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가 건넨 구두 한 켤레… “맨발인 제게 실내화 사 주셨잖아요.” : 월간조선

‘선생님! 소주 한잔하시지요.’ 하면서 조심스럽게 걸려오는 제자의 전화 목소리는 참으로 반갑다.

한 달 전 경북 포항을 찾았다. 수필 <보리>로 알려진 한흑구 선생의 흔적을 더듬기 위해서다. 그곳에서 한흑구 선생의 장남 동웅(韓東雄·80·전 동지고 교장)씨와, 한흑구의 문단 제자인 동화작가 김일광(金日光·66)씨를 만났다.

김일광 작가는 40년 가까이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 동화를 써왔다. 교과서에 동화작품이 실리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30여 권의 동화집을 펴냈다. 일제강점기 고난 받은 생명에 대한 관심으로 《귀신고래》《조선의 마지막 군마》《석곡 이규준》 등의 작품을 펴냈으며, 독도 문제를 다룬 《강치야 독도 강치야》《바위에 새긴 이름 삼봉이》《독도 가는 길》 등의 작품이 있다. 《강치야 독도 강치야》는 영어로 번역되었다. 다문화 관련 동화인 《외로운 지미》《엄마라서 행복해》는 다문화 이해 자료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최근 그가 기자에게 산문집 한 권을 보내왔다. 《호미곶 가는 길》은 지난 2월 20일 출간됐다.

책에 실린 글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문단의 어느 작가들보다 작품의 결이 고왔다. 한흑구 선생이 살아계셨다면 흐뭇하게 여길 만큼 좋은 책이었다. 《호미곶 가는 길》에 실린 ‘구두 한 켤레’와 ‘간밤에 잠을 설치다’를 소개한다.

구두 한 켤레

김일광 작가의 산문집 《호미곶 가는 길》

완연한 봄날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이른 삼월 첫 토요일, 운전 중에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제자의 사고 소식이었다. 소식을 전해주는 또 다른 제자의 말에 따르면 토요일, 쉬는 날인데도 기계 고장이라는 연락을 받고 회사로 달려갔다고 했다. 멈춰 버린 기계를 정비하기 위해 기계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기계가 작동하는 바람에 일어난 안전사고라고 했다.

나는 길섶에 차를 멈추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가슴이 짓눌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 정신없는 순간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게 바로 운명이라는 말이었다.

교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떠나보냈던 제자를 만나는 게 단연 기쁜 일이리라. 5월의 그 어느 언저리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선생님! 소주 한잔하시지요.’ 하면서 조심스럽게 걸려오는 제자의 전화 목소리는 참으로 반갑다.

나에게도 그런 제자가 있었다. 공부를 잘했거나 집안이 좋아서 부모와 친분을 나눈 아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공부는 늘 뒤쪽을 맴돌았으며, 홀어머니 밑에서 위로 형과 누나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궁색한 얼룩을 늘 앞섶에 달고 다니던 아이였다.

졸업을 시키고 시간이 한참 흐르면서 나는 녀석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바로 그 녀석에게서 불쑥 전화가 왔다. 엉겁결에 녀석의 제안에 따라 저녁 약속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가만히 꼽아보니 그 녀석과 헤어진 지 15년 쯤 흘러 있었다. 나이는 스물일곱 아니면 스물여덟은 되었을 터이다. 약속 시간까지는 대여섯 시간이 남았기 때문일까. 별의별 생각들이 다 떠올랐다. 못난 생각도 언뜻 이어졌다.

‘취업을 부탁하려는 건 아닐까? 아니면 물건 판매, 보증?…….’

퇴근 뒤에 작은 식당에서 얼굴을 마주 한 그 녀석은 나의 못난 걱정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첫 취업이 되었다고 했다.

그 기쁜 마음에 가장 먼저 나에게 알리려 했단다. 돈, 그놈의 돈을 스스로 벌게 되었다는 기쁨을 나와 함께하고 싶었다고 했다.

집안이 넉넉하지 못하여 중학교도 어렵게 마친 뒤, 고등학교는 실업계로 갈 수밖에 없었으며, 학교를 곧 그만둘 것만 같은 위태위태한 시간을 건너 간신히 졸업장을 챙겼다고 했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은 기계 정비에 남다른 능력을 보인 덕에 작은 정비 업체에 남보다 먼저 취업할 수 있었다고 했다. 정말로 반가웠다. 지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눈물을 글썽 대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저녁 시간을 보냈다.

그날 밤, 나는 거나하게 취해서 아주 느긋하게 골목길을 걸었다. 이웃이라도 만나면 커다란 소리로 자랑하고 싶었다. 비틀거리는 걸음마저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한 달 뒤, 녀석은 또 전화를 했다. 마주 앉자마자 종이가방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선생님, 구두 한 켤레 샀심더.”

“구두라니?”

“맨발로 교실을 돌아치던 제게 실내화 사 주셨잖아요.”

“내가? 전혀 기억이 없는데….”

“저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심더, 15년 동안 벼르고 별렀던 일인기라요. 선생님한테 구두를 꼭 사드리고 싶었거든요. 근데 그 때 사주셨던 실내화보다는 값지지 않은 느낌이 듭니다.”

“이놈아! 돈을 아껴야지 뭐 할라고 이런 걸 샀노.”

“걱정 마이소. 이제는 좀 살 것 같심더.”

나는 그 말에 한동안 말을 잃었다. ‘이제는 좀 살 것 같다.’는 그 말 속에는 일찍부터 알아버린 삶의 숱한 그늘이 담겨져 있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녀석의 눈을 피하여 천장을 쳐다보며 눈을 껌벅였다.

나는 그 구두를 아껴 가며 신었다. 평소에는 신발장 위에다 고이 모셔두었다가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만 자랑스럽게 꺼내 신었다. 그 구두를 신으면 왠지 어깨가 으쓱해지곤 했다.

그 구두를 내 신발장 위에 남겨두고 녀석이 허망하게 떠나 버렸다. 녀석이 떠난 뒤, 나는 그 구두를 신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좀 살 것 같심더.’ 라던 녀석의 바로 그 말이 자꾸만 후렴구처럼 구두 뒤축에 따라붙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간신히 고생을 면하게 되었다는 일말의 안도감이 녀석에게 주어진 운명의 끝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렇게 불공평할 수가. 종교를 갖고 있는 나였지만 녀석을 잃고 한동안 그놈의 운명이라는 말을 붙들고 방황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누가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신발장 위에서 구두에 먼지가 덮이듯이 가슴을 짓누르던 바윗덩이도, 신의 침묵에 대한 원망도 어느새 깃털처럼 되어 버렸으니 문득문득 인간의 심사라는 게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것도 운명일까? 이따금 먼지 덮인 구두를 볼 때마다 아들처럼 생각했던 그 녀석과 인연이 안타까울 뿐이다.

수필 <보리>의 작가 한흑구씨의 장남 동웅(오른쪽·전 동지고 교장)씨와 김일광 작가.

간밤에 잠을 설치다

간밤에 잠을 설쳤다.

가을바람치고는 제법 세게 불었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도 그랬지만 바람이 몰고 다니는 낙엽 구르는 소리에 문득문득 잠을 깨곤 했다.

일찌감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텃밭 구석에는 바람이 몰아다 놓은 낙엽이 자욱했다. 아직 묶지 않은 배추들을 들여다보았다. 찬바람과 맞서서 더욱 푸른 얼굴을 하고 있다. 그 곁에는 아직 가녀린 양파가 줄기를 바람에 맡기고 있다. 바람 찬 겨울을 이기고 나면 더욱 매운맛으로 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나뭇가지는 눈에 띄게 앙상했다. 키 낮은 가시오가피 빈 가지 사이로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손바닥 하나를 오므린 크기의 작은 새집이었다. 일 미터 남짓한 높이에 새집이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의심을 알아챘다는 듯 아기 새의 깃털 한 점이 바람을 타며 파르르 손짓을 보냈다. 얼마 전까지 살았음이 분명했다. 가만히 손을 얹어 보았다. 고물고물 아기 새의 움직임과 체온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 나무 밑은 길고양이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곳이었다. 길고양이가 마음만 먹으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앞발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지점이었다. 그런데 용케도 그곳에 터를 잡고 오가피의 잔가지와 가지를 끌어당겨서 집을 매달았다. 그곳에서 작은 어미 새는 알을 낳고, 품어서 새끼를 얻었다. 어미 새는 사람과 길고양이와 매들의 눈을 피하여 몰래몰래 드나들며 새끼를 키웠으리라. 드나드는 것도 조심스러웠을 것이며, 소리조차 감추어야 했을 것이다. 무성한 잎에 집을 숨기고, 오가피의 잔가시를 울타리 삼아서 예쁜 새끼들을 먹이고 지켜냈다. 새집을 들여다보며 어미 새와 아기 새 사이에 이루어졌을 조건 없는 베풂과 따름의 마음 교류가 그림처럼 가슴에 와 닿는다. 우리 모두는 가슴 밑바닥에 흐르는 동심과 같은 그 마음을 잊고 있다. 하찮게 여기는 첫 마음이 어쩌면 우리에게 다시 인간다운 삶을 돌아볼 용기와 힘을 줄지도 모른다.

찬바람이 불어 잎이 다 떨어지기 전에 어미 새는 아기 새를 데리고 겨울을 보낼 따뜻한 곳으로 거처를 옮겨 갔다. 나뭇잎이 찬바람에 떨어지듯이 지난 계절 동안 생명을 품어 준 새집도 바람에 흩어져 갈 것이다. 자연의 신비다. 자연은 가르치려 들지 않아서 좋다.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게 참 좋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기 새들은 어느 하늘에서 날고 있을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시간의 운행이 느껴진다. 바람이 음악처럼 흐른다. 바람과 시간의 흐름이 가슴을 적신다. 아기새가 되어 엄마의 육아낭에서 잠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