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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

못 해먹을 직업, 기자

[옛 잡지를 거닐다] 이서구의 <기자 시절> ①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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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잡지는 흥미롭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가득한 보물상자다. 먼지를 탈탈 털고 다시 읽으면 앞선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치열함과 마주할 수 있다. 지금 읽어도 진부하지 않고 새롭다. 잡지 필자 대개는 20세기를 활짝 불 밝혔던 문인(文人)들이어서 눈길이 더 간다. 앞으로 옛 잡지에 실린 보석 같은 글을 소개한다.

이서구(李瑞求, 1899년 4월 5일 ~ 1981년 5월 25일)는...
극작가이자 연극인, 작사가이다. 토월회 창립회원, 조선연극협회 회장, 방송작가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일본(니혼)대학 예술과에 입학하였으나 1922년 중퇴하였다. 1922년 5월부터 연극운동단체인 토월회 창립 동인으로 참여해 1926년 2월까지 활동하였다.

1924년 9월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동경(도쿄)특파원을 지내다가 1926년 5월 매일신보사 사사(司事)를 거쳐 10월 사회부장으로 승진해서 1929년 5월까지 재직하였다. 1927년 11월 최상덕, 최남선 등과 함께 문예잡지 『소년조선』을 창간하였고, 12월 이익상(李益相), 김기진(金基鎭), 안석주(安碩柱) 등과 함께 영화연구회 찬영회(讚映會) 조직하였다. 1929년 동양영화주식회사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전무를 역임하면서 이구영 감독의 「승방비곡」을 제작하는 등 대중예술계에서 활약하였다. 1940년 12월 22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통제하에 조직된 조선연극협회에서 회장으로 선임되면서 일제에 협력하기도 했다.

해방 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서울시청 공보실장으로 임명되었고 1949년 한국무대예술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1966년 방송인협회 이사장, 1974년 방송작가협회 이사장 등 방송계, 연극계, 영화계에서 두루 활동하였다. 1981년 5월 25일 사망하였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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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신태양》 1958년 5월호에 실린 이서구의 <기자 시절>

기자 시절
-못 해먹을 직업-
 
李瑞求
 
모조리 깡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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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구 선생.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3.1 독립운동에 가슴이 내려앉은 일인(日人)들은 어떻게든지, 달래서 가라앉혀 보려고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허여함으로써 소위 문화정책을 들고나오기는 했으나, 두시구멍으로는 까다로운 검열과 무지한 취체(取締·단속한다는 뜻-편집자)를 함부로 하고 있었다.
동아일보는 일주일에 한 번씩은 의례이 발매 금지를 당했고주필이나 편집국장은 하루가 멀다고 불려갔다.
당시 총독부경무국에는 우리말로 발행하는 신문을 검열하고자 한국말에 가장 익숙하다는 서촌진태랑(西村眞太郞)이라는 자를 통역관으로 임명하여 말 한마디 글 한 자씩 훑어보는 때이었던지라, 말로만 언론자유이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놈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소리가 독립만세였고 보기만 하면 이를 가는 것이 태극(太極) 무늬였다. 태극은 우리 국기에 씌워져 있으며 3.1운동 때 삼천리 강산에 물결치듯 했던 까닭이다.
어느 때, 안국동 네거리를 색병(色餠·색을 넣은 떡이나 절편-편집자) 담은 그릇을 머리에 이고 지나가는 여자가 있었다. 색떡이란 경사 때 축하하기 위하여 잔치상에 장식하는 화려한 떡으로 꽃도 있고 거북도 있고 안경집도 있고 태극 무늬를 놓은 석경도 있었다.
안국동 파출소를 지키는 순사 녀석이 색떡목판 위의 태극기 모양을 보더니 당장에 눈이 뒤집혀, 칼을 빼가지고 떡목판을 찔러 태극기 모양을 한 떡조각을 땅에 뭉기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이야말로 조상적부터 전해 오는 떡모양새로서 아무런 의미도 없으련만 놈들의 신경은 이렇게까지 날카로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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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8월 16일 자 《매일신보》 3면에 실린 서촌 통역관 관련 기사.

이 소문을 듣고 동아일보가 점잖게 있을 리 없어그날 3면 〈붓방아〉라는 단평(短評)에다가
“‘태극 무늬와 무슨 원수가 졌기에 모조리 깡그리 없애려는지 모르겠다.”
고 비웃었더니 그 이튿날 아침 서촌 통역관은 곧장 전화를 걸어
어저께 석간 붓방아〉는 누가 썼는가.”
편집국장이 썼다.”
그러면 있다 점심시간에 좀 만나자.”
전 같으면 당장 호출이 날 터인데 순순히 점심까지 같이 먹자는 수작에 놀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몽(何夢) 이상협(李相協)씨는 단평 잘 쓰기로는 천하에 독보하는 분이었다. 결국 서촌이는 이상협씨를 만나가지고 한다는 소리가
오늘은 사적으로 물어볼 말이 있어서 만나자고 했소.”
무슨 말이든지 물어보시오.”
내가 조선말 잘하기로는 일인들 중에서는 전중(田中) 군보다도 나은 편인데 꼭 한 가지 모르는 말이 있소.”
도대체 모조리라는 말은 알겠으나 깡그리란 무슨 말이요?”
고개를 숙이며 묻는 것이었다. 전중이라는 자는 궁중(宮中)에 드나드는 자로 능청스러운 말솜씨로 고종(高宗)을 일러대고 순종(純宗)을 달래는 흉악한 녀석이었다. (계속)
(출처= p 200~201, 《신태양》 1958년 5월호)

입력 : 2018.08.16

조회 : 2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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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도야 (2018-08-17)

    이모할머니의 시댁 조카셨던 이서구님의 라디오 드라마를 열심히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람입니다. 이모 할머니의 조카셨기에 홍도야 우지 마라-노래를 노래방에서 열심히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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