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注〕
이 기사에서 신창원과 金경장이 주장하는 내용은 경찰측의 공식 견해와는 상반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어느 쪽이 진실인가는 별도의 조사나 취재를 통해서 밝혀질 것입니다. 따라서 독자 여러분께서는 이 글을 경찰측 발표에 대한 당사자들의 反論이란 차원에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이 기사에서 신창원과 金경장이 주장하는 내용은 경찰측의 공식 견해와는 상반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어느 쪽이 진실인가는 별도의 조사나 취재를 통해서 밝혀질 것입니다. 따라서 독자 여러분께서는 이 글을 경찰측 발표에 대한 당사자들의 反論이란 차원에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신창원이 말하는 동거녀 강간說의 내막
신창원은 일기에 자기를 쫓던 金경장이 동거녀를 강간했다고 썼다. 그녀로부터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변호사인 필자는 그 전말을 신창원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경찰관이 신창원의 동거녀를 강간한 점에 대한 강한 의혹이었다. 강간하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이 말을 하는 데는 여러 근거와 논리가 있다.
경찰의 수사발표 중에는 또 신창원의 강간혐의도 있다. 보도를 보면 이미 단정을 넘어 파렴치한 강간이 덧붙여짐으로써 사형을 시킬 수 있지 않느냐가 논의되고 있다. 변호사인 필자는 경찰의 신창원에 대한 강간조사의 대질 과정에 직접 참여했다. 피해자와 증인이라는 여자를 직접 보고 얘기도 들었다. 결론은 강간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언론은 경찰의 수사결과 발표를 인용해서 경찰관과 신창원 둘 다를 성급히 강간범으로 결론을 짓고 끝났다.
누구든지 확정판결이 나기 전에는 무죄로 추정된다. 헌법의 원칙이다. 또 검사나 형사가 공판 청구 전에 수사한 범죄사실을 알리면 피의사실 공표죄로 3년 이하의 징역이나 자격정지형에 처해지도록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언론의 지면에는 공판 청구 전 수사결과 발표가 기정사실화되어 있다. 당사자나 변호사의 항변은 조금도 반영될 여지가 없었다. 일방적이고 독선적인 여론재판이었다. 이제부터 기존의 결과발표에 대한 반론과 그 근거사실을 제시하려고 한다.
형사가 범인을 잡는 데 건달을 동원해서 개인적으로 움직였다. 일단 제보자는 신속 정확했다. 탈주한 지 얼마 안되어 신창원은 세차장 주인에 의해 꼬리가 잡혔다. 그리고 즉시 신고가 됐다. 정보를 받은 원경장은 1997년 10월16일 후배들을 소집해서 신창원의 은신처를 덮쳤다. 그리고 실패했다. 신창원은 며칠 후 또 꼬리를 잡혔다. 이번에도 제보자는 정확히 신창원의 집과 전화번호까지 경찰관에게 제보했다. 신창원 검거에 실패한 원경장은 멧돼지도 잡을 수 있다는 강력한 가스총을 개인적으로 사서 다시 신창원 검거에 나섰다.
이번에는 동료인 金경장과 함께였다. 두 번째 검거에서도 정규 경찰조직이 아닌 그들의 후배들이 동원됐다는 점은 석연치 않다. 경기경찰청 형사기동대의 金경장은 원경장의 개인적인 부탁으로 박혜숙이 살던 집에 잠복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에게 쫓겨 도망할 당시의 심정을 신창원은 이렇게 말했다.
『그때 경찰관에게 진짜 총이 있었더라면 저는 꼼짝없이 잡혔어요. 장전을 하고 사격을 가하는 시간 동안 사정거리를 빠져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건달들이 왔기 때문에 쉽게 빠져 나올 수 있었어요. 그런 조무래기 건달들은 아무리 많아도 겁 안나요』
결국 두 사람의 행동은 특진 욕심에 눈이 어두워 혼자 잡으려다 놓친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그들은 해임됐었고 최근 두 경찰관은 다시 복직되어 근무중이다가 그중 金경장은 「강간혐의자」가 되어 다시 파면되었다. 정말 상부가 모르게 특진에 어두워 그가 그랬을까.
金경장 부인의 전화
1999년 9월1일 오전 11시경. 책상 위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나는 기계적으로 익숙하게 송수화기를 들었다.
『여기 안성인데요, 엄상익 변호사를 바꿔주세요』
전화 저쪽에서 독이 오른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접니다만…』
내가 대답했다.
『어떻게 신창원이 같은 나쁜 사람을 변호하실 수가 있어요?』
상대방 여자는 다짜고짜 나를 힐책했다. 신창원에 대한 동정 여론도 있다지만 내게 오는 편지나 전화는 대개는 이런 항의였다. 한 여고생은 신창원 같은 나쁜 사람을 변호하는 변호사도 이상한 사람 아니냐고 편지를 했다.
『저, 누구십니까?』
내가 물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은근히 부아가 났다.
『저는 신창원을 잡으려고 했던 金경장의 처예요』
갑자기 신경이 곤두섰다. 그녀가 계속했다.
『신창원 때문에 우리 가족이 너무나 고통을 받아요. 어떻게 그런 사람을 변호하실 수가 있습니까? 그 사람 좀 만나게 해주세요』
송수화기를 통해 아이가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金경장의 부인이라는 사람이 아이를 달래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아이의 우는 소리가 더 커졌다. 잠시 후 그녀가 다시 송수화기를 드는 것 같았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렇게 대답했다.
『아픈 환자가 오는데 의사가 사람을 가려서 치료해 줍니까? 나쁜 놈은 치료하지 말아야 하는 겁니까? 변호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창원보다도 더 흉악한 살인범이라도 사건을 의뢰하면 변호를 합니다』
이건 적반하장이었다. 건달 동원에 강간혐의까지 보도된 측에서 변호사에게 항의하는 형국이었다. 내가 반문했다.
『남편 되시는 김형사는 왜 불쌍한 사람들을 잡아 가뒀습니까라고 하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어요? 사람이 미워서가 아니라 직무이기 때문이라고 할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녀의 어조가 수그러지기 시작했다.
『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여자의 강간당했다는 말만 믿고 우리 남편 말은 왜 안 믿죠? 저도 딸이 둘인데 나중에 아버지가 강간으로 경찰에서 쫓겨났다고 하면 자식한테까지 죄인이 될 거 아니에요? 신창원 그 사람 너무 야속해요』
남편의 무죄를 확신하는 아내의 어조였다.
『남편이 밖에서 하는 일을 어떻게 절대적으로 확신합니까? 남자가 집식구 이외에 다른 여자에게도 모두 신사라면 세상에 사건이 없을 건데요…』
내가 따졌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우리 어머니가 강간당했다는 그 여자를 찾아가서 진짜냐고 물었더니 「미안하다 말 한마디 잘못해서 이렇게 됐는데 죄송하다」라고 그러더래요. 진짜 강간당했다면 그렇게 말하겠어요?』
엉엉 우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그랬으면 녹음이라도 해두시죠』
『미처 그러지를 못했어요』
金경장의 고백
나는 힘들게 金경장과 단 둘이 만났다. 쌍꺼풀에 커다란 눈을 가진 선량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어깨 부분에 실밥이 터진 회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검소한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왜 강간을 하셨습니까?』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전 강간한 사실 없습니다』
그의 얼굴이 불쾌한 표정이었다.
『아무리 잠복근무라 하더라도 여자 혼자 있는 집에 밤 늦게 같이 있으면 당연히 의심을 받는 것 아닙니까?』
『그건 제 실수입니다. 맞습니다. 인정합니다』
의외로 그가 선선히 대답했다.
『잠복 근무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하셨습니까?』
『밤 열시부터 새벽 두세 시까지 했습니다』
『혼자서요?』
내가 물었다.
『혼자 했습니다』
『신창원이 살던 집 내부구조가 어땠습니까?』
『방이 세 개고 앞뒤로 베란다가 있었습니다. 박혜숙이 자기 방에서 생활하고 제가 거실에서 혼자 지켰습니다』
언제 신창원이 나타날지 모르는 그 집에서 여러 명의 경찰관이 아닌 혼자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신창원이가 올 경우 혼자서 당해낼 수 있습니까?』
『실탄과 권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제든지 쏘려고 생각했습니다』
『감시일지는 작성했습니까?』
특정지역에 잠복하면 시간대별로 그 상황을 적어서 서류화하게 되어 있었다. 그것을 물은 것이다.
『작성하지 않았습니다』
『낮에는 그러면 어떻게 감시했습니까?』
『낮시간 동안에는 원경장이 시키는 일을 하고 특별히 감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감시가 없는 낮에는 신창원이 마음대로 왔다 가도 몰랐겠네요』
『사실 그렇습니다』
『金경장은 경기경찰청 형사기동대 소속이고 원경장은 평택경찰서 조사계에서 근무했는데 어떻게 金경장이 원경장의 명령을 받고 일했습니까? 소속도 다르고 보직도 전혀 무관한데… 정말 개인적인 행동들이었습니까?』
원경장은 武道(무도)경찰 출신이고 金경장은 일반공채 출신이었다. 나는 끝내 말하지 않으려는 金경장을 집요하게 설득했다. 또 파렴치한 강간범으로 강하게 추궁도 했다. 결국 그가 나를 만난 건 나름대로 恨(한)을 전달하기 위한 점이 있었다. 오랜 침묵 끝에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눈알이 벌겋게 충혈되면서 가슴에 맺힌 뜨거운 서러움이 철철 넘쳐 나오는 것이었다. 뭔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한 내용들은 이랬다.
기동대장의 명령
1991년에 경찰에 들어선 그는 경기도 용인, 안성 지역에서 형사생활을 했다. 고속도로에서 달리는 차에 뛰어들어 치기배를 검거하기도 했다. 안성경찰서에서 경기경찰청 형사기동대로 배치받은 그는 조직폭력배 검거 실적이 인정되어 신창원 추적 무렵 이미 순경에서 경장으로 특진이 됐다.
1997년 10월28일경이었다. 그는 경기경찰청 형사기동대 2층 사무실에서 조직폭력배를 조사하고 있었다. 갑자기 1층의 대장 사무실로 내려오라는 연락이 왔다. 잠시 후 그가 내려갔다. 대장실에는 원경장과 감찰주임, 대장이 함께 앉아 있었다.
『이건 극비사항이니까 너만 알고 있어』
대장이 앞의 기록들을 들추며 말했다. 申昌源(신창원)에 관한 서류들이었다. 그들이 거기 모인 배경은 개별적인 인맥관계에서 비롯됐다. 원경장은 신창원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자 예전의 상관이던 경기경찰청 감찰주임에게 말했다. 감찰주임은 원경장을 형사기동대장에게 데리고 갔다. 신창원의 정보를 들은 기동대장은 원경장에게 빠릿빠릿한 형사를 붙여주겠다고 약속했다. 거기에 차출된 형사가 金경장이었던 것이다. 金경장은 원경장과는 용인에서 일어났던 중학생 피살사건 때 수사를 하면서 아는 사이였다.
『여기 근무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너는 내려가서 원경장하고 수사해라. 실탄하고 권총을 줄게』
金경장은 사실상 기동대장의 정식명령을 받은 셈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22구경 투투권총과 실탄 일곱 발을 지급받았다. 원경장은 경기청 형사기동대장실에서 그동안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 이후 金경장은 원경장과 한 팀이 되어 신창원 추적에 나섰다.
평택경찰서에서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평택경찰서 조사계에 근무하던 원경장은 낮에는 경찰서에서 정상근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金경장에게 신창원에 관한 정보들을 소상히 알려 주었다. 신창원과 박혜숙이 첫 번째 살던 집과 그 부근의 지리 및 상황, 박혜숙의 부모나 형제가 사는 집의 주소와 위치, 신창원이 타고 다니는 「52너5023」의 그랜저 승용차 번호 등 여러 정보를 알려주었다.
金경장은 그의 갤로퍼 지프차를 박혜숙의 빌라 근처 군부대 앞에 세워두고 감시를 하기 시작했다. 신창원의 차가 그 집으로 들어오나를 감시했다.
1997년 10월29일, 30일 이틀 동안 밤 10시경부터 새벽 2시에서 3시까지 잠복했다. 추웠다. 金경장은 스키복과 라면을 차 안에 준비했었다. 외부에서 혼자 잠복하던 金경장은 11월6~7일 이틀간 박혜숙의 빌라로 들어갔다. 빌라구조는 방이 세 개에 욕실이 있었다. 앞뒤로 베란다가 있었다. 뒷 베란다 쪽에는 가스레인지가 설치되었다. 그는 해가 떨어지면 그 집에 들어갔다가 동트기 전에 나와서 집으로 갔다. 그는 거실 소파에서 실탄을 장전한 권총을 들고 대기했다. 답답했던 원경장과 金경장은 점쟁이를 찾아가 보기도 했다. 점쟁이는 박혜숙이 아직도 신창원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빌라에서 혼자 지내는 박혜숙의 태도는 아주 평범했다. 전혀 다른 낌새가 없었다. 박혜숙은 거실에서 대기하는 金경장에게 포도주스 한 잔을 내다 주기도 하고 한번은 라면을 끓여 주었다. 그게 다였다.
『안 한 걸 어떻게 말할 수 있나요』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네요…』
내가 말했다. 열 명의 경찰이 한 명의 도둑을 잡지 못한다는 게 속담이다. 너무나 허술한 근무였다. 金경장의 말대로라면 사실상 대장 명령을 받아 나온 것이다.
『원경장과 함께가 아니고 혼자서 여자 혼자 있는 집에 있었단 말입니까? 어떤 일을 뒤집어 써도 할 말이 없네요』
그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게 제 실수였습니다』
金경장이 솔직히 인정했다.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렇지만 제 신분이 완전히 노출된 상태인데 어떻게 제가 강간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거야 멀쩡한 정복을 입은 파출소 순경이 여자아이를 숙직실로 데려가 성폭행하는 사건도 벌어지는 세상에서 변명이 되기는 곤란하죠』
내가 반박했다. 이상했다. 그는 논리적인 추궁에는 단 한마디도 설득력 있는 답변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눈빛, 표정, 어딘지 모르는 그의 태도에서 진실함이 전해오기 시작했다.
『저도 정말 환장하겠습니다. 아! 나 참!』
그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모양이었다.
『이번 감찰조사에서 조사관이 강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납득이 가게 설명을 해보라고 하더라구요. 했으면 이렇게 저렇게 말하겠지만 안 한 걸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알아서 하래』
그가 항의조로 내뱉었다. 그가 계속했다.
『저도 형사를 했습니다. 남자가 강간을 안 했다고 부인하고 여자가 당했다고 할 때 강간으로 조작하려면 여자가 말하는 걸 리얼하게 조서에 올리고 남자는 「안 했습니다」로 간단히 적어주면 결국 강간죄가 성립됩니다. 저도 그런 식으로 강간범이 됐어요』
나는 그때 이정훈 기자(당시 시사저널, 현재 동아일보 주간동아)가 당시 상황을 취재해 썼던 도망자 신창원 책의 한 부분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박혜숙이 라노스 승용차를 몰고 천안에서 교통사고를 낸 후 金경장에게 도움을 요청한 부분이었다.
『여기 이 부분을 보면 위급한 사고처리를 부탁할 정도로 친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솔직히 이 정도면 강간은 아니라도 和姦(화간) 정도는 의심이 간다고 보이는데요』
내가 물었다.
『이건 사실과 틀립니다. 그때 전화를 받긴 받았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1997년 12월22일 밤이었다. 박혜숙이 金경장에게 전화를 했다.
『저, 박혜숙인데요』
『무슨 일인데요?』
『전화번호를 알아 볼 일이 있어서…』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그거죠?』
金경장은 귀가 번쩍 뜨였다. 그녀가 신창원이 있는 곳을 말하려는 것이다.
『저…, 송탄 시내를 가다가 신창원하고 강순희가 만나는 걸 봤어요. 제가 두 사람을 따라가서 헤어지라고 하고 왔어요. 강순희 전화번호하고 그 집 주소를 아는데…』
그녀가 신창원의 집을 알려주었다. 그는 즉시 그 사실을 원경장에게 알렸다. 12월29일 金경장은 경기경찰청 형사기동대장에게 전화를 했다.
『김○○입니다. 신창원의 소재를 파악했는데 권총과 실탄이 필요합니다』
金경장이 기운차게 말했다.
『넌 이미 특진했으니까 그 공은 원경장에게 돌리고 뒤에서 보조만 해 줘라』
기동대장의 명령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얼마 전 특진한 그로서는 신창원을 잡는다고 다시 승진하는 건 아니었다. 그가 옆에 있던 원경장에게 송수화기를 건네 주었다. 원경장이 형사기동대장과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신창원을 검거하려니까 얼마 전에 반납한 실탄과 권총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형님, 권총하고 실탄을 달라고 해』
옆에서 金경장이 元경장에게 재촉했다. 元경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님, 총 좀 주십쇼』
원경장이 전화에 대고 말했다.
『그러면 對(대)테러 요원 열명만 지원해 주십쇼』
원경장이 다시 말했다. 잠시 후 전화를 끊은 원경장은 『알아서 하래』라고 대장의 말을 전했다. 권총과 실탄의 지급 그리고 정규 對테러요원의 지원요청이 거절당한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동네 후배들을 불러 신창원이 강순희와 묵고 있는 빌라를 덮치게 된 것이다.
경찰도 최선 다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막연하나마 건달을 동원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렇지만 신창원의 소재가 발견됐다고 보고하는데도 무기와 지원병력을 거절한 사실은 납득하기 힘들다. 그들 중 한쪽은 거짓말로 남게 될 것이다.
『평택 신장동의 빌라로 가서 신창원을 덮치던 날 상황을 얘기해 주시죠』
내가 물었다. 나는 신창원의 입으로 그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들었었다. 이번에는 당시 출동한 경찰관에게 그 사실을 확인하는 셈이었다. 내가 金경장을 자극할 만한 질문을 먼저 이렇게 던졌다.
『신창원의 말로는 원경장과 金경장 그리고 후배들이 신문보급소 직원이라고 하면서 들어왔는데 원경장은 남고 金경장은 먼저 뒤로 도망을 했다고 하던데요』
대개의 형사들은 무력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본성이 있다. 그 반대로 꼬집을 때 그들은 자존심을 상해 하며 튀기도 한다. 그 반응이 알고 싶었다.
『예, 맞습니다. 그때 제가 그 빌라에 들어갔었습니다. 싱크대 앞에 신창원이 있는 게 보였습니다. 순간 저는 「그래 너는 이제 끝났다」 하고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싱크대 도마 위에 긴 회칼이 보이고 신창원이 그걸 들고 우리한테로 오는 거예요. 그걸 보고 저는 후배들하고 도망을 쳤습니다』
그가 솔직하게 말했다. 의외였다.
『왜 도망했어요?』
내가 물었다.
『무기가 없었습니다』
그가 약간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얘기를 계속했다.
『그때 원경장이 신창원에게 새로 구한 가스총을 쐈어요. 멧돼지도 기절시킨다는 강력한 총이었어요. 그런데 신창원이 끄떡도 하지 않는 거예요. 원경장이 당황해서 권총을 신창원에게 던졌어요. 신창원이 그 권총을 받아서 원경장에게 겨눴어요. 원경장은 그걸 보고 「총이다」 하고 도망나왔어요』
신창원이 내게 설명해준 부분과는 약간 달랐다.
『신창원은 원경장이 바닥에 넘어진 걸 보고 「빨리 꺼져」라고 말했다던데…』
내가 물었다.
『그건 신창원이가 교활하게 말한 거 같고, 사실은 원경장이 뒤로 물러나오면서 휘청거리기는 한 것 같아요』
『내가 한 방에 캑 하고 나가 자빠졌다고요?』
어느 쪽이나 상관없었다. 그 정도면 상황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일선 경찰관으로서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다. 경찰관과 범인의 검거과정을 보면 묘하게 상반된 얘기들을 들을 수 있다.
1989년 신창원이 강도치사죄를 저지를 때 그를 검거한 경찰관은 은형사였다. 이정훈 기자가 은형사에게서 검거 당시의 상황을 듣고 기록한 내용은 이랬다.
<『신창원이는 나 혼자 잡았소. 그때 나는 정보원을 통해 신창원이 나타나는 곳을 알고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었소. 신창원이 들어오는 순간 「경찰입니다. 신분증 좀 봅시다!」 하자 신창원은 「학생인데요」 하며 학생증을 꺼내려는 척 손을 안으로 집어 넣더군요. 그 순간 나는 선방을 올렸고, 신창원은 캑하며 나가 자빠졌죠. 그렇게 해서 수갑을 채워 청량리 경찰서로 데려온 것입니다. 당연히 신창원의 품 속에는 학생증이 아니라 회칼이 숨어 있었어요』>
이 글의 내용을 신창원에게 보였었다. 신창원의 대답은 이랬다.
『내가 한 방에 캑하고 뻗었다고요? 그 형사 내 앞에서 10초만 정상적으로 버티고 있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집니다. 그때 형사 끄나풀을 하는 건달이 나를 레스토랑에서 만나자고 했어요. 멋모르고 가서 얘기를 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목을 졸랐어요. 기절했다가 잡히고 보니까 뒤로 양손에 수갑이 채워져 있었어요. 청량리 오팔팔 창녀촌에서 여자애들 피 빨아먹는 포주나 건달이었어요. 경찰 끄나풀하는 야당 아이들 20명이 동원돼서 나를 잡은 거예요. 나를 잡았다는 형사는 제가 정신차려서 묶여 있을 때 나타나서 신분증 한번 쓱 보여 준 게 다예요. 그런데 한 방에 내가 캑 하고 나가 자빠졌다고요?』
극과 극을 달리는 상반된 진술이었다. 형사로서는 검거만 하면 되고 방법에 너무 좌우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근육에서 오는 원색적인 힘을 과시하는 면이 있는 신창원으로서는 듣기 싫어하는 소리 같았다. 어쨌든 이 얘기는 곁가지니까 본 얘기로 넘어가겠다.
평택 신장동의 ㄴ빌라에 있던 신창원을 놓치고 이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일부 경찰관이 특진에 눈이 어두워 개인적으로 행한 경솔한 행동으로 결론지어졌다. 元경장과 金경장 두 사람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배제해임되었다. 조직에 필요 없으니 나가달라는 얘기였다.
『솔직히 말해서 상부에 보고도 다 했는데 대장이 권총과 실탄을 주지 않아서 놓쳤던 거예요. 무기가 있었으면 절대 실패하지 않았다니까요. 왜 그때 권총을 안줬는지 모르겠어요』
金경장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억울해 하니까 주위에서 소청하면 살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더라구요. 외형적으로만 해임이지 몇 달 후면 산다는데 구태여 사실을 까발려서 좋을 일이 뭐 있겠습니까? 모두 내가 뒤집어 썼죠』
『소청에서는 그 결과가 어떻게 됐어요?』
『나마저 거기서 구제하면 경찰에서 책임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꼴이 됐어요. 결국 해임확정 쪽으로 결론이 나더라구요. 퇴직금은 바로 지급해 주더라구요. 그 돈을 투자해서 행정소송을 제기했어요. 경찰 자체에서 하는 것보다 차라리 법원의 재판이 공평한 셈이죠. 원경장이 울면서 증언도 해주고 해서 일심에서 승소했는데 경찰측은 나를 자르려고 상고까지 하더라구요. 저도 하는 수 없이 상고해서 거기서도 승소판결을 얻었어요』
金경장은 1999년 4월2일 승소판결을 근거로 복직했다. 그러나 경찰은 그가 보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사유로 다시 정직 1개월의 징계처분을 내렸다. 그는 4월23일부터 5월23일까지 다시 업무를 할 수 없었다. 정직 기간이 끝난 1999년 5월24일부터 그는 안성경찰서 대덕파출소에 근무했다.
그로부터 두 달 보름 후인 7월16일 신창원이 검거됐다는 사실이 톱뉴스로 모든 일간지와 방송에 보도됐다. 그가 잡으려 했던 신창원이 검거된 사실에 대해 아쉽기도 하고 마음이 홀가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압수된 신창원의 일기 속에 자신이 신창원의 첫 여자 박혜숙을 강간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걸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강간범」이 된 金경장?
1999년 7월18일 밤 9시. 金경장은 안성의 대덕면 일대에서 순찰을 돌고 있었다. 그때 파출소에서 무전으로 연락이 왔다.
『경기청 강력계에서 빨리 들어오라는 지시입니다』
『무슨 일로 그래요?』
그가 물었다.
『그냥 빨리 올라오라고 그러는데요』
『알았어요』
金경장은 영문을 모른 채 바로 경기경찰청으로 향했다. 두 시간 후.
『박혜숙이와 성관계했지? 빨리 실토하지 그래』
2층 폭력계 사무실에서 하급자인 순경이 金경장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런 사실 없습니다』
그가 완강히 부인했다. 옆 사무실에 있던 반장이 그에게 다가와서 조용히 달랬다.
『어차피 망신당하는 거니까 공연히 시간만 더 끌지 말고 빨리 끝내지』
조사경찰이나 반장은 이미 그의 강간을 진실로 굳힌 것 같았다. 남은 것은 그의 자백과 서명뿐이었다.
『내가 말하는 건 진실이 아니고 박혜숙이 말만 사실입니까? 조직원인 경찰관의 말은 믿지 않고 그 여자 말만 믿는 게 충성한 사람에게 대해주는 보답입니까?』
분노와 실망감이 엄습했다. 고속도로에서 치기배를 잡기 위해 달리는 차에 덤벼들기도 했다. 조직폭력배 검거실적 일등도 해 봤다. 텔레비전 프로 「경찰청 사람들」에 출연해서 인정받을 때는 정말 경찰에 들어온 보람을 느꼈었다. 그러나 이제 비정한 조직의 본질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이 허탈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박혜숙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대질신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눈에서 불이 났다.
『지난번에도 너 때문에 죽었는데 이번에는 무슨 억하심정으로 또 나를 잡냐?』
金경장이 박혜숙에게 소리쳤다. 그녀가 움찔했다.
『했으니까 했다고 그러죠』
그녀가 옆의 형사들을 보더니 기운을 얻었는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사관들의 얼굴에 「그것 봐라」 하는 득의만면한 표정이 돌았다. 이어서 박혜숙이가 1997년 11월3일 새벽 2시경에 강간당했다는 내용들이 그녀의 진술에 의해 상세하게 기록되기 시작했다. 金경장은 11월2일 저녁에 잠복에 들어간 사실이 없었다. 그날 파출소 무기고에 총기를 반납시켰고, 그 기록도 있는데 아예 무시당했다. 수사는 결론을 내려 놓고 짜맞추는 것이었다고 한다. 金경장이 부인하면 조서진행이 정지됐다. 자백조서를 받겠다는 뜻이었다.
『정말 이러면 박혜숙이한테 고소장을 받아서 구속시켜 버릴 꺼야』
자백하면 파면으로 끝나고 계속 부인하면 강간범으로 형사구속시키겠다는 말도 나왔다.
『차라리 그렇게 해 주십시오』
金경장이 말했다. 차라리 검찰에서 조사를 받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지 말아. 신창원의 일기, 그리고 박혜숙의 말이 증명력이 있지 자네의 진술을 믿을 것 같아? 그러니까 자꾸만 버티지 말고 그만 인정하지. 서로 더 이상 피곤하지 말자구』
『안한 걸 어떻게 설명합니까?』
『인정 못합니다. 죄가 있다면 신창원이를 놓친 겁니다. 어차피 지난번에 당해봐서 아는데 이제 더 이상 이 조직에 미련이 없어졌습니다. 미안하다면 제 어머니나 처자식에게 잘못했지, 경찰조직에 미안할 건 하나도 없어요』
막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미칠 것 같았다. 그의 격정을 눈치챈 감사계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기자들이 냄새를 맡고 왔으니까 자리를 옮기자』
조사관들이 그를 위하는 척하면서 경찰청 본관 4층의 거짓말 탐지기실로 장소를 옮겼다. 그의 짐작으로는 특수유리창 저편에서 박혜숙과 경찰간부들이 조사받는 그를 바라보려고 그런 것 같았다.
『성관계를 안 했다는 사실을 내가 납득할 만하게 설명해 봐』
감사계장이 다시 다그쳤다.
『강간을 했다면 설명하지만 안 한 걸 어떻게 설명합니까?』
金경장이 답답한 마음으로 말했다.
『거 봐, 자네가 결국 나를 납득시키지 못하잖아』
칼로 확 가슴이라도 열어보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무 일도 없게 해 줄게. 그리고 언론에도 터지지 않을 거야. 안심해』
감찰계장이 방향을 바꾸어 회유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조서에 서명무인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날 저녁 다섯시 반 경찰의 수사결과 발표가 있었다.
<경기지방경찰청은 24일 탈옥수 신창원의 전 동거녀를 성폭행한 것으로 드러난 안성경찰서 대덕파출소 소속 김아무개(30) 경장을 파면조치했다. 金경장은 지난 1997년 11월 초 신을 검거하기 위해 충남 천안시 목천면 H빌라에서 3일간 잠복근무하면서 신의 전 동거녀 朴아무개(31)씨를 성폭행한 것으로 경찰 자체조사 결과 밝혀졌다>
『언론에서 떠드는 대로 결론을 정해놓고 짜맞추기 수사를 하는 게 경찰이에요. 언론은 이슈거리를 요구하죠. 경찰은 거기 맞추어 주지 않으면 엉뚱한 간부들이 줄줄이 알사탕으로 다치니까 나 같은 놈 하나 희생양으로 잡아 없애는 게 상책이죠』
『몸을 준다고 해도 거절할 것』
그가 허탈한 표정으로 결론지었다.
『징계위원회에서는 어땠어요?』
『징계도 이미 파면을 결정해놓고 하는 요식행위인데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거기서 강간한 일이 없다고 부인하면 되잖아요?』
『물론 했죠. 그랬더니 조사할 때는 도장 다 찍어놓고 왜 이제 와서 다른 소리를 하느냐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인데 더 이상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이 의리 없는 조직에는 조금의 미련도 이제는 없다니까요』
말을 끝낸 그가 설움에 복받쳤는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가 우는 소리로 내게 이렇게 항의했다.
『저는 명령에 따라 잠도 못 자 가면서 최선을 다했어요. 보고도 했고 권총도 달라고 사정했어요. 그런 여자는 거저 몸을 준다고 해도 거절하겠어요. 그런데 강간범으로 몰아 두 번 파면시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우리 경찰의 높은 사람들은 어떤지 아세요? 택시운전기사의 신고사실을 은폐했던 간부는 오히려 영전했어요』
그의 격정과 분노하는 태도 속에는 분명히 진실이 숨어 있었다. 강간죄는 고소가 있어야 처벌할 수 있다. 그녀는 고소하지 않았다.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金경장의 어머니에게 박혜숙은 사과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말해 주신 것 중에 어떤 것을 비밀로 하고 어떤 것을 발표할까요?』
내가 물었다.
『사실 형사기동대장님이 저를 무척 귀여워해 주셨습니다. 그분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에 여태껏 입을 다물었어요. 그렇지만 더 이상 파렴치범이 되지는 않으렵니다』
독오른 그가 내뱉었다. 그가 한 마디 덧붙였다.
『전부 다 저에게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하라고 해주십쇼. 그러면 법정에서 정면으로 붙어 보겠습니다. 누가 사실인지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걸 꼭 보여줄 테니까』
강간범 신창원
강간범은 만들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객관적인 수사를 통해 밝혀지는 것인가? 金경장의 강간과 대칭이 되는 신창원의 강간 부분이 있다.
1999년 8월5일자 한 일간지에는 이런 박스 기사가 났다.
<『탈옥수 신창원의 파렴치한 면모를 남김없이 밝혀 주겠다』
신창원의 조사를 마치고 나온 경찰 관계자의 말이다. 경찰은 이를 증명이나 하듯이 신창원이 지난해 7월 충북 청주에서 30대 金아무개씨를 성폭행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야 이건 해도 정말 너무하다』
신창원이 내가 보여주는 기사를 보며 혀를 찼다.
『믿어주세요. 이 기사는 거짓말한 겁니다. 저는 청주에 산다는 이 여자를 강간하지 않았어요. 정말입니다』
그가 호소하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일간지의 이런 내용의 기사 하나를 내놓았다.
<신창원이 청주시에서 부녀자를 성폭행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파렴치범임이 거듭 확인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경찰관이 신의 동거녀를 성폭행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경찰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자 이를 희석시키기 위해 성급히 발표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신창원이 일기로 金경장의 성폭행을 폭로한 데 대한 경찰의 보복을 의심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또다른 기사는 이랬다.
<탈옥수 신창원이 강절도 외에 가정집에 침입해 성폭행한 것까지 드러났다. 이에 따라 그동안 극형 구형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던 신은 상습강도와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법」상 「특수강도강간」 규정에 의거, 최고 사형까지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예 죽이려고 작정을 했군. 죽어주지. 그렇지만 진짜 청주에 산다는 여자, 강간은 하지 않았는데…』
그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내뱉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접견실에서 그에게 기사 한 장 한 장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제가 사실 성욕이 강한 놈입니다. 그렇지만 강한 만큼 절제도 할 줄 압니다. 남의 집에 들어가 보면 여자가 발가벗은 건 흔하고요, 별 짓을 하는 것도 봤어요. 정말 강간하려고 했으면 한두 번 했겠어요. 그렇지만 저는 강간하지 않았어요』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가 덧붙였다.
『변호사님, 경찰이 저를 파렴치범으로 몰아 죽이고 싶은 모양입니다. 죽는 거는 상관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친구들한테 모함받아 죽지는 않겠습니다. 법정의 최후진술 시간만 확보해 주십시오. 그때 제가 경찰이 듣기 싫어한 범죄를 제 입으로 자백하겠습니다』
그의 눈에서 불이 번쩍였다.
접견권과 수사권
그때 교도소 과장이 접견실로 들어섰다. 허리에 걸친 가죽지갑에서 권총이 음산한 빛을 뿜고 있었다.
『저 잠깐만 얘기하실까요』
그가 나를 보고 말했다.
『그러시죠. 말씀하세요』
내가 대답했다. 그가 신창원의 얼굴을 힐끗 보더니, 『잠깐 밖으로 나오시죠』라고 말했다. 접견 도중 교도소 책임간부가 와서 변호사를 밖으로 나오라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과장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지금 경찰청 특수수사팀에서 조사하러 왔는데 양보하시면 안되겠습니까?』
신창원을 그만 만나라는 것이었다. 형식은 권유 같았지만 사실상의 강요였다. 법적으로 변호사의 접견권이 수사권에 밀려야 할 이유도 없었다. 불쾌했다. 권위주의의 냄새가 풍겼다.
『안 되겠는데요』
내가 고개를 흔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강간 부분을 집중조사하러 일부러 서울에서 내려온 수사팀인데요, 웬만하면 변호사님이 이해하시죠』
그가 다시 재촉했다.
『저도 서울에서 내려왔습니다. 변호사로서 지금 접견권을 행사하는 중인데 기다리라고 하시죠』
내가 버텼다.
『그러지 마시고 양보하시죠. 많이 접견하셨잖습니까』
간부가 다시 말했다.
『그렇게 생각대로 꼭 하고 싶으면 저를 강제로 들어내세요. 힘으로 하면 어쩔 수 없겠지요』
『아니 뭐 그렇게까지야…』
그가 얼버무렸다.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강간 부분의 조사라면, 볼 수만 있다면 정말 귀중한 현장이 아닌가. 내가 말을 바꾸었다.
『강간 부분 조사에 입회할 수 있다면 양보할게요』
『입회는 곤란할 걸요…』
과장이 말했다. 어차피 그것은 그의 관할은 아니었다.
『아니 수사관들이 강제로 내쫓으면 할 수 없지만 그 정도가 아니면 수사상황을 지켜 보겠습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수사팀들이 웅성거리며 들어서기 시작했다.
『먼저 가리개를 설치해야겠는데. 피해자가 신창원 뒤에서 얼굴을 확인해야 하니까』
사십대 말쯤으로 돼 보이는 형사가 말했다. 이어서 교도관들이 철책상 주위로 베니어로 된 가리개를 둘러쳤다. 신창원이 앉게 될 걸상의 뒤쪽 가리개 사이에 아주 작은 틈을 만들어 놓았다. 성폭행을 당했다는 여자가 그 사이로 신창원의 얼굴을 살짝 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변호사가 참여하면 나중에 더 조사가 신빙성이 있겠네』
중년으로 보이는 특별조사팀의 팀장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특별 수사팀은 뚱뚱한 중년의 남자가 두 명, 젊고 미남인 형사 1명, 그리고 강력계에만 7년을 근무했다는 여형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특별 수사팀과 간단한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 구석에 있는 소파로 가서 앉았다.
사명감에 불타는 女형사
여형사가 여자 두 명과 함께 옆에 앉았다. 찌는 듯한 날씨로 서성이는 형사들의 얼굴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이거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15일간 수사하는데 미칠 지경이네. 우리같은 형사 인생은 누가 보상해 줄 거야』
미남인 젊은 형사가 밝은 표정으로 들으라는 듯 말했다.
『어디 소속이세요?』
내가 앞에 앉은 여형사에게 물었다. 검은색 바지와 티셔츠의 활동적인 차림이었다. 사명감에 불타는 눈빛이었다.
『강력계에만 7년을 근무했어요. 주로 절도범들의 수법을 연구하고 우범지역에 網(망) 부식도 합니다. 자료들을 만들어 놓으니까 어떤 수법의 범죄가 발생했다 하면 대강 어떤 자들이 그랬나를 추측할 수 있어요』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프라이드가 있는 일선 경찰관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내 옆에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이십대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얼굴 여기저기에 붉은 여드름이 보였다. 여형사 옆에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약간 뚱뚱한 여자가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입술에 붉은 루즈를 바른 그녀의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직감적으로 신문에 보도된 피해자라는 여자와 신창원이 서울 강남구 양재동에서 함께 살림을 한 여자라는 걸 느꼈다. 오전에 신창원이 나에게 고백한 게 머리에 떠올랐다. 영등포 역전 근처 창녀촌에서 만났다는 것이었다. 양재동에 방을 얻었는데도 기둥서방과 그 사이를 왔다갔다하더라는 것이었다. 신창원은 도망자 신세를 미끼로 그녀에게 이용당했다고 말했었다. 신문보도에 나온 경찰에 협조하겠다는 그 여자였다. 여형사가 우범지역에 첩자들을 부식한다는 말과 그녀가 영등포역 앞 창녀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면 이분이 영등포역 동네에서 신창원과 만나 살림을 차렸던 그 여잡니까?』
내가 여형사를 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여형사가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내가 옆으로 얼굴을 돌리며 인사했다. 그녀가 순간적으로 바짝 긴장했다. 내게 강한 적대감을 보이는 눈빛이었다. 객관적 증인이라기보다는 이미 경찰 편에 철저히 선 느낌이 들었다. 서울경찰청의 여형사가 창녀촌에 부식해 놓은 망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일었다. 신창원으로부터 그녀가 경찰도 이용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저 분은 피해자십니까?』
내가 여형사 옆에 있는 삼십대 중반쯤의 뚱뚱한 여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 유부녀신데 강간의 피해자입니다. 남편도 지금 여기 온지 몰라요. 저희에게 수사협조를 하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여형사가 부인임을 특히 강조했다. 신문보도에는 다방종업원으로 나와 있었다. 하기야 다방종업원과 유부녀가 양립 못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니까.
『안녕하세요』
내가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 역시 나를 경계했다. 그때 팀장으로 온 사십대 쯤의 노련한 남자가 다가왔다.
『여기 계시는 이분은 신창원의 변호사입니다. 두 분은 묵비권을 행사하셔도 되죠』
팀장은 능란하게 여자들의 입을 단속했다. 수사나 재판에 있어서 증인은 누구 편이 아니다. 진실을 얘기하면 그뿐이다. 누구 편이다라는 인식을 가지면 이미 그 자체가 공정하지 못하다. 자기편의 의도에 맞는 말이나 대답을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변호사는 죄를 감춰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경찰하고 방향은 다르지만 진실을 역시 밝히는 입장입니다. 만약 신창원이 두 분에게 잘못했다면 사과하게 해야 하는 겁니다』
내가 설명했다.
『…!!…』
둘은 짜기나 한 듯 완강하게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윽고 수사할 준비가 다 됐다.
고개를 갸웃
교도관들이 신창원을 칸막이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철제의자에 앉혔다.
『지금 순간이에요. 일어나서 나를 따라오세요』
여형사가 강간 피해자라는 뚱뚱한 여자에게 속삭였다. 그들이 소파에서 일어나 칸막이 틈으로 갔다. 나도 얼른 그들을 따랐다. 피해자가 신창원을 보는 순간의 표정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었다. 찰나적인 얼굴 표정이 가장 정확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흥분했는지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조심조심 칸막이 틈으로 눈을 접근시켰다. 숨막힐 듯한 긴장감이 돌았다. 신창원은 그녀가 보는지도 모르고 무심히 앞쪽을 향해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눈을 뗀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 없는 표정이었다. 그녀가 다시 한번 칸막이 틈으로 얼굴을 들이댔다. 그리고 나선 다시 얼굴을 좌우로 흔들면서, 『눈매는 비슷하기도 한 것 같은데…』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분명히 읽었다.
『강간범이 저 사람 확실히 맞습니까?』
내가 피해자라는 뚱뚱한 여자에게 조용히 물었다.
『정확히 잘 모르겠어요』
그녀가 경계심이 사라진 표정으로 얼버 무렸다. 그녀가 덧붙였다.
『남자한테 당하긴 당했는데 나중에 전단을 보니까 비슷한 것 같기도 했어요…』
『왜 약속 어겼어요?』
잠시 후 정식으로 조사가 시작됐다. 하얀 티셔츠를 입은 미남형사가 주무 조사관이었다. 그 뒤로 강력계 여형사가 배치됐고 팀장으로 보이는 간부급들은 그 앞과 옆의 의자에 앉았다. 수사팀 중 한 사람은 비디오 촬영 담당이었다. 카메라의 앵글이 내 쪽을 수시로 향했다. 이렇게 변호사까지 입회한 가운데 공정한 수사를 했다는 근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주무 조사관의 맞은편에서 신창원이 냉랭한 표정으로 주무 조사관을 직시하고 있었다.
『왜 약속을 어겼어요?』
신창원이 조사관에게 먼저 따지듯 물었다.
『무슨 약속?』
조사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일단 여자들을 터치하지 않기로 약속 했잖아요? 그래서 내가 다 불어줬는데 왜 여자들을 구속했죠?』
신창원의 눈이 배신감으로 이글거렸다. 변호사인 내 앞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주무 조사관도 만만치 않았다.
『이봐. 신창원씨 조사한 경기청에서 얼마나 후카시를 넣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따지지 마. 우리는 서울청이니까』
『…!!…』
신창원이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는 태도였다.
『그러면 내가 써 준 먼젓번 진술서 가져왔어요?』
신창원이 따졌다. 아마 담당 조사관이 약속을 어겼으니까, 자신의 진술서도 철회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신창원! 이거 왜 이래? 그렇지 않아도 윗사람들 잔소리 듣기 싫어 죽겠는데 나를 수사지휘하는 거야 뭐야』
형사가 짜증스런 어조로 되쐈다.
『알았어요. 그럼 조사하세요』
신창원이 그 말에 한풀 기가 꺾인 채 말했다. 그에 대한 의례적인 인적사항의 확인이었다. 담당 형사가 그 사항을 조서 위에 또박또박 써 내려갔다. 잠시 후, 주무조사관은 『대질할 테니까 자 이리 오세요』라고 옆에다 소리쳤다. 먼저 양재동에서 신창원과 살았던 청바지 여자가 주무형사 옆자리로 왔다.
『고개 돌리고 앉아요. 대질한다고 얼굴을 마주 댈 필요는 없으니까』
형사가 그녀의 편의를 봐주었다.
『그 뒤에는 피해자 분이 앉으시고』
청바지와 피해자라는 여자가 앞뒤로 나란히 앉았다.
『자 김○○씨, 이 앞에 있는 사람 알죠? 누구죠?』
담당 형사가 물었다.
『신창원이오』
그녀가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이 사람이 여자를 강간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죠?』
『네!』
『언제 어떻게 강간을 했다고 하던가요?』
형사는 조서에 문답 형식으로 또박또박 적어 나갔다.
『1998년에 양재동에서 동거하고 있을 때였어요. 신창원이 저보고 창문이 열린 틈으로 여자를 보고 성욕을 느껴서 강간을 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강간을 하고 둘이서 얘기를 나누었는데 여자가 나중에 1백달러짜리 한 장을 달라고 하더래요. 그러다가 다시 괜찮으니까 그냥 가라고 하더래요』
그 말을 앞에서 듣는 신창원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형사의 신문이 계속됐다.
『신창원이와 함께 살 때 섹스를 했죠?』
『네』
『신창원이 좋아하는 체위라든가 다른 성적 특징은 없었나요?』
『신창원이 오럴섹스를 좋아했어요』
『해달라고 하는 편인가요, 해줬나요?』
『자기가 원하기도 하고 또 내가 해주기도 했어요』
『또다른 특징은요?』
『애무가 길었어요』
형사가 볼펜으로 한 자 한 자 적어 나갔다. 섹스의 특징을 묻는 것으로 보아 이미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점진적으로 질문의 벽돌을 쌓아 올리는 것 같았다.
『성기의 특징은요?』
『야 이거 팔이 아파 못쓰겠다』
담당형사가 팔을 털며 투덜거렸다. 찜통 같은 더위였다. 조사실은 바람 한 점 없었다. 앞쪽에 앉은 나이 먹은 형사가 하품을 했다. 지친 눈이 가물거렸다. 마른 몸집의 사복 경찰관이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조사광경을 찍고 있었다. 앵글이 내 쪽에 와서 한참을 머물다 가곤 했다.
『성기에 특징은 없었습니까?』
형사가 청바지에게 질문을 계속했다.
『거기에 다마가 두 개…』
여자가 말했다.
『그러니까 성기에 구슬이 두 개 달렸더란 말이죠』
『네…』
형사가 신창원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이 봐 창원이 맞아? 어디 박았어?』
형사는 직접 눈으로 확인이라도 할 듯 신창원의 하체로 시선을 향했다.
『네. 아랫부분에 두 개 있습니다』
신창원이 대답했다. 그 말에 형사가, 『성기의 아랫부분에 구슬이 두 개 달렸습니다라고 대답했지』라고 확인했다.
청바지의 뒤에서 피해자라는 여자가 질문 대답상황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자 그럼 이번에는 피해자와 대질하도록 하겠습니다. 얘기 들으셨죠?』
형사가 말했다.
『예…』
피해자 여자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단도 직입적으로 물을게요. 강간당하고 돈 뺏긴 적 있죠?』
『네』
『언제 어디서 당했나요?』
『1998년 7월 초에 우리집에서 당했습니다』
『어떻게 당하셨나요?』
『새벽 세시 반쯤 범인이 창문을 뜯고 들어왔습니다. 손에는 칼을 들고 안경을 쓰고 있었어요. 저를 강간하고 지갑 속에 있던 돈 8만원을 가지고 갔어요』
피해자 여자가 외웠다는 듯 대답했다.
『구슬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자, 내 앞에 있는 남자가 누군지 아시죠?』
형사가 물었다.
『신창원이오』
여자가 즉각 대답했다.
『그건 우리가 다 아는 이름이구요. 그렇게 말하지 마시고 저 남자 전혀 본 적이 없는 남자예요?』
형사가 여운을 띤 어조로 물었다. 그가 재차 물었다.
『당시 강간했던 사람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겠어요?』
『그때 모습으로는 알 수 있겠는데…』
피해자 여자가 자신없는 어조로 어물거렸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시고 저사람이 그때 봤던 사람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형사가 다시 물었다.
『글쎄요… 눈 있는 데는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그때 신창원이 끼어들었다.
『저를 봐야 할 거 아닙니까? 자세히 보라고 하십시오』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아까 이미 봤어요』
뒤에 앉았던 여형사가 소리쳤다.
『봤어요?』
신창원이 물었다.
『칸막이 뒤에서 봤단 말예요』
여형사가 대답했다.
『봤으면 됐어요…』
신창원이 한 풀 물러났다.
『창원이!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 지금 내가 수사중이야. 과장 계장한테 잔소리 듣는 것도 지겨운데 자네한테도 이래라 저래라 소리를 들어야겠어?』
담당형사가 소리쳤다. 그때 여형사가 뒤에 앉았다가 담당형사 옆으로 다가가 뭐라고 귓속말을 한다. 아마 추가 신문사항을 제시하는 것 같았다. 담당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간을 당할 때 남자에게서 느껴진 무슨 신체적 특징이 없었습니까?』
형사가 물었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강간당하시면서 어떤 느낌을 받았다면 말해 보세요』
형사가 다시 말했다.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성기에 구슬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피해자가 말했다. 어느새 그 여자가 세뇌된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들었다. 흘러가는 상황에 따라 대답을 해버리는 것 같기도 했다. 조서에는 대답하는 여자의 태도나 어조가 적히지 않았다. 나중에 그걸 읽는 판사는 기가 막힌 두 명 증인의 일치된 진술이 확보되는 순간으로 볼지도 모른다. 정말 중요한 현장에 있다는 느낌이었다.
『급한데 옷 벗고 하나?』
『진짜 내가 많이 참고 있다니까요』
신창원이 서늘한 냉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가 덧붙였다.
『강간으로 몰려면 먼저 정액채취를 해서 검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정액이 이불에 묻었을 수도 있고 여자 옷에 묻었을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억지로 여자들 시켜서 말로 꾸며대지 말고 과학적으로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 말에 여형사가 나섰다.
『강간당한 여자들이 단번에 나 강간당했습니다라면서 나서는 거 봤어요? 창피하니까 입다 물고 있다가 마지못해 얘기하는 거지요. 그런데 어디서 정액채취를 하겠어요?』
여형사가 다부지게 대응했다.
『나 분명히 말하는데 강간은 하지 않았어요. 이러지 말아요』
신창원이 여형사에게 따졌다.
『그건 당신 주장이고. 우리도 경찰관 직을 걸고 끝까지 수사하는 거니까 그 성패는 법원에서 판단하지 않겠어?』
『좋습니다. 그러면 여자가 구슬까지 느꼈다면 내 몸에 있는 다른 건 왜 얘기하지 않는 겁니까? 당연히 그 말이 나와야 하지 않나요?』
이때 담당형사가 끼어들었다.
『이 사람아, 강간할 때 급한데 몸 다 보여주고 즐기면서 할 수 있나?』
신창원이 지지 않고 결사적으로 대꾸했다.
『제 얼굴은 특징이 있어서 남들이 한번 보면 잊지 않아요. 다시 좀 자세히 보고 진술하라고 해주세요』
『자네는 기억력이 좋아서 본 사람은 다 기억하는지 몰라도 나는 이 교도소를 몇 번이나 와서 창원이를 봤는데도 모르겠어. 그런 말 하지 마』
담당형사가 신창원을 제지했다. 형사가 청바지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자 사실대로 모든 것을 진술하셨나요?』
『사실대로 진술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서명무인하시죠』
형사가 인주를 그녀 앞에 내놓았다. 그녀가 조서 끝에 이름을 쓰고 지장을 찍었다.
『피해자분도 사실대로 진술하셨죠?』
『네…』
『남편도 계실 텐데 이렇게 멀리 와서 진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 서명무인하시죠』
형사가 서류를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창원이도 여기 무인 찍어야지』
『난 강간한 사실 없어요. 이래도 되는 거예요? 불겠다는 건 불지 말라고 하고 안 한 건 했다고 만들고. 나 정말 많이 참는 거예요』
신창원이 말했다.
『아 그거야 법정에서 판사님들이 가릴 일이고』
형사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정말 섹스할 때 구슬을 느꼈어요?』
다시는 피해자라는 여자를 보기 힘들 것 같았다. 그리고 이왕 조서에 말을 뱉어 놨으니까 만약 사실이 아니더라도 이제는 끝까지 우길 것이다. 나는 칸막이 뒤로 돌아 피해자로 온 뚱뚱한 여자에게 소리 없이 다가갔다.
『그때 옷을 다 벗었어요?』
내가 물었다.
『아니오』
그녀가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정말 섹스할 때 구슬을 느꼈어요?』
『그런 것 같아요…』
그녀가 쑥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어느새 모든 게 기정사실이 되어 버렸다. 형사들이 득의만면한 표정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여형사에게 간단히 몇 마디 더 묻고 싶었다. 진짜 신창원이가 강간을 하고 교활하게 끝까지 부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경찰이 혐의를 두고 몰아붙이는 데 참고인이 분위기에 휩쓸려 착각하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현장의 분위기가 전혀 없이 단정적으로만 쓴 진술조서를 보는 판사는 아마도 강간에 대해 확신을 가지기 쉬울 것이다. 내가 여형사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떻게 강간을 조사하게 됐습니까?』
『청주 부근의 연립주택에서 강간사건이 있었습니다. 저희들의 추리로는 신창원이가 그곳을 지날 때하고 시간이 일치된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일단 강간혐의를 두고 추궁해 가는 거죠』
여형사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말에 신뢰가 갔다.
그녀가 계속했다.
『처음에 파출소에 신고되지는 않았어요. 여자들이 보통 자기가 당한 걸 말하지 않잖아요? 그러다가 나중에야 강간사건이 발생한 걸 알게 됐어요』
새벽 세시 반 어두운 상태에서 강간당한 남자의 얼굴을 일년이 지난 후에 명확히 기억할 수 있을까? 또 성기에 구슬이 있다는 것을 가정부인이 정신없이 강간당하는 순간에 느낄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비뇨기과 전문의들은 여자들이 섹스를 할 때 느낌상으로 남자의 성기를 파악하기 어렵다고 했다. 외설소설에 나오는 건 현실과 다르다는 의견이었다. 직접 보고 만지지 않는 이상 남자의 성기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의학적인 소견이라는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 나는 원로법관이었던 이시윤씨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특히 강간사건을 많이 재판했다. 남자 경험이 엄청 많고 대담하지 않고는 강간한 남자의 얼굴을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모르더라는 것이었다. 수사팀이 나가고 다시 신창원과 마주 앉았다. 그는 마음 속으로 흔들리는 내 모습을 눈치 챈 것 같았다.
『변호사님, 정말 강간은 하지 않았어요. 믿어주세요』
신창원의 논리적 항변
그의 눈빛이 간절했다. 그가 계속했다.
『참 변호사님, 아까 피해자라는 여자가 내가 강간을 하러 들어가는데 안경을 쓰고 들어갔다고 진술한 것도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요 전단에 안경을 쓴 모습이 워낙 많이 나와 있어서 그렇지, 난 안경을 쓰고 다니지 않았어요. 그 여자가 완전히 전단에서 본 내 인상을 보고 말하는 거 같았어요』
신창원의 표정에 억울함이 비쳤다. 그가 얘기를 계속했다.
『경찰에서 여태까지 내 범죄수법을 확인하면 잘 알 거예요. 전 그전에 어떤 집에 들어갈 때도 칼을 들고 들어간 적이 없어요. 이번에 강도할 때 처음으로 칼 든 거 빼고는요. 그런데 그 여자는 내가 칼을 들고 왔다고 진술하잖아요? 형사들이 내 범죄수법을 한번만 살펴보면 당장 알 텐데 안해요. 그리고 정말 강간을 할 것 같았으면 내가 복면을 하지 왜 얼굴을 뻔히 들고 하겠어요』
신창원의 말이 오히려 논리적이었다. 강간을 인정하게 하는 데 급급해서 아니라는 증거에 대해서는 거의 무시하는 수사였다.
『구슬보다 더한 제 신체적 특징이 있어요. 그런데 피해자라는 그 여자는 전혀 말도 못해요』
『어디 한번 벗어봐요』
내가 말했다. 신창원이 일어서서 내 앞에서 옷을 벗었다. 성기 주변에 누가 봐도 금방 눈에 띄는 특징이 있었다. 피해자라는 여자가 왜 그건 얘기하지 않았을까.
『그여자가 정말 나한테 강간당했다면 관계하는 시간 동안 이걸 보지 못했겠어요? 그리고 내가 강간하고 돈 8만원을 가져갔다고 하는데 도대체 알 수 없어요. 그때 저는 돈이 3천만원 있었어요. 그런데 돈 8만원을 가져가겠어요? 제가 진짜 굶을 때는 잔돈이라도 훔치지만 있을 때에는 절대로 안 훔쳐요』
그의 말이 조리가 있었다. 그의 행동방식을 이해할 때 행위의 결과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변호사님 제가 교활하게 범죄를 부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 법정에서 오히려 여죄를 더 자백하겠어요. 나중에 판사님에게 말할 시간만 확보해 주세요』
그가 결심한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궁금한 게 있었다. 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 김○○의 태도였다.
『참 그런데 왜 김○○가 그런 진술을 하지?』
내가 물었다.
『저도 왜 그런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솔직히 저도 숨길 게 있고 얘기할 게 있잖아요? 어떤 남자가 강간했다고 하겠어요? 아직 내 여자로 만들지 못했는데. 아마 정들고 사는 여자한테도 그런 소리는 못할 거예요』
맞는 말이었다. 어떤 저의나 원한이 있지 않는 한 그런 얘기를 하기 힘들었다. 그가 얘기를 계속했다.
『○○하고 그 기둥서방이 날 아주 호구로 봤어요. 세를 얻을 때 보증금 1천4백만원을 줬어요. 또 ○○가 빚을 갚아야 포주한테서 풀려 나온다고 해서 1천만원을 주기로 했어요. 나하고 지낼 때도 수시로 나가서 기둥서방하고 지내고 왔어요. 그때 배신감이 느껴지더라구요. 그래서 떠나겠다고 했더니 현찰 1천9백만원 정도를 내놓으라고 했어요. 그때 기분에서는 정말 돈이 있어도 주기 싫은 기분이었습니다. 나를 철저히 이용하려는 거였으니까요. 그래서 나중에 온 라인으로 부쳐준다고 하고 부쳐주지 않았어요. 아마 나에게 감정이 있으면 그것 때문일 거예요. 걔는 경찰도 이용해 먹는 애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트렁크에 실려 빠져나간 두 여자
접견을 끝내고 신창원을 그의 감방으로 보냈다. 교도소가 주간 근무를 종료하는 시각이었다. 숙소로 가기 위해서 교도소 마당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마당 한 구석에 세워둔 앰뷸런스 뒤에 이상한 게 보였다. 김○○와 피해자라는 여자가 가지 않고 바퀴 옆에 쪼그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 옆에서 수사관들이 문쪽을 보면서 정찰하는 모습이었다.
『왜 거기 숨어 있어요?』
내가 물었다.
『밖에 기자들이 와 있대요』
형사가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교도소에 부탁해서 이 앰뷸런스를 빌리지 그래요』
내가 말했다.
『앰뷸런스를 빌려서 여자들을 태워 나갔으면 좋겠는데 교도소 측에서 안 빌려줘요』
형사 한 사람이 원망스런 어조로 대답했다. 형사 한 사람이 궁리를 하더니 입을 열었다.
『하는 수 없다. 박형사는 밖에 나가서 망을 보고 이 여자들은 우리 차 트렁크에 넣어 나가야겠다』
뚱뚱한 형사가 하얀 승용차의 뒷 트렁크 뚜껑을 열었다.
『들어가세요』
그가 강간의 피해자로 온 여자를 보고 말했다. 그 여자가 냉큼 트렁크 위로 올라가 옆으로 누웠다. 이어서 신창원과 함께 살았다는 청바지가 올라가 마주보고 누웠다. 두 여자는 서로 마주보며 씩 웃었다. 잠시 후 두 여자를 태운 차는 부산교도소 철문을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결론
아침에 자고 있는데 집으로 전화가 왔다. 방송국이었다. 생방송 진행중인데 한두 가지 질문을 할 테니까 대답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첫번째 질문이 시작되었다.
『도둑이 의적처럼 여겨지는 사회 분위기가 있고 이런 가운데 엄변호사의 태도에 대해 범죄를 미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또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진, 어떻게 보면 스타 범죄자를 변론함으로써 명망을 얻으려는 게 아니냐, 이런 의혹의 눈초리도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자기 변호를 하겠습니까?』
벌써 방송은 나에게 범죄의 美化(미화), 공명심이란 죄명을 공개적으로 달아주었다. 자기변호를 하라는 용어는 벌써 죄인임이 전제된 것이다.
『도망자 신창원에 대해서 말을 하시는데 그건 신창원의 진술만 바탕으로 하는 겁니까? 아니면 객관적인 시각에서 신창원이란 인물과 그가 저지른 범죄에 접근하는 겁니까?』
또다른 질문이다. 한마디로 정확하지 않으면 말하지 말라는 뜻이다. 수사기관은 범죄에 대해 공판청구 전에 말하지 못한다. 말하면 징역 3년이다. 그래도 수사결과 발표라는 형식으로 형법조문을 눌러버린다. 변호사는 말해도 된다. 처벌대상이 안 된다. 일방적인 매도에 대해 한마디 항변하려니까 입을 막으려 한다. 권력이 있으면 무죄, 없으면 유죄다.
한 토론회에서 이시형 박사는 신창원 사건은 언론이 각본을 쓰고 신창원은 주역, 경찰이 조역을 맡았다고 정의했다. 그 말에 동감한다. 잃어버린 반론권을 찾기 위해 신창원 사건의 모든 진실을 책으로 쓸 예정이다. 법정에서 법과 사건을 논한다면 책에서는 거기서 말할 수 없는 인간 신창원을 통해 본 병든 우리의 사회를 발표할 것이다.
경찰의 수사발표 중에는 또 신창원의 강간혐의도 있다. 보도를 보면 이미 단정을 넘어 파렴치한 강간이 덧붙여짐으로써 사형을 시킬 수 있지 않느냐가 논의되고 있다. 변호사인 필자는 경찰의 신창원에 대한 강간조사의 대질 과정에 직접 참여했다. 피해자와 증인이라는 여자를 직접 보고 얘기도 들었다. 결론은 강간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언론은 경찰의 수사결과 발표를 인용해서 경찰관과 신창원 둘 다를 성급히 강간범으로 결론을 짓고 끝났다.
누구든지 확정판결이 나기 전에는 무죄로 추정된다. 헌법의 원칙이다. 또 검사나 형사가 공판 청구 전에 수사한 범죄사실을 알리면 피의사실 공표죄로 3년 이하의 징역이나 자격정지형에 처해지도록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언론의 지면에는 공판 청구 전 수사결과 발표가 기정사실화되어 있다. 당사자나 변호사의 항변은 조금도 반영될 여지가 없었다. 일방적이고 독선적인 여론재판이었다. 이제부터 기존의 결과발표에 대한 반론과 그 근거사실을 제시하려고 한다.
형사가 범인을 잡는 데 건달을 동원해서 개인적으로 움직였다. 일단 제보자는 신속 정확했다. 탈주한 지 얼마 안되어 신창원은 세차장 주인에 의해 꼬리가 잡혔다. 그리고 즉시 신고가 됐다. 정보를 받은 원경장은 1997년 10월16일 후배들을 소집해서 신창원의 은신처를 덮쳤다. 그리고 실패했다. 신창원은 며칠 후 또 꼬리를 잡혔다. 이번에도 제보자는 정확히 신창원의 집과 전화번호까지 경찰관에게 제보했다. 신창원 검거에 실패한 원경장은 멧돼지도 잡을 수 있다는 강력한 가스총을 개인적으로 사서 다시 신창원 검거에 나섰다.
이번에는 동료인 金경장과 함께였다. 두 번째 검거에서도 정규 경찰조직이 아닌 그들의 후배들이 동원됐다는 점은 석연치 않다. 경기경찰청 형사기동대의 金경장은 원경장의 개인적인 부탁으로 박혜숙이 살던 집에 잠복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에게 쫓겨 도망할 당시의 심정을 신창원은 이렇게 말했다.
『그때 경찰관에게 진짜 총이 있었더라면 저는 꼼짝없이 잡혔어요. 장전을 하고 사격을 가하는 시간 동안 사정거리를 빠져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건달들이 왔기 때문에 쉽게 빠져 나올 수 있었어요. 그런 조무래기 건달들은 아무리 많아도 겁 안나요』
결국 두 사람의 행동은 특진 욕심에 눈이 어두워 혼자 잡으려다 놓친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그들은 해임됐었고 최근 두 경찰관은 다시 복직되어 근무중이다가 그중 金경장은 「강간혐의자」가 되어 다시 파면되었다. 정말 상부가 모르게 특진에 어두워 그가 그랬을까.
金경장 부인의 전화
1999년 9월1일 오전 11시경. 책상 위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나는 기계적으로 익숙하게 송수화기를 들었다.
『여기 안성인데요, 엄상익 변호사를 바꿔주세요』
전화 저쪽에서 독이 오른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접니다만…』
내가 대답했다.
『어떻게 신창원이 같은 나쁜 사람을 변호하실 수가 있어요?』
상대방 여자는 다짜고짜 나를 힐책했다. 신창원에 대한 동정 여론도 있다지만 내게 오는 편지나 전화는 대개는 이런 항의였다. 한 여고생은 신창원 같은 나쁜 사람을 변호하는 변호사도 이상한 사람 아니냐고 편지를 했다.
『저, 누구십니까?』
내가 물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은근히 부아가 났다.
『저는 신창원을 잡으려고 했던 金경장의 처예요』
갑자기 신경이 곤두섰다. 그녀가 계속했다.
『신창원 때문에 우리 가족이 너무나 고통을 받아요. 어떻게 그런 사람을 변호하실 수가 있습니까? 그 사람 좀 만나게 해주세요』
송수화기를 통해 아이가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金경장의 부인이라는 사람이 아이를 달래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아이의 우는 소리가 더 커졌다. 잠시 후 그녀가 다시 송수화기를 드는 것 같았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렇게 대답했다.
『아픈 환자가 오는데 의사가 사람을 가려서 치료해 줍니까? 나쁜 놈은 치료하지 말아야 하는 겁니까? 변호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창원보다도 더 흉악한 살인범이라도 사건을 의뢰하면 변호를 합니다』
이건 적반하장이었다. 건달 동원에 강간혐의까지 보도된 측에서 변호사에게 항의하는 형국이었다. 내가 반문했다.
『남편 되시는 김형사는 왜 불쌍한 사람들을 잡아 가뒀습니까라고 하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어요? 사람이 미워서가 아니라 직무이기 때문이라고 할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녀의 어조가 수그러지기 시작했다.
『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여자의 강간당했다는 말만 믿고 우리 남편 말은 왜 안 믿죠? 저도 딸이 둘인데 나중에 아버지가 강간으로 경찰에서 쫓겨났다고 하면 자식한테까지 죄인이 될 거 아니에요? 신창원 그 사람 너무 야속해요』
남편의 무죄를 확신하는 아내의 어조였다.
『남편이 밖에서 하는 일을 어떻게 절대적으로 확신합니까? 남자가 집식구 이외에 다른 여자에게도 모두 신사라면 세상에 사건이 없을 건데요…』
내가 따졌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우리 어머니가 강간당했다는 그 여자를 찾아가서 진짜냐고 물었더니 「미안하다 말 한마디 잘못해서 이렇게 됐는데 죄송하다」라고 그러더래요. 진짜 강간당했다면 그렇게 말하겠어요?』
엉엉 우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그랬으면 녹음이라도 해두시죠』
『미처 그러지를 못했어요』
金경장의 고백
나는 힘들게 金경장과 단 둘이 만났다. 쌍꺼풀에 커다란 눈을 가진 선량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어깨 부분에 실밥이 터진 회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검소한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왜 강간을 하셨습니까?』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전 강간한 사실 없습니다』
그의 얼굴이 불쾌한 표정이었다.
『아무리 잠복근무라 하더라도 여자 혼자 있는 집에 밤 늦게 같이 있으면 당연히 의심을 받는 것 아닙니까?』
『그건 제 실수입니다. 맞습니다. 인정합니다』
의외로 그가 선선히 대답했다.
『잠복 근무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하셨습니까?』
『밤 열시부터 새벽 두세 시까지 했습니다』
『혼자서요?』
내가 물었다.
『혼자 했습니다』
『신창원이 살던 집 내부구조가 어땠습니까?』
『방이 세 개고 앞뒤로 베란다가 있었습니다. 박혜숙이 자기 방에서 생활하고 제가 거실에서 혼자 지켰습니다』
언제 신창원이 나타날지 모르는 그 집에서 여러 명의 경찰관이 아닌 혼자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신창원이가 올 경우 혼자서 당해낼 수 있습니까?』
『실탄과 권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제든지 쏘려고 생각했습니다』
『감시일지는 작성했습니까?』
특정지역에 잠복하면 시간대별로 그 상황을 적어서 서류화하게 되어 있었다. 그것을 물은 것이다.
『작성하지 않았습니다』
『낮에는 그러면 어떻게 감시했습니까?』
『낮시간 동안에는 원경장이 시키는 일을 하고 특별히 감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감시가 없는 낮에는 신창원이 마음대로 왔다 가도 몰랐겠네요』
『사실 그렇습니다』
『金경장은 경기경찰청 형사기동대 소속이고 원경장은 평택경찰서 조사계에서 근무했는데 어떻게 金경장이 원경장의 명령을 받고 일했습니까? 소속도 다르고 보직도 전혀 무관한데… 정말 개인적인 행동들이었습니까?』
원경장은 武道(무도)경찰 출신이고 金경장은 일반공채 출신이었다. 나는 끝내 말하지 않으려는 金경장을 집요하게 설득했다. 또 파렴치한 강간범으로 강하게 추궁도 했다. 결국 그가 나를 만난 건 나름대로 恨(한)을 전달하기 위한 점이 있었다. 오랜 침묵 끝에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눈알이 벌겋게 충혈되면서 가슴에 맺힌 뜨거운 서러움이 철철 넘쳐 나오는 것이었다. 뭔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한 내용들은 이랬다.
기동대장의 명령
1991년에 경찰에 들어선 그는 경기도 용인, 안성 지역에서 형사생활을 했다. 고속도로에서 달리는 차에 뛰어들어 치기배를 검거하기도 했다. 안성경찰서에서 경기경찰청 형사기동대로 배치받은 그는 조직폭력배 검거 실적이 인정되어 신창원 추적 무렵 이미 순경에서 경장으로 특진이 됐다.
1997년 10월28일경이었다. 그는 경기경찰청 형사기동대 2층 사무실에서 조직폭력배를 조사하고 있었다. 갑자기 1층의 대장 사무실로 내려오라는 연락이 왔다. 잠시 후 그가 내려갔다. 대장실에는 원경장과 감찰주임, 대장이 함께 앉아 있었다.
『이건 극비사항이니까 너만 알고 있어』
대장이 앞의 기록들을 들추며 말했다. 申昌源(신창원)에 관한 서류들이었다. 그들이 거기 모인 배경은 개별적인 인맥관계에서 비롯됐다. 원경장은 신창원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자 예전의 상관이던 경기경찰청 감찰주임에게 말했다. 감찰주임은 원경장을 형사기동대장에게 데리고 갔다. 신창원의 정보를 들은 기동대장은 원경장에게 빠릿빠릿한 형사를 붙여주겠다고 약속했다. 거기에 차출된 형사가 金경장이었던 것이다. 金경장은 원경장과는 용인에서 일어났던 중학생 피살사건 때 수사를 하면서 아는 사이였다.
『여기 근무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너는 내려가서 원경장하고 수사해라. 실탄하고 권총을 줄게』
金경장은 사실상 기동대장의 정식명령을 받은 셈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22구경 투투권총과 실탄 일곱 발을 지급받았다. 원경장은 경기청 형사기동대장실에서 그동안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 이후 金경장은 원경장과 한 팀이 되어 신창원 추적에 나섰다.
평택경찰서에서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평택경찰서 조사계에 근무하던 원경장은 낮에는 경찰서에서 정상근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金경장에게 신창원에 관한 정보들을 소상히 알려 주었다. 신창원과 박혜숙이 첫 번째 살던 집과 그 부근의 지리 및 상황, 박혜숙의 부모나 형제가 사는 집의 주소와 위치, 신창원이 타고 다니는 「52너5023」의 그랜저 승용차 번호 등 여러 정보를 알려주었다.
金경장은 그의 갤로퍼 지프차를 박혜숙의 빌라 근처 군부대 앞에 세워두고 감시를 하기 시작했다. 신창원의 차가 그 집으로 들어오나를 감시했다.
1997년 10월29일, 30일 이틀 동안 밤 10시경부터 새벽 2시에서 3시까지 잠복했다. 추웠다. 金경장은 스키복과 라면을 차 안에 준비했었다. 외부에서 혼자 잠복하던 金경장은 11월6~7일 이틀간 박혜숙의 빌라로 들어갔다. 빌라구조는 방이 세 개에 욕실이 있었다. 앞뒤로 베란다가 있었다. 뒷 베란다 쪽에는 가스레인지가 설치되었다. 그는 해가 떨어지면 그 집에 들어갔다가 동트기 전에 나와서 집으로 갔다. 그는 거실 소파에서 실탄을 장전한 권총을 들고 대기했다. 답답했던 원경장과 金경장은 점쟁이를 찾아가 보기도 했다. 점쟁이는 박혜숙이 아직도 신창원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빌라에서 혼자 지내는 박혜숙의 태도는 아주 평범했다. 전혀 다른 낌새가 없었다. 박혜숙은 거실에서 대기하는 金경장에게 포도주스 한 잔을 내다 주기도 하고 한번은 라면을 끓여 주었다. 그게 다였다.
『안 한 걸 어떻게 말할 수 있나요』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네요…』
내가 말했다. 열 명의 경찰이 한 명의 도둑을 잡지 못한다는 게 속담이다. 너무나 허술한 근무였다. 金경장의 말대로라면 사실상 대장 명령을 받아 나온 것이다.
『원경장과 함께가 아니고 혼자서 여자 혼자 있는 집에 있었단 말입니까? 어떤 일을 뒤집어 써도 할 말이 없네요』
그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게 제 실수였습니다』
金경장이 솔직히 인정했다.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렇지만 제 신분이 완전히 노출된 상태인데 어떻게 제가 강간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거야 멀쩡한 정복을 입은 파출소 순경이 여자아이를 숙직실로 데려가 성폭행하는 사건도 벌어지는 세상에서 변명이 되기는 곤란하죠』
내가 반박했다. 이상했다. 그는 논리적인 추궁에는 단 한마디도 설득력 있는 답변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눈빛, 표정, 어딘지 모르는 그의 태도에서 진실함이 전해오기 시작했다.
『저도 정말 환장하겠습니다. 아! 나 참!』
그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모양이었다.
『이번 감찰조사에서 조사관이 강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납득이 가게 설명을 해보라고 하더라구요. 했으면 이렇게 저렇게 말하겠지만 안 한 걸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알아서 하래』
그가 항의조로 내뱉었다. 그가 계속했다.
『저도 형사를 했습니다. 남자가 강간을 안 했다고 부인하고 여자가 당했다고 할 때 강간으로 조작하려면 여자가 말하는 걸 리얼하게 조서에 올리고 남자는 「안 했습니다」로 간단히 적어주면 결국 강간죄가 성립됩니다. 저도 그런 식으로 강간범이 됐어요』
나는 그때 이정훈 기자(당시 시사저널, 현재 동아일보 주간동아)가 당시 상황을 취재해 썼던 도망자 신창원 책의 한 부분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박혜숙이 라노스 승용차를 몰고 천안에서 교통사고를 낸 후 金경장에게 도움을 요청한 부분이었다.
『여기 이 부분을 보면 위급한 사고처리를 부탁할 정도로 친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솔직히 이 정도면 강간은 아니라도 和姦(화간) 정도는 의심이 간다고 보이는데요』
내가 물었다.
『이건 사실과 틀립니다. 그때 전화를 받긴 받았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1997년 12월22일 밤이었다. 박혜숙이 金경장에게 전화를 했다.
『저, 박혜숙인데요』
『무슨 일인데요?』
『전화번호를 알아 볼 일이 있어서…』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그거죠?』
金경장은 귀가 번쩍 뜨였다. 그녀가 신창원이 있는 곳을 말하려는 것이다.
『저…, 송탄 시내를 가다가 신창원하고 강순희가 만나는 걸 봤어요. 제가 두 사람을 따라가서 헤어지라고 하고 왔어요. 강순희 전화번호하고 그 집 주소를 아는데…』
그녀가 신창원의 집을 알려주었다. 그는 즉시 그 사실을 원경장에게 알렸다. 12월29일 金경장은 경기경찰청 형사기동대장에게 전화를 했다.
『김○○입니다. 신창원의 소재를 파악했는데 권총과 실탄이 필요합니다』
金경장이 기운차게 말했다.
『넌 이미 특진했으니까 그 공은 원경장에게 돌리고 뒤에서 보조만 해 줘라』
기동대장의 명령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얼마 전 특진한 그로서는 신창원을 잡는다고 다시 승진하는 건 아니었다. 그가 옆에 있던 원경장에게 송수화기를 건네 주었다. 원경장이 형사기동대장과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신창원을 검거하려니까 얼마 전에 반납한 실탄과 권총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형님, 권총하고 실탄을 달라고 해』
옆에서 金경장이 元경장에게 재촉했다. 元경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님, 총 좀 주십쇼』
원경장이 전화에 대고 말했다.
『그러면 對(대)테러 요원 열명만 지원해 주십쇼』
원경장이 다시 말했다. 잠시 후 전화를 끊은 원경장은 『알아서 하래』라고 대장의 말을 전했다. 권총과 실탄의 지급 그리고 정규 對테러요원의 지원요청이 거절당한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동네 후배들을 불러 신창원이 강순희와 묵고 있는 빌라를 덮치게 된 것이다.
경찰도 최선 다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막연하나마 건달을 동원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렇지만 신창원의 소재가 발견됐다고 보고하는데도 무기와 지원병력을 거절한 사실은 납득하기 힘들다. 그들 중 한쪽은 거짓말로 남게 될 것이다.
『평택 신장동의 빌라로 가서 신창원을 덮치던 날 상황을 얘기해 주시죠』
내가 물었다. 나는 신창원의 입으로 그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들었었다. 이번에는 당시 출동한 경찰관에게 그 사실을 확인하는 셈이었다. 내가 金경장을 자극할 만한 질문을 먼저 이렇게 던졌다.
『신창원의 말로는 원경장과 金경장 그리고 후배들이 신문보급소 직원이라고 하면서 들어왔는데 원경장은 남고 金경장은 먼저 뒤로 도망을 했다고 하던데요』
대개의 형사들은 무력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본성이 있다. 그 반대로 꼬집을 때 그들은 자존심을 상해 하며 튀기도 한다. 그 반응이 알고 싶었다.
『예, 맞습니다. 그때 제가 그 빌라에 들어갔었습니다. 싱크대 앞에 신창원이 있는 게 보였습니다. 순간 저는 「그래 너는 이제 끝났다」 하고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싱크대 도마 위에 긴 회칼이 보이고 신창원이 그걸 들고 우리한테로 오는 거예요. 그걸 보고 저는 후배들하고 도망을 쳤습니다』
그가 솔직하게 말했다. 의외였다.
『왜 도망했어요?』
내가 물었다.
『무기가 없었습니다』
그가 약간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얘기를 계속했다.
『그때 원경장이 신창원에게 새로 구한 가스총을 쐈어요. 멧돼지도 기절시킨다는 강력한 총이었어요. 그런데 신창원이 끄떡도 하지 않는 거예요. 원경장이 당황해서 권총을 신창원에게 던졌어요. 신창원이 그 권총을 받아서 원경장에게 겨눴어요. 원경장은 그걸 보고 「총이다」 하고 도망나왔어요』
신창원이 내게 설명해준 부분과는 약간 달랐다.
『신창원은 원경장이 바닥에 넘어진 걸 보고 「빨리 꺼져」라고 말했다던데…』
내가 물었다.
『그건 신창원이가 교활하게 말한 거 같고, 사실은 원경장이 뒤로 물러나오면서 휘청거리기는 한 것 같아요』
『내가 한 방에 캑 하고 나가 자빠졌다고요?』
어느 쪽이나 상관없었다. 그 정도면 상황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일선 경찰관으로서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다. 경찰관과 범인의 검거과정을 보면 묘하게 상반된 얘기들을 들을 수 있다.
1989년 신창원이 강도치사죄를 저지를 때 그를 검거한 경찰관은 은형사였다. 이정훈 기자가 은형사에게서 검거 당시의 상황을 듣고 기록한 내용은 이랬다.
<『신창원이는 나 혼자 잡았소. 그때 나는 정보원을 통해 신창원이 나타나는 곳을 알고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었소. 신창원이 들어오는 순간 「경찰입니다. 신분증 좀 봅시다!」 하자 신창원은 「학생인데요」 하며 학생증을 꺼내려는 척 손을 안으로 집어 넣더군요. 그 순간 나는 선방을 올렸고, 신창원은 캑하며 나가 자빠졌죠. 그렇게 해서 수갑을 채워 청량리 경찰서로 데려온 것입니다. 당연히 신창원의 품 속에는 학생증이 아니라 회칼이 숨어 있었어요』>
이 글의 내용을 신창원에게 보였었다. 신창원의 대답은 이랬다.
『내가 한 방에 캑하고 뻗었다고요? 그 형사 내 앞에서 10초만 정상적으로 버티고 있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집니다. 그때 형사 끄나풀을 하는 건달이 나를 레스토랑에서 만나자고 했어요. 멋모르고 가서 얘기를 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목을 졸랐어요. 기절했다가 잡히고 보니까 뒤로 양손에 수갑이 채워져 있었어요. 청량리 오팔팔 창녀촌에서 여자애들 피 빨아먹는 포주나 건달이었어요. 경찰 끄나풀하는 야당 아이들 20명이 동원돼서 나를 잡은 거예요. 나를 잡았다는 형사는 제가 정신차려서 묶여 있을 때 나타나서 신분증 한번 쓱 보여 준 게 다예요. 그런데 한 방에 내가 캑 하고 나가 자빠졌다고요?』
극과 극을 달리는 상반된 진술이었다. 형사로서는 검거만 하면 되고 방법에 너무 좌우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근육에서 오는 원색적인 힘을 과시하는 면이 있는 신창원으로서는 듣기 싫어하는 소리 같았다. 어쨌든 이 얘기는 곁가지니까 본 얘기로 넘어가겠다.
평택 신장동의 ㄴ빌라에 있던 신창원을 놓치고 이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일부 경찰관이 특진에 눈이 어두워 개인적으로 행한 경솔한 행동으로 결론지어졌다. 元경장과 金경장 두 사람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배제해임되었다. 조직에 필요 없으니 나가달라는 얘기였다.
『솔직히 말해서 상부에 보고도 다 했는데 대장이 권총과 실탄을 주지 않아서 놓쳤던 거예요. 무기가 있었으면 절대 실패하지 않았다니까요. 왜 그때 권총을 안줬는지 모르겠어요』
金경장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억울해 하니까 주위에서 소청하면 살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더라구요. 외형적으로만 해임이지 몇 달 후면 산다는데 구태여 사실을 까발려서 좋을 일이 뭐 있겠습니까? 모두 내가 뒤집어 썼죠』
『소청에서는 그 결과가 어떻게 됐어요?』
『나마저 거기서 구제하면 경찰에서 책임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꼴이 됐어요. 결국 해임확정 쪽으로 결론이 나더라구요. 퇴직금은 바로 지급해 주더라구요. 그 돈을 투자해서 행정소송을 제기했어요. 경찰 자체에서 하는 것보다 차라리 법원의 재판이 공평한 셈이죠. 원경장이 울면서 증언도 해주고 해서 일심에서 승소했는데 경찰측은 나를 자르려고 상고까지 하더라구요. 저도 하는 수 없이 상고해서 거기서도 승소판결을 얻었어요』
金경장은 1999년 4월2일 승소판결을 근거로 복직했다. 그러나 경찰은 그가 보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사유로 다시 정직 1개월의 징계처분을 내렸다. 그는 4월23일부터 5월23일까지 다시 업무를 할 수 없었다. 정직 기간이 끝난 1999년 5월24일부터 그는 안성경찰서 대덕파출소에 근무했다.
그로부터 두 달 보름 후인 7월16일 신창원이 검거됐다는 사실이 톱뉴스로 모든 일간지와 방송에 보도됐다. 그가 잡으려 했던 신창원이 검거된 사실에 대해 아쉽기도 하고 마음이 홀가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압수된 신창원의 일기 속에 자신이 신창원의 첫 여자 박혜숙을 강간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걸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강간범」이 된 金경장?
1999년 7월18일 밤 9시. 金경장은 안성의 대덕면 일대에서 순찰을 돌고 있었다. 그때 파출소에서 무전으로 연락이 왔다.
『경기청 강력계에서 빨리 들어오라는 지시입니다』
『무슨 일로 그래요?』
그가 물었다.
『그냥 빨리 올라오라고 그러는데요』
『알았어요』
金경장은 영문을 모른 채 바로 경기경찰청으로 향했다. 두 시간 후.
『박혜숙이와 성관계했지? 빨리 실토하지 그래』
2층 폭력계 사무실에서 하급자인 순경이 金경장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런 사실 없습니다』
그가 완강히 부인했다. 옆 사무실에 있던 반장이 그에게 다가와서 조용히 달랬다.
『어차피 망신당하는 거니까 공연히 시간만 더 끌지 말고 빨리 끝내지』
조사경찰이나 반장은 이미 그의 강간을 진실로 굳힌 것 같았다. 남은 것은 그의 자백과 서명뿐이었다.
『내가 말하는 건 진실이 아니고 박혜숙이 말만 사실입니까? 조직원인 경찰관의 말은 믿지 않고 그 여자 말만 믿는 게 충성한 사람에게 대해주는 보답입니까?』
분노와 실망감이 엄습했다. 고속도로에서 치기배를 잡기 위해 달리는 차에 덤벼들기도 했다. 조직폭력배 검거실적 일등도 해 봤다. 텔레비전 프로 「경찰청 사람들」에 출연해서 인정받을 때는 정말 경찰에 들어온 보람을 느꼈었다. 그러나 이제 비정한 조직의 본질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이 허탈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박혜숙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대질신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눈에서 불이 났다.
『지난번에도 너 때문에 죽었는데 이번에는 무슨 억하심정으로 또 나를 잡냐?』
金경장이 박혜숙에게 소리쳤다. 그녀가 움찔했다.
『했으니까 했다고 그러죠』
그녀가 옆의 형사들을 보더니 기운을 얻었는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사관들의 얼굴에 「그것 봐라」 하는 득의만면한 표정이 돌았다. 이어서 박혜숙이가 1997년 11월3일 새벽 2시경에 강간당했다는 내용들이 그녀의 진술에 의해 상세하게 기록되기 시작했다. 金경장은 11월2일 저녁에 잠복에 들어간 사실이 없었다. 그날 파출소 무기고에 총기를 반납시켰고, 그 기록도 있는데 아예 무시당했다. 수사는 결론을 내려 놓고 짜맞추는 것이었다고 한다. 金경장이 부인하면 조서진행이 정지됐다. 자백조서를 받겠다는 뜻이었다.
『정말 이러면 박혜숙이한테 고소장을 받아서 구속시켜 버릴 꺼야』
자백하면 파면으로 끝나고 계속 부인하면 강간범으로 형사구속시키겠다는 말도 나왔다.
『차라리 그렇게 해 주십시오』
金경장이 말했다. 차라리 검찰에서 조사를 받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지 말아. 신창원의 일기, 그리고 박혜숙의 말이 증명력이 있지 자네의 진술을 믿을 것 같아? 그러니까 자꾸만 버티지 말고 그만 인정하지. 서로 더 이상 피곤하지 말자구』
『안한 걸 어떻게 설명합니까?』
『인정 못합니다. 죄가 있다면 신창원이를 놓친 겁니다. 어차피 지난번에 당해봐서 아는데 이제 더 이상 이 조직에 미련이 없어졌습니다. 미안하다면 제 어머니나 처자식에게 잘못했지, 경찰조직에 미안할 건 하나도 없어요』
막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미칠 것 같았다. 그의 격정을 눈치챈 감사계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기자들이 냄새를 맡고 왔으니까 자리를 옮기자』
조사관들이 그를 위하는 척하면서 경찰청 본관 4층의 거짓말 탐지기실로 장소를 옮겼다. 그의 짐작으로는 특수유리창 저편에서 박혜숙과 경찰간부들이 조사받는 그를 바라보려고 그런 것 같았다.
『성관계를 안 했다는 사실을 내가 납득할 만하게 설명해 봐』
감사계장이 다시 다그쳤다.
『강간을 했다면 설명하지만 안 한 걸 어떻게 설명합니까?』
金경장이 답답한 마음으로 말했다.
『거 봐, 자네가 결국 나를 납득시키지 못하잖아』
칼로 확 가슴이라도 열어보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무 일도 없게 해 줄게. 그리고 언론에도 터지지 않을 거야. 안심해』
감찰계장이 방향을 바꾸어 회유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조서에 서명무인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날 저녁 다섯시 반 경찰의 수사결과 발표가 있었다.
<경기지방경찰청은 24일 탈옥수 신창원의 전 동거녀를 성폭행한 것으로 드러난 안성경찰서 대덕파출소 소속 김아무개(30) 경장을 파면조치했다. 金경장은 지난 1997년 11월 초 신을 검거하기 위해 충남 천안시 목천면 H빌라에서 3일간 잠복근무하면서 신의 전 동거녀 朴아무개(31)씨를 성폭행한 것으로 경찰 자체조사 결과 밝혀졌다>
『언론에서 떠드는 대로 결론을 정해놓고 짜맞추기 수사를 하는 게 경찰이에요. 언론은 이슈거리를 요구하죠. 경찰은 거기 맞추어 주지 않으면 엉뚱한 간부들이 줄줄이 알사탕으로 다치니까 나 같은 놈 하나 희생양으로 잡아 없애는 게 상책이죠』
『몸을 준다고 해도 거절할 것』
그가 허탈한 표정으로 결론지었다.
『징계위원회에서는 어땠어요?』
『징계도 이미 파면을 결정해놓고 하는 요식행위인데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거기서 강간한 일이 없다고 부인하면 되잖아요?』
『물론 했죠. 그랬더니 조사할 때는 도장 다 찍어놓고 왜 이제 와서 다른 소리를 하느냐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인데 더 이상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이 의리 없는 조직에는 조금의 미련도 이제는 없다니까요』
말을 끝낸 그가 설움에 복받쳤는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가 우는 소리로 내게 이렇게 항의했다.
『저는 명령에 따라 잠도 못 자 가면서 최선을 다했어요. 보고도 했고 권총도 달라고 사정했어요. 그런 여자는 거저 몸을 준다고 해도 거절하겠어요. 그런데 강간범으로 몰아 두 번 파면시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우리 경찰의 높은 사람들은 어떤지 아세요? 택시운전기사의 신고사실을 은폐했던 간부는 오히려 영전했어요』
그의 격정과 분노하는 태도 속에는 분명히 진실이 숨어 있었다. 강간죄는 고소가 있어야 처벌할 수 있다. 그녀는 고소하지 않았다.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金경장의 어머니에게 박혜숙은 사과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말해 주신 것 중에 어떤 것을 비밀로 하고 어떤 것을 발표할까요?』
내가 물었다.
『사실 형사기동대장님이 저를 무척 귀여워해 주셨습니다. 그분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에 여태껏 입을 다물었어요. 그렇지만 더 이상 파렴치범이 되지는 않으렵니다』
독오른 그가 내뱉었다. 그가 한 마디 덧붙였다.
『전부 다 저에게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하라고 해주십쇼. 그러면 법정에서 정면으로 붙어 보겠습니다. 누가 사실인지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걸 꼭 보여줄 테니까』
강간범 신창원
강간범은 만들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객관적인 수사를 통해 밝혀지는 것인가? 金경장의 강간과 대칭이 되는 신창원의 강간 부분이 있다.
1999년 8월5일자 한 일간지에는 이런 박스 기사가 났다.
<『탈옥수 신창원의 파렴치한 면모를 남김없이 밝혀 주겠다』
신창원의 조사를 마치고 나온 경찰 관계자의 말이다. 경찰은 이를 증명이나 하듯이 신창원이 지난해 7월 충북 청주에서 30대 金아무개씨를 성폭행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야 이건 해도 정말 너무하다』
신창원이 내가 보여주는 기사를 보며 혀를 찼다.
『믿어주세요. 이 기사는 거짓말한 겁니다. 저는 청주에 산다는 이 여자를 강간하지 않았어요. 정말입니다』
그가 호소하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일간지의 이런 내용의 기사 하나를 내놓았다.
<신창원이 청주시에서 부녀자를 성폭행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파렴치범임이 거듭 확인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경찰관이 신의 동거녀를 성폭행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경찰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자 이를 희석시키기 위해 성급히 발표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신창원이 일기로 金경장의 성폭행을 폭로한 데 대한 경찰의 보복을 의심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또다른 기사는 이랬다.
<탈옥수 신창원이 강절도 외에 가정집에 침입해 성폭행한 것까지 드러났다. 이에 따라 그동안 극형 구형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던 신은 상습강도와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법」상 「특수강도강간」 규정에 의거, 최고 사형까지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예 죽이려고 작정을 했군. 죽어주지. 그렇지만 진짜 청주에 산다는 여자, 강간은 하지 않았는데…』
그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내뱉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접견실에서 그에게 기사 한 장 한 장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제가 사실 성욕이 강한 놈입니다. 그렇지만 강한 만큼 절제도 할 줄 압니다. 남의 집에 들어가 보면 여자가 발가벗은 건 흔하고요, 별 짓을 하는 것도 봤어요. 정말 강간하려고 했으면 한두 번 했겠어요. 그렇지만 저는 강간하지 않았어요』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가 덧붙였다.
『변호사님, 경찰이 저를 파렴치범으로 몰아 죽이고 싶은 모양입니다. 죽는 거는 상관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친구들한테 모함받아 죽지는 않겠습니다. 법정의 최후진술 시간만 확보해 주십시오. 그때 제가 경찰이 듣기 싫어한 범죄를 제 입으로 자백하겠습니다』
그의 눈에서 불이 번쩍였다.
접견권과 수사권
그때 교도소 과장이 접견실로 들어섰다. 허리에 걸친 가죽지갑에서 권총이 음산한 빛을 뿜고 있었다.
『저 잠깐만 얘기하실까요』
그가 나를 보고 말했다.
『그러시죠. 말씀하세요』
내가 대답했다. 그가 신창원의 얼굴을 힐끗 보더니, 『잠깐 밖으로 나오시죠』라고 말했다. 접견 도중 교도소 책임간부가 와서 변호사를 밖으로 나오라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과장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지금 경찰청 특수수사팀에서 조사하러 왔는데 양보하시면 안되겠습니까?』
신창원을 그만 만나라는 것이었다. 형식은 권유 같았지만 사실상의 강요였다. 법적으로 변호사의 접견권이 수사권에 밀려야 할 이유도 없었다. 불쾌했다. 권위주의의 냄새가 풍겼다.
『안 되겠는데요』
내가 고개를 흔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강간 부분을 집중조사하러 일부러 서울에서 내려온 수사팀인데요, 웬만하면 변호사님이 이해하시죠』
그가 다시 재촉했다.
『저도 서울에서 내려왔습니다. 변호사로서 지금 접견권을 행사하는 중인데 기다리라고 하시죠』
내가 버텼다.
『그러지 마시고 양보하시죠. 많이 접견하셨잖습니까』
간부가 다시 말했다.
『그렇게 생각대로 꼭 하고 싶으면 저를 강제로 들어내세요. 힘으로 하면 어쩔 수 없겠지요』
『아니 뭐 그렇게까지야…』
그가 얼버무렸다.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강간 부분의 조사라면, 볼 수만 있다면 정말 귀중한 현장이 아닌가. 내가 말을 바꾸었다.
『강간 부분 조사에 입회할 수 있다면 양보할게요』
『입회는 곤란할 걸요…』
과장이 말했다. 어차피 그것은 그의 관할은 아니었다.
『아니 수사관들이 강제로 내쫓으면 할 수 없지만 그 정도가 아니면 수사상황을 지켜 보겠습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수사팀들이 웅성거리며 들어서기 시작했다.
『먼저 가리개를 설치해야겠는데. 피해자가 신창원 뒤에서 얼굴을 확인해야 하니까』
사십대 말쯤으로 돼 보이는 형사가 말했다. 이어서 교도관들이 철책상 주위로 베니어로 된 가리개를 둘러쳤다. 신창원이 앉게 될 걸상의 뒤쪽 가리개 사이에 아주 작은 틈을 만들어 놓았다. 성폭행을 당했다는 여자가 그 사이로 신창원의 얼굴을 살짝 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변호사가 참여하면 나중에 더 조사가 신빙성이 있겠네』
중년으로 보이는 특별조사팀의 팀장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특별 수사팀은 뚱뚱한 중년의 남자가 두 명, 젊고 미남인 형사 1명, 그리고 강력계에만 7년을 근무했다는 여형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특별 수사팀과 간단한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 구석에 있는 소파로 가서 앉았다.
사명감에 불타는 女형사
여형사가 여자 두 명과 함께 옆에 앉았다. 찌는 듯한 날씨로 서성이는 형사들의 얼굴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이거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15일간 수사하는데 미칠 지경이네. 우리같은 형사 인생은 누가 보상해 줄 거야』
미남인 젊은 형사가 밝은 표정으로 들으라는 듯 말했다.
『어디 소속이세요?』
내가 앞에 앉은 여형사에게 물었다. 검은색 바지와 티셔츠의 활동적인 차림이었다. 사명감에 불타는 눈빛이었다.
『강력계에만 7년을 근무했어요. 주로 절도범들의 수법을 연구하고 우범지역에 網(망) 부식도 합니다. 자료들을 만들어 놓으니까 어떤 수법의 범죄가 발생했다 하면 대강 어떤 자들이 그랬나를 추측할 수 있어요』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프라이드가 있는 일선 경찰관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내 옆에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이십대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얼굴 여기저기에 붉은 여드름이 보였다. 여형사 옆에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약간 뚱뚱한 여자가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입술에 붉은 루즈를 바른 그녀의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직감적으로 신문에 보도된 피해자라는 여자와 신창원이 서울 강남구 양재동에서 함께 살림을 한 여자라는 걸 느꼈다. 오전에 신창원이 나에게 고백한 게 머리에 떠올랐다. 영등포 역전 근처 창녀촌에서 만났다는 것이었다. 양재동에 방을 얻었는데도 기둥서방과 그 사이를 왔다갔다하더라는 것이었다. 신창원은 도망자 신세를 미끼로 그녀에게 이용당했다고 말했었다. 신문보도에 나온 경찰에 협조하겠다는 그 여자였다. 여형사가 우범지역에 첩자들을 부식한다는 말과 그녀가 영등포역 앞 창녀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면 이분이 영등포역 동네에서 신창원과 만나 살림을 차렸던 그 여잡니까?』
내가 여형사를 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여형사가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내가 옆으로 얼굴을 돌리며 인사했다. 그녀가 순간적으로 바짝 긴장했다. 내게 강한 적대감을 보이는 눈빛이었다. 객관적 증인이라기보다는 이미 경찰 편에 철저히 선 느낌이 들었다. 서울경찰청의 여형사가 창녀촌에 부식해 놓은 망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일었다. 신창원으로부터 그녀가 경찰도 이용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저 분은 피해자십니까?』
내가 여형사 옆에 있는 삼십대 중반쯤의 뚱뚱한 여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 유부녀신데 강간의 피해자입니다. 남편도 지금 여기 온지 몰라요. 저희에게 수사협조를 하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여형사가 부인임을 특히 강조했다. 신문보도에는 다방종업원으로 나와 있었다. 하기야 다방종업원과 유부녀가 양립 못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니까.
『안녕하세요』
내가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 역시 나를 경계했다. 그때 팀장으로 온 사십대 쯤의 노련한 남자가 다가왔다.
『여기 계시는 이분은 신창원의 변호사입니다. 두 분은 묵비권을 행사하셔도 되죠』
팀장은 능란하게 여자들의 입을 단속했다. 수사나 재판에 있어서 증인은 누구 편이 아니다. 진실을 얘기하면 그뿐이다. 누구 편이다라는 인식을 가지면 이미 그 자체가 공정하지 못하다. 자기편의 의도에 맞는 말이나 대답을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변호사는 죄를 감춰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경찰하고 방향은 다르지만 진실을 역시 밝히는 입장입니다. 만약 신창원이 두 분에게 잘못했다면 사과하게 해야 하는 겁니다』
내가 설명했다.
『…!!…』
둘은 짜기나 한 듯 완강하게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윽고 수사할 준비가 다 됐다.
고개를 갸웃
교도관들이 신창원을 칸막이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철제의자에 앉혔다.
『지금 순간이에요. 일어나서 나를 따라오세요』
여형사가 강간 피해자라는 뚱뚱한 여자에게 속삭였다. 그들이 소파에서 일어나 칸막이 틈으로 갔다. 나도 얼른 그들을 따랐다. 피해자가 신창원을 보는 순간의 표정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었다. 찰나적인 얼굴 표정이 가장 정확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흥분했는지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조심조심 칸막이 틈으로 눈을 접근시켰다. 숨막힐 듯한 긴장감이 돌았다. 신창원은 그녀가 보는지도 모르고 무심히 앞쪽을 향해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눈을 뗀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 없는 표정이었다. 그녀가 다시 한번 칸막이 틈으로 얼굴을 들이댔다. 그리고 나선 다시 얼굴을 좌우로 흔들면서, 『눈매는 비슷하기도 한 것 같은데…』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분명히 읽었다.
『강간범이 저 사람 확실히 맞습니까?』
내가 피해자라는 뚱뚱한 여자에게 조용히 물었다.
『정확히 잘 모르겠어요』
그녀가 경계심이 사라진 표정으로 얼버 무렸다. 그녀가 덧붙였다.
『남자한테 당하긴 당했는데 나중에 전단을 보니까 비슷한 것 같기도 했어요…』
『왜 약속 어겼어요?』
잠시 후 정식으로 조사가 시작됐다. 하얀 티셔츠를 입은 미남형사가 주무 조사관이었다. 그 뒤로 강력계 여형사가 배치됐고 팀장으로 보이는 간부급들은 그 앞과 옆의 의자에 앉았다. 수사팀 중 한 사람은 비디오 촬영 담당이었다. 카메라의 앵글이 내 쪽을 수시로 향했다. 이렇게 변호사까지 입회한 가운데 공정한 수사를 했다는 근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주무 조사관의 맞은편에서 신창원이 냉랭한 표정으로 주무 조사관을 직시하고 있었다.
『왜 약속을 어겼어요?』
신창원이 조사관에게 먼저 따지듯 물었다.
『무슨 약속?』
조사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일단 여자들을 터치하지 않기로 약속 했잖아요? 그래서 내가 다 불어줬는데 왜 여자들을 구속했죠?』
신창원의 눈이 배신감으로 이글거렸다. 변호사인 내 앞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주무 조사관도 만만치 않았다.
『이봐. 신창원씨 조사한 경기청에서 얼마나 후카시를 넣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따지지 마. 우리는 서울청이니까』
『…!!…』
신창원이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는 태도였다.
『그러면 내가 써 준 먼젓번 진술서 가져왔어요?』
신창원이 따졌다. 아마 담당 조사관이 약속을 어겼으니까, 자신의 진술서도 철회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신창원! 이거 왜 이래? 그렇지 않아도 윗사람들 잔소리 듣기 싫어 죽겠는데 나를 수사지휘하는 거야 뭐야』
형사가 짜증스런 어조로 되쐈다.
『알았어요. 그럼 조사하세요』
신창원이 그 말에 한풀 기가 꺾인 채 말했다. 그에 대한 의례적인 인적사항의 확인이었다. 담당 형사가 그 사항을 조서 위에 또박또박 써 내려갔다. 잠시 후, 주무조사관은 『대질할 테니까 자 이리 오세요』라고 옆에다 소리쳤다. 먼저 양재동에서 신창원과 살았던 청바지 여자가 주무형사 옆자리로 왔다.
『고개 돌리고 앉아요. 대질한다고 얼굴을 마주 댈 필요는 없으니까』
형사가 그녀의 편의를 봐주었다.
『그 뒤에는 피해자 분이 앉으시고』
청바지와 피해자라는 여자가 앞뒤로 나란히 앉았다.
『자 김○○씨, 이 앞에 있는 사람 알죠? 누구죠?』
담당 형사가 물었다.
『신창원이오』
그녀가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이 사람이 여자를 강간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죠?』
『네!』
『언제 어떻게 강간을 했다고 하던가요?』
형사는 조서에 문답 형식으로 또박또박 적어 나갔다.
『1998년에 양재동에서 동거하고 있을 때였어요. 신창원이 저보고 창문이 열린 틈으로 여자를 보고 성욕을 느껴서 강간을 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강간을 하고 둘이서 얘기를 나누었는데 여자가 나중에 1백달러짜리 한 장을 달라고 하더래요. 그러다가 다시 괜찮으니까 그냥 가라고 하더래요』
그 말을 앞에서 듣는 신창원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형사의 신문이 계속됐다.
『신창원이와 함께 살 때 섹스를 했죠?』
『네』
『신창원이 좋아하는 체위라든가 다른 성적 특징은 없었나요?』
『신창원이 오럴섹스를 좋아했어요』
『해달라고 하는 편인가요, 해줬나요?』
『자기가 원하기도 하고 또 내가 해주기도 했어요』
『또다른 특징은요?』
『애무가 길었어요』
형사가 볼펜으로 한 자 한 자 적어 나갔다. 섹스의 특징을 묻는 것으로 보아 이미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점진적으로 질문의 벽돌을 쌓아 올리는 것 같았다.
『성기의 특징은요?』
『야 이거 팔이 아파 못쓰겠다』
담당형사가 팔을 털며 투덜거렸다. 찜통 같은 더위였다. 조사실은 바람 한 점 없었다. 앞쪽에 앉은 나이 먹은 형사가 하품을 했다. 지친 눈이 가물거렸다. 마른 몸집의 사복 경찰관이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조사광경을 찍고 있었다. 앵글이 내 쪽에 와서 한참을 머물다 가곤 했다.
『성기에 특징은 없었습니까?』
형사가 청바지에게 질문을 계속했다.
『거기에 다마가 두 개…』
여자가 말했다.
『그러니까 성기에 구슬이 두 개 달렸더란 말이죠』
『네…』
형사가 신창원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이 봐 창원이 맞아? 어디 박았어?』
형사는 직접 눈으로 확인이라도 할 듯 신창원의 하체로 시선을 향했다.
『네. 아랫부분에 두 개 있습니다』
신창원이 대답했다. 그 말에 형사가, 『성기의 아랫부분에 구슬이 두 개 달렸습니다라고 대답했지』라고 확인했다.
청바지의 뒤에서 피해자라는 여자가 질문 대답상황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자 그럼 이번에는 피해자와 대질하도록 하겠습니다. 얘기 들으셨죠?』
형사가 말했다.
『예…』
피해자 여자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단도 직입적으로 물을게요. 강간당하고 돈 뺏긴 적 있죠?』
『네』
『언제 어디서 당했나요?』
『1998년 7월 초에 우리집에서 당했습니다』
『어떻게 당하셨나요?』
『새벽 세시 반쯤 범인이 창문을 뜯고 들어왔습니다. 손에는 칼을 들고 안경을 쓰고 있었어요. 저를 강간하고 지갑 속에 있던 돈 8만원을 가지고 갔어요』
피해자 여자가 외웠다는 듯 대답했다.
『구슬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자, 내 앞에 있는 남자가 누군지 아시죠?』
형사가 물었다.
『신창원이오』
여자가 즉각 대답했다.
『그건 우리가 다 아는 이름이구요. 그렇게 말하지 마시고 저 남자 전혀 본 적이 없는 남자예요?』
형사가 여운을 띤 어조로 물었다. 그가 재차 물었다.
『당시 강간했던 사람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겠어요?』
『그때 모습으로는 알 수 있겠는데…』
피해자 여자가 자신없는 어조로 어물거렸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시고 저사람이 그때 봤던 사람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형사가 다시 물었다.
『글쎄요… 눈 있는 데는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그때 신창원이 끼어들었다.
『저를 봐야 할 거 아닙니까? 자세히 보라고 하십시오』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아까 이미 봤어요』
뒤에 앉았던 여형사가 소리쳤다.
『봤어요?』
신창원이 물었다.
『칸막이 뒤에서 봤단 말예요』
여형사가 대답했다.
『봤으면 됐어요…』
신창원이 한 풀 물러났다.
『창원이!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 지금 내가 수사중이야. 과장 계장한테 잔소리 듣는 것도 지겨운데 자네한테도 이래라 저래라 소리를 들어야겠어?』
담당형사가 소리쳤다. 그때 여형사가 뒤에 앉았다가 담당형사 옆으로 다가가 뭐라고 귓속말을 한다. 아마 추가 신문사항을 제시하는 것 같았다. 담당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간을 당할 때 남자에게서 느껴진 무슨 신체적 특징이 없었습니까?』
형사가 물었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강간당하시면서 어떤 느낌을 받았다면 말해 보세요』
형사가 다시 말했다.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성기에 구슬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피해자가 말했다. 어느새 그 여자가 세뇌된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들었다. 흘러가는 상황에 따라 대답을 해버리는 것 같기도 했다. 조서에는 대답하는 여자의 태도나 어조가 적히지 않았다. 나중에 그걸 읽는 판사는 기가 막힌 두 명 증인의 일치된 진술이 확보되는 순간으로 볼지도 모른다. 정말 중요한 현장에 있다는 느낌이었다.
『급한데 옷 벗고 하나?』
『진짜 내가 많이 참고 있다니까요』
신창원이 서늘한 냉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가 덧붙였다.
『강간으로 몰려면 먼저 정액채취를 해서 검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정액이 이불에 묻었을 수도 있고 여자 옷에 묻었을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억지로 여자들 시켜서 말로 꾸며대지 말고 과학적으로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 말에 여형사가 나섰다.
『강간당한 여자들이 단번에 나 강간당했습니다라면서 나서는 거 봤어요? 창피하니까 입다 물고 있다가 마지못해 얘기하는 거지요. 그런데 어디서 정액채취를 하겠어요?』
여형사가 다부지게 대응했다.
『나 분명히 말하는데 강간은 하지 않았어요. 이러지 말아요』
신창원이 여형사에게 따졌다.
『그건 당신 주장이고. 우리도 경찰관 직을 걸고 끝까지 수사하는 거니까 그 성패는 법원에서 판단하지 않겠어?』
『좋습니다. 그러면 여자가 구슬까지 느꼈다면 내 몸에 있는 다른 건 왜 얘기하지 않는 겁니까? 당연히 그 말이 나와야 하지 않나요?』
이때 담당형사가 끼어들었다.
『이 사람아, 강간할 때 급한데 몸 다 보여주고 즐기면서 할 수 있나?』
신창원이 지지 않고 결사적으로 대꾸했다.
『제 얼굴은 특징이 있어서 남들이 한번 보면 잊지 않아요. 다시 좀 자세히 보고 진술하라고 해주세요』
『자네는 기억력이 좋아서 본 사람은 다 기억하는지 몰라도 나는 이 교도소를 몇 번이나 와서 창원이를 봤는데도 모르겠어. 그런 말 하지 마』
담당형사가 신창원을 제지했다. 형사가 청바지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자 사실대로 모든 것을 진술하셨나요?』
『사실대로 진술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서명무인하시죠』
형사가 인주를 그녀 앞에 내놓았다. 그녀가 조서 끝에 이름을 쓰고 지장을 찍었다.
『피해자분도 사실대로 진술하셨죠?』
『네…』
『남편도 계실 텐데 이렇게 멀리 와서 진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 서명무인하시죠』
형사가 서류를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창원이도 여기 무인 찍어야지』
『난 강간한 사실 없어요. 이래도 되는 거예요? 불겠다는 건 불지 말라고 하고 안 한 건 했다고 만들고. 나 정말 많이 참는 거예요』
신창원이 말했다.
『아 그거야 법정에서 판사님들이 가릴 일이고』
형사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정말 섹스할 때 구슬을 느꼈어요?』
다시는 피해자라는 여자를 보기 힘들 것 같았다. 그리고 이왕 조서에 말을 뱉어 놨으니까 만약 사실이 아니더라도 이제는 끝까지 우길 것이다. 나는 칸막이 뒤로 돌아 피해자로 온 뚱뚱한 여자에게 소리 없이 다가갔다.
『그때 옷을 다 벗었어요?』
내가 물었다.
『아니오』
그녀가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정말 섹스할 때 구슬을 느꼈어요?』
『그런 것 같아요…』
그녀가 쑥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어느새 모든 게 기정사실이 되어 버렸다. 형사들이 득의만면한 표정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여형사에게 간단히 몇 마디 더 묻고 싶었다. 진짜 신창원이가 강간을 하고 교활하게 끝까지 부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경찰이 혐의를 두고 몰아붙이는 데 참고인이 분위기에 휩쓸려 착각하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현장의 분위기가 전혀 없이 단정적으로만 쓴 진술조서를 보는 판사는 아마도 강간에 대해 확신을 가지기 쉬울 것이다. 내가 여형사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떻게 강간을 조사하게 됐습니까?』
『청주 부근의 연립주택에서 강간사건이 있었습니다. 저희들의 추리로는 신창원이가 그곳을 지날 때하고 시간이 일치된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일단 강간혐의를 두고 추궁해 가는 거죠』
여형사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말에 신뢰가 갔다.
그녀가 계속했다.
『처음에 파출소에 신고되지는 않았어요. 여자들이 보통 자기가 당한 걸 말하지 않잖아요? 그러다가 나중에야 강간사건이 발생한 걸 알게 됐어요』
새벽 세시 반 어두운 상태에서 강간당한 남자의 얼굴을 일년이 지난 후에 명확히 기억할 수 있을까? 또 성기에 구슬이 있다는 것을 가정부인이 정신없이 강간당하는 순간에 느낄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비뇨기과 전문의들은 여자들이 섹스를 할 때 느낌상으로 남자의 성기를 파악하기 어렵다고 했다. 외설소설에 나오는 건 현실과 다르다는 의견이었다. 직접 보고 만지지 않는 이상 남자의 성기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의학적인 소견이라는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 나는 원로법관이었던 이시윤씨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특히 강간사건을 많이 재판했다. 남자 경험이 엄청 많고 대담하지 않고는 강간한 남자의 얼굴을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모르더라는 것이었다. 수사팀이 나가고 다시 신창원과 마주 앉았다. 그는 마음 속으로 흔들리는 내 모습을 눈치 챈 것 같았다.
『변호사님, 정말 강간은 하지 않았어요. 믿어주세요』
신창원의 논리적 항변
그의 눈빛이 간절했다. 그가 계속했다.
『참 변호사님, 아까 피해자라는 여자가 내가 강간을 하러 들어가는데 안경을 쓰고 들어갔다고 진술한 것도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요 전단에 안경을 쓴 모습이 워낙 많이 나와 있어서 그렇지, 난 안경을 쓰고 다니지 않았어요. 그 여자가 완전히 전단에서 본 내 인상을 보고 말하는 거 같았어요』
신창원의 표정에 억울함이 비쳤다. 그가 얘기를 계속했다.
『경찰에서 여태까지 내 범죄수법을 확인하면 잘 알 거예요. 전 그전에 어떤 집에 들어갈 때도 칼을 들고 들어간 적이 없어요. 이번에 강도할 때 처음으로 칼 든 거 빼고는요. 그런데 그 여자는 내가 칼을 들고 왔다고 진술하잖아요? 형사들이 내 범죄수법을 한번만 살펴보면 당장 알 텐데 안해요. 그리고 정말 강간을 할 것 같았으면 내가 복면을 하지 왜 얼굴을 뻔히 들고 하겠어요』
신창원의 말이 오히려 논리적이었다. 강간을 인정하게 하는 데 급급해서 아니라는 증거에 대해서는 거의 무시하는 수사였다.
『구슬보다 더한 제 신체적 특징이 있어요. 그런데 피해자라는 그 여자는 전혀 말도 못해요』
『어디 한번 벗어봐요』
내가 말했다. 신창원이 일어서서 내 앞에서 옷을 벗었다. 성기 주변에 누가 봐도 금방 눈에 띄는 특징이 있었다. 피해자라는 여자가 왜 그건 얘기하지 않았을까.
『그여자가 정말 나한테 강간당했다면 관계하는 시간 동안 이걸 보지 못했겠어요? 그리고 내가 강간하고 돈 8만원을 가져갔다고 하는데 도대체 알 수 없어요. 그때 저는 돈이 3천만원 있었어요. 그런데 돈 8만원을 가져가겠어요? 제가 진짜 굶을 때는 잔돈이라도 훔치지만 있을 때에는 절대로 안 훔쳐요』
그의 말이 조리가 있었다. 그의 행동방식을 이해할 때 행위의 결과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변호사님 제가 교활하게 범죄를 부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 법정에서 오히려 여죄를 더 자백하겠어요. 나중에 판사님에게 말할 시간만 확보해 주세요』
그가 결심한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궁금한 게 있었다. 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 김○○의 태도였다.
『참 그런데 왜 김○○가 그런 진술을 하지?』
내가 물었다.
『저도 왜 그런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솔직히 저도 숨길 게 있고 얘기할 게 있잖아요? 어떤 남자가 강간했다고 하겠어요? 아직 내 여자로 만들지 못했는데. 아마 정들고 사는 여자한테도 그런 소리는 못할 거예요』
맞는 말이었다. 어떤 저의나 원한이 있지 않는 한 그런 얘기를 하기 힘들었다. 그가 얘기를 계속했다.
『○○하고 그 기둥서방이 날 아주 호구로 봤어요. 세를 얻을 때 보증금 1천4백만원을 줬어요. 또 ○○가 빚을 갚아야 포주한테서 풀려 나온다고 해서 1천만원을 주기로 했어요. 나하고 지낼 때도 수시로 나가서 기둥서방하고 지내고 왔어요. 그때 배신감이 느껴지더라구요. 그래서 떠나겠다고 했더니 현찰 1천9백만원 정도를 내놓으라고 했어요. 그때 기분에서는 정말 돈이 있어도 주기 싫은 기분이었습니다. 나를 철저히 이용하려는 거였으니까요. 그래서 나중에 온 라인으로 부쳐준다고 하고 부쳐주지 않았어요. 아마 나에게 감정이 있으면 그것 때문일 거예요. 걔는 경찰도 이용해 먹는 애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트렁크에 실려 빠져나간 두 여자
접견을 끝내고 신창원을 그의 감방으로 보냈다. 교도소가 주간 근무를 종료하는 시각이었다. 숙소로 가기 위해서 교도소 마당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마당 한 구석에 세워둔 앰뷸런스 뒤에 이상한 게 보였다. 김○○와 피해자라는 여자가 가지 않고 바퀴 옆에 쪼그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 옆에서 수사관들이 문쪽을 보면서 정찰하는 모습이었다.
『왜 거기 숨어 있어요?』
내가 물었다.
『밖에 기자들이 와 있대요』
형사가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교도소에 부탁해서 이 앰뷸런스를 빌리지 그래요』
내가 말했다.
『앰뷸런스를 빌려서 여자들을 태워 나갔으면 좋겠는데 교도소 측에서 안 빌려줘요』
형사 한 사람이 원망스런 어조로 대답했다. 형사 한 사람이 궁리를 하더니 입을 열었다.
『하는 수 없다. 박형사는 밖에 나가서 망을 보고 이 여자들은 우리 차 트렁크에 넣어 나가야겠다』
뚱뚱한 형사가 하얀 승용차의 뒷 트렁크 뚜껑을 열었다.
『들어가세요』
그가 강간의 피해자로 온 여자를 보고 말했다. 그 여자가 냉큼 트렁크 위로 올라가 옆으로 누웠다. 이어서 신창원과 함께 살았다는 청바지가 올라가 마주보고 누웠다. 두 여자는 서로 마주보며 씩 웃었다. 잠시 후 두 여자를 태운 차는 부산교도소 철문을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결론
아침에 자고 있는데 집으로 전화가 왔다. 방송국이었다. 생방송 진행중인데 한두 가지 질문을 할 테니까 대답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첫번째 질문이 시작되었다.
『도둑이 의적처럼 여겨지는 사회 분위기가 있고 이런 가운데 엄변호사의 태도에 대해 범죄를 미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또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진, 어떻게 보면 스타 범죄자를 변론함으로써 명망을 얻으려는 게 아니냐, 이런 의혹의 눈초리도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자기 변호를 하겠습니까?』
벌써 방송은 나에게 범죄의 美化(미화), 공명심이란 죄명을 공개적으로 달아주었다. 자기변호를 하라는 용어는 벌써 죄인임이 전제된 것이다.
『도망자 신창원에 대해서 말을 하시는데 그건 신창원의 진술만 바탕으로 하는 겁니까? 아니면 객관적인 시각에서 신창원이란 인물과 그가 저지른 범죄에 접근하는 겁니까?』
또다른 질문이다. 한마디로 정확하지 않으면 말하지 말라는 뜻이다. 수사기관은 범죄에 대해 공판청구 전에 말하지 못한다. 말하면 징역 3년이다. 그래도 수사결과 발표라는 형식으로 형법조문을 눌러버린다. 변호사는 말해도 된다. 처벌대상이 안 된다. 일방적인 매도에 대해 한마디 항변하려니까 입을 막으려 한다. 권력이 있으면 무죄, 없으면 유죄다.
한 토론회에서 이시형 박사는 신창원 사건은 언론이 각본을 쓰고 신창원은 주역, 경찰이 조역을 맡았다고 정의했다. 그 말에 동감한다. 잃어버린 반론권을 찾기 위해 신창원 사건의 모든 진실을 책으로 쓸 예정이다. 법정에서 법과 사건을 논한다면 책에서는 거기서 말할 수 없는 인간 신창원을 통해 본 병든 우리의 사회를 발표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