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발굴

일제강점기 조선땅에 온 벽안의 선각자들 ⑩ 서양 간호사들의 활약

에드먼즈-쉴즈-셰핑, 트로이카 체제로 朝鮮 간호계 이끌다

  • 글 : 양국주 서빙더네이션스 대표  
⊙ 마거릿 에드먼즈, 保救女館(이대부속병원)에서 2년간 간호사 배출
⊙ 한국 간호계의 代母 에스더 쉴즈… 세브란스의학교에서 후진 양성
⊙ 셰핑, 1923년 조선간호부회 출범시켜… 1세대 간호사 李孝敬과 李金田 교육
⊙ 마거릿 프리처드, 전주에 예수대학교 설립으로 셰핑의 못 이룬 꿈 이뤄

梁國柱
⊙ 67세. 연세대 철학과 졸업. 연세대 대학원 경영학과 석사.
⊙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회장, 한국학생연합회 의장, 이스라엘문화원장 역임.
⊙ 1987년 워싱턴으로 이주. 現 미국 버지니아주 소재 NGO단체 ‘서빙더네이션스’ 대표,
    한국 내 사단법인 ‘서빙더피플’ 상임이사.
⊙ 저서: 《이스라엘 역사적 조명》 《조선교회사》 《제국의 무덤-아프간》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 외 다수.
미국 중서부 켄터키주의 렉싱턴(Lexington)에서 서남쪽으로 한 시간 반을 달리면 레바논(Lebanon)이라는 작은 도시가 나온다. 이곳에 있는 라이더 공동묘지에는 목포와 군산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했던 윌리엄 해리슨(1866~1928) 선교사 부부의 묘가 있다. 여기에는 해리슨의 두 번째 부인인 마거릿 에드먼즈(Margaret Edmonds·1871~1945)가 합장돼 있다. 원래 에드먼즈는 캐나다 온타리오 출신의 감리교 간호 선교사였다. 그녀가 조선 선교사로 와서 한 일은 간호사(看護士) 양성이었다. 1906년에 첫 번째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고작 해야 두 명뿐이었다.
 
  간호사 양성 환경이 척박했던 시절, 간호사를 길러내는 일 자체는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남녀가 유별했고, 게다가 외간 남성의 피고름까지 닦아주어야만 하는 간호사의 일은 사회적·문화적 정서로 도저히 용납되지 않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에드먼즈는 간신히 두 해에 걸쳐 졸업생을 배출했으나 힘이 몹시 부쳤다. 그는 1908년 전라도에서 사역하던 해리슨 선교사와 결혼하면서 목포로 내려갔다. 이후 에드먼즈는 20년간 목포와 군산에서 교회 개척과 복음 사역에만 전념했다.
 
  전라도 전주 은송리에 처음 약국을 열었던 남편은 원래 의사였으나 에드먼즈와 결혼한 이후부터 의사 본업을 제쳐놓고 전도하는 일에만 매달렸다. 에드먼즈도 복음 사역에만 전념했다. 1928년 7월 초 고베에서 떠난 러시아 황제호는 7월 20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두 달 뒤인 9월 22일 남편이 61세를 일기로 소천(召天)했다. 해리슨과 20년을 함께 살았던 에드먼즈는 고향인 캐나다로 돌아가지 않고 남편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조선 땅에서 1945년까지 살았다.
 
  에드먼즈는 보구여관(保救女館·이대부속병원의 전신)이란 여성 전용 병원에서 2년간만 졸업생을 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최초로 간호사를 양성한 인물로 기념되고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제중원이 있었던 현재의 세브란스병원 내에 간호사 양성소가 있었지만, 세브란스의학교는 1910년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졸업생을 배출한다.
 
 
  서양인 간호부의 출범
 
1884년 무렵의 마거릿 에드먼즈. 보구여관(이대부속병원)에서 한국 최초로 간호사를 배출해 냈다.
  세브란스 간호사 양성소는 안나 제이콥슨(Anna P. Jacobson)이 시작하였지만, 에스더 쉴즈(Esther L. Shields·1868~1940)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간호사 양성이 이루어졌다. 쉴즈는 에드먼즈보다 몇 해 전인 1897년 10월 조선에 왔지만, 처음에는 1906년 7월까지 평안도 선천에서 일했다. 그 때문에 쉴즈는 세브란스로 전출된 1906년 이후에라야 간호사 양성의 꿈을 펼 수 있게 된다.
 
  한국 간호계의 대모(代母) 에스더 쉴즈는 1939년 3월 70세의 나이로 은퇴, 이듬해 11월 고향인 펜실베이니아에서 71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야말로 세브란스에서 후진을 양성하느라 육체의 진액을 모두 쏟아부은 셈이다.
 
  1900년대 초 한국의 의료 체계는 그야말로 무(無)에서 출발했다. 제중원은 애초 궁궐과 고위층을 위한 진료소였으며, 선교사들이 운영권을 이양받은 이후부터 가난하고 헐벗은 서민들에게 빗장을 열었다. 보구여관 역시 정동에 문을 열었을 때, 지역의 특수한 정황상 일반 서민들이 찾아오기가 어려웠다. 그런 이유로 서민들이 편안하게 찾아오도록 동대문으로 옮기면서 비로소 부인과 치료 시설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의료진은 서양에서 온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의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서울에 온 간호 선교사들은 이런 이유로 친목과 연구 목적의 재선(在鮮) 서양인간호부회를 1908년 발족하였고, 목포로 시집간 에드먼즈가 자리를 비운 중심에 에스더 쉴즈가 있었다. 그러나 재선 서양인간호부회는 친목 모임 이상으로 발전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엘리자베스 셰핑의 입국과 지각변동
 
에스더 쉴즈. 쉴즈는 세브란스 간호사 양성소에서 본격적으로 간호사를 양성한 한국 간호계의 대모다.
  흔히 서서평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엘리자베스 셰핑(Elisabeth J. Shepping·1880~1934)은 1912년 조선에 왔는데, 초기에 광주 봉선동의 문둥병원에서 2년, 패터슨 의사가 안식년으로 자리를 비운 군산 구암병원에서는 1917년 세브란스병원으로 파견될 때까지 3년을 일했다. 이 무렵 서서평은 에드먼즈 해리슨 부부와 더불어 군산지부에서 3년을 함께 일했다. 서서평의 리더십은 이때부터 두드러졌다.
 
  그는 군산에 간호학교 설립을 청원하고 이에 대한 자금도 선교부에 요청한다. 당시 장로교는 세브란스와 연희전문학교, 평양신학교, 숭실대학 등을 독자 운영이 아닌 각 교단이 연합하여 운영하도록 하였다. 그런 이유로 남 장로교단은 이미 세브란스 내에 간호사 양성소가 있어 간호학교 설립을 허가하지 않는 대신, 군산병원에서 필요로 하는 범위 내에서 소규모로 간호사를 양성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1917년 가을 셰핑은 세브란스로 옮겨가면서 군산에서 길렀던 제자 두 명, 이효경(李孝敬)과 이금전(李金田)을 세브란스로 데려간다. 이금전은 토론토 의과대학에서 예방 간호에 대한 과정을 연구, 6·25전쟁 후 연세대 간호대학장과 대한간호협회장을 지냈고, 이효경은 엘리자베스 셰핑이 조선간호부회 회장 재임 10년 동안 부회장과 만주 동포 위문단을 이끌었다.
 
  에드먼즈는 1914년부터 1917년까지 군산지부에서 셰핑과 함께 보내며 셰핑의 헌신과 리더십을 목격한다. 이후 에드먼즈는 재선 서양인간호부회의 해체와 조선간호부회로의 합병에 힘을 실어준다. 셰핑은 1917년부터 1919년까지 세브란스에 머물면서 에스더 쉴즈와 세브란스 간호학교를 맡기도 했다. 셰핑 선교사를 연결고리로 하는 근대 한국 간호계의 ‘트로이카’ 체제가 형성된 셈이다.
 
  1923년 셰핑은 기존의 재선 서양인간호부회와 그동안 양성한 조선인 간호사들을 섞어 조선간호부회를 발족시키고, 초대 회장이 된다. 조선간호부회는 오늘날 대한간호협회의 전신이다. 셰핑은 1934년 죽기 한 해 전까지 10년에 걸쳐 조선간호부회의 초석을 다져놓았다. 그의 강력한 리더십은 쉴즈와 에드먼즈를 비롯한 재선 간호 선교사들의 전적인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독립지사들을 돕고 이들과 자유롭게 내왕하던 셰핑의 처신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본 당국은 셰핑으로 하여금 세브란스를 떠나도록 압력을 행사했고, 언더우드(Horace Underwood·1859~1916)는 셰핑이 광주 제중원으로 돌아오기까지 세브란스에서 보낸 2년의 세월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919년 3월 26일, 남 장로회의 유진 벨(Eugene Bell·1868~1925)을 비롯한 네 명의 선교사가 제물포에서 미제 자동차 뷰익(Buick)을 구입해 서울을 떠났다. 이들은 지붕이 없는 뷰익 컨버터블에 몸을 맡기고 조선의 봄날을 만끽했다. 그러나 이들이 수원에서 10여 km 떨어진 지금의 평촌역 인근 철로길 교차로를 통과할 무렵, 갑자기 자동차가 경사가 급한 철로길을 넘지 못하고 중간에서 멈춰서고 말았다. 이때 서울행 열차가 뷰익의 뒷좌석을 산산조각내고 말았다. 이 사고로 유진 벨의 아내 마거릿 불과 목포 선교부의 폴 크레인이 즉사했다. 유진 벨로서는 두 번째 부인을 잃은 아픔이었다.
 
  이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세브란스 의료진이 현장에 급파되었다. 조선간호부회 회지(會誌)에 따르면, 올리버 에이비슨(Oliver R. Avison)과 제시 허스트(Jesse W. Hirst)는 에이비슨의 자동차를 이용하여 현장으로 갔고, 우리의 훌륭한 간호사인 셰핑은 언더우드의 차를 타고 출발했다. 언더우드와 셰핑은 같은 미국인이지만 소속된 교단이 다르다. 에이비슨 원장과 세브란스 산부인과 과장을 지낸 허스트는 같은 소속이면서 별다른 얘기가 없다. 하지만 셰핑 부분에 가서는 훌륭하다는 수식이 붙는다. 이는 셰핑이 세브란스에서 일하면서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훌륭하다는 말은 사물이나 행위에서 비교우위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이다. 셰핑의 삶은 그 자체가 남의 본보기가 되는 삶이었다.
 
 
  세계간호협회 정회원으로 가입시키려 노력
 
네 명이 졸업하던 1918년 세브란스 간호사 양성소 졸업 사진. 뒷줄 중앙 왼편이 쉴즈, 오른편이 셰핑이다. 가운데 휘장을 들고 앉은 이는 감리교에서 사감으로 파견한 인물이다.
  셰핑은 조선간호부회 회장으로 재임하였던 10년 동안 실용간호학과 간호학 교과서도 번역, 편찬했다. 조선간호부회가 공창(公娼) 폐지운동을 전개하면서 단순한 연구와 자기계발뿐 아니라 사회적 리더십을 발휘하도록 눈높이를 높인 것이다. 선교 관련 양성소뿐 아니라 관립 간호사 양성소 등을 포함하여 간호부회의 지경(地境)을 넓혔다. 그는 또한 조선간호부회 회의록을 한국어로 기록하였고, 스튜어트가 지은 《간호역사개요》를 한글로 번역, 출판하였다.
 
  이러한 기여 이외에도 셰핑은 조선간호부회를 세계간호협회의 정회원으로 가입시키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 식민 통치 아래에서 본인이 회장을 맡고 있을 때에 조선간호부회를 단독으로 국제기구에 가입시켜 잃어버린 조선인의 위상을 찾고자 노력한 것이다.
 
  1929년 7월, 셰핑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국제간호협의회(ICN·International Council of Nurses) 총회에서 1500명의 대의원 앞에서 조선의 가입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일본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그의 꿈은 그가 길러낸 제자들에 의해 1949년 조선간호부협회가 국제간호협회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함으로써 이루어졌다.
 
  1934년 6월 엘리자베스 셰핑 선교사는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떠나자 광주 양림동 오웬기념각에는 그로부터 사랑받았던 창녀들, 문둥병자, 남편으로부터 소박맞은 가난한 여인들, 부동교(不動橋) 밑에서 고단한 삶을 살던 걸인들이 함께 모여 범시민적 추도회를 거행했다.
 
  조선간호부회는 회지에 ‘한국 민족의 슬픔을 안고서 가신 님’이라는 제목으로 서서평의 죽음을 애도했다.
 
 
  프리처드가 이룬 셰핑의 꿈
 
간호사 양성소 졸업식 사진에서의 엘리자베스 셰핑. 1929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국제간호협의회(ICN) 총회에서 조선의 가입을 호소했지만, 일제의 방해로 좌절됐다.
  1930년 전라도 광주에 간호 선교사로 온 마거릿 프리처드(Margaret F. Pritchard)는 그의 편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저는 지난 일곱 달 동안 조선에서 보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제가 티푸스를 앓았던 두 달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흥미로운 시간들이었습니다. 저는 조선을 즐기고 있습니다. 조선은 아름답고, 사람들은 사랑스럽고, 하나님은 제 기도에 응답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곳 사람들이 어떻게 그토록 가난하게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이가 일용할 양식을 위해 하루에 5센트를 씁니다. 이들의 경제는 너무나도 딱해 직접 눈으로 목도하지 않으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봉사의 기회가 너무 큰 이곳에 저 자신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커다란 특권이고, 기쁨입니다.”
 
  마거릿 프리처드는 1930년 광주에 와서 1970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1934년 2월 쓰러진 셰핑 간호 선교사의 마지막 병상을 지키며 그와 긴 시간을 함께한 인물이다. 1917년 군산에 간호학교를 세우고자 했던 열망, 1919년 세브란스간호학교에서 중도하차해야 했던 낙심, 장 흡수부전증이라는 풍토병으로 병마와 싸워야 했던 시간들…. 셰핑이 조선간호부회를 섬기며 국제간호부회 가입과 후진 양성이라는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 안타까움이 프리처드에게 고스란히 전수되었다. 광복 이후 그는 다시 찾은 조선에서 셰핑 선교사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어갔다. 전주예수병원 내에 기전간호대학(현재의 예수대학교)을 세운 것이다. 셰핑과 프리처드의 꿈이 전주에서 함께 익어간 것이다.
 
 
  ‘연합 정신’ 사라진 한국 간호계
 
1929년 세계간호부회 총회에 한국 대표단으로 참석했던 셰핑 선교사(앞줄 가운데)와 간호사 이효경(오른쪽), 이금전(왼쪽).
  애초 한국 선교는 미국의 장로교단과 감리교단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그들이 우리나라에 파송했던 선교사의 숫자가 자그마치 2000여 명에 다다른다. 함께 온 식구들과 이들을 돕던 미국 내 파송교회와 후원자들까지 더한다면, 조선-한국을 생각하고 우리나라가 잘되기를 기도하고 바랐던 사람들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도시마다 큰 규모의 병원부터 작은 클리닉까지 정부가 담당한 것보다 선교사들 담당 병원의 범위가 더 컸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망국(亡國)의 설움을 간직한 가난한 조선인들을 끊임없는 사랑과 연민으로 대하며 자신의 삶을 바쳤다. 한국 사회에 대한 기독교와 불교계의 헌신은 교육과 의료, 사회 복지 분야의 통계 수치에서 한눈에 드러난다.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서 기독교가 끼친 영향력은 간호계에도 절대적이다. 1900년대부터 1935년 무렵까지 간호사라는 직종은 그야말로 식자층 집안의 아녀자들에게는 절대 금기시되는 직종이었다. 기왕이면 학교 선생을 택하지 병원에서 온갖 질병과 싸워야 하는 간호사를 직업으로 택하려 하지 않았다. 소위 ‘방문 간호’나 ‘예방 간호’는 그 당시로서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런데 작금 대한간호협회 산하에 40만명에 이르는 회원이 있거니와 해마다 새내기 면허 간호사들이 1만5000명씩 배출되고 있다. 1960년대 독일로의 간호사 파견은 달러 박스, 각광받는 직종으로의 인식의 전환을 불러 일으켰다. 지금은 선생과 간호사가 결혼 대상 1순위로 평가받는 인기 직종이 되었다. 미국과 중동, 우리나라 의료 분야의 세계 수출이 늘어날수록 기왕에 해외로 진출한 간호사들과 더불어 전문 간호 인력은 무한대로 늘어날 전망이다.
 
마거릿 프리처드가 기전간호대학(예수대학교 전신) 졸업생들에게 캡을 씌워주고 있다.
  간호 직종의 위상은 집권 여당 내에서 비례대표 의원직까지 꿰차고 있는 상황이다. 하나 간호정책의 정치화는 간호계를 위협하는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간호계의 수장(首長)인 간호협회의 회장 자리를 노리는 정치판의 암투가 심각한 수준이 되었다. 더욱이 우리나라 간호계를 주름잡아 온 연세대 출신들의 아성(牙城)에 ‘보구여관’의 후예인 이화여대 출신들의 집단적인 협공이 양자 간의 갈등 요인을 넘어 간호계의 암적 기운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간호의 정치화는 원래 우리나라에 간호학의 이상을 심어준 제이콥슨과 에스더 쉴즈, 에드먼즈나 엘리자베스 셰핑의 생각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병들고 지친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가서는 징검다리였다. 에스더 쉴즈는 보구여관의 간호 인력 양성을 위해 힘을 보탰다. 강의도 맡았거니와 임상 부분의 협력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감리교단은 연합으로 세브란스병원에 의사와 간호 전문 인력을 파견하기도 했다. 선교의 이상을 놓고 협력한 자료들은 너무나 많다. 그러한 선교는 간호 분야에 걸쳐 이상적인 연합정신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지금은 초기 간호계의 선배들이 보여준 아름다운 협력과 연합의 정신이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런 연합이 존재하기나 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우리나라 사회 복지 분야의 팽창과 더불어 간호 인력의 수요는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이에 따른 간호 인력의 공급도 중요하지만 현재 간호계의 풍토를 고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해 보인다.
 
  대한간호협회는 에스더 쉴즈와 셰핑, 에드먼즈와 셰핑으로 이어온 아름다운 화합과 협력을 배워야 한다. 파이가 작았을 때는 내 것, 네 것 없이 사이좋게 나누다 파이가 커지니 욕심도 덩달아 커졌다. 안락한 삶을 포기한 채 우리 땅에 와서 고단한 삶을 자청했던 간호계의 대모들이 오늘 한국 간호계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고 혀를 끌끌 차지나 않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