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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취재] 盧武鉉 사람들의 文化권력 장악하다

『大選이 끝난 뒤 노문모 핵심인사들이 모여 盧武鉉 정부에 누가 참여할 것이냐를 두고 李滄東 감독 집에 모여 의견을 모았습니다. 이 자리에는 鄭智泳·文盛瑾· 明桂南·朴在東씨 등이 참석했어요.』

김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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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모」의 이복형제「노문모」
2002년 12월 민주당의 盧武鉉 대통령 후보가 한 영화시사회에 참석, 문화예술인들로부터 선물받은 기타를 쳐보고 있다.
  「노사모」의 배다른 형제인 「노문모」는 「盧武鉉(노무현)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모임」의 약자다. 지난 大選을 한 해 앞둔 2001년 12월17일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결성했다. 처음에는 100여 명이 참여하더니 몇 달 뒤 5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선거를 즈음해 문화계 주변에 정치바람이 분 일은 있어도 집단적으로 모임을 만들고 특정인의 지지를 밝힌 것은 한국 정치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시 李會昌(이회창) 후보 진영에는 개그맨 심현섭·강성범씨, 가수 설운도·김수희·변진섭·신성우씨, 탤런트 박철·석현·김나운씨 등이 간혹 얼굴을 비췄지만 한나라당 행사에 초청받는 수준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盧武鉉 후보 측은 달랐다. 스크린 쿼터 싸움에 앞장섰던 영화감독 鄭智泳(정지영)·李滄東(이창동)씨, 영화제작자 겸 배우 明桂南(명계남)씨, 영화배우 文盛瑾(문성근)씨, 연극작가 겸 연출자 이상우씨, 시사만평가 朴在東(박재동)씨, 가수 鄭泰春(정태춘)씨, 음악평론가 강헌씨 등이 어울려 발품을 팔아 가며 사람을 불러 모으고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다.
 
  특히 文盛瑾·明桂南씨의 활약은 대단했다. 明씨는 당원이 아니면서도 민주당 국민참여운동본부의 100만 서포터즈 사업단장을 맡아 개미군단의 후원금 모금을 위해 전국을 누볐다. 文씨는 盧후보와 정책연합을 선언한 「개혁국민정당」의 실행위원장을, 大選 이후에는 열린당 국민참여본부 본부장을 맡았다.
 
  다음은 가수 鄭泰春씨가 초안을 작성한 노문모의 1차 선언문 「2001 희망 만들기」의 일부다. 鄭씨는 나중 노문모에서 발을 빼고 민주노동당 진영으로 갔다.
 
  <지난날 우리 사회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문화예술인들은 정파와 집단의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위한 투쟁에 앞장서 왔으며… 역사의 물줄기를 되돌리지 않기 위해, 민주개혁 세력의 힘을 결집할 수 있으며 전국적 통합을 이룰 수 있는 국민통합후보로서 우리는 새천년민주당의 盧武鉉 고문을 지지하고자 한다>
 
 
  당선 가능성 높은 盧武鉉 선택
 
  이들은 2001년 5월20일부터 매달 서울 인사동에 모였다. 鄭智泳·文盛瑾·明桂南·李滄東·朴在東·鄭泰春씨 등 각 장르를 대표하는 인사 10여 명이 머리를 맞대고 향후 大選에서 진보적 문화·예술계 목소리를 대변할 사람을 수소문했다. 동시에 보수에서 진보로의 「문화권력」 이동을 꿈꿨다.
 
  난상토론 끝에 민주당 金槿泰·盧武鉉 상임고문을 저울질하다 盧대통령을 최종 낙점했다.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盧武鉉씨가 대통령이 되리라 생각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文盛瑾씨는 盧고문을 지지하기로 결정하자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했다고 한다. 노문모에 참석했던 관계자의 설명이다.
 
  『文盛瑾씨는 그때만 해도 盧대통령을 알지 못했어요. 「도대체 그가 누구냐」고 반문할 정도였으니까요. 동지적으로 결합한 것은 그 뒤의 일입니다.
 
  2001년 말 서둘러 盧대통령을 택하고 지지모임을 가진 데는 2000년 10·26, 2001년 4·26의 연이은 재·보궐선거 참패와 金大中 대통령의 탈당으로 민주당이 위기에 몰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대한 짧은 시간內에 사람들을 모았어요』
 
  노문모에 관여했던 소설가 鄭道相(정도상)씨의 회고다.
 
  『노문모의 구성원이었습니다. 노문모, 그것 참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원로 詩人은 그 따위 전화나 한다며 핀잔을 하셨고, 어떤 선배 詩人은 참으로 모욕적인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그래도 모욕과 경멸을 견디며 盧武鉉이라는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어야 참된 평화가 온다며 대화했고, 설득했습니다.
 
  그 시절은… 속된 말로 「맨땅에 헤딩」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정말이지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전화해서 작가들을 모았고, 모임에 나갔고, 아무런 사심 없이 지지했고 표를 모았습니다』
 
  盧후보의 지지를 끌어오기 위해 노문모가 어떤 공을 들였는지 알게 하는 대목이다.
 
 
  노문모가 만든 「李滄東 장관」
 
盧武鉉 대통령과 李滄東 문화부 장관. 2003년 3월 문광부 업무보고를 하기 위해 청와대 회의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大選 후 노문모는 문화·예술 정책을 생산, 제안하는 조직으로 발전해 나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먼저 노문모 간사인 김종선씨가 대통령직 인수委 사회·문화·여성분과委 행정관으로 들어갔다. 노문모가 영화감독 李滄東씨를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민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노문모의 핵심멤버인 영화감독 鄭智泳씨가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노문모가 문화부 장관을, 되든 안 되든 최소한 추천할 자격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문모에서 李滄東 감독을 1순위로 뽑았어요. 처음에 고사하는 바람에 애먹었지만…』
 
  노문모 간사인 김종선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大選이 끝난 뒤 노문모 핵심인사들은 盧武鉉 정부에 누가 참여할 것이냐를 두고 李滄東 감독 집에 모여 의견을 모았습니다. 이 자리에는 鄭智泳·文盛瑾·明桂南·朴在東씨 등이 참석했어요. 결론은 「대안이 없으니 니가 나가라」며 李감독을 낙점했습니다. 당시 그는 펄쩍 뛰었어요』
 
  초기 노문모에 관여했던 또다른 관계자의 증언이다.
 
  『노문모는 李滄東·文盛瑾·明桂南이라는 카리스마가 전부였습니다. 明桂南의 기획력과 李滄東의 현장 연출력, 文盛瑾의 연기력이 보태져 大選의 판도를 뒤흔들었어요. 大選 이후 3인방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데 이견은 없었지만 정치판에 뛰어들진 않았어요. 모두 자기 분야에 나름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李감독이 장관이 된 것은 솔직히 억지로 떠맡기다시피 한 겁니다』
 
  李감독은 얼마 뒤 盧武鉉 정부의 초대 문화부 장관에 기용됐다. 김종선씨도 李감독과 함께 문화부에 입성했으며 李장관이 물러난 뒤에는 국무총리실 산하 「광복60년 기념사업추진委」의 기획전문위원을 역임했다.
 
  金씨와 함께 노문모 1차 선언에 참여한 정남준씨 역시 「광복60년 추진委」의 기획전문위원에 적을 두었다가 추진委가 해체된 뒤 문화부 산하 서울예술단의 기획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노문모와 현실정치
 
  17代 총선을 앞두고 노문모 사람들의 움직임은 빨라졌다. 먼저 文盛瑾씨는 2004년 2월23일 열린당에 입당해 「국민참여운동본부장」을 맡았다. 앞서 2003년 11월 明桂南씨는 열린당 e-party 위원회의 산하 기구인 「국민과 함께P」의 중앙단장으로 현실정치에 적을 두었다. 明씨는 이후 「1219 국민참여연대 의장」, 「국민참여연대 공동의장」을 맡았다. 하지만 직업 정치인으로 선거에 출마하지는 않았다.
 
  노문모 간사 김종선씨의 설명이다.
 
  『明桂南씨는 겉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조용한 분입니다. 盧후보 지지연설을 한 뒤 대기실에서 울 정도입니다.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스스로 망가져야만 정치를 못 하게 된다」고 생각했어요. 盧대통령 당선 뒤 영화계로 복귀하려 했지만 인간관계에 묶여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자기가 만든 대통령이 탄핵당하자 안타까운 마음에 나선 겁니다』
 

 
  정치는 직업정치인의 전유물 아니다
 
  노문모에 참여했던 영화감독 呂均東(여균동)씨는 「문화도시 고양을 생각하는 문화예술인 모임」의 대변인 자격으로 2004년 2월 열린당에 입당했다. 하지만 그는 열린당 경기 고양 일산乙 경선에서 金斗官(김두관) 前 행자부 장관의 동생(김두수)에게 패하고 만다. 당시 인터넷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치는 권력과 명예욕을 가진 직업 정치인만이 하는 전유물이 아니며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들이 판치는 정치판을 사람을 위한 곳으로 만들려면 저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국회에 진출해 「사람들이 판을 치는 곳」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呂감독 외에 鄭智泳 감독은 비례대표 선정위원으로, 朴在東 화백은 공직후보자 선정위원으로 열린당의 17代 총선에 관여했으나 직접 현실정치에 뛰어들진 않았다.
 
  노문모는 YTN 문화부장 출신의 盧福美(노복미)씨를 현실 정치에 끌어들였다. 노문모는 그에게 「참여정부에서 제대로 된 문화정책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盧씨는 열린당 비례대표 순위경선에 참여했지만 금배지를 달지는 못했다. 그는 지난해 1월부터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상임이사 겸 지식정보처장을 맡고 있다.
 
  「한국연극협회 이사장」이란 직함 때문에 노문모에 공식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던 연극인 崔鍾元(최종원)씨도 사실상 汎(범)노문모 계열에 속한다. 당시 일부 언론에서는 그를 노문모 혹은 노사모 일원으로 활약했다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崔씨는 2003년 4월부터 문화부 산하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연극분야 이사를 맡았고 열린당 비례대표 경선에 나서기도 했다.
 
  盧福美·崔鍾元씨의 열린당 비례대표 순위는 각각 34번과 35번이다. 현재까지 배지를 단 비례대표 끝 번호는 25번 徐惠錫(서혜석) 의원이다.
 
  노문모에 참여한 인사들 중 盧武鉉 정권 들어 문화계 권력 안으로 입성한 사람이 적지 않다. 李滄東 장관 체제가 출범한 뒤 노문모가 조직적으로 특정인을 밀거나 문화계 인사에 개입했다는 뚜렷한 정황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문화 권력판이 한꺼번에 물갈이 되는 과정에서 노문모 참여 인사들의 발탁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봐야겠다.
 
  2003년 4월 문화부가 민간합동 기구인 「문화행정혁신위원회」를 만들 당시 沈光鉉(심광현) 前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장은 혁신委 외부위원으로 참여했다. 沈 前 원장 역시 노문모에 일찌감치 참여한 이다.
 

 
  문화·예술계 권력
 
  원로 화가인 공주大 미술교육과 金正憲(김정헌) 교수는 1996년부터 민예총 이사 및 지도위원을 맡아 오다 지난해 8월 문화부 산하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後身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金炳翼)의 미술부문 위원 및 시각예술委 상임위원으로 선정됐다. 임기는 2008년 8월까지다.
 
  한국영상자료원 李孝仁(이효인) 前 원장도 노문모 1차 선언에 참여한 인사다. 주로 예술적인 독립단편 영화를 만들어 온 그는 한국독립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지난 8월18일 한나라당 「劉震龍(유진룡) 前 문화부 차관 보복 경질 진상조사단」의 방문을 받은 자리에서 李季振(이계진) 의원이 『李원장 역시 노문모이기 때문에 원장이 된 것 아니냐』고 하자, 그는 『선거 당시에는 지지한다는 뜻으로 회원에 가입했지만, 원장이 되고 나서는 노문모 멤버로서 활동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李 前 원장 후임을 두고 청와대 인사개입 논란이 불거졌던 연기자 L씨도 공교롭게 노문모 출신이었다. 이에 대해 노문모 관계자의 설명이다.
 
  『솔직히 L씨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노문모 출신이라고 이름을 판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어요. 이 이야기를 듣고 文盛瑾씨가 굉장히 화를 냈다고 합니다. 그의 얼굴을 알지도, 듣지도 못했어요』
 
  영화진흥위원회 李鉉升(이현승) 부위원장과 김혜준 사무국장 역시 노문모와 관련이 있다. 李부위원장은 「그대 안의 블루」, 「시월애」 등을 만든 영화감독이자 중앙大 영화학과 교수다. 金국장은 DJ 정부 시절인 1999년부터 영화진흥委의 정책연구실장을 맡아 오다 이번에 사무국장이 됐다. 내부 승진한 경우다.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출신인 金東元(김동원)씨 역시 노문모에 참여했다. 장기수 노인의 북송을 담은 「송환」(2004)을 제작한 그는 현재 영화진흥委 비상근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영화진흥委 元容鎭(원용진) 위원은 노문모와 관련 없지만 盧武鉉 정권 출범 당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문화정책 분야 위원을 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출과 교수인 이상우씨는 극작가라는 명칭으로 노문모에 참여했다. 그는 지난해 11월부터 한국문화예술委 산하 연극委 위원으로 있다.
 

 
  노문모 출범의 원동력,「反조선일보」
 
  노문모 출신 중에는 「反조선일보」를 표방한 인사들이 유독 많이 눈에 띈다. 「反조선일보」 성향이 노문모 출범의 원동력이 됐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2001년 9월12일 서울 남산 감독협회 시사실에서 모여 「조선일보 반대 영화인 선언」을 한 明桂南·권해효·李滄東·鄭智泳·李孝仁·황철민씨 등이 나중 노문모 1차 선언에 참여했다. 세종大 영화과 교수인 黃씨는 이날 자신이 만든 「안티조선」 다큐멘터리를 상영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권력들은 자신들의 탈세에 대한 반성은커녕 왜곡보도를 일삼으며 국민을 우롱하는 행태를 멈추지 않고 있다』며 ▲조선일보 구독거부 운동 전개 ▲조선일보에 대한 기고 및 인터뷰 거부 등을 주장했다.
 
  「조선일보 반대 영화인 선언」 후 며칠 뒤인 9월20일 「조선일보 거부 지식인 명단」이 공개됐다. 明桂南·金東元·鄭智泳·鄭道相·沈光鉉·권해효·김혜준씨를 비롯, 양윤모(영화평론가)·임창재(영화감독·한국독립영화협회 운영위원)·홍성원(스크린쿼터 문화연대 정책실장)·최인기(프로듀서)씨 등이다. 이들 11명 모두 고스란히 노문모에 참여했다.
 
  「조선일보 반대 지식인」들은 「조선일보 반대 시민연대」를 발족시켰으며 明桂南씨는 상임공동대표를 맡았다. 明씨는 과거 月刊朝鮮이 다큐멘터리 극영화 「애기섬」의 이념을 문제삼자 이런 말을 했다.
 
  『月刊朝鮮이 상영도 되지 않은 영화를 사상논쟁의 제물로 삼고 있다. 8·15민족통일대축전 파문을 문제 삼아 통일부 장관을 해임시키는 데 성공한 朝鮮日報가 2탄으로 국방부 장관을 공격하기 위해 「애기섬」을 좌익영화로 몰아가고 있다. 조선일보의 글 기고, 인터뷰 등에 응하지 않고 평생 구독을 거부할 것을 선언한다』
 
  明씨는 2004년 6월11일 민주노동당 당원이기도 한 영화감독이 朝鮮日報와 인터뷰하자, 이를 공개적으로 나무라며 인터넷 매체에 기고문을 보냈다.
 
  『… 나는 보고 싶습니다. 영향력 1등이라고 하더라도, 영화 기사로는 다른 신문이 따라 올 수 없다고 해도, 親日과 親독재와 거짓으로 쌓아온 조선일보의 허명 앞에서 「오만하고 당당하게」 인터뷰를 거부하는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 내 글이 과격하고 편향적이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나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믿습니다. … 조선일보에 허투루 이용당하지 마십시오』
 
 
  『노문모는 참여정부에 관여하지 않았다』
 
盧武鉉 대통령과 明桂南씨. 사진은 2003년 12월19일 대통령 당선 1주년 기념「리멤버 1219」행사.
  盧武鉉 정권 출범 이후 노문모의 역할에 대해 노문모 간사인 김종선씨는 지난 10월11일 기자와 만나 『문화 권력층에 노문모가 대거 참여했다는 것은 억측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단순히 후보를 지지하는 모임이었으며 결사체나 조직이 아니었다』고 했다.
 
  『노문모가 정권참여 인사로 李滄東 장관을 민 것은 사실이지만 조직적인 결의를 하거나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 것은 아닙니다. 단순한 지지선언 모임이니 조직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또 大選 후에는 별도 모임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노문모 출신 인사들 가운데 참여정부 문화권력에 참여한 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대부분 영화·미술계 인사들인데, 문화계 인사 누구에게 물어봐도 「갈 만한 사람이 갔다」고 말할 겁니다. 金正憲·金東元·李孝仁 선생 등은 문화계의 핵심이자 원로로 통하는 분입니다. 이들의 천거 역할을 노문모가 하지 않았어요』
 
  ─노문모는 大選 이후 별도 모임이 없었습니까.
 
  『각 장르를 대표하는 핵심 멤버 몇몇이 大選 직후 모인 적은 있지만 정기모임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단순한 후보 지지모임일 뿐입니다. 文盛瑾·明桂南씨 역시 처음부터 盧대통령과 친분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문화정책을 이끌 적임자가 盧대통령이라고 생각했기에 지지했던 겁니다』
 
  하지만 노문모가 문화·예술계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익명을 요구한 한 중견 배우의 주장이다.
 
  『노문모가 단순한 지지모임이고 大選 후 정치를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문화계에 끼친 악영향을 간과할 수 없어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화인 중에서 文盛瑾·明桂南씨가 언론에 가장 많이 얼굴이 나오게 됐어요. 너무 정치적으로 비춰지니까,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역대 정권에서 이런 일이 있었나요?』
 
  또 다른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노문모가 盧武鉉 정권 들어 워낙 잘나가자 「그때 하자고 할 때 할 걸 그랬다」고 후회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어쨌거나 노문모 사람 중에 워낙 재능 있는 분들이 많다고 봐야겠지요. 하지만 예술인 자체가 조직의 소속감이나 인위적 틀을 거부하니까, 노문모를 이탈하는 사람이 늘고 있어요』
 
 
  盧武鉉에 등돌린 일부 노문모 회원
 
盧武鉉 대통령과 文盛瑾씨. 2002년 3월 민주당 광주경선에서 승리하자 文盛瑾 등 지지자들과 환호하고 있다.
  사실 노문모에 참여했던 이들 중 적지않은 인사가 현재 盧武鉉 정권에 돌아선 상태다. 李滄東 장관이 1년 4개월 만에 물러나고 열린당 鄭東采(정동채) 의원이 문화부 장관이 된 뒤 이같은 현상이 두드러졌다는 게 문화계 주변의 평가다.
 
  게다가 일부 노문모 참여 인사들은 이라크 파병과 韓美FTA 협정, 스크린 쿼터 문제를 두고 공개적으로 「참여정부 지지를 철회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심지어 「盧武鉉 정권의 문화정책은 실패했다」고 주장하며 민주노동당 지지를 밝히기도 했다.
 
  소설가 鄭道相씨는 『盧대통령이 非정규군을 이라크에 파견한다면 작가의 양심을 걸고 盧대통령과 싸울 작정이다. 다시 수화기를 들고 노문모의 문화·예술인들에게 盧대통령과 싸워야 한다고 호소하겠다』고 했다.
 
  노문모 일을 거들던 영화감독 이민용씨 역시 지난 4월 「스크린 쿼터 축소 철회」를 요구하는 국토종단을 마친 뒤 이런 말을 했다.
 
  『2001년 가을 노문모 초창기 준비위원 중 한 명이었던 저는 500명 문화예술인들을 결성하여 인사동 느티나무 카페에서 노문모 발기대회를 가졌습니다. 당시 민주당 후보 경선 중이었던 盧후보도 그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저는 盧후보에게 「모든 것이 다 훌륭하신데 문화·예술 방면에는 관심과 애정이 좀 부족한 것 같아 보인다. 그 부분에 많은 노력을 해주셨으면 좋겠고, 대통령이 되시면 스크린 쿼터는 안심해도 되겠지요?」 했고… 대통령께서는 「반드시 그러마」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에 와서는 대통령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계십니다』
 
  盧武鉉 정권 출범 이후 문화권력의 이동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자연스러운 현상이 됐다. 과거 정권에서 문화계 내부의 「대항세력」이 現 정권에서는 가장 영향력 있는 「대안세력」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과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이하 문화연대), 「민족문학작가회의」(이하 작가회의)는 현재 누가 뭐래도 문화권력의 전면에 서서 인재풀 역할을 하고 있다.
 
  玄基榮(현기영) 前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과 姜亨喆(강형철) 前 사무총장은 작가회의 출신이다. 玄 前 원장이 작가회의 이사장, 姜 前 총장이 상임이사를 역임했다.
 
 
  문예총 출신들의 약진
 
  문예진흥원 前 이사인 朴仁培(박인배)·임정희씨는 각각 민예총 사무차장과 문화연대 시민자치문화센터 소장을 거쳤다. 朴씨는 현재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 비상임 이사를 맡고 있다.
 
  문예진흥원의 後身인 한국문화예술委의 金正憲 위원과 전효관 위원은 문화연대 출신이고, 박종관 위원은 충북민예총 부지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金潤洙(김윤수) 관장은 민예총 이사장 출신이다.
 
  대통령 소속 자문기구인 「아시아 문화중심도시조성 위원회」 위원장인 宋基淑(송기숙)씨는 작가회의 출신이고, 추진위원인 姜蓮均(강연균)씨는 민예총 공동의장을 역임했다.
 
  문화부 산하 「문화중심도시조성 추진기획단」 단장인 李榮鎭(이영진)씨 역시 작가회의 문화정책위원장, 문화부 장관 정책보좌관을 맡은 이력이 있다. 노문모에 참여했던 沈光鉉 前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장은 문화연대 문화개혁감시센터 소장을 맡았다. 李英旭 前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장도 문화연대 정책위원회 副위원장을 역임한 바 있다.
 
  체육계의 親與(친여) 인사 독식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체육계 조직은 전국 市·道 조직망과 막강한 인력 동원력을 갖춘 만큼 선거에서 유리하게 활용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盧武鉉 정권 들어서만, 親與 인사의 체육계 독식현상이 두드러졌다고 단정하긴 어렵지만 어느 분야보다 정치권의 코드·낙하산 인사가 횡행하고 있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체육계에서는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는 자조 섞인 푸념과 탄식이 곳곳에서 흘러 나온다
 
  지난 6월 국민생활체육협의회(이하 생체협) 회장 선거에 한나라당 李康斗(이강두) 의원이 선출되자 상위 기관인 문화부가 회장 승인을 거부하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만하다.
 
  문화부는 『「정치적 중립」이라는 내규에 어긋난다』며 李의원의 취임을 불허하고 생체협에 대한 예산배정조차 거부할 태세다.
 
 
  열린당이 장악한 체육계
 
대한체육회 金正吉 회장
  한나라당 金炯旿(김형오) 원내대표는 『열린당 의원 상당수가 체육관련 단체 회장을 맡고 있는 데 대해선 말 한마디 못 하다가 야당 의원이 회장이 되었다고 해서 문제삼고 있다』며 『대의원들의 압도적인 투표로 당선, 선출된 생체협에 대해서만 야당 출신이라고 집중적으로 괴롭히는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정치적 중립성」을 의심하게 하는 체육단체 기관장 중 열린당 출신 인사가 많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문화부의 주장이 설득력이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한체육회 金正吉(김정길) 회장은 열린당 상임고문을 거친 인사다. 지난해 2월부터 회장을 맡아 왔고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직을 겸직하고 있다.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 朴在昊
  국민체육진흥공단 朴在昊(박재호) 이사장 역시 열린당 출신으로 지난 총선에서 부산 남구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공단 상임감사인 金永得(김영득)씨 역시 열린당 국민생활체육특별위원장을 역임했다. 지난 1월 취임한 한국야구위원회 辛相佑(신상우) 총재 역시 盧후보 부산지역 후원회장을 맡은 일이 있다. 辛총재는 盧대통령의 부산商高 10년 선배이기도 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열린당 李鍾杰(이종걸) 의원은 2004년 4월부터 대한농구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같은 당 金爀珪(김혁규) 의원은 2004년 9월 한국배구연맹 회장, 김한길 의원은 지난해 2월 대한핸드볼협회 회장, 張永達(장영달) 의원은 지난해 8월 대한배구협회 회장에 취임했다.
 
  張香淑(장향숙) 의원은 대한장애인체육회 회장, 梁承晁(양승조) 의원은 전국궁도연합회 회장, 文學振(문학진) 의원은 전국택견인연합회 회장이고 지난 8월부터 (사)남북체육교류협회 초대 회장을 맡았다. 「정치적 중립성」만을 따진다면 모두 낙제점수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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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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