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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오봉 ‘주말 나들이’

아! 6.25 “한반도에 또 다시 전쟁이 난다면?”

이오봉  월간조선 객원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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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개입으로 유엔군의 흥남철수작전 당시 한국 해군의 LST에 탑승하고 있는 피난민들.(1950.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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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후퇴 당시 자유를 찾아 한겨울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향하는 평양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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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후퇴하는 유엔군을 따라 목숨을 걸고 끊어진 평양 대동강철교를 타고 넘는
 피난민 행렬. 사진-AP통신 막스 데스퍼, 프리처 상을 받은 사진이다.(195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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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명의 함경도 지역 피난민들이 흥남부두에서 남한으로 가는 군 함정에 동승했다. 유엔군이 퇴각하면서 파괴한 열차들이 불타고 있다.(1950.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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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를 따라 퇴각하는 군인들과 피난민들. 수원근교 6km까지 북한군이 쳐들어 와 있었다.(1950.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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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열차 연결 고리 위에 떨어지지 않게 서로 끌어안고 기차에 오른 일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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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후퇴 당시 인천항에서 한국 해군의 LST에 오르는 피난민들.(1950.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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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 흥남철수작전에는 함경도 주민들의 피난민 철수작전도 동시에 펼쳐졌다. 흥남부두에 미국
함정의 탑승을 기다리는 피난민 가족. (1950.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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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떠날질 모르는 피난열차. 화차에 매달려 기차가 떠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밤새껏 맡아야 했던  청주감옥소 사람 타는 냄새

초등학교 2학년 때 한국전쟁을 겪었다. 인천에서 아버님의 고향인 청주로 걸어서 피난 가는 길에, 그리고 청주에서 잠시 살면서, 그 참혹한 살육의 현장들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국제 연합군의 반격에 쫓겨  달아나게 된 북한군이 밤에 우익 인사들이 많이 갇힌 형무소에 불을  질러 밤새껏 사람 타는 냄새를 맡아야 했다.
자신의 부모, 형제, 자매가 타죽고 있음을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불타는 형무소 근처에 모인 채 방성대곡하던 그 무력하고 가엾은 사람들의 울음을 들어야 했던 악몽의 그 밤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국전쟁의 원인, 과정, 휴전, 영향을 집대성한 ‘한국전쟁’을 펴낸 정치학자 김학준 박사(제물포고,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졸, 현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의 6.25 한국 전쟁 체험담이다.


“아즈바이, 이 이불에 꼭 싸서 묻어주오”

 어느 날, 나무하러 갔다 와서 나뭇짐을 내리려하는데 늘 부엌에서 반가이 맞아주시던 할머니와 어머니 가보이지 않는다(부엌은 창고집 바깥에 있었음).
마당으로 돌아 들어가는 보니 주인집 마루에서 새끼를 꼬고 계셔야 할아버지도 보이지 않고, 무심코 방문을 열었더니, 거기 어둠 컴컴한 방안에 식구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찬찬히 보니 가운데 동생 영숙이가 누워 있는데 소리도 없고 움직임도 없다.
죽은 것이다.
피난길에 추위에 떨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다 보니, 제일 기초 체력이 약한 이 아이가 첫 희생이 된 것이다.
식구들은 이미 눈물도 말라버린듯 곡소리도 없었고, 방안에 얼음 같은 차가운 침묵만이 무겁게,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우리는 이날 아무 말도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막내 동생 용매가 울어 젓을 먹여준 것 외에는 -.
다음날 동네 어른 두 분이 와서 영숙이를 안고 갔다.
그중 한분이 영숙이에게 거적을 덮어 가져가려 할 때, 어머니가 어디선가 누비이불을 꺼내서 영숙이에게 덮어주더니, 그분에게 ‘아즈바이, 이 이불을 꼭 싸서 묻어주오.’라고 간청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바닷가에 늦게 돌아왔는데, 아래 목에 용매가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언제나 젖 달라고 귀 따갑게 울던 애가 조용히 누워 있는 것만 해도 기특하다 생각하며, 타고 넘어가려다 발을 밟았는데 울지 않는다. 웬일인가?
아! 이미 용매가 영원히 그 울음을 멈춘 것이었다.
첫 돌을 넘겼으니 이제 이름을 짓고 출생 신고도 해야 할 터이나, 전쟁 통에 이도저도 못하던 새, 애는 오직 울음만으로 배고픔의 의사 표시를 하다가 드디어 일찍 가버린 것이다.
속속 귀가한 식구들은 하나 같이 대성통곡이었다.
영숙이의 죽음 때 참았던 눈물도 함께 터져 나온 듯. 손자 잃은 할아버지, 조카 잃은 삼촌, 사촌 동생 잃은 용재형.
특히나 세 자식 중 이미 딸과 아들, 둘을 잃고 나만을 외아들로 남게 된 아버지는 무섭게 벽을 치며, 하늘을 향해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맹수같이 울었다.
이러다간 아마도 나마저 조만간에 잃을지 모른다는 절망감도 들었으리라.
그 와중에 어머니는 부엌에서 밥을 지으셨다.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지은 하얀 쌀밥(할아버지는  쌀밥을 잣자 못하도록 엄명을 내리섰다)을 한 보시기 가득 담아서, 죽은 용매의 머리맡에 놓아두시는 것이었다.
철따구니 없는 나는 어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야단맞을 것이 두려웠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현 동보항공 CEO인 이인재(부산고, 서울대 지질학과 졸) 사장의 저서 ‘달리며 돌아보며’에 나오는 6.25 흥남철수작전 때 배를 타고 거제도 장목면에 내려서 일가족이 겪었던 피난생활 수기의 한토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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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로 지게에 가재도구를 잔뜩 짊어지고 피난길에 오른 소년. 살아 있다면
지금쯤 70 중반쯤 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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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소달구지에 가재도구와 어린 아이들을 싣고 온 가족이 끌고 밀면서 피난길에 오른 피난민들, 그들의 기나 긴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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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밥 언제 먹어요?” 피난민촌의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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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손에 들려 있는 메꽃뿌리. 논두렁에서 캐어다 씻어서 살짝 구어 먹으면서 허기를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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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후퇴 당시 눈 덮인 골짜기를 지나는 긴 피난민 행렬. 길 옆 짚 차 위에서 미군이 기록 영화를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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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후퇴 당시 무릎까지 빠지는 폭설을 뚫고 나선 피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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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속의 아이들처럼 바가지에 담긴 밥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다행. 살아 있다면 아마도 70에 가까울 것이다.



“금계랍 한 알만 있어도 살 수 있을 텐데-.”

65년 전 일이다.  산동네 황토 언덕 여기 저기  들어선 판자집 동네에 북에서 빨갱이들이 쳐들어 왔다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그래도 학교는 문을 열었다. 하루는 운동장에서 뛰어노는데 서쪽 하늘에서 경비행기들이 서로 엉켜서 총을 쏘아대며 연기를 뿜어대기 시작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김포비행장 쪽 상공에서 북한군과 아군의 비행기들이 공중전이 벌였다고 했다.
바로 그날 이 후 전쟁이 났으니 학교에 오자 말라고 했다. 2-3일 있으니 띄엄띄엄 떨어진 집들이 모두 조용해졌다. 다들 밤사이에 어디론가 다 피난을 떠나버린 것이다.
2년 전 황해도 연안에서 어렵사리 밤배를 타고 한강을 거슬러 마포에서 내려 북아현동 산동네에 겨우 자리를 잡은 우리네 가족들은 딱히 전쟁을 피해 갈 곳이 없었다.
우리 부모들이 어린 나와 과 갓 태어난 어린 여동생을 데리고 잠시 몸을 피한다간 곳은 서대문구 연희동 지금의 연세대학교 뒤 봉원사 아래 야산의 외딴 농가였다.
며칠을 그곳에서 지내다가 별일 없다 싶어 북아현동 경의선 철길이 내려다보이는 산동네 우리 집으로 돌아 왔다.
7,8월 공산치하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면서 집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어 굶는 날이 많았다.
하루 종일 맷돌에 간 밀가루에 도랑에서 명아주 순을 따다가 넣고 끓인 허연 풀떼기를 마시거나 이도 모자라면 장독에서 고추장을 한 숟갈 퍼서 냉수에 풀어 후루룩 들여 마시는 것이 전부였다.
9월에 접어들자 우리 집의 식량난은 더욱 가혹했다.
집안에 무명천과 입을 만한 옷을 어머니가 내다 쌀, 보리, 밀과 바꿔와 돌절구에 빻아 죽을 쒀 먹으면서 지내야만 했다.
서울 수복이 가까워 오자 산동네는 더욱 죽은 듯 조용했다.
식량이 떨어지자  피난을 가지 못한 또래 동네 아이들과 어울러 빈 집 털이에 나섰다. 산 아래나 철길 건너 맞은편 적산가옥이나 기와집 동네의 빈 집을 돌아다니며 먹을거리를 뒤지러 다니거나 식량과 바꿔 먹을 만한 것들을 흠처 나왔다.
9,28 수복이 되고 다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1,4 후퇴를 겪으며 우리 집은 아버지가 담배 잎을 작두로 썰어 얇은 종이에 말아 시장에 내다 팔면서 험난한 전쟁 통에 굶지 않고 용케 살아남을 수 있었다.
1950년 9.28 수복에 즈음하여 공산군이 젊은 남자들은 다 잡아 간다기에 아버지 혼자 괴나리봇짐을 지고 수원 어딘가로 몇 날 피난을 떠난 사이,
어린 여동생은 엄마 등에 업혀 엄마와 함께 고양(일산) 등 시골로 옷가지 등을 들고 곡식과 바꾸기 위해  다니느라 젖도 밥도 제대로 얻어먹지도 못하며 지냈다.
여동생은 어느 날 며칠째 온 몸이 불 같이 뜨겁더니 꼼짝하지 않고 축 늘어져 누워있기만 했다.
“금계랍 한 알 있어도 창숙이가 일어날 텐데....”
“아이구, 애야!”
한손으로 여동생을 토닥거리며 한숨짓는 엄마 품에서 숨을 헐떡이다가 고개를 옆으로 푹 떨어뜨리고 말았다.
창호지 문을 손가락으로 뚫고는 내다보면서 배시시 웃고 벽에 기대 겨우 발을 떼던 어린 동생. 호롱불 빛 어두운 방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죽어가는 동생을 보고는 나는 목이 메었지만 울지도 못했다.
다음날 동네 아저씨 한분이 지게를 지고 오셔서 가마니 떼기에 동생을 둘둘 말아 지고 아버지는 무덤을 팔 곡괭이를 지고 따라 나스셨다.
문 밖 언덕에 서서 창숙이가 가는 길을 눈을 떼지 않고 보았다.
멀리서 보니 신촌 가는 철길 굴 언덕을 지나 건너편 안산 기슭인 이화여대 뒷산 붉은 황토 길을 올라가고 계셨다.
아버지와 아저씨는 양지 바른 언덕에 구덩이를 파더니 지게에서 창숙이를 내려 대충 땅속에 묻고 산을 내려 오셨다.
가끔 동생이 생각이 나서 그 자리를 더듬어 가보면 불룩하게 솟아 오른 작은 무덤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그 후 그 근처에 9.28 서울 수복 당시 연세대학교 뒤 안산전투에 죽은 인민군들의 무덤들과 뒤섞이면서 우리 창숙이의 묘 자리를 꼭 짚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6.25 전쟁 때 필자가 겪은 잊을 수 없는 뼈저린 기억들 중에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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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업고 보따리는 머리에 이고 손에는 헌 부채와 깔판을 들고 고난의 피난길에
나선 부녀자.(195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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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때 대구 근처 낙동강 변에 차려진 피난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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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사진기자 칼 마이던스가 찍은 북한 피난민 일가족. 벌거벗은 맨발의 어린 손주의
양손에 큰 물고기가 들려 있다.(1950.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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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후퇴 당시 서울역에서 피난 열차를 기다리는 피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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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후퇴 당시 군수 물자가 실린 무개화물차에 오른 피난민들(1950.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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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길에 부모를 잃은 소녀의 절망. 그녀는 그 후 어떻게 됐을까?


“들리는가? 한민족의 울부짖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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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전쟁기념관 공동 주최 ‘6.25전쟁 50주년 특별기획전’ 인명손실 현황.
입력 : 2015.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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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봉 ‘주말 나들이’

ob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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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우영 (2015-08-07)

    김성주-가짜 김일성-라는 인간이 스탈린과 모택동을 배후로 일으킨 동란입니다. 저주 받을 전쟁 원흉들...

  • 주년석 (2015-07-07)

    눈물이 나서.... 더 못 일겠다

  • 박대우 (2015-06-20)

    이오봉 선배님, 70년대 후반 ~80년초 현대그룹에서 같이 일했던 박대우입니다. 여전히 건강하시고 이 선배님의 귀한 사진자료, 글 자주 읽어보고 있습니다. 건승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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