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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하벨라르》, 물타뚤리 지음, 양승윤·배동선 옮김, 시와진실 펴냄
지난 몇 년 동안 이래저래 네덜란드에 대한 책을 좀 읽었다.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 암스테르담》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세계사》등 ... 이런 책들에 그려진 네덜란드는 가슴 뛰게 하는 나라였다. 자유의 정신으로 세워지고,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자유의 정신을 세계에 전파한 나라, 한때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고 극동의 일본과도 교역을 하면서 일본이라는 나라의 근대화에 큰 역할을 했던 나라, 지금도 비록 나라는 작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자유와 교역량, 복지를 자랑하는 강소국....
이 책 《막스 하벨라르》는 그런 네덜란드의 이면(裏面)을 다루고 있다. 1860년 출간된 이 책은 당시 바타비아라고 불리던 네덜란드령(領) 동인도제도, 즉 지금의 인도네시아를 다스리고 있던 네덜란드 식민통치의 민낯을 고발하는 소설이다.
저자 물타뚤리의 본명은 에두아르트 다우어스 데커르. 데커르는 네덜란드 바티비아 총독부의 관리로 17년을 근무한 인물. 자바섬 르박군의 부지사로 부임할 때만 해도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관료였다. 하지만 여기서 그는 토착 봉건귀족들이 민중을 수탈하는 현실을 목격했다. 농민들은 영주들이 자기의 전 재산인 물소를 빼앗아가고, 무보수로 영주(태수)들의 영지를 경작하거나 강제노역에 동원되어도 어디 호소할 곳이 없었다. 총독부의 네덜란드인 관리들은 공정하고 문명적인 통치를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봉건 귀족들의 그런 만행을 철저히 외면했다. 그들로서는 봉건 귀족들의 기득권을 인정해 주면서 그들을 이용해 민중들을 간접통치하는 것이 유리했던 것이다. 무능하고 부패한 네덜란드인 관리들은 인도네시아에서 커피, 향신료 등 환금(換金)작물의 재배를 강요하고 그들을 수탈하면서 거기서 개인적 이익을 챙기는 데만 골몰했다. 데커르가 가혹한 수탈을 자행하는 토착 태수들을 고발했지만, 그의 상급자인 주지사와 총독부는 그를 오히려 좌천시켰다. 그는 이에 항의해 사표를 던지고 귀국한 후 이 소설을 썼다. 필명 ‘물타뚤리’는 ‘엄청난 고통을 겪은 자’라는 뜻이다.
물타뚤리는 이 소설 속에 자신이 르박에서 보고 들은 얘기들을 녹여 넣었다. 소설은 일종의 액자소설 형식으로 되어 있다. 커피중개상 드로흐스또벌은 우연히 옛 동창인 ‘머플러 사내’ 막스 하벨라르와 조우한다. 바타비아(인도네시아)에서 총독부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영락해서 돌아온 하벨라르는 자신이 그동안 수집한 바타비아 실상에 대한 리포트와 산문 등을 넘겨주면서 출판을 부탁한다. 드로흐스또벌은 그 가운데 커피산업 등에 대한 리포트에 관심을 갖고, 자기 회사에 인턴으로 데리고 있는 독일인 청년 쉬떼른에게 그에 대한 정리를 맡긴다. 하지만 쉬떼른은 막스 하벨라르가 민중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분투하다가 좌절하는 이야기에 더 관심을 가지고 이를 바탕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드로흐스또벌과 쉬떼른의 이야기는 엇갈린다. 드로흐스또벌은 막스 베버가 말한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의 정신을 설익게 받아들인 것 같은 사람이다. 반면에 쉬떼른은 당대의 종교에 대해 회의하면서 이성에 의한 진보를 신뢰하는 진보적 청년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막스 하벨라르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물라뚤라 자신이다. 르박군의 부지사로 부임한 그는 현지 민중들의 피맺힌 호소를 들으면서 수탈을 일삼는 태수를 계도하려 하지만 가망이 보이지 않자, 결국 상사인 주지사에게 태수를 고발한다. 하지만 주지사는 오히려 태수와 결탁, 하벨라르의 호소를 묵살한다. 하벨라르는 오지로 좌천된다. 사표를 제출한 하벨라르는 마지막에 총독에게 호소하려 하지만, 총독마저 그를 외면한다.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러, 물타뚤라는 갑자기 소설 속으로 뛰어들어 쉬떼른을 쫓아내고(?) 화자(話者)로 등장해 직접 바타비아의 현실을 국왕에게 고발한다.
소설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소설 속 원주민 청년 샤이자와 처녀 아딘다는 청순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는다. 막스 하벨라르가 복직하고 악독한 태수와 비열한 주지사가 정의의 심판을 받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현실에서의 물타뚤라 평생 가난하게 살다가 쓸쓸하게 죽는다.
하지만 그의 호소는 차츰 열매를 맺는다. 1901년부터 네덜란드는 ‘윤리정책’으로 전환, 보다 온건하고 원주민들의 복지를 배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마치 3.1운동 후 일제가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나아간 것처럼 말이다.
‘윤리정책’으로 숨통이 트인 인도네시아에서는 수카르노 등을 중심으로 민족독립운동이 발흥하기 시작하고, 1949년 드디어 인도네시아는 독립을 쟁취한다. 인도네시아의 독립은 이후 아시아-아프리카 여러 나라 독립운동에 큰 자극을 주었다. 이 책은 필리핀의 호세 리잘 등에게도 큰 영향을 줬다.
프로이트는 ‘당대 최고의 저서 10권’ 가운데 하나로 이 책을 추천했다. T.S 로렌스는 이 책을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에 비견했다. 1999년 《뉴욕타임스》는 ‘지난 1000년 베스트 스토리’의 하나로 이 책을 선정했다. 2006년 영국 서섹스 대학의 피터 박설 교수는 ‘죽기 전에 죽어야 할 1001권’ 중 121번째 책으로 이 책을 올렸다. 그리고 막스 하벨라르는 오늘날 커피공정무역 브랜드로 부활했다.
소설은 ‘식민지는 식민지일 뿐’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 준다. 더 아픈 것은 이 소설 속에서 민중을 착취, 수탈하는 것은 동족인 인도네시아 토착 귀족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의 수탈행위는 조선시대 양반들의 행태를 연상케 한다. 이 때문에 이 소설에 의해 민족의식에 눈 뜬 수카르노나, 30여년간 인도네시아를 철권통치했던 수하르토 시대에 이 소설은 권력자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 책이 전하는 반(反)제국주의 메시지는 오늘날에 와서는 빛이 바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막스 하벨라르는 반제국주의자 혹은 민중의 옹호자를 넘어 ‘올곧은 공직자/지식식인’ 의 표상으로 내게 다가왔다.
160여년 전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 식민지 정부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모습과 참 흡사하다. 코드인사로 총독 등 식민지의 고위직이 결정되고, 상사는 ‘만사가 순조롭게 잘 돌아간다’는 보고만 기다리고, 부하 관리들은 그의 입맛에 맞는 보고서만 올리고, 그래야만 출세한다. 나름 성실하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불의 앞에서는 한발 뒤로 빼는 감찰관 훼르브르흐의 모습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혼 없는 공무원’의 모습 그대로다.
이런 풍토 속에서 막스 하벨라르는 “법률과 법령을 엄정하게 지키고, 모든 신민으로 하여금 이를 지키게 할 것이며, 부지사로서 모든 면에서 부족함 없이 처신하겠다”고 했던 자신의 취임선서를 글자 그대로 지키려 몸부림친다. 그는 부임한 후 토착 귀족들을 불러놓고 “제 소임을 다하면서 정의롭게 살아가려고 한다”면서 가난한 르박군을 일으켜 세울 것을 다짐한다. 태수를 고발했다가 오히려 궁지에 몰리게 됐을 때, 그는 자신에게 정의를 호소하던 민중들을 떠올리며 걸음마를 하기 시작한 어린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가야, 잘 듣거라. 만약 저 사람들이 이 아빠를 비열한 자라고 하면서, 아빠가 용기가 없어 수많은 엄마가 죽어갔다고 비난하고, 아빠가 태만해서 네 머리 위에 내린 축복까지도 없애버렸다고 하면, 네가 나서서 이 아빠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변명해다오.”
그는 총독에게에두아르트 다우어스 데커르 마지막으로 보내는 편지에서 “각하께서 받으신 급료에도 그 자바인들이 흘린 피가 스며 있고, 그동안 받으신 상여금으로 축적한 은괴에도 갈피갈피 그들의 처절한 한이 서려 있습니다”라고 절규한다.그리고 사표를 던지면서는 이렇게 말한다.“저는 제 책무라고 판단한 일에 충실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말을 더듬는 사람이 그 버릇을 버릴 수 없는 것처럼 저도 제 신념을 버릴 수 없습니다.”
광란의 홍위병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그래도 ‘자신의 책무라고 판단한 일에 충실’하려는 공무원, 군인, 법조인, 교사들이 있다. ‘제 신념을 버릴 수 없다’고 다짐하는 언론인, 지식인들이 있다. 그들이 우리 시대의 막스 하벨라르들이다. 막스 하벨라르, 아니 에두아르트 다우어스 데커르가 결국 세상을 바꾼 것처럼 그들이 세상을 바로잡는 날이 오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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