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별 게이트」 사건 변호사 嚴相益이 겪은 株價 조작꾼들의 세계 : 월간조선

2001년 10월 벤처 기업인으로 유명하던 한별텔레콤의 신민구 사장이 구속됐다. 그는 성공한 젊은 기업인으로 인기가 「한글과 컴퓨터」의 이찬진씨 못지않았다고 했다. 위성방송 수신기와 호출기를 만드는 회사를 인수한 그는 새로운 디자인으로 과감히 승부를 걸어 국내는 물론 해외시장을 석권한 것 같았다. 프로여자골프선수 김미현의 스폰서가 되기도 하고 미국의 솔라즈 의원을 회사의 고문으로 영입했다.

외국투자가들 조차 그 회사에 흥미를 가지고 전환사채를 대량 사들인다는 소문이 돌고 연일 증권가격이 치솟았다. 그 회사의 좋은 실적들이 수시로 신문의 경제면을 차지하고 세계적인 회사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 날 신문의 1면에 「한별 게이트」라는 대형 증권조작사건으로 보도되고 젊은 신사장은 결혼을 며칠 앞두고 갑자기 벼랑으로 떨어진 것이다.

변호사인 나는 목동 법원 앞 지하다방에서 또 다른 벤처 기업인 신범식씨와 만났다. 수재형으로 보이는 30代의 남자로 그는 신사장의 대학동창이었다. 변호하려는 신사장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신사장이라는 인간의 정확한 모습과 사건의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운동권 출신이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IT(Information Technology·정보기술)의 흐름을 살펴보다가 가능성이 있겠다 싶어서 뛰어든 거죠. 신사장 그 친구는 아주 뛰어난 인물입니다. 경영도 탁월하고 벤처 기업인 1위로 CEO(Chief Executive Officer·최고경영자) 지수가 나왔거든요』

H회장

그는 경쟁하는 친구인데도 신사장의 능력을 인정했다.

『왜 구속됐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떻게든 기업을 일으키려고 하는 욕구 때문에 H회장의 행동을 묵인했는지 몰라요. 신사장에게도 잘못이 있죠』

나는 「H회장」이라는 인물을 수첩에 기록했다. 그의 행동을 묵인한 게 신사장의 실질적인 죄라면 H회장이라는 인물의 행적을 추적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다음으로 신사장과 삼성전자에 같이 다녔던 동료직원을 만나보았다. 그도 벤처 기업인이었다.

『저는 신사장과 삼성전자 동료였습니다. 이찬진 의원이 한별텔레콤을 인수하고 나서 누구 한번 나가서 회사를 살려볼 수 없느냐고 했어요. 우린 모두 그 계통에서 잘 아는 사이였죠. 그때 신사장이 자원을 했죠. 신사장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고 가진 게 전혀 없어 잘못돼도 잃어버릴 게 없었어요. 공장은 아직 돌아가고 있었고, 젊으면 누구라도 한번 야망을 가져볼 만 하잖아요?』

그게 젊은 벤처 기업인들의 공통된 꿈이었다. 그가 덧붙였다.

『상장기업의 대표라는 것은 대단한 취급을 받습니다. 어디를 가나 화려한 대접을 해주죠. 거기다 1999년 3월에 신민구를 영입한 H회장이 자가용에 기사까지 붙여 줬어요. 신사장의 잘못은 위치를 즐긴 면도 있고 결국 한 수 높은 H 회장의 희생제물이 된 거죠』

여기서도 H회장이라는 인물이 다시 등장했다.

『그렇다면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신사장은 알았나요?』

내가 물었다.

『마지막 순간에 빠지려고 했겠죠. 그렇지만 너무 늦어버린 거예요.

신사장이 젊은 혈기에 대주주의 말을 듣고 개인보증을 선 게 70억원이에요. 사직하면 은행이 곧 달려들 건데요. 신사장은 개인적으로는 카드 빚도 갚지 못하는 형편이었어요』

은행 보증을 서 준 것은 그의 발을 묶는 족쇄였다. 사건의 테두리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프로 골퍼 김미현의 후원자

나는 법원에 가서 수사기록을 복사해 왔다. 2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거의 1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불려가 조서를 받았다. 복잡한 경제용어가 난무하고 서로서로 짜맞춘 거짓말들이 가득했다. 나는 고고학자가 깨진 항아리 파편을 再조립하듯 기록에서 진실한 조각만 모아 다시 사실을 구성해 보았다.

H회장은 증권가에서 알려진 기업사냥꾼이었다. 그가 거느리는 사채시장의 큰손들도 있었다. 그는 자금난을 겪고 있는 한별텔레콤을 인수하기로 했다. 정치인이자 名士인 「한글과 컴퓨터」의 이찬진이 대주주라면 사람들은 그의 명성과 상장기업이라는 데 높은 점수를 주고 있는 것에 착안한 것이리라. 그는 부도위기에 몰린 한별텔레콤에 약간의 자금을 대고 간단히 경영권을 장악했다. 그는 거액의 「해외전환사채」를 발행해서 자금을 마련하겠다고 제의했다.

해외전환사채란 한국의 잘 나가는 기업에 대해 외국인들이 투자하는 방법이었다. 그 회사가 발행한 전환사채를 사서 주식의 가격이 오르면 얼른 주식으로 바꾸어 차익을 얻는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게 해외전환사채에 대한 일반사람들의 인식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부도위기에 있는 그 기업에 대해 단 1달러라도 투자할 외국인이 없다는 데 있었다.

H회장은 모 증권사에 해외전환사채 발행을 의뢰했다. 당연히 증권회사로서는 거절해야 했다. 증권을 발행해 놓고 그걸 사는 사람이나 회사가 없으면 증권회사가 책임을 떠 안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H회장은 증권회사에 당근을 제시했다. 인수할 돈은 이미 마련됐으니까 잠시 증권회사의 이름만 빌리자는 것이었다. 수수료는 두둑했다. 증권의 발행은 증권회사가 독점적으로 하고 있고, 사람들은 큰 증권회사라면 일단 믿고 있었다. H회장은 대표이사를 맡지 않고 신사장을 유임시켰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법적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H회장은 한 발 뒤에서 조정하면서 심복들을 시켜 회사의 자금부문을 장악하게 했다. 그는 회사의 이미지를 부풀리기 시작했다. 중국으로 수십만 대의 제품이 수출되는 기사가 경제면에 올랐다. 앞에 내세운 신사장이 해외에 다녀올 때마다 기자회견을 해서 유럽이나 아시아대륙 여러 나라에 수출한 실적을 발표하게 했다. 솔라즈 미국 前 의원을 회사 고문으로 앉히고 여자프로골프 선수 김미현의 후원자로 나섰다. 그 외 다채로운 이벤트가 있었다.

어느 날 해외전환사채의 발행이 화려하게 광고되기 시작했다. 유명한 로펌의 변호사, 증권회사의 임원, 회사의 임원들이 홍콩 등 호텔 파티장을 빌려 외국경제인, 정치인들과 함께 화려한 조인식을 거행하는 모습들이 연출됐다. 국내에서도 63빌딩 등의 기자회견장에서 해외전환사채 발행이 발표되었다. 금융감독원에서도 회사의 해외전환사채 발행 등이 인터넷을 통해 公示(공시)했다. 회사가 발행한 해외전환사채가 외국투자회사들에 의해 전액 인수되었고 그 물량이 국내로 들어온다는 소식들이 증권가에 전해졌다.

그런 모습들을 만드는 건 너무 쉬웠다. 외화를 빼돌리기 위해서라든지 아니면 탈세를 하기 위해서 만든 위장된 서류만의 외국회사들이 너무 많았다. 또 대형 로펌에 가서 5만 달러만 내면 서류만의 외국회사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서류상으로는 어떤 거래도 만들 수 있었고 어떤 형태도 창조할 수 있었다. 그런 迷路(미로)를 모르는 정부의 감독은 서류만 보고 이루어지는 공허한 것이었다.

이용호게이트와 닮은 꼴

H회장은 사채시장의 큰손들을 움직여 증권회사에 청약금을 납입하게 했다. 사채업자들의 하수인들이 회사 또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위장해서 증권회사에 돈을 냈다. 말만 청약금이지 사실은 높은 이자를 받고 거액을 며칠 빌려주는 것이었다. 사채업계에서는 이런 일들을 속칭 「파킹」이라고 했다. 요즈음 검거되는 깡통회사의 자본납입은 사채업자들이 하루 동안 은행에 돈을 빌려주는 것들이다.

사채업자들의 청약금이 증권회사를 통해 바로 회사로 들어왔다. 외형적으로는 해외전환사채를 발행해서 얻은 회사의 자산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H회장이 사채업자에게 빌린 돈이었다. 그는 회사에 들어온 그 돈을 빼서 바로 사채업자들에게 이자를 붙여 돌려주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증권인 해외전환사채를 회수했다. 이제 한 판의 쇼의 일막이 내려진 것이다.

결국 그 해외전환사채라는 증권은 아무런 실체가 없는 종이쪽지에 불과했다. 이자와 증권회사 수수료를 들이고 그는 1200만 달러짜리 공허한 증권 한 장을 달랑 손에 쥔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가 올려놓은 분위기로 그 회사의 증권시세는 연일 폭등하기 시작했다. 株價(주가)가 상승하는 시점에 이르자 H회장은 해외전환사채를 전부 주식으로 전환해서 증권시장에 팔아버렸다. 한 번 팔 때마다 수익은 100억원이었다. 그걸 14회나 한 것이다. 물론 이런 행위 사이에 더러는 정교한 공정을 만들기도 하는 게 H회장의 수법이었다.

할 때마다 국내외 증권회사가 바뀌고 이벤트가 달랐다. 수사기록에는 거의 유사한 이용호 게이트 사건보도가 붙어 있었다. 2001년 9월16일자 중앙일보 경제면의 보도였다.

이 사건으로 정부 고위직인사들 심지어는 검찰총장까지 물러났다.

수사기록을 읽으면서 나는 묘한 모순을 느꼈다. 모든 형사책임을 지고 구속된 사람은 신사장 한 사람뿐이었다. 철저한 사건의 축소였다. 그러면서도 기록 곳곳에는 비밀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어떤 압력에 의해 수사막판에 H회장이나 그의 부하들을 봐주었다는 냄새가 물씬 풍겼다. 누군가 H회장과 그 심복의 범행을 기록 구석구석에 그대로 남겨 놓은 것이다.

『제가 완전히 당했군요』

영등포구치소의 변호사 접견실은 여러 개의 유리상자들을 붙여 놓은 동물원 같았다. 상자마다 고뇌하고 있는 재소자들과 그를 마주하고 있는 변호사들의 모습이 만화경같이 보였다. 부스스한 얼굴로 신사장이 나왔다. 얼굴색이 창백했다.

『미국으로 출장 갔다 왔더니 검찰에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H회장님에게 물어봤더니 손을 써 놨으니까 가보라고 했어요』

『손을 써 놨다는 게 무슨 말이죠?』

『변호사에게 3억원을 줬다고 그랬어요.

H회장이 넌 조사를 받아도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했어요. 기술개발만 했는데 왜 잡겠느냐는 거죠. 포커스가 다른 데 있다는 거였어요. 또 감사로 있는 그 심복인 공인회계사도 조사받고 나와서 자기가 타깃이니까 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사실 저는 나중에는 삼성동 사무실을 얻어 몇 명만 데리고 기술개발에만 전념했습니다』

그의 표정은 진실해 보였다. 심지어 그는 지금도 H회장을 믿는 것 같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심지어 H회장은 담당 검사가 혈기로 함부로 까불면 다른 곳으로 발령을 내 버리겠다고까지 했어요』

나는 그에게 수사기록 2000쪽을 요약해 온 글들을 내밀었다.

그가 신경을 집중해서 그 글들을 읽기 시작했다.

株價를 조작하거나 천문학적 숫자의 은행돈을 빼서 고급 사기꾼들은 국민들에게 간접적인 사기행위를 벌였다. 증권전문가, 금융전문가, 법률전문가들이 또 그들의 방조범이다. 그들은 범죄적 자본주의의 첨병들인 것이다. 결국 그 많은 돈은 은행의 손해로 돌아가고, 정부는 공적자금 수조원을 투입한다. 결국 그것은 국민들이 땀흘려 만든 돈인 것이다.

『제가 완전히 당했군요』

어느새 신사장의 백짓장 같던 얼굴이 흥분으로 붉어졌다.

『조사받을 당시의 상황은 어땠어요?』

내가 물었다.

『들어가 보니까 답을 이미 다 만들어놨어요. 그리고 어쨌든 제가 대표이사로 되어 있으니까 다 책임을 지라는 거였어요』

삼성전자에서 기술개발을 했고 일본의 와세다대학까지 유학했던 엘리트 사원인 그는 혼자서 벤처 기업을 일으켜 보고 싶었다.

『100억원을 투자한 중국 심천의 공장은 단 한푼도 회수하기 힘든 상황이었어요. 디지털 시대에 생산하는 위성방송 수신기는 아날로그 형식이어서 수십만 대 주문한 바이어들이 모두 발을 뺀 상태였죠. 결국 철저히 분석해 보지 않고 속아서 산 회사였어요. 기술개발로 그걸 일으켜 보려고 했을 뿐인데 이렇게 됐어요. 검사도 그걸 이해하고 잘 해주는 태도였는데 저만 구치소로 보내더군요』

『증권작전을 벌이는 데 귀신』

이런 사건의 실상을 알기 위해서는 실제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보는 게 빠르다. 특히 그 인물이 사건의 주인공과 대립하면 실체적 진실이 더 빨리 파악된다. 나는 소개를 통해 알렉스 김이라는 인물과 만날 수 있었다. 정치권의 핵심과 연결되어 사업을 벌인다는 40代 후반의 남자였다. 얼마 전만 해도 그는 ○○공제회로부터 500억원을 무이자로 얻어 주상복합오피스텔을 분양하고 수십억원을 간단히 벌어들였다는 인물이었다. 이자 없이 수백억원을 만드는 힘은 아무튼 서민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또 다른 세계였다.

그런 일들은 실제로 일어나기도 했다. 얼마 전 만났던 경기도지사 부인이었던 주혜란씨도 용도변경과 관련된 뇌물사건으로 현재 구속 중이었다. 그녀는 정말 기술적으로 접근해서 돈을 전하는 그들에게 넘어갔다고 내게 고백한 적도 있다.

『며칠 전에도 강원도에서 작업에 들어갔는데 시장이 건방지게 뒤틀더라구요. 내가 누군지 모른 거지. 다음날로 무릎을 꿇려 버렸어요』

알렉스 김의 과시성이 섞인 말이었지만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정권이 거의 끝나 가는데 곤란은 없으십니까?』

내가 의미 있게 물었다. 대개는 권력의 철새들이기 때문에.

『李會昌 정권이 들어서면 우린 더 좋아요. 그 밑에 우리가 정치자금을 대서 키운 인물들이 얼만데 그래요. 다만 우리들이 요즈음은 조금 조용히 있어요. 지금 뭘 했다가 정권이 바뀌면 특혜시비가 나올 물건들밖에 없어요. 어떻게 용도 변경했는지 진상을 규명하라고 할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일단 조심하고 있어요』

그는 서울시장 후보들에게 나누어 자금 지원한 걸 자랑삼아 얘기했다. 분산해서 베팅을 한다는 식이었다.

『그런데 그 사건 이미 다 끝난 건데 뭘 알고 싶은 거죠?』

그가 비로소 본론으로 들어갔다. 소개한 사람 덕으로 그는 내게 경계심을 품지 않는 것 같았다.

『H회장은 어떤 사람입니까?』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 친구는 증권작전을 펼치는 데는 귀신이에요, 귀신. 이 바닥에서 등수로 치면 일등은 아니고 이등이죠. 세계대회에서 우승한 여자프로골퍼 김미현을 2억원에 주워다가 수백억원의 광고효과를 올렸어요』

그가 계속했다.

『H회장이 그 회사를 인수하면서 한 2000억원 먹으려고 계획했어요. 운이 좋게 잘 나갔는데 어디서 무리가 생겼는지 검찰에서 손을 대더라구요. H회장이 지금은 외국에서 이 사건 재판이 끝날 때까지 원격조종하면서 기다리는 중이에요. 왜? 연락이라도 해줄까요?』

갑자기 그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오르면서 내게 이렇게 물었다.

『이 사건 조용히 재판 끝내면 되는데 왜 물어 보는 거죠? 여기에는 빅가이가 연루 되지 않았어요』

『빅가이라뇨?』

내가 물었다.

『대통령 아들을 말하는 거예요. 이건 매스컴을 탈 가치도 없는 사건이에요. 조금만 있어 보세요. 지금까지 게이트 사건은 게임도 안 되는 게 터질 거니까요』

돈에 매수된 관리들

그는 대통령 아들이 연루된 사건을 예언했다. 신기하게도 그가 말하는 시점에 金大中 대통령의 아들들이 문제됐고 구속으로 이어졌다. 나는 이 사건의 배경에 대해 궁금했다. 그는 눈치 빠르게 나의 궁금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사건은 사전에 로비를 완벽하게 하고 말도 다 정확히 맞추어둬서 막말로 하자면 검찰에 가서 농담들 하다가 나온 사건이죠. 전체적으로 해외전환사채의 밑그림을 그린 주역 정도는 구속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완벽하게 로비를 했는지 그 친구도 자기는 전혀 걱정 없다고 장담 하더라니까요』

그는 누군가를 비웃고 있었다.

『그래도 일선의 수사검사는 진실을 파헤치려고 했던데…』

내가 말했다.

『처음에는 서울지검에서 수사를 하다가 갑자기 지청검사가 덤벼들기에 우리도 내심 걱정했어요. 그래도 그 검사 15일 만에 나가 떨어지던데 뭘…』

그는 너무나 확신에 차 있는 태도였다. 그때 옆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우윳빛 유리 뒤로 안쪽을 살피는 남자의 모습이 어른 거렸다.

『아, 마침 저 친구가 오네. 한번 만나보시죠. 이봐, 괜찮아. 들어와』

그가 열린 문 앞에 선 거구의 사나이를 보며 소리쳤다.

스포츠형의 짧은 머리에 헐렁한 바지를 입은 30代 후반의 남자였다. 부리부리한 눈에서 만만치 않은 건달세계의 관록이 느껴졌다.

『H회장에 대해 알고 싶으다고 오셨으니까 말씀드려』

그가 스포츠형 머리의 남자에게 명령했다.

『저는 H회장을 옆에서 쭉 보좌했습니다. 저희들은 앞에서 주먹이나 써주고 해서 내용을 잘 모릅니다. 저만 해도 강남에서는 알아주는 건달입니다. 어디가도 다 통해요. 이번에 H회장이 수사대상이 됐을 때 우리들뿐 아니라 선배 형님들도 모두 도왔어요. 선배 형님 한 분은 청송에 있는 김태촌이하고 동급인데 신사예요. 그 선배가 H회장을 헌신적으로 도왔죠.

그런데 저희가 요즈음 들으니까 전환사채를 한 번 발행할 때마다 H회장은 100억원씩 챙겼다고 하는데 우리들한테는 짜기가 말도 못 해요. H회장을 열심히 도운 건달 선배 형님의 아이가 지금 앓고 있는데도 H회장이 도와주지 않아요』

그가 분노한 얼굴로 내뱉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수사 기록 중 건달 노릇을 한 그 남자에 대한 내용이 떠올랐다.

『우리 건달들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주주총회가 열리면 화가 난 주주들이 벼르고 몰려와요. 그 사람들을 우리가 다 양같이 조용히 물러 가게 한 거 아닙니까?』

『검찰에서 조사받으신 적 없어요?』

내가 물었다. 수사기록 중에는 거액의 돈이 심복건달들에게 건네지고 그 돈이 다시 정현준 등 게이트 사건의 주역에게 투자됐다고 기재된 보고서가 보였기 때문이다.

『검찰에서 불러서 나중에 갔는데, 나보고 이제 필요 없으니까 그냥 가라고 하더라구요』

검사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까닭은

그들의 설명을 듣고 나니까 한결 기록 속의 비밀이나 상황들에 대한 이해가 쉬웠다. 먼저 「그림 작성자」라고 언급된 인물에 대한 조서를 다시 살펴 보았다. 그 인물은 일본의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N증권 국제부에서 해외전환사채 업무를 담당한 인물이었다. 그는 N증권 서울의 부지점장으로 근무할 때 각 증권회사를 돌아다니면서 국제금융인 전환사채의 발행절차를 강의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세무서에 근무하다가 작은 업체의 사장이 된 H회장과 인연을 맺는다.

조서에는 그런 배경과 함께 검사와 그가 논쟁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로펌에 간 적이 있죠? 김변호사의 수첩에 적혀 있던데?』

검사는 주가조작과 사기혐의를 잡고 그를 추궁했다.

『김변호사는 국제금융전문가이고 저는 N증권에 근무할 때부터 알고 지내던 분입니다. 뭐 잘못된 거 있습니까?』

도전적인 말투가 그대로 조서에 적혀 있었다. 실제 그런 일이 있어도 기록까지는 하지 않는 예외적인 일이었다. 기록을 작성한 검찰서기는 그의 교만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느라고 그 말을 적어 놓았을지도 모른다.

『해외전환사채 1200만 달러 발행의 상당부분은 당신이 계획했던데』

검사가 그의 혐의점을 알고 몰아갔다.

『검사님 뭔가 착각하고 계신 것 같은데 H회장이 국내에 없으니까 저를 이 사건의 몸통으로 만들고 싶으십니까?』

그는 검사를 역공격하고 있었다. 믿는 곳이 대단한 말투였다.

조사를 받는 인물이 검사를 이미 마음속으로 우습게 보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담당검사가 15일 만에 나가떨어지더라는 그 계통 인물의 말이 떠오르는 부분이기도 했다. 결국 조사대상자였던 그는 늠름하게 빠져나가면서 검사에게 보너스로 몇 개의 정보를 던졌다.

『해외전환사채를 일단 일본의 N증권에서 매입한 형식을 취한 적도 있어요. 그래야 국내에서 의심을 받지 않죠. 그 다음에 H회장이 국내에 설립한 위장회사에서 그 증권을 의도적으로 가격을 올려서 삽니다. 자연스런 매매로 꾸미기 위해서 그런 것이죠. 서류상으로는 해외전환사채가 한 바퀴 정상적인 거래를 하고 돌아온 거죠. 이런 회전은 비자금을 만드는 데도 필요한 건데 H회장은 그 과정에서 한 번에 52억원의 거액을 만들기도 했죠』

그는 검사에게 H회장의 범행에 대한 힌트를 은근히 제공했다. 그런 정보제공의 代價 때문에 그가 살아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비자금을 H회장이 어떻게 사용했어요?』

검사가 물었다.

『제가 듣기로는 톱탤런트 S양에게 몇억원 줬다고 H회장이 제 입으로 자랑합디다. 건달들에게도 몇 억씩 안겼다고 하던데』

『한번에 100억원을 챙겼습니다』

그 건달의 이름에는 내가 만났던 바로 그 스포츠형 짧은 머리의 남자도 들어 있었다. 거명된 여자 탤런트도 그 후 여성지에서 모자를 눌러쓴 얼굴사진이 커다랗게 실린 걸 봤다. 마약사건으로 구속된 내용과 함께 남자관계가 큰 활자로 인쇄되어 독자들의 눈길을 현혹시켰다.

H회장의 심복이라는 공인회계사가 검찰에서 진술한 내용은 결정적인 증언이었다. 10월23일 검사실에서 작성된 조서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랬다.

『투자가들이 산 것처럼 되어 있던 해외전환사채를 H회장이 다 가지고 있던데 어떻게 된 거죠?』

검사가 물었다.

『청약금은 투자가들로 위장한 사채꾼들의 돈이었습니다. H회장의 부탁을 받은 사채업자가 사람들을 적당히 앞세워 분산해서 해외전환사채를 청약하는 것처럼 증권사에 돈을 낸 거죠. 얼마 안 돼서 H회장이 원금과 이자를 주고 사채업자들이 가지고 있는 해외전환사채를 돌려 받았어요. 그때까지는 그 증서가 담보역할을 한 거죠』

『H회장이 뒤로 가지고 있던 해외전환사채는 어떻게 했죠?』

『전부 주식으로 전환해서 팔았습니다』

『순이익으로 얼마나 벌었어요?』

『한 번에 100억원을 챙겼습니다』

금융감독원에 신고된 그런 해외전환사채의 발행이 열네 번이었다.

『사채꾼한테서 돈을 며칠 빌린 代價로 100억원을 벌면 결국 대도둑이네』

검사가 말했다.

『결국 그런 셈입니다』

공인회계사는 그 과정에서 자신도 돈을 끌어들이고 수억원의 현금과 또다른 주식을 代價로 받은 것도 자백했다.

『당신은 돈을 누구한테서 끌어들였죠?』

검사가 물었다.

『백이란 인물한테서 끌어들였습니다. 그 사람은 정현준보다 상위클래스에 들어가는 그 방면의 代父입니다. 미국과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죠』

그는 株價 조작을 하는 꾼들의 족보를 검사에게 알려주었다.

『증권감독원 로비는 어떻게 했죠?』

증권인 해외전환사채를 발행하려면 금융감독원에 필요한 사항을 신고하고 공시가 되도록 해야 한다. 금융감독원은 정확히 감독할 의무가 있었다. 일반 국민들의 투자를 보장하고 건전한 증권시장을 육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무자들까지 모두 로비를 했습니다』

『어떻게?』

『고위층은 H회장이 직접 하고 실무공무원들은 회사직원들 명의로 그들에게 돈을 송금해 줬습니다』

H회장이라는 인물이 사용했던 심복들은 결국 검찰에 가서는 은근히 모든 정보를 제공해 준 셈이었다. 아마도 그들 자신이 살아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깃털들만 기소되고

2001년 12월14일 지방법원 306호 법정 앞 복도. 몇천억원의 손해를 국민에게 끼쳤을지도 모르는 사건에서 구속된 피고인은 단 한 사람 허수아비 신사장이었다. H회장도 거물 사채꾼도 밑그림을 그렸다는 인물도 모두 빠져나갔다. 증권회사 말단직원, 창업투자회사 직원, 컨설팅회사 직원이 불구속으로 덧붙여 기소된 상태였다. 그들은 실무 일선에서 심부름을 담당했던 깃털에 불과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상황에 닥칠 때마다 분노가 일어난다. 동시에 권력의 속성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곤 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힘이 없어 기소된 실무직원을 담당하게 된 최변호사도 변호사석에서 내게 흥분해서 이렇게 먼저 말했다.

『이 사건을 수사하는 데, 검찰이 해도 너무 했어요』

그는 내게 형광펜으로 줄을 친 수사기록의 한 부분을 들이밀었다.

『여기 기록을 보면요. 95억원이라는 거액이 빠져나가 로비자금으로 쓰인 혐의가 명백히 나타나요. 검사로서는 이 돈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조사하는 게 핵심인데 의도적으로 그걸 회피했다니까요. 나도 10년이 넘게 판사생활을 한 사람이지만 이건 너무한 거죠』

그때 옆에서 재판을 기다리던 50代의 민변호사가 끼어들었다.

『경제사범은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다르게 수사되는 수도 있습니다. 허 허, 잘 해 보쇼』

그가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결국은 압력이나 뇌물을 강하게 암시하는 말이었다. 최변호사가 계속했다.

『검찰을 위해서도 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은 솎아내야 해. 아마 대검에서 감사를 할 때 이 수사기록을 보면 담당검사는 징계를 당할걸요. 또 기자들이 이 기록을 보고 기사를 쓰면 검사가 옷을 벗어야 할 거예요』

실제로 이 사건은 그 후 한국일보의 1면 톱기사로 보도된 적이 있었다. 담당기자는 해외로 도피한 H회장과 담당검사 양쪽으로부터 항의를 받았다고 전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검사는 이 사건은 나중에 다시 수사가 될 것이라고 해명을 덧붙이더라는 것이었다.

法기술자

재판이 시작됐다. 컨설팅회사 직원이 볼멘소리로 재판장에게 항의하듯 이렇게 말했다.

『검찰에서 조서에 미리 답을 다 써놓고 억지로 긍정시켰어요』

그의 표정에는 강한 불만이 서렸다. 그가 계속했다.

『조서에는 제가 자백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저는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재판장이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었다.

『그러면 조서에 잘못 기재된 부분을 고쳐 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이의를 제기했지만 고쳐주지 않았습니다. 제 피의자 신문조서는 제가 말한 것과 전혀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가 일러바치듯 호소했다. 재판장의 얼굴에 불쾌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면 검사작성의 조서가 임의성이 없다는 얘기인데 이래도 되나 모르겠네요…』

재판장이 검찰의 일방적인 수사를 노골적으로 꼬집었다. 그때 공판검사가 그를 노려보며 언성을 높였다.

『이봐 피고인! 불구속으로 됐다고 법정에서 이렇게 막 말을 바꿔도 되는 거야?』

그것은 공개적인 협박행위였다. 계속 그렇게 굴면 구속당할 수 있다는 암시였다. 이때 담당인 최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재판장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저 검사의 모습을 보십시오. 법정에서도 저렇게 위압적으로 나오는데 검사실에서 오죽했겠습니까?』

깡마른 검사의 눈에서 불이 번쩍했다. 물론 그 컨설팅회사 직원에게 잘못이 있었다.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고 도운 면이 있다. 그러나 그는 주범들이 처벌 선에서 빠진 것을 보고는 죄의식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지도층이 부패하고 처벌받지 않는 데서 범죄인들의 강한 불만이 나오고 죄의식 자체가 마비되는 것이다. 다음은 불구속으로 기소된 증권회사 직원의 답변이었다.

『저도 이 법정에 왜 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IMF 이후에는 자금조달이 경제에 가장 급한 문제였습니다. 해외전환사채를 국내인이 사도 위법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국제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했고 합법적이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외국환관리법시행령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법정에 서야 합니까?』

일반인들의 인식에 해외전환사채는 외국인 투자자들만 사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법령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인식과 법의 묘한 차이를 게이트 사건들의 주역은 이용한 것이다.

법기술자는 대형 로펌들의 국제변호사였다. 그들은 심지어 서류상의 회사까지 만들어준 비리의 공범이었다. 증권회사 실무 직원은 변호사가 괜찮다고 했는데 무슨 문제냐고 강하게 반발하는 것이다. 변호사들이 만드는 교묘한 법 논리나 허점의 발견은 이 사회의 면죄부가 되었다.

증인인 회계장부를 담당하는 직원은 재판부로부터 왜 엉터리 분식회계를 했느냐고 질책받았다. 장부상으로는 돈이 많은 것 같이 그럴 듯하게 꾸며 놓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는 회사였다.

증인으로 나온 회계직원은 다른 회사들이 다 그런데 왜 그러냐고 반문했다. 윗사람이 시키는데 무슨 힘으로 따지겠느냐는 답변이었다. 분명 일부분은 담당했지만 모두 억울한 사람들뿐이었다.

주범은 「깃털」들을 옭아매는 증인으로

옅은 회색 재킷에 파란 와이셔츠를 단정하게 받쳐입은 30代 말의 남자가 증언 석에 앉았다. 신사장과 증권회사 등의 실무 직원들을 유죄로 확정하기 위한 검찰 측 증인이었다. 사실 그는 주범이었다. 대부분의 일에 핵심브레인 역할을 하고 거액을 챙긴 당사자였다. 그 하나 하나가 분명히 기록에 기재되어 있었다. 주범이 증인이 되고 깃털에 불과한 인물들이 피고인이 된 「해프닝 법정」이었다.

『이건 도대체 말도 안 돼. 제일 나쁜 놈이 증인이 되다니』

최변호사가 분을 참지 못한 소리로 내뱉었다. 판사를 그만두자 그는 불공정한 현실이 더욱 명확히 보이는 것 같았다. 검사가 압축해서 이렇게 먼저 물었다.

『검찰에서 모두 사실대로 진술하고 조서에 서명무인했죠?』

전체조서내용이 한마디로 증언이 된 것이다. 그 내용을 모르는 신사장이나 증권회사 직원들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렇습니다』

그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자신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어서 검사가 그가 검찰에서 진술한 것으로 되어 있던 몇 가지 사항에 대해 물었다.

『저기 있는 신사장이 이 사건에서 어떤 행위를 했습니까?』

검사가 그에게 물었다.

『해외전환사채의 아이디어를 내고 총책임을 진 대표이사입니다』

그가 신사장의 시선을 피하면서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검사의 신문은 이어졌다. 모두가 앞에 서 있는 피고인들에 대해 등에 칼을 꽂는 치명적인 진술들이었다.

『결과적으로 H회장이 여기 서 있는 회사 직원들에게도 수고비조로 돈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죠?』

『당신도 피고인석에 앉아 있어야 할 사람』

검사의 질문 취지는 H회장에게서 조금이라도 수고비를 받았으면 지금 이런 상태를 감수하라는 암시가 있었다. 그 말에 최변호사가 발끈해서 일어났다.

『재판장님, 지금 검사가 증인의 막연한 추측을 묻고 있습니다. 사실을 묻지 않는 부분은 제지해 주십시오』

『검사, 막연한 추측은 신문하지 마세요』

재판장이 바로 제지했다. 그러자 흥분을 참지 못한 검사가 변호사에게 눈을 부릅뜨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아니, 왜 재판 처음부터 검찰이 꼬셔서 수사를 한 모양으로 자꾸 시비를 겁니까?』

공판검사도 냉정을 잃고 있었다.

『아니, 검사님은 이 사건의 진실을 몰라서 그래요? 정말 실체적 진실을 밝혀 볼까요? 정현준에게 간 거액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쓰이는지 압니까? 변호사도 아는데 그걸 수사한 적이 있어요?』

최변호사가 맞받아 소리쳤다. 공판검사가 되받아 말했다.

『최변호사는 자기가 담당한 피고인의 공소사실에 대해서만 신경쓰지 왜 관계없는 사실을 자꾸 말하는 겁니까?』

검사의 이마에 핏줄이 드러났다.

『그러면 검사는 왜 남의 추측까지 묻는 유도신문을 합니까? 그리고 내가 묻는 건 모두 이 사건의 본체와 관계 있으니까 묻는건데 왜그래요?』

너무 뜨겁게 달아오르자 재판장이 말렸다.

『이보세요. 그만들 하세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검사가 다시 신문을 했다.

『해외전환사채를 발행한다고 하면 일반 사람은 그 돈이 다 외국투자가들에게서 들어오는 거로 알고 있죠?』

『그 답변은 제가 할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증인이 핵심답변을 피했다.

『해외투자가 이루어지면 주가가 올라가리라고 판단한 거죠? 그리고 해외전환사채가 발행되면 株價가 상승하는데 그걸 국내인이 인수하는 건 모두 불법이죠?』

『그 문제에 대해서는 국제금융전문가인 변호사가 검토했기 때문에 적법으로 알고 있습니다』

『공인회계사란 사람이 왜 그렇게 자신이 없어요』

미꾸라지같이 빠져나가려는 그의 대답에 검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거 왜 이래? 당신도 증인석이 아니라 피고인들 하고 같이 앉아 있어야 할 사람이야. 왜 풀어줬다고 슬슬 딴소리하고 있어?』

그 말에 증인의 얼굴이 검붉어졌다. 조용한 검사실에서 속삭이던 사실들을 이렇게 공개된 법정에서 말하리라고는 짐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증인은 H회장이 게이트 사건의 핵심인 정현준에게 투자한 사실을 알고 있지요?』

검사가 물었다. 그가 피하지 못하고 풀이 죽은 채 인정했다.

『한 번은 공식적으로 27억원, 또 한 번은 비공식적으로 27억원을 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법정에서 결정적인 증언이 이루어져도 소용이 없었다. 이미 수사가 정책적으로 중단된 그 사건은 누구도 손댈 수 없기 때문이다.

재판장이 직접 묻기 시작했다.

『증인은 공인회계사이시면서 회사의 감사이기도 했죠?』

『그렇습니다』

『감사이고 공인회계사이면 H회장이 하는 행동을 왜 막지 않고 시키는 대로만 했죠?』

점잖게 말하는 재판장의 차분한 눈 속에 은은한 분노의 불꽃이 일렁였다.

『…』

증인이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그걸 보면서 재판장이 서기에게 명령했다.

『공판조서의 재판장 질문 다음에 「증인이 묵묵부답하다」라고 써요』

재판장이 증인의 배임행위를 조서에 분명히 한 것이다.

『그 회사가 유로 달러 시장에서 전환사채를 발행했다는 공시가 나왔는데 증인이 그걸 봤다면 어떻게 해석하겠어요?』

국민들의 착각을 유도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이었다.

『…』

그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는 이미 수많은 소액투자자들을 속인 그 행동의 의미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침묵은 확실한 긍정일 수밖에 없었다. 재판장이 다시 물었다.

『그런 공시를 봤을 때 증인의 느낌이 뭐였습니까? 그 문장을 보통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석할까요?』

『…』

그가 계속 말을 하지 못했다.

『공인회계사란 사람이 왜 그렇게 자신이 없어요? 증인이 처음부터 회의에도 참석하고 자금이 어떻게 조달됐는지 다 알았잖습니까? 말해 보세요』

『외국에서 달러가 들어오는 것으로 알았을 겁니다』

그가 마지못해 긍정했다. 그때 방청객 중에는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사람이 조용히 그의 진술이나 행동을 체크하고 있었다. H회장이 수족같이 활용하던 건달 보스였다.

돌아온 H회장

그들은 결국 모두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재판부는 그들이 깃털인 사실을 안 것이다. 그나마 유일하게 혼자서만 몇 달 구속됐던 신사장에게서 편지가 왔다.

부패는 반복해서 왕성하게 자랐다. 금력을 이길 만한 강한 의지나 힘이 보이지 않았다. 권력의 핵심과 연결이 되면 안 되는 일이 없다. 안 되던 허가도 갑자기 나오고 불법이 적법으로 변한다. 힘 다음에 이용되는 게 정교한 법기술이었다. 탈법이나 불법을 할 수 있는 법의 맹점을 변호사들이 만들어 주는 것이다.

금융권의 돈들도 적당한 정치자금이나 뇌물을 먹이면 압력을 행사해서 가져다 쓸 수 있었다. 대출규정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거절할 수 있는 명분이었다. 동시에 약한 행원을 속죄양으로 만들기 위해 쓰이기도 했다.

내가 변호를 했던 한 은행장은 시중은행장 1년에 10억원이 들어간다고 했다. 임기 3년에 20억원을 가져다 바치니까 나중에 장관이 안 낸 1년치 10억원을 가지고 오라는 독촉이 있었다고 했다.

증권시장의 돈, 은행의 돈, 거대한 기금에 보관되어 있는 돈들은 대형 사기꾼들의 먹이다. 그게 없어지면 국민들이 보충해 준다. 수조원의 공적자금은 결국 국민부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