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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휘날리며」를 보고 난 후, 벌어진 3父子의 격론

『대한민국과 국군에 대한 애정이 아쉬웠다』

정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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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휘날리며」란 제목을 보고 애국적인 내용이라 생각했는데…
● 국군을 고발한 것 같기도 하고…
● 영화에 너무 큰 것을 기대해선 안 된다?
● 그렇다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뭔가?
졸병 출신 세 父子의 회동
  지난 2월10일 오후 8시쯤 우리 父子 셋은 서울 중구 초동 「명보극장」 옆쪽에 붙은 커피숍에서 만났다. 오후 8시50분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함께 보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명보극장이라면 바로 「救國의 영웅」 李舜臣 장군의 生家 터가 아닌가. 우연한 일이지만, 극장은 잘 고른 것 같았다. 당초엔 간단한 식사라도 함께 한 다음에 영화를 볼 요량이었지만, 저마다 무슨 무슨 약속이 따로 있는 터여서 커피 한 잔씩 만 나누고 극장에 입장하기로 했던 것이다.
 
  아비인 내가 먼저 도착했다. 둘째, 첫째 아들 순으로 잇달아 커피점에 닿았다. 서른 살 먹은 우리집 첫째는 육군 병장 출신으로서 현재 국문학과의 「고달픈 助敎」로 재직하고 있다. 스물일곱 살짜리 둘째는 전투경찰 수경 출신인데, 지금 대학 학부 과정을 한 학기만 남겨 놓고 있다. 요즘, 장남은 「학교의 세미나 준비」로, 차남은 학교 도서관에 다닌다고 바쁘다.
 
  우리 父子 셋만 함께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좀 오래된 얘기지만, 父子 셋에다 집사람을 더하여 넷이서 함께 극장에 간 적은 몇 번 있었다.
 
  요즘은 「한 지붕 아래」 살지만, 서로 얼굴 보기도 만만찮다. 아무튼 『아버지가 군대 갔다 온 아들 둘과 함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고 난 뒤에 영화에 대해 토론을 한번 해보면 어떨까』라는 편집방침 덕분에 실로 오랜만에 모처럼 「세 父子의 회동」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아들 둘에게 「부담」을 지우지는 않기로 했다. 『나중에 「태극기~」에 대해 토론을 하자』고 미리 귀띔해 놓으면 어떤 의무감이나 선입감을 안길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도 둘은 뜬금없이 「태극기~」를 함께 보러 가자고 한 記者 아비의 속셈 정도는 대충 알아차렸을 터이다.
 
  극장 안을 둘러보니 역시 「2030」 관객들이 主流였지만, 50代·60代 관객들도 적지 않았다. 그렇다면 흥행 성공을 예고하는 조짐이 아닌 것인가. 두 아들을 사이에 두면서 착석하자마자 영화가 시작되었다.
 
 
 
 『관객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든 秀作』
 
   2시간20분쯤 걸린 제법 긴 영화였다. 영화가 끝난 후, 지하 4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 출구로 올라오면서 승객 10여 명의 얼굴들을 슬그머니 살펴보았다. 늙으나 젊으나 모두 엄숙했다. 뭔가 저마다 어떤 감동을 먹은 것 같았다. 영화를 보면서 흘린 눈물의 흔적―모두들 그것이 무안해 애써 감추려는 표정들이었다. 사실은 필자도 영화에 대해서는 마뜩찮아했지만, 대목대목에서 자꾸 눈물샘을 자극하는 바람에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택시를 잡아 타고 우리 동네까지는 돌아왔지만, 그냥 집에 들어가기에는 뭔가 미진했다. 동네 맥주집에 들러 약간의 「뒤풀이」를 했다. 그러니까 우리 세 父子는 「태극기~」에 관해 택시 안에서 40분, 맥주집에서 1시간20분 남짓, 합쳐서 두 시간쯤 토론을 했던 셈이다. 父子간의 토론이라 목소리는 낮았지만, 자기 논리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던 격론이었다.
 
  차남의 소감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제 눈가에는 정확히 세 번의 눈물이 고였어요. 남자는 일생에 세 번 운다지만, 영화가 끝나자, 전 이미 남자답지 못한 「울보」가 되어 있었죠. 한마디로 상당히 재미있는 영화였고, 볼거리와 감동이 적절히 배합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흥행작으론 성공한 셈이구먼.
 
  『전쟁 비극 속의 「형제애」라는 소재에 따라 영화는 끝으로 다가갈수록 눈물샘을 자극하데요. 보는 사람의 理性을 끊임없이 괴롭혀 感性 쪽으로 돌렸어요.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가던 형제가 갑작스러운 전쟁을 통하여 비극을 향하여 치닫는다는 영화의 기본 골격은 막대한 제작비를 들인 사실주의적 전쟁 묘사와 어우러졌더군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성공을 예감케 하는 겁니다. 영화관을 나서자 등에 젖었던 땀이 겨울밤의 차가움에 식어 등골이 오싹했지만, 입장료가 아깝지 않은 영화 한 편을 봤다는 기분에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나는 확실히 형제애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었고, 전쟁의 잔혹함과 처절함에 몸서리치고 있었습니다』
 
  ―영화가 6·25 전쟁을 너무 상업적이고 피상적으로 다룬 것 같지 않어?
 
  『그렇긴 해요. 잠시 뒤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고, 문득 한 가지 의문스러운 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왜 하필 이 영화의 제목은 「태극기 휘날리며」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바로 그것이었요. 語感上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는 애국적인 느낌이 물씬 느껴지지만, 사실 영화는 「형제의 운명」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좀 고발하는 데 그 초점을 맞추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것도 좀 편파적으로….
 
  국가의 존망과 이데올로기를 걸고 싸우는 戰場인데, 영화에서 등장하는 개개인은 국가 생존이라는 절박한 의식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더군요. 다시 말해 영화의 제목과 달리 애국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애국적 발상에 치우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영화는 대중, 특히 젊은 층에서 식상해 하지 않는 매력을 풍기고 있는 것 같아요. 요즘 아이들은 교과서적인 것을 싫어하잖아요』
 
 
 
 국군을 고발하는 것처럼 비쳐질 가능성도
 
  ―그건 광복 이후 우리 사회의 이념교육이 실패했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지 않느냐.
 
  『영화에서는 인민군 포로를 처형하고 인민군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양민들을 적절한 법적 심판 없이 처형하는 남쪽의 모습을 중점으로, 그리고 리얼하게 보여 주고 있죠. 국군의 한 소대에서 함께 복무하는 두 형제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의 골격 탓이겠지만, 인민군의 만행보다는 국군의 보복행동에 더 초점을 맞추어 그려져 있다는 점에서 「전쟁 고발적」이 아니라 「국군 고발적」으로 비쳐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영화 카메라는 주인공을 따라가게 마련이니까 인민군의 모습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거의 생략해 버렸다는 말이구나.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진태가 동생의 죽음(나중에 오해였음이 밝혀짐)에 배신감을 느끼고 자기 대대장을 돌로 때려 죽였잖아요. 복수심에 불탄 그는 인민군에 투항하여 소좌(소령) 계급을 받고 敵의 정예 「깃발부대」 지휘관이 되었다는 것은 「태극기~」에 기대했던 뭉클한 휴머니즘과는 인연이 먼 것이었습니다. 물론, 형제애를 중심으로 한 영화라는 점에 있어 이러한 비약적 극 전개는 극 자체의 감동에 의해 어느 정도 희석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요』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진태가 동생 진석을 죽게 했다고 자기 대대장을 돌로 쳐죽이는 대목은 어떻게 생각하니.
 
  『영화는 절대적인 영웅의 활약을 그리지도 않았고, 실제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누구의 승리와 패배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민족 모두의 패배일지언정 그 누구의 승리도 없었다는 거죠. 태극기는 승리를 위해 펄럭이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각도로 봤을 때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제목은 다분히 역설적이고 냉소적인 의미를 지닌 命名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 냉소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그것은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의 경험으로 우리에게는 더욱 쓰라리게 느껴지는 전쟁 자체에 대한 회의일지 모르죠. 하지만 인류가 과연 전쟁 없이 살 수 있을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주먹을 쥘 줄 아는 존재인데, 전쟁 없는 인류 역사는 가당치도 않는 이상론이겠죠. 더욱이 우리의 현실은 아직 분단 국가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에 대한 냉소를 성급히 뱉어낸다면 급기야 또 한 번의 남침이 있을 경우, 우리가 과연 견디어 낼 수 있을까요? 그런데도 과연 우리가 지금 전쟁에 대한 섣부른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들더군요』
 
 
 
 이념에 희생된 민중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 看過
 
  ―그러면 「태극기 휘날리며」의 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태극기~」가 노골적인 反戰영화는 아니죠. 6·25를 배경으로 하고 그 참혹함도 보여 주지만, 사실적인 역사를 이야기를 하고자 하기보다는 그 역사 속에 혹 있었을지도 모르는, 아니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인 누군가의 비극을 그리며 그것을 통해 6·25를 투영하고 있을 뿐입니다. 바로 6·25 그 자체를 조명한 영화는 아니고 형제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영화에 대해 그 논란의 여지가 있는 장면들은 살며시 감추어지는 것입니다.
 
  동생을 구하기 위해서 전쟁광이 되어 가는 형의 모습…. 그가 인민군을 모질게 죽이다 다시 인민군 「깃발부대장」이 되고 종국에는 인민군에게 다시 총구를 돌리며 장렬히 전사하게 되는 애매한 설정 속에서도 우리가 당혹감보다는 눈물을 흘리며 감동받게 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 같아요』
 
  ―결국 「태극기 휘날리며」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통한 전쟁의 잔혹성에 대한 고발을 형제애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로 알맞게 버무린 영화이라는 말이냐.
 
  『이 영화는 상업영화라는 점에서 볼 때 전쟁 혹은 역사에 대한 의식이니 하는 무거움보다는 다소 비약적일지라도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 형제 이야기에 중심을 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점이 흥행작으로 충분히 성공할 가능성을 보여 주는 비결인 것 같기도 하고요. 현재 이야기-과거 이야기-현재 이야기로 이어지는 구도는 다소 틀에 박힌 듯했지만, 한 편의 드라마로 보아서 여러 모로 손색없는 秀作이었고, 특히 그 사실주의적인 영상은 충격적이고도 놀라웠습니다』
 
  ―영화에서 아쉬운 건 없었니.
 
  『영화는 그 저변에 나름대로 감독의 의식이 깔려 있게 마련인데, 이 영화엔 전쟁의 참상에 대한 고발과 회의적 시각이 바로 그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민족사의 커다란 오점이었던 6·25를 소재로 한 만큼 역사적 사실에 있어서만은 분단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대중 앞에 균형감 있게 그려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으로 민중을 그리는 것도 좋지만, 그러한 민중의 희생을 통해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 또한 간과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태극기는 휘날릴 것입니다』
 
 
 
 「태극기 휘날리며」에 대한 변명
 
   다음은 장남과의 문답.
 
  ―영화 「태극기~」는 『전쟁조차 삼킬 수 없는 두 형제 이야기…』라고 하던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전쟁」도, 「형제애」의 형상화에도 실패하고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데만 성공했다는 느낌이 들더구나.
 
  『우리는 소설이나 영화를 접할 때면 작품의 주제가 무엇인지부터 찾는 버릇이 있습니다. 敍事物(서사물)에서 작가 혹은 감독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이냐에 대해 지나치게 촉각을 곤두세우는 겁니다. 예술작품, 혹은 영화에 대한 우리의 반응 속엔 어쩌면 테마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면 너의 말은 「주제의 선명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냐?
 
  『그렇다고 예술작품에서 주제가 간과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주제 또한 소설이나 영화의 한 요소임이 분명하죠. 문제는 주제를 아는 것이 예술작품 감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주제 파악은 작품 감상의 시작에 불과한 거죠. 우리가 예술작품에서 좀더 음미해 보아야 할 부분은 작품 속에 내재된 메시지를 형상화하는 「예술적 기법」에 있습니다. 어차피 예술작품, 그것이 대중영화라 할지라도 거기에 담긴 메시지는 다르게 마련이죠.
 
  그렇다고 예술가 개개인의 이데올로기적 경향에 대해 일일이 시비를 가린다는 것은 적어도 예술작품을 두고 볼 때는 무용한 일입니다. 우리가 예술작품을 즐기는 것은 그것이 우리를 즐겁게 하고 마음을 감화시키기 때문이지 윤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바람직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가령 음악감상의 예를 들어 봅시다. 우리가 음악을 듣는 이유는 그냥 그것이 좋기 때문 아닙니까? 그 음악을 윤리나 도덕의 잣대로 평가할 때 그것은 얼마나 단순하고 편협한 논리로 흐르겠습니까. 예술작품의 진정한 마력은 윤리적 선악을 넘어서 감상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화력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좀더 감상의 초점을 두고 보아야 할 부분은 감상자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 요인인 예술적 기법에 있는 겁니다』
 
  ―너의 견해는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6·25 전쟁에 관해서는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느냐, 누가 전쟁을 일으켰느냐에만 시선을 두었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나.
 
  『제가 처음부터 그런 말을 중언부언하는 이유는 최근에 한국의 사회현실과 역사적 과거와 관련된 영화들이 이데올로기적 잣대에 의해 재단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쉬리」, 「공동경비구역JSA」,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가 그러한 경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JSA」와 「실미도」의 경우 그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논란에 올랐지 않습니까. 그것에 찬사를 보내는 쪽이든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는 쪽이든 그 찬반의 초점은 작품성보다 그 이념성에 맞춰져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쪼개서 입장료를 내면서까지 그러한 영화를 보는지, 그 예술적 감응력 자체에 대해서는 정작 언급되지 않는 겁니다』
 
 
 
 『영화는 영화, 역사는 역사』
 
  ―「실미도」가 사실의 왜곡에 의해 우리나라의 정보기관을 마치 마피아 조직인 것처럼 왜곡했다면, 「태극기 휘날리며」는 그 편파성에 의해 『인민군은 별로 나쁘지 않은데 국군은 아주 나쁘다』라는 비뚤어진 의식을 번지게 할 우려가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더냐.
 
  『「태극기~」가 6·25 전쟁이라는 우리의 아픈 과거를 소재로 다루었기에 작품에 담긴 주제 내지 이데올로기가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려질 여지는 있습니다. 혹자는 「태극기~」에 담긴 주제가 소박한 휴머니즘이 아니겠느냐 하지만, 그 휴머니즘이 나라에 대한 애국심을 은근히 퇴색시키지는 않겠느냐고 주장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일면 작품의 메시지에 대한 지나친 확대 해석이 아닌가 싶습니다. 영화에서 나타내고 싶었던 메시지는 행복했던 삶과 인간의 건전한 정신마저도 파괴시키는 전쟁의 잔혹성에 대한 비판입니다. 역사는 역사, 영화는 영화입니다. 역사의 진실을 알려면 무엇 때문에 영화관에 가겠습니까, 책을 봐야죠』
 
 
 
 감독은 『전쟁 중 일어났던 개인의 비극을 정리한다』고 했지만…
 
  「태극기~」의 감독은 『이것은 「전쟁」이나 「이념」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고 어물쩡 피해 가면서 하고 싶은 말을 어물쩡 던진다. 「태극기~」와 관련, 이념논쟁이 불붙기만 하면 흥행에 유리하다는 타산인지도 모른다. 그의 부연설명은 이렇다.
 
  <외부적인 이데올로기나 한국전쟁이 남긴 외형적인 피해처럼 반쪽 면만이 우리의 의식 속에 살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 특히 전쟁의 중심에서 그 거대하고 거친 상황과 싸워야 했던 한 개인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왜 개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누군가는 그것을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감독이 말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수많은 일」은 무엇이며, 그는 그것을 어떤 시각으로 「정리」했는지 그의 작품을 통해 검증해 볼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먼저 비친 영화 타이틀 「태극기 휘날리며」가 눈길을 끌었다. 字體의 끝이 날카롭고 힘찬 글꼴이다. 언젠가 TV 화면에서 본 「평양공항」의 글꼴과 닮은 書體다. 우리 사회에선 대체로 운동권에서 선호하는 글꼴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칠순에 가까운 노인의 회상으로부터 전개된다는 점에서 그 골격은 최근의 할리우드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1960년대에 국내에 개봉된 명화 「리버티 바란스를 쏜 사나이」와 비슷한 구조였다. 극중의 그는 손녀가 모는 승용차를 타고 6·25 전쟁 때 실종된 형의 유골이 발견된 옛 전쟁터로 찾아간다. 「유해발굴사업단」으로부터 유해 곁에 「이진석」이란 이름이 새겨진 「만년필」이 발견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던 것이다.
 
  영화의 장면은 빠르게 「半세기 전 그때」로 돌아간다. 1950년의 서울 종로거리는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때도 차도·인도의 구분이야 있었겠지만, 행인의 형편 따라 이쪽 저쪽, 양쪽을 그냥 건너 다닐 수 있었으니 요즘처럼 「무단횡단」 같은 개념은 애당초 없었을 터이다. 맞다, 맞아! 그래. 1960년대 초반만 해도 종로거리엔 자동차도 몇 대 없고 길 한복판으로 장난감 같은 전차나 띄엄띄엄 다니던 「牧歌的(목가적) 서울」 아니었던가.
 
  영화에서 형 진태는 헌 구두 수선도 겸하는 「구두닦이」다. 그의 장래 희망은 구두가게를 차리는 것이다. 동생 진석은 구제중학교 5년, 지금 같으면 高2년짜리다. 진태는 동생에게 만년필을 선물한다. 양화점 쇼윈도 앞에서 「진태의 맹세」를 한다. 동생은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장남인 자기는 구두가게 주인이 되어 홀어머니를 모시고 오순도순 살겠다는 맹세다.
 
  그날은 부친의 忌日(기일)이었다. 어머니와 형제, 그리고 진태의 정혼자인 영신도 시어머니가 될 진태 어머니의 권유로 제사상 앞에서 큰절을 올렸다.
 
  진태는 아버지 영전에 『진석이가 서울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게 해줍시오』라고 발원했다. 아마도, 聰氣(총기)가 있는 진석이가 법과대학 같은 데 척 들어가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집안을 일으켜 주었으면 좋겠다는 소원 아니겠는가. 그 시절엔 그랬다. 가난한 집안에서는 여러 형제들 중 공부 잘하는 한 명만 고등교육을 시키는 「올인 베팅」을 했다.
 
  영신은 만리동 장터 假건물에서 국수장사를 하는 진태·진석 형제 어머니의 가게에서 함께 일하는 당찬 생활인이다. 좌익단체인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배급을 준다는 소문을 듣고 가서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보리쌀 두 되를 「공짜」로 타온다. 그것이 나중에 비극의 출발점이 된다.
 
 
 
 가볍게 처리한 북한의 南侵
 
  1950년 6월25일, 정오쯤일까. 진석이 헐레벌떡 달려와 진태에게 전쟁이 일어났다고 알린다. 영화에서는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 괴뢰군이 남침했다』는 간단한 아나운스먼트와 「북한 괴뢰군, 돌연 남침」이란 제목을 붙인 신문 호외가 잠깐 가랑잎 날리듯 스쳐 지나간다. 전쟁이 일어나면 으레 교전 당사자들은 정부 공식발표의 형태로 도발의 책임을 서로 상대에게 돌리는 것을 능사로 하는 것이니만큼 그것만으론 누가 평화를 깨버렸는지, 그 진상은 알 수 없는 법이다.
 
  다만 군용트럭이 거리를 달리며 『휴가중인 장병은 즉각 귀대하라』고 가두방송을 하는 대목에서 전쟁책임을 유추할 수 있다. 만약 국군이 「북침을 했다면 전쟁 발발 직전에 국군 장병들에게 비상을 걸었으면 걸었지, 휴가를 내보낼 리 없었을 터이니까…. 그러나 이 대목은 과감한 생략법에 의거한 때문인지 「혼란의 와중」에 파묻혀 있었다. 관람객으로선 정신 바짝 차려 보지 않았다면 놓치기 쉬운 삽화, 아니 예상되는 6·25 참전자 등의 비난에 대비한 「꾀 많은 감독의 어떤 장치」는 아니었을까.
 
  갑자기 피란민들이 몰린 대구驛前 광장에 트럭 하나가 정차하고, 한 무리의 집총 군인들이 하차했다. 강제징집을 하기 위한 것이다.
 
  진석은 군인들에게 끌려간다. 영신의 동생이 아파 약을 사러 갔다 돌아온 진태는 동생 진석을 빼내기 위해 驛으로 달려가 헌병들의 제지를 뚫고 열차칸에 뛰어들었다. 진석이를 데리고 나오려 했지만, 군인들의 제지를 받고 형제 둘 모두가 끌려가게 된다. 떠나가는 기차를 따라 어머니와 영신이 달리며 울부짖는다.
 
  어린 시절, 나는 종시 의문 하나를 풀지 못해 어머니에게 물어본 일이 있다. 진태·진석 형제처럼 강제 징집되어 트럭에 실려가는 아들을 뒤따라가며 방성대곡을 하는 어느 어머니를 거리에서 보고 난 후의 일이었다.
 
  『어매(어머니), 왜 아들이 군대 가는 데 어머니가 길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거야』
 
  『아들이 다칠지도 모르잖아』
 
  그때는 나라를 위해서 軍에 가서 싸우면 영광이 아니겠느냐는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어머니의 말이 이해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지난 후 나는 우리 어머니들이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이해했다.
 
 
 
 6ㆍ25는 소련도 인정한 北의 침략전쟁이 분명하건만
 
  1968년 김신조 일당이 「朴正熙의 목을 따러」 청와대 외곽방어선까지 침투했고, 이어 북한 특공대가 휴전선을 뚫고 자주 내려왔다. 그 해 여름, 어머니는 철책선 소대장으로 복무하는 아들을 면회하러 민간인 통제선의 바로 바깥 동네(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마지리)까지 왔다. 그때 나는 1년 동안 매일 밤 12시간씩 철책에 붙어 경계근무를 하느라고 얼굴이 「베트콩」 같았다.
 
  음식점 겸 여인숙에서 어머니가 푹 고은 닭 두 마리를 먹으려는데, 갑자기 상황이 벌어졌다. 적 게릴라가 철책을 뚫고 침투, 교전이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닭다리 하나 뜯지도 못하고 즉각 일어섰다. 그 순간, 평소엔 그렇게 당차던 여인인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을 보았다.
 
  나는 기억한다. 淸日전쟁을 치르러 중국대륙으로 출진하는 아들을 환송하기 위해 驛頭에 나온 일본인 부형들의 모습을 보고 西洋 각국의 종군기자들이 『깜짝 놀랐다』는 얘기를. 종군기자들의 르포기사의 내용은 『일본의 어머니들은 그 누구도 눈물을 보이지 않고 아들의 「武運長久」만을 조용히 빌고 있었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엔 일본의 여성들도 그렇게 군사문화에 젖어 있었다. 그것은 한국을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 종주권을 주장하는 淸國에 도발한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전쟁이었다. 그런 만큼 그것이 제 아무리 일본의 국익에 부합되는 출전이라 한들, 또한 「그 어머니들」이 자제심을 발휘하여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들, 지금 일본인들에게도 결코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들에게까지도 體化되어 있던 일본의 군사문화를 얕잡아볼 수는 없다. 군사문화가 없는 나라는 결코 자기를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린 어떤가. 우리에겐 어느 틈에 군사문화가 사라졌다. 남이 막아 주겠지―이건 비열한 공짜심리가 아닌가.
 
  6·25는 공산주의 종주국이던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연출하고 북한의 金日成이 앞잡이로 나선 침략전쟁이었다. 이건 「흐루시초프 회고록」뿐만 아니라 공개된 소련 정부의 공식문서에도 기록된 역사적 진실이다. 反戰(반전)이니 평화애호니 휴머니즘이니 또 뭐니 하더라도 그때 누군가가 침략자에 응전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우리는 金日成의 代를 이은 金正日의 治下에 살고 있어야 한다.
 
  8월 이후 워커 라인, 즉 낙동강 전선은 위기일발이었다. 워커 라인 以南은 미군의 안전 철수를 준비하기 위한 지도상의 라인만 설정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낙동강 전선만 뚫리면 인민군은 부산으로 직행하여 8·15 광복 5주년 기념일엔 부산부두에 인공기가 펄펄 휘날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동생을 위해 「람보」가 되는 형
 
  그런 낙동강 전선에 두 형제가 투입되었다. 敵의 대공세 앞에 모두들 사기가 죽어 있었으나 진태만은 다르다.
 
  『이왕에 굶어 죽거나 맞아 죽을 판, 이판사판 한번 붙어 봅시다』라고 외친다.
 
  진태가 소속된 대대는 고립상황에서 죽기 직전, 진태의 건의대로 이판사판의 기습을 감행, 대성공을 거둔다. 특히 敵의 공용화기를 제압한 진태의 활약은 발군의 수준을 넘어 「람보」를 방불케 했다.
 
  어느덧 진태는 전장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기자회견에 불려나가 기자들에게 어떻게 싸웠는지를 설명한다. 군대 입대의 동기를 묻는 질문에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자원입대했습니다』라고 대답할 만큼 요령을 부릴 줄도 알았다.
 
  그렇다면 진태가 왜 그런 용사이기를 자청했던 것일까. 그에게는 무공훈장을 받아 그 공로로 동생을 무사하게 어머니 품으로 돌려보내겠다는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군법상 무공훈장 수상자에게 그런 특권은 부여되지 않는다. 다만 실제로는 지휘관의 재량이나 편법으로 진석의 제대가 가능했는지는 모르겠다. 진석이는 형의 그런 의도를 깨닫고 『말도 안 된다』고 부르짖는다.
 
  9월15일,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苦戰(고전)에 苦戰 중이던 낙동강 전선의 진태 부대에도 전해졌다. 이제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되는 것이었다. 어느덧 진태는 우쭐해졌다. 중사(지금의 하사)로 특진하고 벌써 분대장이 되었다.
 
  진태 형제 부대는 敵都 평양에 1번 입성한다. 인민군은 시가전을 벌이며 막바지 저항을 벌인다. 이때도 진태의 전공은 발군이었다. 건물 옥상에 포진한 敵 기관총조를 혼자서 섬멸해 버렸다. 도주하는 인민군 대좌(최민식 扮)를 격투 끝에 붙잡는다.
 
  진태의 부대는 계속 북진하며 어떤 시가지에서 또다시 전투를 벌인다. 육박전을 하면서 총칼에 찔린 인민군 하나는 국군 병사의 얼굴에 침을 뱉은 뒤 숨을 거둔다. 진석은 센티멘털 휴머니스트다. 진석과 싸우다 지쳐 쓰러진 인민군 병사가 『형, 나 중학 2년생이야』라는 말에 진석은 연민을 느껴 도망치게 하며 그 대신 벽에다 대고 총질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태는 무시무시했다. 인민군이 수용된 감옥에 불을 지르고 빠져 나가는 포로를 붙들어 이글거리는 화염 속으로 차 넣어 버리기도 한다. 영화는 불에 타 일그러진 인민군들의 얼굴과 몸뚱이를 통해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가를 표현한다.
 
  인민군은 후퇴 전에 양민(희생자가 우익인사인지는 불명확하다) 서너 명을 학살하여 높직이 매달아 두었다. 양민학살에 울컥한 진태의 분대는 인민군이 숨어 든 동굴에다 수류탄을 까 넣고 화염방사기를 발사한다.
 
  견디다 못한 패잔병 다섯 명이 손을 들고 밖으로 나온다. 패잔병들 중 하나는 진태의 구두닦이 시절에 닦을 구두를 모집한 「찍새」 용석이었다.
 
  『형, 나야 용석이야. 의용군에 끌려온 거야』
 
  용석이는 양민학살은 자기들이 여기에 오기 전에 저질러진 짓이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진태는 『내 눈엔 빨갱이 새끼만 보인다. 난, 빨갱이 새끼 중엔 아는 놈 없어』라며 분대원들에게 즉결처분을 명한다. 분대원들이 패잔병들에게 총을 겨누는 순간, 진석이가 뛰어들어 용석이를 감싼다. 그리고는 포로를 죽이면 부대에 가서 폭로하겠다며 즉결처분을 저지시켰다.
 
 
 
 보리쌀 두 되가 빼앗아간 목숨
 
  진석의 부대는 韓滿 국경지대인 혜산진까지 진출했다. 이제 통일이 눈앞에 보였다. 敵은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도주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간다』며 병사들은 환호했다. 이진태 중사에겐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된다고 통보되었다. 그동안의 전공, 특히 인민군 대좌를 격투 끝에 붙잡은 데 대한 보상이었다. 그러나 중공군이 개입했다. 12월의 눈보라 속에서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후퇴 중 인민군 포로들 몇이 탈출을 꾀했다. 포로를 데리고 다니기가 곤란했던 진석의 분대에선 포로들을 사살해 버렸다. 그때 용석이도 즉결처분되었다. 진석이는 형에게 『미쳤어!』라고 절규한다.
 
  진태의 부대는 후퇴하면서 서울로 들어왔다. 진석이는 틈을 내어 만리동 집으로 갔다. 그의 형수가 될 영신이만 집을 지키고 있었다. 어머니는 시장에 장사하러 나가 있다고 했다.
 
  미래의 형수와 시동생이 서로 얼싸안고 재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스리쿼터 하나가 삽짝 밖에 턱 닿더니만 죽창을 든 우익청년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영신을 붙든다. 「죄상」은 6·25 직전에 좌익의 전향단체인 「보도연맹」에 가입한데다 敵 치하에서 부역과 자원봉사를 했다는 것이었다.
 
  영신은 『보도연맹이 뭔지 모르고 가입했다』고 변명했지만, 1·4 후퇴를 앞두고 복수심에 불탄 「우익청년단」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카빈총을 든 청년단장(김수로 扮)은 『그러면 왜 敵治下에서 부역을 했느냐』고 다그친다. 영신은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럼, 굶어 죽어!』
 
  진석이는 청년단원들을 혼자서 감당하지 못한다. 부역자들은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두 손을 뒤로 묶인 사람들은 청년단장의 호명에 따라 불려나가 총살이 집행되었고, 시체들은 구덩이에 던져졌다.
 
  영신도 불려 나갔던 위기의 순간에 진태가 출현했다. 진태는 청년단원들과 서로 겨누며 대치했다. 전장에선 영웅이었던 진태도 청년단의 수에 밀려 버린다. 청년단장이 비수 같은 말을 던진다.
 
  『저년, 피란 안 간 건 화냥질… 아랫도리 돌린 거야』
 
  『아니 거짓말… 진태씨, 그건 아니야』
 
  진태를 향한 영신의 눈빛이 참으로 애처롭다. 그 순간, 청년단장이 발사한 소총의 탄환이 영신의 가슴에 명중했다. 뻥 뚫린 영신의 가슴에서 붉은 피가 솟구쳐 나온다. 그래도 눈을 감을 때까지 영신은 호소한다.
 
  『진태씨, 그건 아니야. 거짓말이야, 그건…』
 
  이 기막힌 대목을 접하고 눈물샘이 무감각하다면 그것은 사람이기를 포기한 것 아니겠는가. 나는 흘러 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진태는 진석과 함께 부대로 복귀했지만 영창에 가야 했다. 진태의 소원은 여전하다.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탓인지 진태만 풀려날 수 있었던 것 같다(영화의 템포가 빠르고 과감한 생략법 때문에 확실하진 않는데, 사실 이건 극 전개상 별로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다).
 
 
 
 전쟁의 비극을 상징한 형제간의 육박전
 
  어떻든 진태는 새로 부임한 대대장을 찾아가 전임 대대장으로부터 「진석의 제대」를 약속받은 바 있다면서 이를 사단장이 허락하도록 건의해 줄 것을 거듭 강박한다. 그때는 敵의 포탄이 대대 지휘소에 떨어질 만큼 긴박한 상황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대대장은 거부했다.
 
  「배신감」을 느낀 진태는 총부리를 대대장의 이마에 들이대며 사단장에게 「진석의 제대」를 전화로 상신하도록 협박했다. 그러나 대대장은 敵의 공세에 밀려 부대가 후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진태의 강청을 거부하고, 포로들이 수용된 감옥에 불을 질러 버릴 것을 명했다.
 
  대대 OP(지휘소)는 敵의 포격으로 쑥대밭이 되었다. 진태는 진석이 갇힌 감옥으로 달렸다. 불탄 감옥에는 몸뚱이는 이미 재가 되어 버린 채 유해의 뼈만 흩어져 있었다. 진태가 발견한 것은 평소 진석이 지니고 있던 「만년필」뿐이었다. 그래서 진태는 진석이가 불타 죽은 것으로 믿었다.
 
  그는 복수의 화신으로 변했다. 대대 OP에서 포로가 되어 敵에게 끌려가는 대대장을 보고 뒤쫓아가 돌멩이로 머리를 쳐서 죽였다. 흘러내리는 뇌수가 홍건할 만큼 잔인한 장면이었다. 진태의 증오심을 본 敵은 그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 인민군 소좌까지 「승진」한 진태는 정예 「깃발부대장」이 된다.
 
  진석은 죽지 않았다. 영창에서 불타 죽을 뻔했으나 고참병의 도움으로 살아나 후퇴해 후방의 야전병원에서 부상을 치료하고 있었다. 일주일 후에는 제대명령을 받을 예정인데, 방첩대원이 그를 찾아왔다.
 
  그에게서 형 진태가 인민군의 「깃발부대장」이 되었다는 사실이 통보되었다. 敵의 전단에 인민군 군관 차림을 한 진태의 사진이 박혀 있었다. 진석은 적진에 침투, 형을 데려오려는 요량으로 일선으로 가기를 자원했다.
 
  진석은 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갔다. 때마침 적진에 대한 국군의 포격이 개시되었다. 미군 폭격기의 폭탄투하까지 가세된 혼란의 와중에서 진석은 진태를 발견하지만, 이미 눈이 뒤집힌 진태는 진석을 알아보지 못한다. 국군 보병의 공격으로 육박전이 전개되는 가운데 두 형제간에도 격투를 벌인다. 형은 죽이려고, 동생은 죽지 않으려고…. 동족상잔을 표현한 대목이 아니겠는가.
 
  국군 측이 이기는가 했는데, 인민군의 정예 「깃발부대」가 나타나 전세를 역전시킨다. 진태도 진석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진석이 부르짖는다.
 
  『형, 나야 나, 진석이야』
 
  진태가 퍼뜩 제정신을 차린다. 두 형제는 서로 얼싸안는다. 이제, 진태로서는 어떡하든 동생만은 살려서 어머님 품으로 보내야 했다. 두 형제가 헤어지면서 진태는 진석이 잃어버렸던 만년필을 되돌려 주려고 했지만, 진석은 『다시 만날 때까지 형이 갖고 있어』 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형제는 영영 이별했다.
 
 
 
 자진 입대했던 학도병들의 「태극기~」는 언제 휘날릴까
 
  진태는 오직 동생을 살리기 위해 동생의 뒤를 적으로부터 끊는 일을 결심했다. 진태는 기관총을 뒤로 돌려 「깃발부대」를 향해 힘이 다할 때까지 갈겼다. 그 덕택으로 진석은 무사히 도주했지만, 진태는 인민군의 총을 맞고 쓰러졌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진태가 전사했던 바로 그 현장에서 진석은 「이진석」이라고 쓰인 만년필을 잡고 통곡한다.
 
  『형, 살아온다고 했잖아』
 
  동생 진석은 침략군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야 한다는 大義보다는 우선 자신의 시각 속으로 들어오는 전쟁의 非인간성에 분노하는 캐릭터이다. 그런 진석을 영화에서는 휴머니스트로 그렸다. 만약 6·25 전쟁 당시 그런 類(유)의 「휴머니스트」 청년들뿐이었다면 누가 나라를 위해 싸웠겠는가.
 
  사실 6·25 때 참으로 태극기를 휘날리며 자원 입대한 수많은 학도병들이 있었다. 당시, 국가비상동원령에 의한 징집대상 연령은 만 18~30세였다. 학도병들 중에는 징집대상이 아닌 14~17세 소년들도 위기의 조국을 구하기 위해 입대, 자기 키만 한 총을 들고 싸웠다. 6·25 전쟁 50주년 기념의 해인 2000년, 「6·25 참전 소년병 전우회」가 국군전사자 명단을 조사한 결과 14~17세 소년병 전사자만 2464명인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기록에 나타난 것만 확인한 것일 뿐, 실제로 군번 없이 죽어 간 숱한 소년병 수를 포함한다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그런 학도병·소년병들의 「태극기」와 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의 「태극기」는 차원이 다른 것일까. 그들의 부모들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고, 그들 아래로 자식도 없어 그 피어린 산골짜기와 비탈에 꽃 한 송이 바칠 인적도 끊겼다.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잔인한 세월이다. 오히려 「태극기 휘날리며」를 본 젊은이들에게 국군은 미움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걱정됐다. 「국가보다 민족 優先」 운운하는 위선자들이 많은 세태라서 더욱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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