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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을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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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미군 팩트북 2003 -주한미군의 전력 현재의 주한미군 병력을 살펴보면, 3만6000명의 미군과 3500여명의 미군 군속, 그리고 1만3,000여명의 가족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 4,500여명의 카투사와 1만5,000여명의 한국인 직원들 주한미군에서 복무하거나 근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한미군의 구성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육군이 2만7,000명(장교 3400명), 공군이 8500명(장교930명), 해군, 해병대 500여명(100여명)기타 100여명이 됩니다. 육군병력은 미8군 예하의 1개 전투 보병사단 (미2사단), 1개의 항공여단(17항공여단), 1기의 기갑여단(6기갑여단) 그리고 기타지원 부대들 (19전구 지원사령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미2사단의 전투력을 살펴보면 현재 전시 수준의 병력인 1만4000명을 유지하면서 2개 보병여단, 1개 포병여단, 1개 공병여단, 1개의 항공여단, 1개의 전투 공병여단 그리고 전투지원여단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미2사단은 1917년 창설된 일명 인디안헤드 사단으로 불리우며 1차세계대전과 한국전에서 참전한 부대입니다. (부대마크도 별문양 안에 인디언 머리가 새겨져있습니다) 미2사단이 보유하고 있는 무기들은 에이브라함 전차, MLRS다연장포, 155m 곡사포인 Paladin, 아파치헬기 등의 최정예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17항공 여단은 주로 UH-60블랙호크헬기와 C-12수송기, CH-4누크 헬기가 주종을 이루어 주로 지원 임무를 맡고 있으며 6기갑여단은 아파치 헬기 2개 대대와 패트리어트(Patriot) 미사일 1개 대대로 구성돼 있습니다. 이외에 전투지원업무를 맡고 있는 19전구 지원 사령부는 대구, 부산, 평택에 위치하여 주로 군수지원을 맡고 있습니다. 한편 공군은 오산에 美7공군 사령부가 있으며 오산 (51전투 비행단)과 군산 (8 전투비행단)에 각각 1개 비행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투기 기종으로는 F-16과 A-10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한 미공군을 지원하는 부대로는 제5정찰대대가 있으며 (U-2)때로는 미 공군전략사령부를 비롯한 여러 공군 사령부 예하의 항공기들이 지원됩니다.(Global 개념에서 B-1 폭격기, C-수송기 등) 미해군과 해병대는 한국에서 지원 요원만을 뉴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한미연합연습에는 요코스카에 본부를 둔 미 7함대와 오끼나와 주둔 미 제3해병 원정군이 미증원군으로 참가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한반도 유사시 한미 연합군의 해군 구성군 사령관은 미 7함대 사령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7함대의 해군전력은 주한 미해군 전력에 포함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주한미군의 한국 주둔 현황 주한미군이 사용하는 기지 주한미군은 현재 한국의 국방부로 공여받은 전국에 걸쳐 5만4000에이커(7445만평)에 95개의 기지(기지, 탄약고 훈련장 등)을 가지고 있으며 이 기지에는 1만 여개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는 많은 주한미군 기지들이 도심속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건설 당시에는 전부 외곽지대, 용산을 제외한)도시발전 저해와 교통문제를 유발하여 이전문제가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지난해 한미간에 한미연합 토지관리계획 (Land Partnership Plan)을 확정하여 한국국회의 비준을 마쳤습니다. 이 계획에 의하면 향후 10년에 걸쳐 미군 훈련장 3개 지역 3,900평과 28개의 기지 및 시설 214만평을 한국에 반환하고 훈련장 1개지역 10만평과 7개의 기지/시설 144만평을 미군에 공여하기로 합의하였다. -주한미군의 경제적인 측면 주한미군의 주둔비용은 2002년도 기준으로 보면, 인건비: 17억불 운영비: 10억불 가족주거비: 3700만불 군건설: 1.8억불 기타조달: 150만불하여 총 30억불 정도됩니다. 이중에서 한국 주둔으로 발생하는 비용을 보면 인건비(한국인 지권): 1.7억불 주거비용지원: 7100만불 현지조달비용: 5.1억불 한국내에서의 출장비용: 350만불하여 총 7.5억불이 소요됩니다. 이중 한국정부에서 분담하는 비용(방위비 분담)이 4억불입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까지는 주한미군의 한국 주둔으로 한국정부가 경제적으로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물론 토지를 임대했다고 가정했을 때는 문제가 다릅니다.그러나 일본의 예를 들어보면 주일미군 주둔을 위해 기지의 토지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한편 주한미군의 전쟁억제력은 군사전문가들에 의하면 주한미군의 순수 자산가치을 140억불, 비축물자 등을 포함했을 때는 300억불 이상이 된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국방비 119억불 중 전력증강비가 40억불에 불과하다고 볼 때 7년치의 전력증강비에 해당됩니다. 이외에도 한반도 유사시 전개되는 증원병력을 포함하면 그 액수는 1000억불 이상이 되는 것입니다. -주한미군 주요 日誌 1945년 8월15일: 日本의 패망과 함께 38선을 군사분계선(MDL)으로, 南은 美軍이 그리고 北은 소련군이 진주했다. 日本軍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다는 계획인 미국의 「일반명령 제1호」(General Order No.1)가 당시 美대통령인 해리 트루먼에 의해 승인됨에 따라 한반도에 주한미군의 역사가 시작됐다. 1945년 8월29일: 미국은 한국에 軍政을 실시하기로 하고 「美24군단 야전명령 55호 부록 7」에 의해 당시 일본의 오끼나와에 주둔해 있던 美육군 제24군단을 한국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한다. 1945년 9월4일: 당시 해리스 소장이 이끄는 24군단 선발정찰대가 오끼나와에서 군용기로 김포에 도착하였다. 이들의 임무는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인천을 통해 들어오는 미군병력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1945년 9월8일: 24군단 예하 美 7사단 병력이 오끼나와에서 42정의 함정을 타고 인천을 통해 한국에 들어왔다. 한국에 주둔하게 되는 첫 주한미군. 1945년 9월9일: 서울에서 美 24군단장이자 초대 주한미군 사령관인 존 하지 중장과 일본의 노부유끼 아베 총독사이에 일본의 항복문서 서명이 이뤄졌다. 이날부터 美 7사단은 서울과 인천지역에서 일본군을 무장 해제시키고, 주요시설물을 보호하고, 치안유지를 담당. 1945년 9월10일: 美 24군단 사령부를 서울에 설치. 1945년 9월12일: 하지 중장은 아베 총독을 대신할 美군정 장관에 아놀드 소장을 임명. 1945년 9월15일: 美 32 보병연대 2대대 병력이 개성을 접수. 1945년 9월22일: 당시 필리핀에 주둔해 있던 美 40사단 병력이 인천을 통해 들어와 부산에 주둔. 1945년 9월30일: 美 7사단은 충청도와 전라북도 지역을, 美 40사단은 전라남도와 남부지역을 담당. 이 때 美軍이 용산의 일제시대 조선군 주둔군 사령부로 사용하던 軍시설을 인수해 사용하기 시작. 당시의 주한미군의 총병력은 7만7,000명. 1945년 10월10일: 세 번째 美육군 사단인 6사단이 인천에 도착, 美 40사단이 담당하였던 지역을 담당. 1946년 3월15일: 美 40사단, 全병력을 한국에서 철수, 4월7일 해체. 주한미군 병력수는 5만2,000명으로 줄어들다. 1948년 8월15일: 한국정부가 탄생하면서 美軍政 폐지. 1948년 8월24일: 李承晩 대통령과 하지 중장 사이에 주한미군이 철수할 때까지 미군이 한국군에 대한 지휘권을 갖고, 이를 점진적으로 한국군에 이양한다는 데 합의. 미군은 9월15일부터 철수를 시작, 이해 말에는 주한미군은 16,000명만이 남게 된다. 1949년 1월15일: 美 24군단이 한국에서 완전 철수하여 일본서 해체. 美軍은 美 제5전투연대 7,500명을 제외하고 한국에서 모두 철수. 1949년 3월23일: 李承晩 대통령이 美 제5전투연대의 철수를 승인. 그 해 5월 28일부터 6월29일까지 5연대는 한국에서 완전 철수하여 하와이로 이동. 1949년 7월1일: 美군사고문단(KMAG)이 창설, 482명의 미군 병력만이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한국에 잔류.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의 결의에 따라 미국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에 참전하기로 결정. 1950년 7월1일: 브래들리 스미스 중령이 이끄는 美 24사단 21병연대 병력 406명이 부산에 도착, 오산지역 전투에 투입. 이들은 52포병대대 병력 130명과 합류하여 1950년 7월4일부터 7월5일까지 북한군과 첫 전투를 벌여 150명의 희생자를 내다. 미군이 한국전에서 벌인 첫 전투 기록. 1950년 7월7일: 맥아더 장군,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지명. 1950년 7월9일: 요코하마에 주둔해 있던 美8군이 선발대를 파견, 대구에 美 8군사령부를 설치. 美8군은 한국전이 끝난 후 1953년 8월15일 현재의 용산으로 사령부를 옮기다. 1950년 7월12일: 「在韓 미국 군대의 관할권에 관한 협정」(대전협정)이 체결되어 미군당국이 미군범죄에 대해 배타적인 재판권을 행사. 1966년 7월9일 조인된 현행 SOFA의 모체가 됨. 1950년 7월14일: 李承晩 대통령이 한국군에 대한 지휘권을 유엔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에게 넘겨주는 대전협약이 체결. 그후 작전 통제권은 유엔군사령관에서 1978년 한미연합군 사령관에게로, 평시 작전권은 1994년 한국으로 이양하다. 1950년 7월24일: 맥아더 장군은 東京에서 유엔군사령부를 창설하고 공식적으로 사령관직에 취임. 당시 극동군사령부 요원들로 하여금 유엔군 사령부의 임무를 수행토록 함. 1951년 6월: 한국전에 본격적으로 미군 병력들이 투입되면서 총 병력수가 25만명에 달하다. 1952년 6월에는 26만5000명을 기록했고, 1953년 휴전협정 체결 당시의 미군 병력은 30만명을 넘어섬. 한국전 당시 미군의 희생자수는 전사 3만3,600명, 부상 10만명 이상, 행방불명 및 포로 5200여명으로 집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조인.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워싱턴에서 서명, 1954년 11월 17일 효력이 발생. 한반도에서의 전쟁억제를 위한 미군 주둔의 제도적 보장장치이자 연합방위체제의 법적 근간이 마련. 이에 따라 美軍들은 다른 유엔 참전국들과 함께 철수를 시작, 1955년에는 5만여명의 육군과 1만여명의 공군을 제외하고 모든 미군과 유엔참전국 병력이 한국에서 철수. 이 병력이 1956년까지 유지됨. 참전 16개국과 5개 지원국 중 15개국이 현재 유엔사에 대표단을 파견. 1968년 6만명의 주한미군 병력이 유지되다가 프에블로호 사건과 무장공비의 청와대 침투사건 등으로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자 1969년 6만4000명으로 다시 증가. 1969년 7월 25일: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의 손으로」라는 닉슨 닥트린(일명 괌닥트린)이 발표되면서 태평양지역과 동아시아에 주둔하던 미군병력이 감축되기 시작, 한국에서도 1971년부터 美7사단 2만명이 철수를 시작하여 1971년 9월30일에는 주한미군의 병력은 43000명만이 남게 되다. 미국은 휴전선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美軍을 판문점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후방으로 再배치하고 한국군에 휴전선 155마일의 방위임무를 넘긴다. 판문점 지역에 배치되었던 2개의 미군초소 (오울렛, 콜리어)는 美2사단에 의해 운영되어 당시 군사전문가들은 이 두 개의 초소를 미군에게 자동개입구실을 제공해주는 인계철선(Trip Wire)이라고 불렀다. 그 후 1991년 10월1일 콜리어 초소는 한국군 1사단으로, 오울렛 초소는 유엔군 공동경비구역 경비에게 넘겨져 비무장지대에서의 완전 한국군化가 이루어진다. 1976년부터 한미연합훈련인 팀스피리트 훈련 실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기동훈련이었음. 1992년 일시 중단되었다가 1993년 다시 실시되고 1994년부터 중단. 현재 한미연합/합동 훈련은 봄에 RSOI/독수리훈련, 여름에 을지포커스랜즈훈련이 실시되고 있다. 1976년 카터 행정부는 주한미군 감축 계획을 발표하고 이에 따라 4,000여명의 美2사단 병력이 철수해 주한미군의 수가 3만9,000명으로 줄다. 1976년 8월18일: 판문점에서 도끼만행사건이 발발, 한반도 전쟁 일보 직전 상황. 1978년 11월 7일: 한미 양국은 한미연합군 사령부를 창설하여 본격적인 한미연합방위체제를 구축하게 됩니다. 작전권이 유엔군 사령관에서부터 연합군사령관으로 이전되었고, 1994년 평시 한국군에 대한 작전권이 한국 합참에 이전. 1990년대 들어 우리나라가 주한미군의 방위비 분담을 증가시켜 한미안보협력체제가 동반자적 관계로 발전. 주한미군의 역할이 「주도적 역할(Leading Role)」에서 「지원역할(Supporting Role)」로 변경. 1990년 6월25일: 한미양국은 용산기지를 이전하기로 합의 각서 체결. 그해에 한미양국은 주한미군 減軍(감군) 중장기 계획을 발표. 1991년부터 美지상군 非전투요원 감축, 한미야전군 사령부 해체(韓美 1군단), 한미연합사의 지상군 사령관을 한국군 장성으로 교체, 유엔사 정전委 수석대표를 한국군으로 교체하는 등의 주한미군의 3단계 감축방안을 발표. 유엔군 수석대표 교체에 따라 북한이 정전협정을 무력화해 1995년부터 장성급회담으로 개최. 1991년 미국은 넌 워너(Nunn-Warner) 수정법안을 통과시켜 주한미군 3단계 감축 계획을 확정. 당시 4만여 안팎의 주한미군중 1단계로 6,000여명의 美육군 병력이 철수. 1992년 北核 위기로 「넌 워너」 수정법안 2단계 실행이 연기되면서 현재의 병력수준인 3만7000명이 유지. 「넌 워너」 수정법안이 3단계까지 실행이 되었다면 2만명의 주한미군 병력만이 잔류 예상. *

입력 : 2003.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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