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嚴相益 변호사의 法窓實話] 金宇中 회장의 해외 비밀계좌 BFC의 그림자 : 월간조선

1995년 말 盧泰愚(노태우) 비자금 사건 공판 때였다. 재벌들이 대통령에게 가져다준 돈이 법의 심판대에 올랐다. 주요 재벌그룹의 회장 거의가 볼이 부은 채 피고인이 되어 法臺(법대) 앞에 서 있었다. 깐깐한 인상의 金榮一(김영일) 재판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러분 중 변칙 회계처리를 안한 기업이 있다면 말해 보세요』

기업들의 부도덕성과 이중성에 대한 질타였다. 모두들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그때 大宇그룹의 金宇中(김우중) 회장이 전체를 대변하고 나섰다. 그의 표정에는 구겨진 재벌의 자존심을 세워보려고 하는 의도가 서려 있었다.

『저희가 사업을 하는 건 돈만 걷어 모으려는 게 아닙니다. 돈에 욕심이 나서가 아니라 그냥 사업 자체에 열심이다 보면 돈이 따라오는 겁니다. 돈이 있다고 알려지니까, 여러 곳에서 돈을 달라고 합니다. 솔직히 그런 요구에 박절할 수가 없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또 우리가 처한 환경이 오랫동안 그런 환경 아니었습니까?』

약간 우회하긴 했지만 한국 풍토에서 재벌이 어떻게 돈을 뜯기지 않고 살겠느냐는 게 그의 말의 핵심이었다. 거기에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라를 잘살게 한 經濟戰(경제전)의 장군들을 폄하하지 말라는 의미가 들어 있었다. 재판장이 유연하게 계속되는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金宇中 피고인! 지금 변칙 회계처리를 했냐 안 했냐를 묻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 할 말이 있으면 하시죠』

金宇中 회장이 잠시 멈칫했다. 그의 얼굴에는 「현실을 모르고 원칙만 운운하는」法의 잣대에 대한 원망이 스쳐 갔다. 그는 자세를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계속했다.

『재벌이라고 다 회계를 변칙 처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회장이 자기 주식을 처분할 수도 있는 게 아닐까요? 물론 약간의 금액은 변칙 처리를 하는 수도 있겠죠』

재벌 전체를 음흉한 장사꾼으로 몰지 말라는 것이었다. 所有慾(소유욕)과는 다른 「기업가 정신」을 그는 주장했다. 그가 한때 全(전) 재산을 재단에 증여한 게 떠올랐다. 다시 재판장이 칼날을 들이댔다.

『金宇中 피고인! 재벌 전체를 대표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본인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만 말씀하시면 됩니다』

『…』

金회장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것은 긍정이었을까, 아니면 부정이었을까? 5년이 지난 지금 그에 대한 대답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12월 금융감독원은 별도 조직으로 「大宇그룹 粉飾(분식)회계 조사감리 특별반」을 만들었다. 大宇그룹의 변칙회계를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보안유지를 위해 중간 보고조차 없이 제3의 장소에서 진행된 이 조사에서 大宇 임원들 약 100명이 진술서를 쓰고 서명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證券先物(증권선물)위원회에 회부되어 용서를 받거나, 혹은 검찰에 고발되어 형사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변호사인 필자는 친구를 대신하여 담당 조사관의 소환에 응했었다. 뼛속까지 대우맨이었던 친구의 꿈은 大宇의 임원이 되는 것이었다. 대학 졸업 후 入社(입사)해 20여 년 동안 세계 各國을 누비며 그는 그야말로 개미같이 일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꿈이 이루어졌다. 大宇의 이사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때 이미 大宇라는 거대한 배는 서서히 침몰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金宇中의 下手人(하수인)이라는 굴레가 씌워졌다.

뜨거운 태양이 조사본부가 들어 있는 5층의 장방형 건물을 뜨겁게 달구던 지난 6월 말이었다. 건물 3층의 이방 저방에서 大宇의 고위간부들이 초조한 표정으로 조사를 받고 있었다. 모두가 지치고 힘든 모습들이었다.

조사관의 입에서는 영국의 대우 비밀계좌만 하더라도 100억 달러에 달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담당자들은 나름대로 사명감을 가지고 그 돈의 출처와 사용처를 조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주인공인 金宇中 회장은 해외에 머물고 있었고 핵심 관련자들 가운데는 사망한 이들도 있어 實體的(실체적) 진실의 규명에는 어려움이 많아 보였다.

런던 노스홀트 로드 82번지

원래 그 계좌는 1981년경 大宇가 리비아에 대규모 공사를 따내고 자금의 지원기지가 필요해서 만들었던 것이라고 한다. 그 무렵 런던의 노스홀트 로드 (northholt road south harrow) 82번지 5층 빌딩에 대우의 임시본부가 설치됐다. 원래 65명의 주재원으로 이루어졌던 현지법인인 UK 내에 새로운 조직이 만들어졌다. 金회장의 지시로 4명의 팀원이 특별계좌를 만들어 관리를 전담했다. 그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그들은 겉보기에는 특별히 하는 일이 없어 보였지만, 이면에서는 부지런히 은행들을 찾아다니면서 돈을 빌렸다.

그들은 本社(본사)의 이름으로 돈을 빌리거나 현지 법인의 돈을 쓰기도 하는 등 규정을 초월한 권한을 행사했다. 특수팀원 각자가 자기 파일을 가지고 있었다. 그 파일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도 않았고, 남의 것을 보기도 힘들었다.

보고는 金회장이 런던에 올 때 팀장이 직접 했다. 회계감사와 외환관리의 눈을 벗어날 수 있는 계좌였다. 이사회의 결의서 같은 필요 서류는 나중에 형식적으로 보완됐다.

「BFC」는 지난 20년간 金宇中 회장과 그룹의 몇몇 핵심 관계자가 런던 금융시장에서 은밀히 관리해 온 비밀계좌의 전산암호명이었다. 이 계좌는 국내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주)대우의 정식 회계장부와 상관없이 런던 域外(역외) 금융시장에 개설되었고, 이곳에서 조달된 엄청난 자금이 金宇中 회장 등 극히 일부 인사에 의해 독단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株主(주주), 회계법인, 감독당국에 의해 자금조달과 사용에 있어서의 합리성이 검증되는 일은 없었다.

金宇中 회장의 이 비밀계좌는 大宇직원과 가족에게는 평생의 회한을, 국민에게는 公的(공적)자금의 부담을 안겨주는 요인이 되었다.

지난해 가을 점심을 같이했던 大宇의 한 회장은 직원들의 월급까지 걱정할 때가 많을 정도로 자금 압박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즈음 大宇가 원리금을 갚기 위해 조달해야 했던 돈은 하루 평균 1조2000억원에 달했다고 한다. 大宇는 정부가 大宇의 부도를 막기 위해 일년 이상 금융기관들을 닥달한 덕에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해 갔다.

검은 돈의 사용처는?

그러나 그 무렵 해외 현지법인에 근무했던 한 금융담당직원은 필자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54개 외국은행에서 6억5000만 달러를 빌렸어요. 그걸로 사업을 하고 이자를 지불해야 하는 거죠. 그런데 金宇中 회장이 어느 날 그중 5억 달러를 영국의 BFC 계좌로 넘기라고 명령했어요. 대출받은 돈을 그냥 빼돌리는 셈이었죠』

─거래상의 근거 없이 돈이 움직일 수 있습니까.

『홍콩과 리비아나 프랑크푸르트 간 무역이 있었던 것처럼 가공거래를 만들어 놔야 했어요. 그 흐름이 있어야 돈이 간 게 서류상 그럴 듯하게 보이니까요. 하여튼 金회장이 올 때마다 LC(신용장)를 열고 돈을 영국으로 보내라고 했어요』

그 돈들은 어디에 쓰여졌을까? 大宇의 한 임원은 조심스럽게 자기가 알고 있는 비자금의 사용내역을 말해주었다.

『먼저 그 돈의 상당부분은 손실을 메우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일례로 리비아 공사를 해주고 기성고(旣成高)를 돈대신 기름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이 기름의 公示價(공시가)가 배럴당 25달러라면 시장에서는 18달러밖에 되지 않았죠. 겉으로는 남고 뒤로는 믿지는 장사였습니다. 기름이 유조선 한 척 분량이면 손실은 1000만 달러에 달했습니다』

金회장이 조성한 비자금은 그런 손실들을 메우는 데 사용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는 미약해 보인다.

또 빌려온 돈 중 상당 부분은 이자로 지급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1990년 3월 이후의 이자는 근거가 있어 확인이 가능하나, 그 이전의 것은 추정자료밖에는 없다는 진술이 있었다.

그외 검은 돈의 의심이 가는 곳도 있다. 한 大宇직원은 『大宇가 국내에서 D기업을 인수했는데 중계자에게 리베이트 200만 달러를 지불할 때 BFC 계좌에서 그 돈을 빼서 미국으로 보내준 적도 있다』고 했다.

프랑스의 金회장 포도밭 구입자금이나 모로코에 개인이름으로 등록했다는 두 번째 전용기 代金(대금)에 대해 의혹을 품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金회장도 계좌사용상 억울한 점이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金宇中 회장이 해외에서 개인적으로 받은 리베이트는 그의 개인 돈인 셈인데 BFC계좌에 혼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金宇中 회장의 참 모습은?

일부 주간지에서는 金宇中 회장의 사법처리가 눈앞에 닥쳤음을 알리고 있다. 한때 「세계 경영」을 내세우며 大宇의 거대한 광고탑을 세계 곳곳에 세워나갔던 한 巨人(거인)의 침몰을 보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金宇中이라는 인물은 한국인에게 있어 한 가난한 청년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성취를 보여주는 신화였다. 동시에 「세계는 좁고 할 일은 많은」 모범적인 일꾼이었다. 盧泰愚 비자금 사건 당시 그가 법정에서 말한 대로 「돈이 아니라 사업이 좋아서」 그저 열심이었던 모범적인 경제인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 거액의 외화를 빼돌렸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예전의 부하들이 金宇中씨에 대해 소송을 제기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보도도 눈에 띈다. 과연 그의 진짜 모습은 어떤 것일까?

1995년 말 金회장은 법정에서 『권력자가 무서워 돈을 뺏겼다』고 진술했었다. 그러나 권력자였던 사람들의 얘기는 또 다르다.

필자는 前職(전직) 대통령들이 비자금사건으로 재판을 받을 무렵 그들 가족의 상담 변호사로 일했었다. 그때 필자는 그들로부터 1980년 신군부가 권력을 접수할 당시 재벌들의 군부에 대한 접근 방식과 태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의 실질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재미있는 얘기들이었다. 그중 제일 발빠르게 새로운 권력자들을 찾아온 것이 金宇中 회장 부부였다고 한다.

1997년 4월경 필자는 폴란드의 바르샤바에 갔었다. 폴란드에서 國營(국영) 자동차공장을 인수한 大宇의 위상은 대단했다. 레스토랑에서 예약 없이도 大宇직원이라면 즉석에서 좋은 자리로 안내될 정도였다. 동유럽에서 본 金宇中 회장의 모습은 마치 경제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장군처럼 보였다.

그곳에서 폴란드를 방문했던 金회장을 안내했다는 사람을 만났다. 그때 金회장은 『한국에 있는 지분을 다 빼서 폴란드에 「김우중의 대우」를 다시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한국에는 「주식회사 대우」만 남기면 된다』, 『오늘의 세계에서 자본이 존재하는 곳이 중요하지 국적은 의미가 없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그때 필자는 「아마도 金회장은 1995년의 재판에서 받은 상처가 아물지 않았나 보다」는 생각을 했었다.

大宇보다 소중한 「김우중 神話」

金宇中 회장은 한때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다. 민주사회라면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는 없지만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길은 열려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金회장은 맨손을 가지고도 노력하면 현대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 우리시대의 巨木(거목)이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김우중 神話」가 大宇보다 더 값진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이 죽을 때의 모습은 그의 인생 전체의 축약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기업가도 그 사업에서 마지막으로 손을 놓을 때의 모습이 아름다워야 진짜 성공한 경영인이다.

평생 金宇中 회장과 大宇를 위해 헌신해 왔던 수많은 大宇 임직원들이 파렴치한 범죄자로 낙인찍혀 사법처리되려 하고 있다. 金宇中 회장이 해외에 머물며 그들을 끝내 외면한다면, 그는 그의 全 재산보다 더 소중한 「김우중 神話」마저도 잃게 될 것이다.

金宇中 회장이 침몰하는 타이타닉號의 선장이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