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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

<기생충>의 봉준호 외조부는 1934년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쓴 박태원

봉준호는 박태원 둘째 딸 소영씨의 2남2녀 중 막내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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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의 차남 재영씨는 “조카이자 아버지의 외손주인 봉준호 감독에게 ‘외할아버지의 삶과 문학을 영화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해 두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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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모던보이' 박태원과 말년의 박태원.
 
 
⊙ 박태원은 북한에서 최고의 대하 역사소설가
⊙ 박태원의 5남매 중 맏딸 雪英은 북한에 생존… 평양기계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해
⊙ 둘째 小英의 남편은 국내 디자인 1세대 봉상균… 외손자가 영화감독 봉준호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최고상’인 작품상을 수상했다. 또 각본상, 외국어영화상인 ‘국제장편영화상’, 감독상 등 4관왕의 영예를 받았다.
 
세계를 놀라게 한 봉준호 감독의 재능과 함께 그의 외조부인 구보(仇甫) 박태원(朴泰遠·1910~1986)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박태원은 아내 김정애(金貞愛)와 사이에 2남3녀를 낳았다. 맏딸 설영(雪英·1936~), 둘째딸 소영(小英·1937~)을 비롯해 장남 일영(一英·1939~), 차남 재영(再英·1942~), 막내딸 은영(恩英·1947~)씨다.
 
박태원의 아내 김정애는 1930년 숙명여고를 1등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동아일보》 1930년 3월 14일자 기사에 수석 졸업 기사가 났었다.
 
봉준호는 박태원의 둘째 딸 소영씨의 2남2녀 중 막내다.

봉준호의 아버지 봉상균(전 한국디자인트렌드협회장)씨는 국내 그래픽디자이너 1세대로 통하는 인물이다.
장남 봉준수는 서울대 영문과 교수, 둘째 봉지희는 안양과학대 패션스타일리스트학과 교수다. 셋째 봉지영은 주부, 넷째는 영화 〈괴물〉 〈살인의 추억〉 〈설국열차〉를 만든 영화감독 봉준호다.
박태원의 차남 재영씨는 “조카이자 아버지의 외손주인 봉준호 감독에게 ‘외할아버지의 삶과 문학을 영화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해 두었다”고 말했다.
 
다음은 《월간조선》 2015년 10월호 <문인의 遺産, 가족 이야기 〈10〉 소설가 朴泰遠의 후손들>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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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遺産, 가족 이야기 〈10〉 소설가 朴泰遠의 후손들

 
“한때 아버지 仇甫의 이름은 박○원이나 박태×”

소설가 박태원의 아들 재영씨.
〈천변풍경〉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쓴 구보(仇甫) 박태원(朴泰遠·1910~1986)은 작가 이상(李箱)과 함께 1930년대 한국문단에서 모더니즘의 문을 활짝 연 인물이다. 일제가 프로문학을 탄압하던 시절, 언어의 회화성과 시각적 이미지를 강조한 모더니즘 사조는 암울한 식민지 현실을 묘사하는 새로운 창작방식이었다.

  유학파 출신(일본 법정대학 예과 2학년 중퇴)인 박태원은 ‘대모테 안경에 갑빠 머리를 한 멋쟁이 모던보이’였다고 알려져 있다. 바다거북인 ‘대모(玳瑁)’ 등딱지로 만든 안경테가 대모테 안경이다. ‘갑빠’는 일본의 민간설화에 등장하는 더벅머리 스타일의 짓궂은 동물. 대모 안경과 갑빠 머리는 1930년대 경성과 도쿄 멋쟁이만 도전할 수 있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독특하고 치렁치렁한’ 그의 만연체 문장 역시 기교 면에서 최고로 불렸다. 쉼표로 연결해 빠르게 전개되는 ‘장거리 문장’의 속도감이 일품이었다.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은 그를 ‘선각한 스타일리스트’라고 했을 정도. 상허는 “심리고, 사건이고 무어든 한 번 이 문자에 걸리기만 하면 일사(一絲)를 가리지 못하고 적나하게 노출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6·25 당시 월북을 택해 1988년 해금(解禁)조치 이전까지 그의 이름은 금기어였다. 해금 이후 박태원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북한에서 박태원은 더 이상 〈천변풍경〉으로 알려진 모더니즘 작가가 아니었다. 그는 북한에서 최고의 역사소설가로 평가받고 있었다. 전기적(傳記的) 연구를 통해 박태원이 사망(1986년 7월 10일)하는 순간까지 3부작 대하소설 《갑오농민전쟁》의 집필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고 그 후 국내에 정식 출판되기에 이른다. 박태원은 ‘북한에서 작가로서의 자기 삶을 마감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광운대 조영복 교수) 월북 작가였다.
 
  기자는 지난 7월 31일 박태원의 차남 재영(再英·74)씨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만났다. 낡고 빛바랜 옛 신문과 잡지를 뒤지며 아버지 흔적을 더듬는 일은 그에게 일생의 과업이 되었다. 그는 구보 작품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전업 작가였던 박태원은 여러 매체에 작품을 발표했는데, 시와 소설, 수필을 포함해 그 수가 350~400여 편으로 추정된다.
  
 
한때 ‘박○원’이나 ‘박태×’으로
박태원은 초등학교 교사인 김정애와 1934년 10월 27일 결혼했다.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끝낸 직후다.
  사실 박태원이 월북하리라고는 당대 문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개화파 집안에서 태어나 ‘경아리(서울) 문학’을 하던 댄디보이는 누가 봐도 마르크시즘(Marxism)이나 프로문학과 거리가 멀었다. 월북 동기가 흐릿하게 감춰진 채 오랫동안 그의 작품은 자물쇠로 채워져야 했다. 책을 읽고 싶어도 ‘금대출(禁貸出)’에 묶였다. 재영씨의 말이다.
 
  “과거엔 국립도서관 등지에서 아버지의 책 목록을 찾으면 항상 금대출이라는 오랏줄이 묶여 있었어요. 간혹 활자화된 작품도 저자 이름이 ‘박○원’이나 ‘박태×’로 적혔어요. 아버지 이름이 마치 쥐가 뜯어 먹은 것 같이 한 글자씩 빠졌던 것이죠.
 
  해금이 되고 본격적으로 아버지 작품을 찾았어요. 해방 전 신문과 작품은 대개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돼 있는데 간단한 작업이 아니었어요. 원본이 훼손됐거나 필름으로는 보이지만 프린터로 출력하면 안 보이는 경우도 많이 있어요. 출력한 자료와 마이크로필름을 대조해야 했는데 그 작업이 고되었어요. 또 어렵게 복사한 자료도 시간이 지나면 다 지워져 버려요. 지금까지 복사비로 든 돈이 몇 천만 원에 이르지만, 모든 자료는 마치 아버지를 다시 만난 것 같이 반가웠고, 늘 함께 계신 것 같이 느껴지곤 했어요.”

  —찾는 과정이 그렇게 어려웠나요.

  “작품이 어디에 있다는 정보를 얻고도 실제 입수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어요. 아버지가 북에서 쓰신 《리순신 장군전》(1952년 출간)이라는 소설집이 있는데, 이 책이 하버드대 옌칭도서관에 있다는 걸 2010년 4월 우연히 알았어요. 여러 경로로 수소문하다가 결국 북일리노이주립대(Northern Illinois Univ.) 김영식 교수의 도움으로 1년 만에 볼 수 있었죠. 김 교수는 아버지와 이상·이태준·이효석·김유정 등이 참여했던 구인회(九人會) 마지막 멤버인 문학평론가 김환태(金煥泰)의 아들입니다.
 
  2009년에는 중국 베이징도서관에 있던 《심청전》(1958) 《리순신장군 이야기》(1955) 《그림책 갑오농민전쟁》(1960)을 지인의 도움으로 복사해 국제특송으로 가져오는 과정에 말썽이 생긴 일도 있어요. 북한 서적이란 이유로 책들이 국정원으로 갔다가 통일부 추천을 받고서 겨우 제 손에 들어올 수 있었죠.”
 
  —아직 실체를 확인 못한 작품이 있나요.
 
  “1955년 북쪽에서 출판하신 《정수동 일화집》과 《야담집》은 아직 어느 곳에서도 찾지를 못했습니다.”
 
 
  박태원 全集 발간 마무리 단계
 
젊은 시절 ‘모던 보이’ 박태원(왼쪽)과 말년의 박태원.
  그는 남북한에서 발표된 아버지의 모든 작품을 전집으로 발간할 꿈을 갖고 있다. 이 꿈이 현실화할 날도 멀지 않았다. 박태원의 단편소설 〈채가(債家)〉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글 쓰는 것밖에 다른 재주가 없었으므로 아내의 눈에 딱하게, 민망하게, 또 가엾기까지 보이도록, 나는 나의 힘이 미치는 데까지 밤낮으로 붓을 달렸다’라고. 재영씨의 말이다.
 
  “전집 출판은 1988년 해금되어 깊은샘 출판사에서 간행했고, 나머지 작품은 현재 문학과지성사에서 준비 중입니다. 평전은 성신여대 김명석 교수(국문학)가 집필하고 있어요. 내년쯤 출간을 위해 부지런히 자료를 제공하고 있어요.”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역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입니다. 아버지 대표작 중 하나이고, 여전히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작품이죠. 시대가 변하면서 구보라는 이름은 고유명사에서 보통명사로 바뀌어 작가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사용하게 됐어요. 그 작품으로 연극 공연을 여러 번 했고, ‘소설가 구보 따라 서울걷기 행사’도 열려 제가 직접 해설사로 참여한 일도 있어요. 1930년대 경성(京城)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종로에서 광교·서울시청·소공동·남대문·서울역까지를 2시간 이상 걸었지만 참가자 모두 밝은 얼굴로 즐거워할 때 행복감을 느꼈어요.
 
  또 아버지 작품 중 〈채가〉에 나오는 큰누나 박설영(朴雪英)의 ‘유치원 입학 면접시험’ 대목이 재미있어요.”
 
  〈채가〉는 1941년 4월 《문장》지에 실렸다. 작품 말미에 ‘자화상 제3화’로 표기되어 있다. 꼼꼼한 작가적 관찰력과 가족애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기자가 생각하는 ‘가장 빛나는’ 구절을 짧게 인용하면 이렇다.
 
 
〈… 하룻밤만 자면, 우리 설영이가 유치원에를 가는 날이라, 그래, 우리는 그날 아이를 데리고 백화점을 찾아가서, 가난한 아비의 넉넉지 않은 예산으로는 그것은, 분명히 신중한 고려를 필요로 하는 정도의 지출이었으나, 기위, 있는 집 자녀들 틈에다 우리 딸을 보내는 바에는, 결코 그 행색이 너무나 초라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라, 양복에 구두에 마에까께(짧은 앞치마), 사루마다(팬츠, 잠방이를 그 당시에는 그렇게 불렀음), 카바(덧양말)는 아직도 성한 놈이 집에 있건만, 그것도 새로이 한 켤레를 사고 나니, 낭중(囊中)에는 남은 돈이 그 얼마가 못 되어도, 어린 딸의 두 눈이 자못 자랑스레 빛나는 것을 보고는, 가난한 아비는 가난한 까닭으로 하여, 좀 더 그 마음이 애달프게 기뻤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설영이를 보고 말하였다.
 
  “너, 아버지가 돈 마아니(많이) 들여서, 존 거 마아니 사주셌는데(사주셨는데), 동생 소영(小英)이두 안 사주시구, 일영(一英)이두 안 사주시구, 똑 너 하나만 그렇게 사주셌는데, 낼, 너, 유치원에 가서 선생님이 물어보시는 거, 대답, 썩 잘해야 헌다. 응? 알었지?”
 
박재영씨는 큰누나 설영씨를 2006년 6월 19일부터 3일간 금강산에서 열렸던 남북이산가족 제14차 행사 때 만났다.
  설영이는 결코 우리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 발을 재게 놀리어 언덕을 올라가며, 명쾌하게 대답하였다.
 
  “응.”
 
  아내는 다시 말하였다.
 
  “너 대답 잘못해서 유치원에 못 들어가면, 오늘 산 양복, 구두, 마에까께, 모두, 넌 안 줄 테니 그런 줄 알어라, 응!”
 
  “안 주면, 그럼 누구 줘?”
 
  “누구 줘, 소영이 주지.”
 
  “소영이가, 나버더(나보다) 쪼끄만게, 커서, 그거 맞나?
 
  “안 맞어두 그냥 두지.”
 
  “무얼, 부러 그러지.”
 
  설영이는 우선 한마디 하고, 그래도 약간 의아스러이, 엄마의 얼굴을 흘깃흘깃 쳐다보다가,
 
  “조것 봐, 엄마가 부러 그러지. 웃는 거 보면, 난, 다 알어, 다 알어.”
 
  하고 야살을 떨어, 우리는 잠깐 얼굴을 마주 바라보며 웃었다.
 
  그러나 아내는 다시 정색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얼른 선생님이 되어 가지고 물었다.
 
  “이름이 뭣이냐?”
 
  “설영이에요.”
 
  설영이는 서슴지 않고 대답하였다. 그도 이제는 선생님의 구두시문(口頭試問)에는 익숙하였던 것이다.
 
  “너 몇 살이냐?”
 
  “여섯 살이에요.”
 
  “저어, 아버지는 뭘 하시지?”
 
  “소설가세요.”
 
  아내는 잠깐, ‘선생님’이 아니라, ‘엄마’로서 한마디하였다.
 
  “소설가세요, 그래두 좋고…. 또 소설 쓰세요, 그래두 좋구….”(이하 생략)〉
 
 
  맏딸 雪英은 북한에서 영문과 교수로 재직
 
박태원의 아내 김정애는 1930년 숙명여고를 1등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동아일보》 1930년 3월 14일 자에 수석 졸업 기사가 났다.
  박태원은 아내 김정애(金貞愛)와 사이에 2남3녀를 낳았다. 소설 〈채가〉에 등장하는 맏딸 설영(雪英·1936~), 둘째딸 소영(小英·1937~)을 비롯해 장남 일영(一英·1939~), 차남 재영(再英·1942~), 막내딸 은영(恩英·1947~)씨다.
 
  맏딸 설영은 현재 북한에 살고 있다. 6·25 당시 서울 풍문여중 2학년이었던 그녀는 인민군 야전병원에서 부역하다 북으로 갔다. 지난 2006년 금강산에서 열린 제14차 이산가족 상봉 때 설영은 동생들과 만났다. 그녀는 평양기계대학 영문과 교수로 재직했고 현재 평양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눈 오는 날 태어난 ‘설영’은 박태원의 작품 속에 여러번 실명(實名)으로 등장한다. 〈채가〉에서처럼 〈투도〉, 〈재운〉 등의 작품 속 꼬맹이 설영은 이가 다 썩었는데도 치과 가기 싫다고 떼쓰며, 동생 소영과 과자를 놓고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재영씨의 말이다.
 
  “아버지가 큰누나는 눈 오는 날 낳았다고 해서 설영이라 지었고, 둘째는 작을 소(小) 자를 넣어 작은누나를 소영이라 불렀어요. 첫째 아들이라서 한 일(一) 자를 넣어 일영, 아들 둘이라고 해서 두 재(再)자를 넣어 재영, 막내는 은영이라 했습니다. 족보상의 항렬이 ‘장사 상(商)’인데 그 글자가 아버지가 사농공상(士農工商) 중 맨 꼬라비(마지막)라 싫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개화된 세상에선 항렬 같은 것은 안 따라도 된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셨는지 모르겠어요. 자식들 출생신고도 음력 대신 양력으로 올렸고, 큰누나는 출생 후 12일, 작은누나는 10일, 형은 첫아들이라 더 기뻐서 그랬는지 낳고 5일 만에 호적에 올렸더라고요. 저요? 저도 아들이라서 그랬는지, 6일 만에 올렸죠. 막내는 두 달이 지나서 올렸는데 그 이유를 추론해 보니 아버지가 당시 〈홍길동전〉을 쓰실 때 태어났는데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어서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박태원의 동생인 화가 문원이 《천변풍경》(1947년 간행)의 장정을 맡았다.
  —북한에서 설영씨는 어떻게 살았나요.
 
  “큰누나 설영은 월북한 아버지와 함께 살았고, 평양기계대학 영문과 교수로 재직했다고 합니다. 음악대학 교수이자 테너가수인 남편과의 사이에 아들 하나, 딸 넷을 두었어요. 소진, 은선, 순미, 유진, 은주라고 아버지(아이들에게는 외할아버지)가 이름을 지었다는데, 이름 끝 자를 모두 모으면 ‘진선미 진주’가 됩니다. 또 남쪽에 두고 간 딸들이 그리워, 손녀딸 이름에 둘째 소영의 ‘소’ 자를, 그리고 막내 은영의 ‘은’ 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대요. 다섯 자식들은 모두 결혼해 (박태원의) 손자손녀가 10명이나 됩니다.”
 
  설영보다 한 해 늦게 태어난 둘째 소영은 1961년 결혼해 2남2녀를 낳았다. 그녀의 남편은 국내 그래픽디자이너 1세대로 통하는 봉상균(전 한국디자인트렌드협회장)씨. 장남 봉준수는 서울대 영문과 교수, 둘째 봉지희는 안양과학대 패션스타일리스트학과 교수다. 셋째 봉지영은 주부, 넷째는 영화 〈괴물〉 〈살인의 추억〉 〈설국열차〉를 만든 영화감독 봉준호다. 재영씨는 “조카이자 아버지의 외손주인 봉준호 감독에게 ‘외할아버지의 삶과 문학을 영화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해 두었다”고 귀띔했다.
 
  구보의 장남 일영은 서울대 수학과를 나와 출판사인 정음사 편집장으로 7~8년간 일하다 1969년 미국 이민을 떠났다. 편집장 시절, 셰익스피어 전집을 간행했다고 한다. 미국 버지니아주에 정착, 치과기공 일을 했고 나중 워싱턴D.C. 한국학교 교장을 지냈다고 한다. 한국어 잡지 《사슴》을 발간하기도 했다. 슬하에 딸 둘을 뒀는데 둘째가 워싱턴에서 동물보호 운동을 하고 있다.
 
북한에서 미술가로 활동 중인 박문원의 장남 철호가 쓴 붓글씨.
  넷째 재영은 서울대 농경제학과를 재수해 1963년에 입학했다. “형과 함께 의사가 되려고 이과를 택했으나 두 사람 모두 색약으로 판정이 나서 포기했다”고 한다. 그는 이런 농담을 꺼냈다.
 
  “대학에 한 번 만에 입학 못하고 재수한 것은 아버지가 지어 주신 이름에 ‘두 재(再)’ 자가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살면서 1등보다 2등을 더 많이 했고, 반장도 했지만 부반장이 더 많았어요. 하하하.”
 
  그는 한국산 잡화(雜貨)를 해외로 수출하는 무역업에 종사했다. 슬하에 딸 하나를 뒀다.
 
  “제 딸이 국악(해금)을 전공했어요. 아버지도 총각 때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노래도 잘하셨다고 합니다. 그 피를 물려받은 게 아닐까 생각해요. 소설가 최정희(崔貞熙·1912~1990)가 쓴 글에 ‘박태원은 늘 자신이 노래를 잘하며 또 노래를 많이 알고 있노라 자랑을 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어느 날 두 분이 노래대결을 했다고 해요. 아버지가 부르면, 최정희 선생도 부르는 식으로 수 시간 동안 불렀는데 아버지가 졌다고 합니다. 어디까지나 최 선생의 일방적 기억임을 감안해야 합니다. 아버지라면 다르게 말씀하실 수 있겠죠.(웃음) 아버지는 노래가 딸리기 시작하자 ‘엄복동(1920~30년대 유명한 사이클 선수)이야, 조수만이야’ 하고 소리쳤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노래냐’고 하니까 아버지가 ‘장충단 공원에서 엄복동이와 조수만이가 자전거 경주할 때 부르는 응원가’라고 대꾸하면서 하늘을 향해 크게 웃었다고 해요. 심지어 경기고보 다니실 때 들었던 교장 선생님의 훈시에다 곡을 붙여 불렀다는 겁니다. 결국 아버지가 노래대결에서 져서 최 선생에게 ‘모리낭아’ 다과점에서 푸딩을 사 주었다고 해요.”
 
  박태원의 막내인 다섯째 은영은 슬하에 자식이 없다고 한다.
 
 
  비 새던 돈암동 집과 성북동 草家의 추억
 
1956년 서울 이화동집에서 찍은 가족사진. 왼쪽부터 장남 일영, 차녀 소영, 박태원의 아내 김정애. 앞줄은 삼녀 은영. 동그랗게 추가한 사진은 1969년 박태원과 1990년 장녀 설영.
  재영씨에게 유년 시절,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들려 달라고 부탁했다.
 
  “1940년 돈암동 487-2번지에 집터를 마련한 아버지는 손수 기와집을 멋지게 지었어요. 마당이 넓어 누나·형과 함께 숨바꼭질하던 기억이 납니다. 여섯 살 때까지 그 집에서 살았는데, 아버지는 잠시 동네 반장을 맡기도 하셨죠. 동네 사람들이 모여 방공연습을 했던 것과 때때로 곰팡이가 핀 건빵을 배급 받던 기억이 나요.”
 
  재영씨에 따르면, 돈암동 집은 새로 지어 넓고 좋았지만 비가 오면 지붕이 새서 양동이를 갖다 놓기 바빴다고 한다. “어머니(김정애)는 내다버릴 새도 없이 차 오른 물그릇을 치우며 흘러넘친 빗물을 연방 훔치셨고, 아버지는 물이 안 떨어지는 한쪽 구석에서 《조광》에 연재하던 〈수호전〉을 쓰시던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다.
 
  여름이면 기왓장이 골치를 썩이고 겨울이면 난방이 제대로 안 되고 외풍도 심했다. 심지어 도둑까지 들어 결국 돈암동에서 성북동 230번지로 이사를 가게 된다. 성북동 집은 초가(草家)였다. 재영씨는 “마루 뒷문을 열면 뒷동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아주 시원했다. 집 뒤에는 작은 폭포가 있고, 매미 우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마당에는 앵두나무·복숭아나무가 여러 그루 있어 복숭아와 앵두를 따서 손님들에게 대접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가끔 식구들이 둘러앉아 직접 딴 과일을 먹을 때면 어머니는 아버지 원고를 읽어 주시고 누나나 형은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곤 했어요. 어떤 때는 막 재미있어지려는데 그날 연재분이 끝나 누나들이 아버지에게 ‘주인공이 어떻게 되느냐’고 묻기도 했어요. 그때마다 아버지는 ‘그야 나도 모르지. 내일이 되어야 알 수 있는 거란다’고 하시며 웃으셨어요.”
 
  —성북동 집은 현재 어떻게 바뀌었나요.
 
  “그곳은 가로(街路)공원이 되어 만해선생 좌상이 세워졌어요. ‘만해의 산책공원’이라는 간판을 걸어 놓은 곳이 우리 집터죠. 집은 기역(ㄱ) 자인데 뒷간엘 가려면 집 뒤로 빙 돌아야 했기에 날이 조금만 어두워도 형이 무서워했어요. 형이 무서워 뒷간에 못 갈 때면 아버지는 꼭 저더러 ‘형과 함께 뒷간에 다녀오면, 다음에 기뜨기를 사 주마’고 말씀하셨죠. 그 당시엔 과연 ‘기뜨기’가 무얼까 궁금했어요. 아버지에게 여쭈면, ‘그거? 아주 좋은 거’라고만 하셨는데, 결국 사 주지 않고 북으로 가 버리셨습니다. 제가 좀 더 커서 ‘기뜨기’가 ‘기특하다’의 명사형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어요. 성실하게 기뜩(기특)한 일을 많이 하면 살아감에 도움될 거란 뜻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구나, 하고 해석했어요.”
 
  —가훈이 있었나요.
 
  “‘성실’이 가훈이라 할 수 있지만, 이것이 가훈이라고 일부러 강조하신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5남매 모두 학교 다닐 때 성실하여 모범생으로 1~2등을 다투었고, 지금도 성실하게 살아가는 걸 보면, 역시 성실이 가훈인 것 같습니다.”
 
  그는 “성북동 집 이야기를 하다 보니, 빼놓을 수 없는 얘기가 있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1947년 9월 백양당 출판사에서 나온 《약산과 의렬단》이란 아버지 작품이 있어요. 독립투사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 선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배정국 사장의 부탁으로, 아버지가 직접 김원봉을 만나 인터뷰하고 역사자료를 모두 조사해 쓴 작품인데 인세로, 성북동 집을 배 사장이 주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운치 있는 집을 만들려고 싸리 울타리를 치고, 대문도 싸리문으로 만들었어요. 당시 성북동에 ‘싸리로 울타리를 친 집’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집이었답니다.
 
  명의이전을 하지 않고 살다가 6·25 때 그 집이 배 사장 친척들 손에 넘어가고 말았어요. 아버지나 배 사장과 그 가족 모두 월북했기에 호소할 길이 없었어요. 어머니 역시 9·28 서울 수복 직후 수감돼 항의도 못하고 집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평생 남편을 기다린 아내 김정애
 
1969년 12월 7일 평양에서 찍은 박태원의 환갑 당시 사진. 앞줄 왼쪽부터 박태원의 여동생 경원(1927~2004), 북한에서 재혼한 아내 권영희(1913~2002), 구보, 남동생 박문원(1920~1973), 제수 최학신. 둘째줄 왼쪽부터 구보의 의붓딸 태선과 태은, 태선의 남편 강시종(1930~1983). 셋째줄 왼쪽부터 장조카 박상건(1929~1979), 장조카 며느리, 손녀, 큰딸 박설영(1936~).
  —어머니 얘기를 들려주세요.
 
  “아버지의 고모 박용일(朴容日)은 신교육을 받은 인텔리 여성이었고 경기여고 교사였다고 합니다.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의 부인 허영숙과도 가까운 사이였다고 해요. 어느 날, 숙명여고 졸업반 연극을 아버지가 고모와 함께 갔다가 영어 연극에 출연, 유창한 영어로 대사를 외우던 어머니에게 반하셨다고 해요. 중매쟁이를 통해 청혼을 넣으니, 당시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소설가여서인지 제 외할머니가 ‘특정한 직업도 없는 사람에게 외동딸을 줄 수 없다’고 하셨답니다.”
 
  박태원의 아내 김정애는 1930년 3월 숙명여고 21회 졸업생 74 명 중 1등으로 졸업했다. 학창시절 배구선수였으며, 졸업반 때 영어성적이 99점이었다고 한다. 여고 졸업 후, 경성사범 여자연습과 1년 과정을 마치고 충북 진천의 한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이 났다.
 
  두 사람이 결혼한 것은 박태원이 1934년 8월 1일부터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9월 19일 자로 끝난 직후다. 그해 10월 27일 ‘다옥정’(지금의 서울 중구 다동) 7번지에서 구식으로 결혼한다.
 
  “제가 재작년 진천에 찾아갔어요. 진천 상선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어머니 사진을 찾았어요. 개교 100주년 기념 사진첩에 실린 10여 장의 사진 중 어머니 사진이 있었어요. 얼마나 기쁘던지….”
 
  북한에서 1965년 간행한 갑오농민전쟁 2부작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의 첫 장에 박태원의 말년 모습을 담은 사진이 실렸다. 15년 후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장남 박일영이 우연히 발견, 그 책을 복사해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가 그 사진을 보시고 3주 뒤인 1980년 4월 21일 돌아가셨어요. 나이 예순여덟이셨어요. 어머니는 늘 아버지 소식을 기다렸어요. 답답한 마음에 점을 보면 ‘당신은 반드시 죽기 전에 남편을 만난다’는 점괘가 나왔어요. 미신이지만 그게 어머니에게 희망이었지 않았을까요? 결국 형이 찾아온 아버지 사진을 보시고 돌아가셨어요. 그래도 사진으로나마 두 분이 상봉하신 게 아닐까요?”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어머니는 6·25 당시 여맹위원회에 나와 일하라는 강압을 거역할 수 없어 부역을 하셨던 이유로 9·28 수복 직후 사형언도까지 받고 복역했어요. 재심 청구로 사형은 면하고 5년이나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그때는 그런 부역이 자의냐 타의냐 하는 것을 입증할 자료도 없었고, 그러한 입증에 끼어들 사람도 없었어요. 많은 사람이 억울함을 호소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인, 그러니까 1955년 봄인가 어머니는 감옥에서 풀려나 집으로 오셨어요.”
 
 
  아내 김정애는 남편의 사진을 본 지 3주 후 사망
 
박재영의 1971년 서울대 졸업식 사진. 왼쪽부터 박은영, 김영희(재영씨의 장모), 김정애(박태원의 아내), 박재영과 아내 남행우, 박소영.
  박태원의 아내 김정애는 그 후 수감 후유증 때문인지 신장염을 심하게 앓았다고 한다. 그녀는 말년에 중풍으로 세 번 쓰러져 5년간 누웠고 2년간은 전혀 말을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날 희망을 품고 사셨어요. 제 아내가 결혼예물로 어머니에게 드린 원앙금침이 있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와 만나는 날 덮겠다며 장롱 깊숙이 넣어 두셨어요. 가끔 꺼내 보기만 했지 돌아가시는 날까지 한 번도 덮지 않았던 겁니다. 한집에서 함께 살았던 우리 내외도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장롱 속에 고이 간직하셨던 원앙금침을 보고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 월북을 아들로서 어떻게 이해합니까.
 
  “동료 문인 이태준과 안회남이 조선문학가동맹을 좌지우지할 때 아버지를 동맹위원장으로 추대했다고 합니다. 선거 전날, 친구 분과 술을 드시고 삼선교에서 성북동으로 걸어오다 일부러 개천 얕은 곳에 떨어졌다고 해요. 그래서 다쳐서 선거에 못 나간다는 구실을 만들 수 있었대요. 6·25가 터지고 9·28 수복 직전인 9월 20일 ‘남조선문학가동맹 평양시찰단’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했다가 돌아오지 못하셨어요. 아버지는 북한에 계실 때도 이념의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해요. 공산주의를 신봉했다면 (이데올로기를) 찬양하는 글을 남겼겠지만 아버지는 역사소설밖에 쓸 수 없다고 장막을 쳐 버렸습니다.”
 
  박태원은 1910년 1월 17일 청계천 광교 옆 ‘다옥정 7번지’에서 박용환(朴容桓)과 남양(南陽) 홍(洪)씨의 4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유아 사망자를 빼면 3남1녀가 함께 자랐는데 진원(震遠), 태원, 문원(文遠), 경원(璟遠·딸)씨다.
 
구보 4남매의 2000년 모습. 왼쪽부터 박재영, 이규정(박일영 아내), 박일영, 박은영, 박소영, 남행우(박재영의 아내).
  구보의 아버지 박용환은 다옥정 7번지에서 공애당약방을 1904년부터 운영했고, 용환의 동생 박용남(朴容男)은 바로 옆집인 다옥정 5번지에서 서양식 병원인 공애의원을 열었다. 박용남은 서울대 의대 전신인 조선의학교 2회 졸업생이라고 한다.
 
  재영씨는 “당시 할아버지(박용환)보다 작은할아버지가 더 유명하셨다”며 “할아버지의 부고가 실린 신문(《동아일보》 1928년 3월 17일 자)에 작은할아버지의 우인(友人)이 여럿 등장하는데 그 중 《매일신보》 부사장과 《중외일보》를 창간한 이상협(李相協) 선생도 있다”고 했다.
 
  재영씨는 또 “아버지가 숙부(박용남)와 고모(박용일)의 소개로 춘원 선생과 백화(白華) 양건식(梁建植) 선생에게 문학을 사사(師事)했다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문학수업을 받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고 덧붙였다.
 
  박용환이 사망한 뒤 장남 진원이 약국을 이어받아 1980년 사망할 때까지 경기도 수원에서 약국을 운영했다고 한다. 진원은 경성제대 조선약학과 본과(서울대 약대 前身)를 나왔다. 그러나 6·25 후 동생 셋(태원·문원·경원)과 자신의 아들(상건)이 월북하는 바람에 고초를 겪었다. ‘공애당’이란 약국 간판도 성남약국으로 바꾸었다. 재영씨는 “‘공애당’이란 표현이 ‘공산당을 사랑한다’로 오해받을 수 있어 큰아버지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박진원은 첫 번째 부인에게서 2남2녀, 둘째 부인에게서 1남1녀를 낳았다. 장남 상건(商健)은 6·25 당시 배재고 3학년으로 피겨와 탁구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인민군 의용군으로 입대해 죽을 고비를 겪었다고 한다. 박씨 집안에 따르면, 북한 종군기자로 있던 박태원이 최북단 압록강 해산진 전투를 직접 취재했다. 국군과 인민군·미군·중공군 시체가 뒤엉킨 곳에서 박태원이 생존한 병사를 찾았는데 그가 바로 조카 상건이었다고 한다. 상건은 그 후 북한에서 체육대학 교수가 됐다. 재영씨는 이렇게 말했다.
 
  “극적인 만남이었다고 해요. 시체더미 속에서 어떻게 조카를 발견할 수 있었는지…. 병원에 후송돼 가슴에 박힌 총탄을 뺐으나 깊이 박힌 것은 못 뺐다고 해요. 퇴원해 아버지가 있던 종군기자단 지프를 운전했다고 합니다.”
 
 
  남북으로 흩어진 박태원 형제들의 행적
 
박태원의 동생 문원이 어린 일영과 재영을 모델로 씨름하는 그림을 그렸다. 어린이잡지 《진달래》 1949년 2월호 표지에 실렸다.
  차남 상욱(商郁)은 연세대 화공과를 나와 제약회사(종근당)에 근무했다. 오래 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삼남 상우(商佑)는 미국에서 한의학박사가 되어 LA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박태원의 남동생 문원은 일찍부터 사회주의 사상에 눈을 떴고 화가이자 사회평론가로 광복 직후 이름을 알렸다. 문원은 경기고보와 연희전문을 거쳐 일본 동북제대에서 미학을 전공한 뒤 귀국, 다시 1946년 경성제대 문학과(서울대 미학과 前身)를 졸업했다. 그는 1945년 좌익계열 미술인들이 창립한 조선프롤레타리아 미술동맹의 중앙위원 및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선전부원으로 활동하다 박태원보다 먼저 1949년 월북했다.
 
  문원은 북에서 아들만 둘(철호, 찬호)을 뒀는데 첫째 부인과 사별을 하고 재혼을 했다. 장남 철호는 북한에서 미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작은아버지 문원씨는 젊은 시절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셨는데 현재 남한에는 작품이 없어요. 어린 시절, 성북동 초가 대청마루에 입선작을 걸어 놓았는데 댕기를 드린 여자아이 그림이었어요. 삼촌은 아버지의 책 장정(책표지)도 그렸는데 1947년(재판) 《천변풍경》 장정을 맡았어요. 북에서도 아버지의 《임진조국전쟁》의 장정을 그리셨죠.”
 
  박문원은 월북하기 전 형의 소설집 외에도 다수 책과 잡지에 표지 그림을 그렸다. 재영씨의 회상이다.
 
  “어린 시절, 저하고 형에게 씨름을 하는 모델을 부탁한 적이 있어요. 까맣게 잊고 있다가 ‘박문원이 어린이잡지 《진달래》의 장정을 맡았다’는 기록을 보고 전국을 뒤져 춘천교대 도서관에서 1949년 《진달래》 2월호를 찾았죠. 그 표지에 저랑 형이 씨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막내 경원은 숙명여고 졸업 후 좌익에 참여하다 월북한 것으로 전해진다. 북에서 검사가 되었다고 한다.
 
  재영씨는 박태원의 월북과 문원·경원의 이념 선택을 구분했다.
 
  “아버지 박태원의 월북은 문원·경원의 경우와 다르다고 봅니다. 동생들은 본래 6·25 이전, 해방 혼란기부터 좌익운동에 가담하였던 경력을 가지고 있지만, 아버지는 좌경화된 작품을 쓰셨다거나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어요.”⊙

입력 : 20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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