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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軍의 두뇌 국방부 정책실 인맥의 浮上

전문성을 바탕으로 두 장관, 네 大將 배출

유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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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內의 전략·정책 전문가
  「金東鎭(김동진), 金在昌(김재창), 張城(장성), 趙成台(조성태), 朴庸玉(박용옥), 金仁鍾(김인종)」
 
  1991년 국방부 정책실이 만들어진 뒤 정책실장을 지냈거나 재임중인 사람들이다. 국방부 정책실은 중장기 정책을 비롯한 각종 국방정책, 미국을 비롯한 일본·중국·러시아 등 세계 각국과의 안보협력 문제, 남북 군사관계 및 군비통제 문제 등을 다루는 국방부의 「두뇌」.
 
  이에 따라 현역 中將(중장)들이 임명됐던 정책실장 자리에는 실력 있고 머리 좋은 사람들이 발탁돼 왔고 軍(군) 수뇌부로 진출하는 출세 코스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역대 정책실장 5명 중 2명이 국방장관을 역임했거나 하고 있고 4명이 대장이 된 것만 봐도 이같은 평가가 부풀려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일을 꼼꼼히 챙기는 실무형으로 전략 또는 정책 분야 전문가이면서 대부분 非(비)하나회원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1993년 金泳三(김영삼) 정부 출범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용됐거나 軍 수뇌직에 있다는 점도 이들의 공통분모다.
 
  金泳三 정부 이전엔 보스 기질을 가진 하나회 출신들이 軍 수뇌직을 독차지하다시피 해 실무형들이 軍 수뇌가 될 기회가 거의 없었지만, 하나회가 숙정된 金泳三 정부 이후 이들 같은 전략 정책통들이 「뜨고」 있는 것이다.
 
  金東鎭(육사 17기)씨는 金泳三 정부 시절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 국방장관 등 군 수뇌직을 섭렵했다. 인재가 많기로 유명한 육사 17기 수석졸업생으로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영어실력의 소유자다.
 
  金在昌(육사 18기)씨는 정책실장을 지낸 뒤 대장으로 진급,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으로 진출했으나 하나회원이어서 1994년 하나회 숙정 때 주위의 동정을 받으며 옷을 벗었다. 張城(육사 18기)씨도 金在昌씨처럼 金泳三 정부 시절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지낸 뒤 예편했으며 비상기획위원장을 지냈다. 지난 5월 개각 때 유력한 국방장관 후보로 거명됐었다.
 
  趙成台(육사 20기) 현 국방장관은 1996년 2군사령관을 끝으로 예편한 뒤 지난 5월 국방장관으로 발탁됐다. 정치적인 배경이나 인맥이 없는 그의 발탁은 의외의 것으로 軍 안팎에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군내에선 드물게 정책 분야뿐 아니라 전략 분야에도 밝은 그의 등장을 반기는 軍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정책실장 출신 장·차관
 
 
  정책실장 시절엔 통일 과정 및 통일 이후 전략 차원에서 중국 등 주변국과의 군사외교에 공을 들여 성과를 거뒀으며 이를 토대로 지난 8월 국방장관으로는 처음으로 중국을 공식방문했다. 중국방문 기간중 통일 이후 駐韓美軍(주한미군) 장래문제를 『주변국과 만장일치로 결정하겠다』고 발언해 물의를 빚었으나 통일 이후에도 주한미군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장 강하게 갖고 있는 軍인사 중의 한 사람이다. 정책실장 시절엔 매우 깐깐한 일처리로 「趙하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朴庸玉(육사 21기) 현 국방차관은 軍의 대표적인 對美(대미) 정책통으로 중대장 이상 야전지휘관을 한 번도 하지 않았으면서도 중장까지 올라 「신기록 제조기」로 통한다. 美 하와이大(대) 정치학 박사 학위를 가진 국방대학원 교수 출신으로 1992년 교수요원으로는 처음으로 소장으로 진급했다. 또 진급한 뒤 일정기간이 지나면 전역해야 하는 직위진급을 세 차례나 하며 중장이 돼 야전경험이 없는 순수 정책전문가도 고위장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보여줬다.
 
  지난해 4월 정책실장(중장)을 끝으로 예편한 뒤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장으로 진출했다가 지난 5월 개각 때 차관에 임명돼, 趙장관과 함께 정책실장 출신 국방 장·차관 시대를 열었다. 李俊(이준·육사 19기) 국방개혁위 위원장과는 처남 매부지간이다.
 
  朴차관으로부터 정책실장 바통을 넘겨받은 金仁鍾(육사 24기) 현 정책보좌관(현 정부 들어 명칭이 바뀜)은 정책통으로는 드물게 보스 기질도 갖고 있어 따르는 후배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정규사단 사단장, 수방사령관을 지냈으며 軍사령관 진출도 유력시되고 있다. 趙장관과 朴차관이 정책실장 시절 정책분야 주무국장인 정책기획관으로 두 사람을 보좌, 장·차관과 호흡이 잘 맞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합참 작전본부 등 작전분야의 요직도 두루 거쳤다.
 
  이와 함께 權寧海(권영해·육사 15기) 前 장관도 역대 국방장관 중 가장 실무에 밝은 것으로 평가받을 만큼(월간조선 1993년 조사) 실력 있는 정책통으로 金泳三 정부 들어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경우. 權 전 장관은 1988년 吳滋福(오자복) 장관에 의해 기획관리실장으로 발탁됐다. 당시 기획관리실장은 1991년 분리된 정책실과 기획관리실 업무를 함께 맡고 있어 능력 없는 사람들은 제대로 업무를 수행할 수 없는 중요 직책.
 
  權 전 장관은 이 업무를 2년여 동안 효과적으로 수행, 李鍾九(이종구) 장관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1990년 소장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차관으로 발탁됐다. 權 전 장관이 차관 시절 김동진, 김재창, 장성씨 등이 정책실장으로, 조성태 장관이 정책기획관으로 근무했다.
 
 
  정책기획관 출신들
 
 
  정책실의 주무국장인 정책기획관(현 정책기획국장) 출신들도 金泳三 정부 이후 상당수가 승승장구했다. 1980년대 말 이후 정책기획관을 거친 사람은 金東鎭 전 국방장관, 金光石(김광석·육사 17기) 전 청와대 경호실장, 尹龍男(윤용남·육사 19기) 전 합참의장, 趙장관, 최기홍(육사 22기) 예비역소장, 韓勝義(한승의·육사 22기) 예비역중장, 이강언 육군대학 총장(육사 25기·육군 소장) 등이다.
 
  金光石 전 청와대 경호실장은 소장으로 예편, 1993~1994년 병무청장을 지낸 뒤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정권 말기까지 金泳三 전 대통령을 보좌했다. 「군사용어 해설사전」을 직접 쓸 정도로 학구파다.
 
  尹龍男 전 합참의장은 金泳三 정부 시절 김동진 前 장관에 뒤이어 육군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을 지내며 승승장구했던 인물. 金泳三 정부의 軍 수뇌들 중 가장 실력있는 군사전략통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현대전의 요체인 기동전에 밝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략·정책통의 代父 林東源
 
 
  육군참모총장 시절 「하부가 튼튼한 강한 군대 육성」을 모토로 육군 청사진인 「육군 발전목표 및 방향」을 강력히 추진했고, 합참의장 시절엔 미래전에 대비한 합동戰場(전장)교리 등을 발전시켰다. 군사전략에 뛰어난 식견을 갖고 있지만 주변 여론을 충분히 수렴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일을 추진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현재 軍 수뇌는 아니지만 林東源(임동원·육사 13기) 통일부 장관은 현역 시절 전략통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지금도 軍內(군내) 전략통의 「代父(대부)」로 통한다. 햇볕정책 추진과 관련해 상당수 軍관계자들이 그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평가를 하면서도 그를 「代父」로 인정하는 것은 한국군 전략 발전사에서 차지한 위치 때문이다.
 
  林장관은 1974년 朴正熙 대통령의 지시로 軍 전력증강계획(일명 율곡계획)을 처음 시작할 때 합동참모본부 군사력소요과장(일명 율곡과장·대령)으로 있으면서 우리 軍 최초의 중장기 군사력건설 청사진을 짰다. 軍의 원로 전략통인 李秉衡(이병형·육사 4기·예비역중장) 前 전쟁기념사업회장이 합참본부장(중장)으로 林장관의 상관으로 있었다. 당시 합참 군사력소요과에 소속돼 林장관 밑에서 소령으로 근무하며 두각을 나타냈던 사람이 尹龍男 전 합참의장이다.
 
  전략적인 식견을 높일 수 있는 자리였던 율곡과장직은 1980년대 중반 千容宅(천용택·육사 16기) 국정원장도 역임했다. 千원장은 1991년 군사전략과 한미 연합방위태세, 주한미군 협조문제 등을 총괄하는 합참 전략본부장으로 임명돼 군내 전략통으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千원장이 율곡과장직을 맡고 있을 때 현재 軍 고위장성 가운데 최고의 전력증강분야 전문가로 꼽히는 曺永吉(조영길·갑종 172기) 2군사령관이 그의 밑에서 주무 장교(중령)로 활약했다.
 
  林東源 장관은 4년 뒤인 1978년 육군에 설치된 「80위원회」를 통해 우리 軍 전략수립에 다시 한번 중요한 역할을 한다. 80위원회는 「개혁 없이는 육군의 발전도 없다」는 위기감 속에 1980년대 강군육성을 위해 조직돼 12·12 직후 해체될 때까지 활약한 육군 內 「태스크 포스」. 전략, 인사, 군수 등 3개부 20여개 팀 엘리트 영관장교 40여명으로 구성됐다.
 
  참모차장이 위원장이었던 이 위원회에서 林장관은 간사장(준장)으로 각 팀별 보고서를 총괄, 정리하는 역할을 했다. 이때 주목을 받았던 사람이 趙장관과 金熙相(김희상·육사 24기·중장) 국방대학원장이다. 대대장을 마친 뒤 위원회에 왔던 趙장관은 보고서 작성에 두각을 나타냈고 우여곡절 끝에 대령으로 진급했다. 위원회 활동을 마치고 林장관이 육본 전략기획처장으로 옮겨갔을 때 趙장관을 데리고 갔으며 趙장관은 전략기획과장으로 林장관과 함께 2차 율곡계획을 수립, 1980년대 군사력 증강 청사진을 짰다.
 
  金熙相 중장은 육사 전사학 교관으로 있다가 위원회에 참여, 최연소(소령) 위원회 멤버로 활약했다. 그가 육사 교관 시절인 1977년에 지은 「중동전쟁」은 군내 스테디셀러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틈틈이 안보관련 책들을 써 현직 고위장성 중 가장 많은 책을 저술한 사람으로 기록돼 있다.
 
  1988년 3월 국내정책과장으로 임명된 지 1개월 만에 金宗輝(김종휘) 외교안보수석에 의해 청와대 국방비서관으로 발탁된 그는 그해 8월 시작된 軍구조 개편계획인 8·18 계획 추진과정에서 군내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청와대 국방비서관실에 함께 있던 윤일영(육사 29기·준장) 현 국방부 대변인과 함께 8·18 계획을 통합군 추진 쪽으로 강력히 밀어붙였던 것. 그러나 해·공군의 반발로 통합군 추진은 결국 좌절됐다.
 
 
  「백두산 계획」
 
 
  1984년 이기백 합참의장의 지시로 통일 후 미래 한국군 청사진을 처음으로 그린 「백두산 계획」에도 전략통들이 대거 참여했다. 장성 前 한미연합사부사령관이 책임자(연구부장·준장)로 있었으며 전관(육사 23기) 예비역소장을 중심으로 K준장(육사 28기), 尹국방부대변인, C대령(육사 30기) 등이 활약했다.
 
  1988∼1990년 추진된 8·18 계획에도 육사 28기 동기생으로 현재 사단장으로 있는 K소장과 또다른 K소장, 尹光雄(윤광웅·해사 20기) 전 해군참모차장, K준장(육사 28기) 등 전략통들이 활동했다.
 
  합참 부서 중 우리 軍 전략을 담당하는 군사전략 과장직과, 對美 군사협력 관계를 맡고 있는 군사협력 과장직도 전략 정책통들이 거쳐간 자리다. 張城 전 연합사부사령관, 都日圭(도일규·육사 20기) 전 육군참모총장, 전관 예비역소장, 유홍모(육사 24기·소장) 국방품질관리소장, 이상희(육사 26기·소장) 국방부 정책기획국장, 사단장인 K소장(육사 28기) 등이 군사전략 과장을 지냈다.
 
  역대 군사협력과장은 신일순(육사 26기·소장) 육군교육사 교훈부장, 황진하(육사 25기·소장) 주미 국방무관, 현직 사단장인 K소장(육사 27기), 역시 현직 사단장인 또다른 K소장(육사 28기), L준장(육사 29기) 등이다. 신일순 소장은 육사 생도로는 처음으로 美 육사(웨스트 포인트)에 유학했으며 국방부에서 對美정책을 맡는 국외정책과장도 지낸 미국통이다.
 
  黃진하 소장은 하나회 출신이지만 영어에 능통한 실력파로 지난해 구제 케이스로 뒤늦게 진급했다. 육사 28기 출신의 K소장은 美 스탠포드大에서 3년 만에 석·박사학위를 받은 엘리트 장성으로 駐美(주미) 무관을 지내기도 했다.
 
  국방부의 경우 한미 안보협력관계 등을 맡은 국외정책과장(현 미주정책과장) 자리도 정책통 코스. 金東信(김동신) 육군참모총장이 초대 과장이었고 朴庸玉 국방차관, 유보선(육사 24기) 전 국방부 군비통제관, 신일순 소장, 현직 사단장인 L소장(육사 28기) 등이 이 자리를 거쳐갔다.
 
  이처럼 육군 출신들이 두각을 나타내며 軍 수뇌직을 독차지하다시피 한 가운데 해군 출신 전략통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이 安炳泰(안병태·해사 17기) 전 해군참모총장이다. 해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작전사령관 등 요직을 두루 거친 安 전 총장은 강한 추진력으로 大洋海軍(대양해군) 건설의 필요성을 軍 안팎에 널리 알린 「대양해군의 전도사」다. 특히 1996년 초 한·일간 독도분쟁이 불거졌을 때 金泳三 대통령에게 야심찬 大洋해군 건설계획을 극비리에 보고, 재가를 받았다.
 
  이 계획은 2015년쯤까지 수직이착륙기 탑재가 가능한 1만t급 輕(경)항공모함, 7천t급 이지스 순양함, 3천t톤급 중잠수함 등을 보유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안유지를 이유로 정식 전력증강계획 절차가 생략된 채 국방장관과 합참의장 등에게만 보고돼 절차상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육군 출신 軍 수뇌들의 제동으로 이 계획은 상당 부분 유보됐다.
 
 
  黃源卓 외교수석의 불운
 
 
  黃源卓(황원탁·육사 18기) 외교안보수석은 전형적인 전략정책통 코스를 밟지는 않았지만 한미 군사관계 및 정전협정 분야의 전문가로 꼽히는 정책통. 1991년 3월 한국군 장성으로는 처음으로 제57대 군사정전위 유엔군측 수석대표로 임명돼 언론의 각광을 받았으나 그뒤 북한이 군사정전위 본회담을 계속 거부, 1995년 전역할 때까지 본회담에 한번도 참석하지 못했다.
 
  黃源卓 수석은 육사 각기별로 가장 우수한 졸업생에게 주어지는 영예인 대표화랑 출신이다. 12·12 때 鄭昇和(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수석부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신군부의 미움을 사 예편할 위기에 처했으나 그를 높이 평가한 주한미군 고위장성들의 도움으로 한미 연합사에서 작전처장, 작전차장 등을 지냈다. 1995년부터 올해 초까지 駐파나마 대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車榮九(차영구·육사 26기·준장) 전 국방부 대변인도 전략정책통 코스를 거치지는 않았지만 정책통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경우. 1970년대 중반 현역장교로는 처음으로 프랑스 유학을 떠났고 파리대학에서 3년 만에 국제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땄다.
 
  1980년부터 14년간 국방연구원(KIDA)에서 안보정책 및 군비통제 분야의 책임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주로 對美관계를 담당, 朴庸玉 차관과 함께 軍의 대표적인 對美 정책통으로 알려져 있다. 1994년 趙成台 당시 정책실장에 의해 발탁돼 국방부 정책기획실 차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한미 군사정책, 중장기 국방정책 등을 담당하다 지난해 말 非政訓(비정훈) 출신 현역장성으로는 처음으로 대변인에 임명됐다. 지난 6월 연평해전 후 「부부싸움」 운운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켜 전격 해임됐으나 그의 경력 및 능력에 비추어 중용될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이 많다.
 
 
  정책통의 한계
 
 
  이처럼 전략 정책통들이 부각되고 있는 데 대해 軍內에선 대체로 시대 변화에 따른 자연스런 흐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컴퓨터와 정보통신의 발달로 단추 하나로 전쟁이 이뤄지는 C I(지휘-통제-통신-정보-컴퓨터)체제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지휘관이 앞장서서 싸워야 했던 구식 戰場의 비중이 줄어들었다는 시각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첨단 정보전으로 상징되는 미래전의 경우 전략 정책통들을 더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 시각도 만만치 않다.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경우 걸프전이나 코소보 사태와는 달리 사람과 사람이 직접 부딪치는 재래식 전쟁의 성격이 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좁은 한반도에 남북한의 1백70만 정규군이 대치하고 있고 남북한 모두 구형 무기체계를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이에 따라 유사시엔 『나를 따르라』며 앞장서고 부하들을 심복시켜 이에 서슴지 않고 따르게 할 수 있는 보스형 지휘관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략 정책통들이 흔히 지휘관형이 아닌 참모형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나오는 얘기다.
 
  특히 국방부 및 합참의 전략 정책 부서에서 근무한 경험을 갖지 못하고 주로 야전부대에서 근무한 장성 및 장교들은 전략 정책통들이 부각되는 최근의 추세에 대해 아쉬움과 불만을 토로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전을 경험한 장병들에 대한 설문조사는 상급 지휘관들이 모든 분야에 걸쳐 모범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보여주고 있다. 1944년 2차세계대전 때 역전의 미군 보병용사 6백명에게 「격렬한 전투 때 어떤 장교가 가장 여러분에게 신뢰감을 줬는가」라고 물었더니 「위험 속에서도 용감하고 침착하게 모범을 보인 장교」라고 답한 사람이 31%로 가장 많았다고 한다. 이어 「용기를 북돋워주고 대화를 유도하며 농담을 한 장교」가 26%, 「병사들의 복지와 안전에 관심을 보여준 장교」가 23%를 차지했다.
 
  전문가들도 바람직한 軍 지휘관상은 실력 외에 인간미가 점차 중시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軍의 한 리더십 전문가는 『미군은 종전엔 싸우는 능력만을 중시했는데 지금은 인간적인 면도 중시한다』며 『미래전은 병사 개개인의 목숨이 더욱 중시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격적 리더십
 
 
  리더십 전문가들은 걸프전 때 미국 슈워츠코프 사령관의 경력을 보고 승리를 예측했다고 한다. 군사전략에 밝았고 박사 학위를 가진 기술 전문가이면서 그의 아들이 월남전 때 전사, 인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상을 갖고 있는 등 현대전의 지휘관에게 필요한 세 가지 요소를 모두 갖췄기 때문이라는 것.
 
  그런 면에서 美 해군사관생도들의 필독서 「리더십」이 정의한 리더십은 우리 軍의 지휘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 같다.
 
  「리더십이란 한 인간이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복종, 신뢰, 존경, 충실한 협력을 얻는 방법으로 인간의 사고, 계획, 행위를 지휘할 수 있고, 또 그러한 특권을 갖도록 하는 기술, 과학 내지 천성으로서 인간집단에는 리더와 팔로워(Follower)가 있다. 리더십은 한 사람이 명령이나 설득, 기타 수단을 가지고 많은 인간을 심복시키고자 하는 의사로서 매우 강력한 동기 부여를 전제로 한다」
 
  일본 방위청 시설청장을 역임한 위기관리 전문가인 사사 아츠유키씨는 그의 저서 「평상시의 지휘관, 유사시의 지휘관」에서 지휘관이 알아야 할 열 가지 수칙으로 손자병법, 「나를 따르라(Follow Me)」, 인내력,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지 마라, 꾸중보다 칭찬을, 인간애, 物慾(물욕)의 자제 등을 들고 있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 춘추전국 시대의 전략가 吳子(오자)는 병든 부하 장병의 고름을 직접 입으로 빨아 부하들을 심복시켰다. 로마의 명장 스키피오는 수만명에 달하는 부하 장병들의 얼굴과 이름, 가족환경을 거의 모두 기억, 부하들이 마음에서 우러나 따르도록 함으로써 카르타고의 맹장 한니발을 격파하기도 했다.
 
  이 모두 부하들을 심복시켜야 지휘관의 리더십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軍의 경우 전략 정책통들이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1993년 이후 軍 수뇌의 권위가 떨어지고 상관에 대해 심복하는 부하들이 점차 줄어들었다는 지적들이 軍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지난 7년여 동안 軍을 가까이서 지켜본 기자가 보기에도 이같은 지적에 일리가 있는 면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를 전략 정책통들의 책임만으로 돌리기에는 한때 軍을 지나치게 매도한 우리 사회의 책임도 크다.
 
  하지만 인간미와 리더십을 갖춘 전략 정책통들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소장파 장교들이 軍內에서 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또 역대 정책실장, 정책기획관은 물론 합참 군사전략·군사협력 과장, 국방부 미주정책과장 중 해·공군 출신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점에서 해·공군 출신도 이들 자리를 차지해야 한국군의 발전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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