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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배진영 ‘간서치의 세상읽기’

배신이 난무하는 세상, 의리를 생각한다 <47인의 사무라이>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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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혹은 일본인에 대해 논하는 많은 책들에서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책이 있다. <주신구라(忠臣藏‧충신장)>가 바로 그 책이다. 한국과 일본의 문화를 비교해 말하는 사람들은 흔히 한국이 <춘향전>이 있다면 일본에는 <주신구라>가 있다고 말한다. <주신구라>는 일본 사무라이 문화가 무엇인지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때문에 이 책을 구해보려 애를 썼는데, 다행히 얼마 전 알라딘 헌책방에서 싼값에 책을 구할 수 있었다.
 
<주신구라>는 실제 있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1701년 벌어진 ‘아코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신년 하례를 위해 쇼군이 있는 에도로 천황의 칙사가 파견되었다. 아무리 상징적인 존재라고는 하지만 쇼군도 천황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 당연히 예의를 다해 칙사를 맞이했다. 이때 접대책임을 맡은 사람이 아코 영주인 아사노 다쿠미노카미 나가노리와 요시다번의 영주인 다테 사쿄노스케 무네하루였다. 그리고 의전에 밝은 기라 고스케노스케 요시나가가 이 두 사람의 지도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3월 14일 쇼군 저택의 복도에서 아사노가 돌연 기라에게 칼부림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라가 아사노를 모욕한 게 이유라고 한다. 기라가 아사노에게 뇌물을 요구했는데, 아사노가 불응했기 때문에 기라가 아사노를 모욕했다는 얘기도 있다.

하여튼 천황의 칙사를 접대해야 할 의전책임자가 오히려 쇼군의 저택에서 칼부림을 한 것은 큰 죄였다. 아사노는 할복하고 그의 가문은 폐족이 되었다. 아사노의 가신들은 낭인(浪人‧로닌)신세가 되었다.

이듬해 12월15일 새벽, 아사노의 가신이었던 오이시 구라노스케 요시타가 등 47명의 낭인들이 기라의 집을 습격, 기라를 죽였다. 1년 넘게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절치부심하다가 결국 주군(主君)의 원수를 갚은 이들의 행위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이들에 대한 처리를 두고 정치철학적 논란도 진행됐다. 주군을 위해 원수를 갚은 의리와 충절을 평가하느냐, 아니면 그보다는 공적인 법질서가 우선하느냐 하는 논란이었다. 후자의 주장을 편 사람이 유명한 유학자 오규 소라이였다. 결국 47명의 낭인들은 모두 할복을 명받고 배를 갈랐다. 법질서를 위반하고 사사로이 무리를 지어 중신을 살해한 죄는 묻되, 할복할 기회를 줌으로써 그들에게 무사로서의 명예를 지킬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대중이 열광했던 사건인 만큼, 사건 직후부터 이를 모티브로 한 소설, 인형극, 가부키 등이 쏟아져 나왔다. 20세기 이후에도 <주신구라> 소설이나 만화, 영화는 수없이 많이 나오고 있다 (2013년에 나온 영화 <47로닌> 도 <주신구라>의 헐리우드판이다. 전혀 추천하고 싶은 영화가 아니지만...)그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가나데흔 주신구라>다. 이 소설은 당대의 정치적 사건을 극화하지 못하게 하는 당시의 금령 때문에 배경을 14세기 초 가마쿠라 막부 시대 초기로 옮겨 놓는다 (그 바람에 가마쿠라 막부 시대를 배경으로 함에도 담배, 화승총 등이 등장하는 우스운 일이 벌어진다). 등장인물들의 이름도 가마쿠라 시대에 실존했던 비슷한 성격의 인물들로 대치된다. 하지만 전체의 줄거리는 아코사건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일본 사무라이 문화의 전범인 작품이다 보니 우리 정서와는 안 맞는 부분들도 있다. 특히 자기 딸과 연애를 하느라 임무를 소홀히 했다가 동료들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사위(하야노 간페이)에게 거사자금을 마련해 주기 위해 딸을 유곽에 파는 부모, 그리고 그걸 받아들이는 딸과 사위의 이야기 같은 건 영 받아들이기 어렵다. 책 전체에 걸쳐 죽음이 너무 자주 나오는 것도 불편하다. 꼭 그 대목에서 사람이 죽고 배를 갈라야 하나 싶은 대목이 하나 둘이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주신구라>는 울림이 있다. 최하급 무사 아시가루인 데라오카 헤이에몬의 말에는 47명의 아코낭인들의 정신이 그대로 녹아 있다.

“그렇습니다. 주군의 할복 소식을 홋고쿠에서 듣고, 이거 큰일 났다 싶어서 부리나케 돌아오는 도중에, 주군의 영지는 몰수당하고 사람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원통함, 비록 신분이 미천한 아시가루지만, 주군의 은혜는 여러분과 다를 바 없습니다.”

“쥐꼬리만한 녹을 받는 거나 1500석의 봉록을 받는 당신이나 주군의 덕분으로 살아가는 목숨이기는 매한가지. 은혜의 높고 낮음은 없는 것입니다.”

<주신구라>를 관통하는 정신은 오늘날에도 일본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비리사건 같은 게 발생했을 때 회사를 위해, 혹은 모시는 정치인을 위해 아랫사람이 목숨을 던지는 것이 그 예이다.
물론 그러한 것이 21세기 민주국가,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서 바람직한 자세인지는 의문이다. 봉건시대의 군신윤리와 민주공화국 시민의 덕성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아코 낭인들의 행위가 국가공동체 구성원의 행위로는 적절치 못했다는 지적은 이미 당시에도 있었다.
 
하지만 의리와 충절을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던진 사나이들의 이야기는 역시 상쾌하다. 그들의 이야기는 시류에 영합해, 눈앞의 이익 때문에 배신을 밥 먹듯 하는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 시원한 죽비소리 같다.

진흙탕 같은 세상,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책으로 읽어도 좋고, 일본/일본인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참고서로 생각하고 읽어도 좋은 책이다.
입력 : 2017.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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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 ‘간서치의 세상읽기’

ironheel@chosun.com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습니다. 2000년부터 <월간조선>기자로 일하면서 주로 한국현대사나 우리 사회의 이념갈등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써 왔습니다. 지난 70년 년 동안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내용을 어떻게 채워나가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2012년 조국과 자유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45권의 책을 소개하는 <책으로 세상읽기>를 펴냈습니다. 공저한 책으로 <억지와 위선> <이승만깨기; 이승만에 씌워진 7가지 누명> <시간을 달리는 남자> 등이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제가 읽은 책들을 소개하면서 세상과 역사에 대한 생각을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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