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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착취재] 누드모델의 세계

무대에 서기 전 반드시 샤워를 하는 뜻은…

서철인    iron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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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은 인간의 몸이라고 한다. 그 몸을 드러내기 위해 날마다 옷을 벗는 이들이 있다. 때만 되면 예술이니 외설이니 하는 시비와 논쟁에 휘말려 곤욕을 치르고도「예술 도우미」라는 자부심으로 사는 사람들. 누드모델의 세계에 미술전문모델 이정숙씨와 사진모델 하영은씨의 안내로 들어가 보았다
무대에 서기 전 샤워는 일종의 세리머니
유명 사진 작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톱모델 하영은씨.
  이른 아침. 주부이자 한국미술모델협회 회장인 이정숙씨의 손길이 분주해진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를 깨워 등교시키고 남편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나면 여느 주부들처럼 설거지에 청소며 빨래 같은 집안 일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뜸들이거나 뒤로 미루는 일 없이 일사불란하게 척척 해낸다. 그 솜씨가 영락없는 「살림 9단」 주부다.
 
  그런 李씨가 주부의 옷을 벗고 누드모델로서 프로페셔널한 日課(일과)를 시작하는 시간은 대략 오전 9시쯤. 그날 그날의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아침 시간이 규칙적이지는 않다.
 
  오늘 그녀의 스케줄은 하나. 강남에 있는 모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두 시간짜리 누드 크로키 수업을 진행하는 일이다. 지도 강사가 따로 있지 않고, 모델인 그녀가 주도하는 강좌다. 이같은 강좌는 수강생들의 그림 실력이 중급 이상의 수준에 도달했을 때 가능하다.
 
  집을 나서기 전 그녀가 하는 일은 정성들여 샤워를 하는 것이다. 청결한 몸은 수강생들에 대한 기본 예의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컨디션 조절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경력 24년차인 그녀에게 샤워는 단순히 몸을 씻어 내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마음까지 정갈하게 씻어 내고 비워 내는 일종의 儀式(의식)이다.
 
  『모델의 컨디션이 좋고 나쁘고는 작업하시는 분들이 먼저 알아봐요. 몸의 動線(동선)이나 흐름에 워낙 민감한 분들이라서 숨길 수가 없습니다.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단박에 「어디 몸이 안 좋은 거 아니에요?」하며 항의해 오는 경우가 많아요』
 
  일반 수강생이건 전문 작가이건 그날 그날의 작업 분위기는 모델이 얼마나 일에 몰두했는가에 의해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건강 관리뿐만 아니라 마인드 컨트롤에도 철저해야 한다.
 
  李씨가 문화센터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1시20분. 수강생들이 하나 둘 入室(입실)하는 동안 그녀는 옷을 벗고 가운을 걸친 채 대기 중이다. 강의실은 열두 평이 될까 말까 할 정도로 작고 아담하다. 수강생은 모두 열두 명. 이 중 남자가 두 명이다. 여느 강좌에 비하면 남자 수강생 수가 적은 편에 속한다.
 
  누드모델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옷을 벗는 행위」라는 데 갖는 호기심은 여전하다. 작가나 학생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異性(이성)의 몸을 과연 「정물」로만 볼 것인가에 쏠려 있는 듯하다. 그녀는 일반인들로부터 『작가들 중에는 性的인 흑심을 품는 이도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심심치 않게 받는다.
 
 
 
 눈길이 순수하지 않을 때의 퇴치 방법
 
  『솔직히 20년 전에는 귀찮게 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근데 요즘에는 없어요. 간혹 좀 이상한 포즈를 요구하는 분들이 있긴 하지만 추근대는 정도는 아니에요. 美大生들의 경우 한창 혈기왕성한 때여서 그런지 그림보다 벗은 몸에 더 관심을 갖는 학생이 가뭄에 콩 나듯 있는데 그럴 땐 나름대로 퇴치법이 있습니다. 보내 오는 눈길이 순수하지 않다 싶으면 그 학생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예요. 그러면 스스로 무안해져 시선을 거두거나 아예 자리를 뜹니다』
 
  무대에 서 있는 동안에는 서로 무안해지기 때문에 작업하는 이와 눈을 맞추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이런 경우는 예외다.
 
  수강생을 제외한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는 가운데 李씨가 마침내 걸치고 있던 가운을 벗고 무대 위에 올라선다. 不惑(불혹)을 훌쩍 넘긴 여자 치고는 군살도 없고 탄력이 느껴지는 몸매다. 하지만 요즘 젊은 여성들이 꿈꾸는 바비 인형 형 체형과는 좀 거리가 있는, 지극히 동양적인 몸이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적당히 살집도 있는 편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몸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도 당당할 수 있는 자신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모델 경력 24년의 베테랑인 그녀는 인체가 어떤 동작을 취했을 때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녀의 공연장인 가로 2m 세로 1m 정도의 무대 양쪽에는 전기 스토브가 켜 있다.
 
  『전기 스토브는 계절과 상관없이 항상 필요합니다. 추우면 몸이 경직되어 자연스런 동작을 취할 수 없거든요. 그러고도 감기에 걸리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한여름에는 에어컨 때문에 冷房病(냉방병)으로 고생하기도 하구요』
 
  허리와 다리를 구부렸다 폈다 하는 동작이 많은 모델들에게 디스크나 관절염은 흔한 직업병이다. 스트레칭을 생활화하지 않으면 모델로서의 생명은 끝이다. 패션모델 못지않게 몸관리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본격적인 포즈 연출이 시작되자 좁은 강의실은 「슥슥 삭삭」 연필 소리와 「소스락 사스락」 스케치북 넘기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반복된다. 수강생들의 스케치북은 그녀의 포즈가 바뀔 때마다 한장 한장 채워져 간다.
 
  『포즈는 특별한 주문이 없는 한 저희가 알아서 취합니다. 작업하시는 분의 숙련도에 따라 30초 간격으로 바꿀 때도 있고, 1분이나 2분, 길 경우 5분에 한 번씩 바꿀 때도 있습니다』
 
  2분마다 동작을 바꾼 오늘 수업에서 두 시간 동안 그녀가 연출한 포즈는 약 50가지. 그녀가 얼마나 다양한 느낌을 주는 모델인지는 스케치북 한 권이 그대로 圖錄(도록)이 된 수강생들의 작품에서 쉽게 읽을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작가 고유의 情緖(정서)와 內面(내면)이 스며 있는 작품을 볼 때가 그녀는 가장 즐겁고 행복하다.
 
 
 
 남자모델을 에워싼 주부들의 열기
 
   다음날은 같은 협회 소속 모델인 임진태씨가 무대에 서는 날. 江東에 있는 한 백화점 문화센터內 강의실은 전날 李씨가 작업했던 곳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우선 공간이 훨씬 넓은 데다 수강생들의 자리가 무대를 에워싸고 있어 모델이 어떤 자세를 취해도 全身(전신)이 노출되도록 되어 있다. 게다가 20여 명에 이르는 수강생 전원이 30代에서 50代에 이르는 주부들이다. 지도 강사인 서양화가 이은기씨는 남자모델이 무대에 서는 날은 출석률이 100%라고 귀띔한다.
 
  『초급반이어서 그런지 모델이 여자일 경우, 수강생들의 집중도가 많이 떨어져요. 강의실 분위기가 확연하게 구분될 정도로 산만합니다. 반면에 남자모델이 오면 벌써 연필소리부터가 달라요. 강의실 분위기가 아주 좋습니다. 生命力으로 가득찬 젊은 남자의 싱싱하고 건강한 몸에서 그리고자 하는 에너지를 수급받는 것 같아요』
 
  임씨는 남자모델 중 특A급에 속한다. 키 176cm에 몸무게 72kg의 체격 조건을 갖춘 그는 한국 남자 치고는 보기 드물게 하체가 긴데다 피부가 깨끗하고 탄력이 있다. 전체적인 몸의 균형과 비례가 서구 스타일인데다 근육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을 만큼 적당히 붙었다. 한 마디로 누드모델을 하기에는 가장 스탠더드한 체형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옷을 벗고 무대에 선 그의 몸은 살아 있는 다비드像(상)처럼 수려하고 아름답다.
 
  『피부나 골격은 타고 난 것 같고, 근육은 운동이라면 뭐든 좋아해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한 게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육상 선수로 활약했고, 중고등학교 때는 태권도와 축구를 쉬지 않고 했거든요. 헬스는 하고 싶어도 시간과 돈이 없어서 못했는데 결과론적으로 그게 오히려 누드모델 하기에는 좋은 점으로 작용한 것 같아요.
 
  모든 걸 몸으로 표현해야 하는 누드모델은 무용수와 마찬가지로 근육이 너무 많을 경우 표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근육이 물처럼 흘러야 할 몸의 흐름을 막아 아무리 다양한 포즈를 취해도 그 느낌이 한 가지로 고착되기 때문이죠』
 
 
 
 근육질 모델은 作家들도 부담스러워해
 
  근육이 많은 모델은 작가들도 부담스러워한다. 그렇지 않아도 돌출 부위가 많은 남자의 몸은 「해석」하는 데만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근육까지 울퉁불퉁하면 표현 요소가 너무 많아 전체적으로 산만한 작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리스 조각상을 닮은 모델만이 A급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어떤 작가는 자코메티의 조각처럼 바짝 마른 모델을 선호하는가 하면, 어떤 작가는 스모 선수처럼 살집이 풍만한 모델을 좋아한다.
 
  대체로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을 드러내는 데는 마른 체형이 낫고,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표현하고자 할 때는 살집이 좀 있는 몸이 좋다는 게 인물화 전문 작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은 임씨가 특A급 대우를 받는 것은 표정이 풍부한 몸과 喜怒愛樂(희노애락)을 표현할 줄 아는 테크닉을 갖추고 있어서다.
 
  『저는 작가의 취향과 개성을 피부에 와 닿는 시선과 연필 소리로 읽습니다. 이 일을 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읽는 데 청각과 촉각이 얼마나 중요하고 예민한 기관인지 알게 되었죠. 덕분에 작가가 원하는 포즈를 이야기하기 전에 제가 먼저 알아서 취해 주니까 다른 모델보다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진지하고 열의에 찬 강좌가 끝난 게 오후 2시30분. 중간에 가진 휴식 시간 10분을 빼더라도 두 시간 동안 꼬박 무대에 서 있었건만 그는 지친 기색이 전혀 없다. 개강 첫날이라며 수강생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는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처음에 수강 신청을 할 때는 막연히 남자의 벗은 몸을 봐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쑥스럽고 부담스러웠는데 막상 눈앞에서 대하고 보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고 경건해지기까지 했다』는 게 한 초보 회원의 소감이다.
 
  『처음 무대에 섰을 때는 저도 굉장히 힘들었어요. 긴장감 때문에 식은땀도 많이 흘렸고, 또 중간에 다리에 쥐가 나기도 했습니다. 겨우 30분짜리였는데도 끝나고 나서는 몸살을 앓았을 정도로 상태가 나빴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스트레칭을 제대로 안 한데다 호흡 조절에 실패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경미한 근육마비 증상은 지금도 종종 나타난다. 하지만 그때처럼 당황하거나 식은땀을 흘리지는 않는다. 무대에 서기 전날밤 충분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 조절을 통해 수축과 이완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밥을 먹건 길을 걷건 瞑想(명상) 수련을 하듯 단련한 호흡 조절 덕분에 그는 시간을 재지 않고도 포즈를 바꿔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정확히 가늠할 수 있다.
 
  『저 같은 경우 호흡수가 보통 1분에 15회 정도 됩니다. 때문에 오늘 강좌처럼 5분마다 한 번씩 동작을 바꿔야 할 때는 호흡수를 75회까지 센 후 새 포즈를 취하면 정확해요』
 
  작업 시간이 긴 彫塑(조소: 조각의 원형을 만듦) 강좌의 경우 무려 6시간 동안 무대에 서 있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그는 쉽게 지치지 않는다. 술 담배는 물론 건강에 해로운 음식은 절대 입에 대지 않을 정도로 건강관리에 철저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과 즐거움 때문인 듯하다. 그는 太初(태초)의 인간인 아담의 몸으로 千(천)가지 표정을 창조하는 또 다른 예술가다.
 
 
 
 누드모델 커플 제1호의 만남
 
   이정숙씨와 임태진씨는 지난 1월에 결혼한 부부다. 누드모델 커플 제1호인 이들의 나이 차이는 무려 열두 살. 게다가 연상의 李씨는 再婚(재혼)이고 임씨는 初婚(초혼)이다. 집안의 반대가 적지 않았을 법한데 둘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입을 모은다. 하긴 반대가 있었다 해도 누드모델로서 자신들이 견뎌 온 세상의 편견과 수근거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터이다.
 
  『시어머님을 빼곤 시댁 식구들 모두 저희 부부가 어떤 일을 하는지 다 알고 있어요. 그냥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저희 못지않은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시어머님한테만 비밀로 하고 있는 이유는 유교 사상이 워낙 깊이 배어 있는 분이어서 충격을 받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입니다』
 
  본의 아니게 시어머니를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에 그녀는 여느 며느리보다 더 살갑게 대하려 몇 배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 李씨가 남편 임씨를 처음 만난 건 1998년. 미술 전문 누드모델들의 친목 단체인 한국미술모델협회를 발족한 직후다. 이 무렵은 IMF로 인한 생활고를 극복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협회의 문을 두드렸다. 등록금을 벌기 위한 20代 대학생에서부터 30, 40代 주부들까지 너도 나도 누드모델이 되겠다는 상담 전화 때문에 협회 사무실 전화가 불이 날 지경이었다.
 
  『태진씨가 직접 사무실까지 찾아왔을 때는 이미 모델이 차고 넘쳐서 무조건 거절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도 태진씨만큼은 쉽게 돌려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모델이 되고자 하는 의지가 워낙 확고부동한데다 체형도 좋았고, 말투며 인상이 아주 순수하고 성실해 보였기 때문이에요』
 
  집이 전북 군산인 임씨는 軍에서 갓 제대해 당시 起居(기거)할 곳도 마땅치 않은 상태였다. 사정을 눈치 챈 李씨는 그를 사무실 한켠을 막아 생활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었다. 그 때문에 매일 얼굴을 대하게 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세상살이의 고달픔을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다.
 
  李씨가 누드모델에 입문한 것은 국악예고를 졸업하던 1980년. 인터넷이나 각종 매체를 통해 포르노가 범람하는 요즘 같은 때에도 누드모델에 대한 일반인들의 시선이 곱지 않은 걸 감안하면 그 당시 그녀가 감당해야 했던 사회적 편견과 선입관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버거웠다.
 
  『그 무렵에는 누드모델의 수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략적인 수치와 통계를 낼 수 없을 만큼 각자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숨기고 생활했어요. 얼굴이 알려지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정도로 누드모델에 대한 인식이 나빴으니까요. 저 같은 경우 홍익大 전속 모델로 활동했는데, 美術大 내에서만 누드모델이었을 뿐 밖에서는 그냥 사무직에 근무하는 평범한 교직원인 것처럼 행동하며 지냈습니다. 교제 중이던 남자에게도 결혼 직전에야 사실을 밝혔죠』
 
  다행히도 이해심이 많은 남자를 만나 결혼에 골인한 그녀는 임신과 출산 때만 잠시 쉬었을 뿐 꾸준히 활동했다. 누드모델의 권익을 보호하고 직업적으로 전문화하기 위한 단체 설립에도 앞장섰다. 그 와중에 사업에 실패한 남편과 금전적인 문제로 이혼하는 아픔을 겪었다.
 
  李씨가 자신의 막냇동생뻘인 임씨에게 속내를 편안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던 건 그가 나이답지 않게 잘 받아 주고 위로해 주었기 때문. 임씨가 또래보다 이해심이 많고 남의 얘기를 잘 들어 주는 건 매사에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천성과 전직 간호사로 근무한 경험 덕분인 것 같다.
 
  『고등학교 졸업 후 정신과 병원에서 간호 조무사로 일했어요. 이때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다 상처가 있다는 걸 알았고, 그것이 겉으로 어떻게 표출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軍 제대 후 누드모델이 되어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누구보다 내가 인간의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 때문이었습니다』
 
  누드모델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접하게 된 건 軍에 있을 당시 李씨가 출연한 한 시사 토크쇼를 보고 나서였다. 『인체는 조물주가 창조한 가장 아름다운 자연』이라며 『누드와 나체는 엄연히 다르고, 어디서 벗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정해진다』는 李씨의 말에 그는 깊이 매료되었다. 李씨에 따르면 나체는 단순히 알몸을 드러내는 상태를 뜻하고, 누드는 건강하고 순수한 정신까지 수용한 몸을 말한다.
 
  李씨는 올해로 5년째 협회 살림을 꾸려오고 있다. 회원이면서 동시에 회장인 그녀가 관리하고 있는 회원은 남편까지 포함해 현재 총 19명. 이들은 수도권에 있는 미술대학과 각 기관 단체에서 운영하는 문화센터 및 크고 작은 작가 동호회 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세계 최초의 누드모델 관련 단체
 
   현재 한국에 결성되어 있는 누드모델 관련 단체는 두 개. 한국미술모델협회(이하 「미모협」)와 그보다 2년 먼저 발족한 한국누드모델협회(이하 「누모협」)가 그것이다. 이 두 단체는 활동 영역상 겹치는 부분이 많으면서도 성격이 많이 다르다.
 
  우선 두 단체의 활동 폭이 좀 다르다. 미모협이 모델 활동 영역을 순수 미술에만 제한하고 있는 반면, 누모협은 순수 미술은 물론 사진, 광고, 퍼포먼스까지 모든 예술 장르를 다 소화한다. 때문에 규모면에서 누모협이 훨씬 크다. 이 단체에 籍(적)을 두고 있는 회원만 현재 500여 명에 이른다. 얼마 전, 모 우유 업체의 신제품 홍보에 동원되었던 세 명의 여자모델도 이 단체 소속이다.
 
  세계 최초이자 한국 최초의 누드모델 단체임을 자부하는 누모협은 단순히 친목 단체인 미모협과 달리 공식적으로 인가를 받은 사회 단체다. 1996년 창립한 이후 7년 동안 이 단체를 이끌고 있는 이는 올해로 모델 경력 16년째인 하영은 회장. 그녀는 누드모델로서는 처음으로 대중에게 얼굴을 공개해 오래 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인물이다. 또한 유명 사진 작가들이 지금까지도 가장 선호하는 톱 모델이기도 하다.
 
  『1988년 500여 명의 사진 동호인들 앞에서 다른 세 명의 모델과 함께 포즈를 취한 게 데뷔 무대였어요. 돈 때문에 시작한 일이어서 그땐 하늘이 노래질 정도의 수치심에 괴로워했습니다. 그런데 「앵글을 통해 보는 누드는 사람이 아니라 仙女다」라는 사진 작가들의 순수함 덕분에 수치심까지 벗고 나니까 저 또한 나뭇잎이나 잠자리처럼 자연의 일부가 된 듯 묘한 희열이 느껴지더군요』
 
  이후 하씨는 수많은 작가들에게 여왕 대접을 받으며 즐겁게 일해 온 한편, 당당하고 떳떳한 직업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자신이 먼저 팔을 걷어붙였다. 「얼굴 공개는 곧 사회적 매장」이라는 누드모델 세계의 禁忌(금기)를 깨고 자신을 드러낸 것이다. 아울러 단체 결성을 통해 누드모델을 유흥업 종사자들과 연결지으려는 사회적 편견과 맞서 싸울 것을 선언했다.
 
  『협회 설립 허가를 받기 위해 시청에 갔을 때 담당 직원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아세요? 한마디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들이더군요. 등록 준비 서류는 아예 검토해 볼 생각도 없이 스트립 걸이나 포르노 배우를 대하듯 피식피식웃기만 하더라구요. 공무원들의 왜곡된 편견 때문에 협회를 창립하게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몰라요』
 
  우여곡절 끝에 협회가 창립되고도 그녀는 한동안 세상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시도 때도 없이 관할 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는가 하면 국가정보원의 요원으로부터는 사회 풍기문란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內査(내사)까지 받아야 했다. 사무실을 이 잡듯이 뒤지고 회원들의 주변을 샅샅이 수사해도 풍기문란죄로 몰아붙일 만한 단서가 없자 할 말을 잃은 요원은 『건전한 직업이구만』이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갔다.
 
 
 
 『고추를 좀 세워 보라』
 
   협회가 누드모델들의 창구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자 등록회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하지만 얼굴을 공개하겠다는 모델은 여전히 극소수에 불과했다. 충분히 예상했던 한계였기에 그녀는 흔들리지 않고 누드모델의 세계를 알리는 데 주력했다. 협회 창립 기념일 공연으로 대대적인 누드 퍼포먼스를 가졌고, 그 다음해에는 누드 사진 촬영 대회를 열기도 했다.
 
  『경남 마산에서 열렸던 사진 촬영 대회 때는 처음으로 남자모델 두 명을 일반 참가자들에게 공개했어요. 그 때문인지 아마추어 여류 작가들이 대거 참석했는데 작가로서 자질이 의심되는 몇몇 아줌마들이 남자모델들에게 「고추를 좀 세워 보라」는 등 수치심을 자극하는 말을 해 모델들이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일로 현장에 있던 남자 작가들과 여자 작가들 간에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어요. 너무나도 非상식적인 말과 행동에 참 어이가 없더군요』
 
  모델들에게 묘한 포즈를 요구하거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작가는 그 후로도 종종 있었다. 그녀는 그때마다 잘잘못을 따지고 모델에게 사과할 것을 요청했다. 또한 다음에도 그런 일이 있을 때에는 모델을 보내지 않겠노라고 못을 박기도 했다. 그 결과 모델에 대한 작가들의 예우가 조금씩 달라진 반면, 그녀는 「어린 게 건방지다」는 이미지로 굳어져 갔다.
 
  모델들의 억울함을 대변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싸움꾼」이 되어 가더라는 하영은씨. 그녀는 또 다른 사회의 장벽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 얼마 전 서울 인사동에서 벌인 누드 퍼포먼스를 「공연 음란」으로 규정, 출연 모델 두 명을 각각 벌금 200만원에 약식 기소한 검찰과의 싸움이 바로 그것이다.
 
  모 우유 업체의 신제품 홍보를 위해 기획된 이 행사는 두 명의 모델이 요구르트를 서로의 몸에 뿌리는 퍼포먼스 공연으로 진행되었다. 누드 퍼포먼스 치고는 단순했던 이날 행사에 대해 검찰이 「공연 음란」이라는 혐의를 씌운 데 대해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검찰 쪽 주장은 「관객들이 모델의 벗은 몸을 충분히 관찰할 수 있는 거리와 밝은 조명 상태에서 행위가 이뤄져 불특정 다수의 관객들에게 性的 수치심을 일으킨 점이 인정됐고, 공연 목적이 다분히 상업적이어서 예술행위로 보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두 모델이 누드로 워킹을 하고 분무기로 서로에게 요구르트를 뿌렸을 뿐인데 도대체 어떤 동작이 「음란 행위」이고 관객들로 하여금 수치심을 느끼게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어요. 검찰 쪽에서는 음부를 노출시켰다고 하는데, 여자의 음부는 깊숙이 숨어 있기 때문에 벗었다고 해서 무조건 드러나는 부위가 아닙니다. 일부러 드러내려고 특정 동작을 취하지 않는 한 말이에요』
 
  하씨는 이번 공연의 최고 책임자인 기획자와 연출자보다 모델들에게 더 무거운 혐의를 씌우는 까닭이 납득되지 않는다. 또한 검찰 소환 당시 진술서를 거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지하지 않은 채 무조건 쓰게 한 다음 「사인」을 하게 한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모델들이 힘도 배경도 없는 弱者(약자)여서 당하는 설움이라는 생각에 속상하고 억울하기 이를 데 없다. 싸우는 게 힘들다고 모든 혐의를 그대로 인정할 수는 없는 일. 그녀는 벌써 변호사를 선임해 약자로서의 억울함을 풀 준비를 하고 있다.
 
 
 
 누드모델의 자격 조건
 
  공식 협회 출범과 직업에 대한 인식이 좀 달라지면서 IMF 이후 수적으로 엄청난 팽창을 보였던 누드모델界는 최근 몇 년 동안 답보 상태다. 인터넷의 보급과 성인 문화의 범람이 그 원인인 듯하다.
 
  직업에 대한 자부심보다 돈이 먼저인 신세대 모델들의 경우 미술이나 사진 쪽보다는 인터넷 성인 방송의 VJ(비디오자키) 쪽을 택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술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존 모델들까지도 성인 방송 쪽으로 흘러들어가는 예가 빈번해지고 있다. 이에 대한 하씨의 대응은 강력하다.
 
  『저희에게도 인터넷 성인 방송 쪽에서 좋은 모델 하나만 추천해 달라는 전화가 자주 옵니다. 캐스팅비 1000만원에 협회에도 찬조금을 주겠노라며 아주 적극적으로 나오는 방송사들이 많아요. 설사 1억원을 준다 해도 性을 파는 일은 하지 않는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하곤 하는데, 그러면 대뜸 『당신이 뭔데 모델들이 돈벌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막느냐』며 소리를 지르더군요. 저희 회원들의 개인 신상은 모두 제가 관리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성인방송 쪽으로 간 모델은 없습니다. 그쪽에서 우리 쪽으로 온 모델도 없구요』
 
  그녀는 회원들의 전화번호나 주소를 어느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는다. 모델 요청이 들어와도 모두 자신을 거쳐 섭외가 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협회에 등록하기를 원하는 모델의 경우 철저히 심사한 후 받아들인다. 초보인 경우 순수 누드모델로서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심지가 굳은지를 살펴보고, 경력인 경우 혹 성인방송 쪽에서 온 게 아닌지 확인한다.
 
  『저 같은 경우 몸만 보아도 그 사람이 살아온 來歷(내력)이랄지 習性(습성)을 읽을 수 있어요. 저에게 에로배우가 좋다 나쁘다는 평가를 할 자격이 없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해요. 에로배우는 그 나름의 습성 때문에 누드모델로 활동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사실이에요』
 
  미모협이나 누모협이나 모델의 자격 조건은 비슷하다. 여자는 키 155cm 이상에 몸에 큰 흉터나 피부 질환이 없으면 되고, 남자는 175cm 이상에 털이 지나치게 많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남자건 여자건 에너지 소모가 많은 일이어서 체력적으로 강해야 한다.
 
  나이는 상대적으로 수요가 많은 20代가 가장 좋으나 30, 40代는 물론 70代까지도 가능하다. 누모협의 경우 현재 20代부터 60代 모델까지 골고루 등록되어 있다. 주름이 많은 노인을 묘사하고자 하는 작가가 종종 있어 요즘에는 70, 80代 모델을 찾고 있는 중이다.
 
  『누드모델이 되기 위해서는 외모보다 중요한 게 사실 성실성이에요. 작가들에게 시간은 곧 돈이기 때문에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모델은 경계 대상 1호입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교육하고 강조하는 게 성실성이에요. 테크닉 교육은 그 다음입니다』
 
  「예술 도우미」로서 기본적인 소양이 갖추어지면 곧바로 현장에 투입되는데, 미술 분야에서만 일하는 미모협 소속 모델들은 美術大와 문화센터 위주로 일터가 제한되어 있는 반면, 누모협 소속 모델들은 방송, 영화, 패션, 출판 등 인체를 필요로 하는 곳은 다 나가기 때문에 훨씬 광범위하다. 하씨의 경우 홈쇼핑 업체 속옷 모델과 분유 업체 지면 광고 모델 등으로도 이름을 떨쳤다.
 
 
 
 남녀 모델의 生理的 사고
 
  옷을 벗고 하는 일이다 보니 일반인들의 일터에서는 보기 힘든 事故도 종종 있다. 남자모델의 경우, 일반인들이 가장 호기심을 가질 만한 勃起(발기) 문제를 예로 들 수 있다. 사실 남자들의 생리상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일부러 발기시키려 해도 쉽게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본능적으로 발기가 이루어지는 때가 있으니 사고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임진태씨의 경우 눈을 감고 있으면 발기가 잘 돼 눈을 감는 포즈는 벌써 오래 전부터 금기사항이 되었다.
 
  『대개 잡념이 많을 때 자신도 모르게 발기가 되는 것 같아요. 그럴 땐 본인은 물론 작가들도 놀라고 당황하게 되는데 어떻게 하든 스스로 가라앉히는 방법밖에 달리 해결법이 없습니다. 저 같은 경우 발기 조짐이 오면 혀를 깨물어 해결하는데 애국가를 부른다거나 어머니 얼굴을 떠올리며 가라앉힌다는 모델도 있어요』
 
  여자모델들 역시 생리 현상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가 가장 큰 사고다. 특히 생리 주기가 불규칙한 모델의 경우, 포즈를 취한 채 갑자기 시작된 생리 때문에 당황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처리법은 하나밖에 없다. 중간에 무대에서 내려오는 일은 더 큰 사고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부탁해 삽입형 생리대를 구해 착용하는 수밖에 없다.
 
 
 
 모델료 시간당 2만5천~3만원
 
  미모협 회장 이정숙씨에 의하면 미술 쪽 모델료는 지난 10년 동안 큰 변동 없이 시간당 2만5000원에서 3만원대를 유지해왔다. 그 동안 오른 物價를 생각하면 최하 5만원 정도는 되야 하는데, 계속 같은 가격대에 머물러 있는 이유가 뭘까. 李씨의 대답이 씁쓸하다.
 
  『일을 따내느라 「제 살 깎아먹기」식 경쟁을 했기 때문이에요. 돈을 벌 목적으로 생각없이 뛰어든 사람들이 기존 모델들과 능력으로 싸워서는 승산이 없으니까 모델료를 다운시키는 것으로 승부를 건 것이죠. 결국 올리는 사람 따로 내리는 사람 따로 있다 보니까 늘 같은 가격대에 묶여 있었던 겁니다』
 
  모델료는 경력에 상관없이 다 똑같다. 다만 연기력과 성실성에 따라 일이 많은 모델이 있는가 하면 적은 모델이 있을 뿐이다. 일주일에 보통 20시간씩 무대에 서는 李씨의 경우 한 달 수입은 200만원에서 250만원 선이다. 경력이나 노고에 비하면 그리 많지 않은 돈이다.
 
  방송이며 광고까지 소화하는 하영은씨는 그래도 사정이 좀 낫다. 수입 공개를 함부로 하지 않는 게 철칙이라는 그녀에 의하면 사진은 미술 쪽보다 단가가 10배 쯤 높고, 광고는 그때 그때 계약을 하기 때문에 천차만별이지만 최소한 사진 단가의 수십 배는 족히 되지 않을까 싶다.
 
  李씨와 하씨는 이렇듯 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서로 다른 산맥을 형성해 왔다. 그러나 두 사람이 최종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는 크게 다르지 않다. 늙어서도 더욱 당당하고 멋진 모습으로 무대에 서고 싶다는 꿈이 바로 그것이다.
 
  세상의 편견과 오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지켜가는 두 사람에게 예술이냐 외설이냐의 시비와 논쟁은 「거추장스러운 옷」일 뿐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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