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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태완 ‘Stand Up Daddy’

[발굴] 文人, 옛 잡지를 거닐다 ② 이광수·오상순·김찬영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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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同人, 현실을 폐허로 인식하며 술·요정·기생에서 문학소재 찾아”

⊙ 《白潮》 동인이자 《조선일보》 학예부장 安碩柱의 <文壇回顧錄> 입수
⊙ 춘원은 女醫 허영숙과 결혼한 뒤 ‘애욕의 심연’ 담은 기괴한 작품(?) 남겨
⊙ 공초는 기르던 고양이가 죽자 천지가 통곡한다는 詩를 써

이광수·오상순·김찬영 자화상(위로부터).

 金泰完 月刊朝鮮 기자        

일제 강점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학예부장을 지낸 석영(夕影) 안석주(安碩柱·1901~1950)는 다양한 재능, 예술가적 기질로 한국 근대사의 문화 개척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한 분야에 머무르지 않고 소설과 수필·영화·시나리오 창작은 물론, 신문 삽화를 직접 그렸고 바이올린, 플루트, 기타, 심지어 파아노 즉흥연주도 가능했다고 한다.
 
  8·15 광복과 분단을 겪으며 쓴 노랫말에 아들(安丙元)이 곡을 써 만든 동요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다. 석영이 처음 가사를 쓸 때(해방 전)는 ‘통일’ 대신 ‘독립’이었으나 이후 교과서 등에서 통일로 바뀌었다.
 
  석영 선생은 신문사 학예부장과 《백조(白潮)》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1920년대와 특히 30년대 문단의 모습을 직접 목격한 인물이다. 나라 잃은 문인들의 가난과 호기, 술에 얽힌 비사(秘史)를 많이 남겼으나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석영이 남긴 평론으로 <문단 메리꼬라운드> <조선문단삼십년측면사> <문단삼십년비사> <문단회고록(文壇回顧錄)> 등이 있다. 이 중 기자가 발굴한 비사는 <문단회고록>이다. 이 글은 《민족문화》 1949년 10월호(창간호)와 1950년 2월호에 게재됐다.
 
  이 글을 쓸 당시 석영은 대한영화협회 이사장에 재직하고 있었고 서울시 예술위원, 문교부 예술위원, 국립극장 위원에 위촉될 정도로 주류 문화계 인사였다. 그러나 1950년 2월 24일 가난과 오랜 병고로 영면했다. <문단회고록>은 생의 마지막 시기에 쓴 글이다. 이 글에는 석영이 만났던 문인들의 말랑말랑한 에피소드가 가득하다.
 
 
  나혜석과 《폐허》 동인
 

안석주 선생과 그가 그린 신문삽화.
 < …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기미년(己未年) 가을. 서울 동소문 안 혜화동이 지금은 인가가 빽빽이 들어차서 볼품이 없지만 그때는 혜화동을 걸어가면 길 옆으로 맑은 시내가 흐르고, 냇가에는 버들이 늘어져 있어서 풍치가 좋았다. …>(‘문단회고록1’, 《민족문화》, 1949년 10월, 107쪽)
 
  어느 맵시 있게 들어앉은 기와집에 여류화가 나혜석(羅蕙錫)이 행리(行李)를 풀었다. 일본 여자 미술학교 출신의 그녀는 ‘노리끼리한 육색의 가냘픈 체구’를 지녔다. 그 교태는 일본 유학생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였다. ‘이 교태로 해서 일생을 그르쳤으나 어쨌든 당시만 해도 청춘인지라’, 능히 지사(志士)나 문인들이 그녀의 집을 드나들었다.
 
 < … 이 여자에게는 ‘파트롱’ 겸 남편이 이미 정해 있으나 그 여자가 일본에서 가지고 온 자유연애관은 별로 그런 데로서 깨질 리 없다. …>(‘문단회고록1’, 107쪽)
 
  하루는 이 집에 《폐허》 동인 제씨(諸氏)가 나타났다. 폐허 동인으로는 김동인(金東仁), 염상섭(廉想涉), 김찬영(金鑽永), 오상순(吳相淳), 변영로(卞榮魯), 김억(金億) 등이다.
 
  이들은 여자라고 해서 덮어놓고 찬사를 보낼 리 없지만, 우연찮게 어느 누가 “우리나라에서 여류화가로 나군(羅君) 하나뿐이니까”라고 한 말이 불씨가 됐다. 이 바람에 나혜석의 개인전람회의 작품 정가표가 풍경화 한 폭에 그때 돈으로 1500원이라는 엄청난 고가에 달했다. ‘나혜석의 교태’가 전람회에서도 흘러넘친 셈이다.
 
  석영은 나혜석의 그림을 이렇게 평했다.
 
 < … 사실 이 여자는 그림을 배웠으나 작품을 보면 인체의 골상학(骨象學)도 잘 모르는 듯하였고 그저 정물화가 속되지 않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의 성격은 히스테릭한 것이 특징이겠으나 그것이 그 일생을 그르친 바요, 이 폐허 동인의 환멸을 자아내게 한 바일 것이다. …>(‘문단회고록1’, 108쪽)
 
  《폐허》 동인들은 일제 강점기의 현실을 폐허로 인식하며 방황하던 끝에 소위 일본 유학생 출신이자 인텔리 여성이었던 나혜석의 집을 자주 찾았던 것이다.
 
 < … 하지만 오히려 요정의 기생에 더 끌렸고, 그곳에서 문학적인 소재를 찾을 것도 같았다. 그래서 ‘마돈나’라든가 ‘비너스’로 여겼던 나혜석의 노랑 얼굴이 그들의 희미한 기억이 되어 갈 뿐이다. …>(‘문단회고록1’, 108쪽)
 
《백조》와 《폐허》 동인

 
  문예 동인지 《백조(白潮)》는 1922년 1월 9일 창간됐다. 순문학을 지향하며 당대 최고 문사들이 참여했다. 이광수(李光洙)·나도향(羅稻香)·박종화(朴鍾和)·안석영·이상화(李相和)·현진건(玄鎭健)·김기진(金基鎭) 등이 《백조》를 통해 문학작품을 발표했다.
 
  《백조》보다 2년 앞선 1920년 7월에 창간된 《폐허(廢墟)》는 김억(金億)·김찬영(金讚永)·남궁벽(南宮壁)·오상순(吳相淳)·변영로(卞榮魯)·염상섭(廉想涉) 등이 참여했다. 두 동인지는 근대문학의 불모지였던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낭만주의·자연주의·상징주의 등 새로운 문예사조를 도입하며 신문학 운동을 이끌었다.
 
  김동인·김찬영은 부자, 변영로·오상순은 빈털터리
 
  《폐허》 동인 중에 당시 부자였던 김동인, 김찬영은 매일 밤 요정을 드나들었다. 김억도 중산층 이상은 되었지만 오상순, 변영로는 그제나 이제나 빈털터리였다.
 
  공초(空超) 오상순은 식사(式辭)·축사(祝辭)·찬사(讚辭)로 한몫을 보고 어딜 가나 영서(英書) 철학책 십여 권은 옆에 끼고 다녀서 기생들이 공초의 이름이 얼른 생각 안 날 때는 “책 서방님”, “책 나리”라고 부르곤 했다.
 
  수주(樹州) 변영로는 기생이 어여쁘다거나 밉다거나 관계할 것 없이 그때나 이때나 그저 술뿐이라, 다만 잔소리가 길어 파흥(破興)이 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수주의 재치 있는 시는 동인들이 애송할 뿐 아니라 세평(世評)도 높아 어디서든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폐허》 동인들은 절망기의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매일 밤마다, 술집에서 세월을 보냈지만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술을 끊고 집에 들어앉아 책을 읽고 창작을 하며 사색을 하는 때도 있었다. 이때에 한 일화가 있다.
 
  공초 오상순이 서울 광희문(光熙門) 근방 허술한 외딴집에 살고 있었다. 당시 부인이 있었다는데 아무도 본 일이 없다. 하루는 공초가 기르던 고양이가 죽은 것을 공초가 무덤을 만들어 그 안에 매장한 뒤에 천지가 통곡한다는 뜻으로 시를 지었는데, 그 시가 명시(名詩)였다는 것이다.
 
  《폐허》 동인 중에 요절한 남궁벽이라는 이가 있다. 이 불행한 시인은 예배당 한 모퉁이에 임시로 살면서 달밤이면 뜰에 핀 월계화를 밤새워 바라보며 시상에 잠기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 기생과의 연정관계로 자살을 했다고 하는데 그의 죽음을 목격한 자가 없어서 분명치 않다’고 석영은 회고했다.
 
  평양 갑부의 아들이자 동경예술대학 출신의 화가이자 문필가였던 김찬영에게 오색 파라솔을 쓰고 찾아오는 향란(香蘭)이라는 기생이 있었다. 향란은 4자매 중 둘째로 어딘지 거친 데가 있어서 눈꺼풀이 팽팽한 데다 옴팡눈이어서 괄괄하게 보였다. 그녀가 《폐허》 동인과 가까이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동인들끼리 모여 술자리가 잦으니 술집 왕래가 잦았고 이 과정에서 향란이 ‘묻어 오게’ 된 것이다. 향란은 동인들에게 한 떨기 꽃이었다. 동인들은 그녀를 누가 차지하든 여자의 향기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향란이 김찬영을 정남(情男)으로 택한 것은 ‘업(業)이 기생이라 돈 있는 사내가 좋았던 탓’이지만 어느날 둘 사이에 파탄이 났다. 다른 동인들도 그녀에게 싫증이 났다.
 
 < … 청루(靑樓)에서 깃들인 평범한 기녀가 이들의 생애에 있어서 그리 애틋한 존재는 될 수 없는 데다가 이 여자의 주책없이 떠드는 불평이 이들을 불쾌하게 한 때도 있었다. …>(‘문단회고록1’, 110쪽)
 
  향란은 이들의 태도에 외로움을 느끼자 김찬영에게 발악을 했다. 어느날 남대문의 파밀호텔로 김찬영을 찾아간 향란은 대범하게 그 앞에서 옷을 벗고 소리쳤다.
 
  “보세요. 여자는 다 마찬가지죠? 내 몸에 무슨 티끌이 있기에 나를 배척을 하세요!”
 
  향란은 소리 높여 울었다. 김찬영은 어리둥절해하며 상서롭지 못한 풍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석영은 ‘향란이 그 길로 나가 단발을 하고, 여성해방운동에 쫓아다녔으나 결국 불행한 여성이 되고 말았다’고 썼다.
 
 
  巨匠 춘원과 후반기 작품
 
남편 김우영과 파리 여행에 나선 나혜석. 당시 첨단 유행을 보여주는 모자와 모피 코트 차림이다.
  《폐허》 동인들이 활동하던 시절, 춘원 이광수는 중국으로 간 망명자들이 조직한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주필로 활동했다. 춘원은 일본 와세다대 시절,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無情)>을 연재했다. 이인직(李人稙)이 신소설(《혈의누》 《은세계》)을 써서 근대소설은 이런 것이라고 세상에 알릴 무렵, 춘원의 《무정》은 신(新)문물에 열광했던 조선의 인텔리 독자(讀者)들을 사로잡았다.
 
  특히 춘원이 《무정》 《개척자》를 언문체(言文體)로 쓰고, 문미(文尾)에는 ‘하였다’로 써서 당시 ‘하니라’, ‘하였도다’에 익숙해 있던 이들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비록 ‘노인들에게는 기이한 느낌을 주어 경망한 것을 모방한다는 비난이 있었으나, 새것을 좋아하는 청소년들은 그 야릇한 새로운 문장에 매혹되고 말았다’고 한다.
 
 < … 그때 봉건주의의 아성에서 신음하는 청춘남녀에게 그 암묵(暗默)한 골방의 문을 두드리는 광명의 신(神)같이 이 《무정》은 그들 앞에 군림했다. 아직도 남녀가 서로 만났으되 얼굴을 붉히고 돌아서던 이때에 이 《무정》은 그들에게 ‘사랑’이라는 말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사랑’을 호소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문단회고록2’, 《민족문화》, 1950년 2월, 110쪽)
 
 < … 오늘까지 춘원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가 춘원 같은 사람이다. 가장 먼저 깨고, 가장 민족을 사랑하고, 가장 이 땅의 흙을 사랑하는 사람도 춘원이다. 1인칭 소설 외에도 누구나 느껴지는 것은 소설의 주인공은 반드시 춘원 자신으로 화(化)하려는 기미가 보인다. 그러나 이때 춘원은 정열이 과잉한 까닭으로, 될 수만 있다면 자기와 같은 정열의 인(人)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고 싶었을 것이다. …>(‘문단회고록1’, 111쪽)
 
  그러나 석영이 볼 때 춘원의 일생에서 후반기에 쓴 작품들은 ‘기괴’하게 느껴졌다. 《여자의 일생》 《애욕의 피안》《유정(有情)》 등은 춘원이 쓴 작품이라기보다 ‘애욕의 심연 속에서 침윤되는 인간’으로 쓴 작품에 가깝다는 것이다.
 
  무엇이 춘원을 변화시킨 것일까. 석영은 여의(女醫) 허영숙(許英肅) 때문으로 짐작했다.
 
 < … 그 여자의 눈은 흑진주와 같다. 이 눈이 춘원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 명모(明眸·밝은 눈동자)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허씨가 그 눈으로 춘원의 일생을 마름질했다고도 볼 수 있다. 춘원은 허씨와의 감정에서 여성묘사의 기묘를 얻었는지 모르지만 춘원의 근작이 조금 병적인 것이 뉘 덕택인지 말하기를 피할 수밖에 없다. 허씨가 춘원을 상해로 모시러 갈 때 그때가 춘원의 일생을 결정하는 계기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문단회고록1’, 111쪽)
 
 
  춘원과 허영숙
 
  《무정》이 시끌벅적한 인기를 끌 무렵, 춘원은 아내 백혜순과 이혼하고 1918년 허영숙과 ‘사랑의 도피행’을 떠났다. 그리고 1921년 5월 그녀와 정식 혼인했다.
 
  허영숙은 당시 최고의 여학교(진명소학교, 경기여중)를 거쳐 도쿄 여자의학전문학교(우시고메女醫專)에 입학, 1918년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의사시험에 여성으로 처음 합격한 인물이다. 그녀는 1920년 5월 서울 서대문에 조선 최초의 산부인과 병원 ‘영혜의원’을 개원한 일도 있다.
 
  이런 일화도 전해진다. 허영숙은 《동아일보》 학예부장으로 있던 춘원이 병으로 눕게 되자 대신 원고정리를 해 줄 요량으로 신문사에 나갔다가 1925년 12월 정식으로 학예부장 자리를 남편에게서 이어 받는 진기록을 세웠다. 신문 사상 첫 여성 부장이 허영숙이었다. 그녀는 1927년 3월까지 학예부장으로 있었다.(안석주 선생은 1928년부터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맡았었다.)
 
 < … “동아일보 학예부장이었던 남편 춘원이 병으로 눕게 되자 정리할 원고가 많은데 도저히 다른 사람이 정리할 수 없는 것이라, 며칠 정리할 셈치고 나갔다가 눌러앉게 되었습니다. 그때 손이 모자라 주요한씨를 모셔왔죠.” …>(‘퇴역 여기자들의 방담’, 《여성전진 70년》, 조선일보사, 1991년, 372~373쪽)⊙

입력 : 2014.11.20

조회 : 3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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