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作故한 구엔 반 티우 대통령을 回顧한다

美國의 背信으로 絶望하면서도 마지막까지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

유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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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당하는 수모
  지난 10월4일 外信은 前 베트남공화국의 구엔 반 티우(Nguyen Van Thieu) 대통령이 9월30일 망명지인 미국 보스턴 시내 병원에서 78세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외신은 그의 약력과 함께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선거를 했고, 독재자, 부패 정치인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망명길에 금괴 3.5t을 갖고 갔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는 것을 덧붙였다.
 
  1975년 4월, 월남 공화국이 공산군에게 항복하자, 세계 여론은 티우 대통령을 독재자, 부정 축재자로 비난하는 데 열을 올렸다. 나는 월남인들이 그의 통치 스타일이나 영도력에 비판은 가할지언정 그를 부패 정치인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듣지 못했다. 당시 사이공 주재 외국 대사를 비롯하여 외교관들의 티우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그같은 인격적 비난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당하는 수모일 것라고 생각한다.
 
  나는 1971년 2월부터 1974년 3월까지 미국 다음으로 大軍을 파견한 나라의 大使로서 전쟁의 절정기와 휴전협정 체결, 그리고 그 후 1년간의 상황을 현지에서 지켜봤으며, 귀국 후 월남 패망時까지 사태진전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었다.
 
  월남전은 한국전과 더불어 20세기 후반의 가장 중대한 세계의 정치적, 군사적 사건의 하나였으며, 東西 冷戰의 절정을 이룬 민족 내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 최대 강국과 아시아의 일개 후진 농민국가의 대결이었다.
 
  월남전쟁 20年史의 壓卷(압권)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 「월남 휴전」문제였다. 나는 휴전 협상에 대한 티우 대통령의 認識(인식)과 미국 정부에 대한 분노, 그리고 월남을 지켜내려는 그의 행적을 볼 때, 그가 부패하고 무능한 대통령이었다는 비난에 동의할 수 없다.
 
  존슨 대통령의 재선 출마 포기는 미국내 反戰 여론을 반영한 것으로 티우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1968년 1월에 취임한 닉슨 대통령이 1970년 선언한 「괌 독트린」(아시아 문제는 아시아 국가들에게 맡긴다는 선언)은 미국의 월남 이탈을 의미한 것으로서 월남전쟁의 일대 전환점을 이뤘다.
 
  당초 미국의 월남 개입은 군사적 수단에 의해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월남공화국을 북쪽의 공산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국내 여론이 反戰쪽으로 기울자, 1968년의 舊正 공세 후 정치적 해결정책으로 급선회하게 되었다. 따라서 압도적 군사력으로 적을 철저히 파괴해야 한다는 티우의 주장은 먹혀들지 않았다.
 
  월남전을 끝내려는 미국은 닉슨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인 헨리 키신저 박사 주도하에 파리에서 월맹의 레둑토 대표와 휴전협상에 들어갔다. 전쟁의 주역인 월남정부는 배제된 상태였다. 공산주의자들의 협상은 평화가 목적이 아니고, 월남을 적화통일하기 위한 통일전선 전략에 의한 것이라는 월남정부의 반대 때문이었다.
 
  이같은 파리협상에 대한 월남정부와 미국정부간의 입장 및 견해 차이는 휴전협정 조인 때까지 좁혀지지 않았다. 특히 마지막까지 월남정부를 배제한 채 미국-월맹간에 합의한 휴전협정 내용과 조건들은 명색이 주권국가라는 월남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 중 하나가 월맹, 베트콩, 월남 3자의 대표로 구성되는 「민족화해협력 전국평의회」를 설치하는 案이었다. 공산측 2 對 월남측 1로 구성하자는 이 案을 티우가 동의할 수 있었겠는가. 더욱 중요한 쟁점은 월남내에 침투해 있는 10여만명의 월맹군을 철수하지 않고 現 상태, 現 위치에서 휴전한다는 것이었다. 現 위치 휴전은 월맹군의 남침을 합법화하는 적법성의 문제와 제네바 협정에 의한 국경 17도선을 무효화하자는 것이었다.
 
 
  『월남을 敵에게 팔아넘길 생각인가』
 
 
  월맹 레둑토 대표와 회담을 마치고 사이공에 날아온 키신저 박사는 대통령宮을 방문, 티우에게 휴전협정案을 제시했다. 초안을 훑어본 티우의 상기된 안색은 차츰 창백해지면서 그의 눈에서 분노의 눈물이 쏟아졌다. 배신감과 절망감, 폐부가 찢기는 처절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그는 키신저를 향해 『귀하는 월남을 팔아 넘길 생각인가』라고 소리쳤다.
 
  평화 협정案에 대한 티우의 반발에 키신저는 크게 당황했다. 1972년 12월 이전에 타결하려던 계획은 좌절됐다. 키신저는 수정안을 만들어 크리스마스 北爆(북폭)으로 월맹에 수정案을 받아들이라는 압력을 가하기도 하고, 월남정부에도 수정案을 인정하라는 신호를 보냈으나, 티우는 요지부동이었다.
 
  닉슨 대통령은 친서를 보내 1973년 1월23일 평화협정案에 假서명하고 1월27일 파리에서 정식 서명할 예정이라고 통보해왔다. 닉슨은 『만일 월남정부가 협정案을 끝까지 반대하면 「월남정부가 평화를 반대하고 있다」고 미국 국민들에게 설명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결과 월남에 대한 미국의 경제, 군사원조 중단은 불가피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티우는 트란 반 람 外相을 파리에 파견하겠다고 통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협정에 조인하겠다는 뜻이었다. 티우는 닉슨에게 사이공 정부를 월남의 정통 정부로 인정하겠다는 것과 월맹은 월남에 병력을 잔류시킬 권리가 없다는 점을 미국이 일방적으로 선언해줄 것을 조건으로 협정체결을 수락한다고 통보했으며, 닉슨은 이를 수락했다.
 
  월남 全域에서는 여전히 총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월남 휴전협정은 1973년 1월23일 假조인되고, 1월27일 미국 국무장관, 월맹 外相, 월남 外相, 베트콩 임시정부 外相 등 4者간에 정식 조인되었다. 휴전협정에 따라 2개월 안에 월맹군을 제외한 모든 외국군이 월남땅에서 철수토록 했다.
 
 
  키신저, 회고록에서 티우를 애국자라 찬양
 
 
  휴전협정이 조인된 후, 티우는 그 전보다 격화한 공산군과의 전투와, 닉슨의 실각으로 말미암은 미국의 원조중단으로 심각한 위기에 몰렸으나, 국난 타개를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국가의 존망 위기에 처하여 보여준 티우의 책임감과 인내와 자존심과 투지로 뭉쳐진 그의 헌신적 모습에서 진정한 국가 지도자로서의 위대한 자세를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티우의 염려대로 휴전협정이 조인된 지 2년 후 월남 공화국은 지구상에서 영원히 소멸되고 말았다.
 
  키신저는 최근(1999년) 발간된 그의 회고록에서 티우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우수한 지성과 불굴의 용기를 가졌으며, 고통스러운 전쟁을 통해 유능하게 국가에 헌신한 애국자라고 극구 찬양했다.
 
  나는 1985년 6월 영국 런던 시내 한 중국 음식점에서 우연하게 티우 대통령을 만났다. 조카들을 데리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10여년 만의 會遇(회우)였다. 만감이 교차했다. 1991년 봄에는 미국 보스턴 시내 주택가에 있는 그의 자택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夫妻가 조촐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미국 헤리티지 재단연구소의 신세를 지면서 공산 월남의 인권문제를 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사이공을 떠난 지 22년만인 1996년 봄에 그 곳을 찾았다. 私的인 방문이었다. 사이공에서 만난 모 회사의 중견사원 한 사람이 중얼거리던 소리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 많은 피를 흘리며 통일을 해야 했는지, 통일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도 분명 전쟁을 치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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