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NEWSROOM
  1. 배진영 ‘어제 오늘 내일’

'진실이 침묵할 때' - 미야베 미유키의 미스테리 <외딴집>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하기
  • 스크랩
  
일본의 시코쿠의 시골 마을 마루미번에 악령이 나타난다. 악령의 이름은 가가. 에도에 있는 막부에서 재정부교, 즉 재무부 장관을 했던 거물 관료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아내와 자식, 부하들을 베어 죽이는 참극을 저지른다. 
쇼군은 가가를 마루미 번으로 유배를 보낸다. 쇼군은 악령이니 뭐니 하는 존재 앞에 약한 사람. 악귀 같은 짓을 저지른 가가를 처형했다가 그 악령이 자기에게 붙을까봐 겁을 낸다. 여기에는 또다른 꿍꿍이가 있다. 마루미번은 근래 조개를 이용한 염색업을 진흥시켜 재정이 넉넉해졌다. 재정난을 겪고 있는 막부는 마루미 번이 무슨 실수만 하면 이를 빌미로 삼아 번을 폐하고 막부 직할로 편입시킬 궁리를 하고 있다. 막부의 고관을 지낸 가가는 마루미 번을 그런 점에서 아주 써먹기 좋은 카드다. 유배를 온 그를 전직 고관이라고 예우를 하건, 아니면 죄인이라고 소홀히 다루건, 막부는 그걸 빌미로 얼마든지 마루미 번을 궁리로 몰 수 있기 때문이다. 

마루미 번도 그걸 모르지 않는다. 가가의 유배지로 정해진 순간부터 마루미 번은 ‘계엄’과 같은 삼엄한 상태로 들어간다. ‘어떤 불미스러운 일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런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마루미 번은 끝장이다’하는 인식이 확산된다. 물론 사람 사는 동네이니 크고 작은 불미스러운 사건이 안 일어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없었던 일’로 덮어져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상급 사무라이 가문의 딸 가지와라 미네가 연적(戀敵)인 이노우에 고토에를 독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노우에 집안은 마루미 번의 대표적인 사지(의사) 집안 중 하나. 영주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분으로 무사로 대우를 받는다. 사인(死因)도 알 수 있고, 정황증거를 가진 목격자도 있지만, 이노우에 집안은 고토에의 죽음을 자연사(自然死)라고 공표한다. 가지와라 가문은 유배를 온 가가를 감시할 옥지기 일을 맡을 수 있는 가문이기 때문에, 그런 가문의 여식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했다가는 막부에 무슨 꼬투리를 잡힐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침묵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선 이노우에 집안에서 하녀일을 하는 소녀 호(呆). ‘호‘는 ’바보’라는 뜻이다. 에도에서 흘러들어온 기구한 고아 소녀인 호는 가지와라 미네가 이노우에 집안을 찾아가는 것을 본 목격자다. 하지만 그의 증언은 ‘바보 같은 어린 아이가 환상을 본 것’으로 치부된다. 자기가 알고 있는 진실과 주위 사람들이 강요하는 진실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하던 호는 히키테(방범대원) 견습인 우사에게 맡겨진다.
여자의 몸으로 히키테가 되려고 분투하는 우사는 호가 말하는 진실을 믿는다. 하지만 파수막의 대장인 가스케도, 관리인 와타베도, 진실을 외면하고 ‘가짜 진실’을 강요한다. 
진실을 말한 사람이 있기는 하다. 이노우에 가문의 후계자로 죽은 고토에의 오빠이자 우사의 멘토인 이노우에 게이치로는 우사에게 진실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그것은 마루미 번을 위해 진실에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믿으면 거짓도 진실이 되지. 거짓인 줄 알면서도 거짓을 계속 믿는 척하는 것은 괴롭지만, 정말로 믿어 버리면 훨씬 편하다.”게이치로도 쉽게 그런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은 아니었다. 온화한 인품이지만 번의 정치와 음모에 깊숙이 발을 들여 놓은 아버지 겐슈는 게이치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철저하게 감춘다는 것은 철저하게 거짓말을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 전혀 없었던 일인 양 행동해야 한다. 거짓은 거짓, 진실은 진실로 나누어, 상대를 보아 가며 진실을 이야기하는 어중간한 짓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한 사람의 귀에 진실이 들어가면 언젠가는 열 명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열 명의 입에서 돌고 돌아 막부 밀정의 귀에 들어가게 될지 모른다. 그러면 감추는 의미가 없다.”

드디어 가가가 마루미에 도착한다. 가가는 마루미의 오래된 사무라이 가문인 이사노 집안의 저주가 얽혀 있는 마른폭포집에 유폐된다. 크고 작은 사건들이 터지는 가운데 호는 가가의 집 하녀로 들어간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가가와 대면하게 된 호는 이후 모든 사람들이 ‘악령’이라고 기피하는 가가와 묘한 우정을 쌓아가기 시작한다. 매일 가가를 감시하는 무사의 손에 이끌려 가가에게 문안인사를 하고, 가가로부터 습자와 산수를 배우게 된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마루미 번을 속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사고가 나도, 병이 나도, 벼락이 쳐도 그것은 모두 가가라는 악령의 탓으로 돌린다. 여기에 마루미 번을 움직이는 사무라이 집안들간의 알력, 막부와 손을 잡고 지금의 영주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세력의 음모가 끼어들면서 일은 더욱 꼬인다. 

일본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미야베 미유키의 미스테리 소설 <외딴집>의 이야기다. 여기서 이리저리 얽히고 꼬인 이 이야기의 가닥을 잡으면서, 수많은 등장인물들-대부분은 비명에 가는-의 운명을 되돌아볼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라거나, 곱씹어 볼 가치가 없는 책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한번 손에 잡으면 놓기 어려울 정도로 재미있는 책이고, 읽고 난 후에도 묵직한 감동을 주는 책이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 이렇게 독후감을 쓰고 있는 것이겠지만.... 
사실 예스24 중고매장에서 이 책을 골라잡은 것은 오래 전에 친한 친구가 일독을 권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추리소설, 미스테리소설은 잘 안 읽지만, 골치 아픈 세상에 이런 책을 읽으면서 머리 좀 식혀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늘 하던 것과는 달리 밑줄도 안 치면서 그냥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이건 단순한 미스테리소설이 아니라 진실에 눈 감으라고 강요한 집단의 폭력과 광기(狂氣)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가슴이 먹먹해 지기 시작했다.

유감스럽게도 이 책에는 진실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워서 결국은 파사현정(破邪顯正)하는 영웅은 없다. 여자 히키테 우사는 파수막에서 쫓겨나 다 망한 절집 일을 돕다가 벼락이 치던 날, 사람을 구하려다가 목숨을 잃는다. 서쪽 파수막의 히키테 대장인 가스케는 마른폭포집에 담력시험을 하러 갔다가 죽은 자식들의 잘못을 짊어지고 죽는다. 그의 죽음은 호열자(콜레라)로 인한 것으로 은폐된다. 죽은 고토에를 연모했던 도신(경찰관) 와타베는 진실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가와지마 미네를 죽이고 자신도 죽음을 맞는다. 
맑고 순수한 호는 그와 묘한 우정을 쌓았던 가가의 배려로 살아남아 이노우에 집안으로 돌아온다. 작가는 마지막 장에서 우사의 무덤을 찾는 호의 모습을 통해 애써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그 뒤에는 너무 많은 죽음이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이 더 가슴에 와 닿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동화가 아니라는 걸 이 소설은 이야기한다. 살기 위해 진실을 외면해야 하는 나약한 인간들의 이야기가 곳곳에서 나온다. 호를 내보낸 이노우에가를 보며 우사는 생각한다.
‘이노우에가도 번을 위해, 집안을 위해 굳이 고토에님의 원통한 죽음의 진상을 덮어두어야 한다. 거짓말을 하고 뚜껑을 덮어 두어야만 한다. 그 뚜껑을 누르고 있는 모습을 이 아이의 맑은 눈동자가 응시하는 것이 괴로운 것이다. 어쨌거나 이 눈동자는 진짜 일어난 일의 일부를 목격했으니까.’
‘너야말로, 정말로 진실을 보고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밝힐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다함께 네게 거짓말을 들려준 것이다. 네가 나쁜 존재에게 속았다고 들려주려면 이 세상에는 나쁜 존재가 있고 저주나 재앙을 가져온다고 주장해야 했다. 너는 거짓말의 근거인 거짓말을 짊어지고 또 짊어지고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다...’
우사가 몸담게 된 주엔지의 주지스님은 우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지간하게 똑똑한 것은 어리석은 것보다 불행한 일일세. 그것을 알고도 똑똑함을 선택할 각오가 없으면 지혜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편이 스스로를 위한 길이야.”
“세상을 고친다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닐세. 또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 시간과 사람과 천운이 갖추어져야 비로소 이룰 수 있네. 지금은 그때가 아니야.”

동생을 잃고도 침묵해야 하는 이노우에가의 게이치로도 불쌍한 존재다. 그는 원래 나가사키를 통해 들어온 난학(蘭學)서적과 의서 등을 보면서 서양식 이성(理性)에 눈을 뜬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성과 합리의 사고(思考)가 확산되면 비합리적인 봉건체제가 무너지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거라고 믿었다. 그랬던 그이기에 번과 가문의 안녕을 위해 진실 앞에 침묵해야 하는 현실은 괴롭다. 이성‧진실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아들에게 아버지 겐슈는 이렇게 말한다.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 지식의 말은 조만간 너를 해하게 될 것이다. 다치는 것이 너 자신이라면 그것도 교훈으로 살릴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지는 마라.”
‘게이치로의 지식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현재의 바람이 한번 불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릴 만큼 약했다.’그러면서도 그는 숱한 변고 속에서도 의사라는 자신의 책무를 다하려 애쓴다.

이 책 속에 나오는 수많은 인간군상들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아무 생각 없이 거짓선동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는, 그러다가 속에 쌓인 스트레스를 결국은 폭동과 유혈로 풀고 마는 마루미의 백성들의 모습은 어딘지 낯익다. 진실이 숨죽인 시대는 결국 그런 파국을 맞는다는 걸 보여주는 듯 하다. 가가가 오고 난 후 야기된 혼란과 공포분위기 속에서 정치적 이익을 챙기려 분주하게 음모를 꾸미는 마루미의 유력 자의 행태들 또한 현실에서 낯설지 않은 모습들이다. 서민들이 보기에는 대단한 ‘나으리’지만 봉건체제의 말단에서 생존을 위해 전전긍긍해야 하고, 일이 잘못되면 파리목숨이나 다름없는 여러 계층의 사무라이들도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이다 (아마 사무라이 계급 내의 이런 모순이 축적되어서 메이지유신으로 폭발한 것이리라). 진실을 알면서도 번의 이익을 위해 혹은 가문을 보존하기 위해 침묵해야 하는 게이치로는 나약한 지식인을 연상케 한다. 
소설 속에 묘사된 19세기 초 마루미 번의 모습은 21세기 대한민국과 별로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도 진실이 사라지고 거짓과 선동에 사로잡힌 우중(愚衆)들이 날뛰는 세상이라는 점에서...
그런 세상에서 우리, 아니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 덧붙임) 마루미 번은 가공의 번이다. ‘가가님’도 가공의 인물이다. 19세기 중엽 막부의 중신으로 일련의 개혁정치를 추진하다가 시코쿠의 마루구메(丸龜)번에 유배되었던 ‘요괴’라는 별명의 도리이 요조의 일을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마루구메는 사누키 우동 브랜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시코쿠로 여행이나 가고 싶다. 그게 아니면 ‘마루구메 제면’에 가서 우동이나 한 그릇 할까? 

   

  


입력 : 2017.07.26

조회 : 284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사진

배진영 ‘어제 오늘 내일’

ironheel@chosun.com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습니다. 2000년부터 〈월간조선〉기자로 일하면서 주로 한국현대사나 우리 사회의 이념갈등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써 왔습니다. 지난 70년 년 동안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내용을 어떻게 채워나가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2012년 조국과 자유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45권의 책을 소개하는 〈책으로 세상읽기〉를 펴냈습니다. 공저한 책으로 〈억지와 위선〉 〈이승만깨기; 이승만에 씌워진 7가지 누명〉 〈시간을 달리는 남자〉 등이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제가 읽은 책들을 소개하면서 세상과 역사에 대한 생각을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1711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정기구독

MAGAZINE 인기기사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