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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尹靜姬-白建宇 부부 납북 공작 가담 혐의자 朴仁京, 서울에서 활보

예술인 부부 납치 가담 혐의자에게 자유를 주는 세력은 누구인가

추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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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仁京씨는 1994년 1월10일 첫 방문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한국을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다. 북한과 연계된 납치 가담 혐의자인 사람이 어떻게 청와대에까지 초청을 받아 들어갔을까. 납북 미수 사건 후 그를 「요주의 인물」이라고 했던 駐佛 한국 대사관은 주요 행사 때마다 朴仁京씨를 초청하고 있다
白建宇-尹靜姬 부부는 왜 국정원을 찾아갔나
  서울에서 제3차 아시아 유럽 頂上회의(ASEM)가 열렸던 2000년 10월20일. ASEM 의장인 金大中 대통령은 이날 개회식과 오전·오후 회의를 비롯, 오찬과 만찬을 주재했다. 이날 청와대에는 각국 頂上의 방문을 기념하여 국내 주요인사들이 리셉션에 초청되었다. 이 자리에 朴仁京(박인경·77)씨도 포함되었다. 朴씨는 在佛 화가였던 顧菴 李應魯(고암 이응로·1904∼1989) 화백의 두 번째 부인으로 현재는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李應魯 미술관」 관장이다.
 
  月刊朝鮮은 2003년 7월호에서 유고 주재 북한 대사가 유고 정부에 대해 尹靜姬-白建宇(윤정희-백건우) 부부 납치 공작을 시인한 외교문서를 공개, 1977년에 발생한 이 사건이 북한의 소행임을 확인하고 기사를 보도한 바 있다. 「尹靜姬-白建宇 부부 납북 미수사건」은 1977년 사건 당시 파리에 거주하던 尹靜姬-白建宇 부부가 연주회 초청을 받아 스위스 취리히 공항을 거쳐 공산국가 유고에 들어갔다가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될 뻔한 사건이다.
 
  尹씨 부부는 유고의 자그레브 주재 미국 영사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유고를 탈출했으며 프랑스 파리로 돌아가자마자 駐佛 한국 대사관에 출두, 사건의 전모를 신고했다. 朴仁京씨는 유령인물의 연주회 초청을 구실로 尹씨 부부를 유고의 자그레브로 유인했던 사람이며 그동안 「북한 工作 협조자」로 지목돼 왔으나 증거부족 등의 이유로 조사를 받지 않았다.
 
  尹靜姬-白建宇 부부는 朴仁京씨를 자신들의 납치와 관련이 있다는 혐의로 수사 기관에 신고했다.
 
  그럼에도 朴仁京씨는 金泳三 정부 시절인 1994년 1월10일 첫 방문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한국을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으며, 金大中 정부 시절엔 청와대 행사에도 참석했다. 간첩 혐의자인 사람이 어떻게 청와대에까지 초청을 받아 들어갔을까.
 
  金大中 정부 시절인 1999년 尹靜姬씨 부부는 朴智元(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을 만나서 朴仁京에 대한 수사를 요청했다. 尹靜姬씨는 『당시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李應魯 화백 전시회가 열리고, KBS에 朴仁京씨 인터뷰가 나오면서 朴씨가 무슨 민주인사라도 되는 양 귀빈대접을 받았다』며 『北과 연계된 수상한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활보하는 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수사를 요청했다』고 말했다.
 
  朴智元 장관은 그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니 國情院에 가서 얘기를 해보라고 했고, 尹씨 부부는 국정원으로 직접 찾아갔다. 尹씨 부부는 당시 국정원장이던 千容宅(천용택) 의원을 만나 관련자료까지 넘겨주면서 수사를 부탁했다.
 
  『朴仁京씨는 북한하고 관련성이 짙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마음대로 드나들도록 놔두는 것은 위험합니다』
 
 
 
 金大中 정부 들어 더 자유롭게 활보
 
   尹씨 부부의 朴仁京씨에 대한 수사 요구에도 불구하고 朴씨의 신상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千의원과의 면담 후 尹씨 부부는 파티장에서 우연히 千의원을 만났다. 千의원은 『말씀하셨던 그 사건은 내가 국정원장에서 물러나게 돼 처리하지 못했다』고 尹씨 부부에게 말했다고 한다.
 
  1999년 5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국정원장으로 재직한 千의원에게 『국정원장으로 재직 당시 尹靜姬-白建宇 부부로부터 「朴仁京 간첩 혐의 수사 요청」을 받은 일이 있는가』를 물었다. 千의원은 『국정원 재직時에 있었던 일은 대외적으로 발설할 수가 없다』며 『더군다나 원장이었던 내가 그 문제를 말할 수는 없다. 게다가 기억도 잘 안 난다』고 했다. 朴仁京씨의 간첩 혐의와 관련해 「내사」를 했었는지에 대해서도 역시 『노코멘트』라고 답했다.
 
  千의원의 반응을 들은 尹靜姬씨는 『그 자리에는 千원장말고도 국정원의 다른 직원이 여러 명 있었고 우리를 데려다 준 국정원 소속 운전사도 있다』고 말했다.
 
  尹靜姬씨는 『납북 미수 사건 직후 서울에 들어와 남산(前 중앙정보부)과 모호텔에서 두 차례에 걸쳐 조사를 받았다』며 『우리가 조사를 받았으면 우리 부부를 유고로 유인한 朴仁京씨도 당연히 조사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尹靜姬씨는 『유고 주재 북한대사가 납치를 시인한 공식 문서가 발견되었고, 月刊朝鮮과 일본 NHK 보도 등으로 명백하게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朴仁京씨가 거짓말 하는 것 자체가 우리는 너무 싫다』고 말했다. 尹씨는 『朴씨가 아무리 부인을 해도 증거는 너무나 많다. 그 사람이 「내가 옛날에 잘못했다」고 사과한다면 우리가 그 사람을 왜 위험하게 생각했겠느냐』면서 『그 사람은 언론과 인터뷰 때마다 거짓말을 하고, 이런 거짓말이 통하는 세상이 이해가 안 간다』고 덧붙였다.
 
  尹씨 부부 납북 미수 사건에 朴仁京씨가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보여 주는 여러 증거들에 불구하고 朴씨는 자유롭게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심지어 청와대 주최 행사는 물론이고 프랑스 주재 한국 대사관이 주최하는 행사에도 초대받고 있다.
 
 
 
 「對共혐의 있다면 상황 달라질 것』
 
   尹靜姬-白建宇 부부 납치 미수사건이 폭로된 후 李應魯-朴仁京 부부는 파리를 떠나 잠적했다. 두 사람은 駐佛 한국대사관의 출두 요구에 한 차례도 응하지 않았다. 李應魯-朴仁京 부부에 대한 조사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정부는 李應魯 화백 작품의 국내 전시와 판매를 금지시켰다. 李應魯-朴仁京 부부는 1983년,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李應魯 화백은 1989년 파리에서 사망했고, 朴仁京씨는 1994년부터 한국을 출입하기 시작했다.
 
  金泳三 정부 시절 한 고위 관계자는 朴仁京씨의 한국 입국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李應魯 화백의 사망을 계기로 安企部가 尹靜姬-白建宇 부부 납치 미수사건을 더 이상 추적, 감시하지 않은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李應魯 화백 사망 5년 후, 朴仁京씨가 첫 입국할 때 정부 어느 부서에서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고, 安企部에 문의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정부의 무관심이 납북 공작 가담 혐의자의 활동을 방조한 셈이다. 月刊朝鮮의 문의에 대해 관계기관을 통해 확인한 결과, 안기부 對共부서의 한 수사관이 첫 입국한 朴仁京씨를 찾아가 납치미수 사건을 추궁한 적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하지만 朴仁京씨에 대한 고소나 고발이 없었기 때문에 정식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金泳三 정부 시절 청와대에 근무했던 한 고위 관계자는 『尹靜姬-白建宇 부부 납치 미수사건의 연루자 朴仁京씨의 한국 입국 여부는 청와대에 보고될 만큼 중요한 사안인데 보고를 받은 기억이 없다』고 말하고 『李應魯 화백 작품에 대한 販禁 해제 과정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 말했다.
 
  對共사건을 담당하는 서울지검 吳世憲(오세헌) 공안1부장은 『朴仁京씨가 한국을 왔다갔다 한 사실이나, 對共혐의점에 대해 검찰이 가지고 있는 자료는 없는 것으로 안다』면서 『해외거주자의 對共사건에 대한 일차 수사기관은 국가정보원이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 뭐라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다만 1977년 尹靜姬-白建宇 납북 미수사건 당시 朴仁京씨의 범죄행위가 있었더라도 공소시효가 완료돼 처벌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1994년 이후 한국을 드나들면서 對共혐의 사실이 있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여류화가회 申今禮(신금례·77) 고문은 『金泳三 정부 때만 해도 서울 호암 아트홀에서 李應魯 화백 작품 전시회를 할 때 朴仁京씨 주변엔 정보기관의 사람들이 나와 있었는데, 金大中 대통령 때부터는 그런 일이 없어졌다』며 『우리는 초대 못 받아도 朴仁京은 청와대도 초대받아서 가고 그랬다』고 말한다.
 
  申고문은 朴仁京씨의 이화여대 미술학부 1회 동기다. 申고문에 따르면 朴仁京 씨는 2000년 3월, 金大中 대통령이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엘리제宮에서 열린 만찬에 초대받았고, 그 해 10월, 시라크 대통령이 서울에 왔을 때는 청와대 만찬에 초대받았다고 한다.
 
  申고문은 당시 朴仁京씨가 「봉황이 그려진 청와대 초청장」을 보란 듯이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고 기억했다.
 
  2000년 10월 당시 청와대 제 1부속실장이었던 金漢正(김한정)씨 『朴仁京씨는 알지만 朴仁京씨가 청와대 만찬에 왔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당시 행사를 주관했던 외교 통상부 의전 2과에서는 『그 날 청와대 만찬 명단에 朴仁京이라는 이름은 없다. 그러나 오전에 열린 리셉션 명단은 기록이 없어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朴仁京씨가 2000년 10월 청와대 만찬에 참석했다는 이야기는 尹靜姬씨도 들은 바가 있다. 尹씨는 평소 친분이 있는 한 언론인으로부터 『청와대에 갔다가 그곳에서 朴仁京씨를 만났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기자가 확인한 결과 尹씨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준 언론인이 朴仁京씨를 본 것은 오전에 열린 「리셉션」에서였다.
 
  2000년 3월 金大中 대통령이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시라크 대통령이 파리 엘리제宮에서 개최한 만찬에 朴仁京씨가 참석한 것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尹씨는 그 자리에 참석했던 在佛 판화가 金昌烈(김창열·74)씨의 프랑스인 부인으로부터 朴仁京씨가 참석한 사실을 직접 들었다고 한다. 尹씨는 『우리는 그날 음악회가 있어서 가지 못했다』며 『朴仁京씨가 그곳에 나타났다는 게 놀라웠다』고 했다.
 
  朴仁京씨는 그동안 파리 교민사회에서 활동은 거의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리 특파원 출신의 한 여성 언론인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朴仁京씨는 교인이 아니었는데 요새는 파리 한국 교민 장로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며 『교민들 사이에서 어떤 활동을 전개하려고 하는 건지, 진짜 신앙 때문인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일전에 우연히 朴仁京씨를 만났는데 朴씨가 먼저 『월간조선에 나에 관한 기사가 날 텐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얘기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대사관:『朴仁京은 요주의 인물』
 
   그는 『파리 한국 대사관에서 교민들 중 유력인사를 초청할 때 朴仁京씨는 꼭 집어넣는다』면서 『金泳三 前 대통령 때부터 그랬다는 얘기가 있지만 金大中 정부 들어서는 그 정도가 심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1977년 尹靜姬-白建宇 부부 납북 미수 사건 당시 파리의 한국 대사관에서는 교민들에게 「朴仁京이 요주의 인물이니 만나지 말라」는 공문을 보냈었다』며 『그 후 朴씨나 대사관 측에서 어떠한 해명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朴씨가 한국 대사관이나 엘리제宮 만찬에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공관에서 크게 잘못하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다.
 
  在佛 서양화가 韓默(한묵·89)씨는 한국에 있을 때 李應魯 화백과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그러나 프랑스에 가서 무슨 이유인지 절교를 하고 20여 년 가까이 왕래를 하지 않고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李應魯 화백은 한국에 있을 때 조카 이희세씨에게 『韓默 선생이 아주 무서운 사람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게 될 분』이라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韓默 선생은 현재 한국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다.
 
  韓默 선생의 부인 마담 韓은 『韓默 선생이 파리에 가시기 전에는 李應魯 화백과 아주 가까이 지냈지만 파리에서 李應魯 선생이 이상하게 변했다』고 말했다. 마담 韓은 『1960년대 무렵에는 파리에 유학하는 학생들이 다 어려웠고 북한이 경제적으로 한국보다 우위일 때라서 유혹이 많았다』고 설명한다.
 
  『그 때는 집에 전화가 있으면 형편이 아주 좋다고 할 때였는데, 李화백 부부가 갑자기 교외에 큰 집도 사고 전화를 놓고 해서 이상하다고들 했어요. 친분이 있는 사람들끼리는 집에 갈 때도 그냥 무작정 가고 할 때였는데 李화백 부부는 갑자기 「전화하고 찾아오라」고 해서 바깥 양반은 물론 다른 화백들하고도 관계가 소원해졌지요』
 
  韓默 선생 내외는 李應魯 화백 장례식에 참석했다. 마담 韓은 『입관을 하는데 우리 바깥양반께서 어찌나 통곡을 하는지 깜짝 놀랐다』며 『남편은 장례식장에서 朴仁京씨에게 눈길을 한 번 주고는 다시는 쳐다보지 않더라』고 회고했다. 마담 韓은 『그 자리에서 가족도 우정도 칼질하는 분단의 아픔을 소름 끼치게 느꼈다』고 말했다.
 
  『그 후로 朴仁京씨를 파리에서도 더러 만났어요. 파리 대사관에서 송년회할 때 교민들 중에 유지들을 초청해서 파티하고 그러는데 金大中 대통령 때부터 거기에 朴仁京씨가 쭉 나오니까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張德相(장덕상·68) 자문위원은 1965년에서 1972년까지 중앙일보 駐佛 특파원을 지냈다. 張위원은 李應魯 화백이 당시 파리에서 활동을 뛰어나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李화백의 집에 자주 놀러 갔다. 張위원은 『李화백 댁에 가면 朴仁京씨가 김치랑 한국 음식도 해주고 그래서 상당히 좋게 생각했었다』며 『당시 李화백이 조국에 대해 걱정 많이 하고 정치에 관심이 많았는데 李화백이 걱정할 때마다 나는 「점점 나아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얘기했다』고 말했다.
 
 
 
 李應魯 화백 장례식장을 찾은 북한 관리들
 
   張위원은 그러나 『李화백과 朴仁京씨에 대해서 좋게 평가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1966년 동백림 사건 때 내 이름이 포섭 대상자로 신문 1면에 크게 났어요. 나중에 정부 쪽으로 알아보니까 李應魯 화백 쪽에서 내 이름이 나왔다는 사실을 내가 직접 확인했어요』
 
  張위원은 『李화백 집에서 상세하게 정리된 교민들 리스트를 발견했다는 것을 정부 관계자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李應魯 화백이 사망했을 때 張위원은 파리에서 駐佛 문화원장을 하고 있었다. 당시 서울 문공부 장관실에서 張위원에게 전화를 걸어 『李화백 앞으로 조전을 보내는 게 좋으냐』고 물었고 張위원은 『나한테 맡겨라』 하고는 정부 측 대표로 장례식에 갔다.
 
  張위원은 『그 날 조문객은 모두 120명쯤 되었고 한국 사람들보다는 외국인들이 많았는데 프랑스인이 80여 명 되는 것 같았다』고 기억했다.
 
  『오전 11시쯤 좁은 영안실에서 나와 찬바람을 쏘이는데 벤츠 2대가 들어왔어요. 駐佛 유네스코 북한대사와 북한 대표부 대사가 차에서 내리고 마이크로 버스에서 대형 조화가 내려졌습니다. 李화백이 북한과 얼마나 관련이 있었으면 북한 사람들이 그렇게 정중하게 대접했겠습니까. 그가 아무리 변명한들 북한 쪽 사람인 것을 부인할 수 없는 풍경이었습니다』
 
  張위원은 『장례식은 별다른 예식 없이 쓸쓸해 보였다』며 『장례식에 온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계기로 조국을 배반한 사람의 종말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을 것』이라고 했다.
 
  朴仁京씨는 무인(1926)년生 호랑이띠로 전라북도 전주시 전주군 전주면 본정 삼정목 26번지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박종현씨와 어머니 송병헌씨 사이의 장녀인데 남동생 박두만씨와 여동생 朴仁子씨가 있다. 박두만씨는 아들이 없는 朴仁京씨 집안에 양자로 들어왔다. 그는 연세大를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던 중 독일에서 행방불명되었다. 그의 가족은 한국에 살고 있으며 부인 이경숙씨와 자녀들은 朴仁京씨에게 여러 차례 박두만씨의 행방을 물었으나 朴仁京씨는 『모른다』고만 할 뿐이었다. 이경숙씨는 애를 태우다 한이 맺혀 1992년 사망했다. 박두만씨의 자녀들은 고모 朴仁京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감정이 좋지 않다고 한다.
 
 
 
 朴仁京:『돈많은 할머니』(화랑가 사람들)
 
  서울에서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광복 후 이화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1회생으로 입학한 朴仁京씨는 고암화숙을 드나들며 22년 연상의 스승이었던 고암 李應魯 화백의 둘째 부인이 되었다.
 
  1969년 李應魯 화백과 함께 渡佛했으며 1983년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1989년 顧菴 사망 후 朴仁京씨가 보관 중인 顧菴의 작품은 1만 점이 넘는다. 그림의 재산가치는 100억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며 화랑가에서 朴仁京씨는 「부자할머니」로 통한다.
 
  여동생 朴仁子씨는 1941년 광주에서 출생, 현재 서울에 살고 있다. 남편은 공무원으로 재직하다 몇 년 전에 사망했다. 朴仁子씨에게 언니 朴仁京씨에 대해 물었다
 
  그의 첫마디는 『형제라도 잘 모릅니다. 답답할 정도로 몰라요』였다. 朴仁子씨는 『언니와 워낙에 나이 차가 많이 나고 어릴 때부터 떨어져 자라서 잘 모른다』며 『나는 덜렁대는 편이고 언니는 어려서부터 얌전했다』고 했다. 朴仁京씨와 朴仁子씨는 15년 차이다.
 
  朴仁子씨는 『그 양반은 워낙에 바빠서 서울에 와도 나하고 얘기할 처지가 아니다』며 『 朴仁京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그 양반에게 직접 물어보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朴仁京씨와 이화여대 동기인 한 사람은 『학생 때 굉장히 친했고, 지금도 교류는 계속 하고 있지만 朴仁京이 속내를 전혀 얘기하지 않기 때문에 불편한 얘기는 서로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납치 미수 사건 후로는 뭔가 베일에 가려진 듯해 학생 때와는 분위기나 느낌이 달라졌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1958년 프랑스에 가서 고생할 때였으니까 이북의 도움을 받았을 수도 있지요. 그땐 다들 많이 그랬으니까요. 朴仁京이 예전에는 허리가 조금 구부러지고 안색도 어두웠는데 李應魯 선생이 죽고 나서는 눈에 띄게 혈색도 좋아지고 건강해졌어요』
 
  충남 예산군 수덕사 인근의 낙상리 선산에는 李應魯 화백의 가묘가 있다. 조카 이두세씨가 프랑스에서 李화백의 머리카락을 잘라 온 것을 李화백의 첫째 부인 박귀희씨가 밥그릇에 넣어 가묘를 만들었다. 박귀희씨와 함게 수덕여관을 40년 넘도록 돌봐온 李昌周(이창주·65)씨는 李應魯 화백의 집안 친척으로 박귀희씨의 수양아들이다.
 
 
 
 본처 박귀희와 朴仁京
 
  2001년 박귀희씨가 죽은 후 李昌周씨가 수덕여관을 운영해 왔지만 그의 부인이 암말기로 투병 중이라 수덕여관을 더 이상 경영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李昌周씨는 『李應魯 화백의 손녀는 교수와 결혼하여 중국에 가 있으며 손자는 사업 실패 후 회사에 다니고 있다』고 전해 주었다. 李화백이 프랑스로 가기 전에 그린 그림들은 대부분 손자의 집에 있다고 한다.
 
  李昌周씨는 朴仁京씨가 서울 마포에 살 때 그녀를 처음 봤다고 한다.
 
  박귀희씨가 작고하기 한 해 전인 2000년에 朴仁京씨가 수덕여관에 한 번 찾아왔다. 李昌周씨는 朴仁京씨가 카스텔라 하나 달랑 들고 李皓宰(이호재·48)라는 사람과 같이 왔었다고 기억했다. 李皓宰는 「가나아트 센터」의 대표로 李應魯 화백의 그림 판매 등 국내에서의 朴仁京의 재산관리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화랑가에 알려져 있다.
 
  李昌周씨는 李화백을 「응노 할아버지」라 불렀다. 李씨는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 응노 할아버지가 장인 어른한테 인사간다고 해서 병에다 술을 담아 가지고 들고 홍성으로 같이 간 기억이 있다』고 했다. 李씨는 충남 홍성군 월산리의 큰 도로가에 있는 주유소 앞에서 보면 마을이 내려다보인다고 일러 주었다.
 
  李씨가 가르쳐준 대로 찾아간 마을은 산 아래에 과수원으로 둘러싸인 제법 큰 마을이었고 근처에는 홍주 종합 경기장이 있었다. 부지는 넓었지만 가구수는 많지 않았다. 정확한 주소는 충남 홍성군 월산리 1구 월계마을. 「朴仁京, 朴仁子」라는 이름을 말하자 과수원에서 일하던 노인들은 『박인자와 초등학교, 중학교를 같이 다녔다』고 했다.
 
  주민 金成鎭(김성진·62)씨는 李화백의 장조카인 이두세씨와 바로 옆집에 살았다. 朴仁京씨 일가는 이쪽에 연고가 없었으나 6·25 전쟁 때 서울에서 李應魯 화백하고 같이 내려왔다. 金成鎭씨는 『서울에서 朴仁京씨 아버지, 朴仁京, 朴仁子 이렇게 3父女가 내려왔다』며 『朴仁京씨의 어머니는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朴仁京씨는 李應魯 화백하고 수덕사에 가 있었고 월계마을에는 아버지 박종현씨와 朴仁子만 살았다』고 기억했다.
 
  朴仁京씨가 李화백과 함께 서울로 올라 간 후에도 아버지 박종현과 朴仁子는 8년간 이곳에서 살았다. 朴仁子는 이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쳤으며 부녀가 조용하게 살았다고 한다. 떠난 후로는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박종현씨는 선비 스타일로 마을에서 글방을 하며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쳤고 농삿일은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金成鎭씨는 『박종현씨는 군산에서 교편을 잡았던 것으로 들었다』고 했다.
 
  월계마을 마을회관에는 피란 당시 朴仁京씨와 李應魯 화백이 함께 그린 용깃대가 보관되어 있다. 가로 4m, 세로 1.5m가 넘는 깃대 한켠에는 단기 4283년(1953년) 8월15일이라고 제작 날짜가 적혀 있었다.
 
 
 
 한 언론인:『朴仁京씨가 시인하고 사과해야』
 
  金成鎭씨는 6·25 전쟁 당시의 충남 홍성군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여기 홍성이 원래 유명한 빨갱이 동네였어요. 6·25 전쟁 때 남로당이 들어와서는 사람들을 생매장하고 철사줄로 찢어 죽이고 아주 잔인하게 죽였는데 당시 경찰이나 지식인들은 다들 도망가고 그랬지요. 근데 朴仁京씨네는 그때 아무 이상도 없었어요. 만약에 자유진영이었으면 피살당했을지도 모르죠. 근데 잘 모르겠어요, 난 그때 어렸으니까』
 
  공보처 통계국이 1952년에 발간한 「6·25 사변 피살자 명부」에 따르면 당시 충남 홍성군에서는 246명이 피살됐고, 월산리(월계마을)로 끌려와 피살된 사람은 44명이었다.
 
  이장 元聖九(원성구·67)씨도 朴仁京씨를 기억했다. 元씨는 朴仁京씨를 「낙타」라고 불렀다. 元씨는 『朴仁子는 우리 또래였지만 朴仁京은 우리보다 나이가 많았다』며 『하도 말라서 허리가 구부정해가지고 다니니까 우리가 낙타라고 불렀다』고 했다. 그는 李應魯 화백과 朴仁京씨가 일꾼을 사서 복숭아 과수원을 했었다는 것도 얘기했다.
 
  홍성 시내에는 李應魯씨 장조카 며느리 이영구(84)씨가 아직 살고 있었다. 그가 朴仁京씨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없었다. 그는 『朴仁京이 서울에서 피란 내려왔을 때는 내가 애들 데리고 친정으로 피란갔기 때문에 마주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 후 지금까지 살면서 서로 소식을 전하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朴仁京씨는 「尹靜姬-白建宇 부부 납북 미수 사건」에 대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밝혀질 것』이라며 아직도 얼버무리고 있다고 한다.
 
  「尹靜姬-白建宇 부부 납북 미수 사건」을 취재했던 한 언론인은 『朴仁京이 간첩 혐의자라는 사실이 月刊朝鮮 2003년 7월호에 이미 명백하게 증거가 나와 있지 않느냐』며 『 증거가 명백한데 시인하고 사과하면 되는 것을 굳이 부인하면서 한국을 드나든다는 것은 아직까지도 북한과 연결이 되어 있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고 말했다.
 
  林錫珍(임석진·71) 명지大 철학과 명예교수는 『동백림 사건과 그 이후 전개된 내용으로 비추어 봤을 때 朴仁京이 북한과 관련이 있음은 사실인 것 같다』고 말했다.
 
  林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재독 교포 송두율은 내가 가르친 학생이었습니다. 요즘 송두율 사건을 보면 검사들은 국가관이 올바로 정립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 수준에서 포착을 하면 朴仁京 같은 사람이 저렇게 서울에 드나들고 있다는 것은 이해가 안 가는 일 아닙니까』
 
  朴仁京씨는 「송두율 사건」의 와중인 2003년 10월6일에도 입국, 보름간 국내에 머문 후 19일 출국했다. 2004년에는 李應魯 화백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이 전시회는 가나아트 센터에서 대대적으로 열 계획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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