許 文 道
1940년 경남 고성 출생. 서울大 농대 졸업. 日 도쿄大 박사과정 수료. 조선일보 도쿄특파원·외신부 차장. 駐日 대사관 공보관. 문화공보부 차관. 대통령 정무1수석비서관. 통일원 장관 역임.
1940년 경남 고성 출생. 서울大 농대 졸업. 日 도쿄大 박사과정 수료. 조선일보 도쿄특파원·외신부 차장. 駐日 대사관 공보관. 문화공보부 차관. 대통령 정무1수석비서관. 통일원 장관 역임.
『나라는 한 사람으로 인해 일어나고, 망한다』
권력을 아무에게나 맡기는 일의 위험성을 준절히 경계하는 말이, 우리 선조들이 많이 읽은 고전인 「大學」 속에 있다. 「小人(소인)으로 하여금 나라를 다스리게 하면 災(재)와 害(해)가 함께 닥친다(小人之使爲國家, 災害竝至)」이다.
민주화를 달성하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대통령을 직접 뽑아 권력을 맡긴 터이라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나라 형편이 대통령만의 탓이고 국민들과는 무관한 것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권부 깊숙이 번져 버린 부패상, 개혁의 空轉, 손자대까지 갚아야 할 나라 빚, 처져버린 제조업의 국제 경쟁력, 흔들려 버린 국가의 정체성, 公교육의 황폐, 對敵觀(대적관)의 불일치로 인해 우리 안보의 기축인 동맹관계에 일어난 난조들, 이 모든 것을 생각할 때, 15년 동안 세 사람의 민주화 지도자를 겪어본 지금 다시 주인인 국민들이 시행착오를 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올해는 유달리 국가 命運의 사활이, 小人을 알아보고 제끼는 국민의 眼力(안력)에 달려 있는 한 해이기도 하다.
宋(송)나라 때의 한 철인이 중국 역사상의 명재상 管仲(관중)을 논해 『나라는 한 사람으로 인해 일어나고, 한 사람으로 인해 망한다. 賢者(현자)는 그 몸이 죽는 것을 슬퍼하지 않고, 그 나라가 쇠퇴하는 것을 걱정한다』고 했다.
지금 우리는 임기 말에 더 두드러져 보이는 국정운영의 난맥상과 現 정권의 마이너스적 실적의 심각함을 앞에 하여, 이것이 통상적 정권의 졸업기에 불가피한 레임 덕의 자연현상인지, 한 정권의 결과적 정당성이 부정당하는 亡政權(망 정권) 현상인지, 더 나아가 亡兆(망조)가 정권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나라 차원까지 번져나는 망국현상인지를 가름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전국시대 말기, 기원 전 3세기경 국가 간의 생존경쟁이 우심했던 시대를 살았던 사상가 筍子(순자)는 한 나라에 찾아드는 난세의 조짐을 다섯 가지로 들어 보였다.
▲其服組 (그 복장은 화사하고·組: 여러 가지 천으로 짜 모은 사치품) ▲其容婦 (그 모습은 여자 같고)▲其俗淫 (그 세풍은 음란하고) ▲其志利 (생각은 모두 이기적, 배금주의적 탐욕에 있고) ▲其聲樂險 (노래와 음악은 거칠고 광적이다)의 다섯 가지다.
일본 경제의 절정기인 1980년대가 끝나면서 거품이 빠지고, 금융위기가 닥치고, 불황이 장기화하고, 개혁은 지지부진하고 정치의 리더십이 혼미를 거듭하던 1990년대 말, 京都(교토)대학의 한 교수는 「왜 국가는 쇠망하는가」(中西輝政, PHP新書)라는 책에서,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의 잿더미에서 일어나 경제에서 서양을 따라잡고 頂點까지 갔던 일본 국가가 平成期(일본연호, 1989년 시작)가 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진단했다.
지구의 4분의 1을 차지했던 大英제국이 大西洋가의 섬나라 보통국가로 쇠망하는 과정을 연구했던 이 교수는 大英제국의 쇠퇴가 결정적으로 된 시기를 20세기의 초두로 잡고있다.
七大洋을 누빈 팍스 브리타니카의 군주 빅토리아 女王(재위 63년)의 他界에 이어 시작된 에드워드 7세의 재위 10년(1901~1910) 간 영국의 정신상태와 사회상이, 거품이 꺼져버린 일본의 1990년대와 酷似(혹사)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 두 시기 각각의 사회 현상을 국가 사회와 문명 쇠퇴의 징표로 보고, 거기에 나타난 정신상의 변화에서 쇠퇴의 근본요인을 찾고자 했다. 사회의 유지·발전을 궁극적으로 가능케 하는 것은 정신의 힘이다. 사회의 정신적 활력, 대중의 극기심, 엘리트의 정신적 긴장도 등이 감퇴하고 풀어지면 頂上을 달리던 사회와 문명도 쇠퇴하고 마는 것임을 역사는 알려 주기도 한다. 이 교수가 1990년 전후의 일본 사회와 너무나 닮았다고 주목한 영국의 에드워드期 사회풍경을 함께 들여다본다.
英國 에드워드 7세 시대의 사회상
▲대도시에 집착하는 젊은이들 상당기간의 안정과 번영으로 생겨난 중산층의 자녀들이 높은 생활수준을 당연시하고, 도시의 향락구조에 침몰하여 날이 갈수록 도시를 떠나려 하지 않고, 지방근무 기피가 늘어나기 시작함.
▲해외근무 혐오 英 본토의 생활이 풍요로워지자 大英제국을 떠받쳤던 해외 진출과 이주에 지장이 생겼다. 해외근무를 싫어하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세계를 누빈 英國 상선의 승무원 되기를 원하는 젊은이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해외근무가 많은 외교관이나 상사원직을 엘리트 학생들이 회피하러 들었다.
▲해외여행 붐과 온천 붐 「그랜드 투어」라고 하여 영국에서는 귀족들이나 하던 해외여행을 중산층의 대중이 떼거리를 지어 패키지로 도버해협을 건너 유럽대륙을 누비는 붐이 일어난 것은 에드워드期다. 이 시기에 온천 붐이 곁들여진다. 古代 로마와의 공통점을 걱정한 영국의 식자들은 「이대로 가면 우리 大英제국도 많은 사람들이 욕탕에 들앉은 채로 無爲로 시간을 보낸 저 로마 말기처럼 돼 버리는 것이 아닐까」고 썼다 한다.
▲이벤트 투성이의 생활 이때의 영국인들은 각종 전람회, 박람회, 스포츠 시합, 온갖 행사, 이벤트에 혈안이 되어 돌아갔다. 영국의 식자들은, 로마제국의 말기에 있었던 大경기장의 전차경기, 노예 검투사들의 살인시합, 라이온과의 혈투에 열광한 로마시민의 無職(무직)대군을 상기하고 걱정했다.
▲脫古典과 만화 선호 이때에 이르러 영국의 독서인구가 고전에 대한 관심이 낮아지고, 만화를 선호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동시에 예술과 문화의 취미도 저열해지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문필가들이 공부를 하지 않은 채, 지나가는 생각만으로 붓대를 놀리는 글이 많아졌다.
▲건강 붐과 식도락 붐 신문이 경쟁적으로 건강관련 기사를 싣고, 잡지가 건강특집을 되풀이한 것이 이때다. 퓨리탄적인 전통이 있는 영국의 음식은 質素(질소)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식도락 붐이 일어나고, 美食으로 한없이 경사해 들어갔다. 생각 있는 영국인들이 또 한번 로마귀족들의 「그리스 도리아지방産의 포도와 포르투갈 루시타니아의 바다에서 건진 성게 알을 차린」 식탁을 상기하면서 쇠망의 조짐이 아닌가 걱정했다 한다.
하나만 더 보탠다면, 20세기가 되면서 영국에는 기독교 등의 전통종교가 힘을 잃고, 邪敎(사교) 비슷한 신흥종교들이 번창하여 기묘하게 사람들을 끌었다 한다.
요컨대 영국의 20세기 初 大英제국의 내리막이 시작된 에드워드 시대는 대단히 소란스럽고, 뭔가 경박하고, 기묘하게 재미있고 우습기만 하던 시대로, 새로운 오락이 연이어 생겨나고, 신기한 물건들이 자꾸만 수입되고, 런던의 밤거리는 휘황찬란하여, 사람들의 눈이 팽팽 돌아갔던 시대였던 모양이다.
앞에 든 나카니시(中西) 교수는 거품이 빠지기 前後(전후)의 日本 사회광경이 영국의 에드워드期와 공통점이 있다면서 日本의 경제, 사회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경고했었다.
그의 경고를 지금 여기 소개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 사회가 이와 닮아가고 있는 것 같아서이다. 글로벌 냉전이 끝나고서 IMF 관리가 오기까지의 1990년대의 세태가, IMF 관리에서 1, 2년 지나자마자 되돌아가서까지, 정상점을 통과한 이들 나라들과 너무나 흡사한 것을 눈감을 수 없고 보니, 일순 아찔한 생각이 든다.
국민소득 겨우 1만 달러 선을 맴돌면서 頂上은 아직도 아득한 산 중턱에서, 퍼질고 앉아 여기만 해도 경치 좋다면서 도시락 끌러 下山 파티를 시작한 꼴이라고나 할까.
『文明의 쇠퇴에 不可抗力은 없다』
全세계 인류사상에 있었던 21개 문명의 흥망성쇠를 관찰·考究(고구)했던 20세기 최고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主著(주저) 「역사의 연구」의 全 5편 중의 한 편을 국가와 문명의 「쇠퇴」를 주제로 하여 다루고 있다. 이중의 한 章에서 토인비는 사회 쇠퇴의 궁극의 기준으로 「자기결정 능력의 상실」을 들고 있다.
그의 논지의 핵심은 어떤 문명이건 성장이란 창조적인 소수가 非창조적인 다수 대중을 이끌 때 가능하다는 것. 성공의 연속으로 인해 대중의 추종 장치인 기계적 모방성을 창조적 소수자 자신이 뒤집어썼을 때는, 성장의 지속에 필요한 창조적 엘리트의 부단의 「자발성과 유연성」은 없어지고 성장은 정지한다는 것. 전체 사회를 구성하는 부분 상호간의 조화의 상실은, 전체의 자기결정 능력을 잃게 한다는 것 등이다.
現 정권 들어 개혁의 이름 밑에 진행된 몇 가지 사례, 즉 교원 정년문제, 의약분업, 의보통합, 週5일제 문제 등 하나같이 지지부진, 우왕좌왕이다. 개혁 과정에서 위의 몇 가지 사례들은 우리 사회의 「자기결정 능력의 상실」이라는 결정적 현상을 드러내 보였다. 그것이 창조적 소수라야 할 사람들의 기능미달(리더십 문제) 때문이든, 사회구성 부분 상호간의 조화 상실 때문이든, 토인비의 소론을 따른다면 우리 사회는 쇠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토인비의 지적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달도 차면 기우나니」式의 숙명론적 쇠퇴론은 없다는 것이다. 그는 『문명의 쇠퇴에 불가항력은 없다』고 하고 있다. 모든 쇠퇴기에는 이유가 있고 이유를 제거하면 反轉(반전)은 가능하므로, 쇠퇴론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토인비는 쇠퇴의 단초를 여는 요인은 체제 안에 있고, 인간정신의 내면에 있음을 강조한다. 더러 기술의 쇠퇴가 경제·사회의 쇠퇴를 불러온다고 강조하는 소리가 있지만, 따져보면 역사상에 그같은 예는 하나도 없다고 토인비는 가르쳐 준다. 토인비는 한 영국 詩人의 구절을 인용한다.
「우리들은 언제나 스스로의 속에 있는 허(虛·false)한 것에 배반당한다」
토인비는 셰익스피어의 「킹 존」에서도 인용해 놓았다.
「이 영국은 지금까지 오만한 정복자의 발 밑에 꿇어 엎드린 적이 없었고, 또 장래에도 없을 것이다. 먼저 스스로를 상처 내는 일을 거들지 않는 한」
문명의 생명력이나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근본 요인이 울타리 안에 있고 인간 정신의 내면에 있다 하는 것이 토인비의 역사철학의 핵심으로 보여진다. 그가 맹자를 읽었다면 아마 다음 구절도 인용했을 것이다. 「國必自伐而後人伐之」(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먼저 망하게 하고 나서 타자가 망하게 한다.)(離婁상편)
19세기 영국의 정치사상가 월터 바조트는 『영국의 성공의 대부분은 영국인이 바보였던 덕분이다』고 했다 한다. 토인비는 영국은 지도자가 좋았다고 긍정하면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온갖 사안을 스스로 생각하기로 결심했다고 가정한다면, 좋은 지도자는 좋은 추종자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고 했다. 쇠퇴의 反轉을 바라고 좋은 지도자를 찾고 있는 우리들이 눈여겨 볼 만하지 않겠는가.
포퓰리즘 경연장에 뛰어든 정치인들
「쇠퇴」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단순히 경제가 내려앉는 것 자체이기보다는 경제의 활력을 떠받치는 좀더 깊은 곳에 있는 사회요인 내지 정신 요인이다.
權府(권부) 깊숙이 파고든 부패의 만연이나, 교육, 국방, 복지, 외교 등 일만 터졌다 하면 어처구니없이 드러나는 관료들의 전문성 감퇴가 얘기하는 것, 그건 우리 사회 지도층, 관료 엘리트들의 사명의식의 증발, Moral(도덕·윤리)과 Morale(사기·정신력)의 수준에 일어난 심각한 변화를 말한다. 1980년대 末 민주화와 글로벌 냉전의 해소를 1, 2년 사이에 불각중에 만난 데다, 때마침의 리더십마저 어설퍼서, 대중이 민주화로 인한 가치관의 다양화를, 규율의 방기와 정체성의 혼란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방치하고 말았다.
의무의 포기와 권리의 無限주장이 자유의 내용이 돼버린 민주화 천지에서, 정치인들은 거리낌없는 권력동기로 자유라는 이름의 대중의 응석을 사냥하려 드는, 포퓰리즘 경연장에 뛰어들었다. 이 바람 속에 경제 주체들의 활력도 사그라지고 말았고, 근대화, 고도성장, 선진화를 떠받쳤던 관료 및 사회엘리트의 긴장도도 풀어지고 말았다. 고도성장의 밑거름이었던 새마을운동으로 다져진 대중의 극기심 같은 것은 들먹이기도 전에 날아가 버렸다.
앞에서 보았던 사회쇠퇴의 조짐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 사회는 민주화 이후 쇠퇴하기 시작한 것으로 된다. 앞시대가 구축해 놓은 경제와 사회바탕을 민주화가 딛고서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토인비式으로 말한다면 한국 사회는 민주화의 역사적 도전에 대한 응전에서 실패하고 있는 것이 된다.
「韓非子」 속에 올해 같은 선거철에 곱씹어 볼 만한 기막힌 잠언 하나가 있다.
<下君은 자기의 능력(能)을 다 하고, 中君은 타인의 체력(力)을 다 쓰고, 上君은 타인의 지혜(智)를 다 쓰게 한다. (八經편)>
君主를 上, 中, 下의 3등급으로 나누었는데, 대통령이나 경영인 사장이라도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이 잠언을 따르면, 무슨 일이 터졌는데 대통령이 下僚(하료)집단에 탓을 돌린다면 그는 中級도 못 된다는 얘기가 된다. 대량매체에 의한 이미지 조작이 대중의 표심을 휩쓰는 세상이 되고 보니, 下級을 충족시킬 「능력」 정도라도 누가 가졌는지, 알기가 쉽지 않음을 세 번 해보고 난 지금 다들 느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1987년의 6·29선언은 우리 정치사의 민주화를 향한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다.
6·29의 결단을 내린 지도자는 당시의 全斗煥(전두환) 대통령이었다. 사안의 성격상 그같은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대통령뿐이었다. 全대통령은 선거를 앞두고 있었던지라 국민 대중을 향해서는 그때의 민정당 盧泰愚(노태우) 대표가 쟁취해서 내린 결단이란 포즈를 취하게 했다.
盧대통령의 「虛한 어떤 것」
문제는 盧대표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스스로 6·29의 결단자라는 포즈를 무너뜨리지 않은 데 있다.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하나는 역사의 진실을 두고 대통령이 국민을 향해 기만 행위를 지속한 것이고, 또 하나는 결단자 포즈를 지속함으로써 참 결단 주체에게 돌아가야 할 일종의 정치적 과일을 끝내 횡령해 버린 일이다. 세상이 다 모른다고 해도 盧대통령 본인은 스스로 마음속에 「기만」과 「횡령」 의식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기만」과 「횡령」 의식은 한 지도자의 정신 내면에 토인비가 얘기하는 「虛한 어떤 것」을 만들어 내고야 마는 것이다. 盧대통령은 임기 내내 애칭인지 비칭인지 알 수 없는 「물 대통령」이란 말을 세상으로부터 들었다. 그 의미하는 바는 주로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것으로 통했다.
결단력이야말로 리더십의 가장 중요한 내용 중의 하나이고 보면, 6·29에 연관하여 盧대통령의 정신 내면에 생겨난 「虛한 것」이 그의 리더십을 弱體 리더십으로 만들고 만 것은 아닐까.
민주화가 되고 나서, 민주화를 규율의 해체로 착각하는 대중의 집단 이기주의 앞에 국정은 주춤거렸다. 盧泰愚 대통령의 弱體 리더십은, 임금이 생산성 향상과 관계없이 폭주하여, 탄탄했던 한국 경제의 국제경쟁력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어찌하지 못했다. 우리 사회의 쇠퇴는 이때부터였다.
盧대통령은 자신의 결단력 부족을 의식했던지 통 큰 결단을 하나 해 보였다. 임기 초년의 남북문제 중요선언에서 그는 『북한은 敵이 아니다』고 했던 것이다. 그가 이것이 국가의 정체성을 건드리는 얘기라는 것을 알고 했을까. 現 정권 들어 우심해져 있는 국가 정체성 혼란문제의 씨는 盧泰愚 대통령 때 이미 뿌려졌던 것이다.
반도를 깔고 앉으려던 大唐(대당)제국의 군대까지 격멸 축출하고, 삼국통일을 완수했던 신라 文武王이 만년에 창고도 다시 차 오르자, 경주의 도성을 일신하려 하였다.
논란이 있었던지 일을 시작해 놓고, 왕은 부석사의 의상대사에게 자문을 구했다. 의상대사는 『비록 초야의 띠집에 있어도 正道만 행하면 복업이 장구할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사람을 수고롭게 하여 성을 쌓아도 아무 이익이 없을 것이다』고 대답했다. 왕은 곧 役事를 그쳤다(삼국사기 문무왕 21년 6월).
도성의 일신은 통일제왕이 집념을 보일 만한 사안이다. 그러나 문무왕은 君王의 恣意(자의)를 견제할 만한 통치 구조 속에 스스로를 두고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金泳三(김영삼) 대통령 때 實名制가 실시되고 우리나라의 OECD(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이 있었다. 그러고서 임기 말에 IMF (International Monetary Fund:국제통화기금) 관리가 왔다. 사안의 성격상, 실명제와 OECD 가입의 정책의도가 타당하고 유효한 것이었으면 IMF 관리는 올 수 없는 그런 문제이다.
투명 경제의 멋을 내고 선진국 진입 대통령의 이름을 얻고 싶었을까. 촌사람이 서울바람 좀 쏘였다고 삐딱구두 신고 넥타이 한 번 매려다가 소 팔고 논 팔고 기둥뿌리까지 빠진 격이라고나 할까. 그 정신 풍경은 끝없이 虛하다. 質實(질실)이 없다. 실명제 문제만 해도 그전의 두 대통령이 문제 많다고 유보해 놨던 것을 「나는 해치울 수 있다」는 오기가 YS에게 있었을까.
오기, 마음속에 세우는 무리한 기둥, 그것은 虛다. 이것이 바로 토인비가 알려 준 정신 내면의 虛 아니겠는가.
앞에서 본 의상대사가 방대한 화엄경전을 210자의 哲理로 응축시킨 법성계를 짓고 서문에서 「執名(집명)의 무리로 하여금 無名(무명)의 眞源(진원)으로 돌아가게 하려 한다」고 했다. 그때에도 이름을 쫓는 執名의 무리는 많았던지, 의상대사는 執名의 무리의 마음속에 있는 虛를 놓치지 않았다.
OECD 가입으로 나라를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은 대통령 소리를 들으려던 것이 IMF 관리로 연결되고 보니 그 執名의 발바닥 밑이 허공이었다는 것도 몰랐다는 것이다. 그만큼 執名하는 정신 내면은 虛하다는 것을 알겠다.
金大中 대통령의 正體性의 연원은?
現 金大中 정권 들어 IMF 소동이 한물 가면서부터, 사람들 입에서 자주 『이 세상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왔다. 이 말 속에는 생활인의 정체성 감각에 대한 혼란이 체감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비전향 장기수를 대거 北으로 보낸 것, 北의 金正日을 만나 연방제·연합제를 걸어 합의한 것, 金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하여 행한 사과성 발언 등, 다 들지 못하지만 이들 조치나 언행 등은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을 흔드는 것들이다. 나라를 이끄는 대통령이 국가 정체성을 흔드니까 사람들 입에서 절로 「이 세상이 어디로 가느냐」는 얘기가 나온 것이다.
위에 든 조치나 발언 등은 곰곰 따져보면, 대한민국의 정체성과는 다른 별개의 어떤 정체성에 연계되어 있는 신념체계와 무관하게는 나올 수 없는 것들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연결될 수 없는 신념체계의 존재를 대통령 스스로는 인정한 적이 없다. 뿐만 아니고 국가 정체성과 충돌하는 정책들을 국민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그 정책들이 원리적으로 바탕할 수밖에 없는 신념체계를 공개하여 국민들을 설득시켜 보려고 든 적도 없다. 그 쪽은 안개 속이다. 대통령 마음속에 있는, 국가정체성(내셔널 아이덴티티)과 충돌하는 정책들의 연원인 신념체계는 안개 속에 덮여 있다. 그 안개만큼 金대통령의 정신 내면에는 토인비가 말하는 「虛한 것」이 있는 것이다.
국민들의 체감적 정체성 혼란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일반인들에겐 「일이 손에 안 잡힌다」는 현상을 가져온다. 급기야는 목표상실감에 빠진다. 아직도 가야 할 산하가 있는 사회에서는 무서운 얘기다.
정체성에 혼란이 오면 엘리트들의 경우 사명의식에 난조를 일으킨다. 現 정권 들어 교육, 외교, 국방, 복지 등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 관료들의 전문성 감퇴는 이와 유관할 것이다.
그리고 경제의 활력을 좀더 깊은 곳에서 지탱하는 사회적·정신적 활력을 구성하는 윤리·도덕(moral)과 사기·정신력(morale) 같은 것은 기본적으로 정체성(Identity)에 뿌리하고 있는 것이다. 말의 모양부터 원래 표리 관계에 있는 moral과 morale은, 정체성이 흔들리면 함께 무너져 내리게 마련이다. 사회 지도층에 만연한 부패, 성장하는 사회가 가졌던 心的 팽팽함의 사라짐 등이 모두 정체성 혼란과 무관하지 않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망하지 않으려면 敵國이 필요하다는 역설
이 정권 들어 국가·사회의 쇠퇴를 불러오게 된 心的 긴장의 이완을 결정적으로 만든 가장 큰 요소는 對敵觀(대적관) 문제이다. 물론 정체성 문제와 관련 있다. 이 정부는 남북 간에 전쟁이 안 일어날 조치를 金대통령이 취한 것으로 선전하다가, 국민들이 敵이 없는 상황 속에 있는 것으로 착각토록 오도하였고, 급기야는 北이 敵이 아니라는 데까지 갔다. 北의 대량 살상무기가 南으로 올 것이 아니라는 데까지.
나라를 생각하는 사람들한테 孟子는 늘 정신이 번쩍 들 말을 준비해 놓고 있다. 이런 말이 있다.
『안으로는 법도를 아는 신하와 (진정한)보필을 아는 선비가 없고, 밖으로는 적국이나 외환이 없는 나라는 항상 망한다(出則無敵國外患者, 國恒亡). 그런 다음에야 우환 속에서는 살아나고, 안락 속에서는 죽게 되는 것을 알게 된다』(告子下편)
망하지 않으려면 적국이 필요하다는 이 역설을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멀쩡한 나라들이 왜 가상적국까지 만들어 평시에 뛰고 있는지 알 만하다. 또 명명백백한 現前(현전)하는 敵을 敵이 아니라고 알게 한 現 정권이 얼마나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다.
이는 토인비가 셰익스피어에서 인용한 국가가 「스스로를 상처 내는 일을 거든」 것이고, 앞부분에서 들었던 맹자의 국가의 自伐(자벌·스스로를 치는 것) 바로 그것이다. 孟子는 敵國의 존재가 나라를 恒存(항존)케 하는 무한한 心的 긴장의 공급원임을 갈파한 것이다.
「런던 타임스」의 英國病 진단
오늘 아침(3월7일) 신문에 「민주노총은 정부가 발전소 매각을 강행하면 제2의 연대총파업을 벌이겠다고 밝혔다」는 기사가 보인다.
가까운 역사 속에 있는 영국을 쇠망으로부터 건진 「鐵(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에 관심이 가 있었던지라, 왈칵 우리나라도 영국病에 걸렸구나 싶은 생각이 함께 일어났다.
영국病이란 고도 복지국가 건설로 인한 정부 공공지출의 불감당한 폭증과, 高복지적·사회주의적 심정이 戰後 영국 사회에 만연하면서 노동조합의 힘이 증대되고 노동운동이 급진화한 것을 두고 이르던 말이다. 이 영국病은 영국의 사회, 경제를 쇠퇴의 극한까지 몰고 갔다.
대처가 수상으로 등장하던 전야인 1970년대, 파운드貨는 폭락하고, 경제의 활력은 사그라져 버리고, 국민의 생활 그 자체인 병원, 학교, 관청을 위시하여 쓰레기 수집요원, 장례매장 공무원까지 공공부문이 파상적으로 파업을 단행, 온 사회가 마비상태로 빠져들었다. 급기야는 가장 강력한 탄광노조가 파업을 걸자, 산업혁명의 본산이요 세계의 최선진국이던 영국이 「촛불을 켠 週3일제」의 국가비상사태로 내몰려졌다. 대처 보수당 당수의 前任者이던 히드 정권은 탄광노조에 밀려났던 것이다. 1970년대에 또 한번 노동당 정권도 이런 경우를 당했다.
그 시절 「런던 타임스」는 다음과 같은 경고를 발한 적도 있었다.
<영국민은 분에 맞지 않은 생활(정부의 복지로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것을 이름)에 안주하려 들고, 좀더 일하기보다는 좀더 휴가를 가지려 들고, 일해야 할 시간에 도박내기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또 국민들은 사물을 실행하려 들기보다는 실행하지 않을 이유만 찾으려 든다. … 어느 내각도 국민에게 진실을 말하는 용기를 갖지 못하고, 노동조합을 조금이라도 바른 자세로 교정해 주려는 각오를 결하고 있어 … 완전고용의 결과, 노동조합은 힘을 남용하고, 정부의 경제기본정책에 반대하여 탈법파업을 그치지 않는다.…
산업계는 勞·使 모두 아직도 보호를 요구하는 소리가 턱없이 많고, 경쟁에 맞붙어 보려는 의욕을 결하고 있다. … 20여 년 간이나 최고 리더십에 문제가 있어, 이빨을 거즈에 싸서는 엄혹한 현실을 감추고, 言行이 일치하지 않은 채, 책임을 완수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권리만 주장하다 보니, 국민 전체에 『받아 챌 것은 뭐든지 받아 채지만, 줄 것은 동전 한푼 안 내 놓겠다』는 근성이 배어 들고 말았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한 나라의 국민들이 「규율을 던져버린 자유」와 평등만 요구하는 일방에서, 그만 그만한 정치 지도자들이 권력 잡겠다고 포퓰리즘(대중·인기 영합주의) 경합만 벌이다 보면 영락없이 빠져드는 나라 꼴이 이런 것 아니겠는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었던 영국은 한 100년 걸렸는데 우리 한국은 15년 남짓해서 이 모양이 되어버린 것 아닌가.
문제는 現 金大中 정권 들어 한국의 영국病 추세는 더 본격화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現 정권은 직불형 기초 복지에 열을 올렸고, 「親노동자 정권」을 표방」(2002년 1월10일 朝鮮데스크)해 보였다. 「온정주의」를 본질로 하는 「큰 정부」의 이상이 역사 현실에서는 파탄나고 말았음을 이 정권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는 말인가. 늦게 가는 우리가 앞선 나라들의 쇠퇴의 장본이 된 시행착오까지 따라 하려드는 것은 그 저의를 알기 어렵다.
「관용과 박애」에 입각한 「계획·간섭」이 의존심 등 인간의 본질에 숨어 있는 「약함」과 「추함」을 오히려 조장하는 결과로 나타났음을 값비싼 역사실험은 알려 주지 않았는가. 그 결과는 국민 모두의 생활 공동체인 국가의 정신적·경제적 쇠퇴의 원천을 불러 오고 만 것이었다.
보도에 의하면 가스노조는 한번 타결났던 노사협상의 과정과 결과에 불만을 품고 보다 강성으로 알려진 민주노총에 가입하기로 결의했으며, 철도노조도 한국노총 탈퇴를 들먹이고 있다 한다. 發電(발전)노조의 파업이 장기화하면서 電力(전력)대란이 우려된다는 보도도 보인다.
한국에도 영국의 사회·경제의 쇠퇴가 극에 달했던 1970년대처럼, 촛불 켜 놓고 週3일제를 하는 시대가 올 것일까.
「親노동자 정권」을 표방한 정권下에서 강화된 노동운동의 에너지가 정작 발휘되는 것은 다음 정권 때 아니겠는가.
철의 여인 대처 수상이 정치생명을 걸고 샅바를 잡은 씨름의 대상은 「영국의 쇠퇴」 그 자체였다. 대처는 수상이 되기 전인 당수 시절부터 소속 정당의 대세나 국민의 전반적 무드를 거스르면서, 복지 삭감 등 공공지출의 축소, 노동개혁, 민영화, 법과 질서 등 대중인기와는 동떨어진 정책을, 그것만이 영국의 살 길이라고 강렬한 신념을 딛고 명확히 내걸었다.
1979년 취임하자마자 착수한 긴축재정으로, 실업자가 늘어나고, 지지율이 노동당 밑으로 내려가고, 반대여론이 와글거리는 속에 열린 1981년의 보수당 전당대회, 그러나 「철의 여인」은 정부의 엄중한 지출삭감과 노동조합과의 대결 결의를 명확히 밝히고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한다.
『좋아하는 타입이면 젠틀맨은 (지나가는 미인을) 되돌아보기도 하지만, 레이디(숙녀)는 그렇게 안 해요』
어떤 희곡의 대사였던 모양인데, 조크이기보다는 보수당의 전임 수상인 히드가 비슷한 개혁 주제를 걸었다가 여론의 반대에 부딪쳐 주저앉았던 것에 빗대, 강렬한 결의 표명을 해 보인 것이다.
「달콤하게 내거는 개혁」 공약은 사기
두 번째 임기의 총선이 있던 1983년에는 정책효과가 가시화되어 20%를 넘던 인프레가 한 자리수로 내려가 있었다. 그동안 몇 번 정권의 숨통을 끊기도 했던 영국 최강의 탄광노조는 1984년 봄부터 드디어 長期 파업에 들어갔다.
이 파업과의 대결과 분쇄가 대처 개혁정치의 분수령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처가 천명했던 「이윤원리」에 따라, 수지 맞지 않는 탄광은 폐쇄하겠다고 사용자인 전국 탄광연맹의 방침 표명이 있었고, 탄광노조는 파업으로 받았다.
대처는 공권력의 동원에 주저하지 않았다. 쟁의는 갱부들과 경찰대의 육탄전의 형태로 쌍방에서 희생자를 속출해 가며 1년 간 끌었다. 대처 수상은 원칙을 견지하며, 말썽은 있었지만 使側인 탄광연맹회장을 끝까지 강력히 지지했다. 마지막엔 마르크스주의자인 탄광노조 조합장이 손을 들었다.
이후 대처의 계산된 강경자세 앞에 전국단위 노조의 힘은 약화되었고, 파업은 격감해 버렸다. 「이윤원리」의 강조로 진행된 기업체질의 개선과 함께, 1986년 영국은 드디어 선진국 중 최고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國有기업의 광범한 민영화로 1000만 명 이상의 근로자와 시민이 株主대열에 합류했다. 400만명의 노동자가 財테크 전선에 나서게 되자, 오랜 기간 정부가 주는 복지의 미지근탕에 잠겨 있던 김빠진 것 같던 사회분위기가 일신되어 버렸다.
그녀의 인간됨은 부친으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한다. 그는 구두 직공으로 출발하여 잡화상으로 자수성가하고, 나중에는 인구 3만 명인 고향 그랜덤의 시장에도 선출되었다. 그는 봉사와 퓨리턴 윤리에 투철했던 개신교도였다 한다.
대처 수상은 늘 국민들에게 『빅토리아 시대로 되돌아 가라』고 했다. 그녀가 강조했던 것은 퓨리턴적 禁欲윤리(근면, 질실, 자조정신)였다. 향락적 개인주의가 만개한 고도복지사회의 한복판에서, 고소득층 속에서의 사회주의 경사가 오히려 지성의 징표로 여겨지던 분위기에서, 그녀는 시대착오, 강경파, 극우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개인 對 공동체의 도식에서 공동체도 염두에 두는 성숙된 민주주의를 영국에 뿌리 내리게 했고, 21세기를 향해 자기 규율 있는 자유라 할, 新자유주의(네오 리버럴리즘)에 세계를 주목케 했다.
대처는 국민들에게 극약처방을 내놓았는데 영국민들이 그것을 삼켰다고 한 표현이 한 傳記(전기)에 있었다.
산업화가 되고 민주화가 된 나라에 불가피하게 닥쳐오는, 복지 문제와 노동 문제로 인한 사회·경제의 쇠퇴위험은, 現 金大中 정권을 거치면서 그 추세가 뚜렷해 지고 있다.
올해 등장할 「한 사람」이 떠맡을 수밖에 없는 과제는 확연하다. 문제는 그를 가려낼 국민의 眼力(안력)이다.●
권력을 아무에게나 맡기는 일의 위험성을 준절히 경계하는 말이, 우리 선조들이 많이 읽은 고전인 「大學」 속에 있다. 「小人(소인)으로 하여금 나라를 다스리게 하면 災(재)와 害(해)가 함께 닥친다(小人之使爲國家, 災害竝至)」이다.
민주화를 달성하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대통령을 직접 뽑아 권력을 맡긴 터이라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나라 형편이 대통령만의 탓이고 국민들과는 무관한 것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권부 깊숙이 번져 버린 부패상, 개혁의 空轉, 손자대까지 갚아야 할 나라 빚, 처져버린 제조업의 국제 경쟁력, 흔들려 버린 국가의 정체성, 公교육의 황폐, 對敵觀(대적관)의 불일치로 인해 우리 안보의 기축인 동맹관계에 일어난 난조들, 이 모든 것을 생각할 때, 15년 동안 세 사람의 민주화 지도자를 겪어본 지금 다시 주인인 국민들이 시행착오를 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올해는 유달리 국가 命運의 사활이, 小人을 알아보고 제끼는 국민의 眼力(안력)에 달려 있는 한 해이기도 하다.
宋(송)나라 때의 한 철인이 중국 역사상의 명재상 管仲(관중)을 논해 『나라는 한 사람으로 인해 일어나고, 한 사람으로 인해 망한다. 賢者(현자)는 그 몸이 죽는 것을 슬퍼하지 않고, 그 나라가 쇠퇴하는 것을 걱정한다』고 했다.
지금 우리는 임기 말에 더 두드러져 보이는 국정운영의 난맥상과 現 정권의 마이너스적 실적의 심각함을 앞에 하여, 이것이 통상적 정권의 졸업기에 불가피한 레임 덕의 자연현상인지, 한 정권의 결과적 정당성이 부정당하는 亡政權(망 정권) 현상인지, 더 나아가 亡兆(망조)가 정권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나라 차원까지 번져나는 망국현상인지를 가름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전국시대 말기, 기원 전 3세기경 국가 간의 생존경쟁이 우심했던 시대를 살았던 사상가 筍子(순자)는 한 나라에 찾아드는 난세의 조짐을 다섯 가지로 들어 보였다.
▲其服組 (그 복장은 화사하고·組: 여러 가지 천으로 짜 모은 사치품) ▲其容婦 (그 모습은 여자 같고)▲其俗淫 (그 세풍은 음란하고) ▲其志利 (생각은 모두 이기적, 배금주의적 탐욕에 있고) ▲其聲樂險 (노래와 음악은 거칠고 광적이다)의 다섯 가지다.
일본 경제의 절정기인 1980년대가 끝나면서 거품이 빠지고, 금융위기가 닥치고, 불황이 장기화하고, 개혁은 지지부진하고 정치의 리더십이 혼미를 거듭하던 1990년대 말, 京都(교토)대학의 한 교수는 「왜 국가는 쇠망하는가」(中西輝政, PHP新書)라는 책에서,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의 잿더미에서 일어나 경제에서 서양을 따라잡고 頂點까지 갔던 일본 국가가 平成期(일본연호, 1989년 시작)가 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진단했다.
지구의 4분의 1을 차지했던 大英제국이 大西洋가의 섬나라 보통국가로 쇠망하는 과정을 연구했던 이 교수는 大英제국의 쇠퇴가 결정적으로 된 시기를 20세기의 초두로 잡고있다.
七大洋을 누빈 팍스 브리타니카의 군주 빅토리아 女王(재위 63년)의 他界에 이어 시작된 에드워드 7세의 재위 10년(1901~1910) 간 영국의 정신상태와 사회상이, 거품이 꺼져버린 일본의 1990년대와 酷似(혹사)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 두 시기 각각의 사회 현상을 국가 사회와 문명 쇠퇴의 징표로 보고, 거기에 나타난 정신상의 변화에서 쇠퇴의 근본요인을 찾고자 했다. 사회의 유지·발전을 궁극적으로 가능케 하는 것은 정신의 힘이다. 사회의 정신적 활력, 대중의 극기심, 엘리트의 정신적 긴장도 등이 감퇴하고 풀어지면 頂上을 달리던 사회와 문명도 쇠퇴하고 마는 것임을 역사는 알려 주기도 한다. 이 교수가 1990년 전후의 일본 사회와 너무나 닮았다고 주목한 영국의 에드워드期 사회풍경을 함께 들여다본다.
英國 에드워드 7세 시대의 사회상
▲대도시에 집착하는 젊은이들 상당기간의 안정과 번영으로 생겨난 중산층의 자녀들이 높은 생활수준을 당연시하고, 도시의 향락구조에 침몰하여 날이 갈수록 도시를 떠나려 하지 않고, 지방근무 기피가 늘어나기 시작함.
▲해외근무 혐오 英 본토의 생활이 풍요로워지자 大英제국을 떠받쳤던 해외 진출과 이주에 지장이 생겼다. 해외근무를 싫어하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세계를 누빈 英國 상선의 승무원 되기를 원하는 젊은이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해외근무가 많은 외교관이나 상사원직을 엘리트 학생들이 회피하러 들었다.
▲해외여행 붐과 온천 붐 「그랜드 투어」라고 하여 영국에서는 귀족들이나 하던 해외여행을 중산층의 대중이 떼거리를 지어 패키지로 도버해협을 건너 유럽대륙을 누비는 붐이 일어난 것은 에드워드期다. 이 시기에 온천 붐이 곁들여진다. 古代 로마와의 공통점을 걱정한 영국의 식자들은 「이대로 가면 우리 大英제국도 많은 사람들이 욕탕에 들앉은 채로 無爲로 시간을 보낸 저 로마 말기처럼 돼 버리는 것이 아닐까」고 썼다 한다.
▲이벤트 투성이의 생활 이때의 영국인들은 각종 전람회, 박람회, 스포츠 시합, 온갖 행사, 이벤트에 혈안이 되어 돌아갔다. 영국의 식자들은, 로마제국의 말기에 있었던 大경기장의 전차경기, 노예 검투사들의 살인시합, 라이온과의 혈투에 열광한 로마시민의 無職(무직)대군을 상기하고 걱정했다.
▲脫古典과 만화 선호 이때에 이르러 영국의 독서인구가 고전에 대한 관심이 낮아지고, 만화를 선호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동시에 예술과 문화의 취미도 저열해지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문필가들이 공부를 하지 않은 채, 지나가는 생각만으로 붓대를 놀리는 글이 많아졌다.
▲건강 붐과 식도락 붐 신문이 경쟁적으로 건강관련 기사를 싣고, 잡지가 건강특집을 되풀이한 것이 이때다. 퓨리탄적인 전통이 있는 영국의 음식은 質素(질소)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식도락 붐이 일어나고, 美食으로 한없이 경사해 들어갔다. 생각 있는 영국인들이 또 한번 로마귀족들의 「그리스 도리아지방産의 포도와 포르투갈 루시타니아의 바다에서 건진 성게 알을 차린」 식탁을 상기하면서 쇠망의 조짐이 아닌가 걱정했다 한다.
하나만 더 보탠다면, 20세기가 되면서 영국에는 기독교 등의 전통종교가 힘을 잃고, 邪敎(사교) 비슷한 신흥종교들이 번창하여 기묘하게 사람들을 끌었다 한다.
요컨대 영국의 20세기 初 大英제국의 내리막이 시작된 에드워드 시대는 대단히 소란스럽고, 뭔가 경박하고, 기묘하게 재미있고 우습기만 하던 시대로, 새로운 오락이 연이어 생겨나고, 신기한 물건들이 자꾸만 수입되고, 런던의 밤거리는 휘황찬란하여, 사람들의 눈이 팽팽 돌아갔던 시대였던 모양이다.
앞에 든 나카니시(中西) 교수는 거품이 빠지기 前後(전후)의 日本 사회광경이 영국의 에드워드期와 공통점이 있다면서 日本의 경제, 사회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경고했었다.
그의 경고를 지금 여기 소개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 사회가 이와 닮아가고 있는 것 같아서이다. 글로벌 냉전이 끝나고서 IMF 관리가 오기까지의 1990년대의 세태가, IMF 관리에서 1, 2년 지나자마자 되돌아가서까지, 정상점을 통과한 이들 나라들과 너무나 흡사한 것을 눈감을 수 없고 보니, 일순 아찔한 생각이 든다.
국민소득 겨우 1만 달러 선을 맴돌면서 頂上은 아직도 아득한 산 중턱에서, 퍼질고 앉아 여기만 해도 경치 좋다면서 도시락 끌러 下山 파티를 시작한 꼴이라고나 할까.
『文明의 쇠퇴에 不可抗力은 없다』
全세계 인류사상에 있었던 21개 문명의 흥망성쇠를 관찰·考究(고구)했던 20세기 최고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主著(주저) 「역사의 연구」의 全 5편 중의 한 편을 국가와 문명의 「쇠퇴」를 주제로 하여 다루고 있다. 이중의 한 章에서 토인비는 사회 쇠퇴의 궁극의 기준으로 「자기결정 능력의 상실」을 들고 있다.
그의 논지의 핵심은 어떤 문명이건 성장이란 창조적인 소수가 非창조적인 다수 대중을 이끌 때 가능하다는 것. 성공의 연속으로 인해 대중의 추종 장치인 기계적 모방성을 창조적 소수자 자신이 뒤집어썼을 때는, 성장의 지속에 필요한 창조적 엘리트의 부단의 「자발성과 유연성」은 없어지고 성장은 정지한다는 것. 전체 사회를 구성하는 부분 상호간의 조화의 상실은, 전체의 자기결정 능력을 잃게 한다는 것 등이다.
現 정권 들어 개혁의 이름 밑에 진행된 몇 가지 사례, 즉 교원 정년문제, 의약분업, 의보통합, 週5일제 문제 등 하나같이 지지부진, 우왕좌왕이다. 개혁 과정에서 위의 몇 가지 사례들은 우리 사회의 「자기결정 능력의 상실」이라는 결정적 현상을 드러내 보였다. 그것이 창조적 소수라야 할 사람들의 기능미달(리더십 문제) 때문이든, 사회구성 부분 상호간의 조화 상실 때문이든, 토인비의 소론을 따른다면 우리 사회는 쇠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토인비의 지적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달도 차면 기우나니」式의 숙명론적 쇠퇴론은 없다는 것이다. 그는 『문명의 쇠퇴에 불가항력은 없다』고 하고 있다. 모든 쇠퇴기에는 이유가 있고 이유를 제거하면 反轉(반전)은 가능하므로, 쇠퇴론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토인비는 쇠퇴의 단초를 여는 요인은 체제 안에 있고, 인간정신의 내면에 있음을 강조한다. 더러 기술의 쇠퇴가 경제·사회의 쇠퇴를 불러온다고 강조하는 소리가 있지만, 따져보면 역사상에 그같은 예는 하나도 없다고 토인비는 가르쳐 준다. 토인비는 한 영국 詩人의 구절을 인용한다.
「우리들은 언제나 스스로의 속에 있는 허(虛·false)한 것에 배반당한다」
토인비는 셰익스피어의 「킹 존」에서도 인용해 놓았다.
「이 영국은 지금까지 오만한 정복자의 발 밑에 꿇어 엎드린 적이 없었고, 또 장래에도 없을 것이다. 먼저 스스로를 상처 내는 일을 거들지 않는 한」
문명의 생명력이나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근본 요인이 울타리 안에 있고 인간 정신의 내면에 있다 하는 것이 토인비의 역사철학의 핵심으로 보여진다. 그가 맹자를 읽었다면 아마 다음 구절도 인용했을 것이다. 「國必自伐而後人伐之」(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먼저 망하게 하고 나서 타자가 망하게 한다.)(離婁상편)
19세기 영국의 정치사상가 월터 바조트는 『영국의 성공의 대부분은 영국인이 바보였던 덕분이다』고 했다 한다. 토인비는 영국은 지도자가 좋았다고 긍정하면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온갖 사안을 스스로 생각하기로 결심했다고 가정한다면, 좋은 지도자는 좋은 추종자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고 했다. 쇠퇴의 反轉을 바라고 좋은 지도자를 찾고 있는 우리들이 눈여겨 볼 만하지 않겠는가.
포퓰리즘 경연장에 뛰어든 정치인들
「쇠퇴」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단순히 경제가 내려앉는 것 자체이기보다는 경제의 활력을 떠받치는 좀더 깊은 곳에 있는 사회요인 내지 정신 요인이다.
權府(권부) 깊숙이 파고든 부패의 만연이나, 교육, 국방, 복지, 외교 등 일만 터졌다 하면 어처구니없이 드러나는 관료들의 전문성 감퇴가 얘기하는 것, 그건 우리 사회 지도층, 관료 엘리트들의 사명의식의 증발, Moral(도덕·윤리)과 Morale(사기·정신력)의 수준에 일어난 심각한 변화를 말한다. 1980년대 末 민주화와 글로벌 냉전의 해소를 1, 2년 사이에 불각중에 만난 데다, 때마침의 리더십마저 어설퍼서, 대중이 민주화로 인한 가치관의 다양화를, 규율의 방기와 정체성의 혼란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방치하고 말았다.
의무의 포기와 권리의 無限주장이 자유의 내용이 돼버린 민주화 천지에서, 정치인들은 거리낌없는 권력동기로 자유라는 이름의 대중의 응석을 사냥하려 드는, 포퓰리즘 경연장에 뛰어들었다. 이 바람 속에 경제 주체들의 활력도 사그라지고 말았고, 근대화, 고도성장, 선진화를 떠받쳤던 관료 및 사회엘리트의 긴장도도 풀어지고 말았다. 고도성장의 밑거름이었던 새마을운동으로 다져진 대중의 극기심 같은 것은 들먹이기도 전에 날아가 버렸다.
앞에서 보았던 사회쇠퇴의 조짐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 사회는 민주화 이후 쇠퇴하기 시작한 것으로 된다. 앞시대가 구축해 놓은 경제와 사회바탕을 민주화가 딛고서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토인비式으로 말한다면 한국 사회는 민주화의 역사적 도전에 대한 응전에서 실패하고 있는 것이 된다.
「韓非子」 속에 올해 같은 선거철에 곱씹어 볼 만한 기막힌 잠언 하나가 있다.
<下君은 자기의 능력(能)을 다 하고, 中君은 타인의 체력(力)을 다 쓰고, 上君은 타인의 지혜(智)를 다 쓰게 한다. (八經편)>
君主를 上, 中, 下의 3등급으로 나누었는데, 대통령이나 경영인 사장이라도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이 잠언을 따르면, 무슨 일이 터졌는데 대통령이 下僚(하료)집단에 탓을 돌린다면 그는 中級도 못 된다는 얘기가 된다. 대량매체에 의한 이미지 조작이 대중의 표심을 휩쓰는 세상이 되고 보니, 下級을 충족시킬 「능력」 정도라도 누가 가졌는지, 알기가 쉽지 않음을 세 번 해보고 난 지금 다들 느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1987년의 6·29선언은 우리 정치사의 민주화를 향한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다.
6·29의 결단을 내린 지도자는 당시의 全斗煥(전두환) 대통령이었다. 사안의 성격상 그같은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대통령뿐이었다. 全대통령은 선거를 앞두고 있었던지라 국민 대중을 향해서는 그때의 민정당 盧泰愚(노태우) 대표가 쟁취해서 내린 결단이란 포즈를 취하게 했다.
盧대통령의 「虛한 어떤 것」
문제는 盧대표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스스로 6·29의 결단자라는 포즈를 무너뜨리지 않은 데 있다.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하나는 역사의 진실을 두고 대통령이 국민을 향해 기만 행위를 지속한 것이고, 또 하나는 결단자 포즈를 지속함으로써 참 결단 주체에게 돌아가야 할 일종의 정치적 과일을 끝내 횡령해 버린 일이다. 세상이 다 모른다고 해도 盧대통령 본인은 스스로 마음속에 「기만」과 「횡령」 의식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기만」과 「횡령」 의식은 한 지도자의 정신 내면에 토인비가 얘기하는 「虛한 어떤 것」을 만들어 내고야 마는 것이다. 盧대통령은 임기 내내 애칭인지 비칭인지 알 수 없는 「물 대통령」이란 말을 세상으로부터 들었다. 그 의미하는 바는 주로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것으로 통했다.
결단력이야말로 리더십의 가장 중요한 내용 중의 하나이고 보면, 6·29에 연관하여 盧대통령의 정신 내면에 생겨난 「虛한 것」이 그의 리더십을 弱體 리더십으로 만들고 만 것은 아닐까.
민주화가 되고 나서, 민주화를 규율의 해체로 착각하는 대중의 집단 이기주의 앞에 국정은 주춤거렸다. 盧泰愚 대통령의 弱體 리더십은, 임금이 생산성 향상과 관계없이 폭주하여, 탄탄했던 한국 경제의 국제경쟁력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어찌하지 못했다. 우리 사회의 쇠퇴는 이때부터였다.
盧대통령은 자신의 결단력 부족을 의식했던지 통 큰 결단을 하나 해 보였다. 임기 초년의 남북문제 중요선언에서 그는 『북한은 敵이 아니다』고 했던 것이다. 그가 이것이 국가의 정체성을 건드리는 얘기라는 것을 알고 했을까. 現 정권 들어 우심해져 있는 국가 정체성 혼란문제의 씨는 盧泰愚 대통령 때 이미 뿌려졌던 것이다.
반도를 깔고 앉으려던 大唐(대당)제국의 군대까지 격멸 축출하고, 삼국통일을 완수했던 신라 文武王이 만년에 창고도 다시 차 오르자, 경주의 도성을 일신하려 하였다.
논란이 있었던지 일을 시작해 놓고, 왕은 부석사의 의상대사에게 자문을 구했다. 의상대사는 『비록 초야의 띠집에 있어도 正道만 행하면 복업이 장구할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사람을 수고롭게 하여 성을 쌓아도 아무 이익이 없을 것이다』고 대답했다. 왕은 곧 役事를 그쳤다(삼국사기 문무왕 21년 6월).
도성의 일신은 통일제왕이 집념을 보일 만한 사안이다. 그러나 문무왕은 君王의 恣意(자의)를 견제할 만한 통치 구조 속에 스스로를 두고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金泳三(김영삼) 대통령 때 實名制가 실시되고 우리나라의 OECD(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이 있었다. 그러고서 임기 말에 IMF (International Monetary Fund:국제통화기금) 관리가 왔다. 사안의 성격상, 실명제와 OECD 가입의 정책의도가 타당하고 유효한 것이었으면 IMF 관리는 올 수 없는 그런 문제이다.
투명 경제의 멋을 내고 선진국 진입 대통령의 이름을 얻고 싶었을까. 촌사람이 서울바람 좀 쏘였다고 삐딱구두 신고 넥타이 한 번 매려다가 소 팔고 논 팔고 기둥뿌리까지 빠진 격이라고나 할까. 그 정신 풍경은 끝없이 虛하다. 質實(질실)이 없다. 실명제 문제만 해도 그전의 두 대통령이 문제 많다고 유보해 놨던 것을 「나는 해치울 수 있다」는 오기가 YS에게 있었을까.
오기, 마음속에 세우는 무리한 기둥, 그것은 虛다. 이것이 바로 토인비가 알려 준 정신 내면의 虛 아니겠는가.
앞에서 본 의상대사가 방대한 화엄경전을 210자의 哲理로 응축시킨 법성계를 짓고 서문에서 「執名(집명)의 무리로 하여금 無名(무명)의 眞源(진원)으로 돌아가게 하려 한다」고 했다. 그때에도 이름을 쫓는 執名의 무리는 많았던지, 의상대사는 執名의 무리의 마음속에 있는 虛를 놓치지 않았다.
OECD 가입으로 나라를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은 대통령 소리를 들으려던 것이 IMF 관리로 연결되고 보니 그 執名의 발바닥 밑이 허공이었다는 것도 몰랐다는 것이다. 그만큼 執名하는 정신 내면은 虛하다는 것을 알겠다.
金大中 대통령의 正體性의 연원은?
現 金大中 정권 들어 IMF 소동이 한물 가면서부터, 사람들 입에서 자주 『이 세상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왔다. 이 말 속에는 생활인의 정체성 감각에 대한 혼란이 체감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비전향 장기수를 대거 北으로 보낸 것, 北의 金正日을 만나 연방제·연합제를 걸어 합의한 것, 金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하여 행한 사과성 발언 등, 다 들지 못하지만 이들 조치나 언행 등은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을 흔드는 것들이다. 나라를 이끄는 대통령이 국가 정체성을 흔드니까 사람들 입에서 절로 「이 세상이 어디로 가느냐」는 얘기가 나온 것이다.
위에 든 조치나 발언 등은 곰곰 따져보면, 대한민국의 정체성과는 다른 별개의 어떤 정체성에 연계되어 있는 신념체계와 무관하게는 나올 수 없는 것들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연결될 수 없는 신념체계의 존재를 대통령 스스로는 인정한 적이 없다. 뿐만 아니고 국가 정체성과 충돌하는 정책들을 국민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그 정책들이 원리적으로 바탕할 수밖에 없는 신념체계를 공개하여 국민들을 설득시켜 보려고 든 적도 없다. 그 쪽은 안개 속이다. 대통령 마음속에 있는, 국가정체성(내셔널 아이덴티티)과 충돌하는 정책들의 연원인 신념체계는 안개 속에 덮여 있다. 그 안개만큼 金대통령의 정신 내면에는 토인비가 말하는 「虛한 것」이 있는 것이다.
국민들의 체감적 정체성 혼란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일반인들에겐 「일이 손에 안 잡힌다」는 현상을 가져온다. 급기야는 목표상실감에 빠진다. 아직도 가야 할 산하가 있는 사회에서는 무서운 얘기다.
정체성에 혼란이 오면 엘리트들의 경우 사명의식에 난조를 일으킨다. 現 정권 들어 교육, 외교, 국방, 복지 등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 관료들의 전문성 감퇴는 이와 유관할 것이다.
그리고 경제의 활력을 좀더 깊은 곳에서 지탱하는 사회적·정신적 활력을 구성하는 윤리·도덕(moral)과 사기·정신력(morale) 같은 것은 기본적으로 정체성(Identity)에 뿌리하고 있는 것이다. 말의 모양부터 원래 표리 관계에 있는 moral과 morale은, 정체성이 흔들리면 함께 무너져 내리게 마련이다. 사회 지도층에 만연한 부패, 성장하는 사회가 가졌던 心的 팽팽함의 사라짐 등이 모두 정체성 혼란과 무관하지 않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망하지 않으려면 敵國이 필요하다는 역설
이 정권 들어 국가·사회의 쇠퇴를 불러오게 된 心的 긴장의 이완을 결정적으로 만든 가장 큰 요소는 對敵觀(대적관) 문제이다. 물론 정체성 문제와 관련 있다. 이 정부는 남북 간에 전쟁이 안 일어날 조치를 金대통령이 취한 것으로 선전하다가, 국민들이 敵이 없는 상황 속에 있는 것으로 착각토록 오도하였고, 급기야는 北이 敵이 아니라는 데까지 갔다. 北의 대량 살상무기가 南으로 올 것이 아니라는 데까지.
나라를 생각하는 사람들한테 孟子는 늘 정신이 번쩍 들 말을 준비해 놓고 있다. 이런 말이 있다.
『안으로는 법도를 아는 신하와 (진정한)보필을 아는 선비가 없고, 밖으로는 적국이나 외환이 없는 나라는 항상 망한다(出則無敵國外患者, 國恒亡). 그런 다음에야 우환 속에서는 살아나고, 안락 속에서는 죽게 되는 것을 알게 된다』(告子下편)
망하지 않으려면 적국이 필요하다는 이 역설을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멀쩡한 나라들이 왜 가상적국까지 만들어 평시에 뛰고 있는지 알 만하다. 또 명명백백한 現前(현전)하는 敵을 敵이 아니라고 알게 한 現 정권이 얼마나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다.
이는 토인비가 셰익스피어에서 인용한 국가가 「스스로를 상처 내는 일을 거든」 것이고, 앞부분에서 들었던 맹자의 국가의 自伐(자벌·스스로를 치는 것) 바로 그것이다. 孟子는 敵國의 존재가 나라를 恒存(항존)케 하는 무한한 心的 긴장의 공급원임을 갈파한 것이다.
「런던 타임스」의 英國病 진단
오늘 아침(3월7일) 신문에 「민주노총은 정부가 발전소 매각을 강행하면 제2의 연대총파업을 벌이겠다고 밝혔다」는 기사가 보인다.
가까운 역사 속에 있는 영국을 쇠망으로부터 건진 「鐵(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에 관심이 가 있었던지라, 왈칵 우리나라도 영국病에 걸렸구나 싶은 생각이 함께 일어났다.
영국病이란 고도 복지국가 건설로 인한 정부 공공지출의 불감당한 폭증과, 高복지적·사회주의적 심정이 戰後 영국 사회에 만연하면서 노동조합의 힘이 증대되고 노동운동이 급진화한 것을 두고 이르던 말이다. 이 영국病은 영국의 사회, 경제를 쇠퇴의 극한까지 몰고 갔다.
대처가 수상으로 등장하던 전야인 1970년대, 파운드貨는 폭락하고, 경제의 활력은 사그라져 버리고, 국민의 생활 그 자체인 병원, 학교, 관청을 위시하여 쓰레기 수집요원, 장례매장 공무원까지 공공부문이 파상적으로 파업을 단행, 온 사회가 마비상태로 빠져들었다. 급기야는 가장 강력한 탄광노조가 파업을 걸자, 산업혁명의 본산이요 세계의 최선진국이던 영국이 「촛불을 켠 週3일제」의 국가비상사태로 내몰려졌다. 대처 보수당 당수의 前任者이던 히드 정권은 탄광노조에 밀려났던 것이다. 1970년대에 또 한번 노동당 정권도 이런 경우를 당했다.
그 시절 「런던 타임스」는 다음과 같은 경고를 발한 적도 있었다.
<영국민은 분에 맞지 않은 생활(정부의 복지로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것을 이름)에 안주하려 들고, 좀더 일하기보다는 좀더 휴가를 가지려 들고, 일해야 할 시간에 도박내기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또 국민들은 사물을 실행하려 들기보다는 실행하지 않을 이유만 찾으려 든다. … 어느 내각도 국민에게 진실을 말하는 용기를 갖지 못하고, 노동조합을 조금이라도 바른 자세로 교정해 주려는 각오를 결하고 있어 … 완전고용의 결과, 노동조합은 힘을 남용하고, 정부의 경제기본정책에 반대하여 탈법파업을 그치지 않는다.…
산업계는 勞·使 모두 아직도 보호를 요구하는 소리가 턱없이 많고, 경쟁에 맞붙어 보려는 의욕을 결하고 있다. … 20여 년 간이나 최고 리더십에 문제가 있어, 이빨을 거즈에 싸서는 엄혹한 현실을 감추고, 言行이 일치하지 않은 채, 책임을 완수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권리만 주장하다 보니, 국민 전체에 『받아 챌 것은 뭐든지 받아 채지만, 줄 것은 동전 한푼 안 내 놓겠다』는 근성이 배어 들고 말았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한 나라의 국민들이 「규율을 던져버린 자유」와 평등만 요구하는 일방에서, 그만 그만한 정치 지도자들이 권력 잡겠다고 포퓰리즘(대중·인기 영합주의) 경합만 벌이다 보면 영락없이 빠져드는 나라 꼴이 이런 것 아니겠는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었던 영국은 한 100년 걸렸는데 우리 한국은 15년 남짓해서 이 모양이 되어버린 것 아닌가.
문제는 現 金大中 정권 들어 한국의 영국病 추세는 더 본격화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現 정권은 직불형 기초 복지에 열을 올렸고, 「親노동자 정권」을 표방」(2002년 1월10일 朝鮮데스크)해 보였다. 「온정주의」를 본질로 하는 「큰 정부」의 이상이 역사 현실에서는 파탄나고 말았음을 이 정권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는 말인가. 늦게 가는 우리가 앞선 나라들의 쇠퇴의 장본이 된 시행착오까지 따라 하려드는 것은 그 저의를 알기 어렵다.
「관용과 박애」에 입각한 「계획·간섭」이 의존심 등 인간의 본질에 숨어 있는 「약함」과 「추함」을 오히려 조장하는 결과로 나타났음을 값비싼 역사실험은 알려 주지 않았는가. 그 결과는 국민 모두의 생활 공동체인 국가의 정신적·경제적 쇠퇴의 원천을 불러 오고 만 것이었다.
보도에 의하면 가스노조는 한번 타결났던 노사협상의 과정과 결과에 불만을 품고 보다 강성으로 알려진 민주노총에 가입하기로 결의했으며, 철도노조도 한국노총 탈퇴를 들먹이고 있다 한다. 發電(발전)노조의 파업이 장기화하면서 電力(전력)대란이 우려된다는 보도도 보인다.
한국에도 영국의 사회·경제의 쇠퇴가 극에 달했던 1970년대처럼, 촛불 켜 놓고 週3일제를 하는 시대가 올 것일까.
「親노동자 정권」을 표방한 정권下에서 강화된 노동운동의 에너지가 정작 발휘되는 것은 다음 정권 때 아니겠는가.
철의 여인 대처 수상이 정치생명을 걸고 샅바를 잡은 씨름의 대상은 「영국의 쇠퇴」 그 자체였다. 대처는 수상이 되기 전인 당수 시절부터 소속 정당의 대세나 국민의 전반적 무드를 거스르면서, 복지 삭감 등 공공지출의 축소, 노동개혁, 민영화, 법과 질서 등 대중인기와는 동떨어진 정책을, 그것만이 영국의 살 길이라고 강렬한 신념을 딛고 명확히 내걸었다.
1979년 취임하자마자 착수한 긴축재정으로, 실업자가 늘어나고, 지지율이 노동당 밑으로 내려가고, 반대여론이 와글거리는 속에 열린 1981년의 보수당 전당대회, 그러나 「철의 여인」은 정부의 엄중한 지출삭감과 노동조합과의 대결 결의를 명확히 밝히고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한다.
『좋아하는 타입이면 젠틀맨은 (지나가는 미인을) 되돌아보기도 하지만, 레이디(숙녀)는 그렇게 안 해요』
어떤 희곡의 대사였던 모양인데, 조크이기보다는 보수당의 전임 수상인 히드가 비슷한 개혁 주제를 걸었다가 여론의 반대에 부딪쳐 주저앉았던 것에 빗대, 강렬한 결의 표명을 해 보인 것이다.
「달콤하게 내거는 개혁」 공약은 사기
두 번째 임기의 총선이 있던 1983년에는 정책효과가 가시화되어 20%를 넘던 인프레가 한 자리수로 내려가 있었다. 그동안 몇 번 정권의 숨통을 끊기도 했던 영국 최강의 탄광노조는 1984년 봄부터 드디어 長期 파업에 들어갔다.
이 파업과의 대결과 분쇄가 대처 개혁정치의 분수령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처가 천명했던 「이윤원리」에 따라, 수지 맞지 않는 탄광은 폐쇄하겠다고 사용자인 전국 탄광연맹의 방침 표명이 있었고, 탄광노조는 파업으로 받았다.
대처는 공권력의 동원에 주저하지 않았다. 쟁의는 갱부들과 경찰대의 육탄전의 형태로 쌍방에서 희생자를 속출해 가며 1년 간 끌었다. 대처 수상은 원칙을 견지하며, 말썽은 있었지만 使側인 탄광연맹회장을 끝까지 강력히 지지했다. 마지막엔 마르크스주의자인 탄광노조 조합장이 손을 들었다.
이후 대처의 계산된 강경자세 앞에 전국단위 노조의 힘은 약화되었고, 파업은 격감해 버렸다. 「이윤원리」의 강조로 진행된 기업체질의 개선과 함께, 1986년 영국은 드디어 선진국 중 최고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國有기업의 광범한 민영화로 1000만 명 이상의 근로자와 시민이 株主대열에 합류했다. 400만명의 노동자가 財테크 전선에 나서게 되자, 오랜 기간 정부가 주는 복지의 미지근탕에 잠겨 있던 김빠진 것 같던 사회분위기가 일신되어 버렸다.
그녀의 인간됨은 부친으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한다. 그는 구두 직공으로 출발하여 잡화상으로 자수성가하고, 나중에는 인구 3만 명인 고향 그랜덤의 시장에도 선출되었다. 그는 봉사와 퓨리턴 윤리에 투철했던 개신교도였다 한다.
대처 수상은 늘 국민들에게 『빅토리아 시대로 되돌아 가라』고 했다. 그녀가 강조했던 것은 퓨리턴적 禁欲윤리(근면, 질실, 자조정신)였다. 향락적 개인주의가 만개한 고도복지사회의 한복판에서, 고소득층 속에서의 사회주의 경사가 오히려 지성의 징표로 여겨지던 분위기에서, 그녀는 시대착오, 강경파, 극우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개인 對 공동체의 도식에서 공동체도 염두에 두는 성숙된 민주주의를 영국에 뿌리 내리게 했고, 21세기를 향해 자기 규율 있는 자유라 할, 新자유주의(네오 리버럴리즘)에 세계를 주목케 했다.
대처는 국민들에게 극약처방을 내놓았는데 영국민들이 그것을 삼켰다고 한 표현이 한 傳記(전기)에 있었다.
산업화가 되고 민주화가 된 나라에 불가피하게 닥쳐오는, 복지 문제와 노동 문제로 인한 사회·경제의 쇠퇴위험은, 現 金大中 정권을 거치면서 그 추세가 뚜렷해 지고 있다.
올해 등장할 「한 사람」이 떠맡을 수밖에 없는 과제는 확연하다. 문제는 그를 가려낼 국민의 眼力(안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