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1975년 4월 30일 월남 자유민주주의 정권은 호찌민이 이끄는 공산주의 세력에 패망했다. 이에 앞서 73년 3월 23일 월남에 주둔했던 주월사령부가 월남에서 철수했다. 당시 군인과 민간인 대부분이 철수했지만,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대사관 직원과 교민 수백 명이 사이공 일대에 남아 있었다. 이들 중에는 월남에 5년 동안 억류됐다가, 나중에 귀국한 이대용 공사도 있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사이공에서 탈출하지 못한 대사관 직원들과 교민들을 극비리에 안전하게 귀환시키라”고 해군에 명령했다. 이른바 교민 구출 작전인 ‘십자성 작전’이다.
LST(전차 상륙용 함정) 2척(계봉함과 북한함)으로 구성된 ‘십자성 작전’ 수송 분대는 국방부 훈령과 해군 작전지시를 받고 75년 4월 6일 부산을 떠나 다낭으로 향했다. 수송 분대는 다낭으로 향하던 중 다낭이 함락되면서, 사이공으로 진로를 수정했다. 4월 22일 사이공 북쪽 뉴포트항에 접안한 수송 분대는 4월 26일 베트콩 해군의 함포 사격을 정면으로 돌파하며, 교민과 월남 난민 1326명을 무사히 수송해 5월 13일 부산항에 입항했다.
이 수기는 당시 구출작전에 참가한 두 함정 가운데 계봉함 함장이었던 박인석 예비역 대령(해사 14기)이 당시의 메모와 기억을 토대로 작성한 것으로 작전 수행 38년 만에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하는 것이다. 박인석 대령은 “십자성 작전은 주월사령부가 철수한 이후 벌인 유일한 작전이며, 최대의 민간인 구출작전이었는데도 우리 군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대령은 현재 ‘십자성 구출작전 동지회’(jworldbank@hanmail.net 장성수)를 조직해, 월남전에 대한 교훈과 작전을 수행한 대원들의 업적을 사회에 알리고 있다.
《월간조선》은 박 대령의 수기를 두 번에 걸쳐 연재한다. 《월간조선》 독자들과 십자성 작전, 월남전에 참전했던 많은 분들의 관심과 제보를 바란다.
⊙ 주월사령부가 철수 후 벌인 유일한 작전이자, 최대의 민간인 구출작전
⊙ 구호물품 전달 명목으로 월남行, 다낭·나트랑 잇달아 함락되면서 사이공으로 목적지 변경
⊙ 월남 인부들, 고의로 하역 작업 늦춰
⊙ 이대용 공사, “아직 할 일 있다”며 항공권 흔들어 보여
⊙ 월남 해군, “공격하겠다”며 나포 시도
朴麟錫
⊙ 78세. 해군사관학교 14기. 서울대 행정대학원 졸업.
⊙ 미 유학 함포장교과정 이수, 해군사관학교 포술교수, 함대 제1해역사 작전참모, 해군본부 정보처장,
대한해운(주) 선장.
⊙ 화랑무공훈장(충무함 간첩선 격침), 보국훈장 삼일장(파월철수구출작전유공).
⊙ 저서: 《바다는 태양을 띄운다》 《수평선너머 해원》.
1975년 4월 30일 월남 자유민주주의 정권은 호찌민이 이끄는 공산주의 세력에 패망했다. 이에 앞서 73년 3월 23일 월남에 주둔했던 주월사령부가 월남에서 철수했다. 당시 군인과 민간인 대부분이 철수했지만,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대사관 직원과 교민 수백 명이 사이공 일대에 남아 있었다. 이들 중에는 월남에 5년 동안 억류됐다가, 나중에 귀국한 이대용 공사도 있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사이공에서 탈출하지 못한 대사관 직원들과 교민들을 극비리에 안전하게 귀환시키라”고 해군에 명령했다. 이른바 교민 구출 작전인 ‘십자성 작전’이다.
LST(전차 상륙용 함정) 2척(계봉함과 북한함)으로 구성된 ‘십자성 작전’ 수송 분대는 국방부 훈령과 해군 작전지시를 받고 75년 4월 6일 부산을 떠나 다낭으로 향했다. 수송 분대는 다낭으로 향하던 중 다낭이 함락되면서, 사이공으로 진로를 수정했다. 4월 22일 사이공 북쪽 뉴포트항에 접안한 수송 분대는 4월 26일 베트콩 해군의 함포 사격을 정면으로 돌파하며, 교민과 월남 난민 1326명을 무사히 수송해 5월 13일 부산항에 입항했다.
이 수기는 당시 구출작전에 참가한 두 함정 가운데 계봉함 함장이었던 박인석 예비역 대령(해사 14기)이 당시의 메모와 기억을 토대로 작성한 것으로 작전 수행 38년 만에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하는 것이다. 박인석 대령은 “십자성 작전은 주월사령부가 철수한 이후 벌인 유일한 작전이며, 최대의 민간인 구출작전이었는데도 우리 군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대령은 현재 ‘십자성 구출작전 동지회’(jworldbank@hanmail.net 장성수)를 조직해, 월남전에 대한 교훈과 작전을 수행한 대원들의 업적을 사회에 알리고 있다.
《월간조선》은 박 대령의 수기를 두 번에 걸쳐 연재한다. 《월간조선》 독자들과 십자성 작전, 월남전에 참전했던 많은 분들의 관심과 제보를 바란다.
⊙ 주월사령부가 철수 후 벌인 유일한 작전이자, 최대의 민간인 구출작전
⊙ 구호물품 전달 명목으로 월남行, 다낭·나트랑 잇달아 함락되면서 사이공으로 목적지 변경
⊙ 월남 인부들, 고의로 하역 작업 늦춰
⊙ 이대용 공사, “아직 할 일 있다”며 항공권 흔들어 보여
⊙ 월남 해군, “공격하겠다”며 나포 시도
朴麟錫
⊙ 78세. 해군사관학교 14기. 서울대 행정대학원 졸업.
⊙ 미 유학 함포장교과정 이수, 해군사관학교 포술교수, 함대 제1해역사 작전참모, 해군본부 정보처장,
대한해운(주) 선장.
⊙ 화랑무공훈장(충무함 간첩선 격침), 보국훈장 삼일장(파월철수구출작전유공).
⊙ 저서: 《바다는 태양을 띄운다》 《수평선너머 해원》.
- 1975년 4월 월남 패망 직전, 주월교포들을 구출하기 위해 계봉함이 월남을 향해 출항하고 있다.
당시 나는 한국함대 제2전단(상륙함전단) 계봉함(LST 810함) 함장으로 제주도 함덕 해안의 암초폭파 지원을 위해 UDT요원과 함께 제주항에 주둔 중에 있었다. 75년 4월 3일 접안 작전 중인데 오후에 우선순위 초 긴급 전문이 도착하였다.
“귀함은 본전 수령 즉시 전속으로 진해 입항, 함대 작전상황실에 집결 해군참모총장 지시를 받으라.”
나는 즉시 제주항을 출항하여 진해 모항에 전속으로 항진, 4월 4일 08시 함대사령부에 출석했다. 국방부훈령과 해군작전지시를 받아 극비 파월 구출작전 임무가 부여된 것이다. 이 임무가 바로 ‘십자성 작전’이다. 이 작전은 초 긴급, 완벽한 극비사항으로 진행해야 했다.
4월 5일은 진해 벚꽃장이 개장한다. 온 국민이 들떠 있을 때였다. 당시 나도 오랜만에 초등학생인 세 아이들을 데리고 벚꽃장 구경 가기로 약속을 해놓은 터였다. 하지만 4월 6일 일요일 우리는 진해 제1부두를 출항하여 부산 제3부두로 떠나야 했다.
곤히 자는 세 딸을 두고 월남으로

13시 부산 제3부두에 접안, 전국에서 밀려오는 농산물, 의료품, 공산품, 식품과 의류 구호품 등을 탑재한 대형 트럭들이 속속 들이닥쳤다. 우리는 3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화물을 탑재한 후, 4월 9일 08시 진해에서 환송나온 자매함 함장들의 작별인사를 받으며 3부두를 떠나 남진했다. 세상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지만, 부산항은 무심하게도 고요한 적막 속에서 여느 때처럼 하루가 열리고 있었다. 다만 우리만이 장엄한 행렬의 진군나팔을 불면서 고국 항을 떠나고 있었다.
어느덧 현해탄으로 진입, 나는 함교에서 우리 승조장병들에게 그간 비밀로 숨겼던 본 함의 작전계획을 방송으로 알려야 했다.
“함 내에 알린다! 본 함은 부산을 출항하여 패망 직전에 있는 월남공화국에 인도적인 지원을 위하여 비군사적인 구호물자를 적재하고 다낭으로 출전 항해를 개시하였다. 이 작전은 대한민국이 월남을 지원하는 마지막 작전이 될지도 모른다. 다낭 도착 예정은 19일이며 도착 즉시 하역 작업과 난민 수송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대사관 철수와 공관원 및 교포 구출작전을 수행한다. 모두 알다시피 지금 월남은 전쟁 중이다. 우리에게도 적 월맹이나 게릴라의 기습 공격 혹은 테러가 예상된다. 그럴 경우를 대비해 우리는 일심단결하여 완벽한 방어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고 이 바다를 통해 부산항으로 개선 귀국해야 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재회의 기쁨을 누릴 때까지 승조장병들의 승리와 무운을 기원한다. 이상 함장.”
“필승 계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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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으로 향하는 계봉함 함상에 서 있는 필자. |
나는 장병들의 환호에 필승의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십자성 작전’ 수송 분대는 LST 2척. 계봉함과 북한함으로 구성되었다. 북한함(815함)이 수송 분대의 기함으로 수송 분대 사령관과 참모진이 탑승하였다. 계봉함(810함)의 함장인 내가 제주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면 권상호 사령관과 정홍석 참모장, 북한함의 이윤도 함장은 월남전에 참전했던 베테랑들이었다.
나는 1960~70년대 동서남해 해상에 침투하는 간첩선을 색출하는 대간첩작전 시기에 함포포술장 과정으로 도미유학을 마치고 해군사관학교에서 생도들에게 포술학을 가르쳤다. 이후 충무함(구축함 DD-911) 포술장으로 긴급 부임하여 24개월간 특수근무를 하다 보니 파월 등 해외 근무할 기회가 없었다. 메콩강을 항해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1960년 평화스럽던 월남 사이공에 생도 원양실습차 방문했던 경험이었다. 전쟁으로 황폐한 월남을 그것도 구출작전 함장으로 출전한다는 임무는 나의 양 어깨를 짓눌렀다.
우리는 하루에 약 240마일(384km)씩 항해하며 월남에 다가갔다. 북태평양의 일본령 도리시마 근해에 이르니 마침 박정희 대통령이 임석하는 해군사관학교 29기 졸업식 행사가 라디오로 중계되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전파가 약해지더니 어느덧 우리는 섬 하나 보이지 않는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망망대해 위에 들어서 있었다. 남지나(南支那)에도 봄은 오는지 대양으로 들어서자 바다는 잔잔하고 밤에는 적막감까지 감돌았다.
南支那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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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으로 향하는 도중 스콜이 오면 장병들은 샤워를 하며 더위를 달랬다. |
도리시마를 지나 남지나해로 들어갈 때에 부장을 불렀다.
“전 승조원은 하절기 복장으로 갈아입고 앞으로 10여 일간의 항해기간 동안 전투 대비 태세 훈련을 실시한다.”
본 함은 한국 연안에 있을 때에도 아침, 저녁으로 전투 배치 훈련을 실시했다. 아침이나 저녁에 실시하는 이유는 세계대전 때 항공기의 함정 공격이 주로 일출과 일몰 시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루 일과는 훈련과 함포의 정비 그리고 만재한 각종 화물의 안전관리가 주 업무였다. 2000여 톤에 달하는 화물이 파도에 흔들려 한쪽으로 쏠리면 선박에 횡경사가 생기고 그러면 롤링 때에 걷잡을 수 없는 위험이 닥칠 수 있다. 만일 화물로 인해 함의 기동이 위협을 받는다면 그야말로 전쟁터에 가보기도 전에 패배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나는 24시간 화물창에 당직자를 배치시켜 이상 유무를 보고하게 했다. 항해에 최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건 군함의 기본이며 항해의 필수 요건이기도 했다.
겨울의 남지나해는 거칠기로 이름난 곳이다. 오죽하면 해군 속담에 “바다의 사나이는 남지나해의 겨울 파도를 타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악명 높은 바다이다. 1960년 1월 해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원양 항해 당시 나도 남지나해의 파도에 며칠을 굶고 기진했다. 주변의 동기생들은 소위 똥물까지 토했고 그때의 고통이 많은 졸업생을 바다가 아닌 상륙군으로 전과시켜 버리기도 했다. 당시 실습함이 사이공에 입항하자 동기들이 비실비실 몸을 일으켜 상륙을 했던 기억이 난다.
“생도가 내 고향 사람이오?”
1960년 1월. 사이공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미항(美港)이었다. 열대의 무더위 속에 사람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시원하게 거리를 질주했다. 하얀 아오자이를 입은 아가씨들이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짙은 열대 향수를 뿜으면서 스쳐가면 젊은 생도들의 마음은 더없이 설렜다. 상륙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부두에 하얀 아오자이의 아가씨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기생들이 무슨 재주가 그렇게 좋은지 그새 월남 아가씨들을 꾀 데이트를 시작한 거였다. 도대체 멀미로 바닥을 기던 모습은 씻은 듯 사라지고 생생하게 살아나 빛나는 얼굴로 기다리던 아가씨들과 짝을 지어 부두를 떠나는 생도들을 나는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멀미는 병이 아니다. 바다에서 생긴 병은 땅을 밟으면 낫는다’는 말이 그래서 생긴 것 같았다. 거리에서 만난 월남인들은 친절하고 온순하며 자유분방해 보였다. 나는 동기생들과 달리 매번 아가씨 한 명 꾀지 못하고 외출에서 먼저 돌아와 침실을 뒹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동기생 한 명이 나를 불렀다.
“현문에 한번 나가 봐. 누가 사람을 찾는데 아마 너를 찾는 거 같아.”
나는 튕기듯 일어났다. 나를 찾는 사람이라고? 설마 그럴 리가. 동기가 나를 놀리는 게 아닐까. 마음이 부풀어 후다닥 옷을 챙겨입고 현문으로 나갔다. 그러면 그렇지. 아무리 둘러봐도 하얀 아오자이는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열대의 더위가 작열하는 갑판 한쪽에 피곤한 모습으로 앉아 있던 중년 사내 한 사람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생도가 내 고향 사람이오?”
그는 이틀간 고향 사람을 찾는 중이라 했다. 나는 허전해지는 마음을 수습하고 그를 휴게실로 안내하여 음료수를 권했다. 음료수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그는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 눈에 천천히 붉은 기가 떠올랐다.
“젊은이, 조금만 일찍 오시지”
“한국 배가 들어왔다기에 혹시 고향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해서 이리 찾아왔다오. 내 고향은 옛날에 배가 들어왔던 강진의 성전이라는 곳이오. 나는 일본 와세다 대학을 다니다가 불란서로 유학 가는 도중에 유학을 포기하고, 독립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오.
한동안 독립운동을 하다 다시 불란서로 유학을 가던 중에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는 바람에 이곳 월남에 주저앉게 되었지요. 지금은 이곳 사이공에서 사업을 하고 있소. 전쟁 중 침몰한 선박이나 고철을 수집하면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제는 자리를 잡아 살 만하지요.
전남 해남군 계곡면 ‘구배미’라는 마을에 가면 박모라는 사람이 있는데 나의 외가 친척이라오. 내가 사이공에 이렇게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해줄 수 있겠소? 어머니야 이젠 돌아가셨겠지만 고향에 내 소식을 꼭 전하고 싶소.”
자신의 이름을 김상율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기어이 눈물을 떨어뜨렸다. 마음이 찡해지고 코끝이 시려 왔다. 어떻게 청을 거절할 것인가. 반드시 소식을 전해 드리겠다며 위로했다. 그는 눈물을 닦았다. 침실에 돌아와서도 마치 나를 고국의 그리운 얼굴로 착각하는 듯하던 시선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1월 말. 원양실습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졸업 휴가를 받아 ‘구배미’라는 마을을 찾아갔다. 교통이 불편한 때여서 꼬박 반나절을 외진 시골 길을 걸어야 했다. 마을 가운데 부농이 있었는데 그 집 주인 할아버지가 바로 김씨가 찾던 외사촌 형이었다. 김씨의 소식을 전하자 할아버지는 목놓아 울며 눈물을 쏟았다.
“젊은이…. 조금만 일찍 오시지. 숙모님이 살아생전 얼마나 애타게 소식을 기다렸는데… 아이고 세상에. 죽은 줄만 알았던 동생이 살아 있다니.”
노인의 통곡 속에 없는 시간을 쪼개 먼길을 찾아 낯선 시골 길을 더듬어 온 피로가 사라졌다. 학교로 돌아와 곧바로 사이공의 그분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후 그들 가족은 많은 소식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김상율씨는 내가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상 근무를 할 때에도 간간이 서신을 보내왔다. 하지만 월남전 당시 나는 한 번도 파병되지 않아 금번 월남 철수 작전에 동원될 때까지 그와 상봉할 기회는 다시 생기지 않았다. 부산항을 떠나올 때도 촉박하게 출항 준비를 하느라 그분의 주소나 연락처를 챙기지 못했다.
기관 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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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으로 향하는 도중 기관 고장이 발생했으나 기관병들의 10여시간에 걸친 노력 끝에 수리할 수 있었다. |
“함장님. 심각한 상황입니다.”
기관장의 더듬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얘기해 봐.”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야밤의 전화가 좋은 일일 리가 없을 터였다.
“좌현 기관이 고장 났습니다.”
현창 밖에서 파도가 우르릉거리며 소리를 키웠다. 아닌 게 아니라 조금 전부터 배의 속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기관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체 능력으로 수리가 불가능한 대형사고입니다. 진해의 공장으로 돌아가야 가능한 수리입니다.”
그도 왜 모르겠는가. 지금 상태로 회항할 수 없다는 것을. 그건 곧 작전의 실패를 의미하는 일이었다.
“기관장. 진해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일단 최단시간 내에 기관을 수리하도록 하라. 나도 곧 기관실로 내려가겠다.”
기관실로 내려가니 기관장과 부원들이 벌써 기름 범벅이 되어 펼쳐놓은 공구들 사이에서 사색이 되어 있었다. 배의 속력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배는 기관이 2개여서 비상시 한쪽만 가동되고 그러면 배의 항진 속도는 절반으로 줄어든다. 첫 번째 수난이었다. 떠나오기 전 그토록 점검을 하고 준비를 철저히 했건만 이런 일은 일어난다. 기관병들이 배 밑에서 사투를 벌이는 동안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긴급사고와 앞으로 다가올 사태에 대한 궁리로 밤을 꼬박 새웠다. 인간의 영역 밖에서 일어날 것만 같은 일 앞에서 나는, 우리 인간은 얼마나 무력(無力)한가.
기어이 현창 밖이 훤하게 밝아온다. 수리시간은 벌써 10시간을 넘어섰고 120마일(약 192km)을 달려야 할 배는 6노트(약 11km)로 항진해 겨우 60마일(약 96km)을 전진했다. 아침 7시. 식사도 거르고 버티는데 벨이 울렸다. 기관장이었다.
“함장님. 기관 수리, 성공했습니다.”
“정말 수고했네, 기관장. 이젠 대원들과 푹 쉬게.”
가져온 성경책 위에 가만히 손을 올려놓고 신에 감사드렸다. 이런 일들은 분명 인간의 노력만으론 불가능한 부분이었다. 기관의 정상 가동으로 안정을 되찾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해군본부에서 전보가 들어왔다.
폭발사고
“목적지 다낭, 베트콩에 함락. 나트랑으로 입항지 변경.”
목적지가 가까워지는데 입항지가 바뀌다니. 월남의 전세가 빠르게 기울고 있다는 증거였다. 떠나오기 전부터 수없이 봐온 월남 지도를 들여다보며 나트랑에 붉은 원을 그렸다. 항해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진로를 나트랑으로 바꿨다. 19일. 나트랑이 가까워지자 배 안은 한층 더 긴장감이 감돌았다. 오전에 입항 준비를 마치고 오후에 운항에 필요한 최소 인원을 제외하고 전원에게 처음으로 휴식시간을 주었다. 짧은 휴식시간이 끝나고 일몰시간. 포신이 뻥 뚫린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사격 완료 태세에 들어간 장병들이 제자리에서 명령을 기다린다. 나는 언제나처럼 함교의 LNG포 옆에 서 있다. 대테러 훈련이다.
그런데 갑자기 펑 하는 폭발음이 귀청을 찢는다. 군함이 요동치고 갑판이 엄청난 충격으로 와르르 떨린다. 파편이 튀고 바닥으로 몸을 던지는 장병들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시야를 스쳐간다. 포연 속에 고통스런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사수가 피투성이가 되어 갑판을 뒹굴고 화약 냄새가 폐 속으로 확 밀려들어 온다.
거꾸러진 장병들 사이로 부장과 군의관이 희뿌연 포연을 뚫고 달려온다. 갑판 아래쪽에서 위생병 둘이 들것을 들고 뛰어온다. 창졸간(倉卒間)에 당한 일에 어안이 벙벙한데 사수의 처절한 비명에 정신이 번쩍 든다.
“빨리 의무실로!” 군의관이 소리친다. 위생병이 몸을 뒤트는 부상병을 들것에 싣고 의무실로 후송한다. 군의관도 환자를 붙들고 같이 달린다. 내 몸에도 피가 낭자한데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겠고 내 몸을 살필 계제도 아니다. 적의 침공은 아니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아직도 열을 내뿜고 있는 뜨거운 포신이 눈에 들어온다. 장병들이 모여든다.
“함장님. 우선 의무실로 가시지요! 이곳 상황은 제가 조사해 보고하겠습니다!”
부장이 내 옷에 번진 피를 보고 재촉한다. 당황하는 빛이 역력한 얼굴이다. 참모들과 확인한 결과 사고는 실탄이 포신의 약실에서 자체 폭발한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불완전한 무기가 생목숨을 잡을 뻔했다. 평소 장비 점검을 철저히 해도 종종 이런 사고가 생기곤 했다. 내 몸을 검사하는 군의관에게 사수의 상태를 물었다.
“지금 응급처치를 해두었습니다. 환자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나 고환에 파편이 박혀 수술을 해야 합니다.”
“뭐라고? 고환에? 그거 큰일 아닌가!”
“파편만 제거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하필 부위가 급소여서 이동 중인 배에서는 수술이 불가능합니다. 사이공에 입항하여 수술을 해야 합니다.”
나트랑도 함락
그나마 다른 곳에 큰 부상이 없는 것이 다행이라 했다. 군의관이 나를 샅샅이 살폈으나 신기하게 내 몸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옆에 있던 부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지에 들어가면서 함장이 부상을 입으면 부장의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내 군복에 묻은 피는 가까이 있던 사수의 피가 튄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감사했다. 이번 작전에 필승 개선하라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나트랑 도착 전에 또다시 도시가 함락되었다는 전문이 날아왔다. 이번엔 목적지가 사이공으로 바뀌었다. 전세가 숨가쁘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이러다 월남 땅에 입항도 못해 보고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우려됐다. 그래선 결코 안 될 일이었다. 우리의 임무는 표면적으론 월남에 인도적인 물자 지원이지만 속셈은 물품 지원을 빙자해 우리 대사관 직원과 교민들을 구출해 내는 것이었다.
대사관 직원을 적지에 방치한다는 것은 나라의 주권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교민들 역시 잘살아 보려고 정든 고향 땅을 떠나 이역만리 타국에서 사업을 일으킨 경제 일꾼이자 경제적 선각자였다. 그런 국민들의 피나는 노력과 땀을 정부가 모른 척하고 공산화된 적지에 내버려둔다는 것은 주권 국가가 할 짓이 아니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막대한 화물을 월남 땅에 퍼주고 우리 대사관 직원과 교민들을 구출해야 했다. 그게 국가의 의무이자 해군의 의무이고 동시에 지금의 내 임무였다. 나는 월남 지도에서 다시 사이공을 찾았다. 항만 정보도 제대로 없고 항로표지도 해도와 차이가 많아 믿을 수 없는 뱃길을.
21일. 남국의 어둠이 내려앉는 18시경. 드디어 메콩강 입구에 도착했다. 물빛은 탁하고 남방의 무더운 대기가 식으면서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12일간 쉬지 않고 달려온 기관을 정지하고 닻을 놓자 검푸른 강물이 쇠로 된 닻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혼탁한 강물에서 역겨운 비린내가 풍겨 올라왔다. 전쟁기간에 사망한 270만여 명(월남인 150만명, 캄보디아인 70만명, 라오스인 50만명)의 피가 이 강물로 흘러들어 왔을까? 메콩강 주변의 그 무성하던 정글도 전쟁에 시달려서 볼품없이 메말라 있었다. 사람살이가 편치 않으면 자연도 같이 황폐해지는 것이 눈으로 확인되었다.
1960년 원양실습 때 메콩강 주변은 그야말로 완전한 정글이었다. 고깔모자를 쓴 여인들이 수로 변을 한가하게 오가던 그림 같은 모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 아름답던 사이공은 어디로 갔는가. 행여나 하던 기대가 무너지자 표현할 수 없는 아쉬움에 마음마저 쓸쓸해졌다.
수송 분대가 닻을 놓았다는 연락을 받은 대사관에서 해군 연락장교 일행과 월남 해군 연락장교가 와 함께 배에 올랐다. 가무잡잡하고 왜소한 월남 군인의 이름은 트롱 반 중위라 했다. 나는 첫인상부터 그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무심한 척 이곳저곳을 살피는 눈초리, 우리의 대화를 유심히 듣는 태도 등. 한국에서도 나는 오랫동안 대간첩 작전을 수행해 온 터였다. 전시엔 곳곳에 스파이가 득실거리는 법. 나는 이 자가 스파이일지도 모른다고 직감하는데 그가 들려주는 사이공의 근황이 더욱 미심쩍었다.
“메콩강 수로는 공산 게릴라의 준동으로 위험한 상태다. 강 유역에 기뢰가 부설되어 있고 강변의 정글에 베트콩이 매복하여 불시에 기습당할 수 있다.”
마지막 훈장 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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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공 뉴포트에서 구호물자 전달식이 끝난 후, 월남정부는 우리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
본 함은 완전무장한 상태로 메콩강 50마일을 조심조심 거슬러 올라갔다. 전쟁으로 인해 정확한 해도, 조석표, 최신 항해 정보 등 제반 정보가 없는데다 물속엔 기뢰까지 다닌다고 했다. 이제 본 함 밖은 모두 위험지대이자 경계구역이 되었다. 탁한 메콩강의 강물이 시야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 남국의 정취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트롱 반 중위의 목소리가 머리를 가득 채웠다. 메마른 정글은 음험한 베트콩의 매복지로 변했고 전투태세에 들어간 장병들의 눈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메콩강의 혼탁한 강물에서 풍기는 특유의 월남 냄새도 숨어 있는 게릴라의 냄새 같기만 했다. 군함의 속력이 6노트로 떨어졌다. 적의 공격이 있을 경우 표적물이 되기 좋은 속도였다. 기관 고장의 악몽도 되살아났다. 긴장된 6시간의 항해 끝에 사이공의 외곽이 드러났다. ‘쾅! 쾅!’ 포성이 연달아 터지고 검은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전쟁터에 들어왔다고 장병들이 실감할 사이도 없이 배는 12시 사이공 북쪽, 뉴포트항에 접안했다. 주변 부두는 아수라장이었다. 정박 중인 외국 상선에 피란민들이 서로 승선하려 아귀다툼을 벌이며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22일 16시. 사령관이 있는 815함에서 구호품 전달식을 거행한다는 연락이 왔다. 부장과 함께 815함으로 건너갔다. 주월 김영관 대사 일행과 월남 보사부 차관을 비롯 고위층 인사와 월남 보도진 10여 명이 815함에 승함했다. 구호품 전달식이 끝난 후 파월 수송 분대 6명에게 월남 훈장을 수여하는 수여식이 있었다. 나도 대상이었다. 월남공화국이 수여하는 마지막 역사적인 훈장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라의 안위가 풍전등화인데 이런 행사 자체가 형식적으로 보였다. 북월남의 진주 또는 반(反) 티우 대통령 세력에 의한 정부 전복 가능성으로 정국이 혼미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눈으로 보기에도 사이공은 꽤 심각해 보였다. 부두에는 피란민을 가득 태운 크고 작은 상선들이 연방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미처 떠나지 못한 피란민들이 우왕좌왕 이 배 저 배로 몰려다니고 정박한 배의 숫자는 자꾸만 줄어 부두는 점점 비고 있었다.
하역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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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관 주월 대사가 수송 분대 장병들에게 환영연설을 하고 있다. |
“그리고 친(親) 한국계 월남 피란민을 그다음으로 수송해야 합니다.”
김영관 대사 얘기로는 월남전에 참전한 후 월남에 남아 가정을 꾸린 한국인이 많다고 했다. 대사관의 철수도 시간문제였다. 대사와 얘기를 나누는 도중, 탄손루트 공항 쪽에서 커다란 폭음이 터져 울리고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더운 열기 속에 매캐한 화약 냄새가 폐부를 들쑤셨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곧바로 하역 작업과 교민 승선에 관한 지휘부 회의를 시작했다.
부두는 화물을 실어 내려는 화물차와 인부들이 뒤섞여 북새통을 이뤘다. 인부들은 남월남 보사부에서 파견된 노무자들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베트콩의 첩자일 게 분명했다. 부장을 불렀다.
“하역 인부들의 휴대품과 몸수색을 철저히 하라. 그리고 완벽하게 출입통제해야 한다. 인부들 중에 누가 베트콩의 첩자인지 알 수가 없어.”
무장한 경계병이 LST 화물창과 함 주변에 배치되었다. 장병들의 삼엄한 경계에 술렁이던 월남 인부들이 긴장하며 질서를 지키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초라한 월남제 트럭들이 화물창에 들어와 구호품을 실어 나가기 시작했다. 하역 작업은 3~4일 정도 소요될 것 같았다. 우리는 하역 작업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지 않기를 바랐다. 김영관 대사와 교민 승선 일자를 4월 26일자로 잡아두었기 때문인데, 월남 노무자들의 작업 속도는 너무 느려 정반대의 걱정을 하게 만들었다. 하루가 지나도 하역량은 겨우 10%에 지나지 않았다.
인부들의 怠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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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공 뉴포트항에서의 하역 작업은 월남 인부들의 고의적인 태업으로 계속 지체되었다. |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느린 하역은 계획적인 것이었다. 작업을 지연시켜 우리를 부두에 묶어 나포하려던 속셈이었던 것이다. 순간순간의 정보 분석과 상황 판단이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촉박한 시간이었다.
도착 3일이 지났는데 화물의 절반도 반출이 안 되었다. 한번은 구호물자가 어디로 향하는지 탐문했더니 모(某) 시장으로 간다고 했다. 트럭에 만재하여 출발하는 라면 차량이 곧바로 암시장으로 흘러들어 가다니. 순간적으로 ‘우리의 노동이 헛수고가 아닌가’ 하는 회의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의 임무는 대사관과 교민의 철수, 구출인 것.
하역 못지않게 급한 것은 함 내의 식수와 유류 수급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월남 해군의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그러더니 사정이 여의치 못해 보급 지원이 불가하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설마 하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 혼란의 와중에서 식수와 유류가 없다면 우리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갈수록 분위기는 심각해졌고 마음이 다급해졌다.
“물과 기름을 수급받지 못하면 구호품도 하역할 수 없다!”
게릴라 침투 막으려 수중에 수류탄 투척
월남 해군에 으름장을 놓고 참모들과 궁리를 했다. 그들의 반응만 기다릴 형편이 아니었다. 사실 월남 해군에선 행정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담당자가 누구인지 파악하기도 어려웠다. 잔꾀를 쓰기로 했다. 화물 담당 장병이 적재한 구호품 가운데 라면 박스를 꺼내 월남 해군에게 넉넉하게 건넸다. 효력은 바로 나타났다. 그렇게 지지부진 끌던 식수가 육상으로부터 공급되고 유류를 가득 실은 바지선이 어디선가 나타났다. 식수의 질이 좋지 않다는 보고가 올라왔지만 패망을 앞둔 국가에서 수질은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23일. 기름과 식수를 받으면서 기동타격대를 함 내외에 배치하고 해군 UDT 팀장에게 수중 탐색을 지시했다. 함수 포대에 함포 사격 요원을 배치하여 대테러 작전으로 전환 가동하였다.
24일. 하역 인부를 추가로 투입했다. 전세가 불리해 빠르게 하역을 끝내야 할 것 같았다. 09시30분. 함승조원 160명과 교포 40명을 하역에 투입했다. 북월맹 전투병이 사이공 시내에 잠입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해군 상륙정이 기습 공격할 가능성이 대두되었다. 소형 선박을 이용하거나 몰래 수영을 하여 폭탄이나 수류탄을 투척하는 방법이 예상되었다. 베트콩들이 수중 잠수 침투를 잘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북월맹 전투병의 수중 접근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야간 경계를 강화하고 보초에게 호각을 지참시켰다. UDT요원이 물 밑에서 경계하고 밤에는 5분마다 수류탄을 함미 양쪽에 정기적으로 투척했다. 수류탄을 수중에 투척하는 전술은 내가 본국에서 연구 개발하여 폭음용 수류탄으로 주문, 적재한 것이었다. 월남에서 처음 사용한 것인데 폭음으로 수중 침투자의 고막을 터뜨리는 전법이었다. 종전에 들어본 적 없는 무기로 적들에게 혼란과 지레 겁을 주는 전시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이런 경계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받을 경우에 대비해, 터그보트를 준비하고 30분 내 출항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었다.
참모총장으로부터 날아온 긴급電文
26일 05시25분. 참모총장에게서 긴급전문이 날아왔다.
1)국방부장관 지시를 아래 같이 하달함.
가. 여하한 경우라도 교전에 말려들거나 사이공항에 상륙, 고립되지 않도록 할 것.
나. 모든 것에 우선해서 대사관 직원 재산 및 교포 철수에 있어 이용 가능한 범위 내에서 월남정부 지원.
다. 현지 대사와 긴밀한 협조 연락을 유지하여야 하는 상황에 대치한 행동의 결정을 사령관이 결심할 것을 강조함.
2) 상기 1항 의거 아래와 같이 행동 지시함.
810(계봉함), 815함은 구호물자 하역 즉시 (위급시는 하역 중단) 철수할 것.
김영관 대사는 우리 교민을 푸콕 섬으로 철수시킬 생각이었다. 월남 고위층은 한국 교민 철수에 호의적이지만, 이미 정부의 행정력이 마비 상태여서 실무진에서는 협조가 되지 않았다. 김 대사는 단시일에 정상적인 출국 수속을 받기가 어렵다고 판단, 출국 수속을 밟지 않는 해상으로 동포들을 실어나를 생각이었다. 이에 월남 부수상은 한국교민을 수송할 때 월남인 400명 정도를 같이 수송해 달라고 요청했다.
우리 계봉함은 월남 피란민 537명을 태우고 18시에 출항할 계획이었으나 예정보다 4시간 늦게 승함이 시작되어 27일 오전으로 출항이 변경됐다. 기함에는 김영관 대사와 분대사령관도 직접 나와서 승함을 지휘했다. 26일. 참모총장으로부터 긴급전문이 또 날아왔다.
“본전 수령 즉시 구호물자 하역을 중지하고 교포 탑승(대사관 직원 및 연락장교, 통신원 포함) 귀국하라.”
난민 승선
분대사령관은 교민 철수를 위해 27일 출항하겠다는 의사를 본국에 보냈다. 하역이 종료되는 즉시 LST-815함에 교민과 친한계 월남 피란민을 승선시켜 26일 정오에 출항토록 할 예정이고 계봉함(LST-810함)은 월남 피란민 및 물자가 적재되는 대로 27일 아침에 출항하겠다고 결정했다. 당시 붕타우에는 자유중국 LST가 먼저 들어와 있었으나 빈 배여서 사이공 입항을 거부당했고 우리는 구호품 전달을 빌미로 사이공에 입항하여 교민을 태울 수 있었다.
26일. 월남정부가 요청한 중국계 월남 난민 1000여 명을 배에 탑승시키는 데 시간이 자꾸 지연되었다. 월남 피란민들의 승함이 시작되면서 우리 배의 갑판은 야시장을 방불케 했다. 중부 월남에서 온, 월남정부에서 가장 싫어한다는 중국계 난민들은 자식들을 업고 끼고 멘 채 짐 보따리를 끌고 이고 배에 올랐다. 그들의 재산은 다양했다. 오토바이, 돼지, 식량, 트럭, 이불, 솥단지, 자전거, 리어카 등. 남월남정부가 수송해 달라고 요청하는 용도가 무언지 알 수 없는 빈 드럼통 800개도 실렸다. 거기에 대사관 차와 짐까지 실게 되니 배는 온통 난장판이었다.
피란민은 철저하게 대사관에서 발급한 비표를 받은 사람들만 승선시켰다. 비표라 해봐야 대사관에서 임시방편으로 커튼을 잘라 대사관 도장을 쾅쾅 찍은 천 쪼가리였다. 그 천조각 한 장을 구하지 못해 탈출하는 배에 오르지 못하는 피란민의 몸짓은 절박했다. 무장한 위병에게 돈을 건네며 승선을 간청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몰래 무기를 소지했다가 강제 하선당하자 끌려 내려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사내도 있었다. 승선이 생명이고 하선이 죽음인 갈림길에서 무너지는 나라의 국민은 비참했다.
우리 장병들은 질서 유지를 위해 흔들리지 않았다. 월남 피란민과 화물 적재 중 ‘본전 수령 즉시 긴급 출항’ 명령이 본국에서 또 날아왔다. 하지만 이 상태로 승함을 중단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혼란을 자초할 지름길이 될 것이었다. 이때, 멀리 탄손루트 공항 쪽에서 폭탄이 터지고 불꽃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오전 10시경. 백주에 함수 제1포대 경계 당직자로부터 긴급 보고가 올라왔다.
“함장님 방금 부두 100m 전방에서 총격으로 한 사람이 쓰러졌습니다.”
나는 권총으로 무장하고 작전관을 대동하여 현장으로 나갔다. 그 사이 시신이 치워져 현장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부두에 위치한 PX에 들렀다. 입항한 날 저녁 몇 가지 일용품을 구입한 적이 있던 PX였다. 문을 열다가 멈칫했다. 조금 열린 문 사이로 누런 군복이 눈에 들어왔다. 아뿔싸! 살며시 문을 닫고 발소리를 죽여 몸을 돌렸다. 그 사이에 월맹군이 이곳까지 침투해 있었다. PX 주인은 보이지 않고 후질그레한 군복의 월맹군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잠들어 있었다. 사태가 긴박했다. 오늘 밤이라도 야간 출항을 해야겠다고 순간 결심했다.
남은 사람들
분대사령관이 탄 기함은 메콩강 수로와 만나는 나베에서 우리 함을 기다리기로 하고 먼저 떠나갔다. 친한파 난민들과 교민 일부가 815함에 탑승하여 떠나자 내 입술과 목은 타는 듯 말라붙었다. 이제는 빈 부두에서 오직 혼자 상황을 판단하고 결심해야 했다. 그 많던 상선들은 간밤에 모두 떠나 버려 부두도 거의 비었다.
옛날부터 배에 위험이 닥치면 쥐들이 먼저 알아차리고 탈출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뱃사람들은 예부터 배에서 쥐를 보고도 죽이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휑한 부두에는 미군 용역선 두 척이 탈출하지 못한 쥐처럼 우리 배와 함께 남아 있었다. 간밤에 그 LST 용역선의 선장이 나를 찾아 왔었다. 선장은 한국인 이(李)씨였다. 그가 걱정이 되어 물었다.
“이 선장. 상황이 위험합니다. 빨리 떠나야지요. 언제 출항합니까?”
“이틀 후에 출항할 겁니다. 설마 그때까진 괜찮겠지요?”
그가 불안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래도 이 혼란한 와중에 고국의 군함이 옆에 있어 위안이 되는지 또 다른 우리나라 사업가도 배에 찾아왔다.
“나는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오가며 해운업을 한답니다. 어렵게 이룬 사업이 이제 한창 성업 중인 셈이지요.”
가방에 가득 담긴 돈뭉치까지 보여주던 젊은 사장의 얼굴은 자랑스러움으로 번들거렸다. “지금 상황이 심상찮다. 그만 사업을 철수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벌여놓은 사업 때문에 미적거리는 그가 충분히 이해되었지만 나는 어서 떠나라고 재촉했다. 이들이 아니어도 얼마나 많은 동포들이 열대의 나라에서 피땀으로 이룬 사업에 대한 미련으로 미적거리고 있을까. 안타깝고 답답했다.
상황이 급박한데 우리 교민과 가족 156명이 뉴포트에 뒤늦게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그들도 허겁지겁 배에 태웠다. 해군본부로부터 모든 작업을 중단하고 본전 수령 즉시 출항하라는 엄명이 또 벼락 치듯 날아왔다. 월남 피란민 1500명을 다 태울 시간이 부족했다. 나도 이제는 물불 가리지 않고 조속히 부두를 떠나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함장님!”
정신없이 탑재 현장을 지휘하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돌아보니 우리 배에 파견 온 헌무사 기관병이 초조한 얼굴로 재촉했다.
“우리는 언제 출항합니까?”
그렇지 않아도 다른 기관 사병들에게서 빨리 출항하자는 호소와 항의를 들어온 참이었다. 만일 우리 배가 나포될 경우 기관 사병들이 먼저 책임 추궁을 당할 것이기에 그들에게는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기함마저 떠나고 없는 이 단독 작전의 속 타는 지휘관 심정을 누가 알랴. 서둘러 난민을 싣고 귀국할 대사관 화물까지 탑재하니 어느덧 오후 6시를 넘고 있었다.
이대용 公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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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패망 시 탈출하지 못하고 5년간 억류생활을 했던 이대용 주월공사. |
“이 공사님. 함께 떠납시다. 상황이 너무 급합니다.”
다시 한 번 이대용 공사를 설득했다. 그는 “아직 할 일이 있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항공표를 내보였다. 단단하고 야무진 체격의 이 공사와 옆에 선 사람들의 얼굴이 흔들렸다. 고국의 마지막 수송함을 떠나 보내는 그들의 심정은 어떨 것인가. 안전하게 잘 가라고 환송하는 그들을 남겨두고 부두를 빠져나오는 마음이 아팠다. 마지막까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제 한 몸의 안위를 거부하고 기꺼이 적지에 남는 사람들. 떠나는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드는 남은 자들의 처연한 모습에 숙연해졌다.
그 후 이 공사와 남은 공관원은 결국 적지에서의 탈출에 실패했다. 월맹군의 오랜 고문과 협박에 시달리며 죽음을 넘어선 고통 속에서도 그들은 끝내 조국을 배반하지 않고 대한민국과 대사관의 명예를 지키다 4~5년 만에야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고국에 돌아왔다. 이 글을 통해 그분들께 깊은 위로와 존경을 보낸다.
사이공 탈출
1975년 4월 26일. 일몰 후 부두를 벗어나 전속력으로 강을 빠져나왔다. 조류가 거세고 강은 어찌나 꾸불꾸불한지 배를 돌리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하늘에 맡기고 과감한 조함을 시도했다. 등대나 항로 표지가 다 파손되는 바람에 장애물이나 이동 선박이 나타나면 서치라이트를 일일이 비춰 물표를 확인해야 했다. 드디어 사이공 항로로 진입했을 때에는 열대의 어둠이 짙어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뉴포트 부두를 간신히 돌아 나와 사이공강을 따라 전속 항진하는데 온 몸에 땀이 비 오듯 했다. 적들의 바다, 이 배에 운명을 건 천여 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 당장 철수하라던 상부의 득달같은 명령. 공산 치하에 남아 마지막 임무를 완수하려는 이 공사 일행과 목숨 걸고 사업을 번창시키려는 동포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스쳐가기도 했다. 그때였다. 함교 VHF로부터 통신이 들어왔다.
“한국 LST-810함(계봉함)은 즉시 출항 중지하라. 만일 불복하면 공격하겠다!”
월남 해군의 강경한 통보였다. 통신장이 두려운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임전무퇴의 단호한 어조로 지시했다.
“일절 응답하지 마! 침묵으로 일관하는 거야.”
등골이 서늘했다. 설마 했는데, 정말 나포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조금만 지체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함은 완전 전투 배치 상태로 전속 항진했다. 캄캄한 시야에 등대는 없고 물살은 세고 수로는 꾸불꾸불하였다. 자칫하면 엉뚱한 수로로 진입하거나 강둑에 부딪혀 좌초할 판이었다. 나는 오랜 해상 근무로 조함술에는 누구 못지않은 자신이 있다고 자부해 왔었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런 경력이 소용없었다. 온 몸의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몸에 있는 구멍이란 구멍에서는 쥐어짜듯 분비물이 흘러나왔다. 땀으로 끈적해진 속옷이 척척하게 피부를 휘감았다.
선수에서 견시를 맡은 초병들도 초긴장 상태였다. 사소한 물체를 피하려다 더 위험한 충돌을 당할 수 있으므로 진로의 방해물은 그냥 뚫고 나간다고 지시했다. 온 몸이 타는 것 같은 긴장으로 견시병들은 경계를 서고 있었다. 월남 해군에서는 계속 나포하겠다는 협박이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