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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치

약소국 이념외교의 비극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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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계승범 지음, 푸른 역사 (2009)

한반도의 모든 역대 왕조들은 중국대륙의 왕조에 대해 사대(事大)를 했다. 중국의 왕조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다. 오늘날 자주적 대제국으로 포장된 고구려나 발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를 두고 일제(日帝)는 ‘사대성’을 주장했고, 단재 신채호 같은 민족주의 사학자들도 ‘사대주의’를 비판했다.
그런데 중국에 대한 사대의 정도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고구려나 신라는 중국과 전쟁도 불사했다. 고려는 후주-송(북송)-요(거란)-금(여진)-원(몽골)-명으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대의 대상을 바꾸었다. 고려말에는 친원파와 친명파의 대립이 있었다. 이는 고려에 사대의 대상을 놓고 이견이 존재할 수 있을 만큼 이 문제는 ‘상대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던 것이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사대는 ‘절대적’인 것이 된다. 명-청 교체기에는 망해가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고집하다가 정묘-병자호란을 불러들이고, 명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대보단과 만동묘를 세워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계속할 정도로 말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에 중국(명,청)의 파병 요청에 대해 조선이 어떻게 반응했나를 놓고, 조선시대의 사대정책의 추이를 살펴보는 책이다.
저자가 대상으로 삼은 조선시대 중국의 파병요청은 15번에 달한다. 세종 때(몽골과의 전쟁),세조 (건주여진 정벌), 성종 때 (건주여진 정벌), 중종 (건주여진 정벌), 광해군 때 (3회.후금과의 전쟁), 인조 때 (6회. 명과의 전쟁/여진 반군 토벌), 효종 때(2회. 나선정벌) 등.
광해군 시절 명나라의 요청에 의한 파병을 제외하면, 대개는 대규모 전쟁이라기보다는 경찰행동 수준의 작은 작전이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응이 시대에 따라 크게 차이 난다.

세종 때 명은 몽골과의 전쟁에 조선군 파병을 요청하지만, 조선은 이를 거절한다. 이때 명-몽골 전쟁은 명의 정통제(영종)이 이끌던 50만 대군이 북경 외곽에서 궤멸되고 황제가 몽골의 포로가 되는 큰 사변이었다 (토목보의 변). 
<조선왕조실록> 등에 의하면 세종은 명에 대한 사대의 예를 게을리 하지 않은 군주였다. 그런데도 당시 조선 조정은 “우리 땅이나 열심히 지키겠습니다”라면서 파병을 외면했다. 내부적으로는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고려가 요나라(거란)와 그랬듯이 한판 싸워 이겨서 우리의 실력을 보여준 후 강화를 맺으면 된다’는 논의가 오고 간다.
세조 때 명은 건주여진을 정벌하기 위해 파병하라는 요구를 해 온다. 세조는 신속하게 파병해 여진 부락들을 토벌한다. 이는 이미 세조에게 여진 토벌 계획과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종 때에는 병력을 보내 약간 명의 여진 포로를 잡아 명에 넘기는 ‘무늬만 파병’을 한다.
그때그때 대응은 달랐지만, 이때까지 조선의 판단 기준은 ‘국익’이었다. 중국(명)이 ‘대국(大國)’이니까 사대를 하긴 하지만, 파병이라는 중대한 국익이 달린 문제에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한 가를 요모조모로 따졌다.

그러던 것이 중중 때가 되면 달라진다. 명의 지방관이 조정에 여진 토벌 작전을 건의했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중종은 바로 명의 요청이 올 경우 즉각 파병할 수 있도록 만반의 대비를 갖추라고 지시한다. 조정 신하들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에 따른다. 명의 정식 파병 요청이 없어서 이 일은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지만, 이는 앞서 성종 때에 비해 50년 사이에 조선 임금과 신하들의 의식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가장 큰 변화는 이 시기에 이르러 ‘주자학 유일사상 체계’가 뿌리를 내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조선 건국 이래 100년이 지나면서 드디어 주자학(성리학)이 ‘국교(國敎)’ 수준으로 뿌리를 내린 것이다. 여기에 더해 반정(反正)공신들에게 업혀서 왕이 된 중종은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중국(명)의 인정(認定)에 집착했다. 종래 논란이 됐던 중국 사신을 맞을 때의 의전(프로토콜)문제에 대해서도 중국측 주장을 전면 수용했고, 시도 때도 없이 핑계거리만 있으면 중국에 사신을 보내 ‘사대의 정성’을 보이려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은 단순한 ‘대국’이 아니라 ‘상국(上國)’이 됐다. 명-조선 관계는 군신(君臣)관계를 넘어 부자(父子)관계가 됐다. 명을 ‘군부(君父)의 나라’라고 부르는 것이 일상화됐다.
대국은 또 다른 대국이 나타나면 바꿀 수도 있다. 하지만 상국은 그렇지 않다. 군신관계도 일종의 계약관계이니 만큼 사정이 변하면 섬기는 대상이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부자관계는 천지가 뒤집혀도 바꿀 수 없는 ‘천륜’이다. 
이때에 이르면 ‘사대’는 ‘절대이념’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는 ‘주자학 유일사상 체계’의 심화라는 문화-이념적인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대를 통한 왕권의 유지-강화라는 국내 정치적 수요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사대를 한 것이 헛되지는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부의 나라’에서 군대를 보내 왜적을 물리쳐 주신 것이다. 이제 조선은 다 망한 나라가 명 덕분에 다시 살아난 은혜(再造之恩)을 입은 것이다. 사대이념은 더욱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명이 쇠락하고 여진(후금, 청)이 일어나는 데도 그게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누르하치를 치기 위한 파병요청이 들어오자 조선 조정은 일치단결해 그에 응하려 했다. 이에 반대한 것은 임금인 광해군 한 사람이었다. 그러자 조정 신료들은 한 목소리로 광해군을 비판한다. 광해군이 계속 미적거리자 신료들은 업무를 거부하는 등 사보타주를 했다. 여기에는 여야(與野)가 따로 없었다. 당시 야당세력이었던 서인이나 남인은 물론 최측근이었던 북인의 이이첨 같은 이도 광해군을 비판했다. 광해군은 결국 강홍립에게 1만 3000명의 병력을 주어 파병하지만 조-명 연합군은 후금에게 대패하고 강홍립은 포로가 됐다.
이후에도 광해군과 신료들의 대립은 계속됐다. 신료들은 “전하에게 득죄(得罪)할 지언정 천조(天朝)에는 득죄할 수 없다”며 광해군에게 대들었다. 그 결과가 인조반정이었다. 5.16이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한다’는 것을 첫머리에 내걸었다면, 인조반정은 광해군이 ‘명에 대한 사대를 게을리했다’는 것을 거사의 가장 큰 명분으로 삼았다.

이후 인조정권이 친명 일변도의 외교정책을 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정묘-병자호란이었다. 특히 병자호란의 결과, 인조는 청에 치욕적인 항복을 해야 했다. 이제 강요에 의해 조선은 사대의 대상을 바꾸어야 했다. 
이후 청은 명을 치기 위한 크고 작은 전쟁에 조선의 파병을 요구했다. 이는 조선이 청의 종주권을 인정하느냐 여부를 판단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이에 대해 조선은 또 미적거린다. 언제 병자호란을 치렀느냐는 듯, 청의 파병요구를 거절하라는 상소가 빗발치곤 했다. 
인조나 조정신료들, 재야의 선비들은 청에 잡혀간 백성들을 송환하는 문제나 청에 각종 공물을 바치는 문제보다, 파병 요청에 더 고뇌했다.
그건 당연했다. 명을 치기 위한 전쟁에 군대를 보내는 것은 자식이 부모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과 다름없는 패륜행위였기 때문이다. 대명작전에 대한 파병요청이 있을 때마다 조선은 “그것만은 면하게 해 달라”고 애원하다가, 청의 직책을 받곤 했다. 임경업이 후일 조정으로부터 후하게 예우를 받고, 백성들 사이에서는 신격화된 것은, 그가 그런 상황에서도 목숨을 걸고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 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조선은 동해의 섬으로 숨어든 여진의 반란분자를 소탕하거나, 북만주에 출현한 러시아인들을 축출하기 위한 파병요청에 대해서는 큰 부담 없이 응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조선에 대한 청의 압박은 덜해졌다. 조선은 계속해서 청에 대한 사대를 했지만, 명에 대한 것과는 달랐다. 명은 문명세계의 중심으로 조선이 마음에서부터 따라야 할 모델이었지만, 청은 그렇지 않았다. 조선인들의 마음속에 청은 오랑캐일 뿐이었다. 명은 ‘상국’이었지만, 청은 ‘대국’에 불과했다. 명나라 시절 북경으로 가는 사신을 ‘천조사(天朝使)’라고 통칭하다가 청나라 때는 ‘연행사(燕行使)’로 부르게 된 것은 그런 의식의 반영이었다.
문제는 ‘사대’의 대상을 바꾸면서 일어나게 된 의식의 혼란이었다. 청의 무력에 굴복해서였다고는 하지만, 부모의 나라 명을 버렸다는 자괴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건 도덕의 문제(조선의 위정자들에게는 이게 제일 중요했다!)이기도 했지만, 현실 정치적인 문제도 있었다. 사정이 달라졌다고,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임금이 부모를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경우에 따라서는 신하와 백성들이 임금인 자신을 버리는 사태가 발생해도 할 말이 없었다. 조선의 정치체제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조선중화사상’은 바로 그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보단과 만동묘를 세우고, 비공식적으로는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을 사용하면서, ‘군부의 나라’인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나갔다. ‘대국’인 청은 정치-외교적인 사대의 대상이기는 했지만, 중화문명의 정수(精髓)는 이제 조선이라는 자부심을 키워갔다. 1980년대 이후 일부 국사학자들이 그렇게 치켜 올린 조선중화사상은 민족에 대한 자부심의 소산이 아니라, 대명사대주의의 찌꺼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 눈으로는 세계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조선이 19세기 중반 이후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 흐름을 놓치고 결국 망국의 비운을 맛보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떠올랐다. 이 책은 ‘현실’이 아닌 ‘이념’에 바탕을 둔 ‘외교’가 어떤 파국을 불러오는 지를 잘 보여준다. 중종 이후 조선의 사대외교는 ‘주자학 유일사상 체계’와 국내 정치적 필요에 기초한 이념과잉 외교였다. 현실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그에 따라 국익을 최대화하려던 전 시대의 노력은 사라지고, ‘절대 사대’라는 이념이 외교를 지배했다. 그 결과는 삼전도의 치욕이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조선은 변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1910년의 경술국치였다.
저자는 명나라와 미국, 조선과 대한민국을 등치시키는 의식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그런 인식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중종과 인조, 그리고 그 신료들의 행태에서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권의 모습을 본다. 노무현 정권은 ‘동북아 균형자론’을 주장했었다. 문재인 정권은 미국에게는 ‘한국이 남북관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고 주장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우리의 역사인식에 따라오라고 강요하고 있다. 대통령 외교안보특보라는 사람은 미국 대통령의 언동을 꾸짖기까지 한다.
이 모두가 국내 정치적 필요에 따라, 현실보다 이념, 실제보다 관념을 앞세우다 보니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념외교’의 결과 인조는 자기가 오랑캐라고 깔보던 청나라 황제 앞에 3배 9고두의 예를 행하고 항복했고, 수십만명의 백성들이 노예로 끌려갔다. 지금 문재인 정권의 ‘이념외교’ 앞에는, 아니 대한민국 앞에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입력 : 2017.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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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 ‘어제 오늘 내일’

ironheel@chosun.com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습니다. 2000년부터 〈월간조선〉기자로 일하면서 주로 한국현대사나 우리 사회의 이념갈등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써 왔습니다. 지난 7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내용을 어떻게 채워나가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2012년 조국과 자유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45권의 책을 소개하는 〈책으로 세상읽기〉를 펴냈습니다. 공저한 책으로 〈억지와 위선〉 〈이승만깨기; 이승만에 씌워진 7가지 누명〉 〈시간을 달리는 남자〉lt;박정희 바로보기gt;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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