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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태완 ‘Stand Up Daddy’

故 박남철 시인을 기억하며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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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철 시인을 기억하며
 

형식 파괴한 '해체시' 이끈 박남철 詩人 별세

 <조선일보> 2014년 12월 8일자

박남철 시인.


1980년대 해체시(解體詩) 운동을 이끈 박남철 시인(61·사진)이 6일 지병으로 세상을 떴다.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으로 등단한 그는 시의 형식을 파괴하는 해체시를 잇달아 내놓아 이상(李箱)의 뒤를 잇는 전위 시인으로 꼽혔다. 그는 시의 고정관념을 깬 이성복·황지우 시인과 더불어 80년대 해체시의 선두 주자가 됐다. 기존 시를 거침없이 인용해서 짜깁기하거나, 묘하게 비틀어 패러디하는 수법을 즐겨 썼다.

박남철은 1978년 첫 시집 '지상의 인간'부터 현실을 신랄하게 조롱하고 풍자했다. 그는 독자들을 꾸짖는 시를 쓰기도 했다. "내 시에 대해서 의아해하는 구시대 독자놈들에게…차렷, 열중 쉬엇, 차렷…"이라고 읊었다. 시집 '반시대적 고찰' '생명의 노래' '자본에 살어리랏다'도 냈다. 문단에선 '괴짜 시인'으로 통했고, 그의 시를 놓고 찬반양론이 자주 벌어졌다. 그는 출판사에 시집 원고를 넘겨놓곤 평론가의 시집 해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출판하지 않은 적도 있다.

그는 지난 2005년 경희 문학상, 2008년 불교문예 작품상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송미자씨와 아들 박해미르씨. 빈소는 서울 중랑구 신내로 서울의료원 장례식장 8호실. 발인은 8일 오전 7시. (02)2276-7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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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자는 작년 126일 세상을 떠난 시인 박남철과 오랜 인연을 이어왔다. ‘독자를 길들이려는그의 창조정신을 흠모해 왔다. 무시무시하고 괴팍하며 날 선 객기로 문인들을 벌벌 떨게 했던 괴짜였으나 자신의 시 정신을 이해하는 이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웠다. 그는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으로 나뉘는 시단의 폐쇄적 권력 사이에서 방황하며 양쪽에서 경원(敬遠)시 됐지만, 오직 가난한 전업 작가의 길을 외롭게 걸었다.

그는 정통파 시인과 달리 시 고유의 비유나 시적 구조보다 형태파괴, 풍자, 분노 등을 여과 없이 토해낸 작품들로 독자를 사로잡았다. 생전 시인은 자신의 창조정신을 나는 반항했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로 대신했다. 그에게 반항하는 삶은 절망이었고, 절망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힘이 창조정신이었다. 시인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삶은 눈물입니다. 저는 크게 한 번 욺으로써 시인이 되었고, 다시 크게 한 번 욺으로써 시인으로서 또다시 깨어났어요.”

창조적 열정에 불타는 사람은 민감하고 감정이 섬세하며 풍부하다. 그런 감정은 주위 사람과 타협하기 어렵고 갈등을 낳게 마련이다. 박남철 시인은 그런 갈등의 언어로 시를 썼다. 그는 주위 사람과의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갈등은 열정을, 창조정신을 불러왔다. 

2. 아래는  시인 하재봉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추모글이다.

박남철 시인이 어제 아침 죽었다. 12시쯤 후배 시인에게서 온 연락을 받고 난 멍해졌다. 문단 최고의 깡패인 그를 안본지 20여년 지난것 같다. 지난해 말인가 페북 친구 요청이 왔길래 묵살했다. 몇일 뒤 살펴봤더니 그 스스로 철회를 했다. 난 알고 있다. 그와 엮이는 순간 내 인생이 피곤하고 힘들어질거라는걸. 그는 내 대학 1년 선배다. 방위를 마친 그와 나는 대학 4년을 같이 보냈다. 그와 지긋지긋하게 싸운 날들은 셀 수도 없다. 등판도 거의 같은 시기에 했고 내가 3년 후배들인 류시화 박덕규 이문재와 시운동 동인을 시작했을 때 그는 나를 엄청 시기했고 괴롭혔다. 그가 문단에서 벌인 깡패짓은 영원히 한국문학사에 남을 것이다. 그는 자타공인 문단 천하제일의 깡패였다. 어제는 일이 가장 많이 겹치는 날중 하루다. 원래 새벽 3시에 끝나는 일정이었지만 솔땅 생일파티에 잠깐 들렸다가 서울의료원 영안실로 갔다. 평소 그에게 괴롭힘을 당한 문단의 엄청난 시인 작가 문학지 편집자들 출판사 관계자들 문학기자들 그의 죽음에 안도감을 느끼며 시끌벅적할줄 알았다. 그의 대학동기이자 역시 내 1년 선배인 고원정, 그리고 박덕규 김요일 김이듬 시인 등 6명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박남철이 죽었는데 영안실에 6명이라니. 김사인 시인과 작가 인홍도 잠깐 들렸다 갔지만, 이럴 수는 없다. 난 생각보다 그가 오래 살았다고 생각한다. 진심이다. 그는 대학때부터 정신질환도 앓고있었고 약도 한웅큼씩 먹었다. 그와의 일화는 10권짜리 대하소설로도 모자라다. 교회식으로 꽃을 바치는 영안실 한쪽에 도봉교회가 새겨진 깃발이 있었다. 영정사진이 마음에 안들었다. 박남철인데 그답게 삐딱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봐야 되는데 너무나 따뜻하고 평온한 표정이었다. 잘가라 박남철, 당신과 살았던 순간들 정말 지긋지긋했다. 이제 그런 일들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런데 조금 아니 많이 쓸쓸하다. 왜 눈물이 찔끔거릴까. 속시원하고 후련해져야 하는데. 잘가. 박남철. 나는 한번도 그를 선배라 부르지 않았다. 항상 그와 부딪칠 때는 전투적으로 싸우려고 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는 막무가내 함부로 깡패짓을 했지만 나한테는 그러지 못했다. 우리는 철없던, 문학적 패기가 하늘을 찌르던 대학 4년 그 긴 시간을 함께 보냈으니까. 잘가 박남철 선배. 거기가서는 싸우지마라. 내가 아주 나중에 가서 또 싸움꾼 노릇하고 있으면 정말 디지게 패버릴테니까.

 

주기도문, 빌어먹을 

               - 박남철 

지금, 하늘에 계신다 해도

도와 주시지 않는 우리 아버지의 이름을

아버지의 나라를 우리 섣불리 믿을 수 없사오며

아버지의 하늘에서 이룬 뜻은 아버지 하늘의 것이고

땅에서 못 이룬 뜻은 우리들 땅의 것임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를 일흔 번쯤 반복해서 읊어 보시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고통을 더욱 많이 내려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미움 주는 자들을 더욱 미워하듯이

우리의 더더욱 미워하는 죄를 더, 더더욱 미워하여 주시고

제발 이 모든 우리의 얼어 죽을 사랑을 함부로 평론지 마시고

다만 우리를 언제까지고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둬, 두시겠습니까?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이제 아버지의 것이

아니옵니다(를 일흔 번쯤 반복해서 읊어 보시오)

밤낮없이 주무시고만 계시는

아버지시여

 

아멘 

3. 아래는 <법률저널>에 실린 오시영 교수(숭실대 법대)의 추모글이다. 그는 시인이자 변호사다.

박남철 시인이 죽었다, 지난 126. 그에게는 살아생전 폭력시인, 성추행시인이라는 살갑지 않은 수식어가 따라 다녔다. 오감도의 시인 이상 이래 한국 해체시의 대가라는 문학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위 두 수식어가 상징하듯 그는 많은 사람들, 특히 시인들로부터 경원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생전의 그에게서는 용광로의 검은 쇳물 사이에서 일출 중인 태양의 이글거림같은 느낌이 짙게 배어 있었다. 보통 용광로 속에서 녹아내리고 있는 쇳물은 붉기 마련인데, 그에게서는 검은 쇳물이 떠오르고, 붉어지기 위해 마지막 안간 힘을 다 하는 그 검은 쇳물 속에서 더 뜨겁게 자신의 존재를 붉게 차별화하겠다며 몸부림치는 일출 직전의 태양 같은 처절한 몸부림이 느껴져 오기도 했다.

황현산 시인은 그의 죽음에 대해 한 작가를 후대의 역사는 영향력으로 평가하고, 당대의 비평은 재능으로 평가한다. 박남철은 많은 사람에게 골치 아픈 인간이었으나, 재능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그의 부고에 날 괴롭힐 일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과 안쓰러움이 교차했을 것이다.”라는 글을 트위터에 남겼다. 아주 적확한 평가라는 생각이다. 언젠가 그는 인사동 골목길 술좌석에서 나에게 오 형, 폭력은 권력이야.”라고 말했다. 동석한 P시인과 피 터지는 난투극을 벌린 뒤끝이었다. 두 사람의 덩치 사이에서 피 터지는 싸움을 말리기 위해 가운데 끼어 있던 내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그의 작품 자본에 살어리랏다가 상징하듯, 그는 자본주의 현실사회에서 철저하게 패배한 가난한 시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세상 모두에 대한 분노를 폭력으로 표출했을 수도 있다. 몸폭력, 말폭력 모두가 자기가 가진 유일한 버팀목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거침이 없었다. 자신의 가장 큰 달란트인 말솜씨, 글솜씨를 통해 많은 선배시인들을 희롱했고, 가면 속의 거짓 진면목을 거침없이 폭로하였다. 까닭에 이름깨나 알려진 유명시인들은 왠지 모르게 그 앞에서 설설 기는 모습을 보이기조차 하였다. 그런 모습이 내게는 참으로 이상해 보이기도 하였지만, 현실은 그러 했다. 그러다가 그는 그 말솜씨, 글솜씨가 통하지 않은 경계의 지점이라고 판단되면 거침없이 몸솜씨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는 했다.

그는 폭력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을 통달하고 있었다. 사람을 두렵게 하면 그게 애정으로 되돌아온다는 이상한 철학(?)을 수많은 경험칙을 통해 익혀버린 자의 고단수 수법이었다. 내 눈에는 그리 보였다. 황현산 시인이 트위터 글을 통해 압축해서 그를 표현한 것처럼 그를 아는 많은 이들은 가까이 하자니 버겁고, 멀리 하자니 뭔가 찝찝한, 법으로 하자니 그렇고, 안 하자니 또 그렇고 하는 묘한 경계에서 그를 대해야 했다. 당찬 이들은 그를 아예 무시하고 만나는 것 자체를 거부했고, 어떤 이들은 그의 시에 푹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 채 마치 꿀병에 빠진 파리처럼 묘한 끈적거림을 느껴야 했을 터이다. 그의 공격대상이 된 이들은 간혼 나에게 도와달라고 했고, 그는 반대로 자신을 도와달라고 하기도 했다. 변호사시인으로서 곤란한 지경이 종종 되고는 하였다. 하지만 그는 참으로 묘한, 특이한 시인이었음이 분명하다. 애증이 교차되는 특이한 시인이었다고 할 것이다.

20
여 년 넘게 친구처럼 지내온 그의 사고 현장에 변호사라는 죄로 자주 불려나가고는 했다. 새벽 두시가 넘은 한밤중에 여기 파출소야, 좀 나와 줘라고 해서 불려나가 졸지에 보증인이 되어 그를 빼내오기도 했고, 경찰에 고소되었다며 진술서를 써야 하는데 도와 달라 해서 수십 장의 진술서를 써주기도 했다. 물론 법원으로 사건이 넘어가면 변론서를 써주어야 하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힘들다고 하면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가슴이 먹먹해지며 눈물이 나기도 했고, 벼랑 끝 칡뿌리에 매달린 채 발버둥치는 한 인간의 모습이 보이기도 해 안타깝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두려움 없이 펼쳐지는 시원스러운 글들은 넓은 만주벌판을 질주하는 한 마리의 적토마였고, 눈 날리는 시베리아 벌판을 질주하는 닥터 지바고의 대륙열차이기도 했다. 동년배의 그가 병으로 고생하다 죽었다니, 참으로 애석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내 첫 시집 <여수>4”를 써 주었다. 좀 긴 글이지만 인용해 보기로 한다. 오시영의 여수(麗水)’는 여수(旅愁). 그것도 단순히 그냥 여수(旅愁)인 것이 아니고, 저 우리 이순신 제독의 여수(黎首)로서의 여수(旅愁). 그리하여 우리의 시인 오시영은 우선 진해루즉 진남관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들리오이니까, 전라좌수 영감/백성의 충성을 아시오니이까(?)”라고 벼락처럼 단언해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누가 들어봐도 처음 듣는 말이다. 감히, 가암히, 우리의 민족 제일의 위대한 성웅 앞에서 백성의 충성을 아시느냐고? 하여, 과연 이러한 물음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물론 이는, 즉각적으로, 바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도대체가 저 일개 이순신 따위가 이겼다는 것이었던가. 아니면 그 이순신을 믿고 따라준 우리 무수히도 많이 죽어간 백성들이 이겼다는 것이었던가? 하여, 우리 위대한 대웅, 부처를 가장 사랑해주는 말이 바로 부처를 가장 죽이는, 부정해주는, 가장 부처 아니게 해주는 말이 되듯이, 오늘날 우리 여수의 시인 오시영은 문득 이러하시게, 이토록 도저하시게, 처음으로 그 역설적인 득오의 발설을, 본의 아니게도, 문득 토해 내놓으셨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앞으로, 이 나라의 그 모든 우리 시인들의 말들도, 바로 이와 같이 바로 이 지점에서, 재편성될 수가 있어야 하리라. 여러 말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이다. 이상이다. 아니,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나는 그동안 뭇 시인, 평론가들이 시집들의 4‘ 같은 데서 하도 구질구질하게도 여러 말도 많아서, 그 판에 박힌 듯한 자기 모방의 그 낯부끄러운 말들도 하도 많아서, 그저 딱 보기에 싫기만 했었다는 것이다. 다시, 이상이다.(黎首는 백성이라는 뜻이다)

<명량> 속의 이순신 장군조차 우습게 여기며 내게 4”를 건네주며 어때?” 했던 박남철 시인은 이제 죽었다. 언젠가 나를 향해 오 형은 큰 무당이야, 나도 큰 무당이지.” 했던 그의 말도 뇌리를 맴돈다. 시인은 그 시대의 시대언어를 표출하는 시대의 무당이 되어야 한다는 박남철 시인, 그의 내면에 이글거리던 용광로 속의 태양은 그를 가만 두지 않고, 자신을 갉아먹고, 남을 갉아먹고, 가학의 미학을 실천해 보였던 시인이다. 한편에서는 그의 무분별한 행위로 인해 피해를 본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를 비난하는 목소리도 높다. 그러면서도 그를 미워할 수만 없다는 묘한 동질감을 느끼는 이들도 많다. 다시는 거침없는, 언어의 살촉을 새로이 맞을 수는 없을 것이다. 7년 전 그의 시 <겨울강>을 본 칼럼의 한 내용으로 삼았던 기억이 새롭다. 연날리기, 첫사랑, 자본에 살어리랏다, 고래의 항진 등 그에 대한 수많은 평가작품들이 있겠지만, 박남철 시인 하면 나는 <겨울강>이 떠오른다.


겨울강에 나가/ 허옇게 얼어붙은 강물 위에/ 돌 하나를 던져본다/ 쩡 쩡 쩡 쩡 쩡// 강물은/ , , ,/ 돌을 튀기며, ,/ 지가 무슨 바닥이나 된다는 듯이/ , , , , ,// 강물은, ,/ 언젠가는 녹아 흐를 것들이, / 봄이 오면 녹아 흐를 것들이, , / 아예 되기도 전에 다 녹아 흘러버릴 것들이/ , , , , ,// 겨울 강가에 나가/ 허옇게 얼어붙은 강물 위에/ 얼어붙은 눈물을 핥으며/ 수도 없이 돌들을 던져본다/ 이 추운 계절 다 지나서야 비로소 제/ 바닥에 닿을 돌들을./ 쩡 쩡 쩡 쩡 쩡 쩡 쩡”(겨울강, 전문)

입력 : 2015.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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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 ‘Stand Up Dad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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