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의 별과 새를 따라 수천km 항해… 해류를 거슬러 未知의 세계로
⊙ 3000년 前 피지·통가·사모아 정착 후 차례로 하와이·이스터 섬 건너, 800년 前 뉴질랜드에서
大항해 마쳐
⊙ 폴리네시아는 인류문화 연구의 좋은 사례… 동일한 인종, 유사한 언어 사용
⊙ 20세기 제국의 시대 거치면서 미국·영국·프랑스·일본·호주·뉴질랜드 지배 받아
⊙ 21세기 태평양은 新舊 패권국가들이 치열히 다투는 外交 전쟁터
⊙ 통가(Tonga), 태평양 섬나라 유일의 王國
⊙ 3000년 前 피지·통가·사모아 정착 후 차례로 하와이·이스터 섬 건너, 800년 前 뉴질랜드에서
大항해 마쳐
⊙ 폴리네시아는 인류문화 연구의 좋은 사례… 동일한 인종, 유사한 언어 사용
⊙ 20세기 제국의 시대 거치면서 미국·영국·프랑스·일본·호주·뉴질랜드 지배 받아
⊙ 21세기 태평양은 新舊 패권국가들이 치열히 다투는 外交 전쟁터
⊙ 통가(Tonga), 태평양 섬나라 유일의 王國
전통적으로 이 지역에 영향력을 발휘해 온 미국·뉴질랜드·호주·일본과 새롭게 부상(浮上)한 중국이 ‘원조(援助)’를 내세워 사활을 건 패권다툼을 하고 있다. 여기에 ‘한국’의 입지는 초라했다. 아니, 오히려 퇴보하고 있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절 해양자원(원양어업) 개척 차원에서 추진했던 것들조차 시간이 지나면서 관심 밖으로 멀어졌다.
2006년부터 ‘중국-태평양도서국가포럼’을 운영하고 있는 중국은 ‘돈’과 ‘노동력’으로 태평양을 공략하고 있다. 사회기반시설(도로, 방파제)을 공짜로 지어 주는가 하면, 필요할 때는 ‘현금’으로 직접 지원하고 있다. 총리를 비롯한 고위 인사들이 이들 국가를 방문하기도 했다.

한때 태평양 일부 지역을 지배했던 일본 또한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동원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여기에는 원조계획을 수립하고 조정하는 일본 외무성과 국제협력협회(자이카・JICA), 일본은행이 선봉에 나선다. 일본이 이 지역에 투입한 원조금의 누적액수는 수십억 달러에 달한다. 기자는 취재 도중 현지인들로부터 “Are you Jican(일본 협력기구대원입니까)?”이라는 말을 여러 번 들어야 했다.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 서방세계는 중국의 영향력 확대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최근 중국이 자체 개발한 소형 여객기(MA-60)를 통가(Tonga)에 무상(無償) 지원하자 뉴질랜드 정부가 항공기의 안전성 문제를 들며 통가에 제공하던 수백만 달러 규모의 원조자금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태평양 국가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조기에 차단하겠다는 계산에서다.
태평양 폴리네시아 섬나라를 돌면서 당초 기자가 가졌던 물음은 ‘태평양 섬나라에 한국의 영향력을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태평양을 너무 모른다. 이 지역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 하는 원초적 질문으로 바뀌었다.
폴리네시아人은 라피타 문명의 후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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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년 전 고대 폴리네시아인(라피타인)들이 사용했던 도자기와 보석류의 일부. |
미크로네시아 지역에 있는 국가들이 미국의 영향력 안에 있다면, 폴리네시아 국가들은 뉴질랜드(폴리네시아 서쪽)와 프랑스(폴리네시아 동쪽)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통가, 사모아, 쿡제도 등 일부 섬나라 젊은이들은 1·2차 대전 때 뉴질랜드군(軍)에 배속돼 참전하기도 했다. 폴리네시아 동쪽에 있는 소시에테, 투아모투 등은 프랑스 영향력하에 있다. 가장 동쪽에 있는 이스터 섬은 칠레 관할하에 있다.
폴리네시아의 섬은 크게 산호초와 화산섬으로 구성돼 있다. 해발이 낮은 섬들은 대부분 환초(산호초)이고, 해발이 높은 섬들은 화산섬이다. 대부분 열대·아열대 기후로 강수량이 많고 삼림이 무성해 먹거리는 풍부하다.
광활한 태평양에 여러 섬이 흩어져 있지만 이곳에 사는 폴리네시아인(人)들은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고고학계에서는 폴리네시아인을 라피타(Lapita) 문명의 후손들로 보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000~3000년 전, 동남아 지역에서 이주해 온 한 무리의 인류가 뉴기니 섬 인근의 뉴칼레도니아에 거주한다. 이들은 불에 구운 형태의 도자기(라피타)를 사용했는데 이들을 일컬어 라피타 문명, 라피타인(人)이라 한다. 이들 중 일부(폴리네시아인)가 다시 1000~2000년의 시차를 두고 태평양 서쪽의 여러 섬으로 흘러 들어가 폴리네시아 문화를 만든다.
기자는 폴리네시아인들의 항해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 지도를 볼 때 적도 아래쪽의 남태평양 바닷물은 동쪽(남미 대륙)에서 서쪽(인도네시아·뉴기니)으로 흐른다. 그런데 해류 방향과 반대로 폴리네시아인들은 동쪽에서 서쪽 태평양을 향해 건너간 것이다. 쉽게 말해 해류를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인류 문명의 수수께끼를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해 온 세계적 석학(碩學) 재러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는 《문명의 붕괴》에서 이렇게 밝혔다.
<과거에 역사학자들은 바람과 해류 때문에 해로에서 벗어난 어부들이 폴리네시아 섬들을 우연히 발견해서 정착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폴리네시아의 모든 섬들은 정밀한 계획에 따라 발견되고 정착된 것이라는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우연한 표류였다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해류와 바람의 방향에 따랐겠지만 대다수의 폴리네시아 섬들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차례로 정착되었다. 따라서 미리 예정된 계획에 따라 맞바람을 안고 미지의 섬으로 모험을 떠나거나, 바람의 방향이 일시적으로 바뀔 때를 기다렸던 여행자들이 새로운 섬들을 차근차근 발견해 나갔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大항해는 800년 前 뉴질랜드에 이르러 막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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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네시아인들은 놀라운 항해술로 미지의 세계를 향했다. 쿡제도 북쪽에 있는 마히니키 섬 주민들이 오래 전에 사용하던 배이다. |
6만~4만여 년 전 빙하기 시절, 지금의 인도네시아, 뉴기니 섬, 호주 등은 같은 땅덩어리였거나 지리적으로 가까웠다. 그만큼 인류의 이동이 자유로웠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 지각변동으로 호주가 분리되고 일대 지역에 여러 섬들이 생기면서 이동은 정체됐다. 그러나 인류는 아시아 본토에서 인도네시아 섬들을 거쳐 호주와 뉴기니 섬까지 진출했고 뉴기니 동쪽의 솔로몬제도에서 멈췄다.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에 폴리네시아인의 확산은 선사시대에 있었던 가장 극적인 바다 개척이었던 것이다.
라피타 양식의 도자기를 만든 해상·농경 민족은 지금부터 4000~3000년 솔로몬제도에서 1600km를 항해해 지금의 피지, 통가, 사모아에 이르면서 폴리네시아인의 선조가 됐다. 나침반, 문자, 금속도구 등은 없었지만 그들은 작은 배로 태평양을 건넌 항해술의 대가(大家)였다. 방사능 탄소측정법을 동원해 도자기, 돌연장, 집터와 사원, 해골 등을 조사한 결과, 폴리네시아인들의 확장 시기와 경로는 고고학적으로 입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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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네시아인들은 작은 배 두 척을 연결하면 더 멀리 갈 수 있고, 더 많은 사람이 탈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
<폴리네시아인의 원조는 아시아인들이다. 그중에서도 동남아시아인들이라고 인류학자들과 유전학자들은 보고 있다. 실제로 동남아인들과 폴리네시아인들은 피부색이나 생김새가 유사하다.>
그러나 동남아인들과 폴리네시아인들은 체격 면에서 차이가 확연했다. 폴리네시아인들은 동남아 사람들에 비해 키가 크고 덩치도 좋다. 과학자들은 먹을 것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폴리네시아인들은 탄수화물이 풍부한 고구마·감자류와 육류·해양수산물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체질이 변한 것이다.
인도네시아, 뉴기니 등지에 수만 년을 살았던 최초의 폴리네시아인들은 뉴칼레도니아 일대로 이주해 라피타 문명을 만든 후 태평양으로 동진(東進)했다. 피지, 통가, 사모아에 정착한 이들은 이곳에서 1000년 동안 거주하다가 다시 대(大)항해를 시작한다. 한 무리는 적도 위쪽(지금의 미크로네시아)으로, 또 다른 무리는 동쪽(프랑스령 폴리네시아와 이스터 섬)과 남쪽(뉴질랜드)으로 향했다. 하와이와 이스터 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불과 1200년 전이다. 폴리네시아인들의 대항해는 지금부터 800여 년 전쯤 뉴질랜드를 발견하면서 마침표를 찍는다. 폴리네시아 여러 섬들 중에서 가장 넓은 섬(뉴질랜드)에 도착한 폴리네시아인들은 마오리(Maori) 문화를 만들며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간다.
인종과 언어의 유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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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네시아인들은 지금부터 800년 전, 뉴질랜드에 정착하면서 대항해를 마쳤다. 뉴질랜드 마오리족이 사용하던 전통문양. |
인종적·문화적으로 폴리네시아인의 뿌리가 같다는 증거는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수천km씩 떨어져 있는 태평양의 여러 섬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놀랍게도 비슷한 말을 사용해 왔다. 언어학자들은 이를 통해 인종적 관계성과 언어의 기원을 추적했다. 폴리네시아 여러 섬나라 사람들이 작은 배(카누)를 부를 때 어떻게 발음하는지 실례를 들어 보자.
사모아(3000년 전 정착) 사람들은 카누를 Va’a(바~)라고 부른다. 사모아보다 뒤늦게 사람이 살기 시작한 쿡제도에서는 Vaka(바카)라고 한다. 쿡제도 다음으로 인간이 정착했던 하와이 지역에서는 Wa’a(와~)로, 가장 늦게 정착한 뉴질랜드에서는 Waka(와카)라고 한다.
섬에 정착한 시기와 위치는 달라도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지금도 비슷하다. 폴리네시아의 여러 섬에서 비슷하게 발음하는 단어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폴리네시아 사람들은 수십 세기 동안 같은 노래를 했고, 같은 말을 사용해 왔다. 18세기 태평양을 세 차례 항해했던 영국의 유명한 탐험가이자 해군 장교였던 제임스 쿡(James Cook) 함장은 자신의 통역사로 타이티의 원주민을 배에 태우고 다녔는데 1774년 쿡 함장이 이스터 섬에 도착했을 때 자신의 통역사와 이스터 섬 원주민이 직접 대화를 하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는 기록이 있다.
“미개한 이들이 우리보다 더 빠른 배 타고 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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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네시아인들은 새로운 섬을 찾아 태평양을 항해할 때 섬과 섬을 오가는 새와 밤하늘의 별들을 이용했다. 이들은 해류와 바람까지 계산해 목표지점에 도달했다. |
폴리네시아인들은 통나무의 속을 파내 배(Vaka·카누의 일종)를 만들었고, 두 배를 나란히 이어 많은 사람이 탈 수 있는 배도 만들었다. 그들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해류에도 불구하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동진해 갔다. 뉴질랜드박물관의 자료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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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코코넛 껍질에 구멍을 내 별의 위치를 파악한 후 자신들의 배가 어디쯤 있는지를 가늠했다. 오늘날의 GPS와 같은 장치는 없었지만 주어진 자연환경을 최대한 활용했다. |
항해 경험이 쌓이면서 폴리네시아인들의 항해술은 더욱 발전해 갔다. 그들이 사용한 배는 점점 더 커지고 속력도 빨라졌다. 16~17세기 무렵 서양인들은 바다 한가운데서 폴리네시아인들을 발견한 후 “미개한 이들이 우리보다 더 크고 빠른 배를 타고 다녔다”는 기록을 남겼다.
폴리네시아인들의 놀라운 항해로 그들만 이동한 것은 아니었다. 개, 돼지, 닭 그리고 쥐도 함께 태웠다. 폴리네시아인들은 먹고살기 위해 식량도 함께 싣고 다녔다. 얌(Yam), 타피오카(Tapioca), 타로(Taro), 쿠마라(Kumara), 빵나무(Breadfruit)와 같은 고(高)탄수화물 농작물(감자·고구마류)도 가져갔다. 단백질은 바다에서 잡아 올린 물고기로 보충했다. 농축된 탄수화물 식량과 육류, 물고기는 그들의 체질을 확 바꾸었다. 흑갈색 톤의 피부에 허리와 엉덩이가 구분이 안 되는 육중한 몸매…. 지금의 폴리네시아인들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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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명의 흥망성쇠를 연구해 온 세계적 석학 재러드 다이아몬드 미국 캘리포니아대학(UCLA) 교수. |
물론 폴리네시아의 여러 섬이 사회문화적으로 유사한 측면이 많지만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니다. 세계적 석학(碩學)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자신의 저서 《총, 균, 쇠》에서 폴리네시아의 다양성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폴리네시아는 환경과 관련해 인간 사회가 다양화되는 모습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중략) 폴리네시아 사회의 경제적 기반은 자급자족적인 가족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일부 섬에서는 기능적 전문가 집단도 있었다. 각 사회는 평등에 가까운 촌락 사회에서부터 계층이 세분화된 사회까지 두루 갖춰져 있었다. 후자의 경우 위계 질서가 뚜렷한 수많은 계보와 추장, 평민 계급 등으로 구분되었다. 각각의 구성원들은 자기 계급 내에서만 결혼했다. 정치 조직 면에서도 여러 개의 독립적인 부족이나 촌락 단위로 나눠져 있는 것에서부터, 정복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상비군까지 갖추고 있는 원시 제국(帝國)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이러한 차이점들이 존재한 것은 섬의 기후, 지질 유형, 해양 자원, 면적, 지형적 분열, 고립성 등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태평양에는 무인도(無人島)를 포함해 2만5000여 개의 섬이 있다. 아직도 미국, 프랑스, 뉴질랜드의 통치를 받는 섬들이 있지만 대부분 독립국 형태로 존재한다. 이곳에는 14개 독립국이 있다. 지역별로 보면, 폴리네시아에는 사모아·통가·쿡제도·투발루·니우에·나우루·키리바시가 있고, 미크로네시아에는 팔라우·마셜제도·미크로네시아연방, 멜라네시아에는 파푸아뉴기니·피지·바누아투·솔로몬 등이 있다. 흔히 태평양 지역은 지상낙원으로 거론되곤 한다. 그러나 파푸아뉴기니를 제외하고는 인구도 적고(대략 1만~수십만 명), 육지 면적 또한 작아 산업기반이 마련돼 있지 않다. 경제적으로 많이 낙후돼 있다. 해발 또한 낮아 기후변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과 사이클론 같은 자연재해에도 취약하다. 태평양의 외딴 섬나라에 불과한 이들 국가는 보기와 다르게 상당한 매력을 갖고 있다. 우선 이들 국가가 보유한 광활한 해역(배타적 경제수역 200해리 적용)을 들 수 있다. 14개 독립국가의 전체 육지면적은 55만km²에 불과하지만(남한의 5배 정도. 파푸아뉴기니는 상당히 넓다), 이들 나라는 총 3000만km²에 달하는 해양관할권을 갖고 있다. 태평양은 주인 없는 바다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착각이다. 태평양의 대부분이 이들 나라의 바다 영토로 나뉘어 있다. 그만큼 이들 나라는 국가별로 풍부한 해양자원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먹는 참치의 90% 이상이 남태평양에서 잡힌다. 참치를 잡으려면 해당 국가에 입어료(入漁料)를 내야 한다. 수산물뿐만 아니라 바다 밑 해양자원 또한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대표적인 것이 해저열수광상(海底熱水鑛床)이다. 바다 밑(1000~3000m)의 뜨거운 마그마로 가열된 바닷물이 온천처럼 솟아나는 과정에서 금속이온이 차가운 물에 접촉해 형성된 광물자원 지역을 말한다. 해저열수광상에는 금과 은, 구리 등 주요 금속이 대량 함유돼 있어 차세대 전략 자원으로 꼽힌다. 우리의 해양과학기술원이 주축이 돼 2008년부터 통가 그리고 2011년에는 피지 정부로부터 탐사권을 획득해 현재 조사 중에 있다. 태평양 국가를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이들 나라가 국제무대에서 발휘하는 영향력이다. 유엔총회 등 각종 국제기구에서 투표를 할 때 이들 나라는 미국, 중국, 일본처럼 똑같이 한 표를 행사한다. 만약 독도관할권을 놓고 유엔에서 투표로 결정한다는 극단적 상황이 발생한다고 치자. 수십 년 동안 경제적 지원을 받아 온 이들 나라가 과연 누구를 지원하겠는가. 태평양 국가의 경제적 가치와 국제무대에서의 중요성을 간파한 미국, 중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등은 일찌감치 섬나라들과의 협력을 강화해 왔다. 주요 선진국들은 원조국으로 맹활약하면서 동시에 태평양도서국포럼(PIF)의 대화상대국으로 참여하고 있다. 우리도 1995년부터 후발주자로 참여하고 있지만 영향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다. 태평양 섬나라에 대한 우리의 무상원조는 전체 액수의 0.3%에 불과하고, 경제교류도 미미하다.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우리 정부는 2011년부터 한국-태평양도서국 외교장관회의를 3년 주기로 개최하기 시작했다. |
이스터 섬의 거석상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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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네시아에는 크고 작은 문명들이 흥했다가 사라졌다. 폴리네시아 최남동쪽 이스터 섬에 세워져 있는 거석상(모아이). 거대한 석상을 누가, 왜,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
모아이는 사람 얼굴을 한 큰 석상으로, 높이는 3m에서 20m까지 다양하고, 무게는 100t에 달하는 것도 있다. 이스터 섬에는 400여 개의 모아이가 있다.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들은 모아이를 왜 만들었으며, 어떻게 만들었는지 지금도 풀지 못하고 있다. 다만 몇 가지 합의된 결론은 있다. 한때 이 좁은 섬(160km²·서울의 4분의1)에 4만~6만여 명의 주민이 살았고, 적의 침입을 막거나 신(神)을 숭배하는 뜻에서 거대한 돌상을 만들었으며, 기후와 생활환경의 변화로 주민들이 대거 사라졌다는 점이다.
폴리네시아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이스터 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200년 전(기원 후 900년경)부터이다. 폴리네시아의 다른 섬들과 마찬가지로 이스터 섬에도 족장 제도와 일부 농경 문화가 정착되면서 인구가 늘어났다.
지금은 황폐한 땅이지만 과거에는 숲이 무성한 비옥한 땅이었다는 증거가 여럿 발견됐다. 현재 남아 있는 거석상은 그 무렵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삼림이 황폐해지면서 인구가 급격히 줄었다. 천연자원이 부족해지면서 살코기를 제공하던 야생동물까지 줄었고 식량생산까지 곤두박질쳤던 것이다. 인구가 준 데는 18~19세기 유럽인들이 이곳을 드나들면서 함께 따라온 전염병(천연두)과 노예사냥도 한몫 했다.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하와이, 피지 등 태평양의 많은 섬들에 대한 기록에서 보듯이 그들은 유럽의 질병까지 이스터 섬에 안겨 주었고, 그런 질병에 대해 면역성이 전혀 없었던 섬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 갔다. 구체적으로 언급된 최초의 전염병은 1836년경의 천연두였다. 또한 태평양 일대의 다른 섬들에서도 그랬듯이, 섬 사람들을 노예로 납치하는 만행은 이스터 섬에서 1805년 처음 자행되었고, 1862~1863년에 절정을 이루었다. 그해는 이스터 섬의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시기였다. 페루인들이 20여 척의 선박을 몰고 와 1500명(살아남은 사람의 절반)을 강제로 납치해 노예로 팔아 넘겼다. 1872년 이스터 섬의 주민 수는 111명에 불과했다.>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문명의 붕괴 요인으로 환경파괴, 환경문제에 대한 사회의 대응, 기후변화, 적대적 이웃, 우호적인 무역국 등 다섯 가지를 든다. 한때 번성했던 이스터 섬은 현재 칠레 사람들이 대거 이주해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전체 주민 수 5000여명).
유럽인과 접촉 후 변하기 시작한 폴리네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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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3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태평양을 건넌 영국 해군장교 제임스 쿡(James Cook) 함장. 그는 태평양에 있는 여러 섬들을 방문해 원주민들을 만났다. 폴리네시아 섬나라 쿡제도는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
태평양을 처음 발견한 이는 1513년 9월, 스페인 탐험가 발보아였다. 그는 중앙아메리카의 파나마를 지나 지금의 태평양에 다다랐다. 그는 태평양을 ‘남쪽 바다’라고 불렀는데 그 당시 자신이 발견한 바다가 지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바다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런 지 7년 뒤, 1520년 11월 스페인의 마젤란이 남미(南美) 대륙 남단을 통해 태평양을 다시 발견한 후 이 바다를 태평양이라 처음 불렀다. 마젤란은 태평양의 서북쪽을 항해했는데 1521년 괌(Guam)을 발견한 후 마침내 필리핀 세부(Cebu) 섬에 도착한다. 그는 이곳에서 원주민에게 살해된다. 그러나 마젤란 탐험대는 인도양을 거쳐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가 세계 최초로 지구를 항해한 기록을 세운다.
마젤란 이후 수많은 유럽의 탐험가들이 태평양을 찾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태평양을 얘기할 때 영국의 해군장교이자 탐험가인 제임스 쿡(James Cook) 함장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773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태평양을 항해, 대부분 섬들을 발견했다. ‘쿡제도’라는 국명(國名)도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당시 유럽인들은 태평양의 여러 섬을 지상낙원으로 생각했다. 남태평양 솔로몬제도에서 20년 넘게 살았던 권주혁(權主赫)씨는 자신의 책 《여기가 남태평양이다》에서 이렇게 적었다.
<끝없이 푸른 하늘과 밝고 뜨거운 태양, 해변의 금빛 모래사장, 크리스탈처럼 속히 훤히 들여다보이는 바닷가에서 여유 있게 물고기를 잡는 원주민, 바닷가에 줄 서 있는 야자나무 밑에 누워 있는 구릿빛 피부의 건강한 여인들을 유럽인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낙원(Paradise), 이상향(Utopia), 에덴(Eden), 샹그릴라(Shangri-La) 등의 별명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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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고갱의 작품. 그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타이티에 거주하며 수많은 여인을 그림에 남겼다. |
유럽인들이 태평양 섬나라를 찾기 시작하면서 태평양 원주민들의 삶에 큰 변화가 왔다. 먼저 종교가 바뀌기 시작했다. 18~19세기에 걸쳐 천주교와 기독교가 전파됐고 현재 이곳의 많은 나라는 기독교 국가로 탈바꿈했다. 서양 종교의 유입으로 오래 전부터 내려왔던 식인(食人) 풍습과 토속 신앙도 사라졌다.
원주민들은 돈을 노린 유럽 노예사냥꾼들로 인해 큰 고통도 겪었다. 이른바 블랙버딩(Blackbirding·노예사냥)이 자행됐다. 서양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노예사냥은 19세기 후반에서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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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프랑스 표현주의 화가 앙리 마티스의 작품 <폴리네시아의 하늘>. 19~20세기 서양의 많은 예술가들은 태평양 폴리네시아를 동경했다. |
1·2차 大戰 후 주인이 바뀐 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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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가, 사모아, 피지, 쿡제도, 니우에 등 폴리네시아 섬나라들에서 차출된 수많은 젊은이가 1, 2차 세계대전 당시 뉴질랜드군, 미군, 호주군 등에 편성돼 전투에 참가했다. |
유럽에서 건너온 전염병도 원주민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외부 바이러스에 취약했던 원주민들은 유럽인과 접촉한 뒤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어 나갔다.
18~19세기 들어 전 세계에 횡행한 제국(帝國)주의로 인해 태평양의 여러 섬은 또 다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등 서양 열강의 영토로 편입되거나 보호령 신세가 된 것이다.
20세기 첫 세계대전이 끝난 후 태평양은 소유권이 바뀌었다. 독일은 그 동안 소유했던 중남부 태평양 섬들을 당시 연합국(영국·호주·뉴질랜드·일본)에 내놓아야 했다. 일본은 이때 처음으로 태평양 섬나라 일부를 차지하게 된다. 이후 일본은 지속적으로 태평양 섬들을 점령해 갔다.
1차 대전과 달리 2차 대전은 태평양 섬 지역에 전쟁의 상흔(傷痕)을 직접 남기게 된다. 일본군이 주둔한 섬 지역에 미군이 직접 포격하게 되고, 일본도 미군이 주둔한 곳에 공격을 감행한다. 이런 과정에 섬 지역에는 비행장을 포함해 수많은 군사시설이 들어섰다. 현재 태평양 섬나라들의 국제공항은 2차 대전 당시 미군(美軍), 일본군(日本軍), 호주군이 만든 비행장이 대부분이다.
전쟁은 태평양 섬나라에 서구문화를 대거 유입시켰다. 아이스크림과 영화와 같은 신식 문물이 원주민들의 삶 속에 깊이 스며들었다. 언어도 바뀌었다. 이들 국가 대부분이 영어를 사용한다. 정치·경제·사회적 시스템도 서양으로부터 그대로 받아들였다. 일부 국가는 미국 시스템을, 또 일부는 유럽 시스템을 도입했다. 종전(終戰) 후 15년이 지난 1962년, 태평양에 처음으로 독립국가(사모아)가 나타났다. 현재 태평양에는 14개 독립 주권국가가 있다.
■ 태평양도서국포럼(PIF·Pacific Islands Forum) 남태평양의 독립국가 및 자치 지역의 정부 수반 회의이다. 매년 열린다. 2000년 들어 기존의 남태평양포럼(South Pacific Forum)을 확대 개편한 것이다. 1971년 창설돼 경제발전 등 역내 공동문제를 협력하고 추진한다. 호주와 뉴질랜드가 주도하고 있다. 회원국은 태평양 독립국가 14개국과 호주, 뉴질랜드를 포함해 총 16개국이다. 2009년 군사쿠데타로 피지는 현재 자격정지 상태에 있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회원국 상품에 대해 무관세, 자국 시장에 대한 무제한 접근을 허용하고 있다. 이와 별개로 중국은 2006년부터 ‘중국-태평양도서국포럼’을, 일본은 1997년부터 ‘일본-태평양도서국 정상회의’를 개최하고 있다. ■ 대화상대국회의(PFD·Post Forum Dialogue) 1988년 태평양도서국포럼 정상회의 때 역외(域外) 관심국가와의 상호협의와 PIF 지위 향상을 위해 만들어졌다. 운영방식은 PIF 정상회의가 끝나면 14개 대화상대국 대표가 참석해 총회를 연다. PIF 회원국과 대화상대국 간, 대화상대국 상호간 비공식 양자회의를 개최한다. 14개 대화상대국으로는 미국, 영국, 프랑스, 캐나다, 일본(이상 1989년 가입), 중국(1990), EU(1991), 한국(1995), 말레이시아(1997), 필리핀(2000), 인도네시아(2001), 인도(2003), 태국(2004), 이탈리아(2007) 등이다. 우리나라는 어업자원 확보, 국제무대에서의 지지 등을 위해 1995년 7차 회의 때부터 참석했지만 영향력은 크지 않다. ■ 한국-태평양도서국 외교장관회의(Korea-Pacific Islands Foreign Ministers’ Meeting) 우리나라 주도로 2011년 서울에서 처음 열렸다. 태평양도서국과의 자원·환경·원양어업 분야에서의 협력 확대, 각종 국제행사 유치 및 국제기구 진출 시 안정적 지지 확보 등을 목적으로 만들었다. 14개 태평양 독립국가 외교장관과 PIF 사무총장이 참석한다. 3년 주기로 개최된다. 회의 기간 내에는 당사국 고위관리회의(SOM)도 동시에 연다. 외무장관 회의 때 결정된 사항을 실무적으로 논의하는 모임이다. 2011년 1차 회의 결과, 한국이 태평양 도서국가에 매년 5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 |
총, 균, 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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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네시아인들은 먹고살기 위해 식량도 함께 싣고 다녔다. 얌(Yam), 타피오카(Tapioca), 타로(Taro), 쿠마라(Kumara), 빵나무(Breadfruit)와 같은 고(高)탄수화물 농작물(감자·고구마류)도 가져갔다. |
이언 모리스(Ian Morris)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는 서양이 세계를 지배한 이유로 정치나 문화적 요인보다 지리적 여건 때문으로 보고 있다. 서양인들이 대서양을 건너 큰 희생 없이 아메리카 대륙을 손에 넣음으로써 태평양까지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언 모리스 교수에 따르면, 21세기 이후에는 동양과 서양의 경계가 무너져 세계가 하나로 통합될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다가오는 동서양(東西洋) 통합의 시대에 우리는 태평양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바라봐야 할까. 가장 시급한 것은 ‘관심’이다. 미크로네시아연방 수도 폰페이에 위치한 중서부태평양수산위원회 의장을 역임한 소성권 박사의 말이 생각났다. 그는 “태평양 주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태평양 섬나라는 지리적으로 멀리 있다. 멀리 있기는 중국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보다 뒤늦게 태평양 도서국(島嶼國)과 수교를 맺은 중국은 현재, 우리보다 훨씬 가깝게 다가서 있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One China Policy·대만 고립 전략)’이라는 목표 아래 그들에게 ‘조건 없는’ 경제지원을 하고 있다.
태평양에는 대륙적(大陸的) 마인드로 무장한 중국과 대양적(大洋的) 마인드로 단결된 일본, 세계 유일의 패권국가 지위를 놓치지 않으려는 미국이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우리도 여기에 깃발을 꽂아야 한다”는 기자의 말에 사모아에서 만난 한 교민은 “이미 늦은 것 아니냐”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과연 우리는 늦은 것일까. 기자는 폴리네시아에서 작은 희망을 발견했다. 그들의 마음속에 우리와 통하는 그 무엇, 이른바 정서적 동질감을 찾을 수 있었다. 가족을 중시하고,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중요시하며, 제국의 지배를 받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경험이 있는 것이다. 주요 선진국들이 대규모 원조를 하고 있지만, “얼굴을 맞대고 만나야 한다(face to face)”는 파카파누아(Fakafanua) 통가왕국 국회의장의 말처럼, 자주 만나다 보면 그들은 부지불식(不知不識) 간에 우리 옆에 와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박흥식 한국해양과학기술원 태평양해양연구센터장은 “태평양 섬나라는 국가차원에서 관리하고 꾸준히 투자해야 한다. 공간에 대한 미래적 투자가치가 분명히 있는 나라들이다”고 했다.
다행히 박근혜(朴槿惠) 정부 들어 태평양 지역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지난 2월 25일 대통령 취임식 때 “아시아 대양주 국가들과 돈독히 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4월 윤진숙 해양수산부장관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을 때 “제가 40여 년 전 우리나라 원양어업 전초기지인 남태평양 사모아를 방문해 이역만리(異域萬里)에서 땀 흘리는 선원들을 만났던 기억이 있다”며 관심을 보였다. 이 자리에서 윤진숙 장관은 “5대양 6대주 글로벌 해양 경제영토를 확대하겠다”고 답했다.⊙
태평양 섬나라 중 유일한 王國, 통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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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가는 왕이 통치하는 나라이다. 태평양 섬나라 중 유일하다. 유럽인의 영향을 받아 1830년대 이후 대부분의 국민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기독교 영향이 커 일요일에는 비행기 이착륙도 일절 없다. |
통가에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비행기로 뉴질랜드를 거쳐 갈 수 있고, 피지(Fiji)를 통해 갈 수도 있다. 기자 일행은 후자를 택했다. 이번 취재에는 박흥식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이하 해양과기원) 태평양해양연구센터장과 김선욱 연구원, 방장완 한국해양과기원 피지·통가현지법인 소장이 동행했다.
해가 가장 빨리 뜨는 느림의 나라
지난 7월 말,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고 피지를 경유해 17시간 만에 통가의 수도(首都) 누쿠알로파에 도착했다. 수도는 통가 가장 남쪽에 위치한 통가타푸 섬에 있다. 착륙 전 하늘에서 본 섬은 매우 평화로워 보였다.
2011년까지 통가는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날짜가 바뀌는 나라였다. 날짜변경선 바로 왼쪽에 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통가 동북쪽에 있는 사모아가 2012년부터 통가와 같은 시간대를 사용하면서 두 나라가 세계에서 해가 가장 빨리 뜨는 곳이 됐다.
통가 땅을 처음 밟았을 때의 첫 느낌은 한마디로 ‘느림(slow)’ 그 자체였다. 모든 게 천천히 돌아갔다. 시계가 고장난 줄 알았다.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느림의 미학(美學)을 읽을 수 있었다. 여유가 있어 보였다.
현지 사정에 밝은 방장완 소장이 통가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다. 현지 교민인 방 소장은 피지와 통가에 20년 넘게 거주하고 있다.
“이곳은 다른 나라에 비해 전통이 잘 보존돼 있습니다. 사람들도 친절하고요. 카사바(뿌리식물)를 주식으로 먹어요. 단호박을 많이 재배하는데 2006년 무렵 한국에 수출하기도 했습니다. 여행객들로는 유럽인과 호주, 뉴질랜드 사람이 많아요. 2006년 사모아에 쓰나미가 발생했을 때 이곳도 영향을 받았는데, 그때 이 나라 왕이 언덕에 위치한 자신의 저택을 열어 주민들의 피해를 막기도 했어요.
수도가 있는 통가타푸 섬은 산호섬이라 석회질이 많아요. 수돗물을 그냥 마시면 안 됩니다. 이곳 사람들은 하루에 몇 차례 내리는 스콜(비)로 샤워를 해요. 물 사정이 별로입니다. 생수로 유명한 피지와 달라요. 섬 자체에 배수가 잘 안돼 중국이 배수시설을 설치해 줬어요. 그런데 중국 근로자가 직접 이곳에 와 공사하고는 그냥 돌아가는 바람에 그 후 보수공사에 애를 먹고 있습니다. 고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고 가 버렸지요. 시내에 있는 수도관은 오래 전에 일본이 지어 줬어요. 누수가 생기고 보강공사가 잦아지면서 최근 세계은행과 일본 정부가 돈을 대 공사를 다시 하고 있습니다.”
정식 국명(國名)은 통가왕국이다. 국토 면적은 748km²로, 169개 섬으로 구성돼 있다. 36개 섬에만 주민이 거주하고 대부분 무인도이다. 서울(605km²)보다 조금 넓다. 인구는 10만여 명이다. 해외에 거주하는 통가 사람도 대략 10만명이다. 이 중 절반이 뉴질랜드에 산다. 통가는 크게 네 그룹(통가타푸·바바우·하파이·니우아스)의 섬들로 구성돼 있다. 수도는 통가타푸에 있는 누쿠알로파(노를 저어 항해하다의 의미. 인구 약 3만명)이다. 한국보다 네 시간 빠르다. 인종은 대부분 폴리네시아인들이다. 종교는 기독교이며 통가어(語)와 영어를 쓴다. 정부 형태는 입헌군주제이며 왕국 체제가 유지되고 있다. 197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현재 국왕은 조지 투포우(George Tupou) 6세, 수상은 투이바카노(Tu’ivakano)이다. 2009년도 국가 국내총생산(GDP)은 미화(美貨) 3억4300여만 달러, 1인당 GDP는 3300달러 수준이다. 통가에는 3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기원 후 10세기 무렵 투이통가 왕조가 들어선 후 400여 년 동안 피지, 니우에, 사모아까지 영향력이 미쳤다고 한다. 광활한 바다를 통치하다 보니 당시 통가 사람들은 상당히 호전적이었다고 한다. 유럽인과의 접촉은 1616년부터(네덜란드 商人 야곱 레말·Jacob Lemaire) 시작됐으며 1770년대 이후 잦아졌다. 제임스 쿡 함장도 세 차례 이곳을 방문했다. 1777년 제임스 쿡 함장이 이곳에 들렀을 당시 피나우(Feenough) 추장을 비롯한 원주민들이 잔치를 베풀며 친절히 맞이하자 쿡 함장은 통가를 ‘친절한 섬(Friendly Islands)’이라 불렀다. 통가 사람들은 자국(自國) 소개를 할 때 이 표현을 자주 인용한다. 여느 태평양 섬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통가에도 1790년대부터 유럽의 천주교와 기독교가 전파됐다. 1831년 당시 국왕 조지 투포우 1세가 세례를 받으면서 통가 국민 전체가 기독교로 개종(改宗)했다. 통가는 태평양 국가 중 기독교의 영향력이 아주 강하다. 일요일에 교회를 가지 않으면 사회생활을 못할 정도다. 이 나라에서는 일요일에 비행기도 이착륙하지 않는다. 주일을 섬기는 게 절대적이다. 1800년대 초반의 통가는 영국인 선원 윌리엄 마리너(William Mariner)에 의해 서양에 자세히 알려졌다. 그는 1806년부터 4년 동안 통가에 거주했던 경험을 영국의 인종학자 존 마틴(John Martin) 박사의 도움을 얻어 《남태평양 통가 제도의 원주민 이야기》라는 책을 냈다. 1875년 당시 통가 왕은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농노제도를 폐지하고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금지하는 통가헌법을 제정하고 국기(國旗)와 국가(國歌)도 만들었다. 민족국가로서 체제를 갖춘 통가는 곧바로 독일·영국·미국과 협약을 체결해 독립국가로서 인정을 받았다. 1893년 조지 투포우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증손자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통가는 영국의 보호령에 편입된다(1900년). 통가는 1968년 영국과의 보호조약을 수정해 내치(內治)와 외교권을 회복했고, 1970년 정식으로 독립국가가 됐다. 통가는 1800년대 후반 일찌감치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유럽 제국의 식민지로 추락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헌법상 군주제가 지속돼 진정한 민주국가로 발전하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다. 현재 국왕은 조지 투포우 6세이다. |
중국人 3000명, 일본人 50명, 한국人 2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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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가에서 한국식당 ‘후렌지파니’를 운영하는 이귀영 사장. |
이귀영 사장은 1992년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이곳에 왔다고 한다. 그가 운영하는 식당은 통가에서 꽤 유명하다. 닭볶음탕, 삼겹살, 주물럭, 김치찌개, 파전 등 한국음식을 파는데 한국인보다 중국인이나 일본인, 한국음식을 좋아하는 현지 고위인사들이 즐겨 찾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왜 안 오느냐”고 물었다. 그의 말이다.
“사람이 없어서죠. 교민이라고 해 봤자 20명이 채 안 돼요. 2009년에는 30명 가량 있었는데 점점 줄고 있어요.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호주, 뉴질랜드로 떠나요. 중국인은 3000여 명이나 됩니다. 대부분 장사를 하지요. 일본 사람은 50명 정도 있는데 봉사활동을 하러 온 젊은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이 사장은 통가 사람들의 기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도전정신이 강해요. 순해 보이기도 하지만 호전적인 면도 있어요. 과거 폴리네시아 지역을 통가 왕국이 지배했다고 하잖아요. 그 피가 남아 있는 겁니다. 작은 나라이지만 국민들의 자부심이 상당해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호전적·진취적 기질 때문인지 이 나라 사람들은 몸싸움이 심한 럭비를 아주 좋아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곳 사람들에게 몽골족 피가 섞여 있는 것 같아요. 갓 태어난 아기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는 걸 많이 봤어요. 여자들이 머리를 뒤로 묶는 것도 우리와 비슷하고요.”
인류학적으로 폴리네시아인(人)들은 동남아 계통인데 몽골족 혈통이 남아있다는 교민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식당(코리아하우스)과 수산업을 하는 또 다른 교민 정재호씨의 말이다.
“봉분(封墳)도 우리와 비슷합니다. 명당자리를 따지는 것도 같고요. 가족을 중시하고 윗사람을 공경하는 것도 우리와 닮았지요. 밥상머리 교육도 비슷해요. 어른들이 밥을 먼저 먹어야 아랫사람들도 먹을 수 있어요.
이 나라가 기독교 국가이지만 관혼상제도 우리와 유사해요. 과거 우리나라 시골에 5일장, 7일장이 섰던 것처럼 이곳에도 장날이 있습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통가가 기독교 교리를 철저히 지키는 나라라는 사실을 알고 상당히 놀랐어요. 일요일에는 모든 게 스톱(stop)입니다. 이 나라 사람들이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요? 한류(韓流) 바람이 불긴 했지만 아직도 잘 몰라요. 일본은 잘사는 나라로 인식해요. 우리 문화를 소개하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우리와 정서 맞아… 문화적 접근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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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가 수도 누쿠알로파 시내에서 만난 여고생들. 기자가 말을 걸자 그들은 매우 쑥스러워했다. |
잠시 후 만난 한 남자 고등학생은 “어릴 때 한국인 선교사에게 태권도를 배웠다”며 한국 사람을 만난 것을 반가워했다.
작년 통가를 방문한 적이 있는 박흥식 박사는 “내가 만난 학생들은 우리나라 아이돌그룹의 이름까지 대며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남자 아이돌그룹 샤이니를 알더라고요. 한 학생은 ‘뭐든지 할 테니 나를 한국에 데려갈 수 없겠느냐’고 했어요. 학생들은 영어로 된 한국 연예인 소개자료도 원했죠. 우리나라를 알리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문화적 접근인 것 같아요. 한류를 적극 활용하는 겁니다. 아프리카 사람들보다 태평양 섬나라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우리와 맞아요.”
같은 아시아 계통이어서일까. 우리와 정서가 맞는다는 느낌은 사모아, 쿡제도를 취재하면서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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駐통가 한국 명예영사로 활동하는 테비타 풀로카. |
“인천공항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여수까지 갔는데 발전 규모를 보고 크게 놀랐어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한국과 통가는 앞으로 가까워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매운 음식을 좋아해요. 한국 음식 중에서 닭볶음탕을 아주 잘 먹지요. 이 나라 수상은 투이바카노(Tu’ivakano)라는 분인데 태권도를 아주 좋아해요. 체육부장관 출신인데 현재 태권도협회 책임자이기도 합니다.”
통가 수상이 태권도 애호가(愛好家)라는 사실에 놀랐다. 풀로카 명예영사에 따르면, 통가 사람들도 태권도를 좋아한다고 한다. 특히 경찰과 군인들의 경우, 태권도로 격투기 실력을 갖춘다고 한다. 과거 태권도를 할 줄 아는 우리나라 선교사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풀로카 씨는 “오는 2019년 태평양도서국 태권도대회가 통가에서 열린다. 그런데 마땅한 경기시설이 없다. 한국은 태권도 종주국으로 알고 있다”며 우회적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풀로카 씨를 통해 통가 현지 사정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통가의 경제상황은 넉넉한 편이 못 된다. 수출 기반이 약해 호주, 뉴질랜드, 미국에 나가 있는 통가 재외국민(10만여명)이 보내는 돈과 외국의 원조자금에 크게 의존한다. 통가의 청장년들이 매년 농산물 수확기 때 호주와 뉴질랜드 농장에 건너가 벌어들이는 임금도 국가경제에 적잖게 기여한다.
다른 태평양 섬나라들처럼 관광수입도 통가의 큰 수입원이다. 기반시설이 좋아지고 사회가 안정되면 관광산업을 통해 국가경제가 활성화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10세기 왕조 설립 후 폴리네시아 일대 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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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가 사람들은 과거 10세기경 그들의 조상이 폴리네시아 일대를 지배했다는 데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전통문화 의식이 강한 그들은 지금도 일상생활에 전통의상을 즐겨 입는다. |
통가에는 군대도 있다. 육군과 해군, 지원군으로 구성돼 있으며 현재 병력은 500명 정도다. 소규모이지만 2004년과 2007년 이라크전(戰)에 소규모의 병력을 파병하기도 했다.
통가의 주요 국가조직으로는 추밀원(국왕의 자문기관), 내각, 의회, 사법부 등이 있다. 국왕은 행정권을 포함해 사실상 전권을 갖고 있다. 내각은 총리를 포함해 16명으로 돼 있다. 국왕이 모두 임명한다. 내각은 추밀원이 결정한 사항을 집행하는 조직이다. 입법부는 귀족 대표 9명(33명의 세습 귀족 중에서 3년마다 선출)과 평민 대표 17명(3년마다 보통선거로 선출)으로 구성된다.
오랜 세월 동안 귀족 중심의 정치가 계속되면서 부패가 심해지자 2000년대 이후 민주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마침내 2005년 9월, 통가 인구의 10분의 1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수도(首都) 누쿠알로파에서 일어났다. 그 여파로 2006년 2월 당시 총리(국왕 투포우 4세의 3남)가 사퇴하고, 첫 평민 출신 총리(페리티 세벨리)가 나왔다.
2010년 헌법 개정을 통해 의회는 평민 출신 의원이 귀족 출신 의원보다 더 많아졌다. 당시 국왕 투포우 5세는 각료 임명을 포함한 정치적 결정은 국민이 선출하는 수상에게 맡기고, 정치 문제에 대해 자신은 후견인 역할만 하겠다고 선언했다. 현재 통가는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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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파카파누아(Fakafanua) 통가 국회의장. 통가 왕세자의 처남으로, 국왕 조지 투포우 6세의 신임이 상당하다고 한다. 향후 통가 수상 자리도 맡을 것이라고 한다. 오른쪽) 통가의 야당 최고지도자 아킬리시 포히바(Akilisi Pohivaㆍ오른쪽)와 재무차관 출신 알리시 국회의원. |
파카파누아 의장에게 통가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어떤 전략을 갖고 있느냐고 물었다.
“갈 길이 멀지만 우선 정부개혁이 제대로 되는 데 노력할 것입니다. 통가에 민주주의 체제가 제대로 정착되기 위해서도 할 일이 많아요.”
그는 통가와 한국의 우호증진 방안에 대해 “자주 만나야 하지 않겠나. 한국이 통가 국왕과 수상을 초청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한국 고위인사가 통가에 오는 것도 환영한다. 정부든 민간이든 얼굴을 맞대고 자주 봤으면 한다”고 했다.
새로운 정치적 시대 맞고 있는 통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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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가에 많이 나는 단호박. 한때 한국에 수출하기도 했으나 관세 문제로 지금은 중단됐다. |
“통가는 작은 나라입니다. 경제적으로 강대국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주요 경제 수입원은 농업, 수산업, 관광업, 해외동포 송금 등인데 이것으로는 어려움이 있어요. 요즘 들어 해외동포의 송금액이 크게 줄고 있습니다. 국가발전을 위해 동양, 특히 일본과 중국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긴밀한 협력을 원합니다. 한국과는 해양자원개발 외에는 특별한 게 없습니다. 단호박 수출 문제로 한국과 접촉한 적은 있군요.”
포히바 대표는 “통가는 정치적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다”며 국가발전 모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2010년 개헌을 통한 정치개혁으로 현재 많은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혁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정부개혁과 업무수행평가를 위해 새로운 시험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내년도 예산안을 통과시켰는데 통가 국민이 토지분배를 포함한 모든 분야에 공평한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그는 통가 해역(海域)에 해양자원개발을 위한 우리의 탐사활동에 대해 “한국의 자원개발 활동을 환영한다. 그로 인한 이익이 통가 왕국과 국민들에게 돌아가는 방향으로 진행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통가의 한 해 예산은 우리나라 돈으로 2000억원이 조금 넘는다. 내년의 경우, 미화(美貨) 2억200만 달러(韓貨 2270여억원 규모)이다. 최근 통가 정부는 국가부채를 줄이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사회기반시설 확충을 위해 중국에서 들여온 차관이 부채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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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네시아인들이 주식으로 먹는 뿌리식물 타로. 탄수화물이 많아 이를 끼니 때마다 먹는 통가 사람들 중에는 비만체형을 가진 이들이 많다. |
국민의식 개혁도 큰 과제다. 리시아테 아콜로 재무장관의 말이다.
“통가의 경제부흥은 쉽지 않은데 발전을 위한 국민들의 마인드를 바꾸기도 힘들어요. 우리나라의 주요 국고 수입원은 외국 원조입니다. 이 때문에 국민들의 마인드가 수동적으로 변했어요. 아무 것도 안 하면서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식이죠. 그러나 최근 외부 원조금이 50% 이상 감소했고(약 1억1300만 달러), 실업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자력을 통한 경제부흥책이 절실히 필요해요.”
통가 정부는 수출업자들의 활로 개척을 위해 약 57만 달러를 수출장려금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정부는 개혁 차원에서 공기업의 운영실태도 더욱 엄격히 관리할 예정이다.
사회 문제로는 최근 통가 고교생들 사이에 번지고 있는 대규모 패싸움을 들 수 있다. 학생들의 패싸움은 마을 간 패싸움으로 번지기도 한다. 이 문제는 통가 사회 전반을 위협하고 경제발전까지 저해하고 있다고 한다.
상속은 장남에게, 명예는 장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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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68세의 통가 현지인 라투 웅가 씨 가족들. 3대가 같이 사는데 어린이만 11명이다. |
웅가 씨 댁에는 3대(代)가 함께 살고 있었다. 아이들만 11명(아들 3, 딸 8)이나 됐다. 웅가 씨의 말이다.
“통가에서 가족은 사회의 기본 바탕입니다. 가족 범위도 넓어요(우리의 12촌까지 가족으로 간주). 가족의 대소사(大小事)는 반드시 회의를 거쳐 결정해요. 집에서는 통가 전통 말을 사용합니다. 종교는 기독교인데 신앙심이 강하지요.”
가족 내(內) 남녀 지위와 관련해 태평양 섬나라 중 통가에만 있는 특별한 전통이 있다고 한다.
“가족의 땅이나 재산은 장남에게 상속됩니다. 그러나 여자에게는 가장 명예로운 지위를 물려줘요. 예를 들어 집안의 어른이 사망했을 때 장례식에서 가족을 대표하는 사람은 장남이 아니라 장녀입니다. 장례식에 왕이 와도 딸이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요. 여자에게는 명예가 상속되는 겁니다.”
참고로, 통가에서 토지에 대한 소유권은 국왕에게 있다. 국민은 국왕으로부터 임대받은 사용권만 갖고 있다. 이것은 상속이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16세 이상의 성인남자는 3ha의 농지를 배분받는다. 이 같은 토지제도는 통가의 경제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한다. 통가에는 전통적인 추장 시스템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
한국과 관련해 웅가 씨의 며느리는 “TV를 통해 한국드라마를 본 적이 있는데 이곳 여성들에게 한국 프로그램은 인기가 많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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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가 남성들이 즐겨 마시는 카바(칡뿌리의 일종). 약간의 마취성분이 있다. 이들은 평일 저녁에 수십 명씩 모여 물에 탄 카바를 마시며 휴식을 취한다. |
통가 시내 한 마을회관에 남성 50여 명이 모여 앉아 전통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들은 중간중간에 먹걸리처럼 보이는 음료로 목을 축이곤 했다. 카바였다. 한잔 마셨는데 아무런 맛이 없었다. ‘이걸 무슨 맛으로 마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20분쯤 지나자 혀가 약간 마취되는 듯했다.
통가 사람들은 나뭇잎으로 만든 전통의상도 즐겨 입는다. 특히 남자들의 경우, 서양식 옷에다 전통의상을 엉덩이에 치마처럼 둘러싼 것이 특이해 보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시골 마을에는 전라(全裸)에다 중요 부위만 나뭇잎으로 만든 옷을 걸치고 다닌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하루빨리 태평양으로 눈 돌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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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해역을 보유하고 있는 통가는 수산물도 풍부하다.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참치를 먹을 수 있다. |
“여기에는 수산물이 많아요. 경제해역 200해리가 적용되는 곳입니다. 바다 면적이 엄청나죠. 이곳 사람들이 고기를 대량으로 잡지 않아서 그렇지 참치를 포함해 어종(魚種)이 풍부해요. 땅도 비옥해서 단호박이나 일반 농작물도 잘돼요. 한국에 있을 때는 우리 것이 좋다고 했지만 막상 이곳에 와보니 여기 농수산물이 더 좋더군요. 관세 문제만 해결된다면 한국이 상생(相生) 차원에서 이곳의 농수산물을 수입하는 것도 괜찮아요. 한국에서 나지 않는 것들이 여기에 많아요.”
통가 정부는 국가 수익 차원에서 중국 어선들에게 상어잡이를 싼 값에 허용해 줬다고 한다. 최진환씨는 “한국은 하루빨리 태평양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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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가에서 참치잡이와 수산물 유통업을 하는 최진환씨. 그는 “한국 국민들은 비싼 가격에 수산물을 먹고 있다”며 국내 수산물 유통시장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
방장완 해양과기원 통가 현지법인 소장의 말이다.
“통가에는 캐나다의 노틸러스가 가장 먼저 뛰어들었어요. 그 다음에 우리가 들어왔고 이어 호주·뉴질랜드가 공동으로 출자한 블루워터메탈이 들어왔어요. 통가, 피지, 바누아투, 솔로몬, 파푸아뉴기니 쪽의 바다 밑에 열수광상이 쭉 뻗어 있습니다. 그런데 해양자원을 탐사하고 개발하는 데는 시간과 돈이 많이 들어요. 일단 탐사활동부터 사람이 직접 할 수 없어요. 3000m 바다 밑을 들어갈 수가 없는 거죠. 모두 장비에 의존해야 합니다. 그만큼 돈이 들어가는 거죠. 또 바다환경이라는 게 매일매일 달라 정해진 시간 내에 일을 마치기가 쉽지 않아요. 캐나다 노틸러스가 세계 최초로 파푸아뉴기니 해역에서 10년 만에 ‘자원개발’에 들어갔습니다. 10년 동안 탐사활동을 계속해 왔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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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장완 한국해양과기원 통가현지법인 소장(왼쪽)과 통가현지법인이 입주해 있는 건물. 통가 시내에서 가장 좋은 건물이라고 한다. 방장완 소장은 “미래를 위해 해양자원개발에 대한 투자를 더 늘려야 한다”고 했다. |
“중국이 최근 들어 피지와 통가의 해저열수광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뛰어들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몰라요. 넓은 해역을 갖고 있는 일본과 인도는 오래 전부터 자기네 바다 밑을 열심히 파헤치고 있어요. 우리는 땅도, 바다도 좁잖아요. 태평양을 우리 해역으로 만들어야 해요. 지금 통가나 피지에서 진행되고 있는 해저탐사 활동의 노하우를 꾸준히 쌓아 간다면 언젠가 나라에 크게 기여할 날이 올 거라 확신합니다.”
무선통신 안테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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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CCTV를 통해 태평양 국가들에 자국의 소식을 전한다. 통가 누쿠알로파 시내 호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CCTV 방송화면. |
“한국의 높은 수입관세 때문에 통가의 단호박이 한국에 들어가다 말았어요. 당시 한국 정부에 ‘관세를 낮추는 게 양국 우호증진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했더니 ‘다른 태평양 국가들과의 형평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한국과 통가가 교역할 수 있는 품목은 농수산물입니다. 한국이 태평양 국가 전체와 특별 경제협정을 맺는다면 상생(相生)할 것들이 많을 겁니다.”
그는 한국의 원조(援助)정책 방향에 대해 이런 견해를 내놓았다.
“한국으로부터 연간 20만 달러 정도 지원받아요. 일본이나 중국에 비하면 아주 적어요. 물론 한국국제협력기구(KOICA)가 통가 사람들을 선발해 한국에 데려가 교육을 시키는 프로그램도 있어요. 이게 좀 더 활성화됐으면 해요. 통가는 한국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기를 원합니다. 중국과 일본의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시도가 필요해요. 한국은 우수한 인적 자원과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요. 사람과 사람의 교류를 통해 도움을 받기를 원합니다.”
현재 한국은 통가 정부 관계자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주지 못하고 있다. 몇 년 전 우리가 통가에 무선통신 안테나를 지원해 준 적이 있는데 현지 작업을 맡았던 한국 업체가 성능이 형편없는 안테나를 설치했다가 망신을 당한 적이 있다. 하청을 맡은 업체가 이익을 내려고 저가(低價)의 제품을 현지에 공급한 것이다.
풀로카 씨는 몇 년 전 한국 어선이 통가 해역(海域)에서 불법으로 어업행위를 하다가 문제가 돼 해결해 준 적이 있다. 그는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내가 난처해진다”며 “좋은 일만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최근 들어 태평양 국가들 사이에 급격하게 영향력이 확대된 중국과 기존 강대국(미국, 호주, 뉴질랜드, 일본 등)의 충돌 가능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현재까지는 미국의 영향력이 여전합니다. 미국과 중국이 충돌한다는 느낌은 아직 없어요. 그러나 앞으로는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중국 소형 항공기 無償 제공하자 뉴질랜드 견제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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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막대한 자금과 국제협력기구인 자이카(JICA)를 통해 태평양 섬나라에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다. 통가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는 자이카 대원 마쓰모토 미사토 씨. |
기자는 투이바카노 수상을 대신해 사미우 바이풀루(Samiu Kuita Vaipulu) 부수상을 인터뷰했다. 수상은 중국 방문 중이었다. 중국은 오는 11월, 태평양 도서국 정상들을 중국 남서부 연안도시 광저우로 초청해 ‘제1회 중국&태평양 도서국 정상회의’를 개최한다. 중국은 현재 태평양 국가들에 차관, 증여, 현물 등 여러 방식으로 지원하고 있다.
최근 중국은 통가에 무상(無償)으로 소형 여객기(MA-60)를 제공했다. 이 여객기는 중국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항공기인데 2009년부터 지금까지 11차례 사고를 일으켰다.
뉴질랜드 정부는 중국 항공기의 안전성 문제를 이유로, 통가에 제공해 오던 수백만 달러 규모의 관광진흥 원조금을 잠정 중단한다고 밝혔다. 통가 외국인 관광객 중 다수(多數)를 차지하는 뉴질랜드 국민의 안전을 고려한 조치라고 했다. 방장완 소장은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뉴질랜드 정부의 입장을 읽을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했다.
일본의 경우, 국제협력기구(자이카・JICA) 대원의 활동이 돋보였다. 현지에서 만난 미사토 마쓰모토 씨는 통가 주민을 대상으로 일본어를 가르쳤다. 그녀는 자이카 대원용 사택에 거주하며 봉사활동을 펼쳐 왔다. 일본 시즈오카에서 지방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자이카 대원으로 지원해 통가에 왔다고 했다. 그녀의 말이다.
“월급은 따로 없고 숙소와 일부 생활비와 활동비를 보조받아요. 2년 주기로 자이카 대원은 교체됩니다. 가족단위로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경우도 많아요.”
자이카는 농업, 산림, 수산, 문화 등 분야별로 전문 대원을 파견하고 있었다. 대원들은 자신들의 활동현황과 현지사정을 기록한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본부에 제출한다고 한다. 이들이 보내는 보고서를 통해 자이카 본부는 원조정책 방향을 지속적으로 수정한다. 일본 자이카의 태평양 폴리네시아 본부는 사모아에 있다.
국민계몽에 미래 달려
통가는 1800년대 후반에 헌법을 제정할 정도로 서양 체제에 일찍 눈을 떴다. 그러나 이후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변화는 없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통가인들은 문명이 발달한 서양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잘사는 나라도 부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현재 충분히 행복하기 때문이다.
현재 통가 위정자(爲政者)들은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사미우 바이풀루 부수상의 말대로, 개혁과 발전에는 국민의 동참이 필요하다. 국민을 어떻게 설득하느냐에 통가의 운명이 달려 있다.⊙
[인터뷰] 사미우 바이풀루(Samiu Kuita Vaipulu) 통가 부수상
“환경론자·국제 NGO들이 우리에게 해 주는 게 뭐가 있나”

중국을 방문한 투이바카노(Tuiva-kano) 수상을 대신해 사미우 바이풀루 부수상이 인터뷰 시간을 내줬다. 그는 평민 출신 국회의원으로 기반산업부 장관을 겸하고 있었다. 바이풀루 부수상은 한국을 다섯 차례 방문했을 정도로 한국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통가는 태평양 국가 중 유일한 왕국으로 영국의 보호를 받았지만 식민지 형태로 지배를 받지 않은 데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영국의 도움을 얻어 국가 체제를 완성했습니다. 1875년에 이미 의회 시스템을 도입했고요. 지속적인 변화를 통해 국가발전을 꾀하고 있습니다.”
바이풀루 부수상은 “통가는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외국과의 협력은 필수적”이라며 “외교협력 강화를 위해 통가는 ‘모든 나라의 친구이자 어느 나라의 적도 아니다’라는 외교적 모토를 갖고 있다”고 했다. 통가는 어떤 나라들이 정치적·경제적 문제로 충돌할 경우 중립적 입장을 취할 것이라고 한다.
그는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해 긍정적인 모습을 많이 봤다”며 이렇게 말했다.
“열심히 일하는 한국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자극을 받아 우리 국민들에게도 열심히 알렸습니다. 한국민의 열성적 모습을 우리나라 사람들도 가졌으면 했지요. 그러나 한국과 여기는 생활방식이 달라서인지 한계가 있더군요. 현대적 개발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는 한국과의 협력방안에 대해 “산업분야별 전문가 교육과 기술이전을 활발히 했으면 한다”고 했다.
“건설, 기상, 항공, 수상교역 등 여러 분야에서 전문 인력이 부족해요. 우리가 추구하는 능력함양 프로그램을 한국과 같이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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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가 북쪽 바바우(Vava'u) 섬에서 사진작가 존 컴포스가 촬영한 혹등고래의 비상. 고래는 통가의 주요 관광자원이다. |
바이풀루 부수상은 지난 6월 해저 광물자원 개발과 관련한 워크숍에서 개발의 필요성을 피력했다. 당시 그는 “환경론자와 국제 NGO(비정부기구)들이 반대하고 있는데 그들이 우리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느냐. 우리는 우리의 자원을 통해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국가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관광자원 개발을 기자에게 언급했다.
“통가는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풍부한 자원을 갖고 있어요. 그러나 관광기반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요. 통가 북(北)섬인 바바오 섬 인근에는 혹등고래가 많은데 현재 작게나마 고래 구경이 관광 아이템으로 개발돼 있습니다. 통가의 여러 섬에 사는 텃새도 좋은 관광자원입니다.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기반시설이 절대적입니다. 우리는 외자(外資)도 환영합니다. 투자자에 대한 정책적 지원도 염두에 두고 있고, 공항 활주로를 넓히는 일도 하고 있어요. 한국 사람들이 많이 왔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