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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1. 사회

소설가 현길언의 ‘내가 겪은 제주 4·3사건’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도망다녔을 뿐… 우린 남 원망하지 않았다”

현길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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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증언] 소설가 현길언의 '내가 겪은 제주 4.3'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도망다녔을 뿐… 우린 남 원망하지 않았다”

글 : 현길언  소설가
 
[편집자 주]
제주 출신 소설가인 현길언(玄吉彦) 전 한양대 교수는 지난 2013년 자신이 발행인으로 있는 《본질과 현상》(여름호)에 ‘과거사 청산과 역사 만들기-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중심으로’라는 글을 실었다. 그는 이 글에서 “제주4·3은 의로운 저항이 아니라, 남로당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방해할 목적으로 일으킨 반란”이라면서, 노무현 정권 시절 나온 4·3진상조사보고서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의 과거사 청산 국정지표를 실현하기 위한 근거자료일 뿐 4·3의 역사적인 실상을 밝히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고 비판했다.
이 글이 나가자 제주 지역 언론에서는 “대학 교수까지 지낸 제주 출신 소설가가 자신이 발행하는 잡지에 4·3특별법과 4·3진상조사보고서 등을 폄하하는 글을 게재해 물의를 빚고 있다” “그동안 4·3흔들기에 앞장서 온 극우세력들의 시각을 명색이 제주 출신인 소설가, 학자의 입을 통해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된다(양조훈 전 제주도 부지사)”(《제주의 소리》)며 현 교수를 비난하고 나섰다. 이들은 《본질과 현상》에 제주도 및 제주도개발공사 등 공공기관들이 협찬 광고를 싣는 것까지 문제 삼았다.
현길언 교수는 1979년 《현대문학》에 <성 무너지는 소리> <급장선거>로 데뷔한 이래 장편소설 <한라산> 등 4·3사건이 남긴 상처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써 왔다. 그는 자신의 글이 제주 지역사회에서 ‘4·3흔들기’라며 매도당하자, 자신이 겪은 4·3사건 체험을 담은 글은 《월간조선》에 기고해 왔다.

玄吉彦
⊙ 73세. 제주대 국문과 졸업. 한양대 문학박사.
⊙ 제주대 국어교육과 교수,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현 평화의문화연구소장, 《본질과 현상》
    발행인.
⊙ 작품: 《열정시대》《한라산》《우리들의 조부님》등.
⊙ 수상: 현대문학상(1990년 소설 부문), 대한민국문화상(1992), 백남학술상(2004년), 황조근정훈장.
 
   2013년 여름
 
제주4·3사건 당시 국군이 사건 가담자들을 체포해 감시하고 있다.
  나는 4·3사건을 소재로 많은 작품을 썼다. 왜 사실에 근거하여 만든 허구적 작품에 만족하지 않고 이제 그 사건의 실제를 쓰려고 하는가? 어느 날 문득 4·3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때 사람들의 모습과 마음과 생각을 지금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인가? 그리고 또 하나, 이제 그때 일들을 잊어버릴 만큼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오히려 그때의 일들이 더욱 생생하게 살아나고, 그 사람들의 목소리와 표정이 어제 일보다 더 선명하게 다가오기 때문인가? 나의 소설의 출발은 4·3이었다. 소설을 그만두려고 했을 때에, 내가 써야 할 이야기가 있다는 생각에 포기할 수 없었는데, 이제 생각하니, 소설보다도 사실(事實)이 중요함을 절감하게 되었는가?
 
  직접적인 이유도 있다. 내가 《본질과현상》(32호·2013년 여름호)에 한 소논문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노무현 정부가 ‘과거사 청산’ 작업의 하나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를 설치하고, 3년에 걸쳐 조사 연구한 결과를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로 만들었는데, 그 보고서의 오류를 제시하고, 정치권력이 역사를 바꾸는 일을 문제 삼았던 것이다. 어느 학회에서 발표한 학술논문이다. 그런데 제주의 일부 언론과 소위 4·3관련 단체들로부터 집중 포화를 맞았다. 이유는 “4·3을 폄훼했다”는 것이다. 내 논문의 오류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반박하지 않고 “4·3을 폄훼했다”는 한마디로 모든 논리를 뒤덮어 버렸다. 나는 4·3을 폄훼하기는커녕 그 진실에 더한 애정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내가 온갖 수모를 느끼도록 하는 언어를 동원해서 매도했다. 이 일은 마치 어느 한때에, “너는 빨갱이다”라는 한마디로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재단해 버렸던 경우와 다르지 않았다.
 
  광란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구나. 나는 그들의 흥분된 언어를 읽다가 나도 덩달아 흥분할까 두려워하면서도 우리 고향 사람들이 4·3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4·3을 안다면, 이렇게 4·3을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증오를 퍼붓지 않을 텐데, 그리고 4·3을 너무 잘 알고 거기에 더하여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정작 그 사건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 그러한 그들의 인식 수준은 4·3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왜 부족할까? 그들이 안다고 자부하는 것은 누구로부터 받은 교육이나 읽을거리에 의지한 지식과 이념과 그것으로 얻은 가치 때문이다. 정작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있다. 왜 그럴까,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2013년 제주의 여름에 있었던 일을 당하고 보니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2013년에도 ‘광란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구나. 1948년에서 2013년, 65년의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녹아 버리거나 산화되어 버릴 수 없는 그 분노와 증오와 한의 정체는 무엇일까?

  형식적인 시간 개념으로 4·3은 내가 9살 때부터 14살 때까지 일어난 사건이다. 9살 때라면 내가 겪은 것을 사실이라고 믿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쓰고 있는 것은 9살의 나이에 겪은 것이 아니다. 그 후에도, 사람들이 모이면, 그렇게 힘들게 살아온 세월에 겪었던 모질고 아픈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그것은 내 기억과 마음과 피에 용해되어 남아 있게 되었다. 이렇게 써서 남김으로 그 험난한 시대를 살아왔던 사람들의 진실의 한 부분을 전하게 되어, 그 시대를 살았던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살아 있는) 분들의 한을 풀어 주는 일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내 기억을 믿도록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의 잔해들을 통해서 제주 4·3이라는 역사의 실상을 바라보는 눈길이 좀 진지했으면 한다.
 
  모두들 세상을 떠났다. 죽음은 모든 것을 청산하게 만든다. 그때 살아남은 사람들은 ‘내’가 또는 ‘그’가 어느 편에 있었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축복처럼 받아들였다. 왜냐면 살아남으로써 그 아픈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편에서 어떤 경험을 했든 그것은 모두 공유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훗날 그들은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말하면서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증오하지 않았다. 아마 그 험난한 광란의 시대를 함께 겪었다는 동질감을 더 좋아했을 것이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말은 조용조용한데, 살아 있는 자들의 목소리는 거칠다. 왜 그럴까? 아마 겪었던 사람들은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큰소리를 칠 필요가 없지만, 사태를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큰소리로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그 큰 목소리로 그들이 의지할 가치나 이념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1947년 여름
 
1949년 8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이 제주4·3사건 진압을 위해 출동했던 제9연대 장병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거칠게 흔드는 대문 소리에 우리는 모두 잠에서 깨었다.
 
  “정○○ 나와라.”
 
  사내의 목소리에 이어 대청마루로 올라오는 사람들 발자국 소리가 어지러웠다.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더니 후다닥 뒷문으로 내달았다. 뒷울을 넘으면 솔밭이었다.
 
  “도망친다!”
 
  뒷울 쪽에서 고함소리와 호루라기 소리가 나고 이어 “탕! 탕!” 총소리가 났다. 어머니는 두 돌이 지난 여동생을 껴안고 눈을 감았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총을 든 경찰관이 어머니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어디로 도망쳤어?”
 
  어머니는 뒷문을 가리켰다. 그때 마당에서 “잡았다” 하는 소리가 났다. 경찰관은 총을 거두고 물러났다. 어머니가 툇마루로 나가자 나도 뒤따랐다. 안방에서 주무시던 증조부님도 일어나셨고, 별채 사시는 할아버지와 삼촌 방에서 잠자던 형님도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 한가운데 맨 마지막 속옷만 입은 아버지가 꿇어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가 아버지 옷을 가져왔다. 옷을 입으려고 일어난 아버지의 한쪽 다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총을 맞았는가 했다.
 
  “정○○ 어디 있어?”
 
  경찰관 중에 책임자인 듯한 사람이 아버지를 추궁했다.
 
  “모르겠습니다.”
 
  “여기로 왔다는 정보를 들었어.”
 
  아버지는 다시 모른다고 대답했다. 책임자는 할아버지에게 정○○가 이 집에 숨어 있다는 정보를 갖고 왔는데, 아버지가 도망치는 것을 보면 무슨 일이 있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우리 아들은 아무 죄도 없수다. 집안을 모두 찾아 봅서.”
 
  할아버지가 사정했다. 그러자 경찰관들이 신을 신은 채로 집안 곳곳을 뒤졌다.
 
  “언제 그 자를 만났어?”
 
  아버지는 최근 몇 달 동안 통 연락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는 무명 수건으로 아버지 오른편 정강이를 싸매었다. 경찰관이 아버지를 붙잡고 총대로 후려쳤다는 것이다.
 
  “너도 남로당원이지.”
 
  책임자가 다그쳤다.
 
  “아닙니다. 난 이 집 종손이라 그런데 마음 쓸 여유가 없수다.”
 
  “남원면 남로당 주모자들이 다 친구라면서?”
 
  “그래도 그 친구들이 나에게는 가입하라고 하지 않았수다.”
 
  “거짓말이야. 이놈 끌고 가!”
 
 
  지서로 붙잡혀 간 아버지
 
  경찰관은 아버지를 오랏줄로 묶었다. 식구들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지서에 잡혀 가면 성한 몸으로 돌아오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경찰관에게 끌려 올레 밖으로 나가는데,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셋삼촌(셋째 삼촌)은 집에 없었고 작은삼촌이 밖으로 뒤따라 나갔다.
 
  “며느리야, 내일 아침 조반을 갖고 지서에 가야 하지 않겠냐?”
 
  어머니는 할아버지 말씀에 새벽밥을 지으려고 준비를 했다.
 
  “이놈들은 어딜 갔나?”
 
  할아버지는 셋삼촌을 걱정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는 삼촌 둘은 초등학교를 나와 집에서 농사일을 돌보았고, 셋삼촌은 일본군에서 살아 돌아와 집에서 쉬고 있었다.
 
  한참 후에 셋삼촌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아버지가 경찰에 잡혀 갔다는 말을 말잿삼촌으로부터 듣고 달려온 것이다. 삼촌은 멍청하게 올레 쪽을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그때 이웃집 친척 어른이 들어서면서, 경찰이 아버지를 데리고 ‘윗새집’으로 갔다고 전했다. 그 집은 살림이 탄탄하고 그 둘째아들은 경찰관이었다가 사표 내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아마 경찰관 중에 그 집안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한밤중에 셋삼촌은 윗새집에서 경찰관 책임자와 인사를 나누면서 사정을 물었으나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그 집에서 닭을 잡아 경찰관들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식사를 한 그들은 남원 지서로 내려갔다. 새벽에 삼촌이 집에 돌아와서 전했다.
 
  아버지 식사가 들어 있는 채롱(대나무로 엮은 그릇)을 들고 셋삼촌과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지서로 갔다. 그날 저녁이 되어서야 식사도 전하기는커녕 아버지 얼굴도 대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삼촌은 지서와 인연이 닿을 만한 사람들을 찾아 부탁했다.
 
  이틀 후에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왔다. 남로당에 가담하지 않았고 지난번 3·1사건에도 관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 석방된 것이다. 평소에도 몸이 허약한 아버지였는데, 그 일을 당하고 나서 며칠 동안 자리에 누워 지냈다.
 
  아버지 사건이 있었던 며칠 후에 삼촌은 경찰관 시험을 보기로 결정했다.
 
  그해 여름 (나중에 기록을 찾아보니) 1947년 8월 2일에 셋삼촌은 제주경찰학교 2기로 들어갔다. (《제주신보》에서 4·3사태 관련 기사를 찾다가 경찰관 합격자 명단에서 셋삼촌 이름을 찾았다.)
 
  학교 가는 길가 바위나 큰 나무 둥치에는 삐라들이 나붙어 있었다. 하얀 백로지 반절에 먹물이 채 마르지 않은 삐라에서는 먹 냄새가 났다. 나는 그 삐라를 읽다가 문득 그 밤중에 잡혀 가던 아버지 일이 생각나서 달음박질을 치며 그 자리를 피하기도 했다. <米軍을 몰아내자> <洋菓子를 먹지 말자> <人民들은 함께 나가 싸우자> <朴憲永 萬歲. 金日成 將軍 萬歲!>.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천자문을 읽어 웬만한 한자는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삐라들 내용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박헌영이나 김일성은 누구인가? <쓰타린 원수 만세!> 쓰타린은 누구인가? 그즈음에 김일성 장군에 대한 신기한 이야기들이 나돌아 다녔다. 일본군을 무찌르는 데는 귀신 같았다는 내용이다.
 
  학교 정문에는 경찰관이 구식 장총을 짚고 보초를 서 있을 때가 많았다. 경찰관 몇이 교장 관사에 나오기도 했다. 김 교장선생님의 표정이 어두웠다. 지난해 담임이었던 오 선생을 비롯해서 몇몇 선생이 학교에 보이지 않았다.
 
  오 선생은 셋삼촌과 친구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3중 훈도시험에 합격하여 선생이 되었다. 학교는 쉬는 날이 많아졌고, 수업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우리 담임선생도 학교에 나오지 않았고, 오 선생은 다시 학교에서 만나지 못했다.
 
  여름방학이 끝났을 때, 셋삼촌은 경찰 제복을 입고 권총을 차고 집에 들렀다. 추자도로 발령을 받았다고 했다. 그곳은 일본군에 입대하기 전에 청년단원 지도자로 몇 년간 살았던 곳이다. 며칠 집에서 머물렀던 삼촌이 떠나갔다.
 
 
  1948년 봄
 
  4월 초였다. 학교에 갔는데 교실이 뒤숭숭했다. 공산당원들이 지서를 습격해서 경찰관과 급사를 죽였다고 했다. 수업하지 않아서 좋았으나, 오 선생이 보이지 않아서 궁금했다.
 
  며칠 후에 남원국민학교 6학년인 형이 수학여행으로 제주도 일주를 떠났다가 되돌아왔다. 구좌면 김녕리까지 겨우 갔는데 더 이상 제주읍으로 갈 수 없었다고 했다. 곳곳에 전신주가 잘라져 쓰러져 있고, 신작로를 가로질러 돌담이 쌓여 있어서 차가 다닐 수 없었고, 경찰관과 폭도(4·3사건이 일어난 다음에 무장대를 그렇게 불렀다) 간에 총격전이 일어나 도 일주가 어렵게 되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큰일이 났다고 걱정했다. 마을에서도 자취를 감춘 청년들이 여럿 있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주고받는 말을 들으면 대강 알 만한 사람들이었다. 일제시대에 징용을 갔다 온 청년들과 맨 윗동네에 사는 몇몇 사람들인데, 모두가 경찰관이 된 셋삼촌과 말잿삼촌의 친구들이었다. 그런데 그즈음에 말잿삼촌도 밤이 되어도 집에 들어오지 않아서 어른들이 걱정했다.
 
  마을에 경찰 응원대가 들어와 공회당에 주둔했다. 아버지는 잠시 동안 마을 구장 일을 맡고 있어서, 응원대들이 자주 집에 드나들었다. 공회당 뒤 공터에 천막을 치고 마을 부인들이 조를 짜서 취사를 맡았다.
 
  얼마 동안 주둔해 있던 응원대가 떠났다. 그 후로는 군인들 대부대가 작전을 한다면서 마을을 지나가기도 했다. 이따금 쌀을 갖고 와서 밥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선거가 가까워지면서 낯선 젊은이가 우리 집에 들어와, 지나던 길인데 날이 저물어서 하룻밤 묵고 가기를 청했다. 길손은 이 집이 마을 구장 댁이라는 것을 알고 찾아왔다고 했다. 어른들은 그를 셋삼촌이 쓰던 방에서 자도록 하고, 저녁을 대접했다. 그런데 아침에 보니 어느새 떠나 버렸다. 그런 일이 몇 번 있었다. 집안 어른들은 그들이 나그네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한번은 마침 그 낯선 나그네가 툇마루에서 쉬고 있을 때에 윗새집 그 인택의 삼촌이 집에 들렀다가 서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거 이야기였다.
 
  남제주군에서 입후보한 사람 중에 양기하 후보는 우리 집안의 외손이었다. 며칠 전에는 마을로 찾아와서 공회당에 사람들은 모아 놓고 이야기를 했다고 들었다.
 
  그즈음에 아버지는 밤에 집에서 주무시지 않았다. 혹 집안에 계셔도 아버지 방에서 주무시지 않고, 외양간이나 뒤 촐눌(꼴 더미)에서 주무셨다. 남원면 선거 사무를 맡은 아버지 친구가 남로당원에게 피살되었다는 소문이 들려 왔다.
 
  5·10선거 투표가 마을 공회당에서 실시되었다. 전날에 경찰관 셋이 투표함을 인부에게 짊어지우고 마을에 왔다.
 
  선거 날은 날씨가 우중충했다. 마을 사람들은 세상 나서 처음 하는 일이라 투표장에 나와서 투표했다. 경찰관들 셋이 투표소를 지키다가 그중에 한 사람이 꿩 사냥이나 하겠다면서 나섰다. 형님과 투표 상황을 지켜보던 그 윗새집 삼촌도 같이 나섰다.
 
 
  폭도들에 납치돼 간 삼촌
 
  한 시간이 채 못 되어 형님이 사색이 되어서 달려왔다. 인택의 삼촌이 폭도들에게 납치되었다는 것이다. 뒤이어 꿩사냥을 나갔던 경찰관도 들어왔다. 수많은 폭도들이 내려가다가 따로 떨어져 있던 인택의 삼촌을 보고 잡아갔다고 전했다. 투표는 거의 마무리되고 있었다. 경찰관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투표가 마감되자 투표함을 봉하고 말에 지워 운반하도록 했다. 처음 계획은 마차를 이용하려고 했는데, 마차는 큰길로 가야 하기 때문에 위험하니, 말에 싣고 외딴 오솔길을 택해 남원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온 마을이 술렁거렸다. 친족들이 윗새집으로 모였다. 사람들은 경찰관이 도망쳐 나온 것을 비난했다. 형님이 상황을 설명했다. 한 20~30명이 떼를 지어 아래로 내려가는데, 혼자서 꿩 망을 보던 인택의 삼촌이 그들의 눈에 띄었다는 것이다.
 
  투표함 운반을 맡았던 사람이 돌아왔다. 말을 타서 의귀를 거치지 않고, 그 서쪽 마을인 한남리로 남원에 도착했다. 돌아올 때에는 그 반대 방향 길을 택했다고 했다. 밤이 깊어 가도 납치된 사람은 소식이 없다. 모인 사람들은 청년들을 모아 찾으러 가 보자는 의견에, 이 밤중에 어딜 가서 찾겠냐고 당치 않은 소리 그만하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새벽녘이 되었는데, 납치된 사람이 되돌아왔다. 빤스만 입고 온 몸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사람들은 의아했다. 모두들 조상의 덕이라고 생각했다. 그분의 탈출 이야기는 한동안 마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폭도에 납치되어 산속으로 끌려갔다. 수망리 마을 목장 지대를 지나 붉은오름 부근인가 큰 궤야(굴의 제주도 방언)에 도착했다. 납치한 부대의 지휘관이 윗사람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수망리와 의귀리에는 투표 감시를 위해 경찰관 대부대가 와서 경비를 하고 있어서 그냥 퇴각했다는 것이다. 그 대신 이놈을 잡아왔다고 보고했다. 인택의 삼촌이 거짓으로 그 부대 책임자에게 말한 내용이었다. 그렇지 않고는 그들이 투표소를 습격하여 투표함을 탈취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었다.
 
  인택의 삼촌은 그곳 지휘관으로부터 심문을 받았다.
 
  마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선거관리 책임을 맡았는가? 그런데 거기에서 제일 책임자인 듯한 그 청년이 눈을 크게 뜨더니, “나를 모르겠나?” 하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인택의 삼촌도 안면이 있었다. 구장 집에서 선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저놈은 5·10선거 적극 지지파야. 동무는 수망리와 의귀리에 선거 경비를 하기 위해서 경찰들이 수십 명씩 배치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어?”
 
  “이자가 말했습니다.”
 
  “이 병신들, 이놈이 허풍을 떤 거야. 우리 사업을 방해할 목적으로.”
 
  그는 부대를 지휘했던 자에게 호통을 치더니, 이놈을 멀찍이 데려가 처치하라고 지시했다. 폭도들이 인택의 삼촌의 옷을 다 벗기려 했다. 포승을 풀지 않고는 옷을 벗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포승을 풀고 빤스만 남기고 모두 벗겨 버렸다. 무장대 둘이 삼촌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사방이 어둑했다. 두 사람이 앞뒤로 호위를 했다.
 
  그들은 숲속으로 들어가서 처치할 만한 곳을 찾았다. 그때 포승을 풀었기에 삼촌은 뒤따라오는 놈을 한 번에 거꾸러뜨리고 뛰기 시작했다. 앞에 가던 무장대가 뒤를 돌아보고 총을 쏘았다. 삼촌은 낮은 곳을 향해 노루처럼 뛰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그 인택의 삼촌은 경찰에 다시 들어갔다.
 
  아버지가 마을을 떠났다. 남로당원인 친구들이 몇 번이나 인편에 만나자고 했고, 직접 입당하여 협조하도록 권유하는 연락도 받았다. 아버지는 몸이 허약해서 그런 생활을 할 처지도 아니었다. 더구나 동생이 경찰관이고, 또한 아버지도 저쪽 사람들 생각에 동조할 수 없었다.
 
  그해 여름 아버지는 삼촌이 근무하는 추자도로 몸을 피해 우리 곁을 떠났다.
 
 
  1948년, 가을과 겨울
 
  마을이 뒤숭숭해졌다. 할아버지는 보리파종만 끝내고서 지서가 있는 남원리로 내려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고구마도 거둬서 웅덩이에 묻었고, 추수도 마쳤다. 마소가 먹을 꼴도 베서 집으로 옮겼다. 이제 보리파종만 남았다.
 
  학교는 선생님들이 나오지 않아서 쉬게 되었다. 새벽에 할아버지는 일갓집 삭망 제사를 모시려 나를 데리고 갔다. 그 집은 마을 공회당 뒤에 있었다.
 
  할아버지와 내가 공회당 앞으로 가는데, 경찰관을 태운 트럭이 몇 대 눈에 띄었다. 경찰관들이 트럭에서 내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고 걸음을 빨리했다.
 
  “저놈은 누구야? 거기 서.”
 
  운전석에서 권총을 찬 경찰관이 뛰어 내리더니 할아버지를 불러 세웠다.
 
  “이 새벽에 어딜 가는 거야?”
 
  “예, 저기 친척집 삭망인데….”
 
  할아버지는 긴 올레가 있는 그 집을 가리켰다.
 
  “삭망? 이 새벽에 토벌대가 왔다고 연락 가는 거지? 야, 이놈 처치해 버려.”
 
  경찰관 둘이 다가오더니 총구로 할아버지 가슴을 툭툭 치면서 길가 구석진 곳으로 밀어붙였다. 할아버지는 내게 눈을 껌벅이면서 어서 가라고 했다. 나는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토벌대가 할아버지에게 총을 겨누었다.
 
  “야, 잠깐!”
 
  그때 다른 트럭 운전석에서 고함 소리가 났다. 권총 찬 경찰관이 내리더니 토벌대의 총부리를 손으로 쳤다.
 
  “우리 고모부야! 아니, 고모부님, 이 새벽에 어떻게….”
 
  할아버지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멍청하게 그 조카를 쳐다보았다. 나도 아는 아버지 외갓집 삼촌이다. 할머니 손을 잡고 할머니 친정집 제사나 큰일에 가면 만났던 그 집안 큰아들이다.
 
  “이거 큰일 날 뻔했네, 어서 가십서. 가다가 토벌대를 만나면 정 경위 삼촌이라고 허십서.”
 
  할아버지는 그 말을 등 뒤로 들으면서 내 손을 잡고 자리를 급히 피했다.
 
  “내 고모부야. 알아둬라.”
 
  등 뒤에서 그 삼촌의 큰 목소리가 들렸다.
 
  트럭에서 내린 토벌대원들은 몇 명씩 짝을 지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구사일생으로 목숨 건진 할아버지
 
  우리는 삭망 제사에 참례하지 않고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한참 가는데 토벌대 서너 사람이 길가에 있다가 우리를 불러 세웠다.
 
  “어디 갔다 오는 거야? 토벌대가 왔다고 연락 가는 것이지.”
 
  젊은 경찰관은 총구를 할아버지 가슴에 겨누고 반말로 윽박질렀다. 할아버지는 겁을 먹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친척집 삭망 제사를 지내러 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리고 토벌대 정 경위의 고모부라고 말했다.
 
  “이 자식 수작 부리네.”
 
  할아버지 말에 화가 났는지, 토벌대가 험악한 얼굴로 할아버지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잠깐! 그 어른은 2중대장 고모부래. 아까 향사 앞에서 만났어.”
 
  밭에서 튀어나온 다른 토벌대원이 총을 겨눈 대원을 제지했다.
 
  “운 좋았수다. 어서 들어가십서.”
 
  “우리 삼촌도 경찰관인디?”
 
  나는 입속으로 말했다. 그때였다.
 
  “저놈 도망친다!”
 
  우리와 함께 서 있던 토벌대원이 고함을 질렀다. 누군가가 이편으로 오다가 토벌대를 보고는 뒤돌아서 달아나고 있었다, 그들은 달아나는 청년을 향해 총을 쏘았다. 청년이 픽하니 쓰러졌다.
 
  집으로 가다가 길 한복판에 죽어 있는 청년을 보았다. 할아버지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얼른 외면했다. 형보다 두 살 위인 만복이였다. 피냄새가 코로 스며들었다.
 
  마을 곳곳에서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날 토벌대는 여남은 가옥을 태웠다. 토벌대는 길에서 달아나는 사람들을 보면 바로 쏴 죽였다. 이상하게도 불탄 집들은 최근에 마을에서 종적을 감춘 청년네 집이었다. 그날 저녁에 마을에서는 장례를 간소하게 치렀다.
 
  할아버지는 그날 당한 일을 두고두고 말했다. “사람 목숨은 종이 한 장 차이여”라고.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토벌대가 마을에서 종적을 감춘 청년네 집을 찾아가 그들을 잡으려 했는데, 집 안에 아무도 없자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어떤 집에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아들을 내놓으라고 닦달을 하다가 모른다고 하자, 집을 불태우고 사람을 쏘아 죽이기도 했다.
 
  우리 집에서는 집이 불탈 것에 대비하여 세간들과 의복과 식량을 간수하였다. 곡식은 항아리에 담아서 땅을 파서 묻었고, 당장 필요한 세간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집 주위 배케(잣벽·작은 돌들을 모아 쌓아 둔 곳. 밭을 개간하면서 나온 작은 돌멩이들을 한곳에 모아 둔 곳이 집 주위에 있다)를 허물어 그 안에 숨겨 놓았다. 옷과 옷감은 멱서리나 짚으로 싸서 잣벽에 묻어 두었다.
 
  우리도 산으로 피난 가야 했다. 토벌대에 들키면 인정사정없다는 것을 알았다. 작은집(할아버지 동생네 집안) 할아버지가 한밤중에 찾아와서는 증조부님을 모셔 가겠다고 했다. 증조부님은 70이 넘은 나이에 시력이 약하셨다. (후에 들은 이야기인데) 할아버지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는데, 작은할아버지는 “여기보다 우리 집이 더 안전하다”고 말했다. 그날 밤에 증조부님은 작은할아버지를 따라가셨다.
 
 
  온 가족이 외딴 굴로 피신
 
제주농업학교 천막수용소. 1948년 가을부터 제주지역 기관장과 유지들도 대거 수용되었다.
  우리 식구들은 아침을 먹고 점심 요기할 것을 마련해 집을 나섰다. 할아버지는 식구들을 둘로 나누어 따로 가자고 했다. 할머니와 고모와 어머니, 그리고 형님, 이렇게 한곳으로 갔고, 나와 할아버지와 여동생이 한곳으로 갔다. 나는 식구들과 헤어지는 것이 안타까웠으나, 할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나를 데리고 나가셨다.
 
  마을 동편에는 새기오름이라는 민둥산이 있다. 여름방학이 끝날 때쯤에 마을 백중제를 지내는 곳이다. 아랫마을 의귀리 한복판에는 넉시오름이라는 낮은 산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산꼭대기에서 망을 보다가 토벌대들이 올라오는 것을 확인하면 긴 장대를 눕혀 놓았다. 아직 새기오름에 장대가 서 있다.
 
  우리는 마을을 벗어나서 넓은 들판을 지났다. 거의가 목초밭이거나 새왓(띠 밭)이다. 한 시간쯤 걸었다. 좀 높직한 언덕 아래를 돌아가니 뻥하게 큰 구멍이 뚫어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벌써 여러 사람이 와 있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아닌데 할아버지와는 아는 사람 같았다. 큰 궤야(굴)인데, 이 주변에서 일하다가 비를 만나면 피하는 곳이라고 했다. 여기저기 짚이 깔려 있고, 불을 땠는지 불타다 남은 나무토막도 보였다.
 
  우리는 한나절을 보내고 싸 간 점심을 먹었다. 새기오름에 장대는 여전히 그대로 서 있었다. 해가 서편으로 기울어지자 집으로 돌아왔다. 식구들도 무사했다. 그렇게 며칠 동안 할아버지를 따라 마을을 벗어나서 외딴 곳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숨어서 지냈다.
 
  그날은 집을 나와 얼마를 가는데, 마을 쪽에서 총소리가 나고, 불길이 솟는 것이 보였다. 할아버지는 황급히 우리를 길가 졸참나무 숲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거기에도 작은 궤야가 있었다. 대여섯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이었다. 할아버지는 궤야 밖으로 나와 멍청하게 마을을 바라보았다. 나도 따라 나왔다. 마을에서 불길이 솟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날 어스름에 마을로 돌아왔는데, 우리 집은 그대로 있었다. 집 주위의 몇몇 집도 그대로 있었다. 변두리에 있는 집들만 그대로 있고 마을 집들은 거의 불타 버렸다. 토벌대들이 집 마당으로 들어와서 촐눌에 있는 꼴단을 꺼내 불을 붙이고서 지붕으로 내던졌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면 그냥 총질을 했다고 들었다.
 
  그날 밤 마을 주민 총회를 열었다. 몇 대 동안 살아온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할아버지가 말했다.
 
  “집에 있는 식량과 가재도구 중에 절반은 내다 주어라. 언젠가는 다 없어질 것인데….”
 
  할아버지 말에 어머니는 고모와 함께 집 안에 있는 그릇들과 쌀을 마을 구장네 집 마당으로 가져갔다. 구장네 집도 불탔다. 마을에는 세간들을 간수해 두지 않았던 집들이 많았다. 그렇게 모인 식량과 일용품을 여러 집에 나누어 주었다.
 
  그날도 우리 식구들은 새벽 조반을 먹고 집을 나섰다. 요즈음은 토벌대들이 이른 새벽에 마을을 덮친다고 했다. 예전과 달리 몇 끼 먹을 음식도 마련했다. 이번에는 식구들이 함께 갔다. 더 멀리 갔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넓은 새왓인데 ‘정동굴왓’이라는 종갓집 밭이다. 아직 띠를 베지 않아서 사람이 들어가면 키가 보이지 않을 만큼 띠가 잘 자랐다. 그 밭 사방은 높직한 동산이어서 밭이 주변보다 낮았다.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가 앉으면 밭 옆으로 토벌대들이 지나가도 찾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밭 가에는 여러 개의 궤야가 있었다. 여남은 사람이 들어가 앉을 만한 굴이었다. 그것을 하나 우리 식구가 차지했다.
 
  거의가 마을 사람들이었다. 젊은이들은 높직한 동산에서 마을 형편을 살피도록 했다. 동산에 서면 넉시오름과 새기오름 정상에 세워진 장대가 보였고, 마을 집들도 한눈에 들어왔다.
 
  청년들이 궤야로 들어오면서 장대가 눕혀졌다고 전했다. 아직은 이른 아침이었다. 동향인 궤야 입구까지 햇살이 들어왔다.
 
  나갔던 청년들이 다시 들어와 큰 소리로 의귀리 마을이 불탄다고 전했다. 나도 나가 보았다. 마을이 연기로 가득했다. 의귀리는 지역이 넓어서 남아 있는 집들이 많이 있다고 어른들이 말했다. 나는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우리 집도 남아 있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총에 맞아 죽은 돼지
 
  낮이 되었다. 우리는 궤야에서 점심 요기를 하였다. 할아버지께서 산 사람은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고구마와 메밀가루로 만든 돌래떡을 먹고 있는데, 청년이 들어오면서 “수망리도 다 타고 있다”고 소리를 질렀다. 지난번 두 번째 토벌대가 와서 태우지 못한 집들이 불타고 있다는 것이다. 그때 할아버지가 궤야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오셔서, “우리 집도 타고 있다”고 전했다. 나는 그 순간 소리내어 울어 버렸다. 왜 울었는지 모른다. 집이 불탄다는 말에 목이 칵 막히고 마구 눈물이 쏟아졌다. 집안 어른들은 그러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후에도 그때 내가 소리내어 울었던 일을 말했다. 고조할아버지께서 분가하셔서 지은 집이다. 한라산에서 제일 좋은 괴목과 가시나무를 썼다고 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증조할아버지 앞에서 천자문을 읽었는데, 그때 괴목 마루를 물걸레로 잘 닦으면 얼굴이 보일 정도로 맑고 깨끗했다. 거기에 붓으로 글씨 연습을 했다. 그 집이 불타 버렸다는 것이다. 집안 식구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주위가 어슬어슬해지자 새기오름에 장대가 세워졌다. 토벌대가 물러간 것이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간곳이 없었다. 앙상한 뼈대처럼 붉은 돌벽만이 남아 있었다. 아직도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훅’ 더운 김이 얼굴로 끼어들었다. 그런데 돼지우리에 돼지가 총을 맞고 죽어 있었다. 외양간 소와 말들은 몇 마리만 들에 매어 두고 나머지는 다 풀어 놓았다.
 
  할아버지가 나가시더니 동네 청년 둘을 데리고 왔다. 뒷울에 숨겨 놓았던 멍석을 가져다가 나무 기둥을 세우고 사방으로 둘러 가려서 바람막이를 만들었다. 남아 있는 꼴단을 풀어 자리를 마련했다. 어머니는 숨겨 놓았던 솥을 꺼내 저녁밥을 준비했다. 할아버지는 빈 달구지에 죽은 돼지를 싣고 동네 사람과 같이 가까운 냇가로 갔다.
 
  얼마 후에 할아버지는 돼지고기를 갖고 왔다. 동네에 나눠 주다 남은 것을 갖고 온 것이다.
 
  저녁 식사를 했다. 삶은 돼지고기는 맛이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할아버지는 집으로 들어오지 않는 삼촌들을 걱정했다. 그 많은 자식들이 이제는 곁에 한 사람도 없다.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했다. 사방은 가려졌으나. 위는 가려져 있지 않아서 추웠다. 할아버지와 형은 장작들을 가져다가 마당 한가운데 밤새껏 불을 피웠다.
 
  뒷날도 우리 식구는 다시 마을을 떠났다. 거의 마을 집들이 불타 버렸으니, 다시 불태우려고 토벌대들이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집에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아직도 마을 외곽 외딴 곳에 몇 채의 집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다가 할아버지는 우리 형제를 십리 밖 외갓집에 가 살도록 어머니와 의논했다. 외가가 있는 신흥리 박수물 부락은 산촌 마을인데도 아직 토벌대들이 집을 불태우지 않았다.
 
  “식구들이 따로따로 있어야 나중에 어느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으면 시신이라도 수습할 게 아니냐?”
 
  할아버지는 우리를 떼어 보내기를 어려워하는 어머니를 설득하셨다. 어머니도 할아버지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를 외가로 보냈다. 어머니는 네 살 된 누이동생과 올해 태어난 남동생을 거느려야 했다. 나와 형님은 외갓집으로 떠났다. 제사나 큰일 때마다 형과 같이 다녔던 익숙한 길이었다. 산길을 가면서 형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예전에 외갓집을 찾아갈 때에는 즐거웠는데, 오늘은 슬펐다. 식구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두렵기도 했다.
 
 
  오랜만의 가족 재회
 
  외갓집에서 조반을 먹고 있는데, 어머니가 막내 동생을 업은 채로 찾아왔다.
 
  “아이들을 데려가쿠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께 아버지가 식구들을 데리러 오게 되었다고 말씀드렸다.
 
  “누님, 데려가지 마십서. 남원으로 소개해도 거기라고 안전할 줄 압니까? 이제 몇 달만 참으면 제주도가 새 세상이 될 텐데….”
 
  외삼촌이 나서서 어머니를 만류했다. (스물대여섯 쯤 된 외삼촌은 외갓집의 외아들이다. 벌써 장가를 가서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소학교만 나온 처지에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가? 아마 그쪽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교육을 받았을 테지. 그 외삼촌을 기억할 때마다 당시 제주도 사람들이 얼마나 허황된 생각에 갇혀 있었는가를 짐작한다.)
 
  “네가 어떻게 남의 집 자손을 책임질 수 있느냐? 누이 말대로 보내줘야 한다.”
 
  외할아버지가 외삼촌을 나무라면서 어머니 청을 받아들였다. (나는 그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훗날 어머니는 그때 정황을 여러 번 되풀이해서 말씀하셨다.)
 
  우리 형제는 어머니를 따라 고향 마을로 향하였다.
 
  후에 아버지께서 우리 식구를 구하려고 애쓰셨던 일을 여러 번 말씀하셨다. 가장으로서 아버지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추자도에 피신해 있었던 아버지는 제주도가 온통 불바다가 되었고 사람들이 다 죽어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루도 더 머물 수 없어서 제주읍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고향으로 갈 길이 아득했다. 제주읍에서 서귀포까지 동서로 신작로를 따라 정기 버스가 운행되었는데, 버스길이 막혀 버렸다. 길에 숨어 있던 무장대들의 습격이 두려워서였다.
 
  제주읍에는 아버지 외삼촌이 제주자동차회사 관리직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어른을 ‘차부할아버지’라고 호칭했다. 아버지는 외숙에게 사정했다. 제주읍에서 며칠 지내면서 섬이 온통 미친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나 길거리에서 서청원(서북청년단원)들에게 잘못 걸리면 반죽음이 되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다가 겨우 서쪽으로 서귀포까지 가는 버스 편을 얻을 수 있었다. 후에 아버지 말씀은 목숨을 하늘에 맡겨 두고 버스를 탔다는 것이다. 위험하다고 만류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루 종일 걸려서 서귀포에 도착했다. 그러나 남원까지 약 15킬로의 길을 가기가 아득했다. 아버지 형뻘 되는 친척 어른이 서귀포에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서 기숙하다가 자전거를 빌려 타고 한밤에 남원으로 달렸다. 위험한 길이었다. 경찰이나 산사람(무장 폭도들을 가리킴)에게 들키는 날에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족들 생각에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남원까지 왔으나 수망리 산간부락으로 가족을 데리러 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중산간(中山間) 부락, 특히 의귀리와 수망 한남리는 산사람 구역이었다. 산사람들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해변 마을로 내려가는 것을 막았다.
 
  그러다가 아버지는 지서에 협조를 얻고 수망리와 의귀리에 가족을 두고 있는 경찰관과 공무원들 몇이 의논해서 가족들을 소개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경찰관과 민보단원(산사람들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민간인들이 스스로 조직한 단체의 구성원) 몇이 지원을 받아 아버지와 몇 사람이 떠났다. 의귀리 마을 중앙에 이르렀을 때였다. 양쪽으로 총을 쏘아 대면서 공격해 오는데, 도저히 앞으로 나갈 수가 없어서 결국 퇴각하고 말았다.
 
  한 번 경험을 살려서 이번에는 더욱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고 경찰 병력도 많아졌다.
 
  며칠 전에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원에 와 계시니 내려와서 한번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어머니는 막내 동생을 업고, 한남리를 지나 남원리 윗동네인 서옷귀 마을로 남원에 가기로 작정했다. 그 길이 외진 길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동생을 업고서 아랫마을로 빠져나오는데, 길목을 지키고 있던 산사람에게 심문을 당했다.
 
  “오늘이 외갓집 제사인데, 시어머님이 누워 계시고 남자 어른들은 아무도 없어서 제가 가는 길이우다.”
 
  외갓집 이름도 댔다. 그렇게 두 번이나 검문을 받고 남원에 내려가 아버지를 만났다. 서로 살아 있다는 것만도 기뻤다. 어머니는 그 길로 다시 마을로 올라와서 내려갈 준비를 하고 우리를 데리고 온 것이다.
 
  우리가 마을 어귀에 있는 새기오름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젊은이 셋이 우리를 막아 섰다. 둘은 남자였고, 한 사람은 여자였다. 그중에 한 사람은 의귀리 아버지 진외가 일가 사람으로 어머니와는 잘 아는 사이였다.
 
  “이 뒤숭숭한데 어디 갔다 오셤쑤과?”
 
  아는 사내가 물었다. 나는 그들 허리에 찬 칼을 보았다.
 
  “아이들을 외갓집에 맡겨 두었다가 오늘이 조모님 제삿날이라서, 시국이 이렇지만….”
 
  그들은 어머니 얼굴을 찬찬히 보더니 어서 가 보라고 했다.
 
  “우리가 남원으로 소개해 가는 것을 다 알고 지키는 것 같다. 이 일을 어찌 하면 좋아?”
 
  어머니는 집에 당도하자 산사람을 만난 이야기를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이왕지사 하늘에 맡기자고 했다. 마차 두 대에 짐을 잔뜩 싣고 떠날 준비를 했다. 아버지는 우리 형제를 보더니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를 만난 것이 더 없이 좋았다. 형님은 이불을 한 채 지었고, 어머니는 동생을 업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마차를 끄는 소를 몰았다, 고모와 할머니도 이불을 지었다.
 
  “문주와 문찬이는?”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두 동생의 안부를 물었으나 할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약속한 장소로 갔다. 아랫마을로 내려가는 길목 ‘올리수’라는 냇가 앞에 모이면 경찰관들과 민보단원의 경호를 받으며 내려가게 되었다.
 
  모두들 모이자 출발했다. 우리를 경호하는 사람은 경찰관 여섯과 민보단원이 넷, 모두 열이었다. 민보단원이 앞장섰고 다음에 사람들, 그리고 경찰관은 뒤에서 따랐다. 대부분 일가 사람들로서 공무원 가족들이었다. 그중에는 의귀리에 가족을 둔 군청에 다니는 아버지 친구도 있었다. 의귀리에서 식구들에게 준비하도록 하고, 거기 있으면 위험할 것 같아서 경찰관을 따라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분이 먼저 내려가는데 이불을 진 형님도 따라갔다.
 
  일행이 내리막길을 내려섰을 때였다. 길에 담벽이 쌓여 있어 마차가 지나갈 수가 없었다. 경찰관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산사람들이 미리 알고 내려가는 길을 막아 놓은 것이다. 사람들이 쌓아 놓은 담벽을 치우려고 할 때였다. 오른편 숲에서 사격이 시작되었다. 모두들 혼비백산 마차를 두고 길을 벗어나 내(川) 반대편으로 달아났다. 나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서 무작정 뛰었다. 아버지는 형님을 걱정했다.
 
  우리는 외진 길을 이용해서 남원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러나 마차에 실은 짐은 다 놔두고 왔다. 형을 만났는데, 죽을 고비를 넘긴 이야기를 했다. 군청에 다니는 분과 같이 ‘높은모루’ 동산에 이르렀을 때였다. 오른편 숲에서 총소리가 났다. 형은 이불을 진 채 길가 도랑으로 굴러 떨어졌는데, 바로 앞에 가던 그분이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다. 형은 총소리가 뜸한 틈을 타서 이불을 진 채 무작정 뛰었다. 뒷날 그 군청에 다니는 아버지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렵게 남원리로 소개한 우리는 그래도 마음이 놓였다. 아버지 친구들이 필요한 세간과 식량을 마련해 주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고모와 며칠 뒤에 내려온 둘째 고모네 식구들은 할아버지 친구 집 바깥채를 빌려 살았다. 그런데 작은할아버지 댁으로 가신 증조부님은 모셔 오지 못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를 걱정했다.
 
  남원 마을은 조용했다. 우리는 신작로 길가 집에 살았다. 이따금 경찰관들이 신작로를 지나면서 “○○○ 있어!” 하고 소리쳤다. 그러면 집 주인인 중년 사내는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면서, “잘 있수다” 하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그 사연을 말했다. 이 집 주인은 사상 문제로 지서에 종종 드나들었는데, 요즈음은 몸이 아파 집에만 틀어박혀 지낸다고 했다. 경찰관은 지나가면서 그의 동태를 알아보기 위해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우리를 소개시키기 위해 당했던 이야기를 심심찮게 말했다. 내려오지 못한 두 삼촌과 증조할아버지를 걱정했다.
 
 
  불타는 마을
 
  진눈깨비가 어지럽게 날리던 초겨울 이른 아침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는데 마을 북쪽 입구에서 총소리가 연달아 났다. 늘 있는 일이어서 마음 쓰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총소리가 났다. 밖으로 나갔던 아버지가 황급히 들어오시면서 “폭도가 습격 왔다”고 소리쳤다. 우리는 식사를 그만두고 밖으로 나왔다. 마을 북쪽 곳곳에서는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어머니는 작은 이불로 갓난 동생을 싸 안고 나왔다. 아버지는 형님에게 소리쳤다.
 
  “길언이와 너는 저쪽으로 도망쳐라. 바닷가로 가서 숨어 있어라.”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와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형님은 아버지 지시대로 내 손을 붙잡고 바닷가로 달려갔다.
 
  바다는 만조여서 발 아래까지 물이 가득 찼다. 큰 바위를 의지해 숨어서 바로 눈앞으로 밀려 온 바닷물을 보면서 생각했다. 폭도가 여기까지 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그러면서 이따금 바위 밖으로 나와 마을을 바라보았다. 온통 마을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검은 연기가 초겨울 바람에 날려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이따금 총소리도 났다.
 
  썰물이 시작됐다. 아주 빠르게 물이 빠져나갔다. 우리가 숨어 있는 바위 아래로 자잘한 돌들이 널려 있는 돌밭이 펼쳐졌다. 거기에는 조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개를 잡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물이 빠져나가자 마음이 좀 여유로웠다.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때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사람 소리가 들렸다.
 
  “양민들은 손들고 나와라!”
 
  고함소리에 우리 형제는 두 손을 머리 위에 얹고 나갔다. 무장한 군인들이 모여드는 사람들을 정리했다. 마을을 뒤덮는 불길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군인의 안내를 받아 마을로 들어섰다. 신작로 양편에 늘어서 있던 집들이 모두 불타 없어졌고, 그 자리에 앙상한 돌담들만 남아 있었다. 면사무소도 학교도 모두 불타 없어졌다. 마을은 마치 도깨비나라 같았다. 불탄 자리에는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길가에는 죽은 사람들이 널려 있었다. 어린아이도 늙은이도 있었다. 짐을 진 채로 죽어 있는 사람도 보았다.
 
  우리는 지서 앞 고구마를 캐낸 넓은 밭에 모였다. 여기저기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랑 할아버지가 궁금했다. 형과 나는 주위를 두리두리 살피면서 식구들을 찾고 있었다.
 
  “야, 너네들 살아 있었구나!”
 
  어머니가 우리를 보고는 달려와 나를 껴안았다. 막내를 업고 여동생의 손목을 꼭 잡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는 갑자기 눈시울을 붉히면서 신작로 가에 있는 양철지붕 집을 가리켰다.
 
  달려가 보니 좁은 방 한 귀퉁이에 할머니가 누워 있고, 그 옆에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할머니 아랫도리는 벌겋게 피로 젖었다. 그 옆에 고모가 훌쩍이고 있었다. 폭도들이 철창으로 할머니 아랫도리를 마구 찔러서 피를 많이 흘렸다고 했다.
 
  “지가 살아줘서 고마워. 난 면목이 없어.”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저렇게 된 내력을 식구들에게 설명했다.
 
 
  우리 마을 사는 ‘청년 폭도’가 목숨 살려줘
 
  그즈음 할머니는 감기로 누워 있었다. 습격이 왔다는 말을 들었으나, 할아버지는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안채 친구가 피하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할머니를 옆구리에 끼고 뒷울로 나왔다. 울담이 높아서 할아버지가 먼저 담 위로 올라가서 할머니의 손을 잡고 끌어올리는데, 청년 두엇이 달려들어 담을 넘는 할머니를 철창으로 마구 찔렀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끌어올려 울담을 넘고서 피흘리는 할머니를 옆구리에 끼고 달렸다. 그런데 그 청년들도 쫓아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힘을 다해 달렸는데 폭도와의 거리가 차츰 좁아졌다. 마침 소나무들을 다 잘라 그대로 버려진 소나무 밭이 있었다. (그 당시 마을 주위 솔밭은 작전상 다 잘라 버렸다.) 할아버지는 그 솔가지 밑에 할머니를 밀어 넣으면서
 
  “나라도 살아야 나중에 시신이라도 수습할 테니, ….”
 
  피 흘리는 할머니를 놔두고 혼자 달렸다. 그제야 뒤따라오던 폭도들이 되돌아갔다.
 
  토벌대 증원군이 들어와서 마을을 수습하자 할아버지는 그 소나무밭으로 가서 할머니를 찾았다. 할머니는 피를 흘리면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밖에서 사람 떠드는 소리가 났다. “죽여! 찢어 죽여!” 아버지가 나갔다. 나도 뒤따라 나갔다. 길가에 한 사내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사람들이 돌멩이를 던지고 장작으로 두들겨 패면서 고함을 질렀다. 이 폭도 새끼야. 아버지가 그에게 가서 얼굴을 보았다. 나도 보았다. 우리 마을 사람이었다. 그 아들이 나보다 학교 1년 선배였다. 나는 무서워 들어와 버렸고, 아버지도 들어왔다. “누구더냐?” “예, 저 윗동네 ○○○입디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라는 표정이다.
 
  고모가 죽었다가 살아난 이야기를 말했다.
 
  할아버지네와 같은 집에서 살던 막내 고모와 둘째 고모도 폭도가 습격했다는 말에 마당으로 나왔다. 앞집이 불타고 있었다. 올레로부터 사람이 들어오는 기척이 났다. 엉겁결에 외양간으로 들어가니 멍석이 있었다. 그것을 펼쳐서 안에 숨었다. 사람이 외양간으로 들어와서 멍석을 휙 걷어 냈다. 두 고모와 청년의 눈이 마주쳤다. 순간 청년은 얼른 그 멍석을 덮고는 나가 버렸다.
 
  “여기 아무도 없으니, 어서 가자. 가져갈 것도 없다.” 그들은 짚단에 불을 붙여 지붕 위로 내던지고 밖으로 달아났다. 두 고모는 집이 불타는 것을 알고는 얼른 나와 뒷울에 숨어서 살아났다.
 
  “그가 누구더냐?”
 
  할아버지가 물었다. 그러나 고모는 할아버지 말을 못들은 척했다.
 
  “누구냔 말이냐?”
 
  할아버지가 역정을 내셨다.
 
  “그 사내가 어머니를 저 지경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거우다. 그러니 다시 묻지 맙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말할 수 없수다.”
 
  둘째 고모 표정이 하도 완강했다. 아무도 더 묻지 않았다. (고모는 그 후 30년이 지난 어느 날 소설을 쓴다는 내게 그 사람 이름을 말했다. 이미 그 사내는 세상을 떠난 후였다. 우리 마을 청년이었다.
 
  “우리 네 식구랑, 동생까지 여섯을 살려준 은인인데도,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서로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되어서. 그런데 이제는 말해도 되지, 조카야. 그렇지?”
 
  나는 고모의 그 말을 들으면서 4·3을 다시 생각했다. 생명의 은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없었던 그 마음을 누가 이해할 것인가?)
 
 
  곳곳에 널려 있는 작은 무덤들
 
  그날 곱게 늙은 노인이 할머니 옆으로 와 앉더니 손을 꼭 잡아 주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 노인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할머니 친정 친척이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남로당 면 중심인물이었다. 그러나 친정 조카가 경찰 간부여서 친정집에 의지해 살다가 습격을 당한 것이다.
 
  잠시 후에 바닷가에서 총소리가 요란스럽게 났다. 습격 왔다가 미처 되돌아가지 못하여 잡힌 폭도를 총살한다고 누가 말했다.
 
  뒷날 그 곱상한 노인이 보이지 않았다. 경찰에 잡혀 가서 총살당했다고 들었다.
 
  이틀 후에 경찰 삼촌이 할머니 일을 알고는 스리쿼더를 타고 왔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우리 형제가 그 차를 타고 서귀포로 갔다. 할머니는 병원에 입원했고, 우리 형제와 할아버지는 아버지 고종4촌 여동생네 바깥채에 기식하였다. 그 삼촌은 여자이지만 일본에서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때 서귀포 경찰서 여자경찰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서귀포에서 지내던 며칠 동안에 시골 아이인 나로서는 서귀포가 인상적이었다. 내가 4살 때인가, 요도결석으로 이곳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생전 처음으로 버스를 탔는데, 길가 전신주들이 재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신통했다. 서귀포에서는 지붕 위에 전신주(전기 배선용)들이 있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나는 경찰에서 가져다주는 누룽지를 맛있게 먹기도 했고, 이따금 서귀국민학교 주변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크고 규모가 반듯한 학교건물이 부러웠다. 그런데 지금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교문에는 집총한 군인이 두 사람씩 근무를 하는데, 눈을 부라리고 오가는 사람들을 주시했다. 국민학교 앞에서 서귀포 바다를 보면 마치 꿈속처럼 편안하고 아름다웠다. 섭섬과 새섬과 문섬이 한눈에 들어왔다. 물새 우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이따금 교문에서 트럭이 나왔다. 양편 좌석에는 집총한 군인들이 있고, 그 가운데는 포승에 묶인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다. 저들이 폭도다. 이제 총살하러 간다. 구경하던 아이들이 소곤거렸다. 트럭이 학교를 빠져나가 얼마쯤 지나서 정방폭포 쪽에서 총소리가 어지럽게 났다.
 
  우리 형제는 며칠 동안 서귀포 생활을 마치고 남원으로 돌아왔다. 지서 앞 넓은 공터에는 ‘함바’라는 임시 움막과 같은 집들이 즐비하게 지어져 있었다. 송진내 나는 나무들을 잘라다가 임시로 기둥을 세우고 띠를 엮어 덮고 사방도 띠를 엮어 겨우 바람막이를 한 집이었다. 그 함바를 한 가구에 한 칸씩 나눠 주었다. 우리는 할아버지와 고모네가 있고, 둘째 고모랑 세 칸을 차지하게 되었다.
 
  습격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제일 끔찍한 이야기는 남원 마을의 경우 지서 주변 몇 가구를 제외하고는 약 400호가 불타 버렸다. 죽은 사람이 60명이 넘는다고 했다. 그것을 알려주듯이 마을 이곳저곳에는 아기무덤 같은 작은 무덤들이 많이 새로 생겼다. 그중에 끔찍한 사건은 정씨 집안(우리가 일제시대 그 집 바깥채에서 살았다) 일이다. 나보다 1년 선배인 (고) 정자홍네 근친인 (3촌인가 4촌지간일 거다) 한 가족 모두가 폭도에게 납치당해 행방불명이 되었다. 중년인 주인은 반 미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살던 그 집, 아침마다 경찰관이 지나가면서 이름을 부르면서 확인했던 그 사람도 습격 온 날 밤에 경찰에 잡혀 가 총살을 당했다. 그리고 습격 와서 많은 물품을 가져간 산사람들은 수망리 외곽 큰 내에 있는 사리물 궤야에서 잔치를 벌이다가, 뒷날 새벽에 출동한 토벌대에 의하여 거의 죽음을 당했다고 했다.
 
  모든 주민이 동원되어 푸지개로 돌을 날라다가 지서를 중심으로 돌성을 쌓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은 철창을 들고 토벌대와 같이 공비토벌에 참여했다. 중산간 부락에서 내려온 주민들은 토벌대를 따라 고향 마을로 올라가 숨겨 놓았던 물건들을 갖고 나왔다. 우리도 집이 불타기 전에 숨겨 놓았던 것 중에 남은 것들은 갖고 내려왔다. 그것으로 한 겨울을 살아야 했다.
 
 
  처형 직전의 폭도들에 몽둥이 세례
 
4·3사건이 평정기에 접어든 1949년 4월 제주 학교 운동장에서 심문반(왼팔에 완장 찬 사람)이 귀순자 가운데 가담 혐의자를 가려내고 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토벌대에 참여했다. 증조할아버지와 삼촌네를 찾기 위해서였다. 할아버지는 이따금 한숨을 쉬었다.
 
  “지 에미가 저렇게 된 것을 알고 있나, 원. 불효막심한 놈! 그 습격 온 날 지놈도 틀림없이 왔을 테니, 제가 지 애미를 저 지경으로 만든 거여.”
 
  할아버지는 이따금 탄식처럼 말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할아버지의 그 심정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아들에 대한 원망의 말이 아니라, 그리움의 말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산에서 귀순하는 사람들을 붙잡고 증조할아버지와 삼촌네 소식을 물었다. 그런데 들려오는 이야기는 분분했다. 증조할아버지도 한곳에 오래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옮겨다닌다는 것이다. 삼촌에 대해서는 언젠가 우리 집터에 와서는 울기도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아마 할머니가 저렇게 된 것을 알고 있었을 거라고 식구들은 말했다.
 
  매일매일 귀순해 오는 사람이 많아졌다. 막대기에 하얀 헝겊으로 백기를 만들어 들고 한 가족이 무거운 짐을 지고 내려왔다. 아이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놀다가 그런 사람들을 보면, “빨갱이 온다!” 소리를 지르면서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다.
 
  함바에는 매일 아침 싸우는 소리로 떠들썩했다. 문제는 대변을 처리하는 것이다. 변소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대부분 공중변소가 마련되어 있기는 한데 너무 사람이 많아서 급하면 바닷가로 가서 아무 데서나 처리하였다. 한밤중에는 그렇게 나돌아다니는 것이 두려워서 함바 주변에 아무렇게나 처리했다. 그러면 남원리 사람들은 “폭도들의 ○”이라고 몰아붙였다. 그 대변을 보면 안다고 했다. 나무 열매가 나오면 틀림없이 폭도들 것이라고 했다. 남원리 사람들은 소개해 온 사람들을 모두 “폭도”라고 했다. 그들은 집과 재산을 하루아침에 다 불태워 잃어버렸고, 어떤 집에서는 사람도 죽거나 다쳤으니 그렇게 분을 풀었다.
 
  사람들에게는 식수도 문제였다. 국민학교 운동장 옆에 두레박으로 떠올리는 깊은 우물이 있고, 간조 때에는 바닷가 샘에서도 물을 길어 왔다. 그런데 우물에서 물을 길을 때에는 산간 부락에서 내려온 아낙들이 멸시를 당하곤 했다.
 
  담이 완성되자 그 밖 출입은 허가를 받아야 했다. 나는 마을을 약간 벗어나 소나무들을 베어 낸 솔밭으로 가서 땔감을 해 왔다. 한 겨울을 지내려면 허술한 함바에서는 땔감이 필요했다.
 
  어느 날 오후였다.
 
  “모두들 지서 뒤로 모입서.”
 
  마을 유사가 두부 종을 흔들면서 함바 동네를 돌아다녔다. 사람들을 집합시킬 일이 있으면 언제나 그랬다. 무슨 일인가?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궁금해했다.
 
  사람들이 지서 뒤 고구마를 캐 낸 밭에 많이 모였다. 그 밭 주위에는 쓸모없는 잡초 밭이어서 꽤 너른 터였다.
 
  “여러분 중에 유가족은 다 나와요!”
 
  지서 주임이 모인 사람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경찰관들이 사람들 틈을 다니면서 나오도록 재촉했다. 할아버지는 주위를 살피더니 나갔다. 할머니가 산사람에게 창을 맞았으니 유가족이 되었다. 아버지는 그 장소에 나가지 않았다.
 
  잠시 후에 트럭이 한 대 도착했다.
 
  “유가족들은 몽둥이를 하나씩 준비해요!”
 
  지서 주임이 다시 말했다.
 
  트럭에서 먼저 무장한 경찰들이 내렸고, 이어 포승에 묶인 사람들이 내렸다. 벌써 “저놈 죽여라! 찢어 죽여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하시오!”
 
  운전석에서 내린 권총 찬 경찰관은 약간 높직한 곳으로 올라가서는 흥분한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여기 있는 이 폭도들은 악질 중에 악질이요.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평화로운 마을을 불바다로 만들었고 우리 형제를 죽인 악독한 폭도들이요.” 그러고는 뭔가 장황하게 말했다. “이번에 폭도들로부터 피해를 많이 당한 위미리와 남원리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이들을 처형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유가족들은 한을 푸세요.”
 
  말이 떨어지자 유가족들은 돌멩이를 던지면서 분에 복받친 저주를 퍼부었다. 어떤 사람은 몽둥이를 들고 가서 이미 반죽음이 된 그들을 내리쳤다. 그들은 얼굴을 땅에 박은 채 고통에 못 이겨 바둥거렸다. 순간 내게 떠오르는 그림이 있었다. 누에들이 누에판 위에서 꾸물대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그중에 한 사람이 어떻게 포승을 풀었는지 달아나기 시작했다. 너무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경찰관들이 당황해서 마구 총질을 했다. 그러나 그 폭도는 위쪽을 향해 달려갔다. 아무리 총을 쏘아도 맞지 않았다. 달려가는 사람의 주위에 총탄이 떨어지는가 먼지가 일었다. 그때 위에서 사람이 내려왔다. “그놈, 폭도다. 잡아라!” 이편에서 소리를 질렀다. 도망치던 청년이 내려오는 사람과 한바탕 붙었다. 이편에서 경찰관이 달려가서 결국 그가 다시 잡혀 왔다.
 
  유가족의 저주와 분노와 증오에 의해 거의 죽은 폭도들을 향해 경찰들은 확인 사살을 하듯이 마구 총을 쏘았다. 사람들이 조용했다. 분을 머금고 “죽여라”고 소리를 지르던 사람들도 조용했다. 어디선가 바람까마귀 떼가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시신을 그냥 두고 함바로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넋 나간 얼굴이었다.
 
 
  삼촌의 시신을 찾아 묻다!
 
  뒷날 이른 새벽에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데리고 지서로 가서 사정을 했다. 아는 친척의 시신을 거둬 주려고 한다고. 지서에서도 허락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누구도 보지 않을 때에 어제 그곳으로 갔다. 시신들은 엉켜 있었다. 두 부자는 막내 삼촌의 시신을 겨우 찾았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으나 혈육이어서 찾아낼 수 있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눈물을 머금고 아들과 동생을 땅을 파서 묻고 작은 아기무덤을 만들었다. 막내 삼촌이 처형을 당하던 그날에, 어머니께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니 남원에 내려가도 안심할 수 없다’고 말하던 그 외삼촌은 위미리에서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를 봐준 것이구나.” 중얼거렸다. 남원에서 처형당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시는 것이다.
 
  그날 이후 할아버지는 말 수가 아주 적어졌다. 이따금 한라산 쪽을 쳐다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하루는 우리 함바로 최근에 하산한 아버지 아는 사람이 놀러왔다. 그는 며칠 전에 식구들을 데리고 자진 귀순을 했는데, 아버지가 신원을 보증해 줘서 석방이 되었다. 그즈음엔 귀순한 사람들의 경우 큰 문제가 없으면 대부분 석방시켰다. 의귀리 아랫동네 사람이라, 의귀리 사람이 보증을 서 줘야 하는데, 마침 지서에 볼일이 있어 갔던 아버지가 보증을 서 주게 된 것이다.
 
  그 사람은 아버지께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산속의 생활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던 아버지는 우리가 남원으로 소개할 때 당했던 일을 말했다.
 
  그 말을 듣던 그 사람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면서 아버지 다리를 확 부여잡는 것이었다.
 
  “성님, 살려주십서. 그때 나도 무장대와 같이 있었수다. 나는 총질은 하지 않았지만, 길 한가운데 담벽을 쌓아서 우마차가 건너가지 못하게 했고, 그렇게 해서 못 가져간 물품들을 모두 구루마(마차) 채로 가져갔수다.”
 
  아버지는 그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도둑놈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맞구나. “성님, 제가 그때 가져간 물건 값을 이제 갚겠수다. 밭이 여러 필이 있는데, 그중에 아무 거라도 말만 허십서. 드리쿠다. 빈말이 아니우다.”
 
  그러면서 밭 이름을 죽 말했다.
 
  “어느 것도 좋수다. 원하시는 것을 말하면, 제가 드립주. 이 자리에서 증서를 쓰쿠다.”
 
  그제야 아버지는 그의 마음을 알았다.
 
  “오해허지 말게. 난 그저 지내 온 이야기를 하는 것뿐이네. 자네에게 무슨 밭을 받아. 난 그런 생각 추호도 없네. 이렇게 살아서 얼굴을 마주보고 지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조상의 은덕이 아닌가?”
 
  그래도 그 사람은 몇 번이고 아버지께 권하다가 거절당하자, “그럼 그 은혜 평생 잊지 않겠수다” 하고 마무리를 지었다.
 
  그 당시에는 말 한마디에 목숨이 오락가락할 때였다. 훗날 아버지는 그때 그 사람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은 참 잘한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학교까지 불태웠던 산사람들
 
  겨울이 오자, 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가 더 걱정되었다. 그리고 아직도 소식이 없는 삼촌도 걱정이었다. 어느 날 귀순한 사람을 통해서 증조할아버지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뒷날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토벌대에 끼여 고향으로 갔다. 증조할아버지는 마을 외곽에 있는 궤야에 혼자 계셨다. 어떻게 끼니를 해결하셨는지, 알 길이 없다. 토벌대 눈을 피해 작은할아버지네가 잡수실 것을 준비해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워낙 토벌이 심하여서 그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우선 증조할아버지는 모셔올 수 있어서 안심했다.
 
  형님은 추자도 삼촌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갔고, 할아버지는 함바 생활이 어려워서 옆 마을 태흥리에 집을 빌려 이사했다.
 
  봄이 되자 학교가 개학했다. 학교도 모두 불타 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바람막이를 찾아가서 공부했다. 조회 때마다 교장선생님은 다른 학교에서 보내온 위문편지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교장선생님은 남원국민학교에 일제시대부터 계셨던 분이다. 사태가 어려워지자, 졸업대장, 학적부, 상장대장 같은 중요 문서를 안전한 곳에 숨겨 두어서 다행스럽게 보존할 수 있었다. 그 일은 내가 5학년이 되던 해 밤에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다. 어느 날 교장선생님은 조회 때에 왜 산사람들이 학교까지 불태웠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학교를 불태울 때에 졸업생도 있었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터진다고 말씀하셨다.
 
  그즈음에 학교를 짓는다는 말이 나돌았다. 의귀리에는 토벌대들이 주민가옥은 모두 불태우면서도 학교는 그대로 두었다. 그래서 거기에 군부대가 주둔해 있었는데, 얼마 전에 무장대들이 한밤중에 기습해 와서 한바탕 큰 전투가 벌어졌다. 그 후에 군부대는 태흥리로 옮겨 갔고, 학교 건물은 그대로 있다. 면에서는 그 학교를 그대로 해체하여 그 재목으로 초등학교를 짓기로 했다. 의귀리 사람들은 반대를 했으나, 그대로 놔두면 학교 건물이 온전히 남을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타협이 되었다.
 
  어느 날 의귀리 군부대에서 무장대와 군인 간에 큰 전투가 벌어졌다. 새벽에 무장대 대부대가 군부대를 습격했는데, 학교 지붕에 설치해 둔 기관총으로 무장대를 물리쳤다. 그 싸움에서 군인도 여러 명이 전사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동안 귀순한 산사람들을 부대에서 심사해서 석방을 했다. 그날도 석방한 사람들이 있어서 더러는 해변 마을로 내려갔고, 내려가도 의탁할 데가 없는 사람들은 내일 낮에 내려가기로 하고 하룻밤 더 머물렀다. 그런데 그날 밤에 싸움이 벌어졌다. 부대장은 남아 있는 귀순자들을 모두 처형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하루 좀 편하게 지내려다가 큰 변을 당한 것이다.
 
 
  마을 재건
 
  6·25전쟁이 일어나는 해, 그러니까 1950년에 의귀리 마을이 재건되었다. 학교터를 중심으로 돌성을 쌓고 그 안에 집을 지어 해변 마을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은 돌아왔다. 수망리나 한남리 사람들도 재건된 이 마을로 몰려들었다. 해변 마을에서 괄시를 받으면서 살기보다는 고향이 가까운 이 마을이 좋았던 것이다. 성문을 남북 두 곳에 두고 허락을 받아야 외부 출입을 하게 되었다. 낮과 밤에 성 담 곳곳에 만들어진 보초막에서 남녀 주민들이 교대로 지켰다. 경찰관 출장소를 두어 마을을 산사람들로부터 보호했다.
 
  할아버지와 둘째 고모네는 의귀리로 이사했다. 고향 밭에 농사를 짓는 데는 남원리보다 가까워서 편리했다. 의귀리가 재건된 그해 여름에 산사람에게 크게 다친 할머니는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산에 남아 있었던 삼촌의 소식은 여전히 듣지 못했다. 어디서 처형을 당했다는 소식도, 재판을 받았다는 소식도 없었다.
 
  일 년 뒤에 수망리 마을도 재건되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남원에 그대로 살았다. 아버지가 면사무소에서 일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에 우리는 수망리 고향 마을로 되돌아갔다. 집이 전소되어 남원으로 소개한 후 3년 만이다. 마을 사람들은 성을 쌓고 그 안에 살았고, 밤이면 성문 밖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다. 밤과 낮에는 보초를 섰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허락을 받아야 했다. 원래 우리 마을은 110가구쯤 되었는데, 정작 재건해서 올라온 집은 60가구도 채 안되었다. 그 사태에 식구가 전몰한 집도 있고, 어린아이만 남아서 가족을 이룰 수 없는 집도 있었다. 아직 다른 마을에 사는 것이 편해서 올라오지 않은 집안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두어 해 전만 해도 모두가 공비였고, 산폭도였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수망리 사람이 되었다. 그들은 산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주저하지 않고 했다. 사람들은 모여 앉으면 그때 이야기를 했다. 누가 산사람이고, 누가 토벌대 편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삶과 죽음이 한순간에 달려 있었음을 체험한 이야기를 풍성하게 했다. 모두들 그 이야기를 즐겁게 했고 들었다.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누구의 이야기이든 그것이 내 이야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막내 고모가 그 시국에 혼기를 놓치고 시집을 가지 못하다가, 그 사태 때에 숨어 있다가 귀순해서 운 좋게 재판을 받고 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하다가 만기 출소한 분과 결혼을 하였다. 그 고모부는 집 앞에 수백 년 된 팽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올라가 살다가 토벌대에 귀순했다. 고모부는 숨어 살 때 이야기나 수형생활 이야기를 재미있게 했다. 자랑할 일이 아니지만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고모부는 고모와 살면서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얻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여름방학이 되면 고향에 내려와 어머니와 조밭 김을 매었다. 대여섯이 매었는데, 이랑 앞에 앉아서 김을 매기 시작하면 어머니는 이야기판을 벌였다. 어머니 이야기가 끝나면 다른 부인네가 이야기를 넘겨받았다. 대부분 그 시국에 살아난 이야기이다. 어머니는 한이 많았다. 외아들인 외삼촌이 그 지경을 당했으니. 시어머니도 그렇게 되었다. 시동생 둘을 잃었다. 장손의 며느리로서 집안을 책임져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누구를 미워하고, 좋아하고 할 겨를이 없이 살았다.
 
  그즈음에 한라산에는 공비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도 한라산은 안전하지 않았다. 우리 마을 위쪽 교래리로 가는 길목 붉은오름 밑에 토벌대가 주둔하였고, 민오름 정상에도 토벌대가 주둔했다. 공비가 출몰하면 즉시 출동할 수 있도록 한라산을 중심으로 빙 돌아가면서 토벌대가 주둔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공비를 토끼몰이식으로 토벌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농사를 짓지 않았던 밭에는 잡풀이 우거졌다. 마을 사람들은 그 풀을 베고 오랜만에 밭을 갈아 농사를 지었다. 불타 버린 집터를 정리했다. 집이 있었던 자리에 남아 있는 담벽을 헐고 그 돌들을 한곳으로 모았다. 그 일을 하면서 할아버지는 마음이 아팠다. 작은삼촌의 소식은 막연했다. 죽었다는 소식도 듣지 못했다.
 
  성은 탄탄하게 쌓았다. 약 5~6m 간격으로 이중 담을 쌓고 그 사이에는 마을 냇가에 지천으로 널려 있었던 탱자나무를 잘라다가 놓았다. 누구도 그 가시 많은 탱자나무를 밟고 성안으로 넘어올 수 없었다.
 
  아직 밭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생활이 어려웠다. 옛 집터에 우거진 나무들을 베어 내어 숯을 구워 팔았다. 마을 목장은 졸참나무 밭인데, 그 나무로 숯을 구웠다. 우리 마을에서 생산되는 숯은 제주시에서도 환영을 받았다. 피난민들이 많이 몰려와서 숯의 소비량이 많아졌다.
 
  나는 수망리로 이사 와서 1년을 남원국민학교로 통학하다가 졸업하고는 아버지께 떼를 써서 읍내 중학교로 진학했다. 6·25전쟁으로 피난민들이 들끓어서, 4·3사건에 대한 일도 거의 잊어지고 있었다.
 
  어느 날 마지막 남은 공비인 오○○가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아무런 감동도 없었다. 그리고 1954년 겨울에 한라산이 개방되면서 실질적으로 4·3사건이 끝났다.
 
 
  1954년 겨울
 
  그해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겨울방학이 늦어졌다. 12월 20일 넘어서 방학이 되었다. 형님과 그 친구들은 4·3사건이 끝났다고 한라산이 개방되었으니 산을 가로질러 고향에 가 보자고 했다. 신작로가 생기기 전에는 한라산 남쪽에 사는 사람들은 이 산길을 이용해서 말을 타거나 걸어서 성안(제주시)을 오갔다. 하루 나절 거린다고 했다.
 
  나는 형님과 형님네 친구 셋(고교 2, 3학년)이서 이른 새벽에 제주시를 떠났다. 아침도 변변하게 먹지 못했다. 자취를 하던 처지라, 더구나 방학이 가까워지면 식량도 용돈도 다 떨어질 즈음이었다. 우리가 살던 집 할머니가 새벽에 떠나는 우리 형제를 생각해서 배고프면 먹으라고 콩을 볶아 주었다.
 
  봉개 마을 지나 명도암이란 동네에 이르자 길가에 눈이 조금씩 남아 있었다. 우리는 마음 쓰지 않았다. 한라산이 개방되고서 우리가 처음으로 산을 가로질러 간다는 생각에 약간 설레기도 했다.
 
  교래리 평원으로 들어서는 길목인 다내오름 기슭을 지나자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그동안에 사람 출입이 없었지만 예전 길은 없어지지 않았다. 교래리 평원에 이르자 온통 눈밭이어서 길을 찾기가 어려웠다. 눈이 정강이까지 차 올랐다. 다리가 지쳤다. 내가 좀 쉬어 가자고 하면 형님이 눈을 부릅뜨고 재촉했다. 이럴 때에 앉아서 졸면 끝장이라고 했다.
 
  우리는 할머니가 마련해 준 볶은 콩을 조금씩 나누어 먹으면서 걸었다.
 
  길을 찾을 수 없었으나 교래리 지경과 남군(南郡)을 경계 짓는 잣담이 있고, 그곳을 넘어서면 토벌대 주둔소가 있던 붉은오름이다. 그 오름만 바라보면서 걸었다. 길이 따로 없었다. 다행히 눈이 더 내리지는 않았다. 그래도 정강이까지 차 오른 눈길을 걷는 것은 너무 힘겨웠다.
 
  우리는 거의 해가 질 무렵에 잣담을 넘어 붉은오름 기슭에 이르렀다. 눈이 덜 쌓였다. 다리에 힘이 없고, 배가 고팠다. 그러나 이제 우리 마을 지경으로 들어섰다는 안도감에 힘이 솟았다.
 
  “저기가 붉은오름 주둔소였던 자리다.”
 
  형의 친구가 말했다.
 
  “여기에서 더 산속으로 들어가면 궤야들이 많아. 거기 가 숨으면 누가 와도 찾을 수 없지. 식량만 충분하였다면 공비들이 오래도록 싸울 수 있었을 거야.”
 
  산에서 산생활을 했던 형의 친구가 말했다.
 
  조금 내려가자 민오름 주둔소 성담이 눈을 뒤집어쓴 채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주둔소에서 근무했던 토벌대들도 죽을 고생을 했어. 얼마나 춥다고. 토벌대원 중에도 골병든 사람이 많아.”
 
  우리는 이미 옛날이 된 4·3사건을 이야기했다. 형 친구 셋은 산생활을 했는데, 다행히 살아났다. 이야기를 시작하자 그때 산생활이 재미있었다는 듯이 이야기가 길어졌다. 마을이 가까워지자 이상하게 허기진 배도 덜 고팠고, 지친 다리에 힘이 났다.
 
  “참 의미 있는 행사를 치렀다. 한라산 개방 기념으로 산을 가로질러 고향에 오게 되었으니.”
 
  형의 말에 모두들 잠잠했다. 정말 그 사태에 살아남았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4·3사건의 끝남을 기념하여 한라산 동쪽 기슭 교래리 벌판을 가로질러 산길 걷기가 무사히 끝났다. 이 넓은 벌판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면서 죽어 갔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배고픔과 헐벗음과 공포에 짓눌려 증오를 씹으면서 세월을 보냈는가? 우리가 걸어 왔던 죽음의 그 눈길을 얼마나 많은 제주 사람이 밟으면서 세상을 원망했던가? 그러나 그날 우리는 그 아픈 지난날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나누었다.
 
  문득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맨몸으로 그 넓은 벌판 눈길에 도전했던 일이 되살아났다. 나에게 4·3은 이렇게 끝났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을 보면서, 그것이 제주 사람들의 하얀 넋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4·3은 그날로 끝나지 않았다. 나는 내게 퍼부었던 야유와 비난의 글들을 읽다가 그만두면서, “당신들이 4·3을 아느냐”고 되묻고 싶었다. 왜 4·3은 날이 갈수록 그 사건과 관계가 덜한 사람들에 의해 분노와 대립과 갈등으로 치닫게 하는가? 나같이 4·3을 폄훼한다는 사람들 때문인가? 누가 진정으로 4·3을 폄훼하는가? 그것은 죽은 이들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진실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그 시국을 살았던 사람들은 그 진실을 공유할 수 있었다.
 
  작년에 형님은 제주도 여기저기 흩어진 조상의 묘소를 옛 집터 뒤로 이장했다. 그 자리에 생사를 모르는 문주 삼촌의 가묘와 남원에서 처형당한 문찬 삼촌의 묘소도 이장하여 나란히 모셨다. 이 두 무덤을 바로 바라보도록 할아버지 할머니의 묘소가 앉아 있다. 문찬 삼촌이 유가족들의 저주에 숨을 거두면서, 그 유가족 틈에 끼여 허둥대는 할아버지 모습을 보았을까 겁이 난다. 할아버지도 그러한 상상에 얼마나 괴로워했을까? 할머니는 당신의 아랫도리를 찌른 그 청년이 혹시 문주 삼촌의 모습을 꿈에라도 보지 않았을까?
 
  경찰에 한평생 몸담았던 셋삼촌은 두 동생을 생각할 때마다 소리없이 울었다. 어느 날 꿈에 두 동생이 집 올레 정낭 밖에 서 있는데, 셋삼촌이 ‘왜 거기 서 있느냐. 어서 올레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해도, 두 동생은 물끄러미 형을 바라보다가 등을 돌리더라고 꿈 이야기를 했다. 그러한 꿈을 꾸기까지 두 동생의 죽음에 집착해 있었던 셋삼촌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4·3사건에 희생된 영령들을 위로하는 일인지, 생각할수록 아득하기만 하다.⊙
 
 
 

입력 : 2019.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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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기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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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진화 (2019-04-03)

    너무도 안타까웠던 일이네요.
    현 소설가께서 겪은 일을 눈에 선히 보이도록 써주셔서 그때의 망막함이 몰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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