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인 대통령. 사진=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북한 정권 수립에 일조한 약산 김원봉(1898~?)을 사실상 긍정적으로 평가한 가운데, 김원봉을 모델로 한 영화 <암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동안 문 대통령은 한국 근·현대사와 우리 사회의 첨예한 이슈를 다룬 영화를 관람한 뒤, 그에 걸 맞는 '정치적 메시지'를 내놓아 주목을 받았다. 영화 <암살>은 문 대통령이 인상 깊게 관람한 영화 중 하나다. 그간 문 대통령이 관람했던 영화에 대해서도 덩달아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문 대통령은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전신) 대표 시절이던 2015년 7월 29일, 서울 영등포의 한 극장에서 <암살>을 관람했다. 관람 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김원봉에 대해 “정말 치열하게 무장투쟁한 분인데 해방 후에 북으로 갔다가 얼마 안 있다 숙청됐다. 남에서도 북에서도 설 곳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당시 문 대통령은 김원봉의 조카를 만난 사실을 언급하며 “약산기념사업회를 추진하는데 정부 인가(認可)가 안 나온다고 하더라”는 말도 했다.
의열단 활동으로 유명한 김원봉은 1948년 4월, 남북 협상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고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고, 국가검열상,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 북 공산정권의 요직을 역임했다. 1952년 3월에는 “미제 약탈자들과 그 주구들에 반대하는 조국 해방 전쟁(6·25)에서 공훈을 세웠다”며 김일성으로부터 최고 상훈(賞勳)의 하나인 노력훈장까지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대한민국 입장에서 김원봉은 한국전쟁의 책임자인 동시에, 대한민국 건국을 사실상 반대했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는 김원봉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해왔다. 정부 여당이 앞장 서 김원봉을 독립유공자로 서훈(敍勳)하는 방안을 추진해온 것이다. 이로 인해 정치권과 관련 학계, 군 등을 중심으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국가보훈처의 피우진 처장은 지난 3월 국회 정무위원회에 출석해 '김원봉을 국가보훈 대상자로 서훈할 것이냐'는 자유한국당 정태옥 의원 질의에 "지금 현재 기준으로는 되지 않는다"면서도 "의견을 수렴 중이며 (서훈 수여) 가능성은 있다"고 답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인 지난 4월 1일 보훈처는 '김원봉 독립운동 업적'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영화의 ‘허구(虛構)’가 ‘정책’으로 연결됐다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원전(原電) 사고를 다룬 영화 <판도라>다. 문 대통령은 2016년 12월, 이 영화를 본 후 “비록 원전사고 확률이 수백만분의 1 밖에 안 되더라도 사고 발생 가능성이 있다면 막아야 한다”며 “원전 추가건설을 막고 앞으로 탈핵·탈원전 국가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통령 당선 후, 문재인 정부는 탈원전 정책을 내세워 원전 추가 건설 백지화 등을 추진, 사회적 논란을 야기했다.
2017년 8월, 문 대통령은 대전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를 관람했다. 당시 청와대는 문 대통령이 영화 관람 후, “아직까지 광주의 진실이 다 규명되지 못했다. 이 영화가 그 과제를 푸는 데 큰 힘을 줄 것 같다”며 “광주민주화운동이 늘 광주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제는 국민 속으로 확산되는 것 같다”는 뜻을 피력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전 월간조선 대표)는 “영화는 현실이 아니라 현실의 조작”이라며 “영화를 기초로 하여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가짜인 영화를 선전 선동의 도구로 활용하여 현실을 조작하려 든다는 비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조갑제 대표는 “(5·18) 광주사태는 다섯 번의 국가적 조사를 거쳐 진상이 가장 정확하게 해명된 경우”라며 “더 밝힐 진실이 없다”고 단언했다. 조 대표는 “그런데도 문재인 대통령은 있지도 않은 발포 명령자, 있지도 않은 헬기 사격을 규명하여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한다”며 “권력의 압박으로, 영화적 선동으로 사실을 조작하거나 국민들이 믿도록 속일 순 있겠지만 이 정도의 진실은 덮거나 왜곡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듬해인 2018년 1월, 문 대통령은 1987년 6월항쟁과 고(故) 박종철씨 다룬 영화 <1987>을 관람하기도 했다. 그는 이 영화에 대한 감상평뿐 아니라,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과정과 연결해 해석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이 영화에서 가장 울림이 컸던 대사가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였다. 6월항쟁 등 엄혹했던 민주화 투쟁 시기에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말이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지느냐’였다”며 “촛불집회에 참석할 때도 부모님이나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그런 말을 들으신 분이 많을 것이다. 지금도 ‘정권 바뀌었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게 있느냐’고 얘기하시는 분도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오늘 이 영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은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다. 우리가 함께 힘을 모을 때 연희(영화 속 등장인물)도 참가할 때 세상이 바뀐다는 것을 영화가 보여주는 것 같다. 정말 좋은 영화를 만들어 주셨다”고 평가했다. 이어 “제가 영화를 보면 천만(관객)을 넘기겠다 아니겠다를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확실히 천만을 넘기겠다는 확실한 예감이 든다. 많이 봐주시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영화 관람에 앞서 가진 간담회에서 문 대통령은 이른바 ‘블랙리스트’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블랙리스트 얘기를 듣거나 피해 입으신 분들을 만나면 늘 죄책감이 든다”며 “제가 가해자는 아니지만, 저 때문에 그런 일들이 생겼고 많이 피해를 보셨으니 그게 늘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블랙리스트 피해자 중 절반 이상이 2012년 대선 때 저를 지지하는 활동을 했거나 지지 선언에 이름을 올린 단순한 이유 하나로 오랜 세월 고통을 겪었다”며 “세월호 관련해서도 많은 분이 고초를 겪었는데 제가 2012년 대선 때 정권교체에 성공했다면 그런 일을 겪지 않았을 텐데라는 늘 회한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규명해 책임 있고 벌 받을 사람들이 확실히 책임지고 벌 받게 하고, 나아가 문화예술인들이 제대로 창작활동을 하도록 사회경제적인 지원을 확대하는 게 제가 할 일인 것 같다”는 입장도 밝혔다.
문 대통령은 2014년 1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인권변호사 시절과 공안사건 ‘부림사건’을 모티브로 한 <변호인>을 관람한 후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들어 역사가 거꾸로 가면서 국민이 피와 땀으로 이룩한 민주주의가 다시 위기를 맞고 있다”고 비판한 적도 있다.
대형마트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을 그린 <카트>를 관람한 뒤엔 노무현 정권 시기 통과된 ‘기간제법’과 ‘파견법’이 오히려 해고자를 양산한 현실을 반성하는 입장도 취했다.
그렇다고 문 대통령이 특정 이념에 편향된 영화만 관람한 건 아니다. 한국전쟁 실향민을 소재로 해 소위 우파 영화로 분류되는 <국제시장>과 북한의 서해 무력도발을 다룬 <연평해전>도 관람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당시 “우리 영토와 영해가 그냥 지켜진 게 아니라 장병들의 숭고한 목숨과 피, 희생으로 지켜진 것이라는 걸 결코 잊어선 안 된다”는 취지의 말을 하기도 했다.
글=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