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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1. 경제

故 구자경 회장 생전 인터뷰 "LG반도체는 (현대에) 뺏긴 셈"

[월간조선 2003년 2월호] 직접 버섯 재배하고 메주 띄우며 여생 보냈던 구자경 회장의 삶과 경영철학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에 이어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14일 오전 향년 94세로 별세했다.

LG그룹에 따르면 구 명예회장은 이날 오전 10시쯤 숙환으로 별세했다고 한다. 구 명예회장은 LG그룹 창업주인 고 구인회 명예회장의 6남 4녀 중 장남으로 1925년에 태어났다. 1945년 진주사범학교 졸업 후 5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활동하다 1950년 LG그룹의 모태인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 이사로 취임하면서 그룹 경영에 참여했다.

1969년 말 부친이 타계하면서 이듬해 그룹 2대 회장에 올랐다. 경영수업 20년만이었다. 이후 25년간 LG그룹을 이끌면서 전자와 화학을 중심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2003년 2월호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버섯 재배와 메주 띄우는 자신의 삶에 대해 담담히 털어놓았다.
 
구 명예회장은 김대중 정권 당시 이른바 '빅딜'로 LG반도체 경영권을 현대그룹으로 넘긴 데 대해 "현대 하이닉스가 우리 반도체를 뺏어가려고 했을 무렵에는 LG반도체의 경영이 참 좋았다"고 말했다. 
 
그는 "하이닉스가 LG반도체를 인수하고 나서 일년 반 동안에 하이닉스 자체에서 반도체를 개발해 수출한 적이 한 건도 없다. 하이닉스는 순전히 우리 것을 수출했고, 그걸로 재미를 봤다"고 했다. 이어 "(LG반도체) 한 주(株)에 적어도 2만5000원은 받아야 되는 건데 2만1000원에 팔았으니까 뺏긴 셈"이라며 정권에 의해 강제로 빼앗겼음을 시인했다.
 
다음은 <월간조선>에 실린 그의 인터뷰 기사 전문이다.
  
 

 

[특별 인터뷰] 농부로 살아가는 具滋暻 LG그룹 명예회장

직접 버섯을 재배하고 메주를 띄우면서 사는 시골 생활의 멋과 맛

 
『우리 집안은 아들만 많이 낳아 가지고 다 관리하려면 골치가 아픕니다. 후계자 양성을 하지 않는 경영자는 빨리 내보냈어요. 경영혁신은 놀고 먹는 사람을 자르는 것입니다』

대담 趙 甲 濟 月刊朝鮮 편집장
정리 禹 鍾 昌 月刊朝鮮 차장

具 滋 暻
1925년 경남 진주 출생.
진주高, 진주사범학교 졸업.
1945~1950년 지수보통학교, 부산사범대학 부속 국민학교 교사
1950년 락희화학공업 이사
1959년 금성사 이사
1970~1995년 LG그룹 회장
1983년 한국산악회 회장
1987~1989년 全經聯 회장
 
 
청국장 냄새
  지난 12월 초순, 현관문을 밀자 구수한 청국장 냄새가 코를 찔렀다.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듯한 찌뿌드드한 날씨여서 불을 켜지 않은 실내는 오후 1시 반인데도 컴컴했다. 약칠을 하지 않은 세 켤레의 구두와 흙 묻은 운동화 두 켤레, 골프화가 신발장 안에 가지런히 놓여 있고, 신발장 위엔 원앙 깃털이 꽂힌 고동색 중절모와 회색 중절모가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주인인 具滋暻(구자경·78) LG그룹 명예회장은 연암축산원예대학 權寬(권관) 학장, 교무과장 등과 점심 식사중이었다. 8년 前인 1995년, 나이 일흔에 스스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具滋暻 명예회장은 20만 평 가량 되는 충남 성환의 연암축산원예대학 구내 사택에 기거하며, 버섯을 재배하고 메주를 띄우며 농부처럼 살아가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 일요일과 월요일엔 서울에 올라가 LG연암문화재단, LG복지재단 업무를 챙기고, 그 나머지 날은 시골에 내려와서 산다.
 
  은퇴 후 일체의 인터뷰를 고사하고 있는 具滋暻 명예회장을 만나기 위해 趙甲濟(조갑제) 편집장 등 月刊朝鮮 취재진은 사전 연락 없이 사택을 찾아갔다. 팽이버섯, 새송이버섯, 만가닥버섯 등을 재배하는 재미에 푹 빠져 산다는 具명예회장의 동정 기사가 朝鮮日報에 보도된 지 얼마 후였다.
 
  ―朝鮮日報에 보도된 회장님의 기사를 많은 사람이 읽고, 많은 분들 사이에 회장님의 삶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어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왔습니다.
 
  신문 기사 이야기를 꺼내자 具명예회장은 『그 기사 바람에 골치가 아프다』며 『내 주소만은 제발 밝히지 말아 달라』고 사정했다. 이유가 궁금했다.
 
  『내 거주지가 알려지니까 도와달라고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회사가 부도날 지경이라며 살려달라고 꿇어앉아 사정하는 사람도 있고요. 연락도 없이 그냥 옵니다』
 
  ―사택 입구에 들어서면서 보니까 지키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돈을 벌면 경비원이 필요하겠지만 돈을 못 버니까 경비원 쓸 형편이 안 돼요』
 
  ―버섯 재배해서 돈 많이 번 걸로 알려져 있는데요.
 
  『아직까지는 돈벌이가 안 되고, 금년부터 좀 되겠지요』
 
  이렇게 해서 예약도 없었던 인터뷰가 성사되었다. 具명예회장은 준비없이, 꾸밈없이 말을 이어갔다.
 
 
 
 『메주 만드느라 바쁩니다』
 
   ―蘭(난)도 많이 키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서양蘭은 대학에서 재배하고, 동양蘭은 내가 길렀어요. 내가 蘭을 시작할 무렵에는 희귀종 동양蘭은 값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한 촉에 100만원짜리도 있었고요. 누가 장관이 되거나 감투 하나를 썼다 하면 동양蘭을 선물했는데, 이 동양蘭 시장이 갑자기 쇠퇴해 버렸습니다. 동양蘭을 가진 사람도 적어지고, 소비가 안 되는 거예요. 입이 크고 무성한 蘭을 선호하지 특이하게 생기고 비싼 蘭은 선물을 안 해요. 비싼 蘭을 선물해 봤자 죽이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蘭을 해보니 도둑이 잦아요. 하룻밤 사이에 좋은 蘭들을 몽땅 도적맞고 나니 이것도 하는 게 아니구나 싶어서 완전히 포기했습니다. 요즘은 메주 만드는 철이어서 내가 좀 바쁩니다』
 
  집안 가득히 배어 있는 청국장 냄새는 具滋暻 명예회장이 손수 만든 메주가 재료였다. 메주는 사택에서 조금 떨어진 유리 온실에서 건조되고 있다. 유리 온실은 具명예회장이 꽃이 크고 탐스러운 새로운 種(종)의 장미 재배를 시작할 때 지었다.
 
  『장미 재배를 그만둔 후 유리 온실을 改造할 방법을 찾다 보니 이 근처에 메주 공장이 있어요. 메주는 볕에 말려서 건조를 잘 시켜야 하는데 유리 온실은 통풍도 잘 되고, 햇볕도 좋아 메주 말리는 장소로는 최곱니다. 이곳 된장을 먹어본 사람들이 맛이 좋다고 난리예요. 여기저기서 자꾸만 더 달라고 해서 금년에는 좀 넉넉하게 만들고 있어요. 된장을 담아서 나눠 주고, 남는 게 있으면 골프장 같은 곳에 팝니다.
 
  곤지암 골프장(LG그룹에서 경영)의 갈비 우거지 국이 예전엔 참 맛이 좋았습니다. 진주집이라고 그 근처에 비빔밥 집이 있는데 거기 女사장에게서 메주 띄우는 비법을 배워서 된장을 직접 담으라고 내가 지시했습니다. 맛 좋은 된장을 풀어 놓은 우거지 갈비탕이 그래서 인기가 있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安養 컨트리 클럽에서 부장 한 사람과 주방장이 연락도 없이 주방에 쳐들어 와서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하기에 비결은 된장에 있다고 가르쳐 주기도 했어요.
 
 
   메주 만드는 일은 참 귀찮습니다. 귀찮으니까 곤지암 골프장에서도 나중엔 직접 만들지 않고 종교단체에서 만든 메주를 사다가 된장을 담았더니 옛 맛이 안 나요. 내가 주방장한테 「멸치 국물에 마른 새우와 마른 조개를 넣고 은근한 불에 오래 끓여라」고 시켰어요. 우동 국물에는 味淋(미림:찹쌀 지에밥에 소주, 누룩을 섞어 빚은 술)을 써야 제 맛이 나는데 주방장이 그걸 몰라요. 味淋은 맛술인데 정종입니다. 정종을 넣으면 맛이 확 달라지거든요. 요즘 곤지암 골프장의 우동이나 오뎅은 맛이 참 좋아요』
 
  맛있는 음식 이야기, 농사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회장님은 농사를 직접 지은 적이 있습니까.
 
  『교사 시절, 고향에서 좀 지었지요. 높은 산에 과수원을 하나 만들었는데, 지게나 리어카도 없는 시절에 지게 질 사람도 없고 해서 나무만 심고 포기한 일이 있습니다. 교편 생활을 시작한 지 4개월 만에 광복이 되었어요. 광복이 되고 나서 농사를 지으려 하니까 우리가 땅 좀 갖고 있다고 해서 (건국준비위원회의)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도와주지를 않아요. 우리 형제들이 모두 나섰는데 농사 일이 참 힘이 듭디다. 모를 심고 나면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프고, 벼를 베면 벼 이삭이 눈을 찌르는데 도와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서 농사를 포기하고 부산으로 나갔죠』
 
 
 
 첫 직업은 보통학교 교사
 
  ―고향인 晉州 쪽은 옛날에 좌익들이 많았죠.
 
  『지리산 근처인 산청과 거창에 많았고 함양은 좀 덜 했습니다』
 
  ―좌우익 투쟁에는 휩쓸리지 않았습니까.
 
  『좌익과 머슴들이 우리가 부자라고 농사 짓는 데 협조를 안 해 줘요. 벼 베고, 보리 베는 일을 우리 형제들이 다 했어요』
 
  ―공산주의자는 절대 안 된다는 확신은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광복 후 직접 상대를 해보니 알겠어요. 공산주의 세상이 되면 평등 사회가 되고 아주 살기 좋은 사회가 될 거라고 했는데, 일 안 하고 어떻게 좋은 사회가 됩니까』
 
  具滋暻 명예회장은 1925년 경남 진양군 지수면 송내리에서 LG그룹 창업주인 蓮庵(연암) 具仁會(구인회) 회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진주高를 졸업하고 진주사범학교 강습과를 수료한 具명예회장은 나이 스무 살 때 고향의 지수보통학교에 교사로 부임했다.
 
  지수보통학교는 具명예회장의 부친 故 具仁會 회장과 三星그룹 창업주 故 李秉喆(이병철) 회장이 나온 학교다. 효성그룹 창업주 故 趙洪濟(조홍제) 회장은 그곳에서 20리쯤 떨어진 경남 함안의 군북보통학교를 나왔다. 한국 기업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이들 세 명은 1년에 한 번씩 遠足(원족:소풍)도 다니고, 축구도 같이 한 친구였다고 具명예회장은 기억했다.
 
  『지수面은 지리산 인근의 험한 산골입니다. 그 일대의 유일한 학교가 지수보통학교인데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나룻가에 있습니다. 宜寧(의령) 출신인 李秉喆 회장은 그 분의 누님이 지수마을로 시집왔기 때문에 누님 집에서 기거하며 학교에 다니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어요. 우리 선친이 6학년일 때 李秉喆 회장은 5학년이었답니다』
 
  ―재벌을 창업한 분들 중에 경남 출신이 참 많은데 이유가 있습니까.
 
  『嶺南이 일본하고 가깝다 보니 앞서가는 것 아닙니까. 기질상 조금 앞서 가는 것 같아요』
 
  ―地主에서 기업인으로 변신한 회장님 집안과 故 李秉喆 회장 집안은 비슷한 길을 걸어 온 것 같습니다.
 
  『우리는 地主에서 포목 도매상을 거쳐 제조업으로 갔고, 李秉喆 회장 집안은 농촌에서 양조장을 하다가 제조업을 했지요. 우리 선친은 시골에서 협동조합을 만들어 이사장을 했습니다. 馬山이나 晉州에서 생선, 꿀, 설탕 같은 생활 필수품을 싸게 사다가 매점에 차려 놓고 팔았습니다. 우리 마을이 富村이니까 집집마다 통장이 있었어요. 매점에서 물건을 사면 각자의 통장에 사인을 했는데, 일년에 두 번, 추석과 설날에 결제를 했습니다. 결제는 잘되었습니다마는 큰 이익은 없었어요.
 
  그걸 하면서 우리 선친은 東亞日報 지국장도 하고 그랬죠. 조그만 장사라도 하고 나서 기업을 일으키면 성장 속도가 조금 빨라요. 장사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선친은 포목상도 하고, 운수업도 하다가 제조업을 시작했어요』
 
 
 
 징용 면하려고 사범학교 진학
 
  ―진주고보 졸업 후 사범학교를 지망한 데는 특별한 동기가 있었습니까.
 
  『나는 (日帝) 징용 세댑니다. 그때는 사범학교 출신과 말 키우는 축산학과, 그리고 수의사, 법관, 공과계와 의대 출신에 한해 징용이 면제되었어요. 징용을 피하는 가장 쉬운 길이 사범학교 진학이었습니다. 그 시절엔 마을마다 학교를 못 다닌 無취학자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한 面에서 최소한 50~60명쯤 되었지요.
 
  사범학교 출신들에게 초등학교 교사 자격증을 주고, 교장 책임下에 無취학자들의 교육을 맡겼습니다. 일본말도 가르치곤 했지요. 사범학교 들어가서 4개월쯤 있으니까 사범학교 출신들에게는 징용 면제 혜택을 안 해준다는 말이 나왔어요. 대부분이 사범학교를 뛰쳐나갔는데, 나는 이왕 틀린 것, 기다리다 보면 뭔가 도움이 안되겠느냐 싶어 계속 학교를 다녔어요.
 
  시간이 되니까 소집영장이라는 것이 나옵디다. 1945년 8월21일자로 馬山 부대에 입대하게 되어 있었어요. 馬山으로 가면 무조건 南方(남방)으로 징용가기로 돼있었죠. 8월7일에 영장을 받았는데 8월15일에 광복이 되었습니다』
 
  ―지나 놓고 보면 사범학교 출신들이 정치, 軍, 기업에 많이 들어가 우리나라를 만든 느낌이 듭니다. 朴正熙 대통령도 사범학교를 나와 軍에 들어갔습니다. 金鍾泌, 白善燁 같은 분들도 그렇고요.
 
  『日帝 말기까지만 해도 사범학교에는 官費가 많이 나왔습니다. 사범학교 재학 중에 내가 받은 장학금이 面長 월급보다도 많았으니까요. 교사 월급은 지서장보다 많고 面長과 거의 비슷했습니다. 대우가 그러니 교사들은 어디를 가도 대접받았죠. 그러니까 엘리트들이 사범학교로 몰렸습니다. 자질이 뛰어난 사람들이 교사가 되어 생활이 안정되니까 옆 눈 볼 여가 없이 맡은 일을 충실히 했어요. 사범학교 출신 중에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사람들은 고등고시 시험에 참 많이 되었습니다』
 
  ―기록에 보니까 부산 사범학교에서도 교사 생활을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고향에서 1년 반쯤 교편생활을 하다가 부산으로 가서, 부산 사범학교 부속 국민학교에서 3년 정도 근무했습니다. 4년 반 동안 교사생활을 했지요』
 
  ―그 정도 교사 생활을 했다면 체취가 많이 남아 있을 것 같은데요.
 
  『그때는 세상이 시끄러울 때 아닙니까. 고향에서는 교사 생활을 제대로 못 했습니다. 운동장에서 축구나 하고 부락사람들과 어울렸지요』
 
  ―전문 경영인(CEO)으로서 성공한 분들의 공통점은 교육자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이 철저한 분들이 결국 성공하는 것 같은데요.
 
  『글쎄요.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具滋暻 명예회장이 교사로 있던 1947년, 그의 부친 具仁會씨는 화장품 럭키크림을 만드는 락희화학공업사(現 LG화학)를 설립, LG그룹의 역사를 열었다. 락희화학은 6·25 전쟁 중인 1952년 국내 최초로 플라스틱 산업에 뛰어들어 빗, 비눗갑, 칫솔, 식기류 등의 플라스틱 제품을 생산했고, 1954년에는 국내 최초의 치약을 개발, 치약시장을 장악했다.
 
  具滋暻 명예회장이 교사 생활을 접고 부친 회사에 들어간 것은 1950년으로, 락희화학 설립 3년 후였다. 창업주 아들인 具滋暻 명예회장이 「창업 1세대」 혹은 「창업 1.5세대」로 대접받는 것은 일찍이 부친 사업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具滋暻 명예회장은 타계한 부친의 뒤를 이어 1970년 LG그룹 회장에 취임, 25년간 경영권을 행사했다.
 
 
 
 『나는 중노동부터 시작했다』
 
  ―락희화학이 생활용품용 플라스틱 제품을 국내에서 최초 개발한 데는 특별한 동기가 있습니까.
 
  『그 무렵 홍콩을 통해 플라스틱 빗과 담뱃갑, 비눗갑 등이 마구 밀수되었습니다. 플라스틱 제품을 처음 보니까 참 신기하데요. 제조 과정을 알아보니 원가에 비해 무려 마흔다섯 배의 이익이 남는 것으로 계산되었습니다. 우리가 기계와 원료를 사서 제조하니까 서른다섯 배가 남더라고요. 돈을 거저 버는 겁니다. 밀수한 값보다 싸게 팔았지만 그때 많이 벌었고, 밀수도 방지했지요』
 
  ―회장님의 경영 철학은 「밑바닥에서부터 경험하라, 작은 것부터 아껴라, 창의와 모험 정신, 기업은 사람이다」는 것으로 소개돼 있는데 밑바닥 경험은 하셨습니까.
 
  『나는 중노동부터 시작했어요』
 
  ―옛날 全經聯(전경련) 회장으로 계실 때 청와대에서 盧泰愚 대통령과 기업인들이 회식하는 자리에서 무슨 말씀을 직설적으로 하셨다가 盧대통령과 서먹해진 적이 있었다면서요.
 
  『참석자 모두가 술을 많이 마신 자리였어요. 내가 全經聯 회장 자격으로 대통령 앞에서 말을 하게 되었는데, 단도직입적으로 序頭(서두)를 시작해서 문제가 생겼어요. 내가 「여태까지의 정부는 직접 선거를 안 했으니까 군사독재 정부고, 現 정부는」이라고 말하는 순간, (盧泰愚 대통령이) 「뭐라고」 하면서 화를 내고는 나가 버렸습니다. 그 다음을 들어봐야 내 말의 진의를 알 것 아닙니까. 군사 독재정부란 말을 하고 난 다음에, 나는 「現 정부는 직접 선거를 했으니까 정당한 정부다」라는 말을 하고자 했던 겁니다. 미처 뒷말을 하기도 전에 (盧泰愚 대통령이) 벌떡 일어서서 나갔어요. 盧泰愚 대통령은 자신이 軍 출신이다 보니 내 말에 양심의 가책을 받은 것인지도 모르죠.
 
  그 자리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발언은, 「全斗煥 대통령은 장춘단 공원에서 당선된 대통령이지만 얼마나 강하게 나갔습니까. 공권력을 동원할 때는 동원하고, 勞組가 시끄럽게 하면 대항도 하고 그랬는데, 그야말로 직접 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盧泰愚 대통령은 全斗煥 대통령 시절보다 더 강하게 나갈 수 있고 공권력을 동원할 때도 더 많이 강하게 할 수 있는 처지인데도 안 하니까 불만입니다」 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대통령이 나가 버리니까 말도 다 못하고 바로 파장이 되어 버렸죠』
 
  ―돌아와서 고민을 많이 했겠습니다.
 
  『고민했죠. 그래서 (대통령의) 동서인 琴震鎬(금진호) 장관을 통해서 「내가 할 말을 다 못 했는데 끝까지 들어봐야 할 게 아니냐. 내 본 뜻은 그게 아니다」라고 전했지요. 공권력을 동원할 땐 하고, 좀 강하게 나가 주시오 하는 소리를 한다는 게 그만 그렇게 되었어요.
 
  그날은 굉장히 추웠어요. 이동막걸리를 곁들여 저녁을 먹고 나서 청와대 별관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전망이 참 좋은 방이었어요. 나는 처음 가봤소. 방이 어떻게 뜨끈뜨끈한지 들어서자마자 문을 열고 그랬죠. 술 먹은 상태에서 그 방에 들어가니까 모두 술에 취하고 말았지요』
 
  ―대통령을 포함해 몇 분이나 계셨는데요.
 
  『全經聯 전체 회원들을 두 팀으로 나누어서 대통령과 저녁 회식을 했는데, 절반이 참석했으니까 열대여섯 명쯤 되었을 거요』
 
 
 
 놀고 먹는 사람을 없애는 게 개혁
 
  ―기업하는 많은 분들은 盧泰愚 대통령 때부터 勞使문제를 물렁하게 대처했다고 비판하는데, 盧대통령 입장에서 생각하면, 민주화를 위해선 그 정도는 불가피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 말도 일리는 있어요. 그러나 데모를 마음대로 할 때 아닙니까. (대통령으로서) 할 일은 해야죠. 법을 엄격하게 집행할 때는 집행해야 하고요. 권위주의를 없앤다고 대통령이 가방 들고 다니는 것은 보기 흉해요』
 
  ―全經聯 회장을 그만 둔 것은 적성에도 안 맞고 해서 스스로 물러난 것이죠.
 
  『그 무렵 우리(LG그룹)는 미국 맥킨지社의 경영진단을 받았습니다. 1987년 11월부터 경영 진단을 받고 1988년에 들면서 본격적인 대변혁을 시작했습니다. 구조조정이죠. 맥킨지에서 권고하는 대로 받아들였어요. 내가 全經聯 회장을 계속 하다가는 경영혁신을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1989년에 全經聯 회장을 그만 두었죠』
 
  ―그것이 결국은 LG그룹으로 하여금 IMF를 견뎌내게 한 힘이 되었겠네요.
 
  『놀고 먹는 사람을 없애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일가 친척부터 먼저 정리했지요. 일가 친척 중 실력이 없는 사장, 부사장, 전무는 다 정리했어요』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렇죠. 나보다 어른들이고 처남들인데 자진해서 나가라고 했죠. 내가 하니까 더 쉽습디다. 젊은 사람이 나이든 사람한테 「좀 나가 달라」고 하기가 편해요. 물러난 분들도 순수하게 받아들였고요. 경영 진단을 한 팀들이 그 분들한테 경영상태를 꼬치꼬치 다 물었거든요. 그리고 전체 사원들의 여론을 수렴해, 이 회사는 무엇이 장점이고 무엇이 단점이라는 것을 완전히 파악해서 결점을 없애 나가는 데 주력했지요』
 
 
 
 LG그룹 경영 혁신에 5년 걸렸다
 
  ―경영 진단을 받지 않은 기업이 없지만, 실천하기가 정말 힘든데 회장님은 실천을 하셨군요.
 
  『(경영 진단을 맡은) 그 사람들이 나보고 그래요. 「우리 진단 결과에 대해 회장님이 솔선수범해서 지도하면 성공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합니다.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에도 회장한테 8할의 책임이 있습니다. 대담하게 혁신할 각오를 갖고 솔선수범해서 모범을 보여줘야 합니다. 결단을 내려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요』
 
  ―경영 혁신을 하는 데 몇 년이나 걸렸습니까
 
  『1987년부터 실행에 옮겨서 딱 5년 걸렸습니다. 그걸 마치고 나서 회장 그만둘 각오를 했지요』
 
  ―그때 만약 경영혁신을 안 했더라면 오늘날의 LG는 어려웠다고 봅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죠』
 
  ―LG그룹은 전체적으로 잘 돌아가고 있습니까.
 
  『계열사 모두가 이익이 너무 많이 났어요. 金利가 빠져 버리니까(내려가니까) 재무 구조도 참 좋고요. 옛날에는 부채 비율이 300% 내지 250%쯤 되었는데 요즘은 150% 내지 30%로 줄고 빚이 거의 없는 계열사도 있어요. 이자가 싸니까 굉장히 재무구조가 좋아졌고 튼튼해졌어요』
 
  ―결과적으로는 IMF가 온 게 잘 된 일이네요.
 
  『경제에 큰 쇼크를 한 번 준 거죠. 정부 지원을 받는 식으로 인위적으로 해서는 안 되지요. 외부 압력에 의해서 바람이 부니까 생각이 달라진 겁니다』
 
  ―LG그룹의 경우, 電子를 제외하면 소비재 산업이 主力이고 한국의 기간산업에 기여한 게 별로 없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석유화학이 기간산업입니다. 정유, LG화학, 플라스틱 가공은 우리가 제일 먼저 시작했어요. 기간산업, 장치산업을 제일 먼저 시작한 기업이 LG이고 오히려 三星이 나중에 시작했지요. 화학은 三星이 우리보다 10년 늦어요』
 
  ―造船(조선)이나 자동차, 항공 산업 쪽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까.
 
  『기업마다 전문 분야가 있습니다. 이것 저것 다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정유를 해서 납사를 분해하면 석유화학 제품이 나옵니다. 그래서 정유 공장을 지었죠. 정유 공장을 지으니까 원유 수송이 굉장히 많습니다. 수송이 많으니까 탱커나 배가 필요하고 그런 것을 취급하니까 보험이 필요해요. 보험을 남 주느니 우리가 하자고 해서 보험회사를 만들었고, 보험회사를 만드니까 돈이 생겨 증권회사를 만들고요. 그러다 보니 가지에 가지를 치고 해서 커 나갔죠. 우리가 하고 있는 사업들은 다 연관이 있습니다. 플라스틱 가공을 할 때 플라스틱 가공품이 잘 안 팔려서 電子 부품을 하면 되겠다 싶어 電子 부품을 하다가 전자 공업으로 나갔습니다』
 
 
 
 LG가 큰 것은 연구 인력이 풍부했기 때문
 
  ―LG그룹에서 구상 중인 신규 업종이라면….
 
  『연구소에서 개발하고 있는 게 두세 가지가 되는 모양입니다. 그것을 더 연구해서 20년 후에 쓸 것, 그리고 15년 후에 쓸 것을 선별 중에 있습니다. LCD(액정표시장치)라는 것은 20년 만에 개발한 것입니다. 벽걸이 TV인 PDP는 개발에 10년이 걸렸어요』
 
  ―회장님 적성은 이공계통입니까 인문계통입니까.
 
  『理工계통입니다. 수치에 밝은 편은 아니고 탐구력이 딴 사람보다 많은 편이죠』
 
  ―우리나라는 지금 理工 계통에 대한 지원자가 줄었을 뿐 아니라 사회에 나와도 푸대접을 받으니 굉장히 기피하는 분야가 되었습니다. 활성화할 대책은 없겠습니까.
 
  『신문에 보니까 고등 고시제도를 없앤다는데 잘하는 것 같아요. 그래야 이공계가 숨을 좀 펴고 살지요. 같은 고등학교를 나와 머리 좋은 사람이 이공계를 갔는데 출세는 인문계가 더 많이 합니다. 장관까지 하고 돈도 더 벌어서 나옵니다. 이공계 출신은 회사나 연구소에 취직해서 돈도 많이 못 벌고요. 그래도 우리 그룹에선 사장을 지낸 사람은 이공계 출신이 훨씬 많아요』
 
  ―이공계를 특별히 우대해서 그렇습니까.
 
  『기술력에서 우수하니까 자연히 그렇게 돼요. 인문계는 경리나 영업 쪽에 배치되는데 영업도 기술이 있는 사람이 나아요』
 
  ―지금 중국이 잘 되는 이유가 이공계 출신들이 정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LG가 이렇게 큰 것도 연구 인력이 풍부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電子와 화학 분야가 그래요. 화학은 기술개발에 그리 오랜 시간이 안 걸리는데 電子는 물건 하나 만드는 데 10년 혹은 20년이 걸립니다. 장래성이 있다고 생각되면 중간에 좌절하지 말고 계속 연구해서 결론을 내야지요』
 
  ―LG는 중국 시장에 굉장히 빨리 진출했죠.
 
  『중국 투자는 우리가 제일 많이 했어요. 천진, 장사, 上海에 진출해 있습니다』
 
  ―중국과 홍콩을 합칠 경우, 우리나라와의 교역량이 400억 달러로 미국보다 앞섭니다. 중국의 비중이 너무 커 버리니까 겁나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그렇게 안 봅니다. 냉장고, 세탁기 같은 것은 중국이 곧 따라 올 것 같고, 중국산 냉장고가 한국에 들어 온다는 소리가 나올 겁니다. 그러나 반도체라든지 LCD 같은 것은 중국이 우리를 따라오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 같고요. 컴퓨터도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중국은 컴퓨터에 들어가는 핵심 반도체를 전부 다 수입하고 있지요』
 
  ―LG그룹은 勞使 문제가 그렇게 심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1987년과 1989년 두 번에 걸쳐 심하게 진통을 겪은 뒤에는 거의 없습니다』
 
  ―勞使 문제를 잘 해결한 데는 어떤 비결이 있습니까.
 
  『최고 책임자를 부사장급으로 내세워 勞務(노무) 관계만 전담하라고 했어요. 권한도 많이 주었고요. 勞務 책임자는 사원들 길흉사를 철저히 챙겼어요. 퇴근길엔 근로자들과 같이 술도 마시며 인간적으로 접근했지요』
 
  ―LG반도체는 現代로 넘어갔는데 요즘 현대 하이닉스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LG로선 결과적으로 잘 한 선택인 것 같은데 혹시 LG그룹에서 반도체를 계속 가지고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르겠습니다마는 現代 하이닉스가 우리 반도체를 뺏어가려고 했을 무렵에는 LG반도체의 경영이 참 좋았습니다. 하이닉스가 LG반도체를 인수하고 나서 일년 반 동안에 하이닉스 자체에서 반도체를 개발해 수출한 적이 한 건도 없습니다. 하이닉스는 순전히 우리 것을 수출했고, 그걸로 재미를 봤죠.
 
  그 기술과 연구소가 지속적으로 활성화되었더라면 지금처럼 악화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활성화시키지를 못 하니까 연구가 약했고, 개발도 안 되었고요. 우리 것을 뺏어 갈 때는 기술만 뺏으면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기술자들이 이탈해 대만, 홍콩, 싱가포르로 가 버렸어요. 흩어진 기술자들을 다 모으지 못했습니다. 이것도 실패작이죠』
 
  ―고급 기술자들이 외국으로 나갔다면 우리나라로서도 대단한 손실이네요.
 
  『손실이죠. 대만으로 많이 갔습니다. 요새 하도 메모리 반도체가 불황이니까 損失(손실) 관계를 따지면 우리가 잘 판 건지, 잘못 판 건지는 모르겠어요』
 
  ―LG반도체는 판 겁니까, 뺏긴 겁니까.
 
  『한 株에 적어도 2만5000원은 받아야 되는 건데 2만1000원에 팔았으니까 뺏긴 셈이죠』
 
 
 
 회의는 아침에 하면 시간 낭비
 
   ―기업을 경영하다 보면 회사 일 이외에 정치나 사회에서 요구하는 일에 시간을 많이 뺏기지 않습니까.
 
  『전자공업협회나 화학협회처럼 우리 일과 직접 관계가 있는 데는 돌아가면서 회장을 하는 거니까 안 할 수가 없고, 그 외 일은 일체 관여하지 못하게 합니다』
 
  ―기업은 전문 경영인이 회사 일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느냐는 게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전에는 임원들하고 대화하는 시간이 없었는데 경영 혁신을 하면서 매주 한 번씩 불러서 대화하고, 점심 시간 혹은 저녁 시간에 회의를 했습니다』
 
  ―회의를 많이 하는 회사는 잘 안 된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요.
 
  『회의는 절대로 아침에 하면 안 됩니다. 그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면 안 되지요. 아침 회의는 완전히 낭빕니다. 점심시간이나 저녁에 작업을 마치고 나서 간단히 식사하면서 회의했습니다. 시간을 절약해야지요. 아침 회의는 월요일 외에는 안 됩니다. 요즘은 週 5일 근무니까 월요일 오전엔 꼭 회의를 해야지요. 내가 서울에 가도 월요일만 회사에 나가는데 오전에는 사장들이 나를 만나자는 소리를 안 합니다. 전부 회의를 하니까요. 점심시간에 점심 같이 먹고 오후에 모여서 얘기를 좀 하지요』
 
  ―그동안 경영을 하면서 특히 기억에 남는 부하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까
 
  『판단을 잘해야 합니다. 판단하기가 참 어려워요. 우리가 무선통신과 휴대폰 사업을 시작할 때 교환국과 기지국 시설만 개발하면 다른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때 휴대폰도 동시에 개발해야 되지 않느냐 하는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앞으로 중소기업의 몫이라고 해서 우리는 개발하지 않았습니다.
 
  교환국과 기지국은 이번에 다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CDMA(다중분할코드접속방식) 동기식 방식과 GSM(유럽 방식) 두 가지 방식이 모두 가능한 데는 세계에서 우리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휴대폰 생산에서 늦었습니다. 휴대폰이 지금은 반도체 수출보다 더 많습니다』
 
  ―LG에서 생산하는 휴대폰의 경우에도 물량이 모자랄 정도로 수출이 잘되고 있지 않습니까.
 
  『미국도 수출이 잘되고 브라질도 잘되고 南美가 특히 잘 돼요. 중국 수출도 대단하고요』
 
 
 
 人事 원칙
 
  ―오너의 경우에는 중요한 결정을 혼자서 하는 경우가 많지 않으세요
 
  『초창기에는 우리 선친하고 윗대 형제분들이 결정했지요. 내가 그룹 회장이 된 후에는 전문 경영인과 의논하고 전문 경영인의 결정에 따랐어요』
 
  ―아주 성공적인 결정을 했다고 생각나는 게 있으십니까
 
  『여태까지 잘된 것은 모두 성공적인 결정이죠. 電子 제품 가운데 PDP와 LCD 기술은 일본보다 앞섭니다. PDP의 경우도 일본의 산요, 히다치, 도시바 등은 우리한테 일괄해서 주문해 갑니다. 그 분야의 반도체 칩을 우리가 제일 먼저 개발했거든요. 경쟁을 하고 싶지만 칩을 만들기 전에는 경쟁력이 없으니까 OEM(주문자 표시 방식)으로 한꺼번에 주문하고 있지요』
 
  ―人事에는 어떤 원칙이 있었습니까
 
  『재직 중에 이익을 얼마나 많이 냈느냐, 업적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을 제일 먼저 보고, 그 다음은 자기가 물러날 때를 대비해 후계자를 양성했느냐 안 했느냐는 점을 보았습니다. 후계자가 없으면 자기를 못 내보낼 것이라고 생각하고 후계자를 양성 안 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은 경고를 하고, 그래도 후계자를 양성 안 하면 빨리 내보내야죠. 자기 욕심대로 하려고 하는 사람이니까요』
 
  ―우리 민족은 동업이 잘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LG그룹 경우 具씨와 許씨 두 집안이 오랫동안 별 문제없이 기업을 경영해 온 것은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주변에서 하도 감시를 많이 하고, 무서워서 그랬지요』
 
  ―기록에 보면, 두 집안이 사업을 시작할 때 許씨 집안에서는 돈을 대고, 具씨 집안에서는 경영을 맡는 걸로 약조했다고 하는데요.
 
  『그게 아니고 우리 선친이 트럭 운수업을 시작할 때 許씨네의 제일 어른되는 분이 우리 선친에게 「돈을 좀 투자하고 싶다」고 하면서, 대신 자기 아들을 맡아서 훈련도 시키고, 교육도 좀 시켜 달라고 했어요. 그 아들이 우리 집안에 장가 온 許準九(허준구) 회장인데, 작년에 돌아가셨죠. 그렇게 했는데 나중에 이쪽(具씨)이 잘 되니까 저쪽(許씨)에서 자꾸 논 팔아 더 增資를 했어요. 그 후 그쪽(許씨) 형제들이 많이 들어왔어요. 우리 집안에서는 전부 받아 주었습니다』
 
 
 
 具씨, 許씨 계열분리한다
 
  ―집안에 문제가 생기면 어떤 식으로 해결한다는 원칙 같은 것은 없었습니까.
 
  『처음부터 재산이 구분되어 있으니까, 그 이상의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지요. 늘 감투가 문제되었습니다. 누구는 사장이 되었는데 왜 나는 사장을 시켜 주지 않느냐 하는 것인데, 그런 것은 어른들이 평가해서 하는 거니까요』
 
  ―집안 간에 문제가 생기면 투서를 하든지 검찰에 고발하든지 언론에 정보를 제공하든지 해서 문제를 외부로 가져가 복잡하게 만드는데 LG에는 그런 게 없었던 것 같습니다.
 
  『모르겠습니다. 과거에는 父子간에도 청와대에 고발하고 투서를 하던데 우리는 그런 게 없었습니다』
 
  ―異見이 있으면 대화를 통해서 해결하는 전통이 있는 모양이죠.
 
  『대가족이니까 가족 회의에서 어른들이 결정했지요』
 
  ―가족 회의라는 공식 모임이 있었습니까.
 
  『공식 모임은 없고요. 경축사가 있을 때라든지 喪(상)을 당한다든지 할 때 모이고, 제삿날이나 시제날에 자연스럽게 모이지요』
 
  ―LG그룹은 지금의 그룹 형태로 계속 갈 것인지, 아니면 계열 분리를 할 생각입니까.
 
  『계열 분리를 해야죠. 우리 가족이 너무 많아요. 具가도 많고, 許씨도 많아요. 딸은 없고 전부 다 아들만 많이 낳아 가지고 다 관리하려면 골치가 참 아파요. 내가 여기서 말은 못 하지만 참 골치 아픕니다.
 
  그래도 어쩝니까. 다 잘 살 수는 없는 것이고요. 여태까지 우리가 부분적으로 계열 분리를 해 왔지만 이대로 나가면 불평불만이 쌓여서 망할 때 한목에 망합니다. 계열 분리를 해서 각자 기업을 경영하다 보면 망할 사람은 망할 것이고, 잘하는 사람은 잘하니까 더 큰 힘이 생기고 저력이 생기지요.
 
  일부에서는 그냥 이대로 밀고 나가면 좋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도 하지만 계열 분리에 불만이 없더만요. 반대하는 사람도 없고요. 계열 분리를 해서 許씨 것부터 먼저 분리하고, 그러면 許씨들은 그걸 가져가 숙질간에 나누겠지요. 우리 숙부 형제들은 숙부 형제들 몫대로, 내 동생들은 그들 몫만큼 다 떼 줄 겁니다. 지분이 제일 큰 사람이 큰 기업을 맡고, 그 다음으로 자본력이 큰 사람이 그 다음 큰 것을 맡을 겁니다』
 
  ―언론에 보도된 걸 보면 電子, 통신, 화학, 금융은 具씨가 맡고, 許씨는 건설, 유통, 정유를 맡는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될 겁니다』
 
  ―분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어느 정도로 예상합니까.
 
  『LG전선, LG칼텍스 가스, 극동가스 등 4개社는 내년 말(인터뷰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2003년 말:편집자 注)부터 시작해서 내후년(2004년) 3월에는 경영권이 완전히 넘어 갈 것 같고요』
 
  ―LG그룹이란 명칭은 어떻게 됩니까
 
  『LG라는 명칭은 다 그대로 씁니다. LG라는 이미지를 손상하는 사고가 나면 해당 기업은 LG란 이름을 더는 못 쓰고 그만한 보상을 하도록 할 것입니다』
 
  ―LG그룹의 10년 후 모습을 그려 주시겠습니까
 
  『기업을 맡은 사람 나름일 겁니다. LG화학이나 LG 증권 등은 동요도 없고, 으레 전문 경영인이 할 것이기 때문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인식을 가진 것 같아요』
 
 
 
 경쟁자가 있어야 발전한다
 
  ―우리나라에서 대기업을 창업한 분들의 공통점이 원칙주의자라는 것입니다. 어떤 부분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그런 고집이 있기 때문에 큰 기업을 만든 것 같습니다. 회장님의 고집이랄까, 원칙이라면 무엇입니까.
 
  『저는 고집이 없어요』
 
  ―그룹 회장들은 자기 나름대로 왕국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만나면 경쟁심이 생기죠
 
  『그런 건 있습니다. 이동통신이나 석유 화학에서도 라이벌 의식이 있죠. 싸울 땐 싸우고 좋아할 땐 좋아해야죠. 그런 일이 있으면 회장들끼리는 모른 척하고 실무는 사장들한테 맡겨야죠』
 
  ―삼성전자하고 LG전자가 宿敵(숙적)인데 두 회사가 경쟁을 한 결과 우리나라의 電子산업 전체가 발전한 것 아닙니까.
 
  『경쟁하면서 발전하는 것이죠. LG전자의 경쟁력도 강한 경쟁자가 있으니까 나온 겁니다. 경쟁에서 지면 죽는다, 그러니 우리도 하자는 그 정신이죠』
 
  ―원래는 금성사가 1위를 하다가 삼성전자에 역전당했죠.
 
  『삼성전자는 우리보다 10년 늦게 생겼습니다. 역전이라고 하면 이상하지만 매출액이 역전된 것은 1987년 금성사에서 3개월간 파업하던 무렵이었어요. 1989년에 또 4개월인가 파업이 있으면서 또 당했고요. 요새 와서는 백색 家電(가정용 가전제품)은 우리가 우위에 있지만 반도체 매출이 워낙 크니까 저쪽이 매출액에서 앞서요』
 
  ―역전되었을 때는 잠이 안 왔겠습니다.
 
  『노동조합에 늘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이 그때 파업을 안 했으면 역전이 안 되었을 텐데, 파업 두 번 하는 바람에 역전이 되었다고요. 파업하면 안 되는 줄을 이제는 알고 있어요』
 
 
 
 『요즘은 정치자금 달라고 안 해요』
 
   ―대한민국이 이렇게 잘 살게 되고, 큰소리를 치게 된 것이 기업인들, 특히 창업 기업인들의 역할 때문이었습니다. 굉장히 높게 평가해야 할 부분인데 사회적으로 대우도 못 받고, 평가도 못 받고 있습니다. 억울한 생각은 안 드십니까
 
  『기업인들 중에서도 정치하는 기업인이 있고, 정부 돈을 정치적으로 융자받아 가지고 해외로 도망가는 기업인들이 있었습니다. 별별 기업인이 다 있습니다. 자유당 때부터 정치 자금 많이 내고, 은행 돈 많이 빌려 기업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도 성공한 사람이 없습니다. 다 망했습니다』
 
  ―언제쯤부터 우리 기업도 정치권의 눈치를 안 보게 될까요.
 
  『정치 세력이 약해져야 되는데, 그게 언제 약해지겠습니까? 허허허』
 
  ―정치 세력이 약해지는 것보다 기업이 먼저 깨끗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깨끗해진다고 되겠습니까. 정치권이 잘 해야지요』
 
  ―시간이 갈수록 기업이 정치권의 눈치를 적게 보는 방향으로 가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차츰차츰 되겠지요. 李載灐(이재형·대림산업 李埈鎔 회장의 부친)씨가 全斗煥 대통령 때는 협조를 많이 하고 국회의장도 지냈는데 盧泰愚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적극적으로 협조를 안 했습니다. 盧泰愚 대통령 취임식 자리에 李載灐씨가 참석하지 않았어요. 요게 괘씸하다고 해서 李載灐씨가 경기도 安養의 선산을 팔아서 아파트 개발할 때 세금을 왕창 물려 쫄딱 망했지요. 요즘 확실히 달라진 것은 정치자금을 달라고 하지 않아요』
 
  ―그룹 회장들이 全斗煥, 盧泰愚 대통령에게 정치 자금을 준 것은 金泳三 정부 시절의 검찰 수사에서 드러났습니다. 회장님의 경우 金泳三 정부와 그후 金大中 정부 시절에도 정치자금을 냈습니까.
 
  『정당 후원금은 조금씩은 다 있죠. 여당에도 있고 야당에도 있고, 조금씩은 다 해야 합니다』
 
  ―이른바 정치 자금이란 명목으로 빼앗긴 돈은 대충 어느 정도 되겠습니까. 몇백억은 넘지 않습니까.
 
  『뺏긴 적은 없고, 자진해서 조금 주었죠. 몇백억원 정도 주었으면 회사가 망하라고요』
 
  ―金大中 대통령 시절에 들어와서 이런 것은 달라진 것 아닙니까. 옛날에는 재벌 회장들이 앞장서서 정부 쪽에 로비하고 이권을 배분하는 역할을 했는데 金大中 정부 들어와서는 그런 게 없어졌죠. 빅딜은 예외인지 모르지만요.
 
  『LG반도체도 그래서 당한 것 아닙니까. 좌우간 對北(대북) 정책에 협조하는 기업체에는 돈이 많이 나가고, 빅딜할 때도 유리했던 것 같습니다』
 
  ―LG도 북한에 투자하는 게 있습니까.
 
  『TV 조립 조금 하고 있죠. 중국이 북한보다 더 인건비가 싸고 편해요』
 
  ―북한과의 사업에서 돈은 법니까.
 
  『돈은 무슨 돈을 법니까. 아직은 적잡니다』
 
  ―북한엔 갔다 오셨습니까.
 
  『안 갔다 왔습니다』
 
  ―金大中 대통령으로부터 北에 투자하라는 부탁을 받은 적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북한이 나름대로 경제 개혁을 시작하는 모양인데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경제 개혁이 되겠습니까? 안 될 겁니다. 신의주나 개성을 개방해서 개발한다지만 자본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모르는 것 같아요. 신의주는 중국 압력 때문에 어려울 것이고, 개성 공단은 위치상 괜찮긴 하지만 인건비를 어느 정도 싸게 하는가에 달렸어요. 북한의 임금이 싼 게 아니에요. 운임도 참 비쌉니다』
 
 
 
 朴正熙 대통령을 존경한다
 
   ―국내외 기업인 중에서 회장님이 특별히 높게 평가하는 분이 있습니까.
 
  『나보고 뽑으라면 朴(正熙) 대통령이지요』
 
  ―朴대통령의 어떤 점을 높이 평가합니까.
 
  『결단력, 그리고 장래를 내다보는 예견력이지요. 朴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우리나라가 이렇게 발전했겠습니까. 부정축재했다고 벌금 물린 그 돈으로 공장 짓고, 시설투자하고, 국가에 봉사하라고 한 분입니다』
 
  ―특히 8·3 私債 동결조치가 기업에 큰 도움이 되었지요.
 
  『그것이 기업을 살린 겁니다. IMF 때문에 金利가 크게 떨어지니까 기업의 재무구조가 다 좋아졌습니다. 참 좋아졌습니다. 웬만한 기업은 다 살아났습니다. 부채 비율이 높은, 그야말로 형편없는 기업만 망하고 자연 도태되었어요. 그 당시 정치권에 유착돼 은행 돈 빌려 쓴 사람은 망해버렸죠』
 
  ―朴대통령이 살아 계실 때 기업하는 분들은 든든한 빽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겠습니다.
 
  『그 시절엔 조그만 공장 하나만 지어도 朴대통령이 반드시 참석하고 격려했습니다. 그 후에도 「잘 되느냐」고 꼭 확인하곤 했지요』
 
  ―朴대통령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회장님은 사실상 창업주 세대인데 창업주 중에 생존해 계신 분이 거의 없습니다.
 
  『李東燦(이동찬·코오롱그룹 회장)씨, 辛格浩(신격호·롯데그룹 회장)씨 정도가 남았죠. 辛格浩 회장은 전에는 몇 번 만나고 했는데, 요새는 서울에 와도 왔다는 소리를 안 하고, 내가 회사에 안 나가니까 연락이 안 되네요』
 
  ―재벌 창업주 중에서는 어떤 분하고 제일 친합니까.
 
  『全經聯에 나가면 다 친해야 되죠. 골프 모임은 金相鴻(김상홍) 삼양사 회장과 친해요』
 
  ―故 李秉喆 회장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판단력이 참 좋은 분이지요』
 
  ―李秉喆 회장은 사업면에서 회장님과 라이벌이지 않습니까.
 
  『李秉喆 회장은 일본에 자주 가고, 일본 경제인들하고 자주 접촉하니까 앞으로 경제가 어떻게 될 것이고, 세계 정세가 어떻게 된다는 데 대해서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 선친(具仁會 회장)하고는 사이가 참 좋았습니다. 사돈되기 전에 우리 선친과 만나서는 「이 사람아, 부동산 사놓으면 좋네」라고 했어요』
 
 
 
 2세들은 창업자보다 더 대담한 투자
 
  ―故 鄭周永 명예회장과의 관계는 어땠습니까
 
  『특별한 관계는 없죠. 鄭周永 회장은 자유당 때부터 쭉 여당하고 손잡았어요. 全經聯 회장을 하고 나서 자기가 그만둘 때에는 나한테 넘겨야 되겠다 싶으니까 나하고 친하게 지내려고 했지요. 나한테 호감을 갖고 일을 하는데 내가 반대할 일은 없고 해서 자연히 자주 만나서 얘기도 하고 그랬어요』
 
  ―현대그룹이 굉장히 어려움에 처해 있는데,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정치적으로 무모하게 달려든 거죠. 말하자면 과거 사고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백화점 등은 좋은 회사지요』
 
  ―대우 金宇中 회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합니까.
 
  『말만 하면 은행에서 척척 융자를 해주니, 자기 맘대로 돈을 썼습니다. 기업인이 그런 쪽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기업을 키우는 데는 정신을 못 차리죠. 사업한다고 은행 돈을 많이 빌려 썼고 이자 갚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어쨌든 金宇中 회장은 이자는 갚아 나갔어요』
 
  ―쌍용그룹은 왜 망했다고 보세요.
 
  『힘에 부치는 자동차에 너무 무모한 투자를 했어요. 요즘 쌍용자동차가 인기가 좋아요. 이자를 갚을 수 있는 뒷심만 있었더라면 지금은 돈을 벌었을 것입니다』
 
  ―재벌 2세로 넘어가서 잘 유지되고 있는 기업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2세들은 확실히 창업자보다는 대담하게 투자를 합니다』
 
  ―창업주 입장에선 2세들 경영이 위태롭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죠.
 
  『창업주들은 요리도 생각하고, 조리도 생각하며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데, 2세들은 대담하게 달려들지요. IMF 이후엔 대담한 투자를 못 합니다. 은행 융자도 옛날같이 쉽지가 않습니다. 신용도와 재무구조를 파악하고 나서 담보가 확실하면 돈을 줍니다』
 
  ―회장님은 아들 具本茂(구본무) 회장한테 여러 가지 주의를 시키겠습니다.
 
  『주의를 줘도 본인이 하기에 달려 있죠』
 
  ―재벌 2세들한테 충고를 한다면 어떤 것을 제일 먼저 강조하겠습니까
 
  『너무 과욕을 부리면 안 됩니다. 자기 아버지가 죽고 나서 적어도 7, 8년은 守成(수성)을 해야지요. 알고 난 후에 판단력이 생겼을 때 그때 투자를 해야지요』
 
  ―우리 경제에 제2의 IMF 위기가 올 것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런 위기는 안 오지 않나 싶습니다. 수출이 활발해지고 있고, 무역 수지도 차츰 나아지고 있어요. 관광을 많이 가고, 유학을 많이 보내기 때문에 무역외 수지가 좀 염려가 되지만, 무역수지가 좋지 않으면 국민들이 자제할 것입니다. 금반지까지 내놓은 우리 국민 아닙니까』
 
  ―週 5일 근무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직은 시기상조입니다. 중국의 江澤民(강택민) 주석이 우리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중국은 週 5일제를 한다고 자랑했습니다. 중국 갔다 온 우리 대통령이 중국에서도 週 5일제를 하니까 우리도 연구해 보라고 지시했다는데 아랫사람들이 무조건 지시대로 하면 어찌 합니까. 중국은 노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 週 5일제를 하면 그만큼 고용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모자라서 외국 노동자들이 수없이 들어와 있는데 거기에 週 5일제를 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말도 아닌 짓이에요.
 
  문제는 노동자들 압력에 못 이긴 거죠. 은행은 주인이 없습니다. 한국에 진출한 외국 은행은 週 5일제를 안 하고 싶은데 국내 은행이 전부 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따라가고…. 그렇게 되면 일을 못 해요. 孫炳斗(손병두) 부회장이 全經聯을 대신해서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의 反美 감정은 어떻게 보세요.
 
  『걱정입니다. 뒤에서 선동하는 배후가 있는 것 같아요』
 
  ―일본 경제는 어떻게 될 것으로 보십니까.
 
  『정말 어려울 겁니다. 일본 은행은 옛날 우리나라 은행과 비슷해요. 정치적으로 연결돼 있는데 그걸 해소 못 하면 애를 먹을 거예요. 빚을 탕감해 주려면 국유화할 도리밖에 없지요.
 
  일본 전자회사인 히다치와 NEC가 우리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한 10년 전부터 1년에 한 번씩 임원들, 그리고 연구진들끼리 회의를 합니다. 이 미팅에서 서로 정보를 교환했는데 일본 사람들 얘기가, 「너무 일찍 한국에 기술을 주었다」는 겁니다』
 
 
 
 데모는 한강 백사장에서 해야지요
 
  ―우리 기업이 경쟁력을 계속 유지해 가기 위해서는 기업인이 해야 할 일이 있고, 관료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은데요.
 
  『과거와 같은 일들을 기업이나 공무원이나 정치인이 안 해야지요. 새 출발하는 각오로 일해야 합니다』
 
  ―차기 정부에 부탁할 말은 없으십니까.
 
  『새 정부는 공권력을 동원할 때는 동원해야죠. 너무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일요일만 되면 서울 시내를 통과하기가 힘듭니다. 한 시간도 더 걸려요. 일요일만 되면 데모하니까요. 종로 거리는 데모 거리지, 종로 거리가 아닙니다. 서울역도 그렇고요. 법대로 집행해 주어야죠.
 
  미국은 교통이 혼잡한 지역엔 시위를 못 하도록 아예 허가를 해주지 않아요. 미국에 가보면 피켓 들고 데모하는 사람이 있는데, 자꾸 움직입니다. 한 군데에 서 있으면 교통에 방해된다고 경찰이 잡아가니까 자꾸 움직이는 거예요. 왜 우리는 하필이면 가장 복잡한 장소에서 데모를 하도록 내버려두는지 모르겠어요. 한강 백사장 같은 넓은 곳에서 맘대로 하도록 해야죠. 시위대가 절대로 車道로는 못 나오게 해야 합니다. 』
 
  ―여기처럼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경제도 멀리서 객관적으로 넓게 볼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넓게 못 봅니다. 정보가 늦어요. 오히려 좁게 보이죠』
 
  ―구체적인 회사 경영에 대해서는 신경을 안 쓰시죠.
 
  『안 씁니다』
 
  ―회장님은 요즘 생활이 지금까지의 생애 중에서 제일 기분 좋은 때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일 편하고 운동도 제일 많이 합니다』
 
  ―넥타이 맬 일이 일주일에 몇 번 정도 됩니까.
 
  『일주일에 하룹니다. 일요일에 서울 올라가 월요일에 한 번 딱 매고 오후에는 넥타이 풀고 내려옵니다』
 
  ―잔병은 없으십니까.
 
  『없습니다. 어쩌다 술을 과음하면 腸(장)이 탈 나죠. 이제는 술도 저울에 달아서 커피 잔으로 한 번에 석 잔 이상은 안 먹어요. 낮에 두 잔, 저녁에 자기 전에 석 잔, 밥 먹을 때 석 잔을 먹고, 담배는 안 피우고요. 늙지도 않는다는 소리를 더러 들어요』
 
 
 
 노래는 음치
 
   ―잠은 하루에 몇 시간 정도를….
 
  『저녁 아홉 시에 자고, 새벽 두 시경에 일어나 화장실에 한 번 갑니다. 다시 또 잠이 드는데, 금년에 들면서 완전히 달라요. 한번 깨면 잠이 안 옵니다』
 
  ―잠이 안 오면 뭘하십니까.
 
  『누워서 공상을 하지요. 버섯 생각, 메주 생각, 내일은 뭘 할까 하는 온갖 공상을 하다가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납니다』
 
  ―독서도 하십니까.
 
  『독서는 이제 틀렸어요. 눈이 침침하고 눈이 아파서 못 해요. 신문은 큰 돋보기를 가지고 읽지요』
 
  ―인터넷은 하십니까
 
  『株價나 좀 찾아보고 하지요』
 
  ―작년에 回婚禮(회혼례·결혼 60주년 기념잔치)를 가지셨죠. 몇 살에 결혼하셨습니까.
 
  『열여덟이죠. 징용가기 전에 어른들이 자식이나 보고 가라고 일찍 장가보냈지요. 영장 받을 때는 애가 하나 있었습니다. 큰놈(具本茂 회장)이죠』
 
  ―60년 동안 같이 살면 부부는 서로 닮는다고 하는데요.
 
  『오래 살았으니까 재미도 없고 그렇지요』
 
  ―어떤 친구보다도 가장 친밀하게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유일한 분이 부인 아닙니까.
 
  『나이가 드니까 여자는 자식 말만 들어요. 자식 비위 맞추지, 내 비위 맞추려는 생각을 안 해요』
 
  ―집에 와보니 회장님은 사치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집안도 수수하고 구두도 국산 같은데요.
 
  『기성화가 발에 맞고 편해요』
 
  ―지갑에는 평소 얼마쯤 넣고 다니십니까
 
  『카드하고 1만원짜리 댓(다섯 가량) 장, 100원짜리 몇 개 정도죠. 카드는 돈 1000만원쯤 쓸 수 있습니다』
 
  ―운전면허는 가지고 계십니까.
 
  『전에 가지고 있다가 한 번 사고 나서 없앴습니다』
 
  ―노래는 좋아하십니까.
 
  『피아노는 조금 쳤는데 노래는 전혀 안 되요. 음칩니다. 교사 시절에도 음악은 안 가르쳤어요. 사범대학 부속학교에는 노래 전공 선생이 있었기 때문에 노래할 생각을 전혀 안 했죠. 환갑 잔치 자리에서 나는 노래를 못 불렀어요. 칠순 때 가서 처음으로 노래 하나를 배워서 불렀어요. 「가는 세월」입니다. 喜壽(희수·77회 생일) 때는 「만남」이라는 노래를 하나 더 배워서 불렀어요』
 
  ―혈액형은 어떻게 됩니까.
 
  『B형입니다. 일제 시대 때는 엉터리로 조사해서 O형이었어요. B형은 사업이나 영업을 잘 한다고 이야기해요』
 
  ―요즘 어느 분야에 가장 관심이 많으십니까.
 
  『정치에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네요』●

입력 : 2019.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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