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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태완 ‘Stand Up Daddy’

[발굴 원문] 해방공간 金東仁 미발굴 자료 독점 공개(下)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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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물과 백두산이… 콱 눈물이 앞을 가린다”

오직 조선독립 일로(一路)를 위하여 건투(健鬪)해 온 ‘이노’(李老·이승만 박사)를 ‘민족 배역자’라 부를 입이 열려진 것은 20세기의 대기적(大奇蹟)일 따름이다. 주체가 없는 모든 소단체가 친공(親共)을 본받아서 이노에게 노(老)파시스트, 배족한(背族漢) 운운하니 이는 희극(喜劇)일 따름이다

⊙ “내 생전 다시 대창(大唱)하는 이 노래(애국가)를 들을 세월이 올 줄이야!”
⊙ 과거의 혹좌혹우(或左或右)는 아집이었다. 좌도 조선인이요, 우도 조선인이었다
⊙ 격식상 있어야 할 것이니 있기는 있지만, 그 ‘있는 것’의 뒷준비가 없으니 딱하다

[편집자註]
김동인 선생은 《중앙신문》 1945년 11월 14일부터 17일까지 수필 ‘동해물과’를 실었다. 또 ‘노(老)문학도가 본 신탁통치 문제’라는 부제(副題)를 단 ‘탁치(託治)냐 탁란(託亂)이냐’를 이듬해 1월 13일부터 24일까지 《대동신문》에 연재했다.
식목일을 장려한다면서도 묘목조차 못 구하는 현실을 풍자한 ‘빈 땅’은 《민중일보》에 1947년 4월 13일과 20일에 각각 게재했다. 어린이 잡지 《소학생》에 ‘~습니다’ 체로 단편역사소설 <이 충무공과 그 아들>을 썼다. 이순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아들 ‘면’이 중심인물이다.
‘×××’는 김동인이 직접 쓴 행갈이 기호, ‘□’는 원문이 담긴 마이크로 필름 상태가 나빠 해독이 어려운 부분이다.


<동해물과>
 
  (1)
 
 

  두 달 전까지만 하여도 우리의 여자들이 아침 눈만 뜨면 자리 속에서부터 부르기 시작하는 노래―그리고 저녁 자리에 들어가기까지 연해 부른 무슨 노래가 모두 일본의 ‘행진곡’ ‘애국가’ 등이었다.
 
  노래의 의의(意義)가 어떤 것인지 이해(理解)할 줄 모르는 어린애에서 비롯하여, 그만 정도(程度)의 일본말은 그래도 뜻을 짐작할 만한 소학(小學) 아동에 이르기까지, 그저 진일(盡日·‘진종일’의 준말―편집자註)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이런 일본 노래들이었다. 뜻을 알아서 이해하고 그 뜻을 주창(主唱)코자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그저 무의식으로 부르는 바이다.
 
  이것은 깨어 있을 동안은 무엇이든 흥얼거려야만 하는 소년의 본능이다. 이 본능을 이용하여 일본성(日本性)의 교육자들이 흘러 넣어준 ‘씨’의 산물이다.
 
  8월 15일이라 하는 돌개바람이 한번 세계를 뒤엎어놓자 여상(如上)한 노래들이 ‘금지’의 불문율(不文律) 아래 봉쇄를 당하여 버렸다.
 
  일장기와 일본 국가가 굴욕과 치욕 아래 인류사회에서 말살당하였다. 동시에 전 동양의 소년들에게 □□ 벌써 습관화하였던 일본의 국가, 애국가들도 비참한 □□□□ 금지(禁止)를 당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출처=《中央新聞》 1945년 11월 14일)
 
 
  (2)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저녁 자리에 들어갈 때까지 무엇이든 입으로 흥얼거리고야 견디는 욕구! 이것은 ‘어린이의 본능’이다. 싱가포르가 무너지기를 희망하는 바도 아니고, 미국인이 물러가기를 바라는 바도 아니건만, 여상의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 그것은 전혀 그들의 본능이다.
 
  일찍이 일본식 시국가(時局歌)에 대신할 만한 다른 노래를 가지지 못하고 배우지도 못한 우리의 귀여운 소년소녀들은 그들의 본능(독창하고 싶은)을 무리하게도 억압하고 불쾌한 세월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국가적 자유는 우리의 소년들에게 본능적 부자유를 갖게 하였던 것이다. 소년들의 그 가긍(可矜)한 심경이 가엾어서 그새 누차 정회(町會·주민자치 모임이라는 뜻의 일본어-편집자註), 그 밖에 기관 등에 주의(注意)하여, 여기에 대하여 무슨 용의(用意)가 있기를 종용하여 보기도 하였지만, 건국의 대업(大業)이 이런 등지에까지 고려할 겨를이 없었던 탓인지, 소년들은 여전히 벙어리의 세상을 계속하지 않을 수가 없는 가긍한 환경에 방치되어 있었다.
 
  눈코 뜰 새 없는 ‘건국의 대업(大業)’에도 조금의 여가가 생긴 양 하여 시내의 각 소학교도 개학을 하였다. 개학하면서 맨 처음 행사가(당연한 일이지만) 국문교육과 ‘애국가’(동해물과)의 교수(敎授)였다.
 
  지금은 길에 나서면 한길에서 집에 들어오면 집안에서 ‘가갸거겨’와 함께 고막(鼓膜)을 두드리는 상쾌한 음향, 그것은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향기롭고 부드러운 멜로디다. 그새 감금당해 있던 소년소녀들의 창(唱) 본능으로 해방과 자유 아래 솟아오른 것이다.(출처=《中央新聞》 1945년 11월 15일)
 
 
  (3)
 
  한일합방 전 온 나라가 한창 배일열(排日熱)에 뒤끓는 시절에 세간에 나서 고도산(故島山·도산 안창호 선생의 호-편집자註) 옹(翁)의 ‘간다간다 나는 간다’며 ‘동해물과 백두산이’ 등을 소리 높이 부르며 소학교를 다닌 우리 같은 50대의 사람에게는 다시는 생전 자유로이 부르는 ‘동해물과’는 아마 단념하였었더니, 지금 거리이고 골목이고 집안이고 도처에 들려오는 이 멜로디를 들을 때는 콱 눈물이 앞을 가리는 감격을 금할 수가 없다. 어찌 예기(豫期)했으랴. 내 생전 다시 대창(大唱)하는 이 노래를 들을 세월이 올 줄이야! 그리고 내 자식들이 40년 전에 자기네 어버이가 부르던 소리보다 더 우렁차게 더 큰 소리로 마음 놓고 부르는 세월이 올 줄이야. 마르고 닳기는커녕 이 강산 떠나가도록 큰 소리로 부를지라도 이를 금지하는 순검(巡檢)이 없는 자유의 세월이 올 줄이야.
 
  ‘마르고 닳는다’는 말이 생각나지만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하는 설자(說者)가 있다.
 
  “일본국가 ‘기미가요’는 우리의 애국가는 ‘마르고 닳도록’ 혹은, ‘내 임금과 같이 길이길이 누리자’라는 뜻을 나타내고 있지만, 표현에 있어서 ‘동해물과’가 ‘기미가요’보다 약간의 손색이 있다. 우리의 것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요, 일본 것은 ‘그대의 세월은 천추만세로 조약돌이 자라나 바위가 되고 거기에 이끼가 돋기까지’는 서로 상통되지만, 일본 것은 조약돌이 자라서, 즉 생장과 번식□□□(의 작용?―편집자註)으로 비유한 데 비하면, 우리 것은 오로지 갈고 달아서 수(壽)와 멸(滅)로 비유하였던 것으로 보아 우리 것이 좁은 감이 있다.”―운(云). (출처=《中央新聞》 1945년 11월 16일)
 
 
  (4)
 
  백두산석(白頭山石) 마도진(磨刀盡)이요, 두만강수(豆滿江水) 음마무(飮馬無)라 하여, 남아의 호쾌(豪快)한 기상을 읊는 데도, 백두와 두만의 산수를 끌어냈거니와 이 산과 이 강은 우리나라를 수호하는 신성한 산천이다. 우리나라 수호의 이 신성한 산천이 지질학상으로든, 산하(山河)의 생성이론상으로든, 마르고 닳을 날이 절대로 있을 까닭이 없고, 날을 돌아서 진(盡)하고 마를 턱이 없는 건(乾)할 날이 있을 까닭이 없다.
 
  그리고 현재 마르고 닳을 까닭이 없다는 원칙(天理)에 반(反)하여 ‘마르고’ ‘닳은’ 듯한 현상이 40년간 현출(顯出)해 있었지만, 천도(天道)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법이라, 40년의 휴식시간을 넘기고는 다시 세상에 고함치며 솟아오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하거니와, 저 조약돌이 자라서 바위가 되고 게다가 이끼가 끼기까지 지질학상으로 있을 수 없는 초자연적 기적으로 비유되는, 무한장(無限長) 축복할 일본제국은 그야말로 초자연적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 한, 인세(人世)의 표면에 다시 떠오르기는 (불가능해-편집자註) 지난(至難)한 몰락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조약돌이 자라서 바위가 되는 ‘옛말’의 세상이나, 생기면 여니와(좋지만―편집자註) 그렇지 못하는 한, 좀체 밝은 세월을 구경키 힘든 비참한 국가가 된 것이다. 하물며 남의 땅에까지 일장기를 휘날리며 ‘태평양은 우리의 바다’ 노래 부를 세월은 꿈에도 못 생각할 것이다.
 
  ×××××××
 
  우리는 ‘동해’라 혹은 ‘조선해’라 부르고 옛날(40~50년 전) 영국 발행의 ‘아주지도(亞洲地圖)’에는 “SEA OF COREA”라 올려졌던 바다가 그 40년간 ‘일본해’라 창씨개명을 하고 있노라니 바다 자신도 적지 않은 고통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다시 옛 이름을 찾은 ‘동해’ 바다, 그것을 40년간 부르지 못하고 불리지 못했던 그 □□(불충?-편집자註)까지 합쳐서 부르고 또 부르자. 동해물과 백두산이 2천만에서 상별(相別)하였다가 3천만으로 늘어서 다시 상봉(相逢)한 기꺼운 오늘 우리 3천만의 소리를 합쳐서 그야말로 백두산이 떠나가고 두만강이 부글부글 끓도록 우렁차게 불러보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하느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무궁화 삼천리 화려한 강산/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출처=《中央新聞》 1945년 11월 17일)
 
 
  <託治냐 託亂이냐-한 老文學徒가 본 信託統治 問題>
 
  (1)
 
   고요히 서재에 들어앉아서 쓰고 싶은 글이나 쓰는 것 ― 더욱이 작품을 검열하는 경무국(警務局)도 이젠 없고 귀찮은 형사(刑事)의 내방(來訪)도 없는 자유로운 세상에서 쓰고 싶은 글 마음대로 쓰는 것 ― 이것이 문학도의 가장 큰 원망(願望)이다.
 
  해방? 일본에서의 해방은 이미 되었다. 독립? 적당한 시기에는 의레히 올 것으로 약속된 일이다. 명랑한 전도가 놓여 있을 뿐 일점(一點)의 암영(暗影)도 없는―진실로 유태로운 세월이다.
 
  이러한 명랑한 기분으로 이미 공약(公約)된 지보(至寶) ‘독립’이 품안에 들어오기만 기다리는 우리에게 웬 뚱딴지 ‘신탁통치’란 요물이 나타났다.
 
  ‘독립을 주기는 줄 테지만 그 독립을 부담할 만한 자격이 있는지 5년 기한하여 그 점을 좀 조사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의레히 굴러들어올 ‘독립’이란 지보를 제반설비 갖추고 기다리는 3천만 동포에게 과연 청천벽력이다. 노기충천하는 것이 당연하다. 탁치를 운운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꾸짖고 노호하는 것이 당연하다.
 
  조선 독립을 요망하는 것은 3천만 우리 민족의 공통된 의사이다. 거기는 좌도 없고 우도 없고 남도 없고 여도 없고 노도 없고 소도 없다. 3천만 조선인의 똑 같은 요망이다. 만약 이 3천만의 마음과 상위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하면 그는 조선인이 아니거나 민족 반역자일 것이다. 조선인으로는 한 사람인들 ‘5년 후라도 무관하다’든가, 혹은 ‘탁치는 과거의 위임통치와는 다른 성질일 것이니 탁치는 배격할 것이 아니다’는 역족적(逆族的) 생각을 가진 사람이 없을 것이다.
 
  혹은 좌나, 혹은 우리 민족통일전선상 자존심이거나 혹은 아집을 세우기 위하여 보이던 ‘불통일(不統一)’은 이 외적의 출현에 혼연합일되었다.
 
  과거의 혹좌혹우(或左或右)는 아집이었다. 좌도 조선인이요 우도 조선인이었다. ‘독립’은 좌우를 물론하고 공통된 희망이었다. 5년 운운의 탁치기간은 좌에게 역하면 우에게도 역하였다. ‘즉시독립’이야말로 좌조선인 우조선인을 물론하고 요망 불이(不已)하는 바다.
 
  28년간을 고국에 돌아오지도 못하고 해외에 유전(流轉)하다 이번에야 귀국한 우리의 임시정부는 이 천여(天與·하늘이 내려준다는 의미―편집자註)의 간기(奸機)를 교묘히 재촉(催促)하였다. 삼국의 대립되었던 세력이 합일을 위해서는 공동의 적을 붙들어서 공동전선을 펴는 것을 최상책으로 삼는다. ‘임정(臨政)’은 조선인 된 자로서는 거력항거(擧力抗拒)해야 할 ‘탁치’를 당면의 적으로 국내 전선을 통일하려 움직였다.
 
  아직껏 아집을 세우던 국내의 모든 정당 단체는 이 임정의 산하로 모여들었다. 탄탄의 단체 혹은 세력 등은 탁치라는 마물(魔物) 앞에 개개로서는 너무도 무력하므로 하다못해 국내세력의 단합으로서나 이 마물에 대항해 보려고 (하였다.―편집자註) 이리하여 좌우, 혹은 남북, 혹은 유무 등으로 각각 대립되었던 삼천리의 삼천만은 급속도로 한 덩어리가 되어갔다. 거진 다 합일이 된 데에 홀연히 또 한 개의 아집이 이 통일을 교란하려 들었다. 이 교란자는 외국인이든가, 조선의 급속 완전독립을 교란하는 자이며 상식적으로 보아 조선인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 교란자는 조선인인 것을, 오인(吾人)은 울면서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출처=《大東新聞》 1946년 1월 13일)
 
 
  (2)
 
  우리는 우리 임시정부가 조선인에게 가지는 지위를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기미년(1919년) 민족자결주의가 세계의 약소민족에게 각성을 크게 외칠 때에 우리 조선도 그 외침에 대하여 조선에서의 자주의 종주권을 주장하며 조선의 자주독립을 세계에 향하여 부르짖었다. 그러나 실상 일포(一砲), 일무(一無), 일병(一兵)으로는 조선은 자력으로 독립을 세우고 부를 수가 없었다. 일본의 군국 무단정치하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 일본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중국 상해 외국 조계에 대한망명임시정부를 건설하였다. 이래 이십팔 년 그 주재자는 몇 번 이동되고 일본 무력의 상해 침입으로 정부의 소재지까지 쫓겨나왔으나 대한임시정부는 중국정부 기타 외국정부와 밀접한 연락을 취하여 오늘까지 이르렀고 오늘의 주석은 김구 대인(金九 大人)이다.
 
  자신의 이름 성명까지도 잊기 쉬울 만치 분요총망(어수선하고 소란스럽다는 뜻―편집자註)한 현세에서 ‘한국’이라는 국가명이 열강의 기억에 그냥 그대로 남아 있어서 ‘카이로 선언’ ‘포츠담 회담’ 등에 조선 운운이 논란이 되고 그 독립까지 약속된 것은 미영인(美英人)의 강기(强記)의 덕택이 아니고 해외망명 조선인의 꾸준한 활동의 힘이다. 그렇지 않으면 본시부터 미영인에게 인상 깊이 기억되어 있지 못하던 한국이요, 더욱이 일본에게 삼키운 뒤에는 ‘조선’이라 변명한 우리라, 열강의 기억에 ‘한국’이라는 이름이 역사문헌을 상고하기 전에는 남아 있지도 않을 것이다.
 
  더욱이 이번 지나전쟁(支那·중일전쟁―편집자註)이며 태평양전쟁에 있어서는 한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일본에 선전까지 하여 한 번 더 그들의 기억을 새롭게 한 바이다. 좀 건망증인 사람은 그 자신조차 잊었을 ‘조선 독립’이 홀연히 우리 앞에 뛰쳐나온 8·15 경사의 이면에 한국정부의 지대한 공적을 결코 몰각해서는 안 된다.
 
  그 한국 임시정부가 우리 3천만에게 어떤 요구를 하는 것이 있을 때에는 우리는 당연한 의무로서 복종할 의무가 있다. 더욱이 민족전선 통일을 위하여 탁치 반대 운동을 일으킬 때에 여기 불응하거나 반대하는 자는 우리 3천만 민족의 공동의 적이요, 민족투쟁 선상에서 매장해야 할 분자다.(출처=《大東新聞》 1946년 1월 14일)
 
 
  (3)
 
  임정으로서 만약 좀 부족한 점이 보이면 우리는 마땅히 그 부족을 취할 의무가 있다. 임정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하여 고루한 점이 보이거든 청신한 분자가 식(殖)할 것이요, 나약한 점이 있거든 강력한 분자가 보(補)할 것이요, 이리하여서 강하고 새롭고 굳센 기관을 만들어서 추대하는 것이 조선인 된 자의 도리요, 조선민 된 자의 의리이다.
 
  근일 인민공화국(정식명칭은 ‘조선인민공화국’. 8·15 해방 직후 여운형을 중심으로 발족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국내의 좌익 세력이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미군의 서울 주둔 전에 선포한 나라 이름이다―편집자註)에서 임정에 대하여 동시 해체재건(同時 解體再建)을 제의했다가 거부당하고 ‘독선적이요 독재적 운운’하여 공격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일제 기관인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가 그것이 부화하여 된 인민공화국은 그 연조로 보든지, 관록으로 보든지, 역사로 보든지, 공적으로 보든지, 국민적 신망으로 보든지, 대등(對等)이 되지를 못한다. 자체가 해체되어 임정에게 포옹을 청하여야 할 것이다.
 
  여(余) 개인의 정의(情誼)로 말하자면, 임정에는 친근인은커녕 일인(一人)의 지인(知人)도 없는 대신에 인공(人共·조선인민공화국―편집자註)은 대부분이 우인(友人) 혹 친한 우의 관계로 있다. 개인의 경우로는 물론 인공에 가변할지나 도리가 그렇지 못함을 어찌하랴.
 
  더욱이 최근 인공은 삼상회의(三相會議)를 절대 지지한다는 뜻을 표시하고 저쪽에 그 의를 전화까지 했다니 이 기괴망측한 일을 어떻게 해석할까.
 
  열강이 조선에 탁치를 억지로 뒤집어씌우면 우리는 무적(武的) 실력(實力)이 없으니 부득이 쓸밖에는(당할 수밖에?―편집자註) 없을지나, 이를 ‘진보적 민주주의 운운’하며 절대 지지한다는 것은 무슨 망발이뇨. ‘즉시 독립’이 3천만의 절대 갈망임을 인공은 모르느뇨. 더욱이 ‘3천만 조선 인민은 삼상결의를 절대 지지한다’고 민족을 팔아서 3천만에게 아첨한 그 죄악은 무엇으로 사하려느뇨. 조공(朝共·1925년 4월 서울에서 처음 결성됐다가 1928년 12월 해체됐다 8·15 광복 이후 재건됐다. 그러다 1946년 11월 23일 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과 합당해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했다―편집자註) 기타 수개의 아직 철없는 단체를 제한 3천만 전 민족이 즉시 독립, 탁치 반대를 절규하는 아우성을 그대들은 듣지 못하느뇨. 어쩌다가 감히 ‘삼상결의 절대지지, 탁치 역(亦·또한―편집자註) 무방(無妨)’의 망언이 조선인인 그대들에게서 나오느뇨.(출처=《大東新聞》 1946년 1월 15일)
 
 
  (4)
 
  그대들을 맹종하던 일부인도 그대들의 이 망발에 노하리라. 그대들의 자제는 말대(末代)까지 자기네들의 부형(父兄)을 부끄러워하리라. 그대들의 이름에는 ‘탁치유인자(託治誘人者) 배족한(背族漢)’의 커다란 탑문(搭文)이 찍히리라.
 
  더욱이 그대들은 당면의 적(敵)인 임정을 욕하기 위하여 ‘이번의 탁치는 옛날의 위임통치와 달라 미개한 조선에 민주주의를 가르치기 위한 연합국 호의의 선물(膳物)인 것을 한국 임시정부가 대업을 호의로 기만악덕하여 조선과 연합국과의 이간을 꾀하는 흉계’라 역선전하며 선량한 3천만 조선인과 그들의 혈(血), 투사(鬪死), 투삼십년(鬪三十年)의 지도자와의 사이를 이간붙이려 하니 묻노라. 그대들은 과연 조선인이뇨, 조선인이거든 부끄럽다 하지 말고 3천만 전에 그대들의 과오를 깨끗이 청(請)하는 데 인색치 말라.
 
  우리 선량한 조선 국민은 임정의 과거 공적인 그 역사적 광휘(光輝)를 존경하여 우리 통일 한민(韓民)의 유일무이한 정부로 인정하기에 별다른 이의가 없다. 그러나 또한 후계정부로서 그대들이 예약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대들이 적당(敵黨)을 봉쇄하기 위하여 민족분열의 대죄(大罪)를 범하면 그대들의 정치행동이 장래에 대하여 완전히 거부될 것을 여기 선언하기 주저치 않는다.
 
  그대들이 만약 조선인의 자손이거든 재래의 태도를 청산하고 애국의 오직 한 길을 재출발하기를 갈망하는 바이다. 마지막으로 조공에 대하여 한두 마디 하겠다. 인공에게 대하여 할 말은 조공에도 역시 매 한가지일 것이다. 이승만 박사에 관한 조공의 태도를 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창건 이래 독재로 생명을 삼는 공산당의 일분자인 조공에서 이 박사에게 ‘파시스트’라 일컫는 것도 우습거니와 어떻게 보면 이 박사가 친일파 혹은 민족 반역자일까.(출처=《大東新聞》 1946년 1월 17일)
 
 
  (5)
 
  조공(朝共)이 이번 인공(人共)과 어울려서 임정에 대한 태도가 벌써 임정과 조선인과의 이간행위이니, 이것이 민족 정도자(正道者)인가 아닌가가 다 자답(自答)이 될 것이고, 중공(中共)이 중국 통일의 최대 방해자인 점도 차치하고, 20 미만의 소년 때부터 70의 오늘까지 무슨 다른 일에 착수(着手) 착념(着念)해 본 일이 없이 오직 조선독립 일로(一路)를 위하여 건투(健鬪)해 온 ‘이노’(李老·이승만 박사를 의미―편집자註)를 ‘민족 배역자’라 부를 입이 열려진 것은 20세기의 대기적(大奇蹟)일 따름이다.
 
  주체가 없는 모든 소단체가 친공을 본받아서 이노에게 노(老)파시스트, 배족한(背族漢) 운운하니 이는 희극(喜劇)일 따름이다.
 
  조공에서는 누차 ‘일제와 사투하여 많은 피를 흘렸노라’고 자랑하나, 과문의 것이지 조선 독립을 위하여 일점(一點) 혈의 희생을 들은 일이 없고 도리어 공산주의를 위하여 조선민족주의와 사투한 수개의 삽화들이 있을 뿐이다.
 
  조선의 독립이 허여(許與)되려는 오늘날 과거의 당혈(黨血)을 국가독립혈로 전가시켜 공적을 사매(詐賣)하려는 비열은 거당(巨黨)답지 못한 치사한 짓이다. ‘중(衆)’은 ‘우(愚)’다. 수백만의 ‘중’을 포기한 당이니 이 ‘우’ 점(點)을 착용하여 국가를 해치는 일을 말고 이 대중의 세력을 건국에 써주기를 바란다.
 
  근일 전하는 바 ‘조공은 삼상회의에 조선 신탁 관리를 자청했다’ 운운의 말은 우리는 믿지 않겠다. 왜? 우리는 조선인 중에 이러한 금수가 있으리라고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혈 조국의 번성보다도 당 융성을 더욱 중대시하는 공산당의 당시(黨是)를 당분간 옆에 떠나서 하다못해 요 한동안만이라도 조선인으로 첩경하여 3천만의 우리 민족 광복에 일당이 되어주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이다.
 
  3천만아!
 
  우리 모두 힘을 같이하여 우리의 조국을 찾아내자꾸나. 왜 군소리를 까며 아집(我執)과 아존(我尊)을 부리느냐. 제각기 저 잘났다는 생각을 버리고 한 지도자의 산하에 모여 그를 협조(協助)하여서 그것은 마치 중국의 호한민(胡漢民), 왕조명(汪兆銘) 등 쟁쟁한 투사들이 고루(固陋)한 손중선(孫中仙·쑨원을 의미―편집자註)을 절대 협조하여 중국혁명을 달성한 것과 같이 우리의 광휘(光輝) 있는 조국을 찾아내자꾸나.
 
  참담하고 창피한 이 관사를 우리의 머리에서 벗어버리자꾸나. 나의 삼천만아!(출처=《大東新聞》 1946년 1월 24일)
 
 
  <빈 땅>
 
  (1)
 
   식목 이야기가 나고 격식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 매우 딱하고 불쾌한 일을 나는 현재 겪는 중이다.
 
  내 사는 근처(하 왕십리)는 현재 모두가 밭이다. 그러나 본시는 그것이 다 도로였던 것을 일본인이 전쟁을 하느라고 식량이 궁핍하여 ‘넓은 길은 약간 갈아먹어도 괜찮다’고 도로 일부의 개간을 용인한 데서 비롯, 왜정시대 넓은 도로는 약간씩 연고자가 갈아먹었던 것이다.
 
  그것이 해방이 되고 보니 원칙상 도회에는 도로를 더욱 넓혀야 할 것이고, 일본이 전쟁하느라고 임시거처로 용인하여 갈아먹던 ‘일시 경작지’는 도로로 복원을 시켜야 할 것이거늘 사람의 욕심이 그렇지 못하여, 아직 초창기의 경찰이 그런 일까지 간섭할 줄 모르는 것을 다행으로, 왜정시대 넓이 석 자(尺)를 갈아먹던 사람은 다섯 자로 넓히고, 갑(甲)이 다섯 자를 갈아먹는데 을(乙)이 그 앞으로 지나가다가 그 길(道)이 그래도 넓어 보이면 두석 자쯤을 더 갈아먹고, 병(丙)이 보기에 그래도 역시 길이 넓어 보이면 또 몇 자가량을 갈아먹고….
 
  이리하여 그 근처 일대가 모두 가늘고 긴 마치 대님 같은 밭이 ‘갑을병정’하여 평행적으로 전개되어 있다. 이것은 물론 교통경찰과 관련되려니와 (24칸 통의 넓은 도로가 모두 간신히 사람 통행이 할 수 있으리만치 좁게 되었다) 그 밭들에 뿌리는 퇴비 때문에 위생상에도 거대한 영향이 있다.
 
  격식상 경찰도 있기는 있지만 경찰이란 단지 사법경찰만인 줄 아는지 당국자는 연해 경찰을 신뢰하라 외치지만 교통경찰, 위생경찰에 대해서는 꿈도 안 꾸고 있는 모양이다.
 
  왜정의 고약한 중독으로 조선 사람의 ‘공덕심(公德心)’이라는 것은 전혀 불감증이다. 어떤 사람이 우리 집 앞길을 갈기에 “도루 길로 복원을 합시다”고 주의를 시켰더니 도리어, “자기가 안 갈아먹는다고 남도 못 갈아먹게 하는 건 무슨 심술이냐?”고 해보자고 한다.
 
  현재 서울 시내 길거리에 나서보면 제일 눈에 많이 뜨이는 것이 전차 승무원과 순경이다. 그 많은 순사를 모두 사람 체포하는 일에만 종사시킬 것이 아니라 교통, 위생, 풍속 등에도(결코 순경 수효는 부족지 않다) 손을 넓혀야 할 것이다. 손이 부족하다는 것은 말이 아니다. 경찰 수뇌자들의 머리가 그런 방면까지 생각지 못하는, 즉 머리의 부족이다.
 
  이리하여 우리 집 근처만 해도 본시의 경계선(길과 밭과의)이 어디쯤인지 이제는 찾아내기도 힘들게 되었으니, 이대로 1~2년만 더 가면 길을 갈아먹던 사람이며 혹은 자기네 집 울을 몇 자 내어 쳤던 사람들은 장차 그것이 자기네의 땅이라고 고집하지 않을지도, 보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경찰에만 책임을 지울 것이 아니라 시(市) 당국자 또한 큰 책임이 있을 것이니, 시 당국으로서 본시의 길은 모두 회수하여 거기다가 가로수나 심어서 도시 미화의 위생을 아우른 시설을 하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도 ‘동회 폐지’니 무엇이니 긴하지도 않고 신통치도 않은(그들에게는 무슨 긴하고 급한 사정이 있기에 그러는 것이겠지만) 문제만 가지고 으르렁거리니 모두가 딱한 일이다.
 
  식목일, 식목일 하면서도 한 그루의 가로수를 새로 심는 것을 보지 못했고 풍치수(風致樹)나 실익수(果木) 등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한 개의 시설도 보지를 못하여, 우리 집 빈터는 정체 모를 나무를 겨우 몇 그루 꽂아놓았고 우리 근처의 길은 비료와 오줌똥으로 젖었으니 이래 가지고야 당국을 믿으라는 말이 어디서 나올 것인가.
 
  경찰도 대체 무슨 일이나 하는지 장충단 공원에 가보았더니 예전 일본인이 심었던 향나무며 고양목 등 풍치수의 묘목이 작년 봄까지는 그래도 꽤 남아 있더니 요즈막에는 한 그루도 없이 깨끗이 뽑혀 없어졌으니 격식상 식목일이라는 것을 만들어가지고 떠드느니 이미 심은 나무들의 보존과 육성에 더 용의할 것이고 도회지의 가로수에도 좀 더 용의할 것이다.(출처=《民衆日報》 1947년 4월 13일)
 
 
  (2)
 
  집에 뜰이 한 백여 평 된다.
 
  그런데 본시 살던 사람이 한 그루의 나무도 심지 않아서 백여 평이 그냥 빈터다.
 
  본시 수목이 울창하던 집에서 지난겨울 이 집으로 이사 오고 보니 백여 평의 빈터가 여간해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서 봄만 되면 무슨 나무를 심으리라, 복숭아, 포도 등 과목 몇 그루를 심고 그 과목이 자랄 동안은 임시로 그해 그해의 푸성귀, 채소 등을 심으리라, 이렇듯 잔뜩 봄 되기만 기다렸다.
 
  묘목은? 어떻게든 봄만 되면 도리가 생기겠지, 산야가 모두 거칠었으니 군정청에서 배급을 주거나 알선을 하거나 해주겠지, 이러한 배짱으로 어서 봄만을 기다렸다.
 
  기다리던 봄이 되어 군정청에서는 미국서 조선 땅에 맞을 복숭아 묘목을 수입한다는 발표가 있고 뒤따라 며칠부터 며칠 동안을 ‘식목일’로 하여 전국적으로 식목을 장려한다 운운의 발표가 있었다.
 
  그 소위 식목일이 내일 모레로 박두하여도 또는 식목일이 이르러도 묘목을 손쉽게 구할 길은 보이지 않았다.
 
  이 땅에 만약 식목이 필요하다 하면 위정 당국은 마땅히 식목을 장려할 것이요, 동시에 또한 식목할 묘목을 손쉽게 입수할 길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도회지의 사람에게 아무 알선이나 준비도 없이 식목하라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에 지나지 못한다.
 
  여기서 또한 다시금 느꼈다. 당국의 소위 방침은 결국 격식을 찾는 행위에 지나지 못함을.
 
  일전에 어떤 기관에서 무슨 그다지 대수롭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소위 ‘징벌위원회’를 만들어 징벌하는 것을 본 어떤 풍자가가 가로되, “이런 기관을 만든 이상은 격식상 징벌도 한 번 해보고 그러기 위해서 징벌위원회도 만들어보고 싶던 차에 불행히 그 의원이 걸려들은 게다. 즉 의원 모씨는 ‘격식’의 희생자다”고 갈파한 일이 있거니와 군정 당국자는 격식상 ‘식목일’이라는 것을 만들어놓고도 그에 대한 아무런 준비며 용어가 없었다.
 
  식목일이라는 것을 제정한 이상 국민 혹은 시민이 그날에 손쉽게 나무를 수입하여 심을 수 있도록 정회를 통하여 배급하든가, 혹은 손쉽게 수입할 수 있는 기관을 사면에 배치하든가 해야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심어라, 심어라’ 하기만 하면 도회지에 사는 사람은 무엇을 심으라는 말인지.
 
  행정 책임자는 1년 중의 적당한 날짜를 택하여 ‘식목일’로 하여야 한다는 격식에 따라 준행할 따름이다.
 
  우리의 정치책임자가 하는 노릇이 모두 이 모양이라, 그 아래서 살아가자니 여간 곤란하지 않다. 경찰도 있어야 하는 격식이 있다, 배급도 있어야 하는 격식이 있다. 무슨 주간(週間) 무슨 주간도 있어야 하는 격식이 있다. 이렇듯 격식을 찾기 때문에 있어야 할 것은 대개 있기는 있다. 그러나 격식상 있어야 할 것이니 있기는 있지만 그 ‘있는 것’의 뒷준비가 아무것도 없으니 딱하다.
 
  그 소위 식목주간에 마음에 있는 묘목 한 그루도 구하지 못하여 근교(近郊)에서 촌동(村童)이 지고 들어온 정체 모를 나무 몇 그루를 간신히 구하여 좌우간 꽂아는 놓았다. 그리고 나머지 빈 땅에는 푸성귀의 씨앗을 사다가 심었다.(출처=《民衆日報》 1947년 4월 20일)
 
 
  <이 충무공과 그 아들>
 
   이순신 장군이 얼마나 훌륭하신 어른인가는 우리 민족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어 누구나 다 잘 아는 터입니다마는 이순신 장군의 아들 ‘면’이라는 소년의 이야기는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듯합니다.
 
  이순신 장군에게는 아들 삼형제가 있었는데, 엄격한 아버지의 가르침과 지극한 사랑 속에서 자라난 세 아들 역시 아버지를 닮아 씩씩하고 바른 소년들이었습니다.
 
  그중에도 이순신 장군은 끝의 아들 ‘면’을 유독 귀여워하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벽파진(碧波津·지금의 진도 앞 좁은 바다) 싸움에서 일본의 대함대를 전멸시키고 위태로웠던 나라의 운명을 바로잡게 되자, 적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은 분함을 참지 못한 끝에 충청도 아산(牙山·이순신 장군의 고향)에서 살고 있는 장군의 가족을 사로잡아 오라고 그의 부하에게 명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이순신 장군의 마을을 향해 왜병들이 50여 명이나 말을 타고 몰려온다는 급보를 듣자 장군의 가족은 몸을 피할 준비를 하고 ‘면’에게도 어서 도망을 가자고 재촉하였습니다. 그러나 열일곱 살 난 ‘면’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아버지(순신)의 피를 받은 내가 나아가 한 놈이라도 더 적을 죽임이 마땅할진대 도망하다니 말이 되느냐. 아버지의 이름을 어찌 더럽힐 수 있으랴” 하며 가족의 만류도 완강히 거절하고 그 어린 몸에 어울리지도 않는 긴 칼을 차고 활을 메고 말에 올라 적병들이 온다는 동쪽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말을 달리기 5리쯤 하여, ‘면’은 과연 적병들과 마주쳤습니다. ‘면’은 말을 멈추고 활을 당겨 삽시간에 적병 세 명을 쏘아 죽였습니다. 너무도 의외의 봉변에 깜짝 놀란 왜병들은 ‘면’의 말을 포위하고 ‘면’을 향하여 조총 탄환을 퍼부었습니다. ‘면’은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물러남이 없이 활을 쏘아 대전하였으나 ‘면’의 말이 적병의 탄환에 맞아 거꾸러졌습니다. ‘면’은 그래도 굴하지 않고 말 위에 선 채 활을 쏘다가 화살이 다함에 활을 버리고 긴 칼을 빼어 빗겨 들었습니다. 그때 적병들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가 대체 누구냐?”
 
  ‘면’은 큰소리로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이면이다.”
 
  “그러면 네가 바로 이순신의 아들이냐?”
 
  “그렇다.”
 
  “오! 그래, 우리가 너의 집을 찾아온 길이다. 너의 가족은 어디 있느냐?”
 
  “잔소리 말아라. 내 살아 있는 한 너희 놈들은 한 발자국도 이 길을 더 못 가리라. 냉큼 나와 내 칼을 받아라.”
 
  ‘면’의 소리는 분노에 떨렸습니다.
 
  적병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우리는 너의 가족을 해치러 온 것이 아니라, 보호하라는 우리 대장의 명령을 받고 온 것이다. 네가 우리에게 항복을 하면 네 목숨을 살려줄 뿐 아니라 너의 가족도 우리가 데려다 편안히 살리겠지만, 끝끝내 항복하지 않고 덤비면, 너도 또 네 가족도 모두 죽일 테다.”
 
  이 말에 ‘면’은 한 번 크게 껄껄 웃고 나서,
 
  “이순신의 아들이 항복할 줄 아느냐? 이순신의 가족이 너희 놈들의 칼에 죽을지언정 항복할 줄 아느냐? 잔말 말고 썩 나와 내 칼을 받아라.”
 
  하고 호령하였습니다.
 
  그러자 적병의 장수인 듯한 자가 말에서 내려서며, “그럼, 나와 단둘이서 칼싸움을 한번 해보자. 너는 갑옷과 투구가 없으니 나도 갑옷과 투구를 벗으마”하고는 칼을 땅위에 꽂아 놓고 투구와 갑옷을 벗었습니다. ‘면’은 장수가 갑옷과 투구를 다 벗을 때까지 그대로 서서 기다렸습니다. 적의 장수는 나이 40이 넘어 보이는 얼굴에 여덟 팔 자 수염이 뻗치고 두 눈이 사발처럼 크게 번득이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칼을 마주 대고 섰습니다. 적장은 ‘면’을 어리게 보고 한칼에 ‘면’의 머리를 두 쪽으로 뽀개(쪼개―편집자註) 버릴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장의 칼이 ‘면’의 정면을 향해 내리칠 때 어느 듯 ‘면’의 칼끝이 적장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적장은 그다지 중상은 아니었으나 속으로 ‘면’의 칼 솜씨가 비범한 것을 깨닫자 기색이 달라졌습니다. 칼과 칼이 맞부딪칠 때마다 무지개가 이는 듯하였습니다.
 
  ‘면’은 처음에는 수세를 취하여 적장의 맹렬한 공세를 교묘히 막아냈습니다. ‘면’이 수세를 취한 것은 적의 실력이 얼마인가를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적장은 여러 부하 졸병의 면전에서 일개 나이 어린 소년의 칼과 대전하여 오래 끈다는 것이 창피한 생각도 들고 또 ‘면’을 처음 얕잡아보았던 것이 웬걸 상당한 강적임을 알고 나니 괘씸한 생각이 부쩍 치밀어올라, “요, 고얀 놈을 한칼에 베어버려야만…”하고 씩씩거리며 날뛰었습니다.
 
  이러한 적장의 실력과 야심을 곧 알아차린 ‘면’은 이번에는 수세를 버리고 공세로 옮겼습니다.
 
  ‘면’의 칼은 더욱 맹렬히 적장의 가슴을 향해 번득였습니다. 적장은 아까의 창피하다는 생각도 괘씸한 분노도 사라지고 이번에는 은근히 겁이 들기 시작하였으며 그럴수록 마음이 조급하여졌습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한참 공세로 나오던 ‘면’이 기진맥진한 듯 팔의 힘이 없어지며 칼이 금시에라도 땅에 떨어질 것처럼 비틀거렸습니다. 이것을 본 적장은 바로 이때라는 듯 칼을 높이 들고 ‘면’의 머리를 향해 정면으로 내리쳤습니다.
 
  앗! 그러나 ‘면’의 팔에 맥이 풀린 듯 보인 것은 ‘면’이 일부러 꾸민 작전술이었던 것입니다. 적장의 칼날이 번개처럼 내려오자 ‘면’은 선뜻 몸을 비키는 찰라 “으악!” 적장의 왼편 가슴에는 ‘면’의 칼끝이 깊이 찔리고야 말았습니다. ‘면’의 칼날에 적장의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적장은 칼을 떨어뜨리며 그 자리에 푹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승부는 끝났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주위를 포위했던 적병이 ‘면’에게로 달려들어 ‘면’의 칼 든 팔을 쳤습니다. ‘면’의 오른팔과 함께 칼이 땅에 떨어지자 ‘면’의 왼팔이 다시 그 칼을 잡아 들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적의 칼은 ‘면’의 왼팔마저 내리쳤습니다. 그리고 ‘면’의 머리도 떨어졌습니다. 그제야 쓰러졌던 적장은 겨우 눈을 뜨고 병사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놈을 죽이진 말아라.”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벌써 죽였습니다.”
 
  적장은 그 말에 놀란 듯 “아까운 놈이었다”하고 다시 숨을 몰아쉬며 “조선의 소년들은 참으로 씩씩하구나. 순신만 훌륭한 것이 아니라 그 아들도 훌륭하다. 너희는 순신의 집을 습격하지 말고 그대로 돌아가거라”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이리하여 이순신 장군의 사랑하는 아들 ‘면’은 17세를 일기로 아버지의 아들다웁게 이 나라 소년의 기백과 명예를 끝까지 지켜 싸우다 죽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아들 ‘면’의 전사를 알게 된 것은 그 후 사흘만이요, 장군은 꿈속에서 ‘면’의 전사를 예감했습니다. 장군이 얼마나 아들을 아끼고 사랑하였던가는 그 꿈을 깨고 걱정하던 심경이며 전사의 소식을 접하고 애통해 한 장군의 일기 속에서 우리는 넉넉히 읽을 수 있고 또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평생을 싸움터에서 보내기에 아들을 앞에 앉히고 애무해 줄 겨를조차 없었던 장군이 그 뒤를 맡기고 믿고 의지하려던 ‘면’을 잃은 가슴 아픔이 얼마나 컸던가를 우리는 다음의 일기 속에서 읽어봅시다.
 
  “(정유년 10월―편집자註) 14일. 신미(辛未) 맑다. 4경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실족하여 개천에 떨어졌으나 넘어지지는 아니 하였는데 꿈에 아들 ‘면’이 나를 붙들어 안으려는 모양 같았다. 깨어보니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저녁에 천안(天安)으로부터 사람이 와서 집의 편지를 전하였다. 떼어보기 전에 벌써 골육이 먼저 통하여 심기가 황난(惶難)하다. 겨우 겉봉을 떼어보니 ‘열(悅·둘째아들-편집자註)’의 편지인데 이면에 ‘통곡’이란 글자를 쓴 것을 보고 ‘면’이 죽은 것을 알고 낙담하여 실성 통곡통곡 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같이 어질지 아니 하신고,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떳떳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변이 어디 있을까. 천지가 캄캄하여지고 백일이 빛을 잃는고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두고 어디로 돌아간고. 영기(靈氣)가 뛰어났더니 하늘이 세상에 두시지 아니 하심인가. 내가 지은 죄가 네 몸에 미침이냐. 내가 이제 세상에 있은들 장차 누구에게 의지하랴. 통곡할 따름이로다. 한밤을 지나기가 4년과 같구나.”
 
  이순신 장군은 이 일기를 쓴 지 1년 후인 무술년(戊戌年) 11월 19일에 ‘면’을 죽인 적병을 죽이고 아들의 뒤를 따라 장렬한 전사를 하였습니다.(출처=《小學生》 65호. 1949년 3월호)⊙
 
계속 찾아야 하는 김동인의 肢體들

 
  《월간조선》은 지난 4월호부터 6월호까지 공연예술자료가 김종욱씨의 제보로 해방공간기(期) 김동인의 산문과 평론을 실었다. 지면 사정으로 ‘해방 1주년보’(출처=《가정신문》 1946년 8월 3~8일), ‘쌀 종이’(출처=1946년 9월 3~18일), ‘아동물 출판업자’(출처=《중앙신문》 1947년 5월 4일), ‘우리의 말’(1948년 1월) 등은 싣지 못했다.
 
  또 일제시대 때 쓴 수필 중 전집(全集)에서 빠진 글로는 ‘꽃은 모두 좋다’(《신동아》 1932년 4월호), ‘죽음과 소아(小兒)’(《매일신보》 1935년 11월 5일), ‘전차 상의 여인’(《여성》 1939년 6월호) 등이 있다.
 
  이들 작품은 평화출판사와 삼중당, 《조선일보》 등이 펴낸 세 종류의 전집에서 모두 빠졌으나, 일부는 한국 근현대문학 연구자들이 존재를 확인한 경우도 있다.
 
  해방공간에서 우후죽순 생겨난 신문과 잡지의 홍수 속에서 김동인 선생의 글이 얼마나 더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또 동인 선생이 한때 만주에 기거하며 《만선일보(滿鮮日報)》에 쓴 대하 장편역사소설 ‘서총대’(연산군 시대 역사물)를 연재했다는 사실은 확인됐으나 신문의 존재가 사라진 상태다.
 
  해방공간 김동인은 치열하게 글을 썼다. 번뜩이는 비판 정신으로 사회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원고지를 아껴야 할 정도로 궁핍했으며 글을 쓸 때 파지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후대인들은 그의 친일행적에 주목하지만, 전 생애를 통해 일부분에 불과하다. 극심한 혼란기 해방공간에서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회현실에 참여했다.

입력 : 2014.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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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 ‘Stand Up Dad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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