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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斗熙는 白衣社 요원이 아니다』

金日成 암살 기도 白衣社 행동대원 李聖烈씨 『安斗熙는 白衣社 요원이 아니다』

배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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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리보고서가 일으킨 파문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李成茂·이성무)는 지난 9월4일 기자회견을 열고 『白凡 金九 시해범 安斗熙가 美 방첩대(CIC) 요원이자, 右翼 단체인 「白衣社(백의사)」 특공대원이었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발굴했다』고 밝혔다.
 
  美 제1군 사령부 정보참모부 조지 실리 소령이 白凡 암살 직후인 1949년 6월29일 작성한 「金九 암살관련 배경정보」라는 문서가 공개되자, 언론들은 이를 크게 보도했다. 李成茂 국사편찬위원장은 『현재로선 미국이나 白衣社가 白凡 암살에 개입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일부 언론들은 미국이 金九 암살의 배후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9월7일 한 노인이 「月刊朝鮮社」로 찾아왔다. 노인의 이름은 李聖烈(이성렬). 그는 1946년 3월1일 평양驛前에서 있었던 金日成 암살미수 사건 당시 白衣社 행동대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그후 美 CIC에 근무했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마치 白衣社나 美 CIC가 白凡 선생 암살 배후인 것처럼 보도되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면서 『누군가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金九의 테러조직」 소리 들었던 白衣社
 
 
  李聖烈씨는 1926년 평남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李根春(이근춘)은 日帝末 白凡 金九 선생의 조카 金興斗(김흥두)를 집에 숨겨주는 등 민족의식이 강한 분이었다고 한다.
 
  1945년 7월 어느 날 친구 金元三(김원삼)이 李聖烈씨를 찾아왔다. 金씨는 『서울에서 呂運亨(여운형) 선생의 密使(밀사)가 왔다. 일본이 곧 망한다고 하면서 서울에 와서 건국운동을 하자고 하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李聖烈씨는 金元三·康赫(강혁) 등 친구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그 후 몇 달간 李聖烈은 건국준비위원회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광복 후의 혼란을 목격했다. 한번은 呂運亨의 수행비서였던 金容基(김용기·前 가나안 농군학교장)씨가 그에게 『宋鎭禹(송진우)·張德秀(장덕수)는 민족반역자』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金씨는 그들이 왜 민족반역자인지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한국민주당 사람들을 극도로 싫어했다.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呂運亨을 존경하고 있던 李聖烈은 金容基의 얘기를 들으면서 呂運亨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9월에는 종로에서 韓民黨이 주최한 연합군 환영 시민행진을 左翼이 폭력으로 막는 일이 발생했다. 서서히 고개를 드는 左右翼 갈등을 의아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李聖烈은 평양으로 돌아갔다.
 
  그가 서울의 상황을 부친께 보고하자 부친은 『염응택에게 가 보라』고 말했다. 그것이 그와 白衣社 司令(사령;단장) 廉東震(염동진·본명 염응택)과의 첫 만남이었다. 白衣社는 낙양군관학교 출신인 廉東震이 1942년 평양에서 조직한 비밀독립운동단체 「大同團(대동단)」이 母體. 白衣社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북한의 토착 공산주의자 玄준혁 암살사건으로 일대 검거 선풍이 불어 조직원들이 越南한 後부터라고 한다.
 
  이번에 공개된 실리 소령의 보고서에 의하면 廉東震은 그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金九의 배신으로 중국 공산당 정보부에 넘겨졌으며, 그들에 의해 고문을 받다가 눈이 멀게 되었다고 한다. 李聖烈씨는 이러한 주장을 부인했다.
 
  『광복 후 左翼들이 「李承晩(이승만)의 테러조직은 三友會(삼우회), 金九의 테러조직은 白衣社」라고 할 정도로 白衣社는 白凡선생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白凡 선생이 廉 司令을 중국 공산당 정보부에 넘겼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깁니다.
 
  내가 1945년 9월 廉 司令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눈이 잘 안 보인다고는 했지만 盲人(맹인)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얼마 후 38선을 넘어올 때 같이 越南하던 白寬玉(백관옥)에게 廉司令이 「눈이 안 보인다」는 얘기를 하더랍니다. 서울에 와서는 아주 盲人 행세를 했지만, 모두 半信半疑(반신반의)했어요. 무슨 다른 생각이 있어 廉 司令이 맹인 행세를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白衣社와 중앙정치공작대
 
 
  실리 보고서에는 廉東震의 白衣社 조직은 軍·경찰·공무원·정당·사회단체·청년단체 등에 광범위하게 뻗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李聖烈씨에 의하면 白衣社 조직이 그처럼 각계 각층에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廉東震이 李範奭(이범석)·申翼熙(신익희)·李靑天(이청천) 등과 가까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장 출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앙정치공작대」를 이끌었던 申翼熙와 가까이 지냈는데, 조직운영에 있어서는 「白衣社=대한민국 임시정부 중앙정치공작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李聖烈씨는 白衣社가 파시스트적·國粹主義的(국수주의적)이라는 실리보고서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았다.
 
  『白衣社가 親 金九노선의 민족주의 단체였지만 확고한 이념적 바탕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파시스트적이니, 國粹主義的이니 하는 것은 민족주의라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미국측의 오해입니다』
 
  1946년 2월 李聖烈은 廉東震 司令의 부름을 받았다. 副司令 朴徑九(박경구)도 함께 있었다. 廉 司令은 朴徑九를 통해 권총을 한 자루 내주면서 『바로 평양으로 올라가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직전 白衣社와 정치공작대 사이에서 연결 고리 역할을 하던 정치공작대 조직부장 曺仲瑞(조중서)와 정치공작대원 金濟哲(김제철·당시 39세)·金亨集(김형집·당시 19세)·崔基成(최기성·당시 20세) 등이 金日成을 암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먼저 당시 서울 가회동에 머무르고 있던 延安派(연안파) 공산주의자인 독립동맹 부위원장 韓彬(한빈)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후 北으로 떠났다. 李聖烈씨에게 떨어진 임무는 일종의 督察(독찰) 임무였다. 北으로 간 일행이 정말 金日成을 암살하려 하면 도와주고, 그렇지 않으면 배신자로 간주, 처단하라는 것이었다.
 
 
  金日成을 암살하라
 
 
  평양에서 金濟哲 일행과 합류한 李聖烈은 金日成을 암살한다는 당초의 계획을 확인했다. 1946년 3월1일 평양驛前에서 3·1절 기념식이 열렸다. 행사장에는 「李承晩·金九 타도」, 「민족반역자 曺晩植(조만식) 타도」 등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金亨集은 수류탄, 李聖烈과 崔基成은 권총으로 무장하고 행사장에 참석했다. 金日成이 연설을 시작하는 순간 李聖烈이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면, 金亨集이 수류탄을 투척하고, 수류탄이 터지지 않을 경우 崔基成이 권총으로 金日成을 쏘기로 했다. 金濟哲은 그의 행적을 수상하게 여긴 知人이 따라붙어 미행을 하는 바람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날 거사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지나치게 긴장한 金亨集이 안전핀을 제대로 뽑지 않은 채 수류탄을 던졌기 때문이었다. 연단에 떨어진 수류탄은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경비 중이던 소련군 야코프 노비첸코 준위가 수류탄을 집어 멀리 던져버리려는 순간 수류탄이 터졌다. 노비첸코는 오른팔이 잘려나가는 등 몸 다섯 군데에 중상을 입었다 (노비첸코는 제대 후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다가 1984년 訪蘇한 金日成과 재회했다. 그후 노비첸코는 북한으로부터 「노동영웅」 칭호를 받고, 金日成과 의형제를 맺었으며, 1994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 당국으로부터 극진한 예우와 지원을 받았다. 지난 8월 러시아를 방문한 金正日은 귀국길에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노비첸코의 유가족들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金亨集은 현장에서 체포되었지만, 아지트로 돌아온 나머지 白衣社 社員들은 다른 공산당 요인들의 목숨을 노렸다. 金日成 암살작전에 참여하지 못했던 金濟哲(그는 이때부터 金正義로 改名했다)과 새로 가담한 李希斗(이희두)가 거사에 참여했다. 이들은 3월5일과 7일에는 崔庸健(최용건)의 집을, 같은 달 9일에는 金策(김책)의 집을 습격했지만, 그들이 金日成 암살미수 사건 이후 집을 비우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李聖烈 일행은 3월13일 자정 무렵 북조선 임시위원회 서기장 康良煜(강양욱·前북한 국가부주석)의 집을 습격했다. 이날 거사에는 李聖烈의 중학 동창인 최의호도 가담했다. 이들은 수류탄을 던지고 권총을 난사, 康良煜의 가족들을 몰살시켰지만, 康良煜을 암살하는 데는 실패했다.
 
  李聖烈 등은 추적해 온 보안대원들과 교전 중 崔基成이 사망했고, 李希斗는 얼굴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최의호는 부근에 사는 친지의 도움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다른 아지트에 은신하고 있던 金濟哲과 또 다른 동지 조재국도 며칠 후 체포되었다. 李聖烈만이 간신히 체포를 모면, 3月末 천신만고 끝에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安斗熙는 白衣社 社員이 아니다』
 
 
  서울로 돌아온 李聖烈은 美軍 CIC에서 조사관(Investigator)-그 후에는 특별보좌관(Special Assistant)-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를 『白衣社에서 美軍 CIC로 파견나간 것』이라고 표현했다. 후일 張勉(장면) 총리의 정치고문을 지낸 도널드 위태커가 이 무렵 CIC 북한課에 있었다.
 
  1947년 7월 呂運亨이 암살되었다. 사건 직후 白衣社 內에서는 「집행부장」으로 알려졌던 李聖烈이 呂運亨을 암살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범인은 한지근이라는 젊은이였다. 李聖烈과는 CIC에 출입하던 政治 浪人 신동운을 통해 아는 사이였다. 실리 보고서는 呂運亨 암살에 白衣社가 개입했으리라고 시사하고 있지만, 李씨는 이를 부인했다.
 
  李聖烈이 CIC에 근무하던 어느 날, 金聖柱(김성주) 서북청년단 부위원장이 지나가는 한 젊은이를 가리키며 『쟤는 말(영어)도 못하면서 뭐하러 여길 드나들어』라고 말했다.
 
  李聖烈은 金興斗와의 인연도 있고 해서 白凡선생의 거처인 京橋莊(경교장)에도 곧잘 드나들었다. 白凡선생이 자서전 「白凡逸志(백범일지)」에 西山대사의 禪詩(선시)를 써서 준 일도 있었다 (이 책은 6·25 전쟁 때 분실했다고 한다). 京橋莊에서 그는 金聖柱가 말하던 그 젊은이를 봤다. 白凡선생의 비서들은 『저 사람 白凡선생님과 가까운 척하면서 자꾸 여길 드나든다. 뭘 하려는 건지…』라고 말했다.
 
  1949년 6월26일 白凡 암살사건이 나고 암살범의 사진이 신문에 실렸을 때, 李聖烈은 그 젊은이가 安斗熙(안두희)라는 것을 알았다.
 
  李聖烈씨는 『내가 아는 한 安斗熙는 白衣社 社員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자신은 직접 행동에 참여하는 조직원들을 거의 다 알고 있었지만 安斗熙는 알지 못했으며, 白衣社의 親 金九노선으로 보아 白衣社가 金九를 암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실리보고서를 접한 이신철 역사문제 선임연구원은 『공산주의와 관련된 白凡의 사상적 노선 변화가 그의 반대자들에게는 容共性으로 보일 빌미를 마련해 주었으며, 이것이 곧 암살을 불러왔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9월4일 연합뉴스).
 
 
  『安斗熙의 범행은 小영웅주의의 발로』
 
 
  그 가능성을 강하게 부정하는 李聖烈씨에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대한 白衣社의 입장을 물어보았다. 그것은 곧 白凡에 대한 白衣社의 평가와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社員들은 「우선 나라는 세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어요. 廉 司令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구요. 그런 廉 司令을 보면서 「廉 司令도 이젠 역부족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廉 司令과 李承晩 박사의 관계는 어땠습니까?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李박사보다는 金九선생과 더욱 가까웠을 겁니다』
 
  ―白凡선생의 單政 수립 반대·남북협상 노선이 白衣社 社員들에게 容共的인 것으로 보였고, 그 때문에 암살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그건 절대 아닙니다. 白衣社 社員들은 대개 單政 수립에 찬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金九선생 말씀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었어요. 우리들로서는 白凡선생을 어떻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李聖烈씨는 安斗熙가 자기가 모르는 현장요원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그가 美 CIC 요원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美 CIC가 白凡암살의 배후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라는 부대 이름에서도 보듯 부대 성격상 美CIC는 암살이나 암살 사주와 같은 적극 공작을 벌이는 곳은 아니라는 것이 李씨의 주장이었다.
 
  李씨는 安斗熙가 白凡선생을 암살한 것은 특정 집단의 치밀한 계획과 使嗾(사주)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越南 후 기댈 데 없어 마음속에 울분을 품고 있던 젊은이의 小영웅주의의 발로로 보았다.
 
  『내가 처음 越南해 왔을 때 金容基씨가 「宋鎭禹·張德秀는 민족반역자」라고 말했던 것처럼, 나라가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걸핏하면 「○○○가 나쁜 놈」이라는 식의 얘기가 떠돌곤 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 휩쓸린 熱血 청년들이 일을 저지르곤 하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어요. 安斗熙가 白凡선생을 암살한 것도 그런 의식의 발로일 겁니다』
 
  李씨는 실리보고서에 대한 보도를 접하는 순간 『의도적으로 이 땅의 右翼과 미국을 흠집내려는 세력이 장난을 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白衣社와 美 CIC에서 근무했고, 먼 발치에서 安斗熙를 지켜보았던 자기로서는 그런 상황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月刊朝鮮社」를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5·16 후 反혁명죄로 투옥되기도
 
 
  白衣社는 1948년을 전후하여 점차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정부가 수립되고 공권력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서 白衣社의 활동 공간은 좁아졌다. 조직원들은 軍이나 경찰에 투신하거나, 각자 밥벌이를 찾아 흩어졌고, 白衣社는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廉東震 司令은 6·25 전쟁이 일어난 후 공산군에게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李聖烈씨는 6·25 전쟁이 일어나자 美 7항만사령부 정보치안국·美 7사단 CIC·8240부대 등에서 근무하면서 전쟁을 치뤘다.
 
  白衣社와 申翼熙의 중앙정치공작대가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柳珍山(유진산)이 白衣社 총무를 지낸 인연으로 민주당系 정치인들과 가깝게 지냈던 그는 1962년 민주당 反혁명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獄苦(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옛 8240부대 출신자들을 동원, 朴正熙 장군을 암살할 생각으로 동조자들을 물색하다가 가까이 지내던 민주당系 정치인들과 함께 反혁명음모죄로 엮여 들어간 것. 이후 特赦(특사)를 받아 풀려났지만, 정보기관의 要視察(요시찰) 인물로 분류되는 바람에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했다. 1969년에는 「3選 개헌반대 汎국민투쟁위원회」 최고위원 가운데 한 명으로 활동했다. 1990년 金日成 암살시도 등 反共투쟁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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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姜英哲 국사편찬위원회 編史부장과의 一問一答
 
  『실리 보고서 공개에 政治的 의도는 없다』
 
  기자는 9월11일 저녁 국사편찬위원회 姜英哲(강영철·57) 編史部長(편사부장)과 실리 보고서에 관해 전화통화를 나누었다.
 
  ─실리 보고서 관련 보도가 나간 후 언론에서는 白凡 선생 암살사건 배후에 右翼 세력과 미국이 개입되어 있는 것으로 단정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국사편찬위원회가 실리 보고서 관련 내용을 공개한 것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진행 중인 「海外史料(해외사료) 移轉(이전) 사업」의 성과를 알리고, 그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서였다. 언론보도가 우리의 본의와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바람에 우리도 당혹스럽다』
 
  姜부장은 『「海外史料 이전사업」은 금년에 10억 원, 내년에 10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국사편찬위원회 추진 단위 사업 가운데 가장 큰 사업』이라고 덧붙였다. 姜부장은 『그동안 海外 史料의 발굴, 이전사업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별 관심을 끌지 못해왔다. 그래서 이번에 발굴한 史料 가운데 국민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놀랍고 특이한 내용들을 공개하여 이 사업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했다』고 말했다.
 
  ─어쨌든 실리 보고서 공개로 인해 국민들은 白凡 선생 암살사건 배후에 마치 右翼 세력과 미국이 개입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한두 가지 文件을 가지고 해방 정국의 의혹들이 전부 해결된 것처럼 보도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 아닌가? 나도 우리 언론이 이렇게까지 얄팍하고 선정적인 줄은 몰랐다』
 
  ─이 시점에 右翼과 미국에 흠집을 내는 史料를 공개한 데에는 어떤 정치적 黑幕(흑막)이 있는 것 아니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 친구들 가운데도 8·15 訪北團 파문을 잠재우려고 실리 보고서를 공개한 것 아니냐는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학자적 양심을 걸고 말하는데 그건 절대로 아니다. 발표 날짜를 9월3일로 잡은 것은 방북단 파문 훨씬 이전이었다. 이번 발표에 정치적 의도 같은 것은 없다』
 
  姜부장은 『反共단체 등에서 항의 전화가 걸려오고 있다. 나도 대한민국이라는 집의 기본틀을 지켜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일이 이렇게 돼 나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리 보고서 관련 보도가 국사편찬위원회의 본의와는 다르게 흘렀다면, 적극적으로 해명 기자회견을 하든가 해서 국민들의 오해를 풀어줘야 하지 않나?
 
  『지금 보도가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계획은 없다』
 
  姜부장과 통화하기 前인 9월10일 기자와 통화한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운 연구사도 姜부장과 거의 같은 얘기를 했다. 金연구사는 『이번에 발굴한 실리 보고서 등만 가지고 어떤 역사적 사건의 실체가 이렇다, 저렇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언론에서는 白凡선생 암살 사건의 배후에 白衣社와 미국이 개입되어 있는 것으로 단정적으로 보도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도 내린 적이 없다』고 말했다.
 
  ─南勞黨 출신 북한 외무성 초대 副相 李康國(이강국)과 詩人 林和(임화)가 美 CIC의 첩자였다는 내용도 있었다.
 
  『우리가 공식적으로 공개한 것은 安斗熙가 白衣社 및 美CIC와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 - 그것도 1949년 6월이 아니라 1948년 12월의 시점에서 - 과 관련되는 부분 뿐이다. 나머지 내용들은 각 언론사에서 자체적으로 취재해서 쓴 것이다』
 
  李成茂(이성무·64) 국사편찬위원장과는 수차 전화통화를 시도했지만, 李위원장의 국정감사 출석·회의 주재·訪北 등으로 통화하지 못했다. 9월11일 오후 기자와 통화한 이영춘 국사편찬위원장 비서관은 『「月刊朝鮮」기자로부터 전화인터뷰 요청이 있었다는 사실과, 김광운 연구사와 통화한 내용을 위원장께 보고드렸다』면서 『위원장께서는 「김광운 연구사의 얘기를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 입장으로 받아들여도 좋다」고 하셨다』고 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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