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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팔사략》, 증선지 지음, 신동준 번역, 올재 펴냄 (2019)
《십팔사략(十八史略)》은 송(宋)나라의 유신(遺臣) 증선지가 삼황오제(三皇五帝)부터 송(宋)나라에 이르는 역대 왕조의 역사 중 에센스만을 뽑아 정리한 책이다. 역사를 좋아하는지라 오래 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인데, 마땅한 책이 없어 안타까워하던 차에 고전을 ‘착한 가격’에 번역, 보급하는 올재에서 올 1월 《십팔사략》을 출간했다. 지난 4월 급서한 신동준 박사가 번역했다.
중국의 역사서는 대개 인문-사회과학적 성격보다는 치자(治者)를 위한 참고서의 성격이 강하다.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중국인이 역사를 보는 이런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십팔사략》은 《자치통감》의 핵심을 추려 정리하는 한편, 거기에 《자치통감》 이후의 역사, 즉 남송의 멸망에 이르는 역사를 덧붙인 것이다.
《십팔사략》은 거대한 이야기책이다. 삼황오제에서 하(夏),은(殷), 주(周), 춘추전국9春秋戰國), 진(秦), 한(漢), 삼국(三國),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수(隋), 당(唐), 오대십국(五代十國), 북송(北宋), 남송(南宋)의 역사 속에서 명멸해간 수많은 인간군상들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기 짝이 없다. 그 중에는 우리가 사자성어나 《삼국지》 《초한지》 등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얘기들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수백, 수천년 전의 중국역사 속 모습을 통해 오늘의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대목들도 적지 않다는 것이 흥미롭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주 여왕(周 厲王)은 자신을 비방하는 백성들을 고발하게 하고, 고발된 자들은 죽였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백성들이 거리를 가면서도 서로 눈인사만 하는 지경이 됐지만, 여왕은 “내가 능히 비방을 막아냈다”고 기뻐했다. 이에 누군가가 간했다.
“이는 백성의 입을 틀어막는 것입니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냇물의 흐름을 막는 것보다 심한 해악을 불러옵니다. 물은 흐름을 막으면 반드시 둑을 터뜨리게 되고, 그러면 반드시 상해를 입은 사람이 매우 많을 것입니다.”
입으로는 ‘소통’을 외치면서도, 자신에 대한 비판은 ‘가짜 뉴스’로 몰거나 법으로 옭아매려 드는 정권의 행태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인사(人事)에 대한 이야기들도 많이 나온다. 공자의 제자 자사가 구변이라는 이를 장수로 추천하자, 위(衛) 신공(愼公)은 “구변이 일찍이 관원으로 있을 때 민간의 계란 두 개를 먹은 적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에 대해 자사는 “버드나무와 가래나무처럼 한 아름이나 되는 재목을 사용하려 할 경우 몇 척마다 썩은 부분이 있게 마련이지만, 양공(良工)은 이를 이유로 재목을 버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비슷한 이야기는 또 있다. 위무지는 한 고조(漢 高祖) 유방에게 진평을 추천했다. 유방이 나중에 진평이 형수와 간통한 적이 있다는 얘길 듣고 위무지를 나무라자 위무지는 이렇게 말했다.
“신이 대왕에게 천거한 것은 그의 재능이고 지금 폐하가 나무라는 것은 그의 행실입니다. 지금 미생과 효기의 행실이 아무리 좋다 한들 승부의 책략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고위 공직자들의 인사청문회 때마다 위장전입 같은 사소한 문제로 사람을 망신 주고 낙마시키는 바람에, 능력 있는 이들은 이를 꺼려 공직에 나가기를 꺼리는 반면, 후안무치하고 무능한 자들만 요직에 나가는 우리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런가 하면 규제와 개혁 등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도 있다.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권신 조간자의 가신 윤탁은 진양이라는 고을을 다스리러 가면서 물었다.
“세금 등을 마치 누에고치에서 뽑아내듯 계속 거둬들이는 견사(繭絲)식으로 할까요, 보루를 쌓고 부단히 땅을 돋우는 것처럼 백성들의 재물을 조금만 거둬들여 그들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보장(保障)식으로 할까요?”
조간자는 보장식으로 하라고 했다. 후일 난이 일어났을 때 조간자의 아들 조무휼은 진양에 의지해서 재기할 수 있었다.
같은 맥락에서 원나라 칭기스칸의 책사였던 야율초재가 “하나의 이로움을 만들어내는 것은 하나의 폐해를 제거하는 것보다 못하고, 하나의 일을 만들어내는 것은 하나의 일을 없애는 것만 못한 이치를 알아야 한다”는 말도 가슴에 와 닿는다.
반면에 신(新)나라의 왕망, 송나라의 왕안석은 자신들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급진적인 개혁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민심의 이반, 더 나아가 패망을 자초했다.
위정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들도 많다. 위징의 간언을 용납했던 당 태종, 한 무제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급암, 살인을 저지른 노복을 그 주인인 호양공주 앞에서 격살하고 광무제 앞에서 당당하게 법을 굽힐 수 없음을 역설한 낙양령 동선 등의 이야기는 보기만 해도 상쾌하다. 그런 곧은 신하들이 있고, 군왕이 그들을 용납할 때에는 나라가 흥했고, 그 반대일 때는 나라가 기울었다.
“다스림을 이루는 위치(爲治)의 요체는 다언(多言)에 있지 않고, 힘써 일하는 역행(力行)을 어떻게 하는지 돌아보는 데 있을 뿐”이라고 한 한 무제 시절 신공의 말, “무릇 장작을 쌓아놓은 밑에 불씨를 놓고 장작더미 위에서 자면서 불이 아직은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편안하다고 말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한 가의의 말, 그리고 겸손하고 온화한 태도로 세상을 속여 결국 천하를 도둑질한 신나라 왕망의 사례를 보면서는 자연스럽게 지금의 세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 증선지는 남송의 유신이었던 까닭에 북송과 남송의 역사를 특히 자세히 다룬다. 그로서는 북송-남송의 역사는 근현대사이자 당대사였을 것이다. 신종 시절 구법당과 신법당이 당쟁을 일삼다가 결국에 가서는 ‘적폐세력 블랙리스트’인 ‘원우당적비’를 세우는 등 상대를 용납하지 못하고 진멸하려 드는 북송 말기의 모습, 한때의 ‘개혁세력’이었던 신법당이 부정부패한 기득권 세력으로 타락하는 모습, 금(金)나라의 간첩 진회에게 국정을 맡기고 눈앞의 평화를 구걸하느라 악비와 같은 나라의 간성들을 숙청하는 모습, 교역을 빌미로 접근해 온 몽골인들에게 속아 요충지 내에 적의 거점을 만들도록 한 남송 여문덕의 실수 등은 남의 얘기 같지가 않다. 남송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한 가닥 재기의 희망을 놓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던 문천상, 장세걸 등 충신 열사들의 이야기는 가슴을 시리게 한다.
한 나라 가의는 《치안책》에서 “앞에 가는 수레가 넘어지면 뒤에 가는 수레는 이를 경계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십팔사략》을 보면 앞에 가는 수레가 넘어진 사례들을 수없이 많이 보여준다. 그런 사례를 보면서도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수레는 그걸 경계로 삼지 못하고 넘어지는 길로 가고 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바로 역사를 보면서도 배우지 못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족] 이 책을 보면서 고우영의 《만화 십팔사략》이 참 괜찮은 책이라는 생각을 했다. 증선지가 《자치통감》을 아주 잘 축약해냈다면, 고우영은 만만치 않은 분량의 《십팔사략》을 유머러스한 만화로 아주 잘 축약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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