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駐韓美軍 공보관 - 金永圭의 25년 체험 증언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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駐韓美軍 공보관 - 金永圭의 25년 체험 증언 『美軍들은 좋은 일 하고도 욕 먹는 「바보짓」을 많이 했다』 反美 감정과 反韓 감정의 협공 속에서 냉정함을 잃지 않는 그는 『미군들은 우리를 동반자라고 생각하는데 우리가 1960~70년대식 생각에 매여 그들이 우리를 얕잡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gomsi@chosun.com) 세 가지 직함을 가진 사람 金永圭(김영규ㆍ56)씨는 세 가지 타이틀을 가지고 산다. 駐韓(주한)미군사령부, 駐韓유엔군사령부, 韓美연합사령부의 공보관이 그의 「공식」 직함이다. 金씨의 사무실은 서울 용산 美8군 메인포스트內에 있는 공보실. 그의 사무실 전화와 휴대전화는 內外信의 문의 전화로 종일 몸살을 앓는다. 남들은 한번 충전하면 며칠씩 사용한다는 휴대전화 배터리도 퇴근 무렵인 오후 5시면 바닥이 난다. 韓美 관계의 「接點(접점)」에 있는 그는 韓美 50년 동맹사상 최악의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동맹관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를 만나기 위해 사무실로 전화부터 걸었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의 답변은 대변인의 성명처럼 우렁차고 간단 명료했다. 『내일 외신기자들과 판문점엘 들어가는데 날 만나려거든 오전 9시에 통일대교 입구로 나오시오. 鄭周永(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끌고 들어간 다리 말이오!』 지난 1월29일 설연휴 직전, 기자는 승용차를 몰고 자유로를 달렸다. 간밤에 도로에 쌓인 눈이 영하 14도의 맹추위로 얼어붙어 고속으로 달리는 차를 위태롭게 했다. 판문점으로 가는 길의 주변 산들은 눈을 뒤집어쓴 채 얼어 있었다. 체감온도 영하 20도를 상회하는 칼바람 속에서 AP, AFP 등 세계의 주요 통신사의 기자들이 유엔군사령부의 협조로 판문점을 찾은 것이다. 駐韓미군 공보관인 金씨가 外信기자들을 따라나서는 일은 그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경비대대인 캠프 보니파스로 가는 길, 金씨가 『1980년대 이전에는 판문점을 출입하는 정치부 기자들이 나의 파트너였었는데, 1990년대 들어서면서 미군 범죄ㆍ매향리사격장ㆍ노근리 사건 등으로 사회부 기자들이 파트너가 됐다』고 말했다. 캠프 보니파스의 VIP 브리핑룸에 들어서니 여덟 평 남짓한 공간 벽면에 주한미군의 略史(약사)가 사진으로 걸려 있었다. 북한의 NPT(核확산금지조약) 탈퇴로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자, 외신 데스크들의 취재 성화에 떠밀리다시피 판문점을 찾았다는 푸른 눈의 외국기자들도 8ㆍ18도끼만행 사건만은 관심 있게 쳐다봤다. 15분간 프로젝터로 부대의 현황과 임무가 소개되는 동안, 金씨는 어두운 실내에 소파에 몸을 묻고 묵묵히 듣고 있었다. 브리핑을 하는 담당 하사관의 멘트를 거의 외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물었더니 『훤하지요, 뭐~』하고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캠프 보니파스를 나와 남방한계선에 접어드니까 金씨의 움직임이 기민해졌다. 가이드를 담당한 美軍 하사관의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창한 영어로 보충설명을 했다. 부대 바로 옆에 있는 골프장에 대한 설명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1홀짜리 골프장, 「컴배트(Combat)」입니다. 三面(삼면)이 지뢰밭으로 덮여 있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골프 코스죠』 취재진을 태운 봉고차가 對전차 방벽을 통과해 남방한계선을 통과해 비무장 지대로 들어갔다. 남방한계선에서 1km쯤 진행했을까, 金씨가 기자에게 『중요한 지형』이라며 길옆에 양쪽으로 늘어선 초소들을 가리켰다. 『이것이 바로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미군에게 자동개입 명분을 주는 「인계철선」(trip wire)입니다. 북한군이 이곳을 통과하면 길 양 옆에 있는 콜리어(Collierㆍ도로 왼쪽) 초소와 오울렛(Ouelletteㆍ도로 오른쪽) 초소의 美軍 병사들이 다치게 되고 自國 병사 보호라는 개입 명분을 주던 것이죠. 그런데 이 두 초소(241초소, 240초소)는 1991년 10월1일자로 한국군 1사단과 유엔사 관할로 넘어갔습니다. 비무장지대의 경계가 완전히 한국군에 의해 이뤄진 것을 의미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FCFS(first come first servedㆍ선착순) 원칙 「자유의 집」에 하차한 취재진은 「자유의 집」 로비를 지나 판문점 회담장 앞에 섰다. 영화 「공동경비구역(JSA)」의 포스터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2인1조로 구역을 순찰하는 북한 병사들이 다리를 쭉쭉 뻗으며 걸어갔다. 『너무 앞으로 가지 마시고 이곳에서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金씨가 포토라인을 지정해 주었다. 그는 군사분계선(MDL)이 판문점에서 어떤 모양으로 변하는지 설명했다. 『군사분계선 철조망이 판문점에 들어오면 하얀 시멘트 기둥으로 바뀌고요, 군사정전委(Military Armistice Commission) 회담장으로 들어가면 시멘트로 된 문지방으로, 회담 테이블 위에서는 마이크선으로 바뀝니다』 회담장 건물 안에서는 남북 구분이 없었다! 분단이 없다! 단지 남쪽과 북쪽에 출입문이 하나씩 나있을 뿐이었다. ―북한 측 관광객들과 서로 똑같이 입장하면 어떻게 합니까. 『먼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먼저 구경하게 돼 있어요. 영어로 하면 FCFS (first come first servedㆍ선착순) 원칙입니다. 옛날에는 회담장 안에 중립국 감독委 깃발을 깃대 봉에 꽂아 벽에 걸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글쎄 북한 병사가 깃대 봉에 꽂혀 있는 미국 星條旗(성조기)를 빼 구두를 닦았다지 뭡니까. 그래서 지금은 액자에 담아 놓았지요』 「聖域(성역)」이란 뜻의 휴게소인 생추어리(santuary) 클럽에 들어서니 병사들이 TV로 부시 美 대통령의 새해 국정연설을 시청하고 있었다. 金씨는 공동경비구역에 근무하는 중대장 데이비스(Davis) 대위에게 몇 마디 질문을 던질 기회를 주선했다. ―최근 촛불시위를 비롯해 反美시위가 일어나고 있는데, JSA에 근무하는 美軍과 한국군은 이번 사건으로 서로 어색하지는 않나요. 데이비스 대위는 대답하는 것을 상당히 곤혹스러워했다. 『우리는 시위 현장을 볼 수 없고, 그런 것에 신경을 안 씁니다. 이곳 부대는 60%가 한국 병사들입니다. 우리 美軍들은 韓美관계에 흠이 가지 않도록 부대 내에서 한국 병사들과 사이좋게 지내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反美감정은 자칫하면 韓美 50년 동맹관계를 깨뜨릴 수 있다고 우려하는 한국인들이 많습니다. 한국인들의 反美에 대해 젊은 나이에 이역 땅에 와서 한국의 안보를 지켜 주는 사람으로서 어떤 기분이 듭니까. 『우리 병사들은 한국에서 1년간 복무하기 때문에 솔직히 그런 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더 이상 묻지 말라며 기자의 손을 잡으며 곤란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金공보관은 『美軍들은 공동경비구역에 근무하는 것을 큰 긍지로 여기고 있다』면서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면 JSA에 근무했던 사람들이 만든 동호회도 있을 정도』라고 했다. 金공보관은 1976년 늦은 나이에 카투사에 입대해 美2사단에 근무하다가 제대를 앞두고 스카우트돼 美2사단 공보관으로 駐韓미군 공보업무를 시작했다. 1980년 美8군사령부로 자리를 옮겨 23년간 공보업무를 담당해 왔다. 그는 駐韓美軍 공보담당으로서 駐韓美軍의 역할 변화를, 유엔司 공보관으로서 판문점을 통해 남북관계를 지켜봤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976년 주한미군에 첫발, 25년간 공보관으로 ―공보관에게 가장 필요한 德目이 무엇인가요. 『駐韓미군 공보관으로는 미국의 對北정책을 잘 알아야 하고, 연합사 공보관으로서는 韓美간 관계를 잘 알아야 하고, 유엔司 공보관으로서는 세계 정세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제 일은 각국의 움직임을 늘 머리 속에 담고 있어야 하고, 책도 관련분야 것을 탐독해야 합니다』 「대결의 장소」였던 판문점은 1990~ 1991년 체육회담ㆍ경제회담ㆍ국회회담이 성사되면서 「대화의 장소」로 변모했다. 그러다가 유엔司가 군사정전委 대표로 한국군 장성을 임명한 후부터는 북한 측이 정전협정 일방 파기를 선언했다. 체코·중국 등 自國의 중립국 감독委를 철수시키면서 소위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를 만들어 「대결의 장소」로 만들었다. 그러나 1998년 故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통일대교를 넘어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통과해 판문점을 「교류의 장소」로 만든다. 金공보관은 『북한이 범민족대회를 판문점 북측에서 개최하면서 집회도 하고 예술제도 하는 「행사의 장소」로 탈바꿈했다』고 판문점의 역사를 요약했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군사정전委는 본회의와 비서장 회의를 포함, 1000여 차례 열렸습니다. 판문점에는 얼마나 드나드셨는지. 『제가 판문점을 유엔司 공보관 자격으로 오는 것 아닙니까. 군사정전委 회담이 열릴 때는 셀 수 없이 드나들었어요. 최근에는 회담 자체가 드물어졌고, 북한이 이유야 어떻든 정전협정을 무력화시키는 바람에 군사정전委 회담도 없어졌고, 유엔司와 북한간의 장성급 회담은 북한 측의 거부로 거의 열리지 않습니다. 여하튼 1990년 기록을 보면 많을 때는 회담을 1년에 30여 차례 연 적도 있으니까요. 한 번 회담하면 두세 시간 걸리고, 그 시간 동안 북한 기자들과 얘기하는 거죠. 1년에 60시간 이상 얘기하는 셈이니까요』 ―자주 만나다 보면 북한을 더 잘 알 수 있겠지요. 『물론 일반 국민들보다는 북한을 더 이해하겠지요. 그러나 제 견해에는 軍의 시각이 많이 들어가요. 이런 거죠. 6ㆍ15 남북 頂上회담 이후에도 155마일 휴전선에는 화해 분위기가 없잖아요.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정확한 남북관계의 진단이 필요합니다. 110만 명의 북한군 중 70%에 해당하는 77만 명이 휴전선에 배치돼 있다는 것은 국민들이 간과해서는 안 돼요. 세계에 이렇게 위험한 곳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렇지만 그는 남북 교류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남북간에 교류와 대화를 지속해야 한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1970년대에 대화가 시작돼 현재에 이르렀고… 대화와 교류가 있으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어요. 1970년대 이후에는 비무장지대內의 사건ㆍ사고가 많이 줄었습니다』 「南朝鮮 기자단장」 ―북한기자들과 私的(사적)으로 만나면 속깊은 이야기를 합니까. 『인사하고 날씨를 화제 삼다가 그날의 회담이야기를 하고, 나중에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해요. 예를 들어 1990년대에는 核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기억들이 많아요. 禁忌(금기)도 있습니다』 ―뭡니까. 『국가원수에 대한 誹謗(비방)인데, 이야기가 깨집니다』 ―처음 들어갔을 때 공보관을 어떻게 알고 있던가요. 『기자 완장(PRESS)을 차고 들어가지만, 저는 제 신분을 밝혀요. 북측 기자들이 유엔司 공보관이라는 직책을 알지 못하니까 자기들이 「金선생」이라고 부르면서 「南朝鮮 기자단장」으로 여겼어요. 기자들을 인솔하고, 회담 때는 양측의 발언문을 받아서 양측 기자들에게 줬으니까요. 제가 정부 기관원도 아니고 언론사 기자도 아닌 신분이니까 좀더 자유스럽게 저와 얘기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북측 기자들은 우리 기자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못 했군요. 『기자라면 자신이 취재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실질적으로 그렇게 오갔던 얘기가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거든요. 오늘 기자들끼리 만나서 나눈 이야기가 그날 밤 우리 방송을 통해서 나가면, 북측 기자들이 저를 단장으로 생각해서인지 제게 항의를 해요. 「내가 언제 그런 이야기를 했느냐. (기사 쓴 記者를 거명하며) 그 악질기자는 출입시키지 말라」고 화를 냅디다』 ―식사도 같이 합니까. 『군사정전委 회담은 회담장에서 하니까 그럴 수 없고, 그 외의 회담은 번갈아가며 북측 「통일각」이나 우리 쪽 「자유의 집」에서 열 것 아닙니까. 주최하는 쪽에서 음식을 대접해요. 통일각에서 회담할 때인데 그곳 식당에서 심지어 동짓날이라고 팥죽을 쑤어 낸 적도 있었으니까. 우리 민족이 음식 인심은 좋잖아요. 서로를 넉넉하게 대접합니다』 ―외신기자들이 한국에 취재를 오면 왜 공보관께서 직접 「가이드」를 하십니까. 공보실에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金씨는 갑자기 정색을 하며 기자의 질문을 반박했다. 『「가이드」란 표현은 안 쓰는 게 좋아요. 외신기자들이 오면 판문점 경비대대에서 군인 가이드가 따라 나오지만, 공보실에서 나가야 하는 이유는 기자들에게 판문점의 정확한 「팩트」를 전달하기 위해서죠. 질문이 있으면 공보관으로서 유엔司의 공식입장을 외국 언론에 알려줘야 하거든요』 유럽기자들, 미국기자들보다 북한 더 잘 알아 ―가장 곤란한 질문은 어떤 것인가요? 『유엔司 공보관이 아니고 가끔 한국인으로서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어요. 우리식으로는 황당한 질문인데, 「통일이 언제쯤 될 것 같은가」라고 물어요. 상당히 곤혹스럽죠』 ―어떻게 답변을 합니까. 『저는 私見(사견)임을 전제로 「가까운 장래에는 힘들 것이다」라고 해요. 영어로 「not in the near future」라고 합니다』 ―현재 참전국은 몇 나라나 한국에 남아 있습니까. 『유엔司는 참전국 16개국과 의료지원국 5개국을 합쳐 21개국입니다. 현재는 미국을 포함해 15개국이 유엔司에 대표를 파견하고 있습니다. 대표단은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의 미군 기지內(유엔컴파운드)에 있죠. 대표 중 많은 사람들이 해당국의 武官(무관)을 겸하고 있죠. 우리가 장성급 회담을 할 때도 한국ㆍ미국ㆍ영국 대표를 常任(상임)으로 하고, 교체대표로 프랑스ㆍ호주ㆍ뉴질랜드ㆍ태국을 임명해 참석시킵니다』 그는 유엔司가 존재하는 것은 한반도가 아직도 엄연히 「停戰(정전)상태」라는 사실이라고 했다. 한국전쟁은 분명히 유엔군의 이름 아래 전쟁을 치렀고, 유엔군의 이름으로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1978년 이전까지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던 유엔司가 1978년 韓美聯合司가 창설되면서 작전지휘권을 韓美聯合司로 이전하면서 유엔사의 「기능」이 작전지휘권과는 거리가 먼 비무장지대 관리와 정전협정 관련 업무만 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아직도 유엔司의 후방사령부(UNC Rear Command)가 지금도 일본에 위치하고 있어요. 물론 실제 병력은 아니고 스태프 요원들로 봐야지요. 유엔사령부도 15개국 병력이 아닌 「UNC의장대」 하나를 상징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공보관의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언제 느끼게 됩니까. 『콜 중위 헬기추락 사건, 8ㆍ18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비무장지대 총격사건 등 국제적 관심이 쏠리는 사건이 터지면 워싱턴, 런던 등지에서 전화통이 불이 나도록 걸려옵니다. 이때 비로소 제 일의 비중을 느끼죠』 그는 얼마 전 외신기자들과 백령도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때 일행들의 화제는 「생맥주 파티」였다고 한다. 『따뜻한 5월에 회담이 있었는데 우리 측에서 생맥주 대를 판문점 우리 측에 설치했어요. 햇살도 좋고 비치 파라솔까지 설치하니까 그럴싸하지요. 러시아, 중국, 북한기자들이 참 좋아하더라고요. 북한 기자들은 1990년대만 해도 우리가 주는 것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눈치를 보는 거죠. 러시아, 중국 기자들은 눈치를 볼 필요가 없잖아요. 500cc 맥주잔 「조끼」를 기념으로 달라는 친구도 있었어요』 ―북한 기자들에게 북한 돌아가는 상황을 물어보면 정보가 될 만한 것을 이야기해 줍니까. 『1994년 7월8일 金日成이 사망했을 때, 金正日이 언제 승계하느냐를 가지고 논란이 많았잖아요. 1991년부터 남북관계가 경직됐는데, 金日成 사후인데도 美軍 유해 반환이 있었어요. 그때 북한 기자들을 만나 「언제쯤 金正日이 주석직을 승계하는가」를 물었어요. 그때 북한의 고참 기자들이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더라고. 「우리들이 볼 때는 3년 내로는 절대로 안 한다」고. 서너 명이 비슷하게 대답했어요. 북한 기자들의 이야기가 「주석직 승계가 중요한 게 아니다. 권력은 진작 이양됐기 때문에 要式(요식)절차만 남은 것 아니냐」고 했어요. 그후 우리 언론이나 정보기관에서 예측한 것은 다 틀렸어요. 결국 3년 뒤에 승계했잖아요』 『最南端에서 태어나 最北端에서 일하는 사람』 지난 2월3일 오후, 서울 용산에 있는 美8군사령부 메인 포스트에 있는 金永圭 공보관의 사무실에서 두 번째로 만났다. 그는 오늘 駐韓美軍 공보관으로 기자를 맞는 것이다. 물론 9ㆍ11테러 이후 미군기지에 대한 보안 검색이 강화돼 그의 「호송」을 받아야 했다. 인터뷰가 적당한 시간을 택했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金공보관은 이날 50여 통이 넘는 전화를 내외신 기자로부터 받았노라고 했다. 駐韓 美8군은 이날, 한국에서의 임기를 마친 장교와 병사 약 2900명에게 앞으로 6개월간 한국에 더 머물도록 할 방침이라고 밝힌 것이 전화통에 불이 나게 만든 것이었다. 이날 金공보관은 보도자료를 통해 『美 육군성에 장병들에 대한 인사이동 중단명령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고 승인을 기다리는 중』이라며 『美 육군성에서 승인이 나면 美 8군 소속 약 2900명의 장병들이 정상 전출 명령대로 이동되지 않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올해 초, 미국 본토 또는 다른 해외 미군부대로 이동 배치될 예정이었다. 그는 부연설명을 했다. 『美軍은 全세계 전략개념을 세우기 때문에 병력보충을 위해 美 육군성에 약 2900명 정도만 「추천자 명단(recommand list)」를 만든 거예요. 駐韓美軍은 최상의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고, 이것을 美 육군성에 보고한 거고, 그런데도 언론들은 한반도 위기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전력증강 아니냐고 끈질기게 묻는 겁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녹음기 틀듯 수십 차례 해야 하는 일은 보통 사람의 인내력으로는 당해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상대방이 전문지식이 없으면 배경설명까지 곁들여 이번 조치를 설명했다. 金공보관은 스스로를 『最南端(최남단)에서 태어나 最北端(최북단)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제주에서 태어나 판문점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그는 영어를 배우기 쉬운 환경에서 자랐다. 제주大 영문학과 교수였던 부친의 서재에서 原書를 뒤적이며 학창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연세大 사학과에 진학한 그는 학창시절, TIME誌 등을 섭렵하며 영어공부에 빠졌다. 서울에 있을 때는 仲父인 金寅昊(김인호ㆍ73) 前 전주제지 사장 댁에서 학교엘 다녔다. 조선일보 정치부장ㆍ중앙일보 편집국장을 지내기도 했던 金寅昊씨는 金공보관에게 글쓰기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 그는 제주도 향우회지인 「徽脈(휘맥)」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제주 民亂(민란)」에 대해 기고를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편집위원으로 같이 활동했던 이가 金首宗(김수종) 한국일보 논설위원이다. 30세에 軍에 입대 金공보관은 카투사 출신이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학원강사 등을 하다 1976년 30세의 나이로 입대했다. 「고도 근시」였던 그는 대학 때 몇 번 징집됐으나 신체검사에서 떨어져 귀향조치되곤 했다. 그래서 입대가 늦어졌다고 한다. 논산훈련소에서 행정 주특기를 받아 카투사로 배치됐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그를 받으려는 미군부대가 없어 근무환경이 가장 열악하다는 美2사단에서 근무하게 됐다. 그게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보충대에 도착해 보니 2사단 영자신문인 「인디언 헤드(Indian Heads)」 기자 선발 시험이 있더라고요. 제가 영어시험에서 80점 가까이 받아 1등을 했는데, 2등이 40점 정도였습니다. 이곳에서도 나이가 많다고 반대했지만 실력이 없으면 일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날 받았어요』 그는 인디언 헤드 기자로 일하면서 「나이를 의식하면 軍 생활이 지루해지고 나로서는 힘겨운 생활이 될 것이다. 나이를 초월해 매사에 적극적이 되자」고 결심한다. 당시 美2사단은 캠프가 제주도에서 비무장지대까지 분산돼 있었다고 한다. 「인디언 헤드」는 한글판, 영문판 두 가지가 있었다. 그는 한참 나이 어린 한글판 신문 편집장 밑에서 기자로 일을 시작했다. 金공보관은 이때 같이 일한 게리 브룸필드(Garry Broomfieldㆍ60)라는 미국인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했던 게리 브룸필드는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참 착한 친구였어요. 미국 고향에서 입던 옷을 빨아서 한 박스씩 가져와 고아원에 가져다 주었고, 피아노도 고쳐 주기도 했지요』 金공보관이 가톨릭 신자가 된 것도 게리 브룸필드의 영향이었다. 게리 브룸필드는 경기도 의왕市에 있는 나환자촌인 聖나자로 마을, 경기도 동두천市에 있는 혼혈아들을 함께 취재했다. 1974년부터 나환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후원이 필요할 때였다. 특히 혼혈아 기사는 국내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코리아헤럴드 등 한국의 언론매체에서 추가 취재를 나왔을 정도였다. 『이렇게 비참한 줄 몰랐다는 편지가 막 날아왔어요. 기사가 계기가 돼 駐韓美軍은 「혼혈인 협회」를 구성했어요. 대한적십자사에서는 혼혈인들을 위한 직업학교를 수원에 세웠어요. 저는 주말이나 밤이면 「샬롬하우스」에 혼혈아 40~50명씩 모아놓고 영어를 가르쳤지요. 사회나 학교에서 冷待(냉대)를 받았으니까, 애환이 참 많았어요』 金씨는 제대하기 3개월 전, 미군 측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다. 『월급표를 갖다 놓고 일해 보지 않겠냐고 해요. 7급부터 간부인데 저에게 11급을 주겠다는 겁니다. 당시 대졸 초임을 훨씬 뛰어넘는 파격적인 대우였어요. 군대 오기 전에 뚜렷한 직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기왕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으니까 2~3년 더 공부하자는 생각으로 눌러앉은 거죠』 「인디언 헤드」 기자 시절,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발생한다. 1976년 8월18일, 당시 미국 경비중대장 보니파스 대위 등 15명은 視界(시계) 정리를 위해 「돌아오지 않는 다리」 부근의 남측 제3초소 앞에서 미루나무 가지를 자르고 있었다. 이때 북한군 15명이 접근해 작업중단을 요구했다. 보니파스 중대장 등은 이를 무시하며 작업을 계속하다가, 추가로 투입된 북한 증원군 등 모두 40여 명에게 변을 당했다. 북한군은 피신하던 미군을 작업도구인 도끼로 공격해 2명의 미군장교가 사망하고, 8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때 상황이 긴박했지요. 『방탄복을 입고 헬기를 타고 현장으로 가는데 죽으러 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사건이 발생하자, 美2사단 공병대가 투입돼 나무 자르는 「폴 번연(나무神이라 함)」 작전이 전개됐습니다. 만일, 북한 측이 총 한 방만 쐈으면 전쟁이 일어났을 정도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어요』 『제일 가기 싫은 나라, 한국』 駐韓美軍 북쪽 기지(메인 포스트)와 남쪽 기지(사우스 포스트)를 잇는 고가차도(Over-Bridge) 건설공사 기공식이 있던 지난 2월6일, 기자는 金永圭 공보관을 용산에서 다시 만났다. 용산구청 관계자는 『두 기지를 잇는 고가차도가 생기면 주변 교통소통이 지금보다 원활해질 것으로 보고 도로점용을 허가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민단체들은 용산 기지를 장기적으로 이전키로 하고 구체적인 이전 방안이 연구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시설을 만드는 것에 대해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며 20여 명이 메인 포스트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한국 사람들이 그만큼 미국 사람들을 모르는 겁니다. 그들은 삶의 질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래서 駐韓美軍은 대한민국 각처에서 근무하는 미군들에게 동일한 복지혜택을 주려 하고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용산 기지가 내일 이전된다고 해도 오늘 생활에 불편한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기 위해 건물을 짓는다는 게 그들의 사고방식이죠』 金공보관은 이들 시위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투로 말했다. 승용차로 그가 사는 경기도 군포市에 있는 산본 신도시로 향했다. 차 안에서 미군기지 얘기를 꺼냈다. ―駐韓美軍들은 결혼하면 가족들을 데리고 올 수 있나요. 『한국에는 駐韓美軍의 숙소가 부족해 美軍 중 일단 기혼자(3만7000명의 美軍 중 57%인 1만9370명)의 10%만 올 수 있습니다. 때문에 지금 駐韓美軍이 취하고 있는 정책은 서울 이북 근무자(美2사단 해당)는 가족을 동반할 수 없습니다. 본인이 그래도 데리고 오고싶다면 「지원(command sponsership)」 없이 자비로 집을 얻어야지요』 ―왜 서울 이남 근무는 가족동반을 허용하나요. 『정확한 이유는 몰라요. 독일과 日本이 각각 74, 72% 정도 가족을 동반할 수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한국에서 지내면 심리적 안정을 찾아 결국 전투력 증강으로 이어질 것 아닙니까? 현실이 그러질 못하니까 일부 美軍 영관급 장교는 한국 발령을 받으면 전역을 신청합니다. 얼마 전, 美 국방성에서 조사한 「해외근무지 희망국가」에서 한국이 80여 개국 중 꼴찌를 차지했습니다. 가장 있기 싫어하는 나라가 한국이에요』 미군 아파트를 지으면 두 가지 좋은 점 그래서 駐韓美軍은 병사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2005년까지 25%, 2010년까지 50% 정도 가족을 데리고 올 수 있도록 용산, 오산에 아파트를 지을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미군 아파트를 지으면 두 가지 좋은 점이 있어요. 하나는 미군들에게 안정적인 생활여건을 마련해 줌으로써 전투력 향상에 기여할 것이고, 다음은 약 3억 달러 가량의 공사를 한국 건설업체가 맡게 된다는 점입니다. 오죽하면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美軍이 아파트 내부를 언론인들에게 보여 줬겠습니까? 40년 전에 세워진 아파트는 슬럼화됐기 때문이죠』 ―미군 사격장은 좀 개선이 됐나요. 『경기도 화성의 매향리 사격장, 파주의 스토리 사격장은 상당부분 개선됐습니다. 적어도 기총소사는 없앴어요. 두 곳은 한국군도 사용하는 사격장입니다. 항상 100% 전투태세를 유지해야 하는 軍에 훈련장이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한반도 같은 안보상황에서는 오히려 우리 국민들이 「훈련장을 더 잘 활용해서 전투태세를 완벽하게 갖춰 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럭저럭 한 시간을 이야기하다 보니 金공보관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金공보관과 동향인 부인 李守珍(이수진ㆍ49)씨가 저녁을 준비했는데 반찬이 창란젓, 생선구이 등 온통 「海軍」 일색이었다. 해산물 아닌 것이라고는 김치찌개가 있는데 제주의 명물 「흑돼지」로 만든 것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그의 서재로 자리를 옮겼다. 書齋(서재)에는 韓美관계 책들이 많았다. 駐韓美軍으로부터 받은 감사패와 공로패가 여러 개 눈에 띄었다. 와인을 서너병 가져다 놓더니 담배를 피워 물었다. 죽어서도 고향에 반드시 돌아가는 美軍 ―한국전쟁 때 전사한 미군들의 유해반환은 언제부터 시작됐습니까. 『1990년대 초로 기억됩니다. 저는 언론사 기자들과 하와이에 있는 美 육군중앙신원확인소(CILHI)를 두 차례 방문했습니다. 해외에서 전사한 단 한 명의 유해라도 찾아야 한다는 강한 집념을 느꼈어요. 조각난 유골의 신원확인을 위해 齒科(치과)기록까지 샅샅이 뒤집니다. 戰死(전사)한 후에도 국가가 나를 돌봐 준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가짐이 다를 수밖에요』 한국전쟁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미군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金공보관은 『3만7000명의 미군이 전사했고, 9만2000명이 부상했어요. 실종자 및 전쟁포로는 8000명 정도입니다. 이 중 일부가 송환된 것』이라고 했다. ―어떤 경로를 통해 북한과 유해송환 협상을 했나요. 『1990년경에 미국 측이 전사자 자료, 지도, 관련자 증언을 북한 측에 넘겨 발굴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북한 측은 발굴한 유해 수십 구를 유엔군, 미군에게 안 주고 미국 정치인인 몽고메리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이유는 뭡니까.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힘들지 모르지만 유엔司나 미국 쪽에서는 「유엔군 遺骸(유해)」라는 표현을 쓰고, 북한은 그들 대표가 기자회견을 통해 「미군 遺骸」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美軍하고 직거래한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거죠』 ―美北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지금도 유해발굴은 계속하고 있습니까. 『1990년대에 미국과 북한 간에 「발굴 공동 조사단」을 구성했습니다. 발굴팀이 구성돼 미국과 북한 간에 매년 12월이면 협의를 통해 이듬해 발굴 횟수와 지역을 합의합니다. 얼마전부터 유해 전달 행사를 판문점에서 하다가 최근에는 정전회담이 끊어지면서 판문점에서 하지 않고 있습니다. 美 발굴단이 요코다(橫田) 공군기지에서 직접 북한으로 날아가 발굴한 다음, 遺骸도 요코다 기지로 비행기로 실어옵니다』 ―미군 유해 한 具(구)당 얼마씩을 북한에 지불한다는데, 사실입니까. 『사실과 다릅니다. 발굴단이 그곳에서 쓰는 경비, 북한차량 임차, 현지 북한인 고용 인건비 등 제반비용을 합쳐서 돈을 북한에 주는 겁니다』 ―어느 지역을 주로 발굴합니까? 『美 해병대가 많이 희생된 함북 長津湖(장진호) 부근을 발굴하고 있습니다. 종전에는 美2사단이 격전을 치른 평양 北方 쪽을 했습니다. 한국군도 2000년부터 국내 발굴작업을 하고 있는데, 때늦은 감이 있지만 참 다행스런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장진호 전투(Chosin Reservoir Battle·「초신」은 장진의 일본식 표기)에서 엄청난 사상자가 양쪽에서 발생했다. 美軍 측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만 중공군 2만5000명, 미군 3000명의 전사자가 나왔다. 미군 참전용사들은 1983년 4월 장진호 전투에서 일부만 살아 남았다는 뜻의 「초신 퓨(Chosin Few)」라는 생존자협회를 결성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 대부분은 이런 뜻을 가진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미군 궤도차량에 숨진 두 여중생 사망사고 이후 한국에서는 지난해 11월 말부터 反美 감정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미군들은 대체로 「한국인들은 대부분 친절하고 부지런하다」고 얘기를 해요. 아직까지도 한국에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건 「공보관의 修辭(수사)」가 아닙니다. 미군들은 自願(자원)이 아닌 근무명령에 의해 한국에 1년간 있게 되는데, 미군들은 東洋의 이질적인 문화에 대해 흥미를 갖습니다. 다만, 美軍들 가운데 연령, 출신이 다양하다 보니 우리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도 범죄가 있듯이 미군들도 범죄가 있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죠』 金공보관은 담배를 피워 물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작년 말 美8군 공보처 소속 A(42) 중령이 서울 용산 중앙경리단 앞 지하도에서 길을 가던 20代 청년 세 명에게 얻어맞은 사건이 있었지요. 이 과정에서 A중령은 가벼운 찰과상과 타박상을 입었지만 자칫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도 있는 사건이었어요. 제가 그 사람과 이야기를 했더니 「한국 사람들 대부분은 이런 뜻을 가진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고 하더군요. 그게 미군들 생각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얼마 전에는 기차역에서 미군에게 침을 뱉고 욕설을 한 사건도 있었는데요, 美軍들도 이런 것들이 쌓이면 한국 사람에게 적대감을 갖지 않을까요? 『대전제는 한국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는 美軍이 대부분이라는 것이고. 그건 美軍이기 이전에 같은 인간으로서 어떻게 느낄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것들이지요. 나아가 異域萬里(이역만리)에 있는 그들의 부모나 가족은 어떻게 생각할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죠』 『미군은 좋은 일만 하고, 되레 욕만 먹는 「바보짓」을 했다』 金공보관은 韓美관계가 변화해 왔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고 했다. 『우리 경제도 발전했고, 韓美관계도 명실상부하게 동반자 관계에 들어섰잖아요. 그럼, 우리들의 시각도 동반자적 관계로 출발해야죠. 미군들도 변해 우리를 동반자로 생각하고 있는데, 우리 스스로 1960~70년대 미군의 모습만을 보고 그들이 우리를 나무라고 얕잡아 본다고 생각한다면 시대착오적입니다』 ―최근 들어 한국을 바라보는 美軍들의 시각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美軍들은 1950년대 이후 일관되게 한국을 친구로 여기고 있습니다. 1960년대 활발하게 이뤄진 게 美軍들의 고아원 돕기입니다. 먹을 것을 주고, 건물을 지어 주고… 미국인들이 고아원 시설에 자주 간다는 것을 알리는 것은 이 사람들이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한국민들과 같이 하나의 공동체(community)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단순한 「제스처」가 아니라 사회봉사라는 것을 어릴 때부터 교육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는 최근 군산 기지에서 희귀 혈액형인 「AB―」을 가진 미군 병사가 헌혈해 생명을 구한 사실, 병원이 없는 백령도에서 한밤중에 妊婦(임부)가 생명이 위태로워 야간비행 경력이 있는 조종사가 자원해 인천 병원으로 옮겨 산모와 아기의 생명을 구한 사실들을 열거했다. 『美軍들이 병원으로 산모를 다시 찾았을 때 저도 동행했습니다. 그 반가운 표정! 인간이면 누구나 마찬가지 아니에요? 생명을 살렸다는데! 얼마나 미군병사 자신도 뿌듯합니까. 그게 인간이거든요』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본 것인데, 「미국이 옛날 우리 아버지에게 해준 것을 가지고 왜 우리에게까지 고마워하라고 하느냐」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공보관으로서 私見이 너무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지만, 그럼 저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에게 되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언제 美軍들이 우리에게 「왜 고마워하지 않느냐」고 요구한 적이 있는가. 물론 한 사람의 개인 의견으로는 표출됐을 테지만요. 미군과 접촉할 기회가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그런 식의 뉘앙스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겁니다. 미군들은 좋은 일만 하고 되레 욕만 먹은 「바보짓」을 한 셈이 됐습니다』 ―駐韓美軍 범죄에 대해 한국에서 형사재판권을 행사하는 문제에 대해 첨예하게 대립돼 있는 상황 아닌가요. 『기본적으로 공무중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는 미군 측이 사건을 관할하고, 공무수행중이 아닌 때 일어난 사건만 한국 측으로 가져갑니다. 신문에 보도됐지만, 미군 소령 군의관이 이태원에서 한국인에게 칼에 찔려 죽은 사건도 있었습니다. 人間事에서 일어나는 일들, 범죄 등 잘못된 것이 용납받는 사회는 없다는 겁니다. 미군도 범죄를 저지르면 형사재판권을 어디에서 행사하든 간에 처벌을 받습니다. 범죄자를 용납하는 조직은 지탱을 못 합니다. 형사재판권을 어느 나라가 행사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큰 시각으로 이해를 해주면 좋겠어요. 한국 사람들이 한국 측에서 형사재판권 행사를 안 하니까 미군 측이 「팔이 안으로 굽듯」 범죄자들을 봐준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게 아니죠. 美軍이 어떤 처벌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통계로 내서 언론사에 보낸 적도 있어요. 불행하게도 실어 준 데는 없지만…』 「처벌」의 韓美 인식차 金공보관은 미국과 한국의 처벌 개념이 다르다고 했다. 『한국사람은 처벌을 「징역(imprisonment)」이라고 생각해요. 미국인들은 「벌금(fine)」과 「강등(degradation)」이라는 형벌을 큰 형벌로 여깁니다. 직업군인으로서 상사까지 올라갔는데, 이등병으로 강등됐다면 生存權(생존권)과 직결되는 것이죠. 月 2000달러를 받던 사람이 500달러로 減俸(감봉)됐다면 생존권 문제지요』 ―지난해 6월13일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故 신효순ㆍ심미선 양의 사건에 대해 검사가 유죄를 입증시키기 위해 노력을 안 했다는 논란이 있습니다만. 『저는 재판 현장에 있었지만 첫째는 배심원 선정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군사재판 규정상 배심원은 군인이 돼야 합니다. 배심원을 선발할 때 무작위로 하지 않습니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하지요.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을 것이라고 뽑았지만 그것으로 안심이 안 되니까 변호사와 검찰 측에서 배심원 審理(심리)를 합니다. 여러 질문을 통해서 부당하게 한쪽 편을 들지 않겠다고 판단이 되면 통과가 되지만 조금이라도 의심이 나면 제외됩니다. 이번 군사재판에서도 첫 번째 심리에서 배심원 10명 중 3명이 탈락했어요. 분명한 것은, 변호사나 검찰 어느 누구도 지기를 원하는 재판은 없습니다. 자기의 명예도 걸린 사안인데 왜 멍에를 지려고 하겠습니까?』 ―이번 사안은 美軍에게 한국인이 희생당한 사건 아닙니까? 『희생자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軍의 전통과 수백 년의 사법전통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오해하지 말 것을 전제로 말씀 드리면, 두 여중생의 비극적인 사망에도 불구하고 한국內 有罪 정서와는 달리 無罪가 평결된 것은 미국 사법부의 독립성을 보여 준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駐韓美軍 측이 여중생 사건과 관련해 처리과정에 미흡했다는 지적에 대해 그는 『최근까지 공보담당으로서 편하지 않았다』면서 『그만큼 미군 측도 계속 이 비극적 사건에 대해 취할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심했다는 것은 알아야 한다』고 했다. 『처음에 사고가 나자 美2사단 공병여단 캠프 하우즈 부대장과 러셀 L. 아너레이 美2사단장이 유가족을 방문해 위로금을 전달하고 사과했습니다. 그런데 보도가 잘못된 것 중 하나가 일부 시민단체와 언론이 위로금을 가지고 건 시비였어요. 「두 여중생을 죽여 놓고 어떻게 100만원으로 입막음을 하려느냐」고요. 처음 부대장이 찾아간 것은 慰勞(위로)와 問喪(문상)을 간 겁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부조」하러 간 거죠. 지난 1월26일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에 추락한 미군 제5정찰대대 소속 U-2S機 사건 때도 정찰기가 피해를 입은 차 정비업소를 찾아 위로금을 전달했습니다. 배상하고는 전혀 다른데도 언론이 사실과 다르게 보도하니까 본질에서 벗어나게 되는 겁니다. 美측에서 배상절차에 대해 유족들에게 설명했고, 美측은 한국 법무부에서 통보를 받고 신속하게 두 여중생의 유가족에게 각각 1억9500만원씩 배상했어요』 『한국민은 너무 감정적이다』 한국과 포르투갈戰이 열린 지난해 6월18일,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美2사단 공병여단 캠프 하우즈에서는 러셀 L. 아너레이 美2사단장, 한국군 장성, 공병여단 부대장 등 장병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촛불추모행사가 있었다. 「여중생 범대委」가 촛불로 「시위」하기 전, 주한미군 장병들이 먼저 촛불로 「추모」한 것이다. 촛불 추모 사진은 기사와 함께 全언론사에 배포됐으나, 어떤 언론도 이 사진을 게재한 곳은 없었다고 한다. 『軍牧의 기도로 시작해서 추모하는 글을 낭독하는데, 울먹이는 병사들도 있었어요. 행사가 끝나고 병사들이 촛불을 하나씩 영정 앞에 내려놓는 장면은, 제가 주한 미군 공보관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볼 때 장병들의 표정이 무겁고 엄숙했어요. 그 자리에서 모금을 하자는 제안이 나와서 돈을 걷기 시작했고 이것이 전체 駐韓美軍에 확산돼 나중에 유가족에게 2만2000달러(2640만원)를 전달했어요』 기자는 한국전의 名將 白善燁(백선엽) 장군의 집무실에 「We go together!(함께 갑시다!)」라는 韓美 연합을 상징하는 그림을 본 적이 있노라고 그에게 말했다. 『2002년 5월 離任(이임)한 토머스 슈워츠 前 주한미군사령관도 그 말을 꼭 연설 끝에다 붙였습니다. 주한미군이 홍보 책자를 만들어 슈워츠 장군이 서문을 쓰면서 「白善燁 장군이 이 말을 처음 썼다」고 했어요. 작년 10월 白장군과 함께 대구의 多富洞(다부동) 전적지를 둘러본 駐韓美軍 장성들이 白장군의 놀라운 기억력에 감탄하던 게 기억이 납니다. 그것을 관심있게 하나하나 메모해 가며 듣는 미군 장군들도 보기가 좋았습니다』 ―駐韓美軍을 바라보는 우리 국민들의 잘못된 시각이 있나요. 『한국민은 너무 감정적이에요. 민족의 자존심과 主權(주권)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어느 민족이 자존심을 잃고 주권을 빼앗기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우리가 미군 문제를 해석할 때 잘못하는 점이 민족의 자존심과 주권만을 앞세워요. 그렇다고 민족의 자존심을 버리라는 것은 아니에요. 해석을 자존심에 맞추다 보면 본질이 왜곡되지요』●

입력 : 2003.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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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룡 ‘밀리터리 인사이드’

gomsi@chosun.com 기자클럽 「Soldier’s Story」는 국내 최초로 軍人들의 이야기를 전문으로 다루는 軍隊版 「피플」지면입니다. 「Soldier’s Story」에서는 한국戰과 월남戰을 치룬 老兵들의 인터뷰를 통해 이들이 후손들에게 전하는 전쟁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합니다. 또한 전후방에서 묵묵하게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軍人들의 哀歡과 話題 등도 발굴해 기사로 담아낼 예정입니다. 기자클럽 「Soldier’s Story」에 제보할 내용이 있으시면 이메일(gomsichosun.com)로 연락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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