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효진 자유기고가
製作費 110億, 賣出 160億
작기만 한 연극 시장에 110억원이란 巨金을 끌어 부은 사람은 정말 얼마나 큰 사람일까. 얼마 되지 않는 관객들의 주머니에서 160억원이란 엄청난 입장료를 받아내 막대한 이익을 낸 사람은 얼마나 神出鬼沒(신출귀몰)하는 재주를 가진 사람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있는 LG 아트센터 로비에서 만난 薛度胤(설도윤·44) (주)제미로 대표는, 아직도 날씬한 몸매와 순진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멋쟁이였다. 나는 극장 로비에 마련된 VIP 라운지에서 그와 차를 마시며,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나라를 一擧에 문화 선진국 대열에 세워 놨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극장에 들어가서 「오페라의 유령」을 보면서도 나는 거듭 놀라야만 했다. 어마어마한 무대장치와 그 극적인 변환, 배우들의 뛰어난 노래 실력, 가슴을 파고드는 스토리의 전개, 이런 것들이 모두 내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파리의 오페라 하우스에 사는 오페라의 유령이, 오페라 가수인 여주인공 크리스틴을 짝사랑하며 차지하려 하지만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애처롭게 떠나간다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유령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나라 문화 시장의 격을 높여 놨다. 그리고 그 주역이 총제작자인 薛대표다.
두 번째로 나는 그를 서울 광화문에 있는 세종문화회관 뒤에서 만났다. 그는 그곳에서 오는 7월20일 새로 공연할 뮤지컬 「수호천사」의 전용극장을 짓고 있었다. 나는 세종문화회관 뒷마당에 철골이 세워지는 모습을 모면서 또 한 번의 성공을 예감하고, 이 사람의 손에 도깨비 방망이가 쥐어져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광화문에 있는 한 식당에 들어가서 긴 얘기를 시작했다.
―「오페라의 유령」이란 뮤지컬 이름을 언제 처음 들었습니까?
『88 서울올림픽 때 제가 개회식의 안무를 맡았는데 그때 미국에서 스태프로 온 친구한테 들었습니다. 제가 뮤지컬을 하고 있다고 했더니 그 친구가 저한테 「당신 더 팬텀 오브 더 오페라(The Phantom of the Opera)를 아느냐」고 해요. 「모른다」고 했더니 「뮤지컬 한다는 사람이 그걸 모르느냐, 어마어마하고 엄청나다」고 그랬습니다』
―언제 그걸 처음 봤습니까?
『1991년 3월에 미국에 가서 봤습니다. KBS를 그만두고 SBS에 가기 전이었어요. 1막이 끝났는데 눈물이 하도 펑펑 나와서 일어나질 못했어요』
―어느 대목에서 눈물이 나오던가요?
『작품도 작품이지만, 우리나라 현실과 비교해 이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하게 이 사업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어요. 절망감, 부러움 이런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어요.
그래서 1막이 끝나고 휴식시간에 밖에 나가지도 못했어요. 2막이 끝나고서는 내용 때문에 또 눈물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습니다. 「오페라의 유령」이 짝사랑하던 크리스틴을 떠나보내는 장면이 너무 슬펐습니다. 내가 울면서 보니까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많이 울었어요.
제 뒤에서 소리내서 우는 여자들이 있었는데, 아시아 여자들이었어요. 홍콩, 타이완, 일본에서 온 여자들이었어요. 「몇 번째 보느냐」고 물었더니, 일본 여자는 「다섯 번째」라고 했어요. 영국에 가서 한 번, 일본에서 한 번, 미국에서 벌써 세 번째 봤는데, 볼 때마다 눈물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다른 여자들도 다 두 번 이상 봤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공연에선 어떻든가요?
『여기서도 여자 관객의 30% 정도가 울어요. 미국 공연에선 70% 정도가 울었어요. 이게 문화의 차이지요』
全세계에서 매출 4조원 기록
―「오페라의 유령」은 미국 뮤지컬입니까?
『보통 뮤지컬은 영국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1930년대 초창기에는 뮤지컬이 미국에서 다 나왔는데, 영국에 작곡가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나오면서부터 영국이 뮤지컬의 강대국으로 올라섭니다. 그래서 영국 런던의 극장가 웨스트 엔드에서 뮤지컬이 검증을 받아서 히트하면, 이것이 미국 뉴욕의 브로드웨이로 건너가게 되지요. 그러면서 영국은 영국대로, 미국은 미국대로 공연을 하게 됩니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회사가 RUG입니다. 이건 「정말 유용한 그룹(Really Useful Group)」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이름입니다. 여기서 만든 것 가운데 80년대에 만들어서 작년에 브로드웨이에서 막을 내린 「캐츠(Cats)」도 그랬습니다. 영국에선 아직도 공연을 하고 있는데 금년에 막을 내립니다. 이 「캐츠」가 뮤지컬 중에서 18년 간이란 장기공연의 기록을 세운 작품입니다.
세계적으로 1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린 뮤지컬 작품들이 거의 영국의 앤드류 로이드 웨버나 카메론 매킨토시의 손에서 나온 겁니다』
―1조원 이상 매출을 올린 작품들이 뭐가 있었습니까?
『「오페라의 유령」이 현재 세계적으로 4조원의 매출을 올렸고, 「캐츠」도 그 정도를 올렸고, 「레미제라블」도 1조원을 올렸습니다』
―지금 공연 중인 「오페라의 유령」의 한국內 매출은 얼마나 될 걸로 보고 계십니까?
『160억원 정도는 되지 않을까 보고 있습니다. 작년 12월2일부터 2002년 6월 말까지 7개월 간 공연하는데, 지금까지(3월 말 현재) 16만명 정도가 관람했습니다. 평균 입장료가 8만원 정도니까 얼른 계산하면 이미 128억원 정도는 확보된 상탭니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적어도 22만명은 보실 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작비는 시작해서 철수할 때까지 110억원쯤 계산하고 있구요』
―객석 점유율이 지금 얼마나 됩니까?
『매일 90%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관객이 얼마나 들어오리라고 예상했습니까?
『처음 목표는 15만명으로 잡았습니다. 그 중에 7만5000명 정도는 우선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7만5000이란 숫자는 어떻게 나온 겁니까?
『그동안 제가 뮤지컬을 제작해 보면서 계산이 나온 거죠. 그런데 이 공연을 하자면 적어도 관객이 15만명은 돼야 하는데, 그렇다면 나머지 7만5000명은 어떻게 하느냐를 놓고 고민을 하다가 이 공연을 처음 본 관객의 50%는 다시 본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제가 미국에 여러 차례 오가면서 그 공연에 오는 사람들을 조사해 봤습니다. 대부분이 여성 관객이었는데, 매회에 30% 이상이 한 번 이상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全 세계적으로 다 그랬답니다. 그래서 그런 확신을 가졌습니다』
―한 번만 보는 사람 7만5000명, 두 번 이상 보는 사람 3만7500명, 나머지 3만7500명은?
『그 나머지는 마케팅을 통한 단체 관람객으로 잡았습니다. 그 계산이 지금까지 다 맞아떨어지고 있습니다. 지방에서 호응이 예상보다 더 좋아서 생각보다 잘 나가고 있어요』
배우, 안무, 연출 다 거친 제작자
그는 그날 오후 2시까지 TV와 인터뷰를 하느라고 점심도 거른 채 또 나를 만나 고역을 치르고 있었다. 그런 그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월간조선 李五峰 사진팀장이 빵을 사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빵을 얻어먹어 가며 인터뷰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 빵을 함께 나눠 먹으며,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1막이 끝난 뒤처럼 인터미션을 가졌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올림픽 안무는 어떻게 하게 되셨나요?
『당시 제가 KBS예술단 상임안무로 있었습니다. KBS예술단에 계시던 한익평 선생님이 전체 안무를 맡게 되셨어요. 그래서 제가 거기 참여하게 된 겁니다』
―마음은 뮤지컬에 가 있는데 방송사에서 안무하는 사람으로 밥벌이를 하는 게 별로였겠군요?
그러나 그는 여기서 무서운 얘기를 한다.
『제가 방송사에서 일을 한 건, 그게 뮤지컬을 하는 데 꼭 거쳐가야 할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방송사에 안무라는 직업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거길 간 겁니다. 저는 배우로 시작해서 제작자까지 왔는데, 배우를 하다 보니 무용이 부족해서 거기 뛰어들었고, 안무를 하다 보니 연출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또 거기 뛰어들었습니다. 또 연출을 하다 보니 제작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작자가 된 것입니다』
그는 1958년 10월20일 경북 포항시 죽도동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성동중, 숭실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예능 쪽 소질은 고등학교 때 드러났다.
『제가 합창반에 들어가 3년 간 활동했습니다. 숭실고등학교가 합창반으로 서울에서 제일 유명했지요』
그는 197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남대 사범대 성악과에 입학한다. 당시 가정형편이 안 좋아져서 서울 유학을 청산하고 다시 고향 근처로 내려갔던 것이다.
그는 이듬해인 1978년 軍에 입대했다가 1981년에 제대해서 대학 2학년에 복학했다. 2학년을 마친 다음 그는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다시는 대학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스물네 살 때였다.
『뮤지컬 배우 하려고 대학을 그만뒀습니다. 당시 한국일보 1면에 극단 현대극장에서 뮤지컬 배우를 모집한다는 광고가 나왔습니다. 당시 金義卿 선생님이 대표셨지요. 거기에 응모해서 1981년 말에 현대극장 단원으로 들어간 겁니다』
―어떻게 뮤지컬을 택하셨을까.
『대학교 다닐 때 제가 연극반에서 활동했는데, 그때 생각으로 연극이 왠지 좀 고루하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성악을 전공하던 제 입장에선 연극에 음악을 넣어 보면 어떨까 하고 실험적으로 저 혼자서 뮤지컬 비슷한 걸 해 보곤 했습니다』
부모의 이해·성원
―그거 참 제대로 맞았네요! 노래하던 사람이 연극을 했으니, 그런 게 나올밖에! 그런데,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오페라로 갈 것이지 왜 뮤지컬을 찾게 됐나요?
『오페라는 클래식한 것이어서 대중이 접근하기엔 좀 어렵겠다는 생각을 한 겁니다. 그래서 대중을 포용할 수 있는 장르가 뭔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연극하는 사람은 참 살기가 힘든데, 왜 그런 길을 택하게 됐던가요?
『우선 제가 그쪽에 소질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대학에서 연극을 할 때는, 1년이면 6개월을 강당에서 잤습니다. 세트도 만들고, 연습도 하고…. 그때부터 저는 무대가 좋았어요』
―부모님은 실망하셨을 텐데.
『아버님은 포항에서 가구점을 하셨는데, 제가 어려서부터 워낙 예능에 소질이 있었기 때문에, 그쪽으로 가겠지 하시고 저를 밀어 주셨어요. 부모님이 항상 저를 이해하시고 밀어 주신 게 제겐 참 큰힘이 됐어요. 아버님은 제가 뭘 하고 싶다고 하면, 안 된다고 하시기 전에 저에게 소질이 있는 일인지를 생각하시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제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셨어요』
―현대극장 단원이 되기도 쉽지 않았겠지요.
『당시 「슈퍼 스타」란 뮤지컬에 김도향, 추송웅, 윤복희씨, 이런 분들이 출연했는데, 앵콜 공연을 하면서 그 작품과 또 다른 작품을 위한 단원을 모집하게 된 겁니다. 거기 오디션에 참가해서 뽑힌 거죠』
代役 배우가 이브 몽탕 役 맡다
―제 생각엔 일단 대학을 졸업하고 했어야 될 것 같은데….
『2년을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뮤지컬을 하자면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여야 하는데, 3년 간 軍생활을 하느라고 기능이 많이 떨어져 있어서, 이걸 빨리 회복해 가지고 쫓아가도 될까 말까 했어요. 2년 간 학교에서 그냥 있으면 도저히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한 겁니다. 지방대학에서 무용도 배울 수 없고, 연기수업도 그렇고』
―오디션은 어렵지 않던가요?
『오디션은 훌륭하게 통과했습니다. 현대극장이 서울 신촌에 있을 땐데, 돌아가신 김상렬 선생이 미국에서 막 돌아와서 「에비타」를 준비할 땝니다. 제가 그 작품에 데뷔를 하게 됐습니다. 「슈퍼 스타」에는 엑스트라로 참여하게 됐구요』
―그 귀중한 대학을 팽개치고 서울에 와서 처음에 한 역이 그래 무엇이었어요?
『「슈퍼 스타」에서 「병사 1」 이런 걸 했습니다. 아주 단역이었습니다』
―그럼 명실공히 데뷔작인 「에비타」에선?
『그 작품에서도 제가 초년병이었으니까 일정한 배역은 없었지요. 「에비타」엔 배역이 다섯 명밖에 없어요. 에비타(에바 페론), 페론 대령, 소녀, 마갈디, 체 게바라, 이렇게 배역이 다섯 갠데, 당시 유명한 분들이 이런 역을 차지했기 때문에 저는 거기 낄 수가 없었죠. 그런데, 마갈디란 배역의 언더 스터디(有事時의 代役)로 오디션에서 제가 합격을 한 겁니다』
―그럼 언제 代役으로 무대에 섰습니까?
『한 번도 못 섰지요. 하하…. 세종문화회관에서 막을 올렸는데, 마갈디 역은 못 했지만 제가 수석 무용수로 뛰게 됐습니다』
―무용은 언제 또 그렇게 배우셨나요?
『아주 짧은 기간에, 두세 달 연습하는 기간에 제 기량이 아주 빨리 늘어난 겁니다. 그래서 앞줄의 가장 가운데서 춤을 많이 추게 됐습니다. 그리고 일정한 배역은 못 받았지만 제가 1인 8역을 했습니다. 군인 1, 노동자, 합창…, 이런 걸 다 해내는데 옷 갈아입을 시간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2주일 간 공연을 했습니다』
―왜 그것밖에 못 했어요?
『저희가 3개월 가량 열심히 연습해서 무대에 올렸는데, 당시 全斗煥 국보위 위원장이 대통령 자리에 앉아야 할 때였어요. 그래서 검열하는 사람들이 와서 군사 독재에 관한 민감한 대사나 장면이 나오는 걸 공연할 때마다 하나씩 빼는 겁니다. 나중에는 공연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만큼 작품이 엉망진창이 됐어요. 20% 정도나 들어내게 됐으니까요. 그렇게 되니까 앞뒤가 연결이 안 됐죠. 그래서 할 수 없이 막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불행 가운데 행운이 찾아왔다.
『「에비타」가 뜻밖에 너무 일찍 막을 내리는 바람에 다음 작품을 재빨리 기획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에디트 피아프의 일생을 그린 「빠담 빠담 빠담」을 무대에 올리게 됐는데, 피아프 역은 윤복희 선생님이 맡으시고 제가 여기에서 이브 몽땅 역을 맡게 됐습니다』
나는 그의 얘기를 듣다가 너무나도 놀라와서 혼자서 박수를 오래오래 쳤다. 배역도 받지 못했던 무명배우가 한다 하는 극단의 뮤지컬 무대에서 일약 주연배우가 됐으니, 꿈이나 동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아닌가? 그게 1982년 1월이었다.
『그때 表在淳 선생님이 연출을 하셨는데, 연습장에서 제가 열심히 연습하는 걸 보고 캐스팅 해주신 겁니다. 저하고는 아무런 친분관계도 없었지요. 저희는 그때 모두 밤 늦게까지 미친 듯이 연습을 했습니다. 이제 연습 그만하고 제발 집에 좀 가라고 해도 아무도 집에 가지 않을 땝니다. 하도 그러니까 金義卿 선생님이 전기요금 많이 나온다고 두꺼비집을 내릴 정도였어요』
―이브 몽탕 역을 잘했을까 걱정되네.
『잘했습니다. 신인 치고는 잘했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윤복희 선생님은 그 당시 쳐다보지도 못할 대선배였고, 추송웅 선생님도 그렇고, 이런 선배들이 「새로 나온 놈이 물건이 괜찮더라」고 안팎에 말씀을 잘 해주셔서, 그 이후 여러 군데서 저한테 출연 섭외가 들어왔습니다』
주연배우가 포스터 붙이러 다녀
―그렇게 인정도 받고 이름도 나고 했는데 살기는 괜찮던가요? 개런티는 얼마나 받았습니까?
『1981년에 처음 극단에 들어가서 한 작품에 3만원을 받았습니다. 연습기간까지 치면 3개월에 3만원을 받았으니까 한 달에 1만원 정도 받은 셈입니다. 당시 대졸 사원 초봉이 30만∼50만원쯤 될 땝니다』
―그 정도로는 최저생계비도 안 될 텐데, 그럼 도둑질을 했나요, 굶고 살았나요?
『극단에서 포스터를 붙이기도 하고 전단을 뿌리기도 하고, 그러면 수당을 조금씩 줬거든요』
―아니 무대에서 커튼 콜을 받는 주연 배우가 그런 걸 했단 말이오?
『그런 건 기본으로 다 했어요. 포스터를 붙여선 안 될 곳에 몰래 붙이다 걸리면 닭장차(호송차)에 실려가서 밤새 유치장에 갇혀 있다가 직결재판을 받았습니다. 재판을 받고 벌금 5000원을 내면 나왔는데, 그게 없어서 몸으로 때웠지요. 저도 네댓 번 걸려서 유치장 신세를 졌습니다』
―포스터를 붙이고 나면 얼마를 줬습니까?
『천원쯤 줬어요. 저희가 밤늦게 연습하다 보면 집에 돌아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극단 측에서 신촌에 여인숙을 얻어 줬습니다. 이것도 그냥 재워 주는 게 아니었어요. 숙박비 대신 풀통하고 버너를 주면서 풀을 쑤라고 했어요. 우린 그때 밀가루에 본드를 섞어서 풀을 쑤었어요. 이걸로 붙이면 접착력이 강해져서 포스터가 잘 안 떨어지죠.
풀을 다 쑤면 우린 2인 1조가 돼서 포스터를 붙이러 나갑니다. 한 사람은 풀통하고 풀비를 들고 다니면서 벽에 풀칠을 하고, 또 한 사람은 그 자리에 포스터를 붙이고, 이러면서 다녔습니다. 이걸 「풀팅」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런 풀팅을 새벽 4시부터 두 시간 동안 하고, 새벽 6시가 되면 이화여대 담을 뛰어넘어 갔습니다』
―왜 캠퍼스 구내에 포스터 붙이러?
『아닙니다. 무용과 학생들 연습하는 강당에 가서 춤 연습을 했습니다』
―아니, 여학생들 무용하는 곳에?
『예. 담을 뛰어넘다가 수위들한테 잡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화대학 陸完順 교수님이 저한테 특별히 써 준 쪽지가 있었는데, 그걸 내 보였죠. 「이 사람은 내가 무용을 가르치는 학생이니 특별히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도록 허락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陸完順 교수는 어떻게 알았어요?
『제가 극단에서 춤을 열심히 추고 있으니까, 무용하시는 분이 陸교수님께 저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무용에 자질이 있으니까 지도해 주십사고』
―그럼 새벽에 아무도 없는 홀에서 혼자 무용연습을 했단 말입니까?
『새벽 6시부터 네 시간쯤 혼자 연습실에서 땀을 흘리며 연습을 하고 있으면, 10시쯤 학생들이 옵니다. 그러면 남자로선 저 혼자만 특별히 여학생들과 같이 12시까지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점심 시간이 되면 구내식당에 갈 돈이 없으니까 저 혼자 극단에 와서 라면 하나 끓여 먹고, 또 극단에서 무용연습과 노래연습을 했습니다. 오후 4시가 되면 또 그날 공연할 작품 연습을 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그때 하루에 열두 시간씩 연습했습니다』
그는 뮤지컬 배우로도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현대극장에서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주인공 역을 맡은 후에 극단 민중으로 스카우트돼 가서 「우리 집 식구는 아무도 못 말려」, 「선인장 꽃」, 「나비처럼 자유롭게」에 연달아 주인공을 맡았다. 그래도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1984년에 극단 마당 세실극장에 와서 월급 15만원을 받으며 「임의 침묵」 안무를 맡기도 했다.
올림픽 按舞로 실력 인정받아
이럴 즈음 그는 KBS 예술단에 상임안무로 들어가게 된다.
『KBS의 한익평 선생님이 1984년에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안무를 맡으셨어요. 제가 거기서 주인공 토니 역을 했습니다. 그때 韓선생님이 제가 춤추는 걸 보고 어떤 부분은 「네가 한번 안무를 해 봐라」 하고 맡기시더라구요. 그때 제게 맡기신 일을 열심히 했는데, 韓선생님은 제가 안무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그후 저를 죽 지켜보시더니 1985년 10월에 KBS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잘 됐습니다. 먹고 사는 건 해결될 테니까.
『그때 제가 너무 힘들 때였어요. 1년 동안 벌어서 손에 쥐는 돈이 10만원도 채 안 됐어요.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KBS에 특채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또 韓선생님도 일단 KBS에 들어와서 「네 안무능력을 한번 마음껏 키워봐라. 월급도 받으니까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지 않느냐. 또 네가 그렇게 하고 싶어하는 뮤지컬을 틈틈이 하도록 시간도 내주겠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월급이 얼맙디까?
『70만원쯤 받았습니다』
―1년에 10만원도 못 벌다가 한 달에 70만원을 받으니 기분이 어떱디까?
『생활이 완전히 달라졌죠. 생활도 안정됐구요. 늘 신세만 지던 부모님한테 선물도 사 드릴 수 있었구요. 저랑 같이 그렇게 어렵게 지내던 동료들을 대학로에 불러놓고 밥도 살 수 있었구요. 그게 너무너무 좋았어요. 그 친구들은 아직도 연극을 계속하고 있는데 1년에 받는 돈이 1000만원도 안 될 겁니다』
―KBS에서의 생활은 어땠어요?
『처음에 들어가니까 옛날 방식의 쇼를 하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걸 다 뜯어 고쳤죠. 당시엔 타이즈를 입고 머리를 묶고 춤을 췄습니다. 제가 무용수들 옷을 일반 의상으로 바꾸고 머리도 다 풀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전체적으로 무대가 좀 현란하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또 문제가 돼서 쇼 프로그램 담당 PD가 방송위원회에서 지적도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쇼 프로그램이 좀 현대적으로 바뀐 건 그때부터였습니다』
―88 서울올림픽 개막식에 참여해서도 인정을 받았는데, 그때도 힘들었겠죠?
『제가 개회식의 마지막 행사 안무를 맡았습니다. 李御寧 前 장관님이 낸 아이디어를 가지고 6개월 간을 허비하고 그게 실현성이 없어서 한 달을 남겨 놓고 저한테 일이 떨어졌어요. 그래서 제가 아이디어를 낸 게, 가운데 놓을 무대를 24개의 문에서 군인들이 들고 나와 맞추게 하고, 코리아나가 그 무대에 등장하게 하고, 또 3000명의 학생들이 24개의 문에서 몰려나와 아리랑의 휘몰이 모양으로 커다란 물결처럼 돌면서, 한 곳으로 몰리도록 한다는 거였습니다. 결국 그게 채택돼서 개회식 마지막을 장식했습니다』
1992년 그는 SBS로 옮기게 된다.
『제가 SBS로 가게 된 것도 뮤지컬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거기 가선 「쇼 탤런트團」을 만들었는데, 노래, 춤, 연기가 다 되는 단원들을 모집해서 팀을 짰습니다. 그때 단원들은 쇼 프로그램 이외에도 많은 프로그램에 출연했습니다. 어떤 땐 리포트도 했습니다. 제가 그때 그 단장이었습니다. 이것도 없던 걸 제가 만든 거죠』
―거기서도 뮤지컬을 했습니까?
『예, 1992년에 SBS로 가서 처음 제작한 게 뮤지컬 「미녀와 야수」였어요. 그것도 아주 성황리에 잘 끝났습니다. 저는 그때 안무와 구성을 맡았습니다. 그게 좀 발전돼서 SBS에서 뮤지컬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좀 있어 보니까 방송사에서 생각하는 것하고 제가 생각하는 것하고는 갭이 많았습니다. 저는 오늘날과 같은 뮤지컬로 발전되기를 바랐는데, 방송사에선 작은 규모로 작은 성공을 거두려고 하는 쪽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1994년에 SBS를 그만뒀습니다』
「재즈」 제작했다 집 날려
그는 마침내 본격적인 뮤지컬 제작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1993년에 제가 「나이세스」(삼성영상사업단의 前身)와 접촉해서 뮤지컬 사업을 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는데, 1994년에 이 회사가 삼성영상사업단으로 바뀌면서 제 제안을 받아들이고 같이 일하자고 해서 그곳으로 옮겼습니다. 그 회사에 직접 입사한 건 아니고, 삼성영상사업단의 공연제작사를 별도 법인으로 설립해서 그 회사에 대표이사로 갔습니다. 그 회사이름이 T&S(Time & Space의 頭音字)였지요. 삼성영상사업단의 투자를 받아서 제가 설립한 회삽니다. 이게 바로 본격적인 뮤지컬 제작사였습니다』
―소원풀이 하셨네!
『예 그랬습니다. 1994년에 T&S 설립을 하고 1995년엔 뮤지컬 아카데미를 설립했습니다. 본격적인 뮤지컬 배우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능력 있는 배우를 양성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만든 겁니다. 1년 코스였어요. 학생을 모집했는데 대학생도 있었고 직장인도 있었습니다. 주로 밤 시간에 교육했는데, 음악, 무용, 연기 같은 걸 가르쳤습니다. 처음엔 30명을 모아서 가르쳤는데 계속 적자였어요. 그러나 후엔 학생이 80명까지 몰리면서 좀 나아졌습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까?
『예,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다른 분이 운영하고 계시지만. 거기 출신들이 뮤지컬 배우로 많이 활약하고 있으니까 성공한 셈이죠. 지금 그 학교가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있습니다』
―T&S에선 무얼 제작했던가요?
『1995년에 「브로드웨이 42번가」를 제작했지요. 이건 삼성영상사업단의 첫 사업으로 제가 제작한 겁니다』
―이게 제작자로서 첫 작품입니까?
『그 전에도 제작을 한 적이 있습니다. 1992년 봄에 KBS홀 개관기념으로 프랑스 뮤지컬 「재즈」를 제작했습니다. 그때 제가 집을 팔아서 이걸 제작했습니다. KBS를 그만두고 SBS로 가기 전에 「재즈」를 만들었어요』
―집을 얼마에 팔았는데요?
『당시 방배동에 집(아파트)이 있었는데, 그걸 1억8000만원에 팔았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그게 신문에 날 정도로 큰돈이었습니다. 뮤지컬 하나 만드는 데 1억8000만원을 들인다는 게 아주 큰 뉴스였어요. 제가 오디션해서 사람 뽑고, 개런티를 주고, 기획, 마케팅까지도 전부 했습니다』
―그렇게 큰돈을 들였는데 결과는 어땠어요?
그는 이 질문에 껄껄 웃었다.
『표 팔아 들어온 돈이 모두 1800만원이었습니다. 완전히 망했습니다』
―큰일 났다! 집 날렸네!
『완전히 날라갔습니다. 그 집은 올림픽 이후 KBS에 근무하는 동안 제가 이벤트를 많이 해서 번 돈에다 집에서도 좀 도와줘서 마련한 거였습니다. 그걸 단 한 번에 날려 버렸습니다』
―집은 날렸지만 그때 많은 걸 배웠겠네요?
『참 많은 걸 배웠습니다. 「과연 이 작품이 얼마나 많은 관객들한테 호응을 받을 수 있겠느냐. 그리고 제작비로 얼마가 투자가 되면, 수익이 최소한 얼마는 나올 수 있겠다」 하는 걸 예측해야 되는데 이게 전혀 안 됐던 겁니다. 그런데도 저한테는 작품을 잘 만들어야 한다는 욕심만 있었기 때문에 무리하게 투자를 한 겁니다. 프로듀서는 제작과 기획에 균형을 잘 잡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또 그렇게 참패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극장이 너무 안 알려졌다는 겁니다. KBS홀이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예약을 받으면 「KBS홀이 강남에 있습니까, 강북에 있습니까?」 이렇게 묻는 겁니다. 그래서 극장의 위치가 좋지 않으면 흥행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그때 깨달았습니다』
『집 날리고도 성공 자신했다』
―재즈는 며칠간 공연했어요?
『열흘간 했는데 하루에 300명도 안 들었습니다. 그 큰 KBS홀이 텅 빌 때, 정말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부인은 뭐라고 하던가요?
『그땐 결혼 안 했을 땝니다. 바로 그후(1992년)에 결혼했습니다. SBS 탤런트였던 사람(배민정·36)하고 했습니다. 사실은 그 전에 제가 KBS에 있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요. 코카 콜라, 쾌남, 이런 데 모델로도 활동했습니다.
SBS에 근무할 때 장모님한테 제가 픽업당했던 것 같아요. 장모님이 저를 좋게 보시는 것 같아서 제가 달라붙어서 열심히 졸랐습니다. 그때 제가 너무 어려웠던 시기였기 때문에 누군가를 만나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위로받을 데도 없구요. 그래서 서둘러서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결혼이 순조롭게만 진행된 건 아니었다.
『장인 어른이 많이 반대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앞으로 돈도 많이 벌고, 성공할 자신이 있습니다」 하고 말씀드렸어요. 제가 구체적으로 「6∼7년은 고생을 해야 될 겁니다. 그렇지만 10년 안엔 꼭 성공하겠습니다」 하고 설득했지요』
―아니 금방 재즈로 망한 사람이 어디서 그런 자신이 생겼어요?
『저는 그때 망했지만, 그 전에도 몇 개 뮤지컬 공연들이 흥행에 성공했었거든요. 1987년에 당시 시민회관(지금 서울시의회)에서 공연한 「가스펠」을 보러 매일 사람들이 덕수궁 돌담길을 다 돌도록 줄을 섰습니다. 또 마당 세실극장에서 「임의 침묵」을 공연할 때도 두 달 동안 객석을 가득 메웠어요. 그런 걸 보면 재즈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뮤지컬을 본격적으로 제작하면 꼭 성공할 것 같았어요』
그는 지금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있는 35평형의 아파트에서 단란하게 살고 있다. 딸(11세) 하나만을 두었다고 한다.
『제가 일을 하다 보니까 너무 바쁘고, 또 이 일이 너무 좋아서 열심히 하다 보니, 아이들한테 잘할 자신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하나만 낳았습니다』
다시 얘기가 본론으로 돌아간다.
―T&S에서 「브로드웨이 42번가」 다음에는 또 무얼 제작했습니까?
『1996년에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를 제작했습니다. 그것도 성공했는데, 삼성영상사업단이 다음 작품으로 저를 통하지 않고 직접 「눈물의 여왕」을 제작해서 저와 거리를 두게 됐습니다』
―그것도 성공했습니까?
『참패했죠. 삼성영상사업단이 저하고 파트너십이 깨지면서 망했습니다. 그 결정적인 계기가 「눈물의 여왕」이었습니다』
―정말 삼성영상사업단이 「눈물의 여왕」이 됐군요. 그 이전에 두 작품이 성공한 비결은 어디 있었어요?
『우선 조직과 자본력이 강했습니다. 자본력이 있어야 마케팅을 할 때 適時適所에 돈을 투입할 수 있거든요』
―우리나라에선 관객이 어느 정도 들어오면 성공했다고 합니까?
『중극장(500∼800석)용이라면 1만5000명 이상, 대극장(1500석 이상)용이라면 3만명 이상만 관객을 동원하면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중극장용은 제작비가 보통 4억∼5억원이 들고요, 대극장용은 10억∼15억원 정도 들어갑니다. 그러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망하곤 한나절을 울었다』
그러나 행복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제가 T&S를 경영하면서 삼성영상사업단을 믿고 사업을 너무 벌였어요. 그러는 바람에 T&S가 그만 부도가 나버렸습니다』
―뮤지컬을 연달아 성공했는데 부도가 나다니!
『삼성영상사업단과 대형 프로젝트를 함께 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저는 그걸 믿고 다음에 공연할 두 작품에 대해 미국 업체들과 미리 가계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삼성영상사업단이 망해서 사업을 접으면서, 제가 지불한 가계약금이 전부 날아가버렸어요. 삼성에서 돈을 안 댄다면 그 사업은 할 수 없는 거였습니다.
저는 삼성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IMF가 터졌어요. 그래서 제가 투자했던 돈도 하나도 못 건졌고, 삼성이 뮤지컬 아카데미에 지원하던 돈도 끊어졌고, 그러면서 사무실 월세가 밀리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1998년에 부도가 난 겁니다. 그때 역삼동에 있는 빌딩의 지하층 200평을 빌려쓰고 있었는데, 월세를 못 내니까 나중엔 보증금까지 다 까먹고 결국은 문을 닫았습니다』
―T&S가 삼성이 투자한 회사라면서요?
『파트너십이 깨지면서 투자한 돈을 다 빼내 간 상태였습니다』
―또 망했으니 큰일났네!
『그때는 집 팔아서 재즈 올리고 쫄딱 망했을 때보다도 더 심각한 상황이었어요. 두 번째 망하고 나니까 내가 또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몰려왔습니다. 또 집에는 와이프와 애도 있고, 그래서 부담이 더 되었습니다. 그때도 조그만 전세집에 살았는데 그것마저 내놓고 처가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정말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부인이 뭐라던가요?
『와이프가 뭐라고 하기 전에, 돈 벌러 나가더군요. 옥외 광고회사의 영업사원으로 들어가서 일거리를 따러 다녔습니다. 광고업계도 참 어려운 때였어요. 광고회사들이 다 문을 닫을 때였는데, 非전문가가 뛰어들어서 광고를 따러 다녔습니다. 그래도 와이프 덕에 최저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무실은?
『직원들도 다 그만두고 나가고…, 하루아침에 완전히 물거품이 된 거죠. 스튜디오를 꾸미느라고 2억 가까이 들었는데, 그것도 한 푼도 못 건지고 그냥 몸만 나왔습니다』
―또 죽고 싶었겠네!
『네, 많이 울었지요. 택시를 타고 목동으로 가는데 도중에 왈칵 눈물이 나서 여의도 근처 방배 지하철역에서 내렸어요. 거기서 KBS별관까지 걸어가면서 다리 위에서 난간을 붙잡고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제가 방배역에 내린 게 낮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둑어둑한 밤이었습니다. 한나절은 지난 것 같았어요. 거기서 KBS별관 뒤에 있는 포장마차로 가서 못 먹는 술을 마셨습니다. 전 소주 한 병만 마시면 죽다시피 하는데, 두 병도 더 마신 것 같았습니다. 그후 어떻게 됐는지 깨어 보니까 집이었어요. 그날 이후에 와이프가 돈벌러 나간 겁니다』
뉴욕에 가서 「오페라의 유령」 보러 매일 출근
―그러곤 뭘 했어요?
『처음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었지요. 그러다가 「아, 이럴 때가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그때도 「IMF가 영원히 가겠느냐, 언젠가는 끝나겠지. 그러면 빨리 이 뮤지컬 사업을 시작해야 된다」 하고 생각하며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래서 뮤지컬 준비를 다시 하기 시작했습니다』
―뮤지컬말고는 할 게 없던가요?
『뮤지컬말고는 하고 싶은 사업도 없고, 다른 덴 의욕도 없었어요. 나에게는 오로지 뮤지컬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전, IMF가 끝나면 오히려 시달리고 쪼들린 사람들의 마음이 문화를 그리워할 것이다, 문화로 빈 마음을 치우려고 할 것이다, 그러면 문화 시장이 커질 것이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IMF 때 「오페라의 유령」 생각을 더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어려운 때에 미국으로 날아갔다.
『제가 와이프한테 「내가 직접 브로드웨이에 가서 오페라의 유령을 보면서 뮤지컬 제작 구상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와이프가 절 물끄러미 보더니 미쳤다고 그러더라구요. 생활비도 없는데 미국엘 가겠다니까. 그래도 와이프가 어디서 100만원을 구해 왔어요. 그 돈으로 60만원짜리 할인 티켓을 사서 미국에 갔습니다. IMF 때니까 다들 어려워서 그런지 비행기 안이 텅텅 비었더라구요. 그래서 누워서 갔습니다. 그때가 1998년 가을이었어요』
―수중에 30만∼40만원 남았을 텐데 그 돈 가지고 미국 가서 어떻게 했어요?
『뉴욕 퀸즈에 아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집 가서 1주일 간 신세지면서 매일 지하철 타고 가서 「오페라의 유령」을 봤습니다. 며칠 지나니까 돈이 떨어져서 1막 끝나고 난 다음에 그냥 공짜로 들어갔습니다. 브로드웨이 머제스틱 시어터엔 로비가 없어서 1막 끝나면 인터미션에 사람들이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시작하면 우르르 들어갑니다. 그때 따라 들어가서 보고 또 보고 했어요』
―「오페라의 유령」을 여러 번 보면서 뭘 느꼈어요?
『우리나라에 들여와도 공연이 성공할 거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저는 경제는 몰랐지만 IMF가 늦어도 2000년이면 끝날 걸로 봤어요. 그래서 빨리 공연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돌아와서 돈이 좀 있는 친구를 찾아갔어요. 그 친구들한테, 「오페라의 유령을 하면 꼭 될 것 같다. 이게 너무 크면 작은 공연을 두 번 하고 이 유령을 하자」고 설득했지요.
그랬더니 그 친구가 1억을 출자해서 다시 회사를 열었습니다. T&S는 부도가 나서 다시 열 수 없기 때문에 1999년에 「스타 서치」라는 회사를 새로 차렸습니다. 그리고 T&S가 쓰던 역삼동의 그 사무실과 스튜디오를 다시 인수했습니다. 그 친구가 투자한 돈 1억원을 사무실 보증금으로 주고 들어간 겁니다. 그 자리에 가 봤더니, IMF라 사무실이 나가지 않아서 그대로 있었어요. 그 모습 그대로였는데 거미줄만 쳐져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 좋아서 저 혼자 200평짜리 사무실과 스튜디오를 전부 청소했습니다. 청소하는 데 힘드는 줄도 몰랐습니다. 너무 행복했습니다. 물걸레질도 하고 왁스도 바르고, 그러다 보니 새벽이 됐어요. 그런데 전기 배선이 뭐가 잘못 돼서 제가 그걸 만지다가 감전이 돼서 그냥 기절해버렸어요. 한참 있다가 깨어났는데 근육이 막 떨렸어요. 그러다가 눈이 떠졌는데 또 일어나서 그 이튿날 아침까지 청소를 했습니다. 아침에 집에 가서 옷 갈아입고 다시 와서 또 청소를 했습니다』
「브로드웨이」 성공으로 再起
이제 일이 서서히 풀리는 것 같았다.
『사업을 일으킬 돈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투자회사를 열심히 찾아다녔어요. 그러면서 세트도 있고 의상도 있던 「브로드웨이 42번가」를 다시 올리기로 한 겁니다. 그러나 선뜻 투자하겠다고 나서는 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제 공연을 열심히 보시는 투자회사(INI) 회장님이 한 분 계셨어요. 가끔 밥도 잘 사주시고, 또 어떤 때는 영덕게를 한 차 가득 싣고 와서 우리들에게 먹이곤 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길을 가는데 제 앞에 세단이 딱 서더라구요. 그러더니 누가 차 안에서 「薛감독!」 하는 겁니다. 쳐다보니까 그분이더라구요. 너무 반가웠어요. 그래서 그분한테 인사를 하자마자 그랬어요. 「투자 좀 해주세요. 제가 지금 해야 될 게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좀 당황해 하시는 거 같았어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만나자마자 돈 얘기를 하니까 그럴 거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분은 저한테 연락처를 달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날은 그렇게 헤어졌어요.
그런데 그 다음날 전화가 왔어요. 「얼마가 필요한가?」 「2억이 필요합니다」 「확실하게 얘기해. 2억인가 3억인가?」 「사실은 2억5000이 필요합니다」 「언제까진가?」 「다음 주 월요일까집니다」 「통장번호를 얘기하게」
그러고 1주일을 기다렸는데 월요일에 보니까 그 돈이 통장에 들어와 있어요! 이건 참 운명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뭘 믿고 아무런 보증도 없이, 그 많은 돈을 선뜻 주었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계약도 안 했으니까요. 그동안 제가 이 사업에 대해 보였던 열정 하나만을 믿고 주신 것 같아요. 사기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 돈을 어떻게 썼어요?
『그 돈으로 「브로드웨이 42번가」를 공연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때가 1999년 12월로 IMF 끝 무렵이었는데도 그 공연이 흥행에 아주 성공했어요. 서울 역삼동에 있는 LG아트센터에서 한 달 동안 공연했는데 객석의 거의 90％가 찼습니다. 이때 제가 LG아트센터를 알게 됐고, 그 바람에 극장의 도면을 보게 됐고, 그래서 이번에도 거기서 공연을 하게 된 겁니다』
―돈 벌어서 2억5000 다 갚았어요?
『물론 다 갚았구요, 이익금까지 많이 나눠 줬습니다. 또 친구한테 빌린 건물 보증금 1억도 다시 돌려 줬고, 집도 전세로 하나 다시 얻었죠. 3억쯤 들여서 2억 정도 벌었으니까요. 더 중요한 건 이 작품 때문에 제가 투자를 받기 쉬워졌다는 거죠』
이야기는 漸入佳境(점입가경)이다.
『공연이 끝난 다음에 제가 INI 회장님한테, 「앞으로 본격적인 사업을 해보고 싶으니 투자를 해 주십시오」 했어요. 「얼마나 필요한가」 저는 크게 불렀습니다. 「20억 정도 필요합니다」 「좋아, 그럼 지금 당장 5억을 주고, 나머지는 2년 안에 나눠 주지」 그러시더니 당장 5억을 주셨어요.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대한 굉장한 확신이 있는 분 같았어요.
그분 덕분에 회사를 키웠습니다. 스타 서치가 자본금 5000만원짜리 회사였는데, 이걸 2000년 2월에 자본금 5억원짜리 회사로 키웠어요』
자나 깨나 「오페라의 유령」
―그때 투자받은 돈은 모두 얼마였습니까?
『INI에서 5억을 받고 15억을 순차적으로 받기로 했고, 또 다른 몇 군데서 15억을 받기로 약속을 받아놓은 상태였습니다』
―그 돈으로 무얼 하려고 했습니까?
『미국의 뮤지컬 제작사인 「월트 디즈니」와 접촉해서 거기서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미녀와 야수」, 「라이언 킹」, 「아이다」, 이런 작품들을 시도해 봤습니다. 그러면서 「오페라의 유령」도 같이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빠른 시일 안에 할 수 있는 걸 찾고 있었습니다』
―실례지만 영어를 잘합니까?
『저는 영어를 잘 못해서 항상 통역과 같이 다닙니다. 이런 일을 자칫 잘못 했다간 0.1%로 몇억원이 왔다갔다하는 일이 생기거든요. 또 이것은 다른 것보다 딜(Deal)이 상당히 복잡합니다. 그래서 저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 하는 걸로 하고 통역을 시킵니다』
―월트 디즈니에선 환영받았습니까?
『절 보고 「뭘 했었느냐?」고 해서 「브로드웨이 42번가,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같은 거 제작했다」고 했더니 「그 정도 작품 가지고는 우리 것 못 한다」고 하면서 그때가 2000년인데 「2005년 이후에나 한번 생각해 보자」고 하더라구요. 또 그쪽에서 「다른 데하고도 접촉하고 있느냐」고 해서 「RUG하고 오페라의 유령에 대해 알아보고 있다」고 했더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막 책상을 치면서 拍掌大笑(박장대소)를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더니 그 사람들이 눈치채고 안 웃더라구요』
LG아트센터 10개월 대관 계약이란 모험
이보다 앞서 그는 1999년, 5억을 투자받고 나서 호주에 있는, 「오페라의 유령」 제작회사 RUG의 매니지먼트 회사 (RUC, Really Useful Company) 지사장 팀 맥펠레인을 서울로 초청했다.
『팀은 서울에 와서 1주일 간 저를 여러 가지로 시험했어요. 불시에 저를 공연장으로 데려가서 배우들하고 만났을 때, 배우들이 저한테 보여 주는 태도와 감정, 또 그 극장의 담당자가 저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저에 대한 신뢰도와 자질을 보는 거였어요. 저는 그때 그걸 모르고 가자는 대로 따라다녔어요.
그러고 나서 그 사람 하는 말이 「오페라의 유령은 너무 커서 위험성이 크다. 그러니 우선 캐츠(Cats)를 해 보는 게 어떠냐」고 해요. 그러면서 「제작비를 어떻게 구하겠느냐」고 묻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돈은 다 구할 수 있다. 염려하지 말라」고 안심시켰어요. 저는 그때 제작비가 70억이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팀은 100억은 들 거라고 했어요』
―그렇게 많은 돈을 구할 자신이 있었어요?
『RUC 지사장도 저한테 똑같은 질문을 했어요. 「그렇게 많은 돈이 있느냐?」고. 그래서 제가 급한 김에 잘 아는 창업투자 회사 사장님들 몇 분을 불러 모았어요. 그 분들이 오기 전에, 「제가 이 공연을 꼭 해야 되겠으니까 보증한다고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들이 다 오셔서 「개런티하겠다」고 얘기해 줘서 팀 지사장이 어느 정도 가능성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가면서 저한테 「극장 대관 기간을 10개월로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엔 극장을 10개월 간 빌린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요. 그런데도 LG아트센터 대관 담당자를 설득해서 6개월 만에 10개월 간 대관하기로 계약을 먼저 했습니다. 이게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었어요. 투자받은 돈 5억원 가운데 절반인 2억5000만원을 대관료 계약금으로 낸 겁니다. 공연을 못 하게 되면 날릴 수도 있는 데 말입니다.
저는 그 계약서를 가지고 호주에 가서 팀을 만났습니다. 그랬더니 팀이 놀라더라구요. 그러고 나서 기술감독을 서울로 불러서 극장에 대해 문제가 없는지 검토시켰습니다. 그 사람이 LG아트센터를 자세히 보고 나서 가능하다는 귀띔을 해 주고 갔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때부터 돈을 구하러 뛰어다녔지요』
자금을 모으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개인 중에 35억을 투자하겠다는 분이 계셨어요. 그분은 외국에 나가서 「오페라의 유령」을 여러 번 보셨답니다. 가족들도 다 봤답니다. 그걸 보면서 한국에서도 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셨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저는 그때 「오페라의 유령」하고 「수호천사(De la Guarda)」를 기획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2004년까지 커다란 공연계획을 세워놓고 일을 하다 보니까, 이런 큰 공연을 하기 위해서는 조그만 개인회사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대외적인 신용도 때문에 자꾸 뜻하지 않은 장벽에 부닥쳐야 했습니다』
일이 잘 풀리는 머리여서 그런지 이 문제 역시 쉽게 풀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참에(2000년 12월), 오리온 그룹의 계열회사인 제미로(Zemiro)란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만나게 됐습니다. 그래서 제미로, 네오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저, 이렇게 三者가 합병형식을 거쳐 「제미로」란 회사를 다시 탄생시켰습니다. 그리고 제가 공동대표로 앉게 됐습니다. 「스타 서치」는 그냥 두고, 제가 가지고 있는 사업성을 그 회사에 투자한 겁니다』
―그럼 이 제미로에 와서 「오페라의 유령」이 다시 시작됐군요.
『그렇습니다. 스타 서치의 이름으로 호주 측과 「오페라의 유령」에 대한 가계약을 하고 그걸 가지고 제가 제미로로 온 겁니다』
―제작비는 모두 제미로가 단독으로 투자했나요?
『코리어 픽쳐스에서 20억을 받고 나머지 30억을 제미로에서 투자해서 50억을 사전 제작비로 쓰게 된 겁니다. 그 밖에 추가로 2억, 3억씩 받은 게 10억이 조금 넘습니다. 일단 공연이 시작된 다음에 들어가는 운영경비(Running Cost)를 제작비에 포함시키는데, 이걸 포함해서 「오페라의 유령」의 총 제작비가 110억이라고 하는 겁니다』
「미스 사이공」 전용극장 지을 계획
이렇게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제미로의 薛度胤 대표는 2001년 4월 오스트레일리아의 RUC와 본계약을 체결한다.
『그때는 조선호텔 컨벤션 홀에서 거창하게 제작발표회를 했습니다. 그것도 마케팅이었으니까요』
―이제까지 이 일을 해 오는 동안 무엇이 제일 어렵던가요?
『RUC에서 온 사람들이 한국 상황을 전혀 이해해 주지 않으려고 하는 겁니다. 로열티를 낮추려고 하루 종일 협상을 해도 꿈쩍도 않는 겁니다. 저는 앵무새처럼 계속 똑같은 얘기를 반복했습니다. 「당신들이 한국 시장이 커진 다음에 들어오면 이미 늦는다. 지금 先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지금 선점할 수 있는 파트너가 바로 나니까 조건을 좀 좋게 해달라. 조건이 좋지 않으면 한국에서 공연 못 한다」 이렇게 똑같은 얘기를 계속 반복했어요. 지겹도록. 그래도 답은 똑같았어요. 「그럼 공연 못 한다」예요.
꼬박 이틀을 그렇게 싸웠어요. 사흘째 오후에 이렇게 얘기하더라구요. 「멕시코도 오페라의 유령을 했다」 저는 멕시코가 오페라의 유령을 했으리라곤 상상을 못 했지요. 왜냐하면 멕시코가 우리나라보다 경제력이 훨씬 떨어진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전 그 얘길 왜 하나 했더니 그쪽에서 이러는 거예요. 「멕시코 수준으로 해 주겠다」 그래서 극적으로 이 계약이 성사된 겁니다』
―멕시코와는 어떤 수준이었나요?
『全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었어요』
―그게 얼만데요?
『비밀 유지 사항이기 때문에 다 밝힐 수는 없지만 순 매출의 10%를 조금 넘는 선입니다』
―그럼 일본은?
『21%입니다. 심지어는 이런 공연도 있습니다. 1주일 공연에 100만 달러를 받아가고, 또 수익의 70%를 가지고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작품이 현재 거론되고 있는 「미스 사이공」 같은 겁니다. 「미스 사이공」은 「오페라의 유령」보다도 더 클 겁니다』
―그것도 한번 해 볼 생각 있어요?
『예, 준비하고 있습니다. 「미스 사이공」은 규모가 훨씬 더 커서 LG아트센터에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컨소시엄을 만들어서 새로운 극장을 짓고 거기서 공연을 할까 합니다.
최근 관계되는 분들과 모임을 가졌는데, 200억원쯤의 펀드(Fund)를 마련해서 독립법인을 만든 다음, 그 가운데 100억을 투자해서 극장도 짓고 공연도 하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그게 2004년쯤 실현될 겁니다.
지금 세종문화회관 뒤에 짓고 있는 극장은 공사비가 15억쯤 들어가는 데 저희가 3년을 쓰고 그 이후에는 세종문화회관에 기부체납하기로 한 겁니다. 거기서 「수호천사」를 일단 1년 동안 공연할 예정인데, 가능하면 2∼3년 연장공연을 했으면 합니다』
보석 박힌 무대의상 7000만원짜리
―薛대표의 꿈은 비싼 로열티 주고 외국 작품 공연하는 건 아닐 것 같은데….
『그렇죠. 우리는 우리 작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것을 소재로 한 우리 것을 만들겠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권리를 가지고 있는 작품을 만들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작품을 저희는 지금 미국 현지에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 작품을 미국에서 준비하고 있다니!
『미국의 뉴욕대학(NYU) 안에 2년 과정의 NYU 프로그램이 있는데, 여기서 뮤지컬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저희가 연간 2만5000달러 정도의 장학금을 줄 예정입니다. 이렇게 관계를 맺으면서 거기서 개발하는 좋은 콘텐츠를 우리가 이용할 계획입니다.
여기서 개발된 콘텐츠를 놓고 한국 돈이든 미국 돈이든 끌어들여서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공연해 볼 계획입니다. 이 계획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습니다.
또 저도 NYU 프로그램 같은 것을 한국에서도 해 볼 작정입니다. 서울 뮤지컬 아카데미는 배우만 양성하고 있지 스태프를 양성하지 않아서 한계가 있습니다. 작가, 작곡가도 양성해야 하거든요』
―순수한 한국 작품으로 「명성황후」도 성공했잖아요?
『「명성황후」는 소재가 너무나 한국적이었기 때문에 세계인들이 공감하는 데 한계가 있어서 외국 나가서 별로 호응을 못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좀더 철저하게 상업적으로 접근해서 그야말로 브로드웨이에서도 투자를 받을 수 있는 소재를 개발해서 공연하려고 합니다. 이런 걸로 시작해서 앞으로 마침내는 순수한 우리 힘으로 세계적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게 3년이 걸리든 5년이 걸리든』
―이번 공연에 쓰인 무대장치, 의상 같은 건 어떻게 했어요?
『로열티 안에 세트, 의상, 조명, 음향의 대여 비용이 전체의 50% 정도 포함이 돼 있습니다. RUG가 처음 「오페라의 유령」을 제작할 때 세트, 의상, 조명, 음향 이런 거에 모두 200억원쯤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걸 저희들한테 빌려준 겁니다』
―「오페라의 유령」을 RUG의 투어 공연으로 들여왔더라면 훨씬 쉬웠을 텐데 굳이 우리 배우를 써서 우리말로 공연해야겠다는 생각은 왜 하게 됐습니까?
『제가 미국에서 그 공연을 여러 차례 봤는데 가사를 알아듣지 못해서 너무 답답했습니다. 또 과거부터 공연을 제작해 오면서 깨달은 것이 우리나라 관객들이 이해도가 낮으면 공연을 외면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우리말 가사로 가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리지널 프로덕션의 작품을 한국 배우를 내세워서 공연한 것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여기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메이저 프로덕션에선 한국의 배우를 인정하지 않으면 이런 기회를 주지 않거든요.
또 「오페라의 유령」을 自國語(자국어)로 한 공연으로, 이번 공연이 세계에서 열네 번째라는 것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이건 세계 최고의 뮤지컬 프로덕션이 한국의 실력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국의 시장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의상도 그쪽 걸 가져왔지요?
『예, 옷 한 벌에 7000만원짜리도 있습니다. 소프라노 칼롯타가 입고 나오는 옷이 보석으로 꾸며진 7000만원짜리 옷입니다. RUG에선 의상비로만 30억원이나 썼답니다. 그쪽 옷을 그대로 가져와서 우리 배우에 맞게 다 수선을 했습니다. RUG에서도 괴로웠지요. 외국 배우들의 체구가 일반적으로 큰데 일단 조그많게 줄여 놓으면 다시 치수를 늘릴 수는 없잖아요. 다른 나라에 또 빌려줘야 할 텐데』
유령처럼 나타난 유령役 윤영석
―배우들은 어떻게 뽑았지요?
『「오페라의 유령」의 모든 제작과정을 마케팅으로 이용했습니다. 첫 번째 오디션을 아주 거창하게 엄청난 돈을 들여서 광고를 하고 실시했습니다. 그것도 마케팅의 일환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오디션을 한 번 할 때마다 1억5000만∼2억원씩 들더라구요.
첫 번째 오디션은 남산 서울예대에서 했는데 클래식 쪽에서 반발이 많았어요. 그래서 1차 오디션은 클래식계의 방해공작과의 싸움이었어요. 제가 개별적으로 만나고 다니면서, 「미국에선 엄청난 오페라 가수가 오페라의 유령에 출연하고 있다」면서, 그렇게 설득했는데도 클래식을 전공한 분들이 많이 안 왔어요. 1차에선 앙상블(主演級 外의 출연자) 30% 정도밖에 못 건졌습니다.
그래서 2차 오디션을 또 거창하게 했습니다. 이번에는 좀 설득이 돼서 클래식쪽에서 아주 많이 왔어요.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유망한 성악가들 중에 많은 분들이 참가했습니다. 그런데도 다 떨어지고 칼롯타役의 윤이나씨만 결정됐습니다.
다른 분들이 떨어진 건 그분들이 노래를 못 해서가 아니고, 그분들의 음색이나 성격이 이 배역에 안 맞아서 그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런 사유를 참가하신 분들에게 일일이 다 편지로 전했습니다. 결국 2차 오디션에서도 절반 정도밖에 못 뽑았어요.
3차 오디션은 미국 뉴욕에 가서 현지에서 음악교육을 받고 있는 한국 사람을 대상으로 실시했습니다. 거기서 라울役의 유정환씨가 나왔습니다.
또 한국에 와서 다섯 번째까지 오디션을 했는데도 주인공 유령役이 안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우리나라에서 뮤지컬 배우로 가장 잘한다는 두 사람을 뽑아서 싱가포르에 있던 음악감독(오스트레일리아人)에게 좀 봐달라고 비행기를 태워서 보냈습니다. 그 사람이 그때 싱가포르에서 「미스 사이공」 음악 지휘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랬는데도 그 중 한 명만 언더 스터디로만 가능하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하도 급해서 미국에서 유령役을 했던 미국인을 세울 작정으로 한 사람을 뽑아서 한국말을 시켜 봤더니 제법 잘하더라구요. 그래서 그 사람을 쓰기로 하고 일을 추진 중이었습니다.
이제 유령을 한국인으로 뽑는 걸 포기하고 아홉 번째 오디션을 하게 됐는데, 맨 마지막에 윤영석씨가 앙상블 오디션을 보러 온 겁니다. 심사위원들이 다 지쳐서 더 이상 봐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고 있는데, 윤영석씨가 와서 앙상블로 출연하겠다고 노래를 했어요. 그런데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그 방 안의 분위기가 싸악 밝아지는 겁니다. 그러자 음악감독이 제 다리를 쿡쿡 찌르면서 이랬어요.
「팬텀 나타났어!」
저도 들어 보니까 진짜 팬텀 같았어요. 그래서 그 자리서 윤영석씨에게 팬텀(유령) 악보를 줬어요. 다른 사람 심사가 다 끝나고 윤영석씨를 불러서 팬텀 노래를 부르게 해 보니까, 딱 팬텀이야! 그래서 그 자리에서 윤영석씨를 팬텀으로 결정했어요.
윤영석씨는 클래식을 전공하고 작은 오페라에 출연한 경험밖에 없는 신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큰 役은 엄두도 못 내고 앙상블이나 하겠다고 맨 마지막에 찾아왔던 겁니다. 이렇게 全세계적으로 「오페라의 유령」의 유령 역은 유령처럼 나타난다는 설이 있어요. 다른 나라에서도 다 그랬답니다』
―배우들은 얼마나 받습니까?
『월급으로 주기로 했습니다. 주연급은 500만∼800만원 정도 줍니다. 물론 연습비, 교통비는 따로 주고요. 7개월 간 공연하는 걸로 따지면 5000만원이 좀 넘을 겁니다. 앞으로 장기공연이 많이 생기면 뮤지컬 배우라는 직업이 새로 태어날 겁니다』
컨테이너 19대 분량
―제가 「오페라의 유령」을 보니까 우선 무대만 보고도 압도되겠더라구요. 그걸 보니까 다른 무대는 무대 같지가 않더라구요.
『저게 40피트짜리 컨테이너로 열아홉 대 분량입니다. 트레일러에 싣고 역삼역부터 세우면 선릉역까지 줄을 서게 됩니다. 그게 극장 안으로 다 들어온 겁니다.
제일 어려웠던 장치가 전동기였어요. 유령이 크리스틴을 분장실에서 불러서 거울 속으로 끌어들이고 나서 지하 호수 장면으로 넘어갈 때, 14m짜리 다리 같은 철 구조물이 움직이는데 아주 큰 電動장치 두 대가 양쪽에서 무대를 바꿔줍니다. 그런데 이 電動장치가 하도 커서 LG아트센터로 못 들어오는 겁니다. 할 수 없이 벽을 뚫으려고 했다가 뜻대로 안 돼서 그걸 절단해서 들여놓고 다시 조립한 겁니다』
―샹들리에도 아주 큰 것이 천장에서 떨어지던데.
『샹들리에 자체의 무게보다도 그걸 떨어뜨리는 아주 큰 모터가 천장에 있습니다. 그걸 천장에 올릴 수 있느냐가 문제였어요. 그래서 LG아트센터를 지은 건축사의 자문까지 받고 설치했습니다. 이렇게 무대를 꾸미고 리허설을 하는데 꼬박 두 달 걸렸습니다. 보통 공연은 그 기간이면 다 끝나는 데 말입니다』
―장래 뮤지컬 시장 전망은 어떻습니까?
『7만 정도 본 시장이 현재 20만이 넘는 시장이 됐습니다. 앞으로도 매년 5만∼10만명이 새로 늘어날 걸로 봅니다. 2005년이면 단일작품으로 관객 50만 동원이 가능해질 걸로 봅니다. 그러면 1人當 8만원씩 치면 400억원 매출이 가능해질 겁니다. 그렇게 보면 시장이 지금보다 세 배 정도 더 커질 겁니다. 그 이후로는 경제상황에 따라서 시장이 급속히 커지겠지요』
―우리나라 경제력이 세계 10위권인데, 문화는 여기서 훨씬 떨어져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 공연으로 뮤지컬이 국력에 걸맞는 위치를 찾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 薛대표가 책임질 일이 있는데, 「오페라의 유령」이 관객들의 눈높이를 높여 놔서 앞으로 저 수준이 아니면 안 보려고 할 거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부터 준비해서 앞으로 저 정도 수준의 작품이 계속 올라가도록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작품들도 그대로 살아갈 겁니다. 「오페라의 유령」을 공연하는 동안에도 「명성황후」도 잘 됐구요, 또 「시카고」, 「캬바레」 같은 뮤지컬도 잘 됐습니다』
―薛대표로서는 일단 꿈을 성취한 거지요?
『그렇습니다. 이번 공연을 성공시키니까, 박장대소를 하며 저한테 그렇게 콧대가 높던 월트디즈니도 다시 공연을 협의하자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미녀와 야수」, 「라이언 킹」을 언제 할 수 있느냐고』
―이번 공연 성공으로 薛대표는 돈을 얼마나 받습니까?
『아주 쪼끔밖에 못 받습니다. 그러나 저는 앞으로 얼마든지 돈을 모을 수도 있고 또 세계 어떤 메이저 프로덕션과도 손잡고 일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게 돈보다 더 값진 거지요』●
작기만 한 연극 시장에 110억원이란 巨金을 끌어 부은 사람은 정말 얼마나 큰 사람일까. 얼마 되지 않는 관객들의 주머니에서 160억원이란 엄청난 입장료를 받아내 막대한 이익을 낸 사람은 얼마나 神出鬼沒(신출귀몰)하는 재주를 가진 사람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있는 LG 아트센터 로비에서 만난 薛度胤(설도윤·44) (주)제미로 대표는, 아직도 날씬한 몸매와 순진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멋쟁이였다. 나는 극장 로비에 마련된 VIP 라운지에서 그와 차를 마시며,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나라를 一擧에 문화 선진국 대열에 세워 놨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극장에 들어가서 「오페라의 유령」을 보면서도 나는 거듭 놀라야만 했다. 어마어마한 무대장치와 그 극적인 변환, 배우들의 뛰어난 노래 실력, 가슴을 파고드는 스토리의 전개, 이런 것들이 모두 내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파리의 오페라 하우스에 사는 오페라의 유령이, 오페라 가수인 여주인공 크리스틴을 짝사랑하며 차지하려 하지만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애처롭게 떠나간다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유령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나라 문화 시장의 격을 높여 놨다. 그리고 그 주역이 총제작자인 薛대표다.
두 번째로 나는 그를 서울 광화문에 있는 세종문화회관 뒤에서 만났다. 그는 그곳에서 오는 7월20일 새로 공연할 뮤지컬 「수호천사」의 전용극장을 짓고 있었다. 나는 세종문화회관 뒷마당에 철골이 세워지는 모습을 모면서 또 한 번의 성공을 예감하고, 이 사람의 손에 도깨비 방망이가 쥐어져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광화문에 있는 한 식당에 들어가서 긴 얘기를 시작했다.
―「오페라의 유령」이란 뮤지컬 이름을 언제 처음 들었습니까?
『88 서울올림픽 때 제가 개회식의 안무를 맡았는데 그때 미국에서 스태프로 온 친구한테 들었습니다. 제가 뮤지컬을 하고 있다고 했더니 그 친구가 저한테 「당신 더 팬텀 오브 더 오페라(The Phantom of the Opera)를 아느냐」고 해요. 「모른다」고 했더니 「뮤지컬 한다는 사람이 그걸 모르느냐, 어마어마하고 엄청나다」고 그랬습니다』
―언제 그걸 처음 봤습니까?
『1991년 3월에 미국에 가서 봤습니다. KBS를 그만두고 SBS에 가기 전이었어요. 1막이 끝났는데 눈물이 하도 펑펑 나와서 일어나질 못했어요』
―어느 대목에서 눈물이 나오던가요?
『작품도 작품이지만, 우리나라 현실과 비교해 이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하게 이 사업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어요. 절망감, 부러움 이런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어요.
그래서 1막이 끝나고 휴식시간에 밖에 나가지도 못했어요. 2막이 끝나고서는 내용 때문에 또 눈물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습니다. 「오페라의 유령」이 짝사랑하던 크리스틴을 떠나보내는 장면이 너무 슬펐습니다. 내가 울면서 보니까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많이 울었어요.
제 뒤에서 소리내서 우는 여자들이 있었는데, 아시아 여자들이었어요. 홍콩, 타이완, 일본에서 온 여자들이었어요. 「몇 번째 보느냐」고 물었더니, 일본 여자는 「다섯 번째」라고 했어요. 영국에 가서 한 번, 일본에서 한 번, 미국에서 벌써 세 번째 봤는데, 볼 때마다 눈물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다른 여자들도 다 두 번 이상 봤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공연에선 어떻든가요?
『여기서도 여자 관객의 30% 정도가 울어요. 미국 공연에선 70% 정도가 울었어요. 이게 문화의 차이지요』
全세계에서 매출 4조원 기록
―「오페라의 유령」은 미국 뮤지컬입니까?
『보통 뮤지컬은 영국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1930년대 초창기에는 뮤지컬이 미국에서 다 나왔는데, 영국에 작곡가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나오면서부터 영국이 뮤지컬의 강대국으로 올라섭니다. 그래서 영국 런던의 극장가 웨스트 엔드에서 뮤지컬이 검증을 받아서 히트하면, 이것이 미국 뉴욕의 브로드웨이로 건너가게 되지요. 그러면서 영국은 영국대로, 미국은 미국대로 공연을 하게 됩니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회사가 RUG입니다. 이건 「정말 유용한 그룹(Really Useful Group)」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이름입니다. 여기서 만든 것 가운데 80년대에 만들어서 작년에 브로드웨이에서 막을 내린 「캐츠(Cats)」도 그랬습니다. 영국에선 아직도 공연을 하고 있는데 금년에 막을 내립니다. 이 「캐츠」가 뮤지컬 중에서 18년 간이란 장기공연의 기록을 세운 작품입니다.
세계적으로 1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린 뮤지컬 작품들이 거의 영국의 앤드류 로이드 웨버나 카메론 매킨토시의 손에서 나온 겁니다』
―1조원 이상 매출을 올린 작품들이 뭐가 있었습니까?
『「오페라의 유령」이 현재 세계적으로 4조원의 매출을 올렸고, 「캐츠」도 그 정도를 올렸고, 「레미제라블」도 1조원을 올렸습니다』
―지금 공연 중인 「오페라의 유령」의 한국內 매출은 얼마나 될 걸로 보고 계십니까?
『160억원 정도는 되지 않을까 보고 있습니다. 작년 12월2일부터 2002년 6월 말까지 7개월 간 공연하는데, 지금까지(3월 말 현재) 16만명 정도가 관람했습니다. 평균 입장료가 8만원 정도니까 얼른 계산하면 이미 128억원 정도는 확보된 상탭니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적어도 22만명은 보실 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작비는 시작해서 철수할 때까지 110억원쯤 계산하고 있구요』
―객석 점유율이 지금 얼마나 됩니까?
『매일 90%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관객이 얼마나 들어오리라고 예상했습니까?
『처음 목표는 15만명으로 잡았습니다. 그 중에 7만5000명 정도는 우선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7만5000이란 숫자는 어떻게 나온 겁니까?
『그동안 제가 뮤지컬을 제작해 보면서 계산이 나온 거죠. 그런데 이 공연을 하자면 적어도 관객이 15만명은 돼야 하는데, 그렇다면 나머지 7만5000명은 어떻게 하느냐를 놓고 고민을 하다가 이 공연을 처음 본 관객의 50%는 다시 본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제가 미국에 여러 차례 오가면서 그 공연에 오는 사람들을 조사해 봤습니다. 대부분이 여성 관객이었는데, 매회에 30% 이상이 한 번 이상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全 세계적으로 다 그랬답니다. 그래서 그런 확신을 가졌습니다』
―한 번만 보는 사람 7만5000명, 두 번 이상 보는 사람 3만7500명, 나머지 3만7500명은?
『그 나머지는 마케팅을 통한 단체 관람객으로 잡았습니다. 그 계산이 지금까지 다 맞아떨어지고 있습니다. 지방에서 호응이 예상보다 더 좋아서 생각보다 잘 나가고 있어요』
배우, 안무, 연출 다 거친 제작자
그는 그날 오후 2시까지 TV와 인터뷰를 하느라고 점심도 거른 채 또 나를 만나 고역을 치르고 있었다. 그런 그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월간조선 李五峰 사진팀장이 빵을 사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빵을 얻어먹어 가며 인터뷰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 빵을 함께 나눠 먹으며,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1막이 끝난 뒤처럼 인터미션을 가졌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올림픽 안무는 어떻게 하게 되셨나요?
『당시 제가 KBS예술단 상임안무로 있었습니다. KBS예술단에 계시던 한익평 선생님이 전체 안무를 맡게 되셨어요. 그래서 제가 거기 참여하게 된 겁니다』
―마음은 뮤지컬에 가 있는데 방송사에서 안무하는 사람으로 밥벌이를 하는 게 별로였겠군요?
그러나 그는 여기서 무서운 얘기를 한다.
『제가 방송사에서 일을 한 건, 그게 뮤지컬을 하는 데 꼭 거쳐가야 할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방송사에 안무라는 직업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거길 간 겁니다. 저는 배우로 시작해서 제작자까지 왔는데, 배우를 하다 보니 무용이 부족해서 거기 뛰어들었고, 안무를 하다 보니 연출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또 거기 뛰어들었습니다. 또 연출을 하다 보니 제작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작자가 된 것입니다』
그는 1958년 10월20일 경북 포항시 죽도동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성동중, 숭실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예능 쪽 소질은 고등학교 때 드러났다.
『제가 합창반에 들어가 3년 간 활동했습니다. 숭실고등학교가 합창반으로 서울에서 제일 유명했지요』
그는 197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남대 사범대 성악과에 입학한다. 당시 가정형편이 안 좋아져서 서울 유학을 청산하고 다시 고향 근처로 내려갔던 것이다.
그는 이듬해인 1978년 軍에 입대했다가 1981년에 제대해서 대학 2학년에 복학했다. 2학년을 마친 다음 그는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다시는 대학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스물네 살 때였다.
『뮤지컬 배우 하려고 대학을 그만뒀습니다. 당시 한국일보 1면에 극단 현대극장에서 뮤지컬 배우를 모집한다는 광고가 나왔습니다. 당시 金義卿 선생님이 대표셨지요. 거기에 응모해서 1981년 말에 현대극장 단원으로 들어간 겁니다』
―어떻게 뮤지컬을 택하셨을까.
『대학교 다닐 때 제가 연극반에서 활동했는데, 그때 생각으로 연극이 왠지 좀 고루하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성악을 전공하던 제 입장에선 연극에 음악을 넣어 보면 어떨까 하고 실험적으로 저 혼자서 뮤지컬 비슷한 걸 해 보곤 했습니다』
부모의 이해·성원
―그거 참 제대로 맞았네요! 노래하던 사람이 연극을 했으니, 그런 게 나올밖에! 그런데,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오페라로 갈 것이지 왜 뮤지컬을 찾게 됐나요?
『오페라는 클래식한 것이어서 대중이 접근하기엔 좀 어렵겠다는 생각을 한 겁니다. 그래서 대중을 포용할 수 있는 장르가 뭔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연극하는 사람은 참 살기가 힘든데, 왜 그런 길을 택하게 됐던가요?
『우선 제가 그쪽에 소질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대학에서 연극을 할 때는, 1년이면 6개월을 강당에서 잤습니다. 세트도 만들고, 연습도 하고…. 그때부터 저는 무대가 좋았어요』
―부모님은 실망하셨을 텐데.
『아버님은 포항에서 가구점을 하셨는데, 제가 어려서부터 워낙 예능에 소질이 있었기 때문에, 그쪽으로 가겠지 하시고 저를 밀어 주셨어요. 부모님이 항상 저를 이해하시고 밀어 주신 게 제겐 참 큰힘이 됐어요. 아버님은 제가 뭘 하고 싶다고 하면, 안 된다고 하시기 전에 저에게 소질이 있는 일인지를 생각하시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제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셨어요』
―현대극장 단원이 되기도 쉽지 않았겠지요.
『당시 「슈퍼 스타」란 뮤지컬에 김도향, 추송웅, 윤복희씨, 이런 분들이 출연했는데, 앵콜 공연을 하면서 그 작품과 또 다른 작품을 위한 단원을 모집하게 된 겁니다. 거기 오디션에 참가해서 뽑힌 거죠』
代役 배우가 이브 몽탕 役 맡다
―제 생각엔 일단 대학을 졸업하고 했어야 될 것 같은데….
『2년을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뮤지컬을 하자면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여야 하는데, 3년 간 軍생활을 하느라고 기능이 많이 떨어져 있어서, 이걸 빨리 회복해 가지고 쫓아가도 될까 말까 했어요. 2년 간 학교에서 그냥 있으면 도저히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한 겁니다. 지방대학에서 무용도 배울 수 없고, 연기수업도 그렇고』
―오디션은 어렵지 않던가요?
『오디션은 훌륭하게 통과했습니다. 현대극장이 서울 신촌에 있을 땐데, 돌아가신 김상렬 선생이 미국에서 막 돌아와서 「에비타」를 준비할 땝니다. 제가 그 작품에 데뷔를 하게 됐습니다. 「슈퍼 스타」에는 엑스트라로 참여하게 됐구요』
―그 귀중한 대학을 팽개치고 서울에 와서 처음에 한 역이 그래 무엇이었어요?
『「슈퍼 스타」에서 「병사 1」 이런 걸 했습니다. 아주 단역이었습니다』
―그럼 명실공히 데뷔작인 「에비타」에선?
『그 작품에서도 제가 초년병이었으니까 일정한 배역은 없었지요. 「에비타」엔 배역이 다섯 명밖에 없어요. 에비타(에바 페론), 페론 대령, 소녀, 마갈디, 체 게바라, 이렇게 배역이 다섯 갠데, 당시 유명한 분들이 이런 역을 차지했기 때문에 저는 거기 낄 수가 없었죠. 그런데, 마갈디란 배역의 언더 스터디(有事時의 代役)로 오디션에서 제가 합격을 한 겁니다』
―그럼 언제 代役으로 무대에 섰습니까?
『한 번도 못 섰지요. 하하…. 세종문화회관에서 막을 올렸는데, 마갈디 역은 못 했지만 제가 수석 무용수로 뛰게 됐습니다』
―무용은 언제 또 그렇게 배우셨나요?
『아주 짧은 기간에, 두세 달 연습하는 기간에 제 기량이 아주 빨리 늘어난 겁니다. 그래서 앞줄의 가장 가운데서 춤을 많이 추게 됐습니다. 그리고 일정한 배역은 못 받았지만 제가 1인 8역을 했습니다. 군인 1, 노동자, 합창…, 이런 걸 다 해내는데 옷 갈아입을 시간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2주일 간 공연을 했습니다』
―왜 그것밖에 못 했어요?
『저희가 3개월 가량 열심히 연습해서 무대에 올렸는데, 당시 全斗煥 국보위 위원장이 대통령 자리에 앉아야 할 때였어요. 그래서 검열하는 사람들이 와서 군사 독재에 관한 민감한 대사나 장면이 나오는 걸 공연할 때마다 하나씩 빼는 겁니다. 나중에는 공연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만큼 작품이 엉망진창이 됐어요. 20% 정도나 들어내게 됐으니까요. 그렇게 되니까 앞뒤가 연결이 안 됐죠. 그래서 할 수 없이 막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불행 가운데 행운이 찾아왔다.
『「에비타」가 뜻밖에 너무 일찍 막을 내리는 바람에 다음 작품을 재빨리 기획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에디트 피아프의 일생을 그린 「빠담 빠담 빠담」을 무대에 올리게 됐는데, 피아프 역은 윤복희 선생님이 맡으시고 제가 여기에서 이브 몽땅 역을 맡게 됐습니다』
나는 그의 얘기를 듣다가 너무나도 놀라와서 혼자서 박수를 오래오래 쳤다. 배역도 받지 못했던 무명배우가 한다 하는 극단의 뮤지컬 무대에서 일약 주연배우가 됐으니, 꿈이나 동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아닌가? 그게 1982년 1월이었다.
『그때 表在淳 선생님이 연출을 하셨는데, 연습장에서 제가 열심히 연습하는 걸 보고 캐스팅 해주신 겁니다. 저하고는 아무런 친분관계도 없었지요. 저희는 그때 모두 밤 늦게까지 미친 듯이 연습을 했습니다. 이제 연습 그만하고 제발 집에 좀 가라고 해도 아무도 집에 가지 않을 땝니다. 하도 그러니까 金義卿 선생님이 전기요금 많이 나온다고 두꺼비집을 내릴 정도였어요』
―이브 몽탕 역을 잘했을까 걱정되네.
『잘했습니다. 신인 치고는 잘했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윤복희 선생님은 그 당시 쳐다보지도 못할 대선배였고, 추송웅 선생님도 그렇고, 이런 선배들이 「새로 나온 놈이 물건이 괜찮더라」고 안팎에 말씀을 잘 해주셔서, 그 이후 여러 군데서 저한테 출연 섭외가 들어왔습니다』
주연배우가 포스터 붙이러 다녀
―그렇게 인정도 받고 이름도 나고 했는데 살기는 괜찮던가요? 개런티는 얼마나 받았습니까?
『1981년에 처음 극단에 들어가서 한 작품에 3만원을 받았습니다. 연습기간까지 치면 3개월에 3만원을 받았으니까 한 달에 1만원 정도 받은 셈입니다. 당시 대졸 사원 초봉이 30만∼50만원쯤 될 땝니다』
―그 정도로는 최저생계비도 안 될 텐데, 그럼 도둑질을 했나요, 굶고 살았나요?
『극단에서 포스터를 붙이기도 하고 전단을 뿌리기도 하고, 그러면 수당을 조금씩 줬거든요』
―아니 무대에서 커튼 콜을 받는 주연 배우가 그런 걸 했단 말이오?
『그런 건 기본으로 다 했어요. 포스터를 붙여선 안 될 곳에 몰래 붙이다 걸리면 닭장차(호송차)에 실려가서 밤새 유치장에 갇혀 있다가 직결재판을 받았습니다. 재판을 받고 벌금 5000원을 내면 나왔는데, 그게 없어서 몸으로 때웠지요. 저도 네댓 번 걸려서 유치장 신세를 졌습니다』
―포스터를 붙이고 나면 얼마를 줬습니까?
『천원쯤 줬어요. 저희가 밤늦게 연습하다 보면 집에 돌아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극단 측에서 신촌에 여인숙을 얻어 줬습니다. 이것도 그냥 재워 주는 게 아니었어요. 숙박비 대신 풀통하고 버너를 주면서 풀을 쑤라고 했어요. 우린 그때 밀가루에 본드를 섞어서 풀을 쑤었어요. 이걸로 붙이면 접착력이 강해져서 포스터가 잘 안 떨어지죠.
풀을 다 쑤면 우린 2인 1조가 돼서 포스터를 붙이러 나갑니다. 한 사람은 풀통하고 풀비를 들고 다니면서 벽에 풀칠을 하고, 또 한 사람은 그 자리에 포스터를 붙이고, 이러면서 다녔습니다. 이걸 「풀팅」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런 풀팅을 새벽 4시부터 두 시간 동안 하고, 새벽 6시가 되면 이화여대 담을 뛰어넘어 갔습니다』
―왜 캠퍼스 구내에 포스터 붙이러?
『아닙니다. 무용과 학생들 연습하는 강당에 가서 춤 연습을 했습니다』
―아니, 여학생들 무용하는 곳에?
『예. 담을 뛰어넘다가 수위들한테 잡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화대학 陸完順 교수님이 저한테 특별히 써 준 쪽지가 있었는데, 그걸 내 보였죠. 「이 사람은 내가 무용을 가르치는 학생이니 특별히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도록 허락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陸完順 교수는 어떻게 알았어요?
『제가 극단에서 춤을 열심히 추고 있으니까, 무용하시는 분이 陸교수님께 저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무용에 자질이 있으니까 지도해 주십사고』
―그럼 새벽에 아무도 없는 홀에서 혼자 무용연습을 했단 말입니까?
『새벽 6시부터 네 시간쯤 혼자 연습실에서 땀을 흘리며 연습을 하고 있으면, 10시쯤 학생들이 옵니다. 그러면 남자로선 저 혼자만 특별히 여학생들과 같이 12시까지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점심 시간이 되면 구내식당에 갈 돈이 없으니까 저 혼자 극단에 와서 라면 하나 끓여 먹고, 또 극단에서 무용연습과 노래연습을 했습니다. 오후 4시가 되면 또 그날 공연할 작품 연습을 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그때 하루에 열두 시간씩 연습했습니다』
그는 뮤지컬 배우로도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현대극장에서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주인공 역을 맡은 후에 극단 민중으로 스카우트돼 가서 「우리 집 식구는 아무도 못 말려」, 「선인장 꽃」, 「나비처럼 자유롭게」에 연달아 주인공을 맡았다. 그래도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1984년에 극단 마당 세실극장에 와서 월급 15만원을 받으며 「임의 침묵」 안무를 맡기도 했다.
올림픽 按舞로 실력 인정받아
이럴 즈음 그는 KBS 예술단에 상임안무로 들어가게 된다.
『KBS의 한익평 선생님이 1984년에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안무를 맡으셨어요. 제가 거기서 주인공 토니 역을 했습니다. 그때 韓선생님이 제가 춤추는 걸 보고 어떤 부분은 「네가 한번 안무를 해 봐라」 하고 맡기시더라구요. 그때 제게 맡기신 일을 열심히 했는데, 韓선생님은 제가 안무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그후 저를 죽 지켜보시더니 1985년 10월에 KBS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잘 됐습니다. 먹고 사는 건 해결될 테니까.
『그때 제가 너무 힘들 때였어요. 1년 동안 벌어서 손에 쥐는 돈이 10만원도 채 안 됐어요.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KBS에 특채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또 韓선생님도 일단 KBS에 들어와서 「네 안무능력을 한번 마음껏 키워봐라. 월급도 받으니까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지 않느냐. 또 네가 그렇게 하고 싶어하는 뮤지컬을 틈틈이 하도록 시간도 내주겠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월급이 얼맙디까?
『70만원쯤 받았습니다』
―1년에 10만원도 못 벌다가 한 달에 70만원을 받으니 기분이 어떱디까?
『생활이 완전히 달라졌죠. 생활도 안정됐구요. 늘 신세만 지던 부모님한테 선물도 사 드릴 수 있었구요. 저랑 같이 그렇게 어렵게 지내던 동료들을 대학로에 불러놓고 밥도 살 수 있었구요. 그게 너무너무 좋았어요. 그 친구들은 아직도 연극을 계속하고 있는데 1년에 받는 돈이 1000만원도 안 될 겁니다』
―KBS에서의 생활은 어땠어요?
『처음에 들어가니까 옛날 방식의 쇼를 하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걸 다 뜯어 고쳤죠. 당시엔 타이즈를 입고 머리를 묶고 춤을 췄습니다. 제가 무용수들 옷을 일반 의상으로 바꾸고 머리도 다 풀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전체적으로 무대가 좀 현란하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또 문제가 돼서 쇼 프로그램 담당 PD가 방송위원회에서 지적도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쇼 프로그램이 좀 현대적으로 바뀐 건 그때부터였습니다』
―88 서울올림픽 개막식에 참여해서도 인정을 받았는데, 그때도 힘들었겠죠?
『제가 개회식의 마지막 행사 안무를 맡았습니다. 李御寧 前 장관님이 낸 아이디어를 가지고 6개월 간을 허비하고 그게 실현성이 없어서 한 달을 남겨 놓고 저한테 일이 떨어졌어요. 그래서 제가 아이디어를 낸 게, 가운데 놓을 무대를 24개의 문에서 군인들이 들고 나와 맞추게 하고, 코리아나가 그 무대에 등장하게 하고, 또 3000명의 학생들이 24개의 문에서 몰려나와 아리랑의 휘몰이 모양으로 커다란 물결처럼 돌면서, 한 곳으로 몰리도록 한다는 거였습니다. 결국 그게 채택돼서 개회식 마지막을 장식했습니다』
1992년 그는 SBS로 옮기게 된다.
『제가 SBS로 가게 된 것도 뮤지컬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거기 가선 「쇼 탤런트團」을 만들었는데, 노래, 춤, 연기가 다 되는 단원들을 모집해서 팀을 짰습니다. 그때 단원들은 쇼 프로그램 이외에도 많은 프로그램에 출연했습니다. 어떤 땐 리포트도 했습니다. 제가 그때 그 단장이었습니다. 이것도 없던 걸 제가 만든 거죠』
―거기서도 뮤지컬을 했습니까?
『예, 1992년에 SBS로 가서 처음 제작한 게 뮤지컬 「미녀와 야수」였어요. 그것도 아주 성황리에 잘 끝났습니다. 저는 그때 안무와 구성을 맡았습니다. 그게 좀 발전돼서 SBS에서 뮤지컬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좀 있어 보니까 방송사에서 생각하는 것하고 제가 생각하는 것하고는 갭이 많았습니다. 저는 오늘날과 같은 뮤지컬로 발전되기를 바랐는데, 방송사에선 작은 규모로 작은 성공을 거두려고 하는 쪽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1994년에 SBS를 그만뒀습니다』
「재즈」 제작했다 집 날려
그는 마침내 본격적인 뮤지컬 제작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1993년에 제가 「나이세스」(삼성영상사업단의 前身)와 접촉해서 뮤지컬 사업을 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는데, 1994년에 이 회사가 삼성영상사업단으로 바뀌면서 제 제안을 받아들이고 같이 일하자고 해서 그곳으로 옮겼습니다. 그 회사에 직접 입사한 건 아니고, 삼성영상사업단의 공연제작사를 별도 법인으로 설립해서 그 회사에 대표이사로 갔습니다. 그 회사이름이 T&S(Time & Space의 頭音字)였지요. 삼성영상사업단의 투자를 받아서 제가 설립한 회삽니다. 이게 바로 본격적인 뮤지컬 제작사였습니다』
―소원풀이 하셨네!
『예 그랬습니다. 1994년에 T&S 설립을 하고 1995년엔 뮤지컬 아카데미를 설립했습니다. 본격적인 뮤지컬 배우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능력 있는 배우를 양성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만든 겁니다. 1년 코스였어요. 학생을 모집했는데 대학생도 있었고 직장인도 있었습니다. 주로 밤 시간에 교육했는데, 음악, 무용, 연기 같은 걸 가르쳤습니다. 처음엔 30명을 모아서 가르쳤는데 계속 적자였어요. 그러나 후엔 학생이 80명까지 몰리면서 좀 나아졌습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까?
『예,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다른 분이 운영하고 계시지만. 거기 출신들이 뮤지컬 배우로 많이 활약하고 있으니까 성공한 셈이죠. 지금 그 학교가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있습니다』
―T&S에선 무얼 제작했던가요?
『1995년에 「브로드웨이 42번가」를 제작했지요. 이건 삼성영상사업단의 첫 사업으로 제가 제작한 겁니다』
―이게 제작자로서 첫 작품입니까?
『그 전에도 제작을 한 적이 있습니다. 1992년 봄에 KBS홀 개관기념으로 프랑스 뮤지컬 「재즈」를 제작했습니다. 그때 제가 집을 팔아서 이걸 제작했습니다. KBS를 그만두고 SBS로 가기 전에 「재즈」를 만들었어요』
―집을 얼마에 팔았는데요?
『당시 방배동에 집(아파트)이 있었는데, 그걸 1억8000만원에 팔았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그게 신문에 날 정도로 큰돈이었습니다. 뮤지컬 하나 만드는 데 1억8000만원을 들인다는 게 아주 큰 뉴스였어요. 제가 오디션해서 사람 뽑고, 개런티를 주고, 기획, 마케팅까지도 전부 했습니다』
―그렇게 큰돈을 들였는데 결과는 어땠어요?
그는 이 질문에 껄껄 웃었다.
『표 팔아 들어온 돈이 모두 1800만원이었습니다. 완전히 망했습니다』
―큰일 났다! 집 날렸네!
『완전히 날라갔습니다. 그 집은 올림픽 이후 KBS에 근무하는 동안 제가 이벤트를 많이 해서 번 돈에다 집에서도 좀 도와줘서 마련한 거였습니다. 그걸 단 한 번에 날려 버렸습니다』
―집은 날렸지만 그때 많은 걸 배웠겠네요?
『참 많은 걸 배웠습니다. 「과연 이 작품이 얼마나 많은 관객들한테 호응을 받을 수 있겠느냐. 그리고 제작비로 얼마가 투자가 되면, 수익이 최소한 얼마는 나올 수 있겠다」 하는 걸 예측해야 되는데 이게 전혀 안 됐던 겁니다. 그런데도 저한테는 작품을 잘 만들어야 한다는 욕심만 있었기 때문에 무리하게 투자를 한 겁니다. 프로듀서는 제작과 기획에 균형을 잘 잡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또 그렇게 참패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극장이 너무 안 알려졌다는 겁니다. KBS홀이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예약을 받으면 「KBS홀이 강남에 있습니까, 강북에 있습니까?」 이렇게 묻는 겁니다. 그래서 극장의 위치가 좋지 않으면 흥행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그때 깨달았습니다』
『집 날리고도 성공 자신했다』
―재즈는 며칠간 공연했어요?
『열흘간 했는데 하루에 300명도 안 들었습니다. 그 큰 KBS홀이 텅 빌 때, 정말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부인은 뭐라고 하던가요?
『그땐 결혼 안 했을 땝니다. 바로 그후(1992년)에 결혼했습니다. SBS 탤런트였던 사람(배민정·36)하고 했습니다. 사실은 그 전에 제가 KBS에 있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요. 코카 콜라, 쾌남, 이런 데 모델로도 활동했습니다.
SBS에 근무할 때 장모님한테 제가 픽업당했던 것 같아요. 장모님이 저를 좋게 보시는 것 같아서 제가 달라붙어서 열심히 졸랐습니다. 그때 제가 너무 어려웠던 시기였기 때문에 누군가를 만나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위로받을 데도 없구요. 그래서 서둘러서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결혼이 순조롭게만 진행된 건 아니었다.
『장인 어른이 많이 반대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앞으로 돈도 많이 벌고, 성공할 자신이 있습니다」 하고 말씀드렸어요. 제가 구체적으로 「6∼7년은 고생을 해야 될 겁니다. 그렇지만 10년 안엔 꼭 성공하겠습니다」 하고 설득했지요』
―아니 금방 재즈로 망한 사람이 어디서 그런 자신이 생겼어요?
『저는 그때 망했지만, 그 전에도 몇 개 뮤지컬 공연들이 흥행에 성공했었거든요. 1987년에 당시 시민회관(지금 서울시의회)에서 공연한 「가스펠」을 보러 매일 사람들이 덕수궁 돌담길을 다 돌도록 줄을 섰습니다. 또 마당 세실극장에서 「임의 침묵」을 공연할 때도 두 달 동안 객석을 가득 메웠어요. 그런 걸 보면 재즈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뮤지컬을 본격적으로 제작하면 꼭 성공할 것 같았어요』
그는 지금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있는 35평형의 아파트에서 단란하게 살고 있다. 딸(11세) 하나만을 두었다고 한다.
『제가 일을 하다 보니까 너무 바쁘고, 또 이 일이 너무 좋아서 열심히 하다 보니, 아이들한테 잘할 자신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하나만 낳았습니다』
다시 얘기가 본론으로 돌아간다.
―T&S에서 「브로드웨이 42번가」 다음에는 또 무얼 제작했습니까?
『1996년에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를 제작했습니다. 그것도 성공했는데, 삼성영상사업단이 다음 작품으로 저를 통하지 않고 직접 「눈물의 여왕」을 제작해서 저와 거리를 두게 됐습니다』
―그것도 성공했습니까?
『참패했죠. 삼성영상사업단이 저하고 파트너십이 깨지면서 망했습니다. 그 결정적인 계기가 「눈물의 여왕」이었습니다』
―정말 삼성영상사업단이 「눈물의 여왕」이 됐군요. 그 이전에 두 작품이 성공한 비결은 어디 있었어요?
『우선 조직과 자본력이 강했습니다. 자본력이 있어야 마케팅을 할 때 適時適所에 돈을 투입할 수 있거든요』
―우리나라에선 관객이 어느 정도 들어오면 성공했다고 합니까?
『중극장(500∼800석)용이라면 1만5000명 이상, 대극장(1500석 이상)용이라면 3만명 이상만 관객을 동원하면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중극장용은 제작비가 보통 4억∼5억원이 들고요, 대극장용은 10억∼15억원 정도 들어갑니다. 그러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망하곤 한나절을 울었다』
그러나 행복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제가 T&S를 경영하면서 삼성영상사업단을 믿고 사업을 너무 벌였어요. 그러는 바람에 T&S가 그만 부도가 나버렸습니다』
―뮤지컬을 연달아 성공했는데 부도가 나다니!
『삼성영상사업단과 대형 프로젝트를 함께 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저는 그걸 믿고 다음에 공연할 두 작품에 대해 미국 업체들과 미리 가계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삼성영상사업단이 망해서 사업을 접으면서, 제가 지불한 가계약금이 전부 날아가버렸어요. 삼성에서 돈을 안 댄다면 그 사업은 할 수 없는 거였습니다.
저는 삼성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IMF가 터졌어요. 그래서 제가 투자했던 돈도 하나도 못 건졌고, 삼성이 뮤지컬 아카데미에 지원하던 돈도 끊어졌고, 그러면서 사무실 월세가 밀리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1998년에 부도가 난 겁니다. 그때 역삼동에 있는 빌딩의 지하층 200평을 빌려쓰고 있었는데, 월세를 못 내니까 나중엔 보증금까지 다 까먹고 결국은 문을 닫았습니다』
―T&S가 삼성이 투자한 회사라면서요?
『파트너십이 깨지면서 투자한 돈을 다 빼내 간 상태였습니다』
―또 망했으니 큰일났네!
『그때는 집 팔아서 재즈 올리고 쫄딱 망했을 때보다도 더 심각한 상황이었어요. 두 번째 망하고 나니까 내가 또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몰려왔습니다. 또 집에는 와이프와 애도 있고, 그래서 부담이 더 되었습니다. 그때도 조그만 전세집에 살았는데 그것마저 내놓고 처가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정말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부인이 뭐라던가요?
『와이프가 뭐라고 하기 전에, 돈 벌러 나가더군요. 옥외 광고회사의 영업사원으로 들어가서 일거리를 따러 다녔습니다. 광고업계도 참 어려운 때였어요. 광고회사들이 다 문을 닫을 때였는데, 非전문가가 뛰어들어서 광고를 따러 다녔습니다. 그래도 와이프 덕에 최저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무실은?
『직원들도 다 그만두고 나가고…, 하루아침에 완전히 물거품이 된 거죠. 스튜디오를 꾸미느라고 2억 가까이 들었는데, 그것도 한 푼도 못 건지고 그냥 몸만 나왔습니다』
―또 죽고 싶었겠네!
『네, 많이 울었지요. 택시를 타고 목동으로 가는데 도중에 왈칵 눈물이 나서 여의도 근처 방배 지하철역에서 내렸어요. 거기서 KBS별관까지 걸어가면서 다리 위에서 난간을 붙잡고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제가 방배역에 내린 게 낮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둑어둑한 밤이었습니다. 한나절은 지난 것 같았어요. 거기서 KBS별관 뒤에 있는 포장마차로 가서 못 먹는 술을 마셨습니다. 전 소주 한 병만 마시면 죽다시피 하는데, 두 병도 더 마신 것 같았습니다. 그후 어떻게 됐는지 깨어 보니까 집이었어요. 그날 이후에 와이프가 돈벌러 나간 겁니다』
뉴욕에 가서 「오페라의 유령」 보러 매일 출근
―그러곤 뭘 했어요?
『처음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었지요. 그러다가 「아, 이럴 때가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그때도 「IMF가 영원히 가겠느냐, 언젠가는 끝나겠지. 그러면 빨리 이 뮤지컬 사업을 시작해야 된다」 하고 생각하며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래서 뮤지컬 준비를 다시 하기 시작했습니다』
―뮤지컬말고는 할 게 없던가요?
『뮤지컬말고는 하고 싶은 사업도 없고, 다른 덴 의욕도 없었어요. 나에게는 오로지 뮤지컬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전, IMF가 끝나면 오히려 시달리고 쪼들린 사람들의 마음이 문화를 그리워할 것이다, 문화로 빈 마음을 치우려고 할 것이다, 그러면 문화 시장이 커질 것이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IMF 때 「오페라의 유령」 생각을 더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어려운 때에 미국으로 날아갔다.
『제가 와이프한테 「내가 직접 브로드웨이에 가서 오페라의 유령을 보면서 뮤지컬 제작 구상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와이프가 절 물끄러미 보더니 미쳤다고 그러더라구요. 생활비도 없는데 미국엘 가겠다니까. 그래도 와이프가 어디서 100만원을 구해 왔어요. 그 돈으로 60만원짜리 할인 티켓을 사서 미국에 갔습니다. IMF 때니까 다들 어려워서 그런지 비행기 안이 텅텅 비었더라구요. 그래서 누워서 갔습니다. 그때가 1998년 가을이었어요』
―수중에 30만∼40만원 남았을 텐데 그 돈 가지고 미국 가서 어떻게 했어요?
『뉴욕 퀸즈에 아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집 가서 1주일 간 신세지면서 매일 지하철 타고 가서 「오페라의 유령」을 봤습니다. 며칠 지나니까 돈이 떨어져서 1막 끝나고 난 다음에 그냥 공짜로 들어갔습니다. 브로드웨이 머제스틱 시어터엔 로비가 없어서 1막 끝나면 인터미션에 사람들이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시작하면 우르르 들어갑니다. 그때 따라 들어가서 보고 또 보고 했어요』
―「오페라의 유령」을 여러 번 보면서 뭘 느꼈어요?
『우리나라에 들여와도 공연이 성공할 거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저는 경제는 몰랐지만 IMF가 늦어도 2000년이면 끝날 걸로 봤어요. 그래서 빨리 공연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돌아와서 돈이 좀 있는 친구를 찾아갔어요. 그 친구들한테, 「오페라의 유령을 하면 꼭 될 것 같다. 이게 너무 크면 작은 공연을 두 번 하고 이 유령을 하자」고 설득했지요.
그랬더니 그 친구가 1억을 출자해서 다시 회사를 열었습니다. T&S는 부도가 나서 다시 열 수 없기 때문에 1999년에 「스타 서치」라는 회사를 새로 차렸습니다. 그리고 T&S가 쓰던 역삼동의 그 사무실과 스튜디오를 다시 인수했습니다. 그 친구가 투자한 돈 1억원을 사무실 보증금으로 주고 들어간 겁니다. 그 자리에 가 봤더니, IMF라 사무실이 나가지 않아서 그대로 있었어요. 그 모습 그대로였는데 거미줄만 쳐져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 좋아서 저 혼자 200평짜리 사무실과 스튜디오를 전부 청소했습니다. 청소하는 데 힘드는 줄도 몰랐습니다. 너무 행복했습니다. 물걸레질도 하고 왁스도 바르고, 그러다 보니 새벽이 됐어요. 그런데 전기 배선이 뭐가 잘못 돼서 제가 그걸 만지다가 감전이 돼서 그냥 기절해버렸어요. 한참 있다가 깨어났는데 근육이 막 떨렸어요. 그러다가 눈이 떠졌는데 또 일어나서 그 이튿날 아침까지 청소를 했습니다. 아침에 집에 가서 옷 갈아입고 다시 와서 또 청소를 했습니다』
「브로드웨이」 성공으로 再起
이제 일이 서서히 풀리는 것 같았다.
『사업을 일으킬 돈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투자회사를 열심히 찾아다녔어요. 그러면서 세트도 있고 의상도 있던 「브로드웨이 42번가」를 다시 올리기로 한 겁니다. 그러나 선뜻 투자하겠다고 나서는 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제 공연을 열심히 보시는 투자회사(INI) 회장님이 한 분 계셨어요. 가끔 밥도 잘 사주시고, 또 어떤 때는 영덕게를 한 차 가득 싣고 와서 우리들에게 먹이곤 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길을 가는데 제 앞에 세단이 딱 서더라구요. 그러더니 누가 차 안에서 「薛감독!」 하는 겁니다. 쳐다보니까 그분이더라구요. 너무 반가웠어요. 그래서 그분한테 인사를 하자마자 그랬어요. 「투자 좀 해주세요. 제가 지금 해야 될 게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좀 당황해 하시는 거 같았어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만나자마자 돈 얘기를 하니까 그럴 거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분은 저한테 연락처를 달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날은 그렇게 헤어졌어요.
그런데 그 다음날 전화가 왔어요. 「얼마가 필요한가?」 「2억이 필요합니다」 「확실하게 얘기해. 2억인가 3억인가?」 「사실은 2억5000이 필요합니다」 「언제까진가?」 「다음 주 월요일까집니다」 「통장번호를 얘기하게」
그러고 1주일을 기다렸는데 월요일에 보니까 그 돈이 통장에 들어와 있어요! 이건 참 운명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뭘 믿고 아무런 보증도 없이, 그 많은 돈을 선뜻 주었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계약도 안 했으니까요. 그동안 제가 이 사업에 대해 보였던 열정 하나만을 믿고 주신 것 같아요. 사기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 돈을 어떻게 썼어요?
『그 돈으로 「브로드웨이 42번가」를 공연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때가 1999년 12월로 IMF 끝 무렵이었는데도 그 공연이 흥행에 아주 성공했어요. 서울 역삼동에 있는 LG아트센터에서 한 달 동안 공연했는데 객석의 거의 90％가 찼습니다. 이때 제가 LG아트센터를 알게 됐고, 그 바람에 극장의 도면을 보게 됐고, 그래서 이번에도 거기서 공연을 하게 된 겁니다』
―돈 벌어서 2억5000 다 갚았어요?
『물론 다 갚았구요, 이익금까지 많이 나눠 줬습니다. 또 친구한테 빌린 건물 보증금 1억도 다시 돌려 줬고, 집도 전세로 하나 다시 얻었죠. 3억쯤 들여서 2억 정도 벌었으니까요. 더 중요한 건 이 작품 때문에 제가 투자를 받기 쉬워졌다는 거죠』
이야기는 漸入佳境(점입가경)이다.
『공연이 끝난 다음에 제가 INI 회장님한테, 「앞으로 본격적인 사업을 해보고 싶으니 투자를 해 주십시오」 했어요. 「얼마나 필요한가」 저는 크게 불렀습니다. 「20억 정도 필요합니다」 「좋아, 그럼 지금 당장 5억을 주고, 나머지는 2년 안에 나눠 주지」 그러시더니 당장 5억을 주셨어요.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대한 굉장한 확신이 있는 분 같았어요.
그분 덕분에 회사를 키웠습니다. 스타 서치가 자본금 5000만원짜리 회사였는데, 이걸 2000년 2월에 자본금 5억원짜리 회사로 키웠어요』
자나 깨나 「오페라의 유령」
―그때 투자받은 돈은 모두 얼마였습니까?
『INI에서 5억을 받고 15억을 순차적으로 받기로 했고, 또 다른 몇 군데서 15억을 받기로 약속을 받아놓은 상태였습니다』
―그 돈으로 무얼 하려고 했습니까?
『미국의 뮤지컬 제작사인 「월트 디즈니」와 접촉해서 거기서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미녀와 야수」, 「라이언 킹」, 「아이다」, 이런 작품들을 시도해 봤습니다. 그러면서 「오페라의 유령」도 같이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빠른 시일 안에 할 수 있는 걸 찾고 있었습니다』
―실례지만 영어를 잘합니까?
『저는 영어를 잘 못해서 항상 통역과 같이 다닙니다. 이런 일을 자칫 잘못 했다간 0.1%로 몇억원이 왔다갔다하는 일이 생기거든요. 또 이것은 다른 것보다 딜(Deal)이 상당히 복잡합니다. 그래서 저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 하는 걸로 하고 통역을 시킵니다』
―월트 디즈니에선 환영받았습니까?
『절 보고 「뭘 했었느냐?」고 해서 「브로드웨이 42번가,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같은 거 제작했다」고 했더니 「그 정도 작품 가지고는 우리 것 못 한다」고 하면서 그때가 2000년인데 「2005년 이후에나 한번 생각해 보자」고 하더라구요. 또 그쪽에서 「다른 데하고도 접촉하고 있느냐」고 해서 「RUG하고 오페라의 유령에 대해 알아보고 있다」고 했더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막 책상을 치면서 拍掌大笑(박장대소)를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더니 그 사람들이 눈치채고 안 웃더라구요』
LG아트센터 10개월 대관 계약이란 모험
이보다 앞서 그는 1999년, 5억을 투자받고 나서 호주에 있는, 「오페라의 유령」 제작회사 RUG의 매니지먼트 회사 (RUC, Really Useful Company) 지사장 팀 맥펠레인을 서울로 초청했다.
『팀은 서울에 와서 1주일 간 저를 여러 가지로 시험했어요. 불시에 저를 공연장으로 데려가서 배우들하고 만났을 때, 배우들이 저한테 보여 주는 태도와 감정, 또 그 극장의 담당자가 저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저에 대한 신뢰도와 자질을 보는 거였어요. 저는 그때 그걸 모르고 가자는 대로 따라다녔어요.
그러고 나서 그 사람 하는 말이 「오페라의 유령은 너무 커서 위험성이 크다. 그러니 우선 캐츠(Cats)를 해 보는 게 어떠냐」고 해요. 그러면서 「제작비를 어떻게 구하겠느냐」고 묻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돈은 다 구할 수 있다. 염려하지 말라」고 안심시켰어요. 저는 그때 제작비가 70억이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팀은 100억은 들 거라고 했어요』
―그렇게 많은 돈을 구할 자신이 있었어요?
『RUC 지사장도 저한테 똑같은 질문을 했어요. 「그렇게 많은 돈이 있느냐?」고. 그래서 제가 급한 김에 잘 아는 창업투자 회사 사장님들 몇 분을 불러 모았어요. 그 분들이 오기 전에, 「제가 이 공연을 꼭 해야 되겠으니까 보증한다고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들이 다 오셔서 「개런티하겠다」고 얘기해 줘서 팀 지사장이 어느 정도 가능성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가면서 저한테 「극장 대관 기간을 10개월로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엔 극장을 10개월 간 빌린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요. 그런데도 LG아트센터 대관 담당자를 설득해서 6개월 만에 10개월 간 대관하기로 계약을 먼저 했습니다. 이게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었어요. 투자받은 돈 5억원 가운데 절반인 2억5000만원을 대관료 계약금으로 낸 겁니다. 공연을 못 하게 되면 날릴 수도 있는 데 말입니다.
저는 그 계약서를 가지고 호주에 가서 팀을 만났습니다. 그랬더니 팀이 놀라더라구요. 그러고 나서 기술감독을 서울로 불러서 극장에 대해 문제가 없는지 검토시켰습니다. 그 사람이 LG아트센터를 자세히 보고 나서 가능하다는 귀띔을 해 주고 갔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때부터 돈을 구하러 뛰어다녔지요』
자금을 모으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개인 중에 35억을 투자하겠다는 분이 계셨어요. 그분은 외국에 나가서 「오페라의 유령」을 여러 번 보셨답니다. 가족들도 다 봤답니다. 그걸 보면서 한국에서도 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셨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저는 그때 「오페라의 유령」하고 「수호천사(De la Guarda)」를 기획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2004년까지 커다란 공연계획을 세워놓고 일을 하다 보니까, 이런 큰 공연을 하기 위해서는 조그만 개인회사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대외적인 신용도 때문에 자꾸 뜻하지 않은 장벽에 부닥쳐야 했습니다』
일이 잘 풀리는 머리여서 그런지 이 문제 역시 쉽게 풀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참에(2000년 12월), 오리온 그룹의 계열회사인 제미로(Zemiro)란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만나게 됐습니다. 그래서 제미로, 네오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저, 이렇게 三者가 합병형식을 거쳐 「제미로」란 회사를 다시 탄생시켰습니다. 그리고 제가 공동대표로 앉게 됐습니다. 「스타 서치」는 그냥 두고, 제가 가지고 있는 사업성을 그 회사에 투자한 겁니다』
―그럼 이 제미로에 와서 「오페라의 유령」이 다시 시작됐군요.
『그렇습니다. 스타 서치의 이름으로 호주 측과 「오페라의 유령」에 대한 가계약을 하고 그걸 가지고 제가 제미로로 온 겁니다』
―제작비는 모두 제미로가 단독으로 투자했나요?
『코리어 픽쳐스에서 20억을 받고 나머지 30억을 제미로에서 투자해서 50억을 사전 제작비로 쓰게 된 겁니다. 그 밖에 추가로 2억, 3억씩 받은 게 10억이 조금 넘습니다. 일단 공연이 시작된 다음에 들어가는 운영경비(Running Cost)를 제작비에 포함시키는데, 이걸 포함해서 「오페라의 유령」의 총 제작비가 110억이라고 하는 겁니다』
「미스 사이공」 전용극장 지을 계획
이렇게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제미로의 薛度胤 대표는 2001년 4월 오스트레일리아의 RUC와 본계약을 체결한다.
『그때는 조선호텔 컨벤션 홀에서 거창하게 제작발표회를 했습니다. 그것도 마케팅이었으니까요』
―이제까지 이 일을 해 오는 동안 무엇이 제일 어렵던가요?
『RUC에서 온 사람들이 한국 상황을 전혀 이해해 주지 않으려고 하는 겁니다. 로열티를 낮추려고 하루 종일 협상을 해도 꿈쩍도 않는 겁니다. 저는 앵무새처럼 계속 똑같은 얘기를 반복했습니다. 「당신들이 한국 시장이 커진 다음에 들어오면 이미 늦는다. 지금 先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지금 선점할 수 있는 파트너가 바로 나니까 조건을 좀 좋게 해달라. 조건이 좋지 않으면 한국에서 공연 못 한다」 이렇게 똑같은 얘기를 계속 반복했어요. 지겹도록. 그래도 답은 똑같았어요. 「그럼 공연 못 한다」예요.
꼬박 이틀을 그렇게 싸웠어요. 사흘째 오후에 이렇게 얘기하더라구요. 「멕시코도 오페라의 유령을 했다」 저는 멕시코가 오페라의 유령을 했으리라곤 상상을 못 했지요. 왜냐하면 멕시코가 우리나라보다 경제력이 훨씬 떨어진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전 그 얘길 왜 하나 했더니 그쪽에서 이러는 거예요. 「멕시코 수준으로 해 주겠다」 그래서 극적으로 이 계약이 성사된 겁니다』
―멕시코와는 어떤 수준이었나요?
『全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었어요』
―그게 얼만데요?
『비밀 유지 사항이기 때문에 다 밝힐 수는 없지만 순 매출의 10%를 조금 넘는 선입니다』
―그럼 일본은?
『21%입니다. 심지어는 이런 공연도 있습니다. 1주일 공연에 100만 달러를 받아가고, 또 수익의 70%를 가지고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작품이 현재 거론되고 있는 「미스 사이공」 같은 겁니다. 「미스 사이공」은 「오페라의 유령」보다도 더 클 겁니다』
―그것도 한번 해 볼 생각 있어요?
『예, 준비하고 있습니다. 「미스 사이공」은 규모가 훨씬 더 커서 LG아트센터에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컨소시엄을 만들어서 새로운 극장을 짓고 거기서 공연을 할까 합니다.
최근 관계되는 분들과 모임을 가졌는데, 200억원쯤의 펀드(Fund)를 마련해서 독립법인을 만든 다음, 그 가운데 100억을 투자해서 극장도 짓고 공연도 하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그게 2004년쯤 실현될 겁니다.
지금 세종문화회관 뒤에 짓고 있는 극장은 공사비가 15억쯤 들어가는 데 저희가 3년을 쓰고 그 이후에는 세종문화회관에 기부체납하기로 한 겁니다. 거기서 「수호천사」를 일단 1년 동안 공연할 예정인데, 가능하면 2∼3년 연장공연을 했으면 합니다』
보석 박힌 무대의상 7000만원짜리
―薛대표의 꿈은 비싼 로열티 주고 외국 작품 공연하는 건 아닐 것 같은데….
『그렇죠. 우리는 우리 작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것을 소재로 한 우리 것을 만들겠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권리를 가지고 있는 작품을 만들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작품을 저희는 지금 미국 현지에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 작품을 미국에서 준비하고 있다니!
『미국의 뉴욕대학(NYU) 안에 2년 과정의 NYU 프로그램이 있는데, 여기서 뮤지컬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저희가 연간 2만5000달러 정도의 장학금을 줄 예정입니다. 이렇게 관계를 맺으면서 거기서 개발하는 좋은 콘텐츠를 우리가 이용할 계획입니다.
여기서 개발된 콘텐츠를 놓고 한국 돈이든 미국 돈이든 끌어들여서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공연해 볼 계획입니다. 이 계획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습니다.
또 저도 NYU 프로그램 같은 것을 한국에서도 해 볼 작정입니다. 서울 뮤지컬 아카데미는 배우만 양성하고 있지 스태프를 양성하지 않아서 한계가 있습니다. 작가, 작곡가도 양성해야 하거든요』
―순수한 한국 작품으로 「명성황후」도 성공했잖아요?
『「명성황후」는 소재가 너무나 한국적이었기 때문에 세계인들이 공감하는 데 한계가 있어서 외국 나가서 별로 호응을 못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좀더 철저하게 상업적으로 접근해서 그야말로 브로드웨이에서도 투자를 받을 수 있는 소재를 개발해서 공연하려고 합니다. 이런 걸로 시작해서 앞으로 마침내는 순수한 우리 힘으로 세계적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게 3년이 걸리든 5년이 걸리든』
―이번 공연에 쓰인 무대장치, 의상 같은 건 어떻게 했어요?
『로열티 안에 세트, 의상, 조명, 음향의 대여 비용이 전체의 50% 정도 포함이 돼 있습니다. RUG가 처음 「오페라의 유령」을 제작할 때 세트, 의상, 조명, 음향 이런 거에 모두 200억원쯤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걸 저희들한테 빌려준 겁니다』
―「오페라의 유령」을 RUG의 투어 공연으로 들여왔더라면 훨씬 쉬웠을 텐데 굳이 우리 배우를 써서 우리말로 공연해야겠다는 생각은 왜 하게 됐습니까?
『제가 미국에서 그 공연을 여러 차례 봤는데 가사를 알아듣지 못해서 너무 답답했습니다. 또 과거부터 공연을 제작해 오면서 깨달은 것이 우리나라 관객들이 이해도가 낮으면 공연을 외면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우리말 가사로 가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리지널 프로덕션의 작품을 한국 배우를 내세워서 공연한 것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여기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메이저 프로덕션에선 한국의 배우를 인정하지 않으면 이런 기회를 주지 않거든요.
또 「오페라의 유령」을 自國語(자국어)로 한 공연으로, 이번 공연이 세계에서 열네 번째라는 것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이건 세계 최고의 뮤지컬 프로덕션이 한국의 실력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국의 시장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의상도 그쪽 걸 가져왔지요?
『예, 옷 한 벌에 7000만원짜리도 있습니다. 소프라노 칼롯타가 입고 나오는 옷이 보석으로 꾸며진 7000만원짜리 옷입니다. RUG에선 의상비로만 30억원이나 썼답니다. 그쪽 옷을 그대로 가져와서 우리 배우에 맞게 다 수선을 했습니다. RUG에서도 괴로웠지요. 외국 배우들의 체구가 일반적으로 큰데 일단 조그많게 줄여 놓으면 다시 치수를 늘릴 수는 없잖아요. 다른 나라에 또 빌려줘야 할 텐데』
유령처럼 나타난 유령役 윤영석
―배우들은 어떻게 뽑았지요?
『「오페라의 유령」의 모든 제작과정을 마케팅으로 이용했습니다. 첫 번째 오디션을 아주 거창하게 엄청난 돈을 들여서 광고를 하고 실시했습니다. 그것도 마케팅의 일환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오디션을 한 번 할 때마다 1억5000만∼2억원씩 들더라구요.
첫 번째 오디션은 남산 서울예대에서 했는데 클래식 쪽에서 반발이 많았어요. 그래서 1차 오디션은 클래식계의 방해공작과의 싸움이었어요. 제가 개별적으로 만나고 다니면서, 「미국에선 엄청난 오페라 가수가 오페라의 유령에 출연하고 있다」면서, 그렇게 설득했는데도 클래식을 전공한 분들이 많이 안 왔어요. 1차에선 앙상블(主演級 外의 출연자) 30% 정도밖에 못 건졌습니다.
그래서 2차 오디션을 또 거창하게 했습니다. 이번에는 좀 설득이 돼서 클래식쪽에서 아주 많이 왔어요.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유망한 성악가들 중에 많은 분들이 참가했습니다. 그런데도 다 떨어지고 칼롯타役의 윤이나씨만 결정됐습니다.
다른 분들이 떨어진 건 그분들이 노래를 못 해서가 아니고, 그분들의 음색이나 성격이 이 배역에 안 맞아서 그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런 사유를 참가하신 분들에게 일일이 다 편지로 전했습니다. 결국 2차 오디션에서도 절반 정도밖에 못 뽑았어요.
3차 오디션은 미국 뉴욕에 가서 현지에서 음악교육을 받고 있는 한국 사람을 대상으로 실시했습니다. 거기서 라울役의 유정환씨가 나왔습니다.
또 한국에 와서 다섯 번째까지 오디션을 했는데도 주인공 유령役이 안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우리나라에서 뮤지컬 배우로 가장 잘한다는 두 사람을 뽑아서 싱가포르에 있던 음악감독(오스트레일리아人)에게 좀 봐달라고 비행기를 태워서 보냈습니다. 그 사람이 그때 싱가포르에서 「미스 사이공」 음악 지휘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랬는데도 그 중 한 명만 언더 스터디로만 가능하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하도 급해서 미국에서 유령役을 했던 미국인을 세울 작정으로 한 사람을 뽑아서 한국말을 시켜 봤더니 제법 잘하더라구요. 그래서 그 사람을 쓰기로 하고 일을 추진 중이었습니다.
이제 유령을 한국인으로 뽑는 걸 포기하고 아홉 번째 오디션을 하게 됐는데, 맨 마지막에 윤영석씨가 앙상블 오디션을 보러 온 겁니다. 심사위원들이 다 지쳐서 더 이상 봐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고 있는데, 윤영석씨가 와서 앙상블로 출연하겠다고 노래를 했어요. 그런데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그 방 안의 분위기가 싸악 밝아지는 겁니다. 그러자 음악감독이 제 다리를 쿡쿡 찌르면서 이랬어요.
「팬텀 나타났어!」
저도 들어 보니까 진짜 팬텀 같았어요. 그래서 그 자리서 윤영석씨에게 팬텀(유령) 악보를 줬어요. 다른 사람 심사가 다 끝나고 윤영석씨를 불러서 팬텀 노래를 부르게 해 보니까, 딱 팬텀이야! 그래서 그 자리에서 윤영석씨를 팬텀으로 결정했어요.
윤영석씨는 클래식을 전공하고 작은 오페라에 출연한 경험밖에 없는 신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큰 役은 엄두도 못 내고 앙상블이나 하겠다고 맨 마지막에 찾아왔던 겁니다. 이렇게 全세계적으로 「오페라의 유령」의 유령 역은 유령처럼 나타난다는 설이 있어요. 다른 나라에서도 다 그랬답니다』
―배우들은 얼마나 받습니까?
『월급으로 주기로 했습니다. 주연급은 500만∼800만원 정도 줍니다. 물론 연습비, 교통비는 따로 주고요. 7개월 간 공연하는 걸로 따지면 5000만원이 좀 넘을 겁니다. 앞으로 장기공연이 많이 생기면 뮤지컬 배우라는 직업이 새로 태어날 겁니다』
컨테이너 19대 분량
―제가 「오페라의 유령」을 보니까 우선 무대만 보고도 압도되겠더라구요. 그걸 보니까 다른 무대는 무대 같지가 않더라구요.
『저게 40피트짜리 컨테이너로 열아홉 대 분량입니다. 트레일러에 싣고 역삼역부터 세우면 선릉역까지 줄을 서게 됩니다. 그게 극장 안으로 다 들어온 겁니다.
제일 어려웠던 장치가 전동기였어요. 유령이 크리스틴을 분장실에서 불러서 거울 속으로 끌어들이고 나서 지하 호수 장면으로 넘어갈 때, 14m짜리 다리 같은 철 구조물이 움직이는데 아주 큰 電動장치 두 대가 양쪽에서 무대를 바꿔줍니다. 그런데 이 電動장치가 하도 커서 LG아트센터로 못 들어오는 겁니다. 할 수 없이 벽을 뚫으려고 했다가 뜻대로 안 돼서 그걸 절단해서 들여놓고 다시 조립한 겁니다』
―샹들리에도 아주 큰 것이 천장에서 떨어지던데.
『샹들리에 자체의 무게보다도 그걸 떨어뜨리는 아주 큰 모터가 천장에 있습니다. 그걸 천장에 올릴 수 있느냐가 문제였어요. 그래서 LG아트센터를 지은 건축사의 자문까지 받고 설치했습니다. 이렇게 무대를 꾸미고 리허설을 하는데 꼬박 두 달 걸렸습니다. 보통 공연은 그 기간이면 다 끝나는 데 말입니다』
―장래 뮤지컬 시장 전망은 어떻습니까?
『7만 정도 본 시장이 현재 20만이 넘는 시장이 됐습니다. 앞으로도 매년 5만∼10만명이 새로 늘어날 걸로 봅니다. 2005년이면 단일작품으로 관객 50만 동원이 가능해질 걸로 봅니다. 그러면 1人當 8만원씩 치면 400억원 매출이 가능해질 겁니다. 그렇게 보면 시장이 지금보다 세 배 정도 더 커질 겁니다. 그 이후로는 경제상황에 따라서 시장이 급속히 커지겠지요』
―우리나라 경제력이 세계 10위권인데, 문화는 여기서 훨씬 떨어져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 공연으로 뮤지컬이 국력에 걸맞는 위치를 찾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 薛대표가 책임질 일이 있는데, 「오페라의 유령」이 관객들의 눈높이를 높여 놔서 앞으로 저 수준이 아니면 안 보려고 할 거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부터 준비해서 앞으로 저 정도 수준의 작품이 계속 올라가도록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작품들도 그대로 살아갈 겁니다. 「오페라의 유령」을 공연하는 동안에도 「명성황후」도 잘 됐구요, 또 「시카고」, 「캬바레」 같은 뮤지컬도 잘 됐습니다』
―薛대표로서는 일단 꿈을 성취한 거지요?
『그렇습니다. 이번 공연을 성공시키니까, 박장대소를 하며 저한테 그렇게 콧대가 높던 월트디즈니도 다시 공연을 협의하자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미녀와 야수」, 「라이언 킹」을 언제 할 수 있느냐고』
―이번 공연 성공으로 薛대표는 돈을 얼마나 받습니까?
『아주 쪼끔밖에 못 받습니다. 그러나 저는 앞으로 얼마든지 돈을 모을 수도 있고 또 세계 어떤 메이저 프로덕션과도 손잡고 일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게 돈보다 더 값진 거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