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7년 북한유학생대회에서 김일성 개인숭배 비판한 후 망명
⊙ 차이콥스키음악원 작곡과를 5점 만점으로 졸업, 차이콥스키의 맥을 이으면서 한국적 정서 접목
⊙ 고려인 민요 1000점 수집, 카자흐스탄 공훈문화인 칭호받아
⊙ 차이콥스키음악원 작곡과를 5점 만점으로 졸업, 차이콥스키의 맥을 이으면서 한국적 정서 접목
⊙ 고려인 민요 1000점 수집, 카자흐스탄 공훈문화인 칭호받아
이렇게 굴곡진 삶을 사는 동안 그의 삶을 관통한 것은 강한 민족의식과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저항의식, 그리고 음악에 대한 사랑이었다.
정추는 1923년 광주(光州)에서 아버지 정순극(鄭淳極·1958년 작고)과 어머니 정삼이(鄭參二·1984년 작고) 사이에서 4남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위로는 형 준채(準采)와 누이 경희(瓊姬), 동생 권(權)과 근(槿)이 있었다. 형 정준채는 훗날 월북(越北)하여 영화감독으로 활약했다. 역시 월북한 동생 정권은 6ㆍ25전쟁 중 인민군에 징집됐다가 소식이 끊겼다. 동생 정근은 한국에서 동요작곡가로 활동했다. 누이 정경희는 김대중(金大中) 정권 시절 국방부 장관과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천용택(千容宅)씨의 장모다.
일본인 교련교관을 “君”이라 부르고 퇴학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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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정추의 가족 사진. 앞줄 오른쪽부터 정근, 정권, 정추. 뒷줄 오른쪽부터 정경희, 아버지 정순극, 어머니 정순이, 형 정준채. |
1936년 정추는 광주서(西)중학교(광주고보)에 입학했다. 학내에서는 국어(일본어) 상용(常用)이 강요되고 교련 교육이 강화되던 시절, 그는 15번이나 정학(停學)처분을 받은 반항아였다. 동방요배(東方腰拜·일본 천황이 사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하는 것)나 교육칙어(敎育勅語) 낭독 때 장난을 치다가 불경죄(不敬罪)로 징계를 받곤 했다.
소년 정추는 조숙했다. 큰형 정준채가 사온 <대일본백과사전> <세계사상전집> 등을 통해 마르크스, 레닌, 엥겔스는 물론 트로츠키, 베른슈타인 같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을 만났다. 손병희(孫秉熙)의 <조선독립소요사>, 최남선(崔南善)의 <고사통>(故事通)도 읽었다. 집안에서는 이런 정추를 ‘역사가’라고 불렀다.
3학년 때, 정추는 사고를 치고 학교에서 쫓겨났다. 하굣길에 저 멀리서 교련 교관인 구로미야 선생의 모습이 보이자 큰소리로 “구로미야 군(君)!”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로서는 나름 항일의식의 표현이었다. 다음 날 교무실로 끌려간 그는 목도(木刀)로 죽도록 얻어맞은 후 퇴학(退學)을 당했다.
한문교사였던 아버지가 퇴학처분을 철회해 달라고 사정했지만, 학교 당국에서는 “광주학생사건 때에도 선생을 보고 ‘군’이라고 부른 학생은 없었다”며 받아주지 않았다.
학교에서 쫓겨난 정추가 선택한 곳은 서울 양정고보였다. 양정을 선택한 이유가 그답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 일본인들의 자만심을 꺾은 손기정(孫基禎) 선수를 배출한 학교라면, 민족의 투지와 얼을 다른 학교보다 한층 더 갈고 닦을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서울로 올라온 그는 봉래동에 있는 신석우(申錫雨) 선생의 집에서 하숙을 했다. 신석우 선생은 상해임시정부 교통총장과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독립운동가였다.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대한민국’이라는 국호(國號)를 제안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정추는 신석우 선생의 소개로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인 장지영(張志暎)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그러면서 정추는 ‘혁명가’의 꿈을 키워 나갔다.
“구례 출신 친구 김익규 등과 늘 ‘혁명가가 되자’고 얘기하곤 했어요. 상해 가정부(假政府·임시정부)에 들어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든, 그게 아니면 중국 베이징대(北京大)에 진학을 하든, 우선 중국으로 밀항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아버지께 ‘중국으로 보내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네 나이가 아직 어리니 우선 학문을 익혀 더 큰일을 도모하라’고 근 1년 동안 나를 달랬습니다.”
진헌식 선생의 권유로 音大 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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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광주 외숙부댁에서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는 정추. |
“저는 조국독립과 혁명을 위해서 사회운동가가 되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일본에 있는 대학의 사회학부에 입학해 사회학을 공부하고 싶은데, 어떻겠습니까?”
진헌식 선생은 “네가 진정 혁명가가 되고 싶다면, 사회과학 관련 학과는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런 학과에 적(籍)을 두는 것만으로도 그 즉시 일본 경찰의 요시찰인(要視察人)이 될 것이다”라면서 “달리 좋아하는 과목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 무렵 정추는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었다. 상해교향악단에서 활약했던 바이올리니스트 최동의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웠고, 테너 최창은으로부터 독일가곡을, 작곡가 안기영에게서 음악이론을 배웠다.
“음악에 관심이 있다”는 정추에게 진헌식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작곡을 전공하는 것이 어떻겠니? 물론 지금은 음악작품에 ‘독립’이니 ‘조국’이니 하는 말을 붙일 수는 없겠지만, 민족의식을 담은 작품을 만들어 동포들에게 민족혼을 심어줄 수는 있을 것이다.”
정추는 “진헌식 선생의 가르침은 후일 소련 유학시절 교향곡 <조국>을 작곡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결국 정추는 일본대 작곡학부에 진학하기로 결심하고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큰형 정준채는 이때 일본대학 영화연출과를 졸업하고 다이에이(大映)영화사에서 조연출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도쿄(東京)에 도착한 그는 일본제국음악학원을 다니면서 일본대 응시를 준비했다. 이때 작곡가 나운영(羅運榮), 첼리스트 전봉초(全鳳楚) 등과 사귀었다.
1941년 봄, 정추는 일본대 예술과에 응시했다. 일본인 400여 명, 한국인 200여 명 등 총 600여 명이 응시한 이 시험에서 한국인 합격자는 정추 한 사람뿐이었다.
1943년 12월 정추는 학업을 마치고 고향 광주로 돌아왔다. 그는 인근 소학교에서 음악과 국어를 가르치며 소일했다. 큰형 정준채도 나날이 험해지는 시국을 피해 귀국,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한 연구를 하며 세월을 보냈다.
징집과 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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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고보 시절의 정추. |
입영열차에 오르는 그에게 아버지는 “부적처럼 간직하라”면서 붓으로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적은 하동 정씨(河東 鄭氏) 목사공파(牧使公派) 가승(家乘·직계 조상을 중심으로 간단한 가계를 적은 책)을 건네주었다. 정추는 이 가승을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서울 용산에서 훈련을 받은 후 정추는 일본 오사카에 있는 노무(勞務)부대로 배치됐다. 여기서 그는 친구 김중한과 함께 탈영(脫營)을 모의하기 시작했다. 탈영 후에는 조선으로 돌아와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펼칠 계획이었다. 민간인 옷과 지도, 나침반, 권총 등을 마련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5~6명의 조선인 동료들이 자기들도 동참하겠다고 했다. 결행일은 8월 16일 새벽.
하지만 거사 하루 전인 8월 15일 정오, 모두 모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라디오에서 천황의 항복선언이 나오고 있었다.
1945년 9월 말 귀국한 정추는 잠시 모교인 광주서중에서 국어교사로 일하다가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큰형 정준채는 서울 원남동에서 ‘서울키노’라는 영화제작소를 차리고 영화제작을 하면서 좌익계열 단체인 조선영화건설본부에서도 활동을 하고 있었다. 정준채는 그해 12월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이 결성되자 서기장으로 선출됐다. 정추는 ‘서울키노’에 출근하면서 영화음악을 담당하는 한편, 좌익계열인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에 참가했다.
‘서울키노’가 좌익단체의 활동상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영화 제작소처럼 되면서 정추는 좌익의 거물들과 자주 접촉하게 됐다. 당시 좌익계 <해방일보> 기자로서 후일 남로당 지하총책이 되는 박갑동(朴甲東)과 알게 된 것도 이때였다. 박갑동과는 수십 년 후 반(反)김일성 운동의 동지로 다시 만나게 된다. 이 시절 정추는 해방일보사를 찾아갔다가 박헌영(朴憲永)을 만나기도 했다.
“1938년경 광주에서 친구가 경영하는 서점에 간 적이 있었어요. 양서(洋書) 코너까지 따로 있는 제법 큰 서점이었는데, 하루는 밀짚모자에 목에 수건을 두른 안경을 쓴 노동자 하나가 양서를 읽고 있더군요. ‘노동자가 저런 책을 다 읽나’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해방일보사에서 기자들과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박헌영을 보니, 바로 그때 그 사람이더군요.”
박헌영은 일제말(日帝末) 광주에서 벽돌공장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은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생 시절의 정추는 그 시절의 박헌영을 목격했던 것이다.
큰형 정준채의 월북
정추의 큰형 정준채는 1946년 2월 좌익선전영화 <민족전선>을 찍기 위해 북한으로 갔다. 당시로서는 구하기 힘들었던 독일제 아이모촬영기를 가지고 북으로 간 정준채는 그해 평양에서 열리는 3·1절 행사, 국제여성절(3월 8일), 국제노동절(5월 1일) 행사 등을 촬영할 예정이었다.
정준채는 필름작업을 하기 위한 장소를 물색하다가 평양 대동군 형제산면에 있는 빈 양말공장을 발견한다. 그는 이 공장을 영화촬영소로 개조하기로 결심하고, 북조선공산당 선전선동부장이던 김창만(金昌滿)을 만나 도움을 요청한다.
연안파(延安派) 계열의 공산주의자로 북한의 문화예술계를 장악하고 있던 김창만은 정준채의 가치와 능력을 알아보았다. 김창만은 “지금 북조선에서는 매일같이 새로운 법령이 나오고, 사회주의 변혁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를 영화로 남겨야 한다”며 정준채를 붙잡았다. 김일성(金日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정준채는 소련인 영화감독 루빈스키와 함께 영화촬영소 건설을 위해 노력했다. 이후 그는 북한 최초의 기록영화인 <우리의 건설> <민주선거>, 최승희가 안무(按舞)를 맡은 북한 최초의 컬러영화 <사도성의 이야기> 등을 만들었다. 1951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카를로비바리영화제에서 <조·소(朝蘇)친선의 노래>로 작품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1958년 정추가 소련으로 망명한 후 정준채가 숙청되면서, 그에 대한 기록도, 업적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월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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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영화의 기틀을 다진 형 정준채. |
1946년 12월, 정추에게 북조선공산당의 ‘초청장’이 왔다. 그보다 한 달 전 정추는 큰형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북조선에 영화촬영소를 만들었다. 네가 오면 영화촬영소에서 음악을 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아버지는 형을 찾아간다는 말에 정추의 북행(北行)을 받아들였다. 광주역에서 아버지와 이별하면서 정추는 “일주일 뒤에 오겠다”고 말했다. 이후 부자(父子)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정추가 월북할 때, 무용가 정지수(鄭志樹)와 그의 아내 이석예(李石藝) 등 10여 명이 동행했다. 개성에서 포복을 하면서 산을 넘었다. 삼팔선을 넘자 당에서 나온 안내자라는 사람이 손전등을 들고 나타났다. 1946년 12월 말이었다.
당시 지식인들의 북행(北行)에 대해 정추는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남한에서 공산당의 지지기반이 그렇게 넓지는 않았어요. 마르크스주의가 뭔지도 잘 몰랐고…. 다만 현실에 비판적인, 양심적 젊은이들이 사회주의적 변혁이 진행되고 있다는 북한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품고 북행(北行)을 택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남한에서 친일파 청산이 지지부진한 데 대해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던 저도 그중 하나였고요.”
정준채는 월북한 동생을 허정숙(許貞淑·후일 문화선전상 역임)에게 소개시켰다. 허정숙은 김일성대 총장,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을 지낸 허헌(許憲)의 딸. 허정숙은 정추에게 “잘 오셨소. 예술전문가들이 부족한 실정이니 형을 도와서 영화음악 일을 도와주시오”라고 당부했다. 정추의 회고다.
“당시 큰형은 영화촬영소의 영화제작부장으로 일하고 있었어요. 당시 영화촬영소장은 주인규(朱仁奎)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일제시대에 <망루의 결사대>라는 영화에 김일성을 잡기 위해 활약하는 일본 밀정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 자가 영화촬영소장을 맡아 김일성 우상화 작업에 나섰으니, 역사의 아이러니죠.”
북한에 대한 회의가 싹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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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무용가 정지수, 한동인과 함께 서울 종로거리를 걷고 있는 정추(오른쪽). |
이때부터 시보(時報)뉴스를 정기적으로 제작하게 됐다. 정추는 이 프로의 타이틀 음악을 부탁하기 위해 월북 음악가 김순남(金順男)을 찾아갔다. 김순남은 평양 국립극장 앞의 일본식 2층집에 살고 있었다. 정추의 부탁을 받은 김순남은 “지금은 개인 창작에 몰두하고 있어 어렵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정추는 당시 인민군대협주단 단장이었던 정율성(鄭律成)과도 친하게 지냈다. 광주 출신인 정율성은 일찍이 항일운동에 투신, 팔로군(八路軍)에서 복무하면서 <팔로군대합창>을 작곡했다. <팔로군대합창>에 포함된 <의용군행진곡>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국가(國歌)가 됐다.
정율성은 후일 중국 총리를 지낸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양녀(養女)인 딩쉐쑹(丁雪松)과 결혼했다. 딩쉐쑹은 당시 북한주재 중화상업대표단 단장으로 사실상 북한주재 중국대사 역할을 하고 있었다.
1948년 4월, 동생 정권(鄭權)이 월북해서 정추를 찾아왔다. 정권은 목포상고를 나왔는데,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과는 동기동창으로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영어·중국어에 능통했던 동생에게 정추는 평양노어대학(평양외국어대학의 전신) 진학을 권했다. 정추도 작곡가동맹원으로 활동하면서 평양노어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익혔다.
북한에서 자리를 잡아가면서도 정추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정추의 말이다.
“사실 북한에 들어가자마자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저는 중요한 것은 민족이고 계급은 부수적(附隨的)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노동자·농민의 나라’를 추구하는 북한에서 인텔리는 소(小)부르주아 내지 동요(動搖)분자로 인식되고 있었어요. 물론 북한정권 입장에서 필요한 사람을 쓰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국가요인으로 일하는 것을 보면서,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북한에서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다. 6ㆍ25 전부터 남한 출신에 대한 압박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1949년경 소설가 이태준(李泰俊)이 <먼지>라는 소설을 발표했어요. 북한이 마음에 들지 않아 삼팔선을 넘다가 북한 경비대의 총에 맞아 죽는 사람의 이야기였어요. 이태준은 이 작품을 발표한 후 ‘왜 북한 경비대의 손에 죽는 것으로 했느냐’고 비판받았어요. 월남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그런 식으로 죽기는 싫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인민군 중좌가 된 음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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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추는 6·25 기간 중 갑작스럽게 인민군 장교가 되어 복무했다. |
1950년 9월, 정추는 민족보위성(국방부) 최고사령부의 호출을 받았다. 소련군 고문관과 면담을 한 후 정추와 노어대 교수 4명은 인민군 중좌(中佐·한국군 중령)로 임명됐다. 북한군 각급 부처에 배치된 소련 군사고문관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러시아어 구사자(驅使者)들을 벼락치기로 군관(장교)으로 임명한 것이다.
정추는 최고사령부 조직보충국 대열부(隊列部·하사관 이하의 인사와 징집을 담당하는 부처) 부(副)부장으로 임명됐다. 팔자에도 없는 군인생활은 8개월 남짓 계속됐다. 그의 군 생활은 후퇴의 연속이었다. 평양에서 희천으로, 강계로, 만포로, 그리고 다시 만주로…. 희천에서는 최고사령부 군사위원으로 있던 김창만으로부터 희천위수(衛戍)사령관으로 임명받아 희천 방어를 명령받는 코미디 같은 일도 있었다.
중·북(中北) 국경에 인접한 고산진에 있는 최고사령부에서 정추는 그해 12월 조선노동당 제3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소식을 라디오를 통해 들었다. 김일성은 패전(敗戰)의 책임을 모조리 군과 당의 간부들에게 전가(轉嫁)하고 있었다. 방송을 들으며 정추는 김일성에게 환멸을 느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어느 정도 안정된 1951년 5월, “사민(私民)들은 이제 원래 일하던 직장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후방사령부 조직보충국 총무부장(대좌)으로 일하고 있던 정추는 군복을 벗고, 인민군합주단으로 자리를 옮겼다(정추의 6ㆍ25 체험담은 <월간조선> 6월호 별책부록 <60년 전, 6ㆍ25는 이랬다> 중 ‘음악도, 인민군 중좌가 되다’에 상술).
얼마 후 제7기 소련 유학생 모집공고가 붙었다. 정추는 유학생 선발 시험에 응시, 합격했다.
‘북조선의 금싸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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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음악원의 북한 유학생들.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정추. 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의 작곡자인 김원균. |
모스크바 야로슬라브스키역에는 소련주재 북한대사관 학생부 지도원이 마중 나와 있었다. 지도원은 대사관에서 유학생들이 준수해야 할 안전수칙을 숙지시킨 후 이들에게 옷과 일용품을 사라고 500루블씩을 주었다. 보드카 한 병에 3루블 하던 시절이었다.
지도원은 “여러분은 ‘북조선의 금싸라기’”라고 말했다. “조국이 전쟁 중이어서 모든 것이 부족한 와중에 인재를 양성하려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용단 덕분에 ‘금쪽같이 많은 비용이 드는 소련 유학을 올 수 있었다”는 얘기였다. 소련 당국과 대학에서도 전쟁 중인 북한에서 왔다며 북한 유학생들을 환대했다.
6개월간의 러시아어 학습을 마친 후 정추는 1952년 9월 차이콥스키음악원에서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정추의 지도교수는 아나톨리 알렉산드로프였다. 차이콥스키의 수제자인 세르게이 타네예프의 수제자였던 그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물 작곡가였다. 스승 알렉산드로프에 대해 정추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자신의 지식을 나에게 전수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가능한 한 내 영혼 안에 깃들어 있는 민족적 감수성을 그대로 살린 민족음악을 작곡하라고 권했습니다. 세계적인 명성의 작곡가가 자신의 작곡기법을 강요하지 않고, 제 안에 있는 민족성을 끄집어내도록 격려하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정추는 알렉산드로프의 애제자(愛弟子)였다. 정추는 1956년 졸업 직전 알렉산드로프의 사인이 있는 악보집(비제의 <카르멘>)을 선물 받았다. 알렉산드로프의 부인은 “남편은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자신의 책이나 악보집을 선물한 적이 없는데 ‘추’에게만은 특별히 선물하는 것”이라면서 “남편은 그만큼 당신을 아끼고 사랑하고 있다”고 말했다. 알렉산드로프 밑에서 정추는 6년을 공부했다.
1953년 1월, 작곡가 김순남이 작곡학부 연구생으로 차이콥스키음악원에 들어왔다. <인민항쟁가> 등 해방공간에서 좌익들이 애창했던 혁명가요들을 다수 작곡했던 그는 당시 북한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김순남과 재회한 정추는 김순남의 지도교수가 된 하차투리안의 음악세계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우정을 쌓았지만,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정추는 김순남에 대해 “‘매끄러운 서울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고, 이념성은 그리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1953년 2월 말 정추와 만난 김순남은 “북한으로 돌아오라는 소환장을 받았다”면서 “박헌영과의 관계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북한에서는 박헌영·이승엽 등 남로당파에 대한 숙청이 진행 중이었다. 김순남은 북한으로 소환된 후 “감정에 치우친 부르주아 성향의 작품”을 만든다는 비판을 받고 음악계에서 추방됐다.
김순남 등 남로당계 문화예술인들의 소환과 숙청은 소련유학생, 특히 정추와 같은 월북자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다.
이런 풍파에도 불구하고 대학생활은 즐거웠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한 후 소련 사회의 분위기는 조금씩 풀어졌다. 대학의 마르크스-레닌주의 강의 시간에 학생들은 도시락을 꺼내 먹곤 했다. 이런 분위기는 북한 유학생들에게는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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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음악원의 북한 유학생들.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정추, 그 오른쪽이 <김일성 장군의 노래> 작곡자인 김원균. |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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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장군의 노래> 작곡자인 김원균(오른쪽)과 그의 애인 김춘실. 김춘실은 김일성의 작은 아버지 김형권의 딸이다. |
1956년 2월, 스탈린 사후(死後) 3년 만에 열린 소련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서 폭탄이 터졌다. 당 제1서기 흐루쇼프가 스탈린의 독재와 개인숭배를 비판하는 연설을 한 것이다. 흐루쇼프의 연설은 ‘비밀보고’ 형식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소식은 곧 대학가로 퍼졌다. 차이콥스키음악원에서도 미학(美學) 교수인 완슬라프 교수가 강의 시간 중에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에 대해 전하면서 “그동안 우리는 숨도 못 쉬고 살아왔지만, 이제는 정말 새 세상이 왔다”며 기뻐했다.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연설 소식은 소련 학생은 물론, 유학생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정추의 회고다.
“유학생들도 들끓기 시작했어요. 유학생 모임에서 소련공산당 20차 전당대회에 대한 긍정적인 얘기가 많이 나왔어요. 내가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지은 김원균에게 ‘<김일성 장군의 노래>도 이젠 그만 불러야겠다’고 했더니, 씩 웃더군요.
빨치산투쟁을 하다가 북으로 올라왔다는 유학생 하나는 이런 분위기에 ‘이 자식들, 평양 같으면 내가 당장 총으로 쏴 죽였을 것’이라며 격분하기도 했어요.”
1957년 여름, 정추는 가을에 모스크바에서 북한유학생대회가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연설 이후 동요하는 북한 유학생들을 단속하기 위한 행사였다. 정추는 이 자리에서 김일성 우상화를 정면으로 비판하기로 작정했다. 그의 회고다.
“이미 1953년 남로당 숙청 때 당할 뻔했던 나로서는 북한으로 돌아가 봐야 ‘월북자’라는 굴레를 벗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럴 바에야 속에 있는 말이나 시원하게 해보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만 나 혼자서 희생당하는 것은 무의미하니,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정추는 영화대학에 재학 중이던 허진을 찾아가 말했다.
“소련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 이후 동구 사회주의형제국가들의 수령(首領)이 모두 바뀌었다. 북조선에서도 김일성 격하운동이 있어야겠다. 유학생 전체모임 때 내가 토론에 나서겠으니, 도와달라.”
허진도 흔쾌히 동의했다. 이들은 녹음기를 구해 기숙사 정원에 나가 토론연습까지 했다.
북한유학생대회에서 反김일성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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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서 스탈린 격하연설을 한 흐루쇼프. |
김도만이 단상에 올라와 말했다.
“소련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 이후 (유학생 사회가) 시끄러운데, 학생들이 무엇을 안다고 시끄럽게 구는가. 학생들은 공부나 열심히 하면 된다.”
이어 허진이 첫 번째 토론자로 나섰다. “소련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서 스탈린 격하연설이 있었습니다. 스탈린이 얼마나 범죄적이었는지, 얼마나 많은 인민이 희생됐는지가 드러났습니다. 스탈린 개인숭배 시절의 범죄를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 스스로 드러냈습니다. 사회주의 형제국들에서도 정변이 일어나 기존의 수령들이 전복되었습니다. 그런데 북조선만 여기서 엇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김일성 개인숭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연설이 끝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반동분자다!” “끌어내려라!” “죽여라!”하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허진은 5분간의 연설을 간신히 마친 후 험악한 분위기에서 겨우 빠져나왔다. 당황한 김도만은 “여기서 그만 하자”고 했다. 순간 2층에 있던 정추가 “이미 토론신청을 했는데, 지금 그만두는 것은 부당하다. 내게도 발언권을 달라”고 소리쳤다.
김도만은 “거 다 알만한 얘긴데, 굳이 할 필요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정추는 “들어보지도 않고,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발언권을 달라”고 주장했다. 김도만은 “발언권을 줘야 할지 다른 학생들의 의견을 들어보자”고 했다. 학생들은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발언권을 줘 보자”는 소리가 들렸다.
정추는 “내가 평소 성실하게 공부해 유학생들 사이에서 평판이 나쁘지 않았던 데다가, 전쟁 중 대좌로 복무하기까지 해서 사상성에 별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동료 유학생들이 발언권을 주자고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발언대에 나선 정추는 “우리도 개인숭배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소련 등 사회주의 형제국들처럼 김일성 개인숭배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저놈도 같은 놈이다!” “총살하라!” “끌어내려라!”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몇몇 유학생이 단상으로 뛰어 올라와 정추를 끌어내리려 했다. 북한 유학생대회는 난장판이 됐다.
‘10眞’
이후 모스크바의 북한 유학생 사회에는 일대 폭풍이 불었다.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관으로 불려갔던 허진은 체포됐다가 대사관 화장실 창문을 통해 거리로 뛰어내려 간신히 탈출했다.
정추와 그의 동지들은 북한대사관원들에게 쫓겨 모스크바 교외(郊外)의 모니노숲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반(反)김일성운동에 평생을 바칠 것을 맹세하면서 “평생을 진실하게 살자”는 의미에서 이름을 모두 진(眞)으로 바꾸었다. 허웅배, 김종훈, 양원식, 최국인, 한대웅, 정인구, 이진한, 이경진, 맹동욱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이 ‘10진(眞)’이다.
‘10진’ 중 지금까지 살아 있는 사람은 정추, 최국인, 김종훈뿐이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고려일보> 사장으로 일하면서 반(反)김일성운동을 전개했던 양원식은 2007년 3월 괴한에게 살해됐다. 이 사건은 북한의 테러로 추정되고 있다.
북한대사관의 위협이 계속되는 가운데 졸업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정추는 지도교수인 알렉산드로프를 찾아갔다. 정추는 “김일성 개인숭배에 반대하는 것은 진리를 좇는 예술인의 양심에서 출발한 것”이라며 이해를 호소했다. 알렉산드로프 교수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1958년 6월, 졸업작품 발표회가 있었다. 정추는 30분짜리 교향곡인 <조국>을 졸업 작품으로 제출했다. 심사장 밖에서 피아니스트 등 실내악단이 작품을 연주하고 있는 동안, 정추는 밖에서 기다렸다. 심사가 끝난 후 알렉산드로프 교수가 흥분해서 달려나왔다. “5점! 5점 만점이다. 누가 네게 5점 만점을 주자고 주장했는지 아는가? 바로 하차투리안이다.”
당시까지 차이콥스키음악원에서 공부한 유학생들 가운데 5점 만점을 받은 사람은 손꼽을 정도였다.
졸업은 했지만, 앞길은 막막했다. 무엇보다도 나날이 죄어오는 북한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일이 급선무였다. 결국 ‘10진’은 소련망명을 선택했다. 정추는 당시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최용건(崔庸建) 앞으로 편지를 썼다.
소련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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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으로 망명한 후인 1959년 카자흐스탄 알마타의 자택에서 피아노 연습을 하는 정추. 이 피아노는 소련 작곡가동맹 위원장 치혼 흐레니코프가 마련해 준 것이다. |
이와 함께 정추는 흐루쇼프 소련공산당 제1서기 앞으로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 청원서에서 정추는 이렇게 썼다.
“조선노동당원인 나로서는 우리나라에서의 개인숭배와 그 후과(後果)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 이후 조선노동당이 김일성의 개인숭배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치 않는다면, 장차 인민의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를 비판한 조선노동당원들은 반당분자(反黨分子)로 몰려 처단되고 있다.(中略)
음악원을 졸업하면서 나는 소련에 남아 (김일성에 대한) 투쟁을 계속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나는 생존을 위한 어떠한 수단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소련에 남을 권리를 제공해 줄 것과 노동할 권리를 줄 것을 간절히 바란다.”
1958년 8월 초, 소련공산당 조선과에서 정추를 불렀다. 책임자는 아나톨리 샤브신. 해방공간에서 서울주재 소련총영사관 부(副)영사로 있으면서 남로당의 활동을 배후 조종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정추는 샤브신에게 소련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 이후 소련의 북한유학생 사회의 분위기를 설명하면서 망명을 허락해 달라고 호소했다.
채 한 달이 되기도 전에 정추 등에 대한 망명허가가 떨어졌다. 이렇게 신속하게 망명허가가 내려진 것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연설 이후 소련과 북한의 관계가 불편해진 영향이 컸다. 하지만 소련당국은 ‘10진’이 모스크바에 머무는 것도, 한군데 모이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들은 모스크바, 우크라이나, 시베리아, 카자흐스탄, 다게스탄, 무르만스크, 볼고그라드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정추는 스탈린의 강제이주 이후 고려인 사회가 형성된 카자흐스탄을 자신의 거주지로 선택했다. 알마타에 도착한 정추는 쿠나예프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에게 편지를 보내 집과 직업을 부탁했다. 얼마 후 쿠나예프의 비서로부터 연락이 왔다. 신설되는 카자흐국립여성대학에 가서 음악학부 창설 작업을 도우라는 얘기였다. 이 대학에서 정추는 30년간 봉직했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민요 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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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추는 1991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오른쪽)으로부터 공훈문화인 칭호를 받았다. |
1958년 말 형 정준채로부터 편지가 왔다. “나는 잘 있으니, 너는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끝마칠 때까지 (소련에) 남아 있기 바란다. 나는 사상재건사업차 당(黨)학교에 입학해 잘 배우고 있으니 염려 말라”는 내용이었다. 이것이 형으로부터의 마지막 편지였다. 얼마 후 형이 정치범들이 수용되는 검덕광산으로 보내졌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후 정추는 카자흐스탄에서 50여 년을 보냈다. 그는 크질오르다 등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사회를 구석구석 찾아다니면서 1000여 편의 민요가사를 채집해 정리했다. 1990년 카자흐스탄국립여성대에서 퇴직한 후에는 카자흐스탄음대에서 동양음악을 강의했고, 알마타 국립사범대 동양어과장(1996~2000년)을 지내기도 했다.
러시아인들이 존숭하는 차이콥스키의 음악적 계보를 이으면서도 한국 전통의 5음계에 바탕을 둔 정추의 작품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61년 인류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을 기리는 소련 음악인들의 모임에서 그의 곡이 연주됐다. 구(舊)소련 음악사전에도 그의 이름이 올랐고, 카자흐스탄 음악 교과서에도 그의 작품이 실렸다.
1973년 10월, 알마타에서 아시아음악인대회가 열렸다. 정추는 소련작곡가동맹원 자격으로 이 행사에 참석했다. 여기서 그는 차이콥스키음악원 동창인 피바다가극단 단장 김원균과 조우했다. 정추의 회고다.
“김원균을 보고 ‘아, 이게 누구신가? 김원균 선생이 아니신가?’라며 다가갔더니 소스라치게 놀라더군요. 북한에서는 나를 비롯해 소련에 망명한 예술가들이 중앙아시아 사막지대로 추방되어 뱀을 잡아먹으며 간신히 연명하고 있다고 소문이 나 있었는데, 그 자리에 나타났으니 놀랄 수밖에요.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더군요.”
1961년 정추는 러시아 여인 나탈리아 흘리모츠키나와 결혼했다. 그녀는 모스크바도서관대를 졸업했고 후일 교육학 박사 학위까지 받은 학자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두 딸이 있다. 1975년에는 소련 국적을 취득했다.
정추가 다시 한국 땅을 밟은 것은 88올림픽 후인 1989년이었다. 이보다 앞선 1988년 9월, 정추는 누이 정경희 등과 싱가포르에서 재회했다.
43년 만에 가족과 다시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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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만에 만난 남매. 왼쪽부터 정추, 정경희, 정근. |
당시만 해도 북한은 물론 공산권과 접촉하는 것도 조심스럽던 때였다. 김방한 교수를 통해 정추의 소식을 접한 누이 정경희는 둘째 사위가 있던 싱가포르로 나와 전화를 걸었다.
누나는 전화기에 대고 “추냐, 추냐”라고 물었다. 정추가 “네”라고 대답하자 누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정추도 통곡했다.
그해 9월 정추는 딸과 함께 싱가포르로 나와 누이 및 그 가족과 만났다. 이듬해 제1회 세계한민족대회가 열렸다. 정추는 43년 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후였다. 1958년 작고한 아버지는 죽기 전에 어머니에게 “당신이 죽어서 저승에 올 때는, 꼭 북으로 간 세 아들의 소식을 알아가지고 와서 내게 얘기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고 했다.
동생 정근은 동요작곡가가 되어 있었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라는 유명한 동요가 바로 그의 대표작이다. 정근은 엉뚱하게도 월북한 형 정권의 이름으로 살고 있었다. 정근씨의 말이다.
“부모님은 자식이 세 명이나 월북했다는 사실이 두려워 저는 죽었다고 소문내고, 월북한 권이 형의 이름으로 살게 했어요. 하지만 내막을 아는 주위 사람들은 조그만 금전적 갈등만 생겨도 경찰에 일러바치겠다고 협박했어요.
성인이 된 후에도 월급날이면 저를 감시하던 형사가 회사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월급봉투를 내놓으라고 합니다. 그러고는 월급봉투에서 지폐를 몇 장 세어 선심 쓰듯 제게 주고, 자기가 봉투째로 가져가는 겁니다. 시달리다 못해 그를 불러내 테이블에 칼을 꽂으며 ‘너 죽고 나 죽자’고 했어요. 그제야 더 괴롭히지 않더군요. KBS에서 30여 년을 일했지만, 저는 늘 ‘비정규직’ 신분이었어요.”
정근씨의 부인도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신혼 초에 가끔씩 저 이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있었어요. 친구들과 만나 술 마시다가 외박하는 건가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경찰에 잡혀가 닦달을 받은 거였어요. 그제야 남편 집안 내력을 알게 됐죠. 친정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그분들도 기절할 듯이 놀라시면서도, ‘그래도 어떻게 하느냐? 같이 살아야지’라고 하시더군요.”
조국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음악으로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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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전선을 이끌고 있는 박갑동(왼쪽)과 정추. |
소련 붕괴와 함께 ‘소련 공민’이었던 정추는 ‘카자흐스탄공화국 공민’이 됐다. 1991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정추에게 ‘카자흐스탄공훈문화인’ 칭호를 내렸다. 카자흐스탄 내 고려인 사회의 민요를 수집, 정리하는 등의 업적을 높이 평가받은 것이다.
2009년 3월에는 알마타에서 ‘작곡가 정추 선생 탄생 기념음악회’가 열렸다. 카자흐스탄 성악가들이 교향곡 <내 조국> 속에 나오는 노래들을 한국어로 불렀다. 정추는 그의 성악곡들을 한국어로만 부르도록 고집하고 있다. <내 조국>은 정추가 “통일 후 한국에서 애국가처럼 불렸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로 애착을 갖고 있는 곡이다.
정추의 예술세계가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금년 1월 EBS의 그의 삶과 예술세계를 다룬 다큐멘터리 <미행>(未行)의 방영을 전후해 국내 언론에서는 앞다투어 그를 다루었다. <미행>을 제작한 이홍기 감독은 정추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정추 선생에게서는 조국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느껴집니다. 그에게 조국이란 어린 시절 고향의 동산, 하늘의 구름, 풀냄새, 어머니에 대한 추억과 같이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감동들을 의미합니다. 그의 음악을 듣다 보면, 어디선가 한 번 들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카자흐스탄에서 그는 차이콥스키의 맥(脈)을 잇는 대가(大家)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장관급 인사들도 그에게는 허리를 숙이며 극존칭으로 존경을 표하더군요. 처음 만났을 때는 가냘픈 촌로로 여겨졌는데, 일단 교향악단 앞에 서면 엄청난 카리스마를 내뿜더군요. 그의 음악을 들으면서 전율(戰慄)을 느꼈습니다.”
“전체주의적 사회주의는 민족단합의 방해물”
1992년 옛 동지 허진이 찾아왔다. 그는 구 소련으로 망명한 북한 요인들을 중심으로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구국전선)이 결성됐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김일성 타도에 힘을 보태자”고 권유했다. 구국전선에는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 전 주소 북한대사 이상조, 전 북한 문화선전성 부상(副相) 정상진(정율), 전 인민군 작전국장 유성철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정추는 <구국전선가(歌)>를 작곡했다.
처음에는 50여 명을 헤아리던 회원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 둘 세상을 떠났다. 살아남은 회원들도 80, 90을 넘으면서 참여가 저조해졌다. 지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은 박갑동 상임의장과 공동의장을 맡고 있는 정추 정도다.
그는 “김대중(金大中)-노무현(盧武鉉) 정권 10년은 통한(痛恨)의 시절이었다”고 말한다. “김일성-김정일 독재체제는 ‘악(惡)의 축(軸)’이고, 전체주의적 사회주의 체제는 민족단합의 방해물에 불과합니다. 김정일 정권을 연장시킨 햇볕정책은 통일지연정책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글자 그대로 파란만장했던 삶, 하지만 정추는 자신의 지난날에 대해 후회는 없다.
그는 “내 인생에서 단 한순간이라도 내 결심이 옳지 못했던 적은 없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그를 ‘카자흐스탄의 윤이상(尹伊桑)’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평생을 김일성 1인 독재에 맞서 온 정추를 김일성을 위해 복무했던 윤이상에 비유하는 것은, 정추에 대한 모독일지도 모른다. <미행>의 이홍기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윤이상 선생의 경우 화려한 서양음악과 한국음악을 접목시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지만, 어느 정도는 지난 정권에서 ‘띄우기’를 한 점도 없지 않습니다. 음악성에서나, 질곡(桎梏)의 역사를 살아왔다는 점에서나 정추 선생의 예술 세계가 국내에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남과 북을 뛰어넘어 평생 조국애를 음악으로 표현해 온 정추 선생을 통해 민족의 화해와 협력을 말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