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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계의 감시자」 李載浩 선생 硏究

『역사歪曲을 보고 바로잡지 못하면 밤에 잠이 안 와요』

정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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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復 이후 어느덧 60년이 가까워지는 지금, 國學의 위기상황이 도래했다. 그동안 우리의 교육정책이 西洋學의 습득에 치중하고, 우리 전통문화 연구의 근원이 되는 漢文교육에는 소홀했던 탓이다. 우리의 역사가 왜곡되고, 문화유산이 매몰되면 우리의 正體性은 어떻게 세울 것인가. 碩學 李載浩 선생에게 그 방법을 물었다

李 載 浩
1920년 慶南 咸安 출생. 1930년 고향의 代山초등학교 4년 졸업. 漢文 수업. 1953년 34세의 나이로 東國大 사학과 졸업. 馬山高·釜山高 교사. 1958~1985년 釜山大 사학과 전임강사·조교수·부교수·교수 역임. 현재 釜山大 명예교수.
저서:「韓國史의 批正」, 「朝鮮政治制度연구」, 「韓國史의 闡 明」
역서:「삼국사기」, 「삼국유사」, 「금오신화」, 「西厓全書」, 「亡憂先生文集」, 「반계수록」, 「丁茶山文選」 등.
「韓國문화사의 內面에 흐르는 淸流」
  필자는 지난 5월, 우리 史學界의 원로인 李載浩(이재호) 부산大 명예교수로부터 다음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月刊朝鮮 5월호에 기재된 先生의 國寶紀行-16을 잘 읽어 보았습니다. 거기 359쪽 아래에서 9行의 宗系辨誣(종계변무)의 기사는 別紙(별지: 이재호 선생 자신이 작성했음)의 기사가 맞습니다. 拙著(졸저) 「散文集(산문집)」 1책을 부송하오니 餘暇(여가) 나는 대로 一讀(일독)하심을 바랍니다」(괄호 안은 편집자의 글)
 
  老학자의 言辭(언사)는 부드러웠지만, 誤報(오보)를 질책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평소 李載浩 선생을 우리 「國學界의 감시자」로 畏敬(외경)해 왔다.
 
  李선생이 일찍이 저술한 「韓國史의 批正」(1985)과 「韓國史의 闡明」(1995)은 학자들이 漢文原典이나 역사사실을 엉터리로 풀이하거나 잘못 알고 집필한 글에 대해 엄정하게 비판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이번에 李載浩 선생이 필자에게 보낸 「滄洲散文集(창주산문집)」은 그가 이미 발표한 각종 서적의 解題와 論考를 묶어 낸 新刊이다. 역시 일부 학자들의 역사 왜곡에 대한 비판이 날카로웠다. 「滄洲」는 李선생의 아호이다.
 
  필자는 「國寶紀行 16회」에 임진왜란 당시의 名宰相인 西厓 柳成龍(서애 류성룡)이 戰後에 삭탈관직된 이유로 「宗系辨誣」를 위한 明나라에의 使行(사행)을 거절함으로써 宣祖 임금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인 것으로 썼는데, 그것에 대해 李선생은 「丁應泰(정응태)의 誣奏(무주)사건」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李선생이 동봉해 보낸 「별첨」은 誤報에 대한 정정기사가 될 수 있다고 판단, 그 全文을 여기에 전재한다(박스기사 참조).
 
  필자는 李선생이 쓴 「批正」(비정), 「闡明」(천명) 두 책을 가까이에 두고 시나브로 읽으면서 그 비판의식에 痛快(통쾌)함을 느껴 왔는데, 어느덧 그 「회초리」가 필자에게도 날아든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제 막 출간한 그의 저작 「滄洲散文集」을 동봉한 데 대해선 고맙게 생각했다. 그날 밤 필자는 이 산문집을 통독했다.
 
  이 책엔 그가 學者가 되는 드라마틱한 과정을 솔직하게 서술한 「硏學槪論」(연학개론)이란 제목의 글이 실려 있었다. 그는 舊制(구제)초등학교 4학년을 졸업한 뒤 중·고교 과정을 건너뛰어 30세의 나이로 대학에 진학했으며, 대학 시절에는 6·25 전쟁을 만나 강의를 거의 듣지 못한 채 졸업하였는데도 대학교수가 된 인물이다. 서울大 사학과 盧泰敦(노태돈) 교수는 그런 특이한 경력의 李선생이 쓴 「滄洲散文集」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특히 「硏學槪論」 등 儒家的(유가적)인 체취가 물씬 풍기는 글들에선 한국문화사의 內面에 흐르는 또 한 줄기 淸流(청류)의 신선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필자는 李선생을 언젠가 어느 출판기념회에서 만나 잠시 인사를 드린 적은 있었지만,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몰랐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碩學(석학)들도 그 앞에서는 「밑천」을 드러내며 魂飛魄散(혼비백산)하는 까닭이 무엇인지가 평소의 관심거리였다.
 
 
 
 『역사歪曲은 漢文고전에 통달하지 못한 것이 원인』
 
  지난 5월8일 오후 2시, 서울 마포구 성산동 시영아파트단지 안에 있는 李선생의 댁으로 찾아갔다. 초인종을 누르다가 보니 대문의 눈높이에 천주교 신자 가정임을 알리는 작은 십자가가 붙어 있다.
 
  금년 84세의 李선생은 아직도 왕성하게 논문도 발표하고, 학문상의 是非를 분명히 가리는 열정적인 학자다. 거실에서 작은 앉은뱅이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李선생과 마주 앉았다.
 
  ―얼굴이 참 맑으십니다. 건강하시죠.
 
  『그렇지도 않아요.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엔 가지도 못해요. 보행이 불편해서…』
 
  그의 25평 아파트에는 희귀한 漢文 原典을 비롯한 서적들이 쌓이다 못해 흘러 넘칠 지경이었다.
 
  『집이야 허름해도 35평은 되어야 될 건데. 책 놔둘 데가 없어서 이 모양이오』
 
  거실의 해묵은 장식장 중턱에 李선생이 金壽煥(김수환) 추기경에게 무슨 봉투 같은 것을 전달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 액자가 눈에 띄었다. 뭔가 전달했다면 사연이 있을 것 같았다.
 
  ―(사진을 가리키며) 선생님은 천주교 신자이십니까.
 
  『아니오. 집사람이 천주교를 믿습니다. 우리 집엔 종교의 자유입니다』
 
  ―추기경에게 뭔가 드리는 것 같은데….
 
  『애국지사 김창숙 선생 학술상 수상식 때 참석했다가 찍힌 사진입니다. 그때 내가 건의서 하나를 만들어 金壽煥 추기경께 드렸습니다』
 
  ―건의서라니요?
 
  『한강변에 있는 가톨릭 聖地(성지)인 切頭山(절두산)의 이름이 「목을 자르는 산」이라고 해서는 종교적으로 좀 험악하다는 생각이 들어 成仁山으로 바꾸면 좋겠다는 나의 소견을 적은 건의서입니다』
 
  ―왜 하필 成仁山입니까?
 
  『거기서 우리나라 초창기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순교했습니다. 그렇다면 殺身成仁(살신성인)에서 「成仁」을 따서 命名하면 더욱 의미가 있지 않겠소』
 
  절두산 일대가 1846년 우리나라 최초의 神父인 金大建을 비롯하여 많은 천주교 신도들이 순교한 새남터이다. 지금 절두산에는 그때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절두산 성당이 세워져 있다. 여기서 필자는 평소 궁금하게 생각하는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李선생님께선 우리나라 학계에서 역사를 왜곡하는 사건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하시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역사 연구의 근본자료인 漢文古典을 이해 통달하지 못한 데서 그 원인이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鄭위원이 「歪曲」을 「왜곡」이라고 발음했는데, 그건 「외곡」이라고 읽어야 합니다』
 
  ―사전에는 「외곡」, 「왜곡」 둘 다 맞는 걸로 되어 있는데요.
 
  『국어사전에 잘못된 곳이 많습니다』
 
  ―어떤 것입니까.
 
  『국어사전을 보면 普♥이 「보편」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그건 「보변」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또 尊卑(존비) 질서가 뒤바뀌고 호칭 자체의 개념마저 불분명한 「妹兄(매형)」이란 용어가 국어사전에 버젓이 올라 있습니다. 손위 누이의 남편은 ♥兄(자형), 손아래 누이의 남편은 妹夫(매부)라고 해야 합니다』
 
  李선생은 숨돌릴 틈도 없이 말을 이어갔다.
 
  『국어사전의 오류를 시정하기 위해 1996년부터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는 논고를 國立국어연구원에 누차 보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 금년 3월에 또다시 통지했더니, 沈在箕(심재기) 원장이 필자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하지만, 현재 국어사전의 組版(조판)이 이미 끝났기 때문에 시정할 수 없다는 회답을 보내 왔습디다』
 
  ―한문고전을 이해하는 빠른 방법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중국의 經·史에서 그 기본지식을 얻어야 해요. 먼저 通鑑(통감)·史記를 독파하여 史實을 파악하고 문장 구조를 이해한 후 四書와 五經을 숙독하여 전통사상의 근원을 구명하고 사물의 추리능력을 연마해야만 한문고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文理가 트이려면 通鑑節要를 읽어야』
 
  ―선생님은 어떤 단계에서 文理가 터집디까.
 
  『通鑑節要(통감절요) 제2권은 楚漢戰(초한전)에 관한 기록인데, 그걸 읽으니까 原典을 해독하는 방법을 대충 알게 됩디다. 通鑑節要 제7권은 三國志를 축약한 것인데, 거기까지 읽으면 文理가 터집니다. 옛날 노인들은 삼동에 밥 먹는 것도 잊고 통감 제7권을 읽었거든요. 통감절요는 國學, 특히 우리 역사와 東洋史 연구자에겐 필독서지요』
 
  ―그때가 언제쯤입니까.
 
  『晦泉 趙亨奎(회천 조형규) 선생님 문하에서 通鑑과 論語(논어)를 수업하던 열두 살 때였습니다. 晦泉 선생님은 당신이 먼저 글 뜻을 해석해 주지 않고, 학생들 스스로가 字典을 찾고 句讀點(구두점)을 찍어 가며 自得自通하게 하는 방법을 취하셨습니다.
 
  혼자서 구두점을 찍는다는 것은 이미 그 문장의 절반쯤은 이해하는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그 후 나는 古典 해독에 큰 부담 없이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國學界에서 한문원전을 제대로 읽어 내는 분이 많지 않죠.
 
  『국문학계·국사학계·철학계 동태를 보면 연구자세에 있어 溫故而知新(온고이지신)하기보다는 埋故而造新(매고이조신), 즉 옛 자료를 슬쩍 파묻어 버리고 신기한 妄論(망론)을 조작해 내는 풍습만 범람하고 있습니다. 그 근본 원인을 구명해 본다면 광복 이후 반세기 동안 우리나라 교육기관에서 한문의 기초교육을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요즘 사람은 다른 일도 많은데, 옛 사람들처럼 漢文에만 전념하기가 어렵겠죠. 또한 國學연구자에겐 漢文原典을 정확히 이해하는 능력이 필수적이겠지만, 일반 교양인은 漢字를 웬만히 읽어 내는 수준이면 괜찮은 것 아닙니까.
 
  『漢字를 모르면 어휘력·사고력이 빈약해져요. 그래서는 학문을 하기도 불편하고 교양인도 되기 어렵지요. 더 큰 문제는 漢文의 기초지식이 없는 대학교수들이 史料(사료)를 잘못 해석하여 엉터리 논문을 쓰거나 논지를 자꾸 외곡시키고 있다는 겁니다』
 
 
  [학자들의 사례]
 
  李선생은 原典을 잘못 해석해서 과오를 범한 某某 학자의 논문들을 「滄洲散文集」에서 다음과 같이 예시했다(편집자가 내용을 縮約).
 
  <某대학교수는 삼국사기 중의 「乙支文德 未詳其世系」(을지문덕 미상기세계)란 기사의 世系(세계: 선대의 계통)를 국적으로 잘못 해석,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을 중국에서 고구려에 귀화해 온 장수라고 발표했다>
 
  <某교수는 「漢書」 食貨志(식화지)에 나오는 「奴婢以千萬數」란 기사 중의 「千萬」(천만: 아주 많은 수효)을 오역, 漢代의 인구총수 5000만 중 노예가 2000만 명을 차지했다고 판단했다. 그런 나머지 중국 秦·漢 시대를 서양 古代 로마의 노예제사회로 比定하는 오류를 범했다>
 
  <1977년에 발생한 「死六臣 외곡사건」은 몇몇 학자들이 그 당시 권력자에 영합하여 사실을 부회·조작한 것이었다. 즉 端宗의 충신 金文起가 三重臣의 한 분일 뿐 死六臣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생육신의 한 분인 南孝溫의 「六臣傳」(秋江先生文集 제8권에 수록되어 있음)과 正祖實錄(정조실록) 15년 2월 丙寅 「御定配食壇條」(어정배식단조) 등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는데도 사학계의 某씨 등이 아직도 김문기公이 사육신이라고 우겨 대고 있다>
 
  『심지어 이병도 선생의 저술 「韓國史大觀」과 유홍렬 선생 감수 「한국사대사전」에는 「남효원의 저술인 六臣傳은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고 쓰여 있습니다』
 
  <일부 학자 등은 임진왜란 발발 10년 전 李栗谷(이율곡)의 「10만 養兵」 제안을 柳西厓(류서애)가 반대했다고 끈질기게 주장해 왔다. 내가 관련된 각종 문집을 검토해 보니 西厓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李文成眞聖人也」(이문성진성인야)라며 栗谷의 先見之明을 敬歎(경탄)했다는 문구는 유독 「栗谷全書」에만 쓰여 있다. 文成은 율곡의 諡號(시호)인데, 이 시호를 나라에서 내린 시기는 仁祖 2년(1624)이고, 서애가 별세한 때는 선조 40년(1607)이다. 서애가 생전에 「叔獻」(숙헌: 율곡의 字)이나 「栗谷」이라고 호칭하지 않고 자신의 死後 17년 뒤 내린 율곡의 시호 「文成」을 어찌 미리 알고 李文成이라고 지칭했겠는가. 그것은 국란 극복의 名宰相 西厓를 폄하하려는 政敵들의 모략이었다>
 
 
 
 『목소리만 높은 名分論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한다』
 
  ―西厓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文識(문식)과 武略(무략)을 겸비한 분으로 조선왕조에서 西厓만 한 인물은 없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서애는 국가안보에 있어 將帥(장수)의 選任(선임)을 가장 중시했습니다. 그럴려면 우선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서애는 李舜臣(이순신)을 將材(장재)로 천거했는데, 그에게 그런 안목이 있어 가능했던 것입니다. 蕭何(소하)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韓信을 將帥로 천거함으로써 漢 高祖 劉邦(유방)이 중국 천하를 얻을 수 있도록 했다면, 서애는 멸망할 뻔한 나라를 구제했습니다』
 
  ―丙子胡亂(병자호란) 때는 왜 西厓와 같은 재상이 나오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그때 崔鳴吉(최명길)과 같은 인물이 없었다면 조선왕조는 벌써 망했을 것입니다. 나라의 실력은 없는데, 목소리만 높던 主戰派(주전파) 일색의 조정에서 그는 고독하게 主和論으로 일관했습니다. 대륙의 정세에 둔감했던 仁祖 조정은 그가 아니었다면 결딴이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尊明論(존명론)과 北伐論(북벌론)이 판을 쳤던 그 후의 老論정권에서 崔鳴吉에 대한 평가가 갈수록 폄하되었습니다』
 
  ―국력이 약할수록 외교를 잘해야 나라가 살아남죠. 우리 역사상 외교를 잘한 인물은 누구입니까.
 
  『거란의 남침 때(고려 成宗 12년) 徐熙(서희)는 불리한 전황에서도 적장과 담판하여 거란군을 철수시켰을 뿐만 아니라 江東 6州까지 고려의 판도에 넣는 大功을 세우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徐熙가 고려, 宋, 거란, 女眞이 착잡하게 얽혀 있던 당시의 국제관계에 정통했고 교섭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盧武鉉 정부는 對外 교섭력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불안합니다. 특히 對美 외교에서 그래요. 안보문제와 관련해서 한국에게 미국은 필수적이지만, 미국에게 한국은 선택적입니다』
 
  ―적어도 국가안보문제와 관련해서는 盧武鉉 대통령의 입이 좀 무거워져야겠죠.
 
  『東晋(동진)의 재상 謝安(사안)은 그가 大將으로 천거한 자기 조카가 前秦(전진)의 80만 대군을 水(비수)의 大戰에서 무찔렀다는 승전보를 전하려고 전령이 달려왔지만, 손님과 두던 바둑을 태연히 다 둔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 집 아이가 이겼어」라고 한마디 할 만큼 진중했어요』
 
  ―고려 顯宗(현종) 때 康兆(강조)는 바둑을 두다가 망했는데요(거란의 聖宗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자 行營都統使(행영도통사) 康兆는 陣中에서 바둑을 두다 기습을 받고 포로가 되었다).
 
  『康兆는 初戰에 승전하자 적군을 얕잡아보다 그렇게 된 거죠. 輕敵必敗(경적필패) 아닙니까』
 
 
 
 誤譯투성이, 남북한의 삼국사기 번역본
 
  李선생은 특히 三國遺事, 三國史記의 오역은 심각한 상황이라고 지적한다.
 
  <삼국유사 기록 중 신라 진덕여왕이 唐 高宗에게 바친 太平頌(태평송) 중 「統天崇雨施 理物體含章」(통천숭우시 이물체함장)을 어떤 번역본에서는 「하늘을 統領(통령)하매 고귀한 비가 내리고, 만물을 다스리매 물체마다 광채를 머금었다」라고 번역했다. 이런 번역은 雨施(우시)와 含章(함장)의 出典을 모르기 때문에 생긴 誤譯이다. 雨施와 含章은 모두 「易經」(역경)의 「雲行雨施 含章可貞」(운행우시 함장가정)이란 典故에서 나온 것인데, 「세상을 대자연처럼 다스리고, 만물을 땅처럼 포용한다」는 뜻이다>
 
  이같은 李載浩 선생의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발하는 학자도 있다.
 
  즉, <先學인 李丙燾(이병도) 박사가 이미 심혈을 기울여 번역해 놓은 삼국유사를 뒤이어 번역하면서 「李丙燾 박사가 번역한 삼국유사는 400개의 誤譯을 남긴 엉터리 책」이라는 식으로 폄하하고 있다. 李載浩 선생이 번역한 삼국유사는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결국 그 틀린 부분 400개만 고친 修訂本(수정본)에 지나지 않는다>
 
  李載浩 선생은 삼국사기의 오역이 남북한 모두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개탄했다.
 
  <삼국사기 제22권 고구려 本紀(본기) 가운데 唐 太宗의 遼東(요동) 침략을 논평한 대목 「史論曰 好大喜功 勒兵於遠者 非此之謂乎」를 북한에서는 「역사평론에서 말하는 바, 큰 것을 즐기고 공명을 좋아하여 먼 곳으로 군사를 내몰았다는 것이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북한, 삼국사기 상권 540쪽)라고 번역했다. 또 이병도 선생은 「史論에 大를 좋아하고 功을 기뻐하여 군사를 먼 데까지 강요하였다고 한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李丙燾, 삼국사기 상권 500쪽)라고 해석했다.
 
  위의 두 번역은 「大」가 과대·과장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몰랐기 때문에 범한 오역이다. 따라서 이것은 「史論에서 과장하기를 좋아하고, 공 세우기를 기뻐하여 군사를 먼 곳까지 끌고 갔다고 말한 것은 이것을 일컫는 것이 아니겠는가」(李載浩, 삼국사기 2권 256쪽)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삼국사기의 북한학계의 번역본에서는 우리나라 역사 서적을 널리 읽지 못한 나머지 고증 소홀로 많은 오역을 범하고 있다. 고구려 本紀 가운데 「唐 太宗…除亂比於湯武 致理幾於成康」(제란비어탕무 치리기어성강)이란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당 태종이 …난을 제거한 것은 은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에 비길 수 있고, 다스림을 이룬 것은 周나라 成王과 康王에 가깝다」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북한의 번역본(삼국사기 상권 532쪽)에서는 「당 태종은 …난을 평정하는 데는 상(商=殷) 탕왕과 주 무왕에 견주고, 리치(理致)에 통달한 것은 주나라 성왕, 강왕과 비슷하였으며」라고 했다. 북한의 번역에서는 「致理」의 「理」가 고려 成宗의 이름 「治」 자를 피하여 쓴 것임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리치」에 통달한 것으로 잘못 번역했다>
 
  ―李선생님께서 洪某 교수가 번역한 「國譯忘憂堂先生文集」(국역망우당선생문집)의 오역문제를 거론했다가 忘憂堂 郭再祐(망우당 곽재우) 선생의 후손들이 「명예훼손」이라고 반발하는 바람에 되레 마음고생을 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만….
 
 
 
 「명예훼손」 是非에 빠진 老학자
 
  『오역에 대한 나의 지적이 잘못된 게 아니라 내가 郭씨 문중 사람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겁니다』
 
  ―洪교수는 「오역이 2000개」라는 李선생의 지적에 대해 「그 숫자를 입증할 만한」 자료를 제시하라고 요구했던데요.
 
  『내가 「國譯망우당선생문집」의 오역 부분에다 일일이 밑줄을 쳐놓았는데 그것을 세어 보니 2100여 개가 됩디다. 이건 확실해요』
 
  李선생이 지적한 洪교수의 오역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도 있었다.
 
  <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안음현감 郭♥ (곽준: 곽재우의 재종숙)은 黃石山城 싸움에서 온 가족이 死節(사절)했던 사실이 있다. 본문의 「郭♥之闔門死節」(곽준지합문사절)이라는 문구는 「온 가족이 절개를 지켜 죽었다」는 표현인데도, 洪교수는 「闔門」이란 단어가 「온 가족」인지 몰라 「곽준이 문을 닫고 순국한 절개」라고 오역했다>
 
  <광해군 2년(1601)에 곽재우가 국왕에게 올린 「中興三策疏」(중흥삼책소) 중 「永慶之謀 不逞者 天也」(영경지모 불령자 천야)는 「柳永慶의 계획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天運(천운)입니다」라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다(宣祖 말기 영의정 유영경은 世子 광해군을 폐하고 어린 永昌大君을 세자로 옹립하려고 했다). 洪교수는 이 대목을 「崔永慶의 역모가 통하지 아니한 것은 하늘의 도움이었습니다」고 오역했다. 최영경과 곽재우는 南冥 曺植(남명 조식)의 제자로서 선·후배관계인데, 최영경은 정여립사건에 가담했다는 모략을 받고 억울하게 옥사한 인물이다>
 
  ―그러면 郭씨 문중 사람에 대한 「명예훼손」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내가 「망우당선생문집」을 改譯(개역)하자고 郭씨 문중 某씨에게 제의했으나 여러 사정상 안 하겠다고 합디다. 그래서 내가 새로 번역한 후 自費(자비) 1000만 원을 들여 작년 3월에 「國譯망우선생문집」(集文堂 발행)을 출간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책의 後記(후기)에 「우매한 후손」이란 용어를 써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왜 「우매한」 이란 낱말을 사용하셨습니까.
 
  『내가 문집을 改譯할 무렵인 1998년 9월에 郭씨 문중을 대표한 세 사람의 이름으로 「만약 日後 일방적으로 (문집 번역작업을) 진행할 경우 법에 의하여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라는 문구의 「내용통지문」이 왔습디다. 400년 전의 문집을 간행하는 데 법적으로 저작권을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경과야 어떻든 학문적인 쟁점도 아니니 그 부분에 대해선 李선생님께서 「표현이 지나쳤다」고 해명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나는 문제의 「우매한」 위에다 「몇몇의」라고 고친 교정자 종이를 붙였는데, 「새로 인쇄하지 않고 땜질을 했다」면서 받아들이지 않는 겁니다. 이 편지들을 좀 보십시오(李선생은 곽씨 문중 某씨가 보낸 편지들을 필자에게 보여 주었다). 이렇게 심하게 괴롭혀요. 이런 편지가 오면 내가 어찌될까 봐 걱정해서 집사람이 감추고 내게 안 보이려 해요』
 
  郭씨 문중의 한 인사가 보낸 편지 내용을 보니 「문중 모욕」, 「인격말살 행위」, 「무덤에 가는 그날까지 매듭짓고 그만둘 각오」라는 거친 표현도 보였다. 심지어는 「현재까지 출판사인 집문당의 재고본, 서점에서의 未매출분, 知人들에게 (보낸) 증정본 등도 모두 고쳤습니까」, 「그 내역을 회시해 주십시오」라는 문구도 있었다.
 
 
 
 자기 돈 써 좋은 일 하고 욕먹는 學者
 
  필자는 비록 李선생의 「우매한」이란 표현에 문제가 있다고 할지라도 老학자에게 이렇게 거친 대응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느꼈다. 어쨌거나 李선생은 自費를 들여 郭씨 문중에서 배출한 우리 역사상 偉人(위인)의 文集을 정확하게 번역해 내는 데 업적을 세운 학자인 까닭이다.
 
  ―國譯망우선생文集을 발간하는 데 든 경비 1000만원은 어떻게 마련하셨습니까.
 
  『그전에 尙州市廳에서 내게 보내온 원고지 1000장분의 번역료를 文集 출판비로 충당했습니다. 상주市의 의뢰로 내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鄭起龍(정기룡) 장군의 實記(梅軒實記)를 국역했거든요』
 
  ―밤을 새워 가며 원고 써서 버신 돈을 그렇게 쓰셔도 사모님께서는 아무 말 안 하십니까.
 
  『왜요. 나를 「남의 조상 현창하기 위해 뼈빠지게 일(번역)하고 자기 돈(출판비용) 쓰고 욕이나 먹는 사람」이라고 해요』
 
  ―언젠가 「신약」 성경 마태복음 몇 장인가를 보니까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비판을 하지 말라」는 구절이 있습디다. 저는 그 대목의 「비판」을 「비난」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그야 어떻든 다른 학자들에 대한 李선생님의 비판이 너무 센 것 아닙니까.
 
  『중국 전국시대, 제자백가의 학설이 분분할 적에, 孟子가 특히 楊朱(양주)·墨翟(묵적)의 학설을 공박했습니다. 그 제자 하나가 「선생님께서 변설로써 남에게 이기기를 좋아한다(好辯)는 외부인사의 말이 있는데, 왜 그러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맹자는 「(邪說이 횡행하니) 마지 못해서 한 것이다」라고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나도 그러합니다. 다만 일부 사이비 학자들이 사료를 曲解·臆斷(억단)하여 역사의 진실을 매몰시키고 국민의 역사의식을 외곡 오도하는 실태에 대해 국사를 전공하는 老學으로서 그냥 방관·좌시할 수 없어 논박한 것뿐입니다』
 
  ―역사가가 되기 위해선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근세 중국 계몽사학자 梁啓超(양계초)의 견해 한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양계초가 그의 명저 「중국역사연구법」의 補編(보편)에서 역사가의 구비조건을 史德·史學·史識·史才의 순서로 강조했는데, 나는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가 제1의 구비조건으로 삼은 史德이란 과거 사실에 대해 불공평하지 않고 善惡의 표폄에 기필코 공정을 기하는 자세입니다.
 
  그는 부연 설명에서 「역사가는 무엇보다도 사실에 성실해야 할 것이니, 즉 과장·牽强附會(견강부회)·臆斷(억단)의 세 가지 병폐를 제거해야 역사가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史學은 역사를 연구하는 방법, 史識은 역사를 통찰하는 史觀, 史才는 역사를 쓰는 문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李선생은 참으로 博覽强記(박람강기)한 우리 시대의 대표적 학자다. 그는 「文史哲의 위기 시대」에 최후의 보루에 버티고 서 있는 지킴이인 것이다. 이제 그런 그가 어떤 성장 배경과 학문의 세계를 걸어 왔는지 추적해 볼 차례다.
 
 
 
 儒學家風을 계승시키려 했던 先親
 
  李載浩는 1920년 음력 11월17일 경남 함안군 代山面(대산면) 玉悅里(옥열리)의 중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載寧李氏 鉉郁(재령이씨 현욱)은 그때 나이 육순, 어머니 廣州安氏(광주안씨)는 마흔으로서 이미 슬하에 딸 여섯을 두었으니 재호는 그야말로 晩得(만득)의 외아들이었다.
 
  재호 소년은 일곱 살 때 面에 있는 4년제 代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때 벌써 「총명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인동에 자자했다. 학교에 다니는 여가에 이웃 마을의 외재종숙 樵山(초산) 안기원 선생에게 千字文(천자문)과 童蒙先習(동몽선습)을 배웠다.
 
  11세 때(1930)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20리 거리의 가야면 검암리에 사는 자형의 집에서 숙식하며 晩岩 安秉烈(만암 안병렬) 선생 문하에서 通鑑節要 7권을 수업했다.
 
  ―선친께서 외아들에게 일찌감치 하숙까지 시키며 漢學공부를 시킨 까닭이 무엇입니까.
 
  『할아버지께서 구한말에 과거에 응시하려고 시골에서 서울로 7, 8차례나 왕래하셨으나 끝내 합격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40여 세의 젊은 연세에 별세하신 것을, 失學無文(실학무문)한 아버지는 한평생의 恨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나를 學行이 겸비한 선비로 성취시켜 先代의 儒學家風(유학가풍)을 계승케 하려는 결심을 하셨어요. 이런 사정으로 어린 나를 객지에 보내 학업을 계속 정진토록 하고 四書 三經과 중국의 각종 서적을 구입해 주셨던 것입니다』
 
  12세 되던 봄에는 집에서 30리 거리의 산인면 대천동에 있는 寒泉齋(한천재)에 가서 晦泉 趙亨奎(회천 조형규) 선생 문하에서 「통감절요」 8권과 「大學」·「孟子」를 수업했다.
 
  『종전에는 스승이 글 뜻을 해석해 주면 수업자가 그대로 따라 복습 이해하는 주입식 교육 방법에 그치고 있었는데, 晦泉 선생께서는 논어에 나오는 不憤不啓 不♥不發(불분불계 불비불발), 즉 「마음속으로 통달하려고 힘쓰지 않으면 그 뜻을 열어 주지 않으며, 입으로 표현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그 말을 이끌어 주지 않는다」는 말씀을 강조하셨습니다.
 
  시쳇말로 하면 계발식 학습방법으로 저를 지도하여 문리를 해독, 自通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晦泉 선생의 교수 방법은 내 자신의 독해력 향상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그 후 내가 대학교단에서 후진들에게 原典을 가르칠 때 이를 그대로 교수지침으로 삼았습니다』
 
 
 
 13세에 결혼
 
  1932년 겨울, 재호 소년은 불과 13세의 나이로 창원군 퇴촌리에 사는 順興安氏 敎彰(순흥안씨 교창)의 맏딸 淑伊(숙이·당시 18세)와 결혼했다.
 
  『그때 나는 가야면 검암리에서 安晩岩 선생의 문하로 다시 가서 論語를 수업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겨우 13세의 나이여서 成婚할 수가 없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선친의 명령에 따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선친의 연세가 72세의 고령이고, 宿患(숙환)까지 있었으므로, 생전에 성혼시켜 손자를 보시려 했던 것입니다』
 
  14세 때 이재호는 가야면 聚友亭(취우정)에 가서 晦山 安鼎呂(회산 안정려) 선생 문하에서 「中庸(중용)」과 「詩經(시경)」을 수업했다.
 
  『晦山 선생은 淸貧自守(청빈자수)하고 學德이 높은 선비로서 老年에 귀향하니 학도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우리 고을의 학풍이 다시 떨쳐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非義不取(비의불취)하는 淸直性(청직성)이 나에게 큰 감화를 주었습니다』
 
  취우정에서 易經(역경) 제4권을 읽던 1936년 겨울, 李載浩는 선친이 위독하다는 기별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선친은 곧 향년 75세로 별세했다. 16세의 호주 李載浩는 이제는 집안일 때문에 외지로 나갈 수 없었다. 그로부터 10년간 監農(감농)하는 여가에 易經의 남은 부분과 史記, 續綱目(속강목), 莊子(장자), 楚辭(초사) 등 經史 外傳을 혼자서 두루 읽었다.
 
 
 
 나이 서른에 동국大 사학과에 입학
 
  1945년 8월15일, 日帝가 연합국에 항복했다. 그때 李載浩의 나이 26세였다. 오랜 지병으로 고생하던 어머니가 그해 9월에 별세했다. 1947년 8월, 28세의 그는 上京하여 대학에 입학하려고 애썼다.
 
  『가정형편과 시국 관계로 광복 전에는 시골에서 漢學을 공부했지만, 광복을 맞으니 新지식을 학습해서 우리 사회에 무엇인가 꼭 공헌하고 싶다는 심정이었습니다』
 
  이재호는 서울대학교 사학과의 청강생으로 입학하기를 희망했으나 대학당국에서 「資格不備」(자격불비)란 이유로 입학허가를 하지 않았다.
 
  『다음엔 고려大 사학과에 입학하기를 희망했으나 문과대학 李某 학장이 「영어시험에 합격해야 입학을 허가하겠다」고 하므로 1년 동안 밤에 영어강습소로 나가 영어를 배우고, 낮에는 고려大에 나가 청강생으로 중국철학사와 국사강독 등의 과목을 수강했습니다』
 
  1948년 9월, 이재호는 고려大 사학과에 별과생으로 응시 입학하려 했으나 李학장은 「전년의 약속을 어기고」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여곡절을 거쳐 1949년 9월 그는 서른의 나이로 동국대학교 「選科生」(선과생)으로 입학했다.
 
  『당시 교무처장 鄭斗石(정두석), 사학과장 閔泳珪(민영규) 선생이 입학을 주선하여 주었으며 입학한 후에도 나를 「老學生」이라 하여 특별히 우대하셨어요』
 
  그러나 그의 대학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1950년, 내 나이 서른한 살 때였죠. 민영규 선생의 지도를 받아 연구발표도 하면서 학업에 정진하고 있는데, 그만 6·25사변이 일어난 것입니다. 6월26일, 일찍 등교하니 동국大는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벌써 먼 곳에서 대포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원남동 하숙집으로 돌아와 귀향 준비를 했다.
 
  『6월27일, 기차표를 사려고 아침 일찍 서울역에 갔으나 헛일이었습니다. 나는 도보로 서울을 빠져나가기로 결심하고 고향친구의 아들과 다른 학생 하나를 데리고 한강다리에 이르니 벌써 날이 저물었어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겨우 한강다리를 건넜습니다』
 
  6월28일 새벽에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었으니 그는 아슬아슬하게 敵치하의 생활을 모면한 것이다.
 
  『흑석동 여관에 들어 눈을 붙이려는데 새벽 1시 무렵에 천지를 진동하는 「꽝」 하는 소리가 나서 방 안에 자던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모두 알몸 그대로 방 밖으로 뛰쳐나가서 몸을 숨겼지요』
 
  李載浩 일행은 아침 일찍 관악산을 넘어 水原까지 내려가 기차를 타고 삼랑진역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6월29일에 귀향했다. 고향 咸安에도 적군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는 가족을 데리고 김해군 진영읍 부근에서 노숙생활을 하는 등 석 달 남짓 피란살이를 했다. 당시 각 대학들은 임시수도 부산에서 수업하고 있었다.
 
  『나는 가정 형편 때문에 동국大에 복학하지 못하고 친구 鄭友鉉씨의 주선으로 마산고등학교 국사 담당 강사로 취직했습니다』
 
  이 무렵 정우현씨가 李선생에게 滄洲라는 아호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滄洲는 「큰 바닷가」라는 뜻이니 곧 가곡 「내 고향 남쪽 바다」의 무대 馬山을 의미한다. 그는 1953년 34세의 나이로 겨우겨우 동국大 사학과를 졸업했다.
 
  『동국大의 졸업장을 받은 그해 7월에 비로소 마산고등학교 정식 교사가 되었습니다. 당시 마산高에는 金春洙·金南祚 두 시인이 국어를 담당했으며, 나는 국사와 동양사를 맡았습니다』
 
  ―마산高라면 名門인데 쟁쟁한 제자들이 많겠죠?
 
  『그때 수재로 손꼽히던 제자들은 姜萬吉(고려大 한국사학과)·閔丙秀(서울大 국문과)·李萬烈(숙명女大 한국사학과) 교수와 서울大 외교학과 교수를 거쳐 총리를 역임한 盧在鳳 교수 등입니다』
 
 
 
 原典 강독 중심으로 지도
 
  1955년 그는 직장을 부산고등학교로 옮겼다. 마산高에서 함께 재직했던 朴龍圭 (영어)교사가 스카우트되어 부산高에 먼저 전임해 있다가 부산高 金夏得(김하득) 교장에게 그를 추천했기 때문이다.
 
  그는 부산高 재직 시절에도 부산대학교 사학과에 출강했다. 그의 소원은 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1958년 5월, 그는 부산大 사학과 전임강사로 부임했다. 그때 그의 나이 39세. 한국중세사를 담당하면서 학생들에게 原典강독을 중점적으로 지도했다.
 
  『초기에 수강한 학생으로 李源鈞(부경大)·李炳赫(부산大) 교수, 후기의 학생으로 金東哲(부산大)·田炯권(창원大) 교수가 원전 해독에 유능한 학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960년 겨울, 李載浩 전임강사는 부산大 한일문화연구소의 위촉을 받아 류성룡의 징비록 16권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상·하 2책으로 출판했다. 1962년에도 같은 연구소의 위촉으로 申叔舟(신숙주)의 海東諸國記(해동제국기)와 金綺秀(김기수)의 日東記遊를 번역 출판했다.
 
  1968년 11월, 부인 順興安氏가 오랜 투병 끝에 별세했다.
 
  『내 학교생활을 뒷바라지하고 자녀들의 학비를 조달하는 데 너무 고심했던 탓인지 자기 몸에 난치병을 얻어 2남 3녀를 남기고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나도 앓아 누워 그해 2학기엔 학교에 못 나가 휴강을 했어요』
 
  다음해 李선생은 50세의 나이로 14세 연하의 廣州李氏(광주이씨)를 재취부인으로 맞았다.
 
  그는 조교수(1964), 부교수(1972), 교수(1979)를 거쳐 1985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다른 보직을 맡지 않고 교수로서 학생지도와 연구생활로 일관했다. 1976년 그는 한문고전의 硏讀(연독)을 지도하기 위한 한문고전연구회를 만들었다.
 
  『한문고전연구회는 내가 부산을 떠날 때까지 계속 지도하여 통감절요·續綱目과 丁茶山의 大學公議까지 완독했습니다』
 
  ―1977년에 발생한 사육신 왜곡사건이 발생했을 때 李선생님께서 비판적인 글을 많이 쓰셨죠.
 
  『나는 「破邪顯正」(파사현정)이라는 논설 등을 여러 신문에 기고했어요. 또 「사육신 정정론의 허점」이란 논문을 작성하여 「釜大 논문집(제26집)」에 발표하고, 국사편찬위원회의 부당한 오판을 논박, 이의 시정을 촉구했습니다』
 
  당시 몇몇 학자들은 死六臣 중 兪應孚(유응부)를 金文起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병도 박사의 저술인 「한국사대관」에도 김문기가 사육신으로 올랐다. 국사편찬위원회도 사육신 문제를 심의, 김문기를 사육신으로 결정했다. 李載浩 교수는 「曲學阿世(곡학아세)한 異論者들의 妄說(망설)」이라고 논박했다.
 
  ―그때 고생 좀 하셨죠.
 
  『협박하는 전화가 많이 걸려 왔습니다. 집사람은 전화소리만 나면 깜짝깜짝 놀라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어요. 』
 
  ―그때 권력기관으로부터 압력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권력기관의 직접적인 압력은 없었지만 내게 항의 편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들이 권력기관의 비호를 받고 있는 듯한 냄새를 풍기며 협박·공갈을 했습니다. 한때는 겁이 나서 밤에 다방에도 못 다녔습니다』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는 얘기군요.
 
  『그때 부산에 있던 친구들인 朴智弘·李泰吉·崔東元 교수의 격려가 없었다면 견디기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가면 그때 이장한 김문기公의 묘가 아직도 그대로 있습디다. 그렇다면 死六臣墓가 아니라 「死七臣墓」가 되어버린 것 아닙니까. 아무튼 김문기公을 사육신으로 인정한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정은 그 후 뒤집어졌죠.
 
  『事必歸正(사필귀정)이지요』
 
 
 
 정년퇴임 후에도 명예교수로 왕성한 연구활동 벌여
 
  李載浩 교수는 1985년 정년퇴임 후에도 부산大 대학원에서 후진들에게 국사원전강독을 계속 지도했다. 1987년, 그의 나이 68세에 정신문화연구원의 객원교수로 부임하면서 경기도 성남시 운중동 소재 교수사택으로 이사를 했다. 「정문연」에서는 부속 한국학대학원에서 후진들에게 「左傳」 등의 원서강독을 지도하면서 栗谷全書(율곡전서)와 肅宗實錄(숙종실록) 번역작업을 교열했다. 4월7일에는 미국 버클리大 한국학연구소의 초청으로 국제학술대회(임진왜란-풍신수길의 한국 침략)에 참석, 「임진왜란과 류서애의 자주국방정책」이란 논제로써 발표했다.
 
  그해 12월에는 이화여대 약학과에 응시한 막내딸(4녀) 允姬가 전교 수석의 성적으로 합격했다. 2남 4녀를 두었지만, 자녀가 모두 결혼하여 따로 살고 老부부 둘이서만 서울 성산동 시영아파트에 산다. 의사인 장남은 부산에서 개업을 하고 있고, 불문학 전공인 차남은 프랑스에 유학하여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현재 대학 강사 자리를 물색하고 있다고 한다.
 
  1989년에는 정문연의 근무를 끝내고 현재 거주하고 있는 성산동 시영아파트로 이주했고, 1990년에는 고려대학교 대학원에 출강하여 후진들에게 한문특강 「史記列傳」을 지도했다. 73세가 되던 1992년에는 부산대학교의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76세가 되는 1995년 1월에는 「조선정치제도사연구」(일조각 刊)를 간행했다. 李선생의 전공 분야 논저이다. 그동안 한국사의 왜곡된 부분을 정정하는 일에 주력한 탓으로 전공분야의 작업이 늦어졌다고 한다.
 
  그해 4월28일 충무공 탄신 450주년 학술대강연회(온양아산문화재위원회 주최)에서는 「滅敵救國한 이순신의 偉績-특히 元均 관계의 曲筆에 대한 辨駁」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이어 7월20일에 부산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 5월, 수년 전부터 작업해 오던 「國譯 西厓全書」를 발간했다. 이 책에는 서애의 저술인 「懲毖錄」(징비록), 「芹曝集」(근폭집), 「辰巳錄」(진사록), 「軍門謄錄」(군문등록), 雜著(잡저), 書簡(서간) 등 7책을 번역하여 묶은 것이다. 이렇게 李선생은 아직도 젊은 학자 못지않게 학문에 정진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 왜곡을 못 참는 성격은 여전하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는 우리 속담 있지 않아요? 나는 역사歪曲을 보고 바로잡지 못하면 밤에 잠이 안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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