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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태완 ‘Stand Up Daddy’

시인 金龍澤의 文靑시절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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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못 견뎌했다.
한밤에 뜬 달과 소쩍새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을 설쳤고, 서서히 저물어오는
어둠을 못 견뎌 강변을 헤맸다』

● 오리 농장하다 망하고 야반도주… 서울역에서 노숙자 신세
● 귀향 후 동생 자취방에서 무위도식 하다 교원임용 시험에 응시… 시골 분교 발령
● 무료한 시골에서 도스토예프스키 全集 읽고 문학에 눈떠 「뿌리깊은 나무」,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등 섭렵
● 시골 선생으로 평생을 살자 다짐하니 「버림의 美學」 생겨
● 1980년 숙직하며 쓴 「섬진강」 연작, 창비 21인 신작 시집에 발표하며 등단

金龍澤
1948년 9월 전북 임실 출생. 순창농림高 임학과 졸업. 섬진강 상류의 임실 운암초등학교 마암분교 교사 역임. 現 전북 임실 덕치초교 교사. 1982년 창작과비평사 21인 신작 시집에 작품발표로 문단 데뷔. 김수영 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수상. 주요 시집으로는 「섬진 강」, 「맑은 날」, 「꽃산 가는 길」, 「누이야 날이 저문다」, 「그리운 꽃편지」 등 다수. 산문집으로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촌놈 김용택 극장에 가다」, 「섬진강 이야기」, 「아들 마음 아버지 마음」 등이 있다.

도망가다시피 오른 서울行 열차

  1969년 봄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집에서 농사를 지을 생각으로 정부로부터 10만원의 융자를 받아 오리를 키우기로 했다. 동네 앞에 있는 강가에 오리를 키워 돈을 벌어 논을 사고 산을 사서 나무도 심고 과수원도 만들고 소도 키우며 큰 농장을 경영하겠다는 각오였다.
 
  울창한 숲 속에 저택을 짓고 살고 싶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꿈은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 오리를 1년 동안 키웠으나, 결과는 참담하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나는 오리 사료를 대느라 힘든 하루하루를 견디지 못해 도망가다시피 서울行 열차에 몸을 싣고 말았다. 운동화와 옷이 없어 사촌동생의 헌 운동화와 헌 점퍼를 얻어 입고 서울로 갔다.
 
  바람이 몹시 부는 이른 봄이었다. 도망가는 게 부끄러워 마을길로 가지 못하고 바람 부는 강길로 가고 있었다. 실은 그때 서울 갈 차비도 없었다. 마른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길을 눈물로 가고 있는데, 마을 쪽에서 바람결을 따라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마을 쪽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께서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바람 쪽으로 서서 어머니를 기다렸다. 내게 다가오신 어머니는 나무껍질 같은 손을 내밀어 내 손에 무엇인가를 쥐어 주셨다. 돈이었다. 어디서 빌렸을 것이다. 어머니는 나에게 『용택아, 어디 가든 몸이 성해야 헌다. 가면 편지허거라』 했다. 나는 돈을 받아 들고 울면서 바람을 향해 뛰었다.
 
  대전 외삼촌댁에 들러 하룻밤을 자고 나는 서울로 갔다. 사촌형 집에 머물렀으나 아무런 대책이 서질 않았다. 친척집을 찾아다니며 하루 한 끼 밥을 때우고 대충 아무 곳에서 잠을 잤다. 잠자리가 없으면 서울역에서 자기도 하고, 노숙자들과 함께 아무 곳에서나 잤다.
 
 
 
 평화시장 헌책방 들락거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평화시장이라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아, 그런데 길가의 작은 책방들이 몇 km가 넘게 이어지고 있었다. 할 일도 없는 나는 그 책방들을 들락거리며 하루를 보냈다. 무슨 돈이 있었는지 나는 그 헌책방에서 백철의 책을 한 권 샀다. 문학개론이었다. 그리고 장수철 시집도 한 권 샀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내 돈을 주고 산 책들이어서 나는 지금도 그 책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나는 이광수의 책을 읽었고, 어떻게 어디서 누가 빌려 주었는지 몰라도 손창섭의 全集을 읽었다. 그리고 순창극장에 들어온 모든 영화를 본 것이 나의 유일한 문학적인 체험이었다.
 
  高3 때 학교에서 동아일보를 보았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김수영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기사를 보았고, 그때 유고작품이 한 편 실렸었다. 그 기억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언젠가 내가 문학의 길에 들어서서 김수영의 詩集 「거대한 뿌리」를 사 들었을 때 「아하! 이분이 바로 그분이구나」 하며 기억의 뿌리가 되살아났던 것이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참 신기하다.
 
  하루 한 끼만 먹고 아무 데서나 자던 나는 사촌형이 얻어 놓은 집으로 들어갔다. 좁은 골목길가에 있는 작은 창문이 있는 방이었는데, 모두 직장이 없어 잠만 잔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어느 날 너무나 배가 고파 아는 형을 찾아 나섰다. 동대문운동장 부근에서 일을 하고 있는 형을 찾아가 배가 고프다고 했다. 형은 라면을 하나 사 주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라면을 먹고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형은 나더러 『용택아, 하나 더 먹을래?』 하며 라면 한 그릇을 더 사 주었다. 그리고 그날 형은 시골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다. 용택이가 거지꼴로 헤매고 있으니, 집으로 데려가라고.
 
 
 
 다시 시골로, 그리고 뜻밖의 교원시험
 
전북 임실 덕치초등학교 2학년 1반 교실에서 金시인.
  나는 다시 시골로 내려갔다. 시골집에도 있지 못한 나는 다시 순창 동생들이 자취하는 곳으로 갔다. 아무 할 일이 없던 나는 밥만 먹고 잠만 잤다. 자취방 근처에 동창이 살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녀석 집엘 가게 되었다. 책이 많았다. 나는 그 집에서 책을 빌려다가 읽었다. 지금 그 책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친구들이 찾아왔다. 선생 시험을 보러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런 제도가 있는지 몰랐다. 초등학교 선생이 너무나 모자라기 때문에 고등학교 나온 사람들에게 선생 시험을 보게 해서 합격하면 4개월 동안 교육을 해서 선생으로 내보내는 교원양성제도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시험을 안 본다고 했다. 나는 그때까지 선생이 된다는 것을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다. 싫다고 하니까 한 놈이 그러면 사진만 찍자고 했다. 사진값도 없는 나는 그냥 친구들을 따라 사진관에 가서 사진만 찍어 주었는데, 어느 날 나에게 수험표를 가져다 주었다. 시험을 보러 가자고 했으나, 나는 광주까지 갈 차비가 없었다. 사촌동생이 어디서 구했는지 광주 갈 차비와 올 차비를 빌려 주었다. 그리고 나는 교원시험을 보고 합격을 했다.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은 선생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나는 자취를 하다가 하숙을 하다가 4개월을 광주에서 보냈다. 하숙을 하고 있을 때 같은 하숙집에 나이 든 선생들도 같이 있게 되었는데, 그분의 방에 「현대시학」이라는 책이 있어서 뒤적여 보았다. 詩와 긴 글들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긴 글들은 詩를 평해 놓은 평론들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교과서 밖에 있는 詩들을 보았다.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지금도 표지만 기억이 난다.
 
  그렇게 광주에서 4개월을 보낸 나는 집으로 돌아와 발령이 나길 기다렸다. 그때 사촌형 친구가 전주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는데, 나에게서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책을 빌려 주었다. 「세계 사상 강좌」라는 다섯 권짜리 전집이었다. 나는 그 책에 줄을 치고 메모를 해 가면서 읽었다. 나는 그 책을 다 읽고 나서 돌려주고 헌책방에서 그 책을 구해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나는 세상에 대한 수많은 의심과 의혹, 그리고 자연의 질서와 철학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시도 때도 없이 엄습하는 세상에 대한 의혹으로 나는 잠을 잘 수 없었다.
 
 
 
 월부 책장수에게 구입한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17년 전 고향집 섬진강 강변에서 부인 이은영, 딸 민혜(유치원생), 아들 민세(초1)와 한때.
  나는 1970년 5월 깊은 산골에 있는 분교로 발령을 받아 선생을 하러 나갔다.
 
  학교는 아주 작고 초라했다. 아이들 앞에 서서 별로 가르칠 게 없어 나는 몇 개월 동안 땀만 뻘뻘 흘렸다. 그리고 아이들이 돌아가면 참으로 세상은 심심했다. 나는 교과서나 다른 교재를 뒤적이며 지내다가 심심하면 마을을 돌아다녔다. 마을 사람들은 윷도 놀고, 화투도 치고, 농사도 지었다. 나는 「참으로 무료하고 막막한 게 세상이구나. 심심한 게 세상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심심하다면 세상이 정말 지루할 것 같아 앞날이 불안해질 때가 많았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참으로 우연찮게 그 골짜기까지 책장수가 들어왔다. 월부 책장수였다. 그때 전집들을 가지고 다니는 월부 책장수들이 무지 많을 때였다. 그 책장수는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내게 내밀었다. 책의 판형이 아주 컸다. 폼도 나고 글씨가 커서 읽기도 좋을 것 같았다. 나는 그 책을 사서 하숙집 내 방 윗목에 놓고 매우 흐뭇해했다.
 
  방학이 되어 나는 그 책을 시골집으로 가지고 갔다. 낮에는 동무들과 나무를 하러 산으로 갔고, 밤이 되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을 읽었다. 어떤 날은 낮이 되어도 동무들과 나무하러 가는 것을 포기하고 내 골방에서 드러눕고 모로 눕기를 반복하며 정신없이 책을 읽었다. 밥 먹고 대소변 볼 때만 밖에 나가고 방 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었다. 책을 읽다가 밖에 나가면 눈이 올 때도 있었고, 바람이 앞산을 훑고 지나갈 때도 있었다. 밤을 하얗게 밝힐 때도 있었다. 나는 방학 동안 도스토예프스키스 전집 여섯 권을 모두 읽었다.
 
 
 
 세상과의 아름다운 「입질」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교정에서.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가려고 들길을 걸어서 정류장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산도 강도 느티나무도 마을도 만나는 사람들도 옛사람이었지만, 나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세상이 새로 보였던 것이다. 「아하, 그렇구나 세상이 새로 보이면 사랑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니, 그때는 잘 몰랐다. 먼 훗날 나는 그때 느꼈던 세상과의 아름다운 「입질」이 세상과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도 나는 그때를 잊지 못한다. 새로 보이던 산과 물과 마을과 들판과 사람들을….
 
  학교에 갔더니 그 책장수는 또 다른 책들을 가지고 왔다. 헤르만 헤세 전집이었다. 「수레바퀴 밑에서」와 「데미안」은 나를 사로잡았다. 알에서 깨어난다는 그 황홀하고 눈부신 부활을 나도 꿈꾸었다. 그 후 나는 그 책장수에게서 이어령 전집, 박목월 전집, 사강 전집, 서정주 전집들을 사 보았다. 나는 거의 밤을 새워 책을 읽었다. 책을 읽다가 밖에 나오면 휘영청 밝은 달이 떠 있기도 했고, 소쩍새가 울기도 했고, 봄비가 내리기도 했다. 세월은 잘도 갔다. 나는 그 학교에서 1년 반 만에 고향 학교로 전근했다. 그때가 1972년이었다.
 
 
 
 섬진강과의 만남, 책과의 만남
 
  나는 집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학교로 걸어갔고,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왔다. 강길은 아름다웠다. 물이 불어 징검다리를 넘으면 나는 맨발로 강을 건넜다. 아직은 강물이 차가운 날 맨발로 강물을 건너 젖은 발을 말리려고 바위를 건너 뛰어다니면 어찌 그리 재미있던지.
 
  봄·여름·가을·겨울 변화무쌍한 자연은 내게 늘 감동이었다. 봄날 그 강변의 풀꽃들, 그 풀꽃 곁에 앉아 쉬며 바라보던 산과 강물, 오! 자연은, 그 강길은 내게 시인학교였고 인생을 가르쳐 주는 스승이었다. 문학에 대해, 인생에 대해 그 누구와도 이야기할 수 없는 외로운 나에게 그 강길은 무궁무진한 삶의 길을 깨우쳐 주고 깨닫게 해 준 위대한 종합예술학교였다. 나는 그 길에서 세계를 배웠고,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인지를 배웠다. 그 길은 이제 사라졌지만, 나는 초등학교 교사로 24년을 걸어다녔다.
 
  내가 자란 母校(모교)로 온 나는 생활의 안정을 찾아갔다. 어느 날 어떤 여선생 교실에 갔더니, 50권짜리 한국문학전집이 있었다. 여선생에게 『그 책을 보느냐』고 했더니, 『그냥 사 놓은 거라』고 했다. 나는 농담 삼아 『그러면 나에게 팔라』고 했다. 여선생은 너무나 쉽게 그러라고 했다.
 
  나는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작은방에 누워 책을 보기 시작하면 점점 추워졌다. 밤 12시가 넘고 닭이 울었다. 그러면 아버지가 내 방에다가 쇠죽을 끓이기 위해 불을 땠다.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가 들리고, 구들로 「훌훌」 불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방이 서서히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방이 따뜻해지기 시작하면 나는 서서히 잠이 들었다.
 
  깊고 따뜻한 잠을 잔 나는 가뿐한 몸으로 일어나 밥을 먹고 학교로 갔다. 책을 읽는 동안 때로 징검다리에서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소 우는 소리, 닭 우는 소리, 빗소리, 눈이 내리는 소리, 어머니가 텃밭에서 김매는 소리, 이웃집 큰아버지의 새벽 기침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책을 읽어 가면서 나는 내 외로움을 키워 갔다. 방학이 되면 나는 전주로 갔다. 전주에도 헌책방이 있었다. 방학한 날은 지게를 가져다가 정류소에 두고 전주로 가서 헌책방을 뒤져서 보고 싶은 책들을 샀다. 대개 헌 잡지들이었다. 커다란 가방에 책을 사서 싣고 정류소에 내려 지게에 책을 짊어지고 30분쯤 걸어가면 우리 집이었다. 방에다 책을 부려 놓고 나는 또 방학 내내 책에 묻혀 지냈다. 아침에 일어나 마루에 턱 내려서면 코피가 주르르 쏟아질 때도 있었다.
 
  헌책을 사 나르던 중 나는 우연히 「뿌리깊은 나무」라는 책을 보게 되었고, 그 책에서 故 김현 선생의 글을 꿀같이 달게 읽었다. 나는 「뿌리깊은 나무」를 창간호부터 다 찾아 사 보았다. 그러다가 「창작과비평」이라는 잡지와 「문학과지성」이라는 잡지를 사 보게 되었고, 그 책들도 창간호부터 다 사 보았다. 미술 잡지 「계간 미술」을 보고 그 책도 창간호부터 다 찾아서 보았다.
 
2001년 4월 문학기행 중 덕치초등학교를 찾아온 대건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버림의 美學
 
아침 저녁으로 지나는 섬진강 상류 옥정호 호반에서.
  그렇게 책을 읽어 가며 나는 아주 중요한 것을 버리고 죽이기 시작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선생을 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 외의 것들은 다 버리고 죽여 강물에 흘려보내 버렸다. 나는 희망을 버린 것이다. 희망 없는 삶의 안정과 평화와 해방감은 나를 행복하게 했다. 내가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다 버림으로써 나는 희망을 이룬 사람이었고,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다. 나는 내가 사는 세상을 얻은 것이다. 그렇게 희망을 버리고 시골 초등학교 선생으로 평생을 살겠다는 생각을 굳혀 가자 내가 사는 세상이 다 보였다.
 
  가난한 우리 아버지와 마을과 나무와 산과 강이, 꽃과 나비와 우리의 역사가, 우리가 사는 땅이, 인류가 다 보였다. 나는 그 속에서 내가 갖추고 살아야 할 삶의 자세와 태도를 터득했던 것이다.
 
  나는 자유로웠다. 다만 우리가 사는 시대에 대한 죄책감은 버릴 수 없었다. 역사는 뒤틀려 있었고, 현실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런 것들과 맞서 긴장된 삶을 택했다. 때로 턱없이 분노하고, 턱없이 과장되게 현실을 진단했다. 그렇더라도 나는 우리 시대가 안은 시대적인 과제를 최소한 외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나는 못 견뎌했다. 한밤에 뜬 달과 소쩍새 소리를 들으며 잠을 설쳤고, 서서히 저물어 오는 어둠을 못 견뎌 강변을 헤맸다. 해가 질 때까지 강을 따라 걷다가 산으로 올라가 산길 끝까지 갔다가 올 때도 있었다. 늘 무엇인가를 기다렸다. 내가 애타게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기다리는 길로 꽃이 피고 새가 우는 봄이 오기도 하고, 바람이 오기도 하고, 사람들이 무수히 도시로 떠나가기도 했다.
 
  언제가부터 나는 글을 쓰고 있었다. 소설도 쓰고, 말도 안 되는 평론을 쓰기도 했고,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고, 동화를 쓰기도 했다. 나는 그런 것들이 글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내 내부에서 무엇인가가 꾸역꾸역 토해져 나왔다.
 
金시인 동호인 모임 다음 카페 회원들과 함께.
 
 
 詩를 쓰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내가 詩를 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 그렇구나. 나는 詩를 쓰는구나」. 그러나 나는 그 詩가 詩인지 아닌지 몰랐다. 「이게 詩냐」고 물어 볼 사람도, 그렇다고 또는 아니라고 확인해 줄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몇 년간 詩를 써 보았다.
 
  1980년, 그 격동의 숨가쁜 역사의 소용돌이가 나를 비껴갈 리 없었다. 나는 그 무렵 발행된 수많은 사회과학 서적에 빠졌다. 수많은 詩人들이 나타났다. 詩人들은 시대의 고통을 詩로 외쳤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숙직을 하게 되었다. 그때 들고 다니던 습작노트에 나는 「섬진강·1」을 썼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 일기장 겸 습작 노트를 보니, 단숨에 쓴 것 같았다. 그리고 연거푸 섬진강 연작을 썼다. 그게 詩가 되든 안 되든 내 속에서 부글거리며 들끓는 그 무엇인가를 다 쏟아 내야 했다. 내 삶은 스스로 치열했고, 나에게 흥분했고, 내가 나에게 감동했다.
 
  남에게 감동을 확인받을 수 없는 나는 나에게 감동했던 것이다. 아! 그러나 나는 그 자기 감동이야말로, 자기 감동이 객관화될 때까지의 그 길고 긴 세월이야말로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겪어 내야 할 「인간 수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기가 자기에게 감동하지 않고 누가 나에게 감동하겠는가.
 
 
 
 「창비」 등단
 
   어느 날 나는 문득 詩를 투고하고 싶었다. 기왕이면 내가 좋아하는 「창작과비평사」로 詩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詩를 정리했다. 모두 18편이었다. 1982년 봄 詩를 모아 「창작과비평사」로 보냈다.
 
  그해 가을 이시영 詩人으로부터 아주 짧은 글의 엽서를 받았다. 「귀하가 보낸 글을 잘 읽어 보았다. 새로 나올 시집에 당신의 詩를 신작 詩人으로 소개하고 싶다. 허락을 하신다면 사진을 보내 달라」 는 아주 사무적인 편지였다. 나는 사진을 보냈다. 얼마 후 다시 이시영씨에게서 답장이 왔다.
 
  「그런 사진 말고 다른 사진을 보내 달라」
 
  나는 양복을 입고 차를 타고 순창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어 보냈다. 그리고 몇 달 후인 1982년 10월 나에게 두툼한 책 두 권이 배달되어 왔다. 노란 봉투를 뜯어 보았다. 시집이었다.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였다. 新군부가 들어서서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지성」, 그리고 「뿌리깊은 나무」를 폐간했기 때문에 詩를 발표할 수 없는 詩人들은 궁여지책으로 이렇게 21명의 詩人들의 詩를 묶어 발간했던 것이다.
 
  시집을 펼치는 내 손이 떨렸다.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숨이 멎을 것 같은 절망과 희망을 스스로 만들어 오며, 나는 그 얼마나 숨이 멎을 것 같은 세월을 보냈던가. 선생이 되어 책을 보기 시작한지 꼭 13년 만의 일이었다.●
입력 : 2014.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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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 ‘Stand Up Dad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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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기정 (2015-04-20)

    한사람의 문학입문기가 잔잔한 감동을 주네요
    김태완 기자님의 시선도 편안하고,,,,
    희망을 버리니 편안했다가 맘에 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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