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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나의 병영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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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炳斗 서강大 총장
권용철 강북삼성병원 건진팀장
홍수환 前 세계 챔피언
李洛淵 민주당 국회의원
孫鶴圭 前 경기도지사
이용식 코미디언
朴相禹 소설가
이대영 중앙大 문예창작학과 교수
金聖珉 자유북한방송 대표
沈裁赫 인터컨티넨탈호텔 사장
홍진표 자유주의연대 집행위원장

진행·정리 : 李相姬 月刊朝鮮 조사담당 〈gwiwon27@chosun.com〉
  「빈대」·「이」와의 全面戰 (孫炳斗)
  논산 擧風(거풍) (권용철)
  「헝그리 정신」 위에 군인 정신 (홍수환)
  알몸뚱이로 만난 사람들 (李洛淵)
  군대는 겸손을 가르쳐 준 학교 (孫鶴圭)
  김치 저장고 大탈출 작전 (이용식)
  三星 장군에게 따진 육군 병장 (朴相禹)
  말년 병장의 脫營 (이대영)
  사람들을 만나면 이를 꽉 무는 이유 (金聖珉)
  로맨틱했던 전방부대의 크리스마스 (沈裁赫)
  강제징집과「녹화사업」어두운 시절의 기억 (홍진표)
 
 

  「빈대」·「이」와의 全面戰
 
  孫炳斗 서강大 총장
  ROTC 2기. 육군27사단. 소대장 근무(1964. 2~ 1966. 4)
  1941년 경남 진주 출생. 서울大 경제학과·한양大 대학원 경영학과 졸업.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 이사, 한국생산성본부 상무이사, 동서투자자문 대표이사, 한국경제연구원 부원장, 전경련 상근부회장 역임. 現 세계청년봉사단 총재.
 
 
  떼를 지어 달아나는 빨간 빈대들
 
   전방 철책선 부대의 소대장으로 부임하던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트럭 뒷자리에 짐짝처럼 실려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렸다. 얼마를 달렸을까 길가에서 작업하는 우리 부대 사병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은 병사들은 그야말로 거지 행색이었다. 1960년대 초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가 안 되는 가난한 시절이었다.
 
  부임 첫날은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내무반에서 우리 소대원들과 첫 밤을 지내게 되었다. 「아, 이렇게 2년의 소대장 생활이 시작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가벼운 흥분이 밀려왔다. 사병들과 나란히 누워 잠을 청했는데 몸이 가려워 잠을 잘 수 없었다.
 
  일어나서 천장에 매달린 백열등을 켰다. 놀라운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빨간 빈대들이 떼를 지어 도망가느라 정신 없었다. 병사들은 낮 동안의 훈련과 작업으로 고단해서 빈대가 피를 빨아먹는지 모르고 곤하게 자고 있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병사들이 밤에는 빈대한테 시달려야 하는 처지가 딱했다.
 
  그날 밤을 꼬박 세웠다. 나는 「빈대 박멸 작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멀리 떨어진 읍내에 나가서 「파라치온」이라는 농약을 사 왔다. 사병들이 교육 훈련을 받으러 나간 사이에 방독면을 쓰고 내무반에 농약을 뿌린 다음 문을 닫아 두었다. 거짓말 보태지 않고, 빈대의 사체가 수북이 쌓였다. 오후 일과를 끝내고 돌아온 병사들은 막사 안에 죽어 있는 빈대들을 빗자루로 쓸어냈다.
 
  그해 여름엔 비가 유난히 많이 내렸다. 보급로가 유실되어 새벽부터 도로복구 작업을 벌였다. 러닝셔츠와 팬티만 입은 채 병사들과 함께 돌과 흙을 날랐다. 육체노동의 어려움을 절감했다. 막일꾼들이 저녁 목로술집에서 대포를 한잔씩 걸치는 이유를 그때 처음 알았다.
 
  금방 겨울이 닥쳐 왔다. 우리 막사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유리 창문의 틈새로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황소바람」처럼 들어오고, 숭숭 뚫린 침상 마루 틈새로 찬바람이 스며들었다. 이런 추위 속에서 병사들을 재울 수는 없었다.
 
  공병대대에 있는 ROTC 동기에게 부탁해서 시멘트 포대를 얻어 왔다. 창문 틈새는 물론이고 바람이 들어올 만한 구멍은 모두 막았다. 침상에 시멘트 포대를 발라서 장판처럼 깔고 그 위에 콩기름을 먹인 다음 니스를 사다가 칠을 했다. 마룻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사라졌다. 그 결과 실내온도가 20℃ 이상 올라갔다.
 
ROTC 교육을 받던 시절.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필자.
 
  DDT 주머니와 「이 잡기 대회」
 
  겨울철의 더 큰 골칫거리는 「이」였다. 사병들은 DDT를 넣은 주머니를 만들어 사타구니나 겨드랑이에 차고 있었다. 밤이면 빈 페니실린 약병을 나누어 주고 「이 잡기 대회」를 벌였다. 나는 다시 이 박멸 작전에 나섰다.
 
  햇살이 따뜻한 일요일 중대원 전원이 지급받은 옷을 모두 가지고 냇가로 갔다. 물을 받아 놓은 드럼통 속에 옷을 집어넣고 불을 때서 끓는 물에 옷을 삶았다. 두 번에 걸쳐 옷을 삶았더니 부대의 이가 완전 박멸됐다. DDT 주머니와 페니실린 병이 함께 사라졌다. 그해 겨울 우리 중대 병사들은 이의 공격을 받지 않고, 따뜻한 내무반에서 편히 잠을 잘 수 있었다.
 
  겨울철에는 병사 한 명당 양말 두 켤레가 보급됐다. 품질은 형편없었다. 게다가 병사들은 가죽 군화가 아니라, 헝겊으로 된 「통일화」를 신고 있었다. 겨울철 눈 속에서 작업하다 보면 물이 스며들었고, 양말에 금방 구멍이 뚫렸다.
 
  「어떻게 하면 병사들이 양말을 오래 신을 수 있을까」 생각을 했다. 어릴 때 어머니가 바느질할 때 바늘로 촘촘히 뜸을 떠서 단단하게 만드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구멍이 잘 뚫리는 부분에 실로 뜸을 뜨게 했다. 보급부대에서 폐품 처리된 작업복 천을 얻어다가 덧버선을 만들게 했다. 양말 위에 덧버선을 신으니 발이 시리지 않고, 양말을 오래 신을 수 있었다.
 
  봄이 왔지만 전방의 막사 앞 풍경은 황량했다. 당시 병사들은 휴가 갔다 부대에 돌아올 때 소대장에게 선물로 담배를 사오곤 했다. 나는 휴가 가는 병사들에게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니, 대신 꽃씨를 좀 사가지고 오라』고 했다.
 
  마침 우리 소대 하사관이 農高(농고)를 나온 분이었다. 그분과 꽃씨 온실을 만들어 싹을 틔워, 막사 앞에 꽃밭을 만들었다. 산에서 야생 벚꽃나무와 철쭉나무를 캐다 심고, 개울의 돌을 가져와 조경을 했다. 초여름 막사 앞 정원의 꽃들이 한꺼번에 활짝 피니 장관이었다.
 
 
  철책선 부대 소대장의 깨우침
 
   연대장까지 소문을 듣고 우리 꽃밭을 찾았고, 『전 막사 앞에 조경사업을 하라』는 명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여름에 시작한 전방 소대장의 四季(사계)는 그렇게 흘러갔다.
 
  商科(상과)대학을 나온 내 ROTC 2기 동기들은 대부분 非전투병과로 발령을 받았다. 非전투병과로 발령이 나서 후방 부대에 근무하게 된 친구들이 솔직히 부러웠다. 그렇지만 전방 부대 소대장 생활은 내게 참으로 값진 수련의 기회였다. 나는 그곳에서 리더십은 관심과 사랑에서 나온다는 걸 배웠다.
 
  내 앞에 많은 소대장들이 거쳐 갔지만, 그들은 병사들을 빈대와 이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놓아 두었다. 칼바람이 스며드는 내무반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사병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풀며 살겠다」는 내 평생의 결심을, 나는 전방 철책선 부대 소대장 시절에 했다.●
 
 

  논산 擧風(거풍)
 
  권용철 강북삼성병원 건진팀장
  육군 39사단 공병대대. 병장 전역(1978. 7~1980. 9)
  1955년 강릉 출생. 강북삼성병원 기획실장, 인사팀장 역임. 現 강북삼성병원 건진팀장. 저서 「오십헌장」(공저), 「대한민국에서 봉급쟁이로 산다는 것」.
 
 
  빨래 건조대 당번
 
   논산훈련소에 입소한 것은 1978년 7월 땡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이었다. 넓은 대지에 2층짜리 막사가 줄지어 서 있고 막사 사이로 잘 자란 나무들이 울창했다. 연병장은 반듯하게 정리돼 있었고 잔디밭은 가지런했다. 힘 좋고 말 잘 듣는 장정들이 항상 넘치다 보니, 돈 한 푼 안 들이고 작업이 가능했다.
 
  한여름인지라 훈련을 받고 막사로 돌아오면 온몸이 땀 범벅이었고, 매일 빨래를 해야만 했다. 시커멓게 땀에 절은 몰골로 내무반에 들어오면 내무반은 땀내와 쉰내, 고린내가 뒤범벅이 되어 호흡이 곤란할 정도였다.
 
  위생점검이 자주 실시됐고, 거기에 대비해 목욕과 세탁을 자주 해야 했다. 문제는 세탁이었다. 옷을 빨아 말리는 과정에서 분실사고가 빈발했다. 훈련소에서는 러닝셔츠와 팬티를 포함한 모든 물품이 개인별로 일정 수량만 지급된다. 속옷을 하나 잃어버렸다가는 위생점검 때 곤욕을 치러야 한다.
 
  그러다 보니 처음 옷을 잃어버린 사람이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일이 도미노 현상처럼 일어났다. 막사마다 비상이 걸리고, 빨래 건조대의 당번은 두 눈을 부릅뜨고 빨래를 사수해야 했다.
 
  훈련소 시절 빨래 건조대 당번은 인기 있는 보직이었다. 땀 뻘뻘 흘리는 훈련을 면제받고, 건조대 아래서 러닝셔츠 바람으로 신선놀음을 할 수 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정말 팔자가 늘어지는 「꽃보직」이었다. 서로 건조대 당번을 하려고 눈독을 들이고, 순번이 틀렸다 싶으면 난리가 났다.
 
  애타게 기다리던 나의 건조대 당번 날. 아침식사가 달고 맛있었다. 모든 동료들이 더 없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군대 참 좋다」는 생각을 넘어 「인생이 즐겁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훈련 나가려고 서두르는 동료들을 그윽하게 바라보면서 「이제 곧 너희들은 땡볕에서 고생을 좀 하겠구나」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야, 너는 뭔데 웃통 벗고 있어』
 
칼날 같은 군기가 선 병참학교 훈련기간.
  모두들 훈련을 떠나고 나는 연병장 옆에 있는 건조대로 향했다. 그곳에는 대여섯 개 부대의 건조대가 함께 설치돼 있었다. 벌써 다른 부대의 당번들이 와 있었다. 연병장에서는 훈련병들이 「좌향 앞으로 가, 우향 앞으로 가~」 제식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따갑게 내리꽂히는 뙤약볕을 맞으면서….
 
  당번들은 각자 자기 부대 건조대 밑에서 러닝셔츠 바람으로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햇살도 따갑고 기분도 한껏 올라 있어 시원스레 러닝셔츠를 벗고 있었다. 연병장의 구령소리만 요란할 뿐 주위는 한가로웠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이때 소대장 한 명이 건조대 쪽으로 다가왔다.
 
  『야, 너희들은 다 뭐야!』
 
  지금 연병장에선 모두들 고생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뭔데 이렇게 편하게 있느냐는 뜻이었다. 우리 중 한 명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저희들은 건조대 당번입니다. 한 부대에 한 명씩입니다』
 
  소대장은 딱히 야단칠 일도 아니니까 그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나하고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나는 괜히 찔끔했다. 뭔가 불안했다. 소대장은 나의 아래위를 유심히 살피더니 『야, 너는 뭔데 웃통 벗고 있어?』 했다.
 
  갑작스런 말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대답했다.
 
  『너무 더워서 그냥 벗었는데요?』
 
  『뭐야? 다른 사람들은 모두 러닝셔츠를 입고 있는데 너만 덥단 말이야? 너 몸매 그렇게 좋아?』
 
  아니 갑자기 웬 생트집이란 말인가? 누가 몸매 좋아서 벗었나? 더우니까 벗었지!
 
 
  훌륭하지도 못한 「물건」을 밝은 태양 아래 드러내고
 
  소대장은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야~ 너 몸매 좋은 모양인데 그러면 아예 아래도 벗지. 모두들 보게 연병장을 향해서 말이야』
 
  아래도 벗으라니? 지금 수백 명이 제식훈련을 하는데 그 앞에서 개망신을 당하라는 말인가?
 
  나는 순간 사정 半, 저항 半 애원했다.
 
  『저… 소대장님, 사실은 그게 아니고…』
 
  소대장의 명령은 단호했다.
 
  나는 어쩔 수 없었다. 연병장을 향해 차려 자세인 채로 엉거주춤 바지를 벗고 「빤스」(팬티)를 내렸다. 바지와 빤스를 발목에 걸치고 나는 마침내 알몸으로 만인 앞에 섰다. 별로 훌륭하지도 못한 「물건」을 밝은 태양 아래 드러낸 채.
 
  연병장의 훈련병들이 함성을 터뜨리며 낄낄거렸다. 어떤 녀석은 박수까지 치며 난리였다. 때 아닌 수치심에 내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순간 오기가 발동했다. 나는 속으로 뇌까렸다.
 
  「그렇지, 나의 불행은 너희들의 행복이고 나의 쪽팔림은 너희들의 즐거움 아니겠는가? 이 한 몸 바쳐 국토방위에 힘쓰는 그대들만 즐겁다면 기꺼이 이 쪽팔림 감수하리라」
 
  뜨거운 시간이 2~3분 흘렀다.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면역과 내성이 생기기 시작했다. 얼굴이 화끈거리던 수치감도 점점 무뎌졌다.
 
  「그래, 볼 테면 봐라. 옛날 도인들은 햇볕 좋은 날 일부러 꺼내서 말리기도 했다더라」
 
  연병장의 「자슥」들도 나의 당당함에 눌렸는지 이젠 쳐다보지 않았다. 나는 아예 콧노래가 나오기까지 했다. 나의 물건은 오랜만에 눈부신 햇살에 살균소독이 되고 있었다.●
 
 

  「헝그리 정신」 위에 군인 정신
 
  홍수환 前 세계 챔피언
  수도경비사령부 근무. 병장 전역(1973. 2~1975. 12)
  1953년 서울 출생. 중앙高·인천體大 체육학과 졸업. 1972년 OPBF 밴텀급 동양 챔피언, 1974년 WBA 밴텀급 세계 챔피언, 1977년 WBA 주니어 페더급 세계 챔피언. 現 권투해설자.
 
 
  아무도 몰라본 동양 밴텀급 챔피언
 
   1972년 12월, 나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일본의 하라도 선수를 이기고 승리의 기쁨을 안았다. 1970년 일본 원정시합에서 하라도에게 첫 패배한 아픔을 씻어낸 그 날, 군대 소집 영장을 받았다. 프로권투 선수라고 해도 군대는 가야 했다.
 
  계속되는 경기 일정으로 두 번이나 입영을 연기한 상태였다. 그때 나는 권투에 지쳐 있었다. 시합에 승리했지만 「파이트 머니」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군대 갈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제대하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권투는 그만두겠다」고 결심했다.
 
  입대를 조금 앞두고 『시합 일정을 잡았다』는 매니저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군대에 간다. 더 이상 권투를 하지 않겠다』고 사실상의 「은퇴의사」를 밝혔다. 매니저는 『경기만 하면 네 몫이 60만원』이라고 나를 꼬드겼다.
 
  나는 당시 동양 챔피언이었으나 세계 랭킹에 들지 않아, 태국의 수코타이를 이겨야만 밴텀급 세계 챔피언에 도전할 자격을 확보할 수 있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거금」과 「타고난 승부욕」에 이끌려 태국行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태국의 복싱 우상이자 WBA 세계 밴텀급 9위에 랭크돼 있던 「타놈 지트 수코타이」를 상대로 나는 만신창이가 되도록 맞았다. 고전 끝에 8회에 통쾌한 역전 KO승을 거뒀다.
 
  1973년 2월13일 경기도 수색의 승리부대 신병교육대에 입소했다. 당시만 해도 TV가 귀했던 시절이었다. 며칠전 국제경기에서 승리한 권투선수 홍수환을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울긋불긋 퍼런 멍들로 만신창이가 된 내 얼굴을 보고 동네 불량배로 오해하는 눈치였다.
 
  6주간의 엄격한 신병 훈련을 받았다. 동양밴텀급 챔피언 홍수환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군기」가 제대로 바짝 들었다. 「권투를 그만두겠다」는 내 생각은 훈련을 받는 중에 바뀌었다. 「이렇게 힘든 훈련을 버티는데 권투하며 힘들었던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6주 만에 훈련소에서 나온 나는 대전 육군 병참학교에서 8주간의 후반기 교육을 추가로 받았다. 대전역에서 병참학교 정문 앞까지 「원위치」와 「실시」가 반복되는 오리걸음이 계속됐다. 수색 30사단 「눈물고개」보다 더 심한 교육을 받으면서 권투에 대한 나의 열정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14주의 훈련을 마치고 드디어 수도경비사령부 제5헌병대대 본부중대에 배치됐다. 수경사 헌병대대 본부중대에는 나의 라이벌이던 염동균과 고상근·유장호·김영식 등 권투선수들이 모여 있었다. 권투를 계속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마음을 굳게 먹었지만 내 체중이 문제였다. 돌아서면 배고픈 훈련병 시절, 생각 없이 퍼먹은 「짬밥」이 문제였다.
 
청와대에서 육영수 여사를 만나던 날.
 
  선수생활 접어야 할 체중
 
  권투선수는 체중이 생명이다. 6주간의 기본훈련을 마쳤을 때 내 체중은 이미 66kg을 웃돌고 있었다. 밴텀급의 한계체중은 53.5kg이다. 병참학교 8주 후반기 교육을 마치고 수경사에 배치됐을 때 내 체중은 68kg으로 미들급 이상이 돼버렸다. 선수생활을 접어야 할 체중이었다.
 
  14주 동안의 어려웠던 훈련기간을 떠올렸다. 14주라는 시간은 「헝그리 정신」보다 무서운 군인 정신을 내게 심어 주었다. 못 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다. 1974년 7월4일 육군 일등병이던 나는 아널드 테일러를 상대하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南아프리카공화국으로 떠나기 전날 내무반원들과 부대 간부들이 「필승」을 응원해 주었다.
 
  시합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당시에는 비디오테이프도 없어 상대 선수가 어떤 스타일의 복서인지 전혀 몰랐다. 당시 동양 챔피언이었던 나는 12회전까지 뛰었는데, 세계 타이틀 매치에선 15회전을 뛰어야 했다. 스태미나 안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적지에서의 시합이라 판정승을 기대할 수 없었다. 5회전을 뛰고 난 후부터 이미 고비가 찾아왔다. 힘이 점점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건투를 빈다. 필승!』이라는 대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옛! 일병 홍수환.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습니다!』
 
  내무반원들의 정겨운 모습이 떠올랐다. 다시 용기를 얻어 다음 회전을 맞아 싸우고 또 싸웠다.
 
  더 이상 낼 힘도 없이 체력이 소진됐다. 마지막으로 미군부대에서 식당일을 하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이를 악물고 열심히 휘둘렀다. 테일러를 세 번이나 다운시켰다.
 
  그렇지만 12회전 경기와 15회전 경기의 차이는 너무나 컸다. 정말 죽을 것 같았다. 마지막 라운드를 얼마 앞두지 않고 코너로 돌아와 큰 호흡을 했다. 이젠 군대 동기 권투선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균이, 장호 형… 군대 막내였던 내게 꼭 이기고 돌아오라던 함께 고생한 사람들이….
 
 
  육영수 여사, 『손이 이렇게 작았어요?』
 
  또다시 「땡!」 하고 라운드 시작 종이 울렸고, 나는 네 번째 다운을 빼앗았다. 몇 라운드인지 카운트 판을 안 보고 라운드마다 죽도록 주먹만 휘둘러 댔다. 정신이 아득한 가운데 종소리를 듣고 코너로 들어오는데 갑자기 선생님이 뛰어나오며 내가 이겼다고 했다.
 
  「15회 판정승」. 나는 WBA 밴텀급 세계 챔피언이 됐다. 내가 이겼고, 군인 정신의 승리였다. 챔피언 타이틀을 따서 귀국하자 수경사 기동대에서 카퍼레이드를 벌여 주었다.
 
  朴正熙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와의 만남이 이어졌다. 朴正熙 대통령은 세계 타이틀 매치가 있으면 체육관을 찾아 선수를 격려했다. 육영수 여사는 악수를 위해 내민 내 손을 잡으며, 『손이 이렇게 작았어요?』라고 했다.
 
  육여사는 朴正熙 대통령을 바라보며 이렇게 얘기했다.
 
  『여보, 이렇게 자그마한 손으로 세계 챔피언이 되었네요. TV로 봤을 땐 커보였는데요』
 
  이후 높낮이가 심한 인생의 격랑 속에서 「과연 무엇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었나」 생각했다. 수색 30사단의 6주 훈련과 대전 육군 병참학교 8주 훈련이었다. 그리고 따뜻한 동료애였다. 입대를 앞둔 후배들에게 말하고 싶다.
 
  「가라! 사나이답게, 軍은 그대를 진정한 인생 챔피언으로 만들 것이다」●
 
 

  알몸뚱이로 만난 사람들
 
  李洛淵 민주당 국회의원
  용산 美8군 21 수송중대 근무. 병장 전역(1974. 2~ 1976. 9)
  1951년 전남 영광 출생. 광주제일高·서울大 법대 법학과 졸업. 동아일보 정치부 차장·東京특파원·논설위원, 제16代 국회의원(새천년민주당), 국회 통일외교위원회 위원, 민주당 대변인, 민주당 기획조정위원회 위원장, 민주당 대통령선거기획단 부단장, 盧武鉉 당선자 대변인 등 역임.
 
 
  먹으려던 빵을 내게 준 B군
 
   1974년 2월 육군에 입대한 나는 1976년 9월 병장으로 만기 제대했다. 어느 훈련병이나 마찬가지였겠지만, 나 역시 광주 31사단 훈련소에서 엄청나게 배가 고팠다. 휴식시간 PX에 가면 다른 훈련병의 입에 들어가는 빵까지 빼앗아 먹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PX에서 B군을 우연히 만났다. 고등학교·대학교 친구인 B군은 빵을 사들고 나오는 참이었다. B군의 입대는 나보다 2주일이나 빨랐다. 낯설고 고생스러운 훈련소에서 친한 친구를 만나니 반가움에 가슴이 다 떨렸다.
 
  B군은 『너 배고프지?』 하더니 자기가 먹으려고 샀던 빵을 모두 나에게 주고 가버렸다. 힘든 훈련을 나보다 2주일이나 더 받았으니, 배고픔을 따져 보면 B군이 훨씬 더 하고도 남았다. 『괜찮다』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B군은 나에게 빵을 안겨 주고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나와 같은 하숙집에서 지냈던 B군은 대학 1학년 겨울방학 때 어딘가로 사라졌다. 방학이 끝날 무렵 머리를 박박 깎고 승복을 입은 채로 돌아온 그는 스님으로 대학을 마쳤다. 배고픈 훈련병 시절 친구가 전해 준 그날의 따뜻한 우정은 늘 잊혀지지 않는다. 그 빵을 사양하지 못하고 받아 먹었던 미안한 마음과 함께….
 
  나는 훈련을 마치고 평택 카투사 교육대에 배치됐다. 그 교육대 구내식당은 권투선수 홍수환씨의 어머니가 운영하고 있었다. 1974년 7월 홍수환 선수가 아널드 테일러에게 15회 판정승을 거두고 WBA 밴텀급 챔피언이 됐다.
 
  『엄마, 나 챔피온 먹었어』 하던 홍선수의 외침이 유명해진 그 시합이다.
 
  그날 저녁 우리들은 두 번 행복했다. 홍수환 선수가 세계 챔피언이 된 게 기뻤고, 「집합」 걱정 없이 구내식당에서 맥주를 마시며 TV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육을 마친 후 배속된 곳은 용산 美8군 21 수송중대였다. 보직은 행정병 조수였다. 수송중대여서 운전면허를 따야 했다. 면회 온 친구들에게 『나 운전면허 땄다』고 자랑했던 기억이 새롭다.
 
 
  美軍 중대장의 통역과 오락시간 통역
 
부대 앞에서(왼쪽이 필자).
  행정병은 전화를 받는 일도, 문서를 만드는 일도 영어로 해야 했다. 중대원 조회 때 중대장(미군 W대위)의 통역이 내 임무였다. 미군과 함께 하는 오락시간의 통역도 내 몫이었다. 중대장 연설 통역은 그렇다치고, 짧은 영어 실력으로 오락 통역을 어떻게 해냈는지 지금도 신통하다.
 
  1975년 2월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있었다. 유신반대 여론을 누르기 위한 정권의 궁여지책이었다. 부대에서는 부재자 투표가 실시됐다. 『부재자 투표에서는 찬성이 100% 나와야 편하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부재자 투표는 한국군 파견대장이 관리했다. 파견대장 K소령은 평소에 나를 아껴 주었다. 투표소는 파견대장실이었다. 중대원들은 세 명씩 한꺼번에 파견대장실로 들어가 투표했다. 파견대장은 투표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순서에 따라 나를 포함한 세 명이 파견대장실로 들어갔다.
 
  파견대장은 두 명을 내보내고 나만 남겨 놓았다. 파견대장은 나에게 『네 마음대로 투표해라. 그 대신 네 투표용지는 나에게 맡겨라』 했다. 나는 파견대장의 말대로 했다.
 
  그 무렵 美8군 본부에 나의 고등학교 선배 S씨가 근무하고 있었다. 내가 일병이었을 때 그 선배는 이미 병장이었다. 개성이 강했던 S선배는 군대에 와서도 술을 즐겼다. 밤 12시가 가까워지면 나는 S선배의 전화를 받곤 했다.
 
  『여기 마포 굴레방다리 앞인데, 병장 모자 하나 가지고 와라』
 
  술 마시고 귀대하려는데 모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S선배의 엉뚱함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美8군 본부와 우리 부대는 식당을 함께 썼다. 식당에서 S선배와 곧잘 마주쳤다. S선배는 술 마신 다음 날 아침이면 우유를 유난히 많이 마셨다. 우유를 잔뜩 마시고는 화장실에 가서 토했다. 『토할 우유를 왜 마십니까?』 하고 묻자, S선배는 『토해도 뱃속에 남는 게 있다』고 했다.
 
  그렇게 짓궂던 S선배는 대학교수가 됐다.
 
 
  내가 고참들에게 얻어맞은 일들만 기억하는 Y군
 
  어느덧 내가 행정병 사수가 됐다. 나는 신참 대원들의 인사기록을 보고 Y군을 조수로 뽑았다. 대학 재학 중에 입대한 Y군은 용모가 준수하고 행동이 점잖았다.
 
  제대 후 20년 만에 Y군을 다시 만났다. 내가 일하는 신문사로 Y군이 전화를 했다. 우리는 광화문 부근 불고기 집에서 만나 소주를 마셨다. 자연스럽게 군대 시절 얘기가 나왔다. 내가 멋있게 행동했던 일이나, Y군을 도와주었던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런데 Y군이 주로 기억하는 것은 내가 고참들에게 두들겨 맞은 일이었다.
 
  군대생활은 내게 뭘 남겨 주었을까? 고참들에게 매 맞은 아픈 기억뿐일까? 그렇지 않다. 2년 7개월에 걸친 군대생활은 나에게 소중한 경험과 기억, 그리고 알몸뚱이로 함께한 전우들을 남겨 주었다.●
 
 

  군대는 겸손을 가르쳐 준 학교
 
  孫鶴圭 前 경기도지사
  육군군수사 예하 보급부대 근무. 병장 전역(1969. 4~1972. 3)
  1947년 경기도 시흥 출생. 경기高·서울大 정치학과 졸업. 영국 옥스퍼드大 정치학 박사. 한국기독교협의회(KNCC) 인권운동 간사, 인하大·서강大 정치외교학과 교수, 제14·15代 국회의원, 보건복지부 장관 역임. 저서 「손학규와 찍새, 딱새들」.
 
 
  배고픔과 「원산폭격」
 
   내가 군대에 간 것은 거의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었다. 학생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나는 4학년을 마치고도 졸업을 하지 못했다. 남들이 졸업을 해서 「취직을 한다」, 「유학을 간다」 하며 희망에 부풀고 신이 나 있는데, 사병으로 훈련소에 가려고 하니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졸업하고 군대에 가는 친구들은 대부분 장교로 갔고, 나처럼 뒤늦게 사병으로 가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당시 이런저런 구실로 군대를 적당히 기피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나는 운동권 출신이었지만 병역의무는 반드시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969년 4월 30사단 신병훈련소로 입대했다. 나보다 어린 훈련병들이 대부분이었다. 처음 며칠 동안의 훈련병 생활은 유치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고된 훈련생활이 반복되면서 나는 차츰 군대생활에 동화되어 갔다.
 
  듣던 대로 배고픔이 컸다. 식사시간이 시작되면 동료 훈련병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선착순이야말로 노예근성을 키우는 것」이라고 경멸하면서도 당장 내가 뒤처지면 또 한 바퀴를 돌아야 하니 그야말로 악착같이 뛰었다.
 
  군대생활에서 내가 제일 싫어한 것이 「원산폭격」이었다. 「친구 아무개는 유학 가서 박사학위를 딴다」, 「누구는 고시 합격해서 판사 임관을 했다」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나만 낙오하는 게 아닌가 하는 조바심이 났다. 「원산폭격」을 하고 나면 그나마 시원찮은 내 뇌세포가 모두 파괴되는 것 같아 마음이 더 불안해졌다.
 
  신병 훈련을 마치고 101 보충대에서 포천에 있는 병기부대로 배치받았다. 졸병 생활을 포천에서 하고 고참이 되어 안양에 있는 예하부대로 내려갔다. 거기서 몇 달 있지 못하고 다시 전방 파주의 신설부대 창설요원으로 차출되어 죽도록 고생했다. 「편안하게 등 붙이고 쉴 팔자는 아닌가 싶다」고 생각했다.
 
 
  중대장의 권유, 『손병장 말뚝 박지』
 
유일하게 한 장 남은 내 軍시절 사진.
  나는 군대생활을 열심히 했다. 유격훈련을 포함해서 훈련이란 훈련, 교육이란 교육은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사격을 잘해서 부대 대표로 사격대회에 자주 나갔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다. 다들 달갑지 않고 지긋지긋하다는 군대생활을 지겨운 줄 모르고 재미있게 생활했다. 35개월 사병으로 근무하는 동안 특박 한 번 나가지 않았을 만큼 「또박이」였다.
 
  병사들하고 잘 어울렸다. 졸병들은 나를 따랐고, 나도 그들을 좋아했다. 맷집이 좋아서 웬만한 기합에는 꿈쩍 안 했다. 졸병들을 못살게 굴거나 내무반 분위기를 흐리는 사람들에게는 「빳따」도 마다 않고 호된 기합을 주었다. 군대 체질이었던가?
 
  오죽하면 중대장이 나보고 『손병장, 말뚝 박지 않을래?』 했을까?
 
  일복은 많아서 제대하는 날 아침, 당시 「개구리복」이라고 불렀던 제대복 겸 예비군복을 갈아 입고 오전 근무를 다한 뒤 중대장, 선임하사와 같이 점심을 먹고 부대를 떠났다. 더플백 짊어지고 예비사단으로 향할 때, 버스에 올라타자 중대장, 선임하사와 동료 사병들이 손을 흔들어 주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군대생활이 뭐가 그리 좋았다고….
 
  군대생활은 평생을 살아가는 데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군대는 평등한 곳이다. 군복만 입혀 놓으면 잘난 놈도, 못난 놈도 없다. 아무리 학벌이 좋고 잘나가던 사람이라도 이등병은 이등병 노릇밖에 못 하고, 병장은 병장의 몫을 하게 마련이다.
 
  나보다 어린 고참, 나보다 못 배운 상사들이 많았지만 나는 그들의 명령을 잘 따랐다. 그들 중에 내가 마음으로 승복하고 존경할 만한 훌륭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경기중·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를 다니며, 학생운동을 하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했던 내게 군대는 겸손을 가르쳐 준 좋은 학교였다.
 
 
  「民心 대장정」 중에 만난 군대 시절 전우들
 
  지금도 나는 가끔 생각한다. 내가 군대를 안 갔으면, 그것도 「졸병」으로 가지 않았다면 지금의 손학규가 있을까? 군대생활을 통해 나는 오만에 가까운 편견을 깨뜨릴 수 있었고, 이웃과 함께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는 서민적 품성을 기를 수 있었다. 군대생활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힘의 밑바탕이 됐다.
 
  나는 지난 6월30일 경기도지사직에서 퇴임하자마자 100일간의 「民心 대장정」을 시작했다. 우리 국민들이 무엇을 절실히 원하고 필요로 하는지를 온몸으로 알아보기 위한 대장정이었다. 대장정 중에 군대생활을 함께 했던 전우들을 만났다.
 
  지난 8월3일 경북 봉화군 은어축제 현장에서 군대 후임병을 우연히 만났고, 그 다음날 안동에서는 군복무 시절 부대장과 재회했다. 8월18일 경남 남해군에서는 군대 시절 선임병이던 분이 찾아왔다. 35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만난 그들의 얼굴은 무더위 속의 소낙비처럼 반가웠다. 옛 전우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군대생활이 내 인생을 풍요롭게 해준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사무치게 깨달았다.●
 
 

  김치 저장고 大탈출 작전
 
  이용식 코미디언
  육군훈련소 정훈참모부 소속 문화선전대. 병장 전역
  1952년 출생. 1975년 MBC 코미디언 1기 데뷔. MBC 코미디 「일요일 밤의 대행진」, 「소문만복래」, 「웃으면 복이 와요」 등 출연. KBS 「TV 내무반 신고합니다」 MC. 1996년 제3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희극인상 수상.
 
 
  「천만다행」 문선대
 
   1975년 겨울, 나는 충남 논산의 제2훈련소(現 육군훈련소)에 입대했다. 훈련을 마치고 배치된 곳은 훈련소 내 정훈본부 소속 문화선전대였다. 입대 전 MBC 코미디언 1기생으로 코미디 프로그램에 1년 정도 출연한 덕이었다.
 
  훈련소 정훈본부에는 연극인 유인촌씨 외에 지금은 고인이 된 탤런트 김성찬·박병훈, 가수 김민식, 영화배우 겸 감독 진유영씨 등 연예인 출신들이 꽤 많았다. 처음엔 지겹도록 훈련받은 훈련소에 남는 게 죽기보다 싫었지만, 돌이켜 보면 그건 내게 「천만다행」이었다.
 
  문선대에서 근무한 3년의 시간이 자연스럽게 제대 후 연예생활에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내 역할은 공연 MC였다. 문선대 대원은 모두 14명이었다. 저녁 먹은 후 연습을 하다 보면 배가 많이 고팠다. 14명의 급식 담당은 언제나 나였다. 나는 연대의 취사장, 급양대 담당자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 힘썼다. 특히 장교식당 주방에는 몇 배의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다.
 
  다행히 본부중대 주방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이 내 「졸병」들이었다. 고참인 나는 가끔씩 주방에 찾아가 『어, 수고한다. 너희들 오늘 저녁 점호 없다』 이렇게 봐주면 되는 거였다. 그때마다 착실한 졸병들은 음식을 만들 때마다 조금씩 모아 놓은 일용할 양식들을 건넸고, 그날 14명 문선대의 밤참은 화려했다.
 
  나는 간혹 캄캄한 밤에 장교식당 「서리」를 감행했다.
 
  칠흑같이 깜깜한 어느 날 밤, 장교식당으로 침투했다. 달빛조차 필요 없었다. 날마다 장교식당을 들락거리면서 지형지물을 확인해 뒀기 때문이다.
 
  계단 17개를 올라가서 왼쪽으로 돌아섰다. 자물쇠 몇 번을 돌리고 문을 열었다. 왼쪽으로 다섯 발자국을 옮겨 냉면그릇을 확인, 옆에 있는 달걀들을 일단 챙겼다. 그 옆에 놓인 숟가락통을 지나면 바로 옆의 대형 냉장고에는 야채가 들어 있다. 그 옆의 대형 냉장고에는 고기, 맨 밑은 해산물이었다.
 
  「아! 브라보」
 
  나의 완벽한 달걀 서리에 스스로 감격해하며 사무실로 돌아왔다.
 
 
  김치저장고에서 몸이 얼기 시작
 
  우리들의 겨울밤을 위해 선택된 메뉴는 「라면」이었다. 라면을 먹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잘 익은 김치다. 라면용 김치는 장교식당 옆 마당, 깊은 땅속의 김치저장고에서 새근새근 「살아 숨쉬고」 있었다.
 
  김치저장고에 도착한 나는 군복을 입은 채 살짝 엎드렸다. 뚜껑을 열고 라이터를 켰다. 손 대면 톡 하고 잡힐 것 같은 김치들이 차분히 누워 있었다. 손을 뻗어 김치를 꺼내려는 순간 온몸이 앞으로 쏠려 그만 빠져버렸다.
 
  컴컴한 김치저장고 안에서 일어서니 김칫국물이 무릎까지 차올랐다. 살얼음이 깔린 김치저장고 안에서 그때부터 김치와의 사투가 시작됐다. 일단 빠져나가기 위해 입구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아뿔싸! 김치저장고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할 정도로 깊었다.
 
  내 몸무게 때문에 점점 더 김치가 눌리기 시작했다. 점프를 할수록 입구는 점점 더 멀어졌다. 한 시간 반 이상을 김치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무엇보다 김치 냄새가 심해서 죽을 것 같았다. 김치랑 같이 죽은 나를 발견한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어이없어 할까 싶었다.
 
  『사람 살려!』
 
  소리를 질러 보고, 김치를 있는 힘껏 밖으로 내던졌다. 누군가가 지나가다 김치에 맞기를 바랐다. 안을 제발 들여다봐 주기를 바랐다. 라면은 분명 끓고 있을 테고 나는 잠깐 김치를 가지러 온 것인데, 그 누구도 나를 찾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졸병들은 나름대로 나를 찾았다고 한다. 김치저장고 가까이 왔다면 내 목소리를 들었을 테지만, 겁이 난 한 졸병이 멀리서 김치저장고 쪽으로 랜턴 한 번 비추어 본 게 전부였다고 한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졸병은 아무리 찾아도 나는 없는데, 김치 몇 포기가 저장고 밖으로 튀어 나와 있어 더 겁이 나서 숙소로 돌아갔다고 한다.
 
  한 시간 반이 지나자 몸이 얼어 오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 내 머리가 차분하게 「생각」이라는 것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당시엔 내 몸무게가 65kg으로 조금 가벼웠다. 입구에 손 끝만 닿는다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치를 쌓기 시작했다. 가운데로 몰아서 피라미드 형태로 쌓아 올렸다. 하지만 올라서기만 하면 무너져 내렸다. 갑자기 김치가 배추니까 자꾸 미끄러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더듬어 무를 찾았다. 김치 사이에 박아 놓은 무를(축대가 단단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 나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김치를 어느 정도의 너비로 쌓았다. 국물도 정성껏 꼭 짰다. 그 위에 무를 한 바퀴 두르고 국물을 짜낸 김치를 다시 차곡차곡 쌓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그래도 오르다가 다섯 번이나 무너졌다. 마지막으로 도움닫기를 시도했다. 달려가 김치와 무 더미를 밟고 뛰어올라 입구 끝을 탁 잡았다. 발 밑에서 「김치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온 힘을 다해 턱걸이를 시도하며 내밀어 입구에 겨우 턱을 걸었다.
 
  김칫국물로 미끄러운 두 손과 턱 끝에 온 힘을 집중했다. 오른쪽 팔꿈치가 걸렸고, 숨고르기 끝에 왼발이 땅에 올랐다. 아! 탈출 성공이었다.
 
  「김치인간」이 되어 힘없이 사무실 문을 열었다. 라면 국물까지 다 마신 뒤 배부른 행복에 젖어 있던 대원들이 전부 벽 쪽으로 도망갔다. 시뻘건 김칫국물로 범벅이 된 내 군복을 보고서 아연실색했다. 모두들 보일러실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내 안의 김치를 씻어 내기 시작했다. 그때 입은 군복은 한 달 동안 다섯 번이나 빨아 말렸는데 김치 냄새는 여전했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라면 먹을 때 절대로 김치는 먹지 않았다. 맨밥에 국물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三星 장군에게 따진 육군 병장
 
  朴相禹 소설가
  육군사관학교(1982. 4~ 1984. 10)
  1958년 경기 광주 출생. 중앙大 문예창작과 졸업. 강원도 인제 기린中, 태백시 황지中 교사. 198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중편 「스러지지 않는 빛」으로 당선. 소설집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독산동 천사의 詩」,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 「사랑보다 낯선」, 「호텔 캘리포니아」 등. 1999년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이상문학상 수상.
 
 
  對간첩작전 투입
 
   그날 새벽, 우리 중대원들은 새벽 4시에 기상해 對간첩작전에 투입되었다. 투입되기 직전, 전방에서 새로 부임해 온 중대장은 카랑카랑한 어조로 경계근무 철저를 지시했다. 특히 『영내 주요 건물 경계 근무자들은 정해진 참호에서 절대 이탈하지 말라』는 당부를 몇 번 되풀이했다.
 
  군장을 갖추고 밖으로 나서자 사방에 안개가 자욱했다.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농무가 36만 평이나 되는 사관학교를 빈 틈 없이 뒤덮고 있었다. 그것은 경계근무에 대한 불길한 조짐처럼 앞길을 막아 중대원 모두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나는 가장 중요한 본부건물 경계병으로 투입되었다. 나를 포함한 네 명의 인원이 본부건물 뒤편에 있는 두 개의 참호에 배정되었다. 대항군들이 침투해 본부건물에 붉은 폭파 딱지를 붙이고 호각을 불면, 사관학교 전체가 점령군에 넘어간 것으로 간주하여 상황종료이었다.
 
  반면 경계 근무자들이 대항군들을 체포하거나 붉은 물총을 쏴 사살하게 되면 포상휴가가 보장되어 있었다. 그와 같은 훈련은 연례행사로 치러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참호에 함께 있던 일병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 친구를 그대로 둔 채 나는 긴장한 눈빛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오전 7시가 가까워질 무렵, 안개 속에서 오른쪽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나는 졸고 있던 일병의 어깨를 치고 재빨리 참호에서 튀어 나갔다. 하지만 내가 건물 뒤편에서 정면으로 달려 나가기 위해 모퉁이를 돌려는 찰나, 안개 속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선명한 호각소리가 들렸다.
 
  순간, 나는 달리던 동작을 멈추었다. 그 순간 나의 腦裡(뇌리)에서 온갖 생각이 교차되고 있었다. 건물 정면으로 달려 나가 봤자 이미 상황이 종료된 터였다. 건물 입구에서는 6~7명 정도의 대항군들이 본부건물 폭파를 알리기 위해 기를 쓰고 호각을 불어 대고 있었다. 나는 건물 정면으로 나가지 않고 다시 참호로 돌아갔다.
 
 
  육사 교장의 판결, 『모두 영창 보내!』
 
  본부건물 폭파로 對간첩작전은 허망하게 막을 내렸다. 본부건물 경계병이었던 우리 네 명의 사병들은 三星(삼성) 장군인 사관학교 교장을 위시하여 숱한 영관급 참모들이 도열한 본부건물 정면으로 교수형을 기다리는 죄인들처럼 끌려 나갔다.
 
  교장의 논지는 『왜 네 명씩이나 되는 병력이 건물 뒤쪽의 참호에만 처박혀 있었느냐』는 얘기였다.
 
  요컨대 건물을 순찰하며 경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폭파 딱지가 붙었다는 것이다. 일방적인 「論告(논고)」를 마치고 교장은 네 명의 사병에게 짧게 판결을 내렸다.
 
  『모두 영창 보내!』
 
  그 자리에 있던 중대장은 우리를 위해 단 한 마디의 변호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육군 병장이 三星 장군 앞으로 나가서 세 명의 부하를 위해 겁 없는 변호를 시작했다.
 
  『저희는 교육받은 대로 경계근무에 임했습니다. 교육의 내용은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절대 참호를 이탈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보다시피 참호는 건물 뒤쪽에 있기 때문에 건물 전방을 애초부터 커버할 수 없습니다. 건물 정면의 경계를 위해서는 별도 병력을 배치했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三星 장군인 교장은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고, 주변의 참모들까지 웅성거렸다. 교장이 언성을 높이며 내게 물었다.
 
  『누가 참호에서 이탈하지 말라고 했어?』
 
  그때 중대장이 나섰다.
 
  『제가 그렇게 교육했습니다』
 
  상황은 대단히 미묘한 형국으로 돌변했다. 군대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집단인데 직속상관인 중대장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한 군인들을 영창으로 보낸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일병 시절, 유격훈련장에서 동기들과 함께(오른쪽에서 두 번째 안경 낀 병사가 필자).
 
  9일간의 영창 대기
 
  교장은 그 자리에서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등을 돌렸다. 그것으로 상황이 종료된 건 아니었다. 對간첩작전에서 사관학교 본부 건물이 그렇게 허술하게 폭파된다는 것은 어쨌거나 지휘관으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을 터였다.
 
  우리는 영창 대기병이 되었고, 중대장은 징계위원회 회부 대상이 되었다. 무더운 여름날, 우리는 무려 9일 동안이나 영창 대기를 했다. 입창을 위한 신체검사까지 받았으니 풀려 나긴 이미 그른 일이지 싶어 매순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든 문제의 매듭은 결국 중대장이 풀었다.
 
  결자해지의 차원에서 그가 직접 교장을 찾아가 자신의 심정을 밝히고, 『옷을 벗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책임을 내가 질 테니 부하들은 영창 대기에서 해제시켜 달라』고 호소했다.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 우리는 영창 대기에서 해제되고, 중대장은 교장의 선처로 징계를 모면할 수 있었다.
 
  살아오면서 나는 그때의 「결정적 순간」을 종종 생각했다. 다시 그런 순간이 온다면 三星 장군 앞에서 당당히 내 주장을 펼칠 수 있을까? 등골에 땀이 흐르는 순간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아름다운 젊은 날의 추억이다. ●
 
 

  말년 병장의 脫營
 
  이대영 중앙大 문예창작학과 교수
  3835 공병부대 행정병 근무. 병장 전역(1985~1987)
  1961년 서울 출생. 중앙大 문예창작과·同 대학원 연극학과 졸업. 1985년 신춘문예 당선 후, 연출가와 극작가로 활동. 연극 「환생경제」, 「박무근 일가」, 「개코도깨비 마을의 신화」 등과 소설 「리미노이드」 등을 발표. 現 극단 「그리고」 대표, 전국예술대학교수연합 사무국장, 자유주의연대 문화위원장.
 
 
  연애편지 대필로 군대생활 시작
 
   1985년 4월, 대학 졸업 후 곧바로 입대 영장을 받은 나는 논산훈련소에 입교했다. 그렇게 4주 신병 교육을 받은 뒤, 자대 배치를 받았다. 공포의 「야전 공병단」이라는 곳이었다. 동기들과 함께 용산으로 향한 나는 인근에 있는 육군본부나 국방부에 배속될 것으로 예상했다가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공병단 본부에 도착했더니 「빵빵」(소총수) 주특기를 「행정」 주특기로 바꿔 줬다. 내가 문학을 전공했고, 글씨를 잘 쓴다는 이유였다. 어리둥절했다. 아니 내가 전공한 문학이 이렇게 실용적인 학문이었단 말인가?
 
  『야, 신춘문예 당선됐다는 놈이 너냐? 나 연애편지 좀 써 줄래?』
 
  내 이력을 어떻게 알았는지 첫날부터 고참이 그렇게 말한다. 목이 찢어져라 『알겠습니다』 하고 큰 소리로 대답하니 곧바로 불침번이 면제됐다.
 
  자대에 배치되자마자 삽자루 대신 펜을 들고 밤마다 고참들의 편지를 대신 썼다. 편지를 잘 쓰기 위해 고참들에게 애인과의 관계를 속속들이 물었다.
 
  고참들은 신부님에게 고해성사하듯이 자신들의 과거를 고백했다. 그 고백의 깊이만큼 나는 진지하게 볼펜을 굴렸다. 고참들은 침을 꼴깍이며 내 손가락에 자신의 운명을 걸었다. 소문이 나자 총각 장교들과 하사관들까지 연애편지를 써 달라고 계급 순서대로 줄을 섰다.
 
  몇몇 되먹지 못한 고참에게 곡괭이 자루로 많이 얻어터지기도 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공병대인지라 거의 매일같이 시멘트 포대를 나르는 등 「노가다」 일에 동원됐다. 고참이 되니 그 일도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그런 내가 본의 아니게 말년 병장 시절 「탈영병」이 됐다.
 
  어느 날 선임하사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몇 해 전에 암으로 돌아가신 韓중사였다. 그분은 직속 부하인 내게 형님처럼 자상했다.
 
  『너, 약혼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서 외출 준비를 해라.』
 
  『네?』
 
  밤낮 없이 다른 사람의 연애편지를 써 주느라 여자친구에게 소홀히 하다가 홀랑 절교를 선언당한 「홀아비」에게 약혼녀라니, 게다가 약혼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니,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놀란 내 표정을 보더니 韓중사는 이렇게 지시를 했다.
 
  『너 슬프겠지만, 절대로 장례식장에서 巾(건)을 쓰면 안 된다.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으니까 喪章(상장)을 해서도 안 되는 거야. 밖에 나가면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하루 외박이니 내일 낮 12시까지 늦지 않게 돌아와야 한다』
 
  밖에 나와 보니, 연극영화과 동창 녀석들이었다.
 
 
  약혼녀 아버지의 사망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동기생 수경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근데 수경이가 언제부터 내 약혼녀냐?』
 
  동창 녀석들은 『잔말말고 문상이나 같이 가자』며 나를 끌었다. 이 녀석들의 연기에 우리 선임하사가 깜빡 넘어간 것이다.
 
  수경이네 喪家(상가)에 가니 문예창작과·연극영화과·사진과 등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의 말썽꾸러기들은 다 모여 있었다. 슬프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서 부어라 마셔라 그냥 뻗어 버렸다. 이후 친구 녀석들의 유혹에 빠져서 歸隊(귀대)를 잊어버리고 며칠을 「술과 예술」로 지냈다.
 
  겨우 정신을 차려 귀대했지만 위병소에서 즉각 체포당했다. 그날 하루 동안 2년여의 군대생활에서 얻어터진 것보다 더 많이 깨지고 망가졌다. 못난 아들의 탈영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우리 부대로 찾아와 「사태수습」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발악」을 했다.
 
  『병사가 실컷 놀다가 갈 데 없으면 귀대하는 거지, 왜 며칠을 못 참고 그새 부모님께 연락하여 고통을 주는 거냐』
 
  그러다가 또 얻어터졌다. 나를 구해준 것은 형님 같았던 韓중사였다. 그가 행정장교와 부대장을 설득했다. 『이대영이가 없으면 행정업무가 마비된다』고. 아버지와 韓중사의 간청으로 영창을 가까스로 면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나는 군대에서 많은 경험을 했다. 농촌의 모내기와 추수를 돕고 막걸리를 얻어먹었다. 주말마다 영화를 봤다. 종교 생활을 하고, 운전면허를 땄으며, 태권도 유단자가 되었다. 콘센트 창고에 독서대학을 지어 놓고 공부를 했다. 많은 책을 읽고 번역을 했다.
 
혹한기 훈련 중에 동기 김종주, 김동규와 함께(맨 왼쪽이 필자).
 
  나이를 잊는 방법
 
  나는 연극도 했다. 내가 각본을 쓰고 연출을 했는데 안타깝게 공연되지는 못했다. 공연 당일 갑자기 공습경보가 울렸기 때문이다. 연극을 보기 위해 우리 부대로 오시던 「야공단장님」이 허겁지겁 귀대하고, 우리는 일사불란하게 5분 만에 완전무장을 하고 내무반에 대기했다.
 
  「아, 드디어 전쟁터로 가는구나」 정신이 아득했다. 중국 민항기 사건이었다. 연극은 공연되지 못했지만 전쟁이 터지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군대에서 나이 어린 고참에게 두들겨 맞으며 나이를 잊고 사는 방법을 배웠다. 나는 요즈음 제자들과 친구처럼 지낸다. 엄숙한 수업시간에 녀석들이 「교수님, 그거 틀렸어요」 지적하면,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임마 선생님도 틀릴 때가 있지, 네가 좀 가르쳐 줘라」고 여유를 부린다. 이것 역시 군대에서 배운 나이를 잊는 방법 때문이다.
 
  이 세상에 선배와 후배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뭔가 먼저 배우고 깊게 알고 있는 자가 선배다. 나는 군대에 가면 모든 게 끝장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거기서 많은 걸 배웠다.●
 
 

  사람들을 만나면 이를 꽉 무는 이유
 
  金聖珉 자유북한방송 대표
  북한군 243군 복무(1978~1988.8)
  1962년 평양 출생. 평양에서 인민학교·고등중학교 졸업. 1991년 김형직 사범대학 졸업. 1991년 10월부터 1996년 10월까지 북한군 212군부대 예술선전대 작가(대위). 1999년 귀순.
 
 
  해골이 된 내 얼굴에 경악
 
   나는 북한에서 군대생활을 했다. 인민군에 입대한 지 2년이 되던 열아홉 살 때였다. 사병들은 물론, 군관들조차 두려움의 대명사로 알고 있는 「국가판정」 검열의 대상으로 우리 대대가 지명되었다. 중앙당 군사위원회에서 직접 내려와 일과(내무반)생활과 훈련, 정치학습과 병영위생 상태에 이르기까지 기준치를 정하고 합격과 불합격을 가려 내는 일이었다.
 
  일단 판정대상으로 지목되면 「모든 것」이 합격 대상에 들어야 하기 때문에 연대와 사단, 그리고 군단으로부터의 「예비검열」이 꼬리를 물었다. 사격훈련과 20kg의 군장을 갖추고 4km를 달려야 하는 무장 강행군이 하루에 두세 차례 밥 먹듯이 진행됐다.
 
  그러던 어느 날 신입병사였던 나는 고된 훈련을 끝내 이겨 내지 못하고 덜컥 드러누워 버렸다. 고열이 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침실에 누워 있는데, 『꾀병 그만 부리라』는 분대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꾀병이면 얼마나 좋으련만, 이튿날 병원으로 실려 간 나는 영양실조라는 어이없는 진단을 받고 입원해야 했다. 열흘 동안 침대에서 뒹굴다가 이제 막 퇴원하려는 날이었다. 갑자기 입 안이 화끈거리면서 어디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아픔이 몸 전체를 덮어 버렸다.
 
  눈알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고, 머리 끝에서 허리뼈가 끝나는 곳까지 송곳으로 마구 찔러 대는 듯한 아픔이 수시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퇴원 수속까지 밟아 놓은 사람을 돌보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퇴원하게 되니까 엉뚱한 곳이 아프다고 한다』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베갯잇 사이로 흘러들었다. 슬펐다. 입술을 베어 물고 신음 소리를 씹어 삼켰다. 그렇게 온밤을 꼬박 지새웠다. 남들이 보기 전에 병원을 빠져나오려고 서두르다가 칫솔을 들고 세면장의 거울 앞에 선 나는 너무나 볼썽사나워진 나 자신의 모습 앞에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밤 사이 볼이 푹 꺼지고 10리 밖으로 기어 들어간 두 눈 사이에 주먹만 한 코가 덩그렇게 솟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으악!」 소리를 낼 만큼 놀라운 모습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밤새 아팠으니까…」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버릇처럼 칫솔질을 시작하려는데, 아픔과 함께 무엇인가 입 안에서 물컹했다. 침을 뱉어 보았다. 시커멓게 죽은 핏덩어리가 튀어나왔다.
 
  반쯤 깨어진 세면장의 거울 앞에 다가가 입 안을 들여다보았다. 앗, 잇몸이 내려앉은 사이로 이 뿌리 전체가 훌러덩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닌가!
 
  백주에 물에 질퍽하게 젖은 해골을 빤히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기겁을 해서 눈길을 돌렸다가, 설마 그럴까 하는 심정으로 깨진 거울 앞에 다시 서야 했던 그 심정….
 
 
  나의 버릇
 
  얼마 전 이가 불편해 치과에 다녀왔다.
 
  치과의사는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잇몸병은 누구나 생길 수 있는 질환입니다. 본인이 증상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부터, 심한 통증을 느끼는 경우까지 다양한 증상을 가지고 있는 병입니다. 발병 원인은 국소적 원인과 전신적 원인으로 분류되고, 서로 연관이 있습니다. 치아에 달라붙은 세균성 치석이 잇몸병을 일으키는 국소적 요인이고, 단백질과 비타민 등의 영양 결핍은 잇몸병을 일으키는 전신적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말이 어려워서 직설적인 설명을 부탁했다. 그랬더니 그 치과의사는 『양치질을 잘 하지 않아서 생긴 병입니다』 하고 내뱉았다.
 
  양치질을 하지 않아서라….
 
  어려서부터 어머니는 『소금물에라도 양치질은 꼭 해야 한다』며 잠든 나를 흔들어 깨우기가 일쑤였다. 칫솔이라고는 몽당 빗자루처럼 닳아빠졌고 치약을 대신한 것은 왕소금 몇 알이었지만 어린 날부터 칫솔질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덕분에 가지런하고 새하얀 이가 내게는 자랑거리였다.
 
  그 의사에게 영양실조로 잇몸이 무너져 버린 내 부끄러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軍에서 제대한 이후 나는 만나는 사람들의 잇몸을 유심히 살펴보는 특이한 버릇이 생겼다. 그래서 내 앞에서 이를 사리무는 친구들이 자꾸만 늘어났다. 반면 나는 남들 앞에서 잇몸을 보이지 않으려고 필사의 몸부림을 했다.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 사람 같다는 이야기를 듣는 처지지만, 나는 내 과거를 들키기 싫어 아직도 이를 사리문다. ●
 
 

  로맨틱했던 전방부대의 크리스마스
 
  沈裁赫 인터컨티넨탈호텔 사장
  5110부대. 병장 전역(1967. 5~1970. 4)
  1947년 서울 출생. 대광高·연세大 상학과 졸업. 美 컬럼비아大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1972년 GS칼텍스정유 입사. LG회장실 홍보팀 전무. 전경련 경제홍보협의회 대표간사. LG상남 언론재단 감사. LG텔레콤 부사장. 現 한무개발 사장.
 
 
  징집 면제 대상자의 자원 입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연말이 되면 알록달록한 크리스마스 트리의 불빛과 캐럴이 거리를 가득 채운다. 쌀쌀한 날씨로 인해 코트 깃을 여민 사람들의 표정에는 한 해를 마감하는 아쉬움과, 다가올 새해에 대한 기대가 엿보인다. 나는 이맘때면 35년도 더 된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나에게 가장 로맨틱하고 가슴 설렌, 잊을 수 없는 전방부대의 겨울이다.
 
  1967~1970년까지 서부전선 사단사령부의 통신 중대에서 군대생활을 했다. 사실 나는 징집 면제 대상자였다. 만 세 살 때 중이염 수술을 받았다. 당시 발발한 6·25 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란 가면서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만성 중이염이 됐기 때문이다. 왼쪽 귀 뒤에 구멍이 뚫려 있어, 수영은커녕 목욕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병무청에 서류를 제출하면 軍 입대가 면제되는 대상자였지만 「사나이는 군대에 가야 한다」고 굳게 믿던 나는 대학교 3학년 1학기 때 군대에 자원 입대했다. 군대에 입대하던 그해 5월은 유난히 날씨가 화창했다. 그리고 육군 통신학교 교육을 수료한 그해 10월, 나는 보직 「사진병」으로 전방 통신부대에 배속되었다.
 
  나에게 다가올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와 흥분은 이듬해인 1968년 1월에 산산이 부서졌다. 1·21 사태(일명 김신조 사태)로 인해 全 군부대에 비상령이 선포된 것이다. 낮에는 김신조 일당의 수색 및 퇴각로를 차단하기 위한 경계작전, 밤에는 매복작전, 외곽경계 보초를 서야 했다. 내가 복무했던 서부전선의 온도는 평균 영하 18℃, 체감 온도는 영하 30℃를 육박했다.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란 나에게는 견디기 힘든 추위였다. 「아뿔싸, 내가 생각했던 생활과는 180도 다르구나!」
 
  겨울 밤 보초를 서고 있노라면, 이가 마주치도록 시렸다.
 
  보초를 설 때 가장 어려운 시간은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이다. 눈꺼풀을 덮는 졸음도 문제지만, 냉기가 군복을 뚫고 들어와 피부를 벌겋게 만들었다. 보통 계급이 낮은 졸병들이 이 시간에 보초를 선다. 하지만 나는 군대생활 동안 늘 이 시간에 보초를 서야 했다. 계급이 낮을 때는 당연한 의무인 양, 고참이 되어 편해질 만한 때에는 사단장의 명령 때문이었다. 당시 새로 부대에 부임한 사단장은 월남전 참전 후 귀국했는데, 「한밤중 보초는 경험 많은 고참들이 서야 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었다.
 
 
  병영생활 즐기기
 
부대 뒷산 전나무에 장식한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서(맨 왼쪽이 필자).
  추위와 전쟁을 벌이며 보낸 나의 軍생활은 막바지로 달려가고 있었다. 병장 시절, 내 관심은 병영생활 즐기기였다. 나는 평소 노래와 악기에 관심이 많았다. 입대한 후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던 시절, 짬짬이 동료들 앞에서 「물망초」 노래를 불러 박수를 받았다.
 
  내가 하모니카를 불기 시작하면 어느새 내 주위에는 부대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몇 번은 기타 연주로 반주를 맞추었다. 처음에는 한두 명이던 나의 수하생(?)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갔고, 우리 부대에는 하모니카와 기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몇몇은 하모니카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겨울 분위기가 물씬 나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자주 연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준위(상사 위의 직급)가 호출을 했다.
 
  『심병장, 자네 부대 안에 합창단을 모아보면 어떻겠나?』
 
  겨울철, 부대원들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던 그가 말을 툭 내뱉었다. 당시 군대에서 합창단을 만드는 것은 상상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군대에 낭만이 없으란 법이 있나. 나는 부대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합창단원이 한 명씩 늘어날수록, 우리의 하모니카 연주는 일취월장했다. 어지간한 화음은 척척 해낼 정도였으니까.
 
 
  크리스마스 이브에 인근 교회에서 공연
 
  하루는 우리 중대 선임하사의 소개로 의정부의 한 교회에서 연락이 왔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부대 합창단이 공연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부대에서 내준 특송 트럭을 타고 합창단 부대원 20명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의정부 교회로 나갔다. 나는 합창단의 리더이자, 지휘자였다. 덜컹거리는 트럭에 올라타자, 기대 반 우려 반으로 내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교회 예배에 참석한 마을 주민들은 「군인 아저씨」 합창단의 공연에 열렬히 환호했고, 앙코르를 수차례 요청했다. 우리는 굉장히 큰일을 해낸 듯한 뿌듯함을 감출 수 없었다. 험한 군사훈련을 함께 해냈을 때처럼 끈끈한 유대감이 느껴졌다. 합창단을 만들고, 공연까지 무사히 마친 나의 감회는 정말 남달랐다.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부대로 돌아온 부대원들은 뒷산에 있는 전나무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기로 했다. 어설프게 전구를 달고, 어렵사리 구한 은종이로 트리 장식을 했다.
 
  군대의 삭막한 막사와 다르게 부대의 뒷산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사회에서 맞은 그 어떤 크리스마스보다 로맨틱하게 느껴졌다. 부대원들과 트리 밑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전방 부대원으로서의 피로는 하얀 눈 속에 파묻히는 듯했다.
 
  제대한 지 올해로 36년째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거리에 캐럴이 울리면 20代 전방 부대 사병으로 돌아간다. 평생 잊지 못할 내 20代의 한 기억 속으로.●
 
 

  강제징집과「녹화사업」어두운 시절의 기억
 
  홍진표 자유주의연대 집행위원장
  육군5사단 35연대. 병장 전역(1983. 5~1985. 11)
  1963년 光州 출생. 서울大 정치학과 중퇴. 서울大 총학생회 사무국장,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부장, 조국통일범민족연합 간사,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조직국장, 「바른 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정책실장 역임.
 
 
  학내시위 참여했다가 강제징집
 
   1983년 5월 친구들의 걱정 어린 눈길을 뒤로 하고, 나는 의정부의 보충대에 입소했다. 근시가 심해 현역 입대는 상상도 하지 않았던 터라,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1983년 4월 첫 학내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붙잡혀 훈방되었으나, 무기정학이라는 중징계가 떨어졌다. 곧바로 강제휴학(지도휴학) 처분이 내려져 징집영장이 나왔다. 운동권 학생들을 대학에서 쫓아내 군대로 격리시키는 이른바 「강제징집」이었다.
 
  전방 보병부대의 81mm 박격포 중대에 배치되었는데, 대학 출신이 10%가 채 되지 않았다. 문화적 이질감과 「데모하다 끌려왔다」는 敬遠(경원)의 시선이 고통스러웠다. 군대에 와서야 대학생이 「특권집단」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사단의 신병훈련소에서 동기생 두 명이 훈련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내내 우울한 분위기에서 지냈는데,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훈련소의 고참 병장이 따로 은밀하게 찾아와 『사격과 필기 측정에서 웬만큼 하면 훈련병 우수생에게 보내 주는 특별휴가를 주선하겠다』고 위로해 주었다.
 
  「강제징집」당한 내 처지를 걱정해 그런 관심을 베풀어 준 것 같다.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훈련을 끝내고 1주일 휴가를 떠났다. 휴가 나온 나를 본 대학의 운동권 이념서클 친구들은 모두 내가 탈영한 것으로 오해하여 걱정했다. 외출을 끝내고 귀대하는 내 발걸음은 입대할 때보다 더 무거웠다.
 
  신병생활이 몇 개월 지나고 소속 연대가 철책근무로 이동했다. 박격포 부대는 철책 후방의 진지에서 독립생활을 했다. 金日成이 1990년 초 철거하라고 주장해 유명해진 對탱크 공격 저지용 콘크리트 방벽 주변에서 농사짓는 민간인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일이라, 군대말로 「세월 가는」 생활이었다.
 
 
  탈영의 유혹
 
  철책근무를 마치고 나서 상병을 달고 페바(FEBA, 철책후방)로 나오자 큰 걱정거리가 생겼다. 분기에 한 번 정도 하게 되는 100km 행군의 공포에 휩싸인 것이다. 일반 소총수는 약 10kg을 메지만 박격포 중대는 분해한 포와 부수장비 때문에 대략 30kg을 지고 행군하는데, 160cm가 조금 넘는 내 체구로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더구나 하급자들을 독려해야 하는 입장에서 부담이 컸다.
 
  몇 차례 단거리 행군은 그런대로 버텼지만, 1984년 말 100km 행군에서 3분의 2 정도를 걷다가 결국 다리에 쥐가 나면서 무너지고 말았다. 등 뒤에서 따가운 고참들의 시선을 느꼈으나 역부족이었다. 교범에서 배운 대로 대검으로 쥐가 난 다리를 째서 피를 내려고 했다. 이 장면을 목격한 대대장이 행군 후 포상휴가를 주었다.
 
  4박5일의 짧은 휴가라 고향 光州(광주)에는 내려가지 못하고 서울에 머물렀다. 갈등에 빠졌다. 아직 숱하게 남은 행군에서 또 낙오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도저히 부대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귀대하는 날, 대학선배를 만나 탈영 결심을 털어놓고 돈과 도피처를 부탁했다. 하지만 그 선배는 서울에 계시는 백부님 내외와 함께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결국 체념하고 선배와 큰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부대 근처 마을로 들어갔다.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를 갖고 싶어서 모두 안심시켜 돌려보냈다.
 
  귀대시간은 이미 넘겼지만 부대로 돌아가는 대신 근처 여관으로 들어갔다. 뜬눈으로 밤을 밝혔다. 5분 대기조가 출동해 여관 주인에게 『여기 군인이 있느냐』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귀찮았는지 여관 주인은 『없다』면서 그들을 그냥 보냈다. 「결국 이 마을을 빠져나가기 힘들다. 이젠 벼랑 끝이다」 하는 생각에 나는 불현듯 자살을 생각했다.
 
  목을 매려고 이런저런 시도를 하다가 한참 눈물을 쏟아 낸 후 마음을 가라앉히고 귀대를 결심했다. 여관 주인을 불러 부대에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곧바로 중대장 등이 달려왔고 다음날부터 경위조사와 면담이 이어졌다. 결국 대대장의 배려로 군기교육대 일주일 처분으로 수습되었다.
 
 
  나이 들수록 애정으로 돌아보게 되는 군대생활
 
  1984년부터 「녹화사업」(강제징집자들을 학생운동 정보를 빼내오는 프락치로 활용한 보안사의 공작)의 후유증으로 자살과 탈영이 늘어나자, 軍에서는 강제징집자들에 대한 유화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도 중대 행정반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심한 훈련이 면제되는 덕분에 몸은 편했지만 주변의 따가운 눈초리를 의식해야 했다. 항상 긴장을 유지하며 업무에 완벽을 기하려 노력했다. 군대생활에서 강제징집자라는 편견과 주시를 받지 않으려고 누구보다 열심히 군대생활을 했다. 항상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는 습관은 사회생활에까지 이어져 도움을 받고 있다.
 
  1980년대 중·후반 「국군은 美帝(미제)의 傭兵(용병)」이라는 극단의 논리가 나오기 이전에 학생운동권이 軍 입대를 반기지 않은 이유는, 활동의 공백과 변심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전역한 운동권 출신 복학생들이 고시로 돌아서는 모습을 종종 보아 온 나는 꿋꿋하게 버티겠다는 결심을 유지하려고 무던 애를 썼다.
 
  전역이 다가오자 나는 제대 후 같은 처지의 강제징집자들과 보조를 같이 하자는 구상을 했다. 1985년 11월, 나는 만 30개월의 軍 복무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왔다.
 
  1996년, 전역 후 10년이 흐른 뒤 나는 운동권 생활을 정리했다. 갈등에 휩싸였을 때 나는 문득 군대생활을 했던 경기도 연천으로 향했다. 성북역에서 기차를 타고 대마리에 내려 부대 주변을 발 가는 대로 돌아보았다. 한때는 인생의 쓸모없는 공백으로만 덮어 두었던 군대 시절이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시절은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 시기로 애정을 갖게 된다.
 
  어두웠던 시절의 얘기를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나 개인으로서뿐만 아니라, 한국군으로서도 잊고 싶은 얘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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