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로고
2018년 3월호

평창동계올림픽 그 이후…

평창 동계올림픽 북한 대표단장으로 오는 1928년생 김영남의 처세술은?

“술·담배 안 하고 권력욕 안 부린 게 구십 넘도록 건강 장수(長壽)·권력 장수 누리는 비결”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 북한을 정상 국가로 각인시키고 올림픽에 올 각국 정상과 격 맞추려는 인선
⊙ 본관은 전북 전주… 출생지는 평양 태생설과 중국 출생설 엇갈려
⊙ 동생도, 아들도, 딸도 외교 고위 간부 지낸 북한 최고의 명문가 중 하나
⊙ 김일성 대학 다니며 김일성 눈에 들어 모스크바 유학 다녀와
⊙ 평소 온순하고 아랫사람에게 잘하지만 업무는 엄격해
⊙ “김일성이 벽을 보고 ‘저건 문(門)’이라고 하면 당장 달려들 사람”(탈북 외교관 고영환)
⊙ “그저 ‘네’하니 오래 붙어 있는 것 같다”(북한에 납치됐다 탈출한 영화배우 최은희)
⊙ 온화한 외모와 달리 북한의 벼랑 끝 외교전술의 창시자
  북한이 2018 평창(平昌) 동계올림픽을 맞아 한국을 방문하는 고위급 대표단 단장으로 김영남(金永南·90)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통보했다. 북한 헌법상 수반(首班)인 김영남이 한국을 찾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이 ‘실세 2인자’ 최룡해 대신 헌법상 국가수반에 해당하는 김영남을 고위급 대표단장에 임명한 데는 복선(伏線)이 깔려 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라는 별명을 가진 김영남을 파견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로 짐작된다. 첫째, 북한이 정상(正常) 국가임을 보여주려는 것이며, 둘째 한국에 모일 각국 정상들과 격(格)을 맞추려 선택한 듯하다. 더구나 김영남은 남아공의 지도자 넬슨 만델라가 사망했을 때 김정은 대신 조전(弔電)을 보냈고 러시아 전승절 때도 김정은 대신 갔다.
 
  2015년 중국 전승절 열병식 행사 때 북한은 김영남 대신 최룡해를 보냈는데 당시 중국은 이에 분개, 최룡해를 의전 서열에서 거의 끄트머리에 배치해 ‘분풀이’를 한 적도 있다. 김용현 동국대 교수는 “북한이 제재를 비켜 가면서도 자국을 대표하는 인물을 보내기로 했다”며 “이것은 평창올림픽에 대한 북한의 기대와 지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1928년생으로 올해 90세인 김영남은 툭하면 지도자의 변덕에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북한 역사에서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代)를 모셔온 특이한 존재다. 어찌 보면 1961년 5·16 이후 항상 권력 근처에 머문 한국의 JP(김종필 전 국무총리)보다 더 처세술이 고단수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인생 역정을 거쳐왔을까.
 
 
  동생은 김기남 노동당 비서… 북한의 명문가
 
2009년 8월 21일 국회의사당에 마련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조문한 북한 김기남 노동당 비서가 국회를 떠나고 있다. 사진=조선DB
  김영남의 본관은 전라북도 전주이며 이북에서의 호적은 평안북도 구성이다. 본명은 김명삼(金明參)이다. 김영남의 고향에 대해서는 설이 엇갈린다. 북한의 공식 기록은 평양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나, 아버지 김택세(金擇世)의 장남으로 일제강점기 중국 요녕성 관전현 하로하향(현 진강진) 서강촌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형제로는 동생 김동삼(金東參, 현재 이름 김기남), 성명 미상의 여동생이 있다.
 
  동생 김기남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와 당 중앙위 군사부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런가 하면 김영남의 아들 김동호와 딸 김호정도 외무성과 대외문화연락위원회에서 요직을 맡고 있다. 한마디로 북한의 대표적 명문가라고 할 수 있다. 숙청(肅淸)이 밥 먹듯 이뤄지는 북한 체제에서 이렇게 일가족이 무사한 경우도 드물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김영남의 가족은 광복 직전 중국 흑룡강성(黑龍江省) 목란현(木蘭縣)으로 이주했고 그 후 상지현(尙志縣)으로 옮겼다. 상지현 조선족중학교인 상조중(尙朝中)에 재학 중이던 1950년 6월 6·25가 발발하자 중국 정부의 ‘항미원조 보가위국’이란 호소에 호응해 1950년 10월 상조중에서 군인이 됐다.
 
  김영남은 지원군의 신분으로 6·25에 참가했다가 휴전 뒤 북한에 잔류했다. 1952년 1월 소련 모스크바로 갔다가 그해에 중국으로 귀국했지만 1950년대 중반 가족들을 데리고 북한으로 귀환했다. 그의 최종 학력은 김일성종합대학 졸업과 모스크바 대학 유학이다. 김영남이 김일성의 눈에 든 것은 김일성종합대학 재학 때부터였다고 한다.
 
  그는 소련 모스크바대로 유학 가 외교학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중국에서 항일활동을 하던 팔로군(八路軍) 출신이 군부를 주름잡던 시대임에도 그는 소련 유학파로 당시 북한의 대(對) 소련 외교관계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했다. 김영남은 문장력이 뛰어나 김일성 연설문 초안을 전담하면서 35세인 1962년 외무성 부상에 오르는 등 신임을 얻었다.
 
  ‘벼락출세’ 같지만 그의 약력을 보면 김영남이 꾸준하게 위를 향해 차근차근 승진해 왔음을 보여준다. 그는 1970년 11월에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이 됐고 1972년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노동당 중앙비서국 국제부 부부장이 됐으며 같은 해 12월에 노동당 중앙비서국 국제부 부장과 외무성 부상을 담당했다. 그 흔한 하방(下放)이나 재교육도 안 받았다.
 
  김영남은 1974년 9월 조선노동당 중앙비서국 국제담당 비서로 선출됐고 1975년에는 노동당 중앙비서국 국제담당 비서가 됐다. 1977년에 조선노동당 국제부장, 그해 12월 15일에는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 추가 임명됐다. 김영남은 1978년에 조선노동당 정치국 위원이 되어 최고급 간부층에 들어섰으며 1983년 부총리 겸 외무상에 취임했다.
 
  김영남은 1994년 김일성 주석 추모대회에서 주최 연설을 했고 1998년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어 헌법상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그로부터 20년이 되도록 명목상이긴 하지만 국가원수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도 북한의 ‘수뇌’ 신분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북한 외교관이자 김일성 통역관으로 활동하다가 남한으로 망명한 고영환은 김영남을 북한 관리의 전형이라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일성이 벽을 가리키며 ‘저것은 문이다’라고 한다면 김영남은 그 말을 믿고 벽을 뚫고 밖으로 나가려 할 것이다.” 북한에서 “김영남이 3대에 아부하느라 지문이 하나도 없다”는 소리도 나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북한 내에서 매우 똑똑한 것으로 소문났다. 게다가 외교관 출신이어서인지 북한의 주요 우방국 언어인 중국어와 러시아어뿐만 아니라 영어, 독일어에도 능통하다고 한다. 사적으로는 따뜻한 성격이고 후배들을 잘 보살펴주는 성격이나 업무에 들어가면 누구보다 냉철하다는 평도 나돌고 있다.
 
  한때 고령의 그가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자 은퇴설도 나돌았으나 이내 최고인민대의원회에 모습을 드러내고 평양에서 열린 국제레슬링대회 개막식에 참가한 일본 국회의원 안토니오 이노키와 만나 현안 문제를 놓고 회담을 진행하는 등 건재를 과시했다. 1920년대 출생임에도 불구하고 키가 180cm가 넘는 김영남은 건강을 잘 관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다른 고위 간부들과 달리 건강식을 챙겨왔고 기름진 음식이나 술, 담배를 멀리하고 평소에 운동을 하는 등 체계적으로 관리했다는 것이다. 건강 이외에도 다른 간부들은 자녀들을 내세우며 자신의 권력을 대놓고 대물림하고, 자식들끼리 권력 투쟁을 벌이는데 김영남은 처를 국제기구 행사 때 대동한 것 외에는 일절 노출시키지 않았다.
 
  술을 멀리하는 것은 만취해 최고 지도자에게 실언(失言)했다가 나락으로 떨어진 고위 간부들이 저지른 잘못을 범할 확률이 없다는 뜻도 된다. 북한에 납치됐던 원로 영화배우 최은희씨는 김영남에 대해 “그저 ‘네’하고 이러니 오래 붙어 있는 것 같아요. 젠틀하고 사람이 아주 유순하고 뭐랄까 성깔도 없는 것 같았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벼랑 끝 외교전술’의 창시자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하자 조문차 방북한 이희호 여사와 김영남이 악수하고 있다. 사진=조선중앙통신
  김영남은 2009년 4월 9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1차 회의에서 위원장에 재선출됐지만 헌법이 개정되면서 명목상의 국가원수직에서 물러났다. 그렇지만 그는 북한 노동당 내 서열 2위로, 김정일 사망 후 서열 1위가 된 김정은의 바로 다음 서열이다. 하지만 그는 양순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북한 특유의 ‘벼랑 끝 외교전술’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북한 외교 자체가 그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뚝심이 강하기 때문이다. 북한 외교는 국력에 비해 국제무대에서 늘 강한 인상을 남겼고, 강대국과의 외교에서도 두둑한 배짱을 자랑해 왔다. 그를 접한 외교관들은 “첫인상은 부드럽고 친근하지만, 막상 업무에 들어가면 단호하고 직설적이기 그지없는 성격”이라고 기억했다.
 
  주목할 것은 그가 외교·국제 부문 외 다른 분야에는 한눈을 판 적이 없다는 점이다. 전형적인 2인자의 처세술이다. 이런 ‘김영남식 충성심’은 지도자의 심기를 거스르는 순간 피의 숙청이 되풀이되는 김일성-김정일 시대를 거쳐 숙부인 장성택마저 잔인하게 살해하는 김정은 시대에도 자리를 지켜온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일의 김영남에 대한 신뢰를 상징하는 사건이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끝난 뒤 6·15 공동성명서를 만들 때 있었다. 김정일은 “북쪽에는 나라를 대표하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있으니 수표는 김 상임위원장과 하고 합의 내용은 제가 보증하는 식으로 하면 되겠습니다”고 제안해 김대중 당시 대통령을 당황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놀란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인 내가 직접 와서 정상회담을 하는 거 아니오. 좀 시원하게 해주셔야 하지 않겠소”라며 김정일의 서명을 이끌어냈다. 이 일화는 김정일이 국가의 대표로서 김영남을 얼마나 인정하는지를 짐작게 해준다. 비행기를 타지 못해 해외로 못 나가던 김정일로서는 북한 국가대표로 김영남만큼 적합한 이가 없었다.
 
  김만복 전 국정원장의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영남에 대한 회고
  (2015년 10월 13일 《일요신문》 보도)
 
2008년 1월 15일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이 사퇴의사를 밝히고 있다. 사진=조선DB
  당시 노 대통령은 이런 취지의 인사말을 전했다. “온 세계가 국가발전을 위해 경쟁하는 마당에 남과 북 7000만이 같이 세계와 경쟁해 나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 문제에 대해 논의합시다. 그런 것에 도움이 될 만한 조선공업 등에 대해 준비를 해왔습니다. 기본적으로 국민들이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는 곧 경제협력에 대한 강조인 셈이었으며, 북한 입장에선 개혁·개방의 요구 취지로 받아들였을 터였다. 이에 김영남 위원장은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품에서 꺼낸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상대방의 사상과 이념을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에 대해서 개혁·개방을 요구하는 것은 결국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김 위원장은 우리 측의 군사 훈련에 대한 유감과 북핵 문제의 근본은 미국의 적대적 대북정책임을 강조했다. 노 대통령을 앞에 두고 행한 이 연설은 무려 40분을 넘겼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특유의 ‘정면돌파’로 불쾌함을 드러냈다. 이 자리서 노 대통령은 “그쪽 하시는 말씀 듣고 ‘내가 잘못 왔구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라며 “이런 식으로 얘기할 거면 뭐 하러 만났습니까? 내일 김정일 위원장도 이렇게 하시면 오전에 짐 싸서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드는군요”라고 노구(老軀)의 김영남 위원장을 향해 쏘아붙였다. 직설화법을 즐겨 사용한 노 대통령 특유의 대응방식이었다.
 
  10월 3일 개천절, 오전부터 시작된 노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은 알려졌다시피 오전과 오후를 기점으로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김 전 원장의 표현에 의하면, 오전 정상회담은 한마디로 쌍방 간 평행선을 달렸다는 것.
 
  오전 회의장서 노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정착 ▲남북의 공동번영 ▲화해와 통일 등 세 분야의 진전에 대해 강조했지만, 애초 이를 듣고 있던 김 위원장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되레 김 위원장은 작심 발언으로 노 대통령을 쏘아붙였다. (하략)

 
  김일성 때부터 확실한 충성심을 보여준 데다 정치와 군무에는 일절 간여하지 않는 자기 관리가 김정일의 김영남에 대한 신뢰의 바탕이 됐다. 권력 장악에는 동물적인 감각을 보였지만 일반 행정과 외교에는 상대적으로 약했던 김정일에게 김영남이라는 존재는 믿고 쓸만한 ‘얼굴마담’을 넘어 국가 관리를 전담하고 맡길 수 있는 ‘최고 살림꾼’이었다.
 
  3대에 걸친 김영남과 비교할 수 있는 인물은 중국의 2인자 저우언라이(周恩來)와 한국의 JP 정도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毛澤東)에 이은 2인자로 중국의 외교, 경제, 행정 부문을 안정시켰다. 김종필 전 총리도 5·16의 핵심으로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외교·정치 분야의 2인자로 활약했고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 시대에는 ‘킹메이커’ 역할을 했다.
 
  비록 1인자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1인자에 버금가는 역사의 족적을 남겼다는 점이 이 세 명이 꼭 닮았다. 임을출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영남은 북한과 국제사회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무난하게 수행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며 “절대로 자기 세력을 만들지 않고 권력욕을 드러내지 않는 특유의 비정치성이 영원한 2인자의 위치를 가능하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최고인민회의란?
 
2016년 6월 29일 북한 평양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사진=뉴시스
  최고인민회의는 북한 헌법상 국가의 최고주권기관으로서 행정부, 사법부 등 모든 국가기관을 조직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 또한 국방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내각 총리, 중앙재판소 소장을 선거 또는 소환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 이 밖에 최고인민회의는 헌법 수정, 국가의 대내외 정책의 기본원칙 수립, 국가의 인민경제발전계획과 그 실행정형에 대한 심의와 승인, 국가예산과 그 집행정형에 대한 심의와 승인, 조약 비준 등의 권한을 갖고 있다.
 
  북한의 최고인민회의가 흔히 우리의 국회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실제의 역할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다. 헌법에 규정된 광범위한 권한과는 달리 실제로 최고인민회의는 당의 결정을 추인하는 형식적 거수기에 불과하다. 최고인민회의는 1년에 1~2회 개최되는 정기회의와 대의원 3분의 1 이상의 요청이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소집되는 임시회의가 있다.
 
  회의는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참석해야 성립된다. 그러나 실제로 1998년 제10기 최고인민회의 출범 이후 최고인민회의는 1년에 거의 한 차례 열리며 회기도 단 하루에 그치는 경우도 많은 상황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심의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최고인민회의 산하에 법제위원회, 예산위원회와 같은 부문별 위원회를 두고 있긴 하나, 실질적인 국정 심의기관으로서의 기능은 하지 못하고 있다.
 
  최고인민회의는 임기 5년의 대의원으로 구성된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은 당, 사회단체, 내각, 군 등에서 직책을 겸임하고 있으며, 이들은 대의원의 직책보다는 자신들의 원래 직책을 수행하는 것이 주 임무로 되어 있다. 2003년 8월의 선거로 선출된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의 수는 제9기, 제10기의 경우와 같이 687명이다. 최고인민회의 제12기 대의원 선거는 제11기 최고인민회의 임기 개시 이후 5년 7개월이 경과한 2009년 3월 8일 실시되었으며 13기 대의원 선거는 2014년 3월 9일 실시되었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최고인민회의 휴회 중 최고주권기관으로서 위원장, 부위원장, 서기장, 위원들로 구성된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임기는 5년이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가운데서 오랜 기간 국가건설 사업에 참가하여 특출한 기여를 한 약간 명을 명예부위원장으로 둔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최고인민회의 소집, 헌법과 현행부문법 규정해석 등의 임무와 권한을 가진다.
 
  1998년의 헌법 개정에서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국가를 대표한다는 내용이 새롭게 보충되었다. 헌법상으로 볼 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은 결국 국방 이외의 국가적인 사업을 다 맡고 국가를 대표하여 활동하게 된다. 이처럼 헌법 개정을 통하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지위가 높아졌으며 종래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중앙인민위원회, 주석이 갖고 있던 권한의 대부분을 물려받게 되었다.
 
  미 국무부 통역관의 증언
  김동현(고려대 교우회보 2005년 6월 21일 자)
 
  1991년 스틸웰 전 UN군 사령관을 수행해 처음으로 북한에 가 당시 김영남 외교부장(현 최고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만났을 때 김 부장이 우리를 보며 “미국과 남조선이 ‘북한 사람들은 머리에 뿔이 났으며 눈이 새빨갛다’고 말했는데 내 머리에 뿔이 돋았으며 눈이 빨가냐고 제스처를 취했다”고 했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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