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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

[김성동의 인간탐험] 데뷔 40주년 맞는 가수 趙容弼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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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동의 인간탐험] 데뷔 40주년 맞는 가수 趙容弼 
 
『가끔 노래 부르면서 가사를 음미하다 보면 눈물 날 때가 있어요. 무지 참습니다』  
   
 『쉬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이제「이게 내 운명」이라고 생각… 무대에 서 있을 때 자유롭다』

 
조용필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서울 경동中·高 졸업. 1968년 그룹 애트킨스 멤버로 문산 용주골 美8군 클럽에서 연주 활동 시작. 1971년 「김트리오」 결성. 1975년 「조용필과 그림자」 결성. 1978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결성. 1980년 국내 가수 최초 미국 카네기홀 공연. TBC 가요대상 최우수상. MBC 가수왕. KBS 최우수 남자 가수상. 「돌아와요 부산항에」, 「창밖의 여자」, 「킬리만자로의 표범」, 「슬픈 베아뜨리체」 등 다수 곡 발표.
 
취재지원 : 金正友 月刊朝鮮 인턴기자〈hgu@chosun.com〉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 (ksdhan@chosun.com)  

출처: 월간조선 2008년 1월호
 
『그런 호칭은 닭살 돋아요』 

 
 「歌王(가왕)」, 「국민가수」, 「영원한 오빠」, 「슈퍼스타」, 「전설」 등 수식어가 지나치게 많다. 最初(최초)와 最高(최고)란 단어가 오히려 식상해진다.
 
  그의 팬은 곧 국민이었고, 그 자신은 곧 1980년대 이후 현재까지 한국 가요 자체였다. 그가 발표한 노래 한 구절 때문에 우리는 「사랑의 아름다움」(「창밖의 여자」)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부산항 떠난 형제」(「돌아와요 부산항에」)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그는 「국민가수」 등 자신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런 호칭은 닭살 돋아요. 전 그저 「가수 조용필」이고 싶습니다』
 
  데뷔 35주년 기념 공연을 가진 후 2003년 月刊朝鮮 10월호와 인터뷰할 때도 그는 「닭살 돋는다」는 말을 자주 했다. 우리는 2007년 12월11일 오후, 역삼동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50代 중반을 넘어 육십을 바라보지만 외모는 오히려 2003년에 만났을 때보다 더 젊어진 듯했다. 눈에 띄는 변화가 있다면 그의 주변에서 재떨이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2003년 인터뷰 당시 그는 연달아 담배를 피워 물며 말을 이어 갔었다.
 
  2008년 가요계 데뷔 40주년을 맞는 가수 趙容弼(조용필·57)씨에게 「40」이라는 숫자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
 
  『40주년이라고 별다른 게 있겠습니까. 오히려 숫자는 저를 위축하게 합니다. 나이 들면 다 비슷한 것 같아요』
 
  40년 동안 대한민국 가요계에 군림했던 「제왕」의 답변 치곤 의외였다.
 
  『전 아직 무대가 좋습니다. 계속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으니까요. 무대는 저에게 부담과 기대를 동시에 줍니다』
 
  ―40년 동안 노래하면서 지겹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까.
 
  『물론 있죠. 좀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한창 바쁘게 활동할 때는 딱 1년만 쉬었으면 했었죠. 어디 멀리 떠나고픈 생각도 있었고요』
 
  지난번 인터뷰에서 그는 같은 질문에 『없다』고 대답했었다. 좀더 솔직해진 여유일까, 아니면 그 사이에 실제로 노래 부르는 일에 지겨움을 느끼기도 했던 것일까. 이어지는 그의 대답이다.
 
  『쉬고 싶을 때도 있지만 이 정도 나이가 되니 「이게 내 운명이다」라고 생각해요. 무대에 있을 때가 오히려 자유롭습니다』  
  
  담배를 끊다
 
  ―2003년 인터뷰 때는 거의 쉼없이 담배를 피우던 기억이 나는데 이젠 끊었나 봅니다.
 
  『정말 끊었어요. 담배 잡아 볼 생각도 안 해요』
 
  ―담배 생각은 전혀 안 나십니까.
 
  『안 난다면 거짓말이죠. 몇 년을 피웠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담배라는 것이 「끊겠다」, 하고 끊는 게 아니라, 「끊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해서 끊는 거잖아요. 이번이 세 번째 금연 시도였는데 성공했죠. 아내가 야단쳐서 두 번 끊었었는데 한 번은 한 4개월 만에 다시 피우기 시작했고, 다시 또 끊었는데 아내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다시 피우게 됐죠』
 
  ―아내 이야기가 나온 김에 묻겠습니다. 아내를 기리는 추모곡 「珍(진)」은 가끔 부릅니까.
 
  『요즘 잘 안 불러요. 아무래도 자꾸 생각나기도 하고, 부르기가 좀 그렇죠』
 
  2008년 1월6일은 그의 아내 故 안진현씨의 4주기가 되는 날이다. 그는 아내 이야기가 나왔을 때 애써 태연한 모습을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커피잔을 든 손이 조금씩 떨렸다. 그는 아직 아내를 마음속에서 떠나 보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에게 아내의 그림자는 너무 짙어 보였다.
 
  ―「리드 미 온」은 어떤가요. 자주 부르십니까.
 
  『한 번씩 무대에서 부릅니다. 이번 성남 공연에서 불렀습니다』
 
  바비 블랜드의 「리드 미 온」은 기타리스트 조용필을 「보컬리스트 조용필」로 바꾼 곡이다. 지방의 한 미군부대 클럽에서 기타를 연주하던 시절, 한 미군병사가 다음날이 자신의 생일인데 자신이 좋아하는 그 노래를 불러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마침 조용필씨가 소속한 밴드의 보컬리스트가 군에 입대한 상황이었다. 조용필씨는 밤새 그 노래를 연습했다. 다음날 조용필씨는 그 미군병사를 위해 「리드 미 온」을 불렀다.
 
  그 노래를 들은 미군병사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자신이 부르는 노래가 누군가에게 눈물을 흘리게 할 정도로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그때부터 노래에 매진했다. 「대한민국 최고 가수」의 출발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조용필씨는 자신의 인생을 바꾼 이 곡을 번안해 「님이여」란 제목으로 3집에 수록했다.
    
  「조용필市」 조성
 
  조용필씨는 13세까지 고향 華城(화성)에 살았다. 먼저 떠난 아내가 그곳 先山(선산)에 묻혀 있다.
 
  화성市는 현재 조용필을 중심으로 한 문화도시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화성시는 봉담읍 일대 20만 평에 「조용필 종합예술연구소」(가칭)와 대중음악당, 국악당, 뮤지컬, 오페라극장 등을 갖춘 종합예술타운을 2008년 중 착공하기로 하고 용역을 진행 중이다.
 
  조용필연구소에는 세계 수준의 녹음시설과 조명·무대실험 시설, 영상·강의 시설 등을 갖출 예정이다. 궁평항 일대에는 음악공원을 조성, 2009년부터 매년 월드뮤직페스티벌을 개최할 계획이다. 조용필씨는 2007년 9월15일 궁평항에서 3만5000여 관객을 모아 놓고 무료 공연을 펼쳤다.
 
  화성市는 조용필씨가 태어나 살던 송산면 생가 터에 음악박물관을 세우기로 하고 2005년 4100m2의 부지를 매입했다.
 
  ―고향 화성엔 자주 가는지.
 
  『자주 가는 편이죠. 식구들이 지금 그곳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선산이 있는 곳이고, 아내도 거기 있고 해서…』
 
  ―화성을 「조용필 도시」로 만들기 위한 계획이 진행되고 있는데.
 
  『화성市에서 많은 배려를 한 것 같아요. 저도 무대 관련 연구소를 지을 계획이 있어 이야기가 통했습니다』
 
  ―뿌듯하신가요.
 
  『뿌듯하기보다는 일단 편안하죠, 고향이니까. 서울에서 가깝고, 한 40분이면 가잖아요』
 
  ―生家 터를 활용하는 건 60세 이후에 생각해 보자고 했다는데.
 
  『지금 활동하고 있으니까요. 살아 있는 사람의 생가를 복원하고 박물관 만드는 게 성급한 것 같기도 하고요. 그리고 찬성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몇몇 반대하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어느 정도 나이가 더 들고 연륜이 쌓인 다음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조용필씨는 2003년 1월 심장병으로 아내 안진현씨를 잃은 후 「아내가 남긴 유산 전액을 심장병 어린이를 돕는 일에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심장병 어린이를 돕는 일은 계속하고 계십니까.
 
  『삼성의료원과 함께 몇 년째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오전부터 지금까지 삼성의료원에서 회의를 하다 온 겁니다. 지금은 장학사업 쪽으로도 많이 하고 있는데, 외부에 알리지 않고 개인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대답 하나하나가 참 소박하다. 市에서 生家 복원을 위해 땅까지 확보했지만 그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 듯했다. 장학사업은 가급적 조용히 하고 싶다고 한다.
 
  조용필씨는 아내를 떠나 보낸 후 한 인터뷰에서 『미국에는 자주 갈 일이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미국 갈 때 동반하던 아내가 곁에 없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는 시간이 너무 지루할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미국엔 자주 나가십니까.
 
  『일이 있을 때 나갑니다. 브로드웨이나 라스베이거스에 새로운 작품이나 공연이 있으면 가서 보고, 영상자료 수집을 합니다. 개인적으로 나가진 않죠』
 
  ―미국 가는 길이 적적하겠습니다.
 
  기자의 질문 의도를 눈치 챘는지, 그는 몸을 뒤로 젖혔다가 다시 앞으로 숙이며 대답했다.
 
  『스태프들과 함께 가요』 
 
  무대공연의 패러다임 변화 보러 미국行
 
  ―영상자료 수집은 어떤 목적으로 하는 건가요.
 
  『무대공연의 패러다임 자체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냥 노래만 하는 시대는 갔어요. 무대와 영상이 하나 된 시대예요. 종합예술이라고 할 수 있죠. 무대가 영상 안에 있기도 하고, 영상이 무대 안에 들어오기도 하고, 서로가 통하는 것입니다』
 
  ―영상이 보조장치에서 또 하나의 주인공이 됐군요.
 
  『그렇죠. 기존의 영상은 조명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수준이었어요. 이젠 하나의 스토리를 가지고 무대와 영상이 실시간으로 만나는 시대입니다. 앞으로 영상은 드라마가 돼야 해요』
 
  ―1990년대 초반부터 무대공연에 집중했는데 본인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다고 봅니까.
 
  『저 스스로가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무대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잖아요』
 
  ―무대공연을 준비할 때 연출자 역할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다른 연출자는 없습니까.
 
  『함께 하는 연출자들이 있습니다. 서로 맡은 파트가 다르죠. 전체적인 것은 함께 의논합니다』
 
  ―다른 연출자들이 잔소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요.
 
  『아뇨, 그런 건 없어요. 일단 아이디어가 가장 중요합니다. 저는 직접 무대 위에 서니까 저만이 아는 느낌이 있잖아요. 그런 걸로 아이디어를 만들고, 다른 연출자들은 객석의 느낌을 살려서 또 하나의 다양한 콘셉트를 제안합니다. 그걸 합치면 무대를 다양하게 꾸밀 수 있는 거죠』
    
  노래방에서 애창하는 곡은 「신청곡」
 
  ―국내가수 최초로 美 카네기홀에서 공연했고, 미국·중국·일본… 안 간 곳이 없는데, 유럽이 빠졌네요. 혹시 정서가 맞지 않습니까.
 
  『그건 아니에요. 기회가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유럽 무대에 서도 물론 자신 있겠죠.
 
  『「자신」이라는 말은 상당히 조심스럽습니다. 전 항상 이렇게 생각해요. 「우리 것」 가져가서 최선을 다하면,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저 그렇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담담하게 준비해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공연할 때 나라마다 관객의 반응이 다르던가요.
 
  『공연 자체는 무대 위에 올려놓으면 다 비슷합니다. 다만 우리나라에선 주로 제 팬들이 오고, 제 노래를 잘 알기 때문에 호응이 더 각별하죠. 반응이 제일 뜨겁습니다』
 
  ―애창곡이라고 할까, 자주 부르는 소위 「18번」은 어떤 노래입니까.
 
  『애창곡이라고 하면 노래방에서 자주 부르는 노래일텐데… 그럼 당연히 신청곡이죠(웃음). 가곡 「떠나가는 배」를 즐겨 불러요』
 
  작고한 아내가 좋아하던 曲이다. 노래방에 가면 언제나 이 노래부터 부르고 신청곡을 받는다.
 
  ―본인의 노래 중 가장 애창하는 노래는 어떤 노래입니까.
 
  『굳이 하나를 꼽는다면 「꿈」입니다. 제가 작사까지 한 곡이라 애착이 많이 가더라고요』
    
  19집 앨범 2008년 초 녹음
 
  ―18집 「오버 더 레인보우」 이후 2007년 9월에 19집이 나온다고 했는데, 아직 안 나왔네요.
 
  『아마 2008년 초에 녹음을 진행할 것 같아요. 발표 시기는 아직 확정되진 않았지만 여름쯤일 것 같습니다. 40주년 기념 공연이 4월 말에 시작되는데 두 가지가 동시에 진행되면 여러 문제가 있어서, 일단 공연부터 시작한 후 발표할 계획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후계자를 양성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는데요.
 
  『그런 적은 없어요. 잘못된 기사입니다』
 
  ―그래도 조용필의 대를 이을 가수의 조건이 있다면.
 
  『일단 기본적으로 악기 몇 개는 다룰 줄 알면 좋겠죠. 코드 악기, 멜로디 악기, 리듬 악기 이 세 가지는 일단 기본이죠. 그 다음엔… 여러 가지 음악적인 요소들이 있겠죠』
 
  ―어학이나 키 같은 외모에 대한 기준은 없습니까.
 
  『글쎄 거기까진(웃음). 그렇게 완벽한 사람을 구할 수 있을까요』
 
  ―지난 인터뷰 때, 대중과의 거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클래식 쪽으로 간다고 했는데, 지금도 그렇습니까.
 
  『전면적으로 클래식만 하겠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클래식 쪽으로도 작품을 만들겠다는 것이죠. 저는 대중가수입니다. 대중가요에서 제가 해야 할 몫이 분명히 있어요. 제 몫을 일단 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음악을 시도하겠다는 뜻입니다』
 
  ―TV 출연 안 한 지 꽤 됐습니다. 스타는 대중을 먹고사는데, 대중과 멀어지는 게 두렵지는 않습니까.
 
  『그 단계는 지난 것 같아요. 처음 결심했을 때부터 이미 각오하고 시작했죠. 음악 인생을 걸어야 할 모험이었지만, 일단 밀고 나갔습니다.
 
  저 개인적인 입장을 무시할 수 없었어요. 나이 들면 사실 후배들에게 밀릴 수밖에 없거든요. 그때 제가 TV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그렇다고 우리나라 음악 프로그램이 많아서 우리가 설 수 있는 프로그램이 제대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오래 나오다 보면 식상해질 수밖에 없잖아요』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처음 몇 년간 고생 많이 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콘서트 문화 자체가 생소하고 저조했을 때니까요. TV 외의 무대 낯설어하던 때였죠. 제가 미국·일본 등 외국에서 무대공연을 하면서 많이 보고 배웠고, 그래서 이걸 한번 개척해 보자, 하고 시작은 했지만 정말 어려웠어요. 모두가 아는 조용필이고, 히트곡도 많은데 왜 관객이 안 모일까… 계속 분석하고 연구했죠』
 
  ―앞으로 계속 TV 출연은 안 할 겁니까.
 
  『안 할 것 같아요』
 
  ―담배 끊을 때와 비슷하게 「TV 출연 금단 현상」 같은 건 없던가요.
 
  『많았죠, 적응이 안 되고. 하지만 일단 끝까지 고수하자고 마음을 먹었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꿈」이란 노래를 마지막으로 TV 출연을 안 했는데, 바로 반응이 옵디다. 「갔다」라고요. 조용필 한물 갔다는 거죠. 어쩔 수 없는 현실이죠』
   
  음악하고 싶어 TV 출연 중단
  
  ―그런 상황에 적응하는 과정이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TV에서만 한물 갔다고 하면 문제가 없는데, 공연까지 그 영향이 오더라고요. 그 정도 심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무대 쪽으로 더욱 방향을 틀었죠. 현실은 인정해야 하니까요』
 
  ―다시 TV 출연을 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던가요.
 
  『아니, 그건 없었어요. 저는 끝까지 고수를 하려고 결심한 상태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 3년간은 참 힘들었습니다』
 
  ―처음 방송출연을 안 하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음악을 계속 하기 위해 방송출연을 중지한 겁니다. 저의 존재감을 숨겨야 음악을 계속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요즘 일부 연예인들이 사용하는 신비주의 전략 같은 겁니까.
 
  『그런 것도 있죠. 제가 워낙 볼거리가 없잖아요(웃음). 방송국에 가면 다 아는 사람들인데 이 프로그램 나가면 저 프로그램도 나가야 되고, 그러다 보면 방송에 종속될 수밖에 없어요. 전 그게 싫었던 거예요. 그러다 프로그램 자체가 없어져 봐요. 갈 곳이 없어집니다. 역시 가수는 무대 위에서 노래해야 해요』
 
  ―1999년부터 2005년까지 7년 동안 해왔던 서울 예술의전당 공연을 2006년부터 하지 않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제가 결정한 게 아니에요. 예술의전당에서 먼저 그만하자고 했어요. 7년 동안 계속해왔으니, 제가 대중가요 가수라는 이유 때문은 아닌 것 같고, 자세한 이유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조용필씨는 2007년 12월4일부터 8일까지 열린 성남아트센터 공연을 시작으로 경기도 고양 아람누리아람극장 (12월14~16일), 부산 벡스코(12월22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12월28~29일)을 돌며 연말공연을 갖는다. 이번 공연의 제목은 「더 오페라 오브 더 시티」다.
    
  청중들이 음향의 미세한 차이 느껴
 
  ―성남아트센터 공연을 시작으로 연말공연을 진행하고 있는데, 예술의전당에서의 공연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공연의 포맷은 비슷하게 꾸며집니다. 성남아트센터는 공연장 규모가 예술의전당보다 작아요. 저는 특히 음향에 신경을 많이 써요. 성남에선 자체 설치된 음향을 써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쓰고 싶어 하는 음향을 사용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죠』
 
  ―음향 전문가가 아닌 일반 관객들은 음향의 미세한 차이를 잘 모를 텐데요.
 
  『아뇨, 뭔가 다르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제 공연을 보러 온 분들은 느낌을 아는 것 같아요. 조명 같은 것은 문제가 없었어요. 성남아트센터는 폭이 좁은 것만 빼고 무대 시스템이 좋기 때문에 큰 불편을 못 느꼈습니다』
 
  조용필씨 공연이 있으면 일본에서 한국까지 찾아와 공연을 관람하고 돌아가는 일본 팬들이 많다.
 
  ―성남아트센터 공연에 일본 팬들이 많이 오셨습니까.
 
  『네, 이번에도 많이 오셨어요』
 
  조용필씨는 넥타이 맨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 그날도 그는 역시 노타이 차림이었다.
 
  ―넥타이는 전혀 안 매십니까.
 
  『넥타이는 잘 안 매요. 제사 지낼 때나 매지, 거의 매지 않아요』
 
  ―혹시 목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그러시는 겁니까.
 
  『아니에요. 갑갑하기도 하고 어색해서 그래요』
 
  ―가수는 목이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목을 보호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시는 게 있습니까.
 
  『10일간, 2주일간 장기간 공연할 때는 공연 이외에는 말을 안 해요. 말을 많이 하면 목이 쉬니까』
 
  ―무대에선 여전히 말없이 노래만 하십니까.
 
  『저는 그게 좋아요. 무대인사 잠깐 하고 바로 음악에 몰입하죠』
 
  ―다른 가수들은 중간에 게스트도 출연 시키고 이것저것 많이 하던데.
 
  『옳고 그름을 떠나 저 개인적 취향에 안 맞습니다』
    
  스타의 不在는 시스템의 문제
  
  ―이번 연말공연을 앞두고 기자회견에서 『대중을 휘어잡는 스타가 없다』고 했는데, 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느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전체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일단 노래 한 곡이 나와서 대중에게 전달되는 과정이 너무 어렵습니다. TV에 음악 프로그램이 많지 않고, 있어도 짧게 지나갑니다. 신인들이 나와 홍보하는 과정이 어렵죠.
 
  음악이 너무 많이 변했기 때문에 국한된 층에게만 어필하는 점도 작용할 겁니다. 나이 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음악이 나오질 않습니다. 인터넷 등 음악 외에 즐길 수 있는 분야가 너무 많다는 것도 한 원인이라고 볼 수 있죠. 결국 스타의 부재가 참 아쉽습니다.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강력한 스타가 나오면 그 분야는 뜨게 됩니다. 음악·영화·드라마 모두 마찬가지예요. 경제 분야도 그래요. 스타가 나오면 살아납니다』
 
  ―요즘 가수들이 TV에서 활동하는 걸 보면 가수인지 개그맨인지 구분이 안 되는 가수들이 많던데.
 
  『TV 프로그램에선 가수든 배우든 인기 있는 사람을 부르려고 하죠. 가수는 노래 홍보를 위해 출연해야 합니다. 가수가 TV에서 웃기고만 있으면 문제죠』
    
  가수가 TV에서 웃기는 것은 문제
 
  ―그런 연예인들을 만능 엔터테이너라 부르는데.
 
  『일단 전 만능엔터테이너가 아닙니다. 그래서 TV에서 빠져나왔죠. TV가 없었다면 제가 존재할 수 있었겠어요? 우리나라 현실이 자꾸 케이블이나 전문음악 채널에서 10대 위주로 흘러가니까,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겁니다』
 
  ―요즘 그룹 가수들이 많이 나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나름대로 장르는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쁘진 않죠. 다만 상업적인 목적으로 나오는 건 좋지 않습니다. 한 명이 끌어오는 팬과 다섯 명이 끌어오는 팬이 다르거든요. 기획사에서는 일단 「한 사람」을 제대로 키우는 게 중요합니다. 다섯 명이 나와도 결국 한 사람이 더 크게 되거든요. 너무 상업적으로 보이는 게 문제입니다』
 
  ―립싱크해 본 적 있습니까.
 
  『예전에 방송에 출연했을 때 야외에서 생중계할 때 자주 했어요. 장비가 안 됐거든요. 워낙 낙후된 시절이니까, 전부 립싱크를 해야 했죠』
 
  ―기분이 어떻던가요.
 
  『노래하는 것 같지 않죠. 입만 벙끗하니까, 꺼림칙하고…. 요즘 기획사가 커지다 보니까 립싱크를 한다는 전제조건으로 방송에 출연시킨다는 말이 있는데, 참 안타깝습니다. 노래도 성의입니다. 가수가 오늘 컨디션이 좋을 수 있고, 안 좋을 수 있어요. 그 상황에 맞게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겁니다』  
  
  『요즘 후배 가수들 노래는 잘하는 것 같지만…』
 
  ―후배 가수들 중에, 『저 친구 정말 노래 잘하네』 하는 가수가 있습니까.
 
  『요즘은 다 잘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어요. 과연 저것이 진짜일까, 하는 생각이요. 요즘 「오토튜닝」이란 게 있어서 가수가 노래를 못 불러도 기계가 다 완성해 줍니다』
 
  ―라이브 하는 후배 가수들 노래는 가끔 들어보십니까.
 
  『저는 TV를 자주 못 보거든요. 어쩌다 보면 제 시대 때보다 노래를 더 잘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가끔 팝송은 기가 막히게 하는데 한국 노래를 들어보면 형편없는 친구들이 있어요』
 
  ―노래를 시작할 당시와 지금의 창법은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처음에 노래를 시작할 때는 제가 미성이었어요. 너무 가늘었죠. 미성으로는 외국 노래를 할 수 없어요. 안 어울려요. 그래서 1970년대 후반에 창도 배우고 하면서 탁음으로 바꿨죠』
 
  ―국내에서 존경하거나 좋아하는 가수가 있습니까.
 
  『처음에 한국 노래 하려고 음악 시작한 게 아니었습니다. 비틀스나 롤링스톤즈 음악을 들으면서 꿈을 키웠죠. 우리 노래에 대해선 그렇게 크게 관심을 두지 못했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질문해 볼게요. 그럼 미국 최고의 가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어렵죠. 「최고」라는 말은 참 애매해요. 최고가 아니라 좋아하는 가수로 바뀌어야죠. 모든 사람은 각자 취향이란 게 있습니다. 어렸을 때 어떤 음악으로 「쇼크」를 받느냐가 중요하죠』
 
  ―라이벌로 생각하는 가수는 없습니까.
 
  『음악장르가 서로 다른데, 라이벌은 억지죠. 가수끼리 라이벌 만드는 건 방송에서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복싱이나 테니스는 라이벌이 가능하죠. 음악은 체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전부 다르잖아요』
    
  평양공연 결심한 이유  

  ―2003년 月刊朝鮮과 가진 인터뷰에서 「평양공연에 별 의미를 두지 않겠다」고 했는데, 2005년에 공연을 다녀왔습니다. 어떤 심적인 변화가 있었나요.
 
  『제 심적인 변화보다는 저쪽에서 제의를 바꿨어요. 그전부터 우리 가수들이 북한에 많이 갔잖아요. 한 사람이 단독으로 가기보다는 여러 팀이 가서 한 프로그램 만들고 내려옵니다. 그쪽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 해요. 그러면 거기서 뭘 남겨 놓을 수 있겠어요. 그렇게 하라면 난 안 간다고 했죠』
 
  ―북측에서 어떻게 제안을 바꿨습니까.
 
  『팩스가 왔어요. 단독으로 공연하고, 장비까지 다 들고 와도 된다고. 그래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모든 걸 직접 기획하고 연출했어요』
 
  조용필씨의 평양공연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남한의 가수들이 줄지어 평양으로 향했지만 북한주민들의 반응은 무표정과 일관된 행동이 전부였다. 가수들도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가수 조용필은 달랐다. 자신의 것을 끝까지 고집했고, 미련 없이 다 쏟아냈다. 꽁꽁 얼어 있던 북한 주민들에게 진정한 「햇볕」을 보여 준 것이다.
 
  ―검찰의 BBK 사건 수사 발표 후 발표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현 여권에서 광화문에서 촛불집회를 매일 하고 있습니다. 집회현장을 지나다 보면 1980년대 운동권 노래들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데 「아직도 저 노랜가」 하는, 이제는 식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나온 「창밖의 여자」는 지금 들어도 좋습니다.
 
  『개인적인 차이겠죠. 그 사람들에게는 제 노래가 별로일 수 있겠죠』
 
  ―金芝河(김지하)씨가 자신의 詩를 가사로 한 민중가요 작곡을 부탁한 적이 있죠.
 
  『1980년대에 그런 적이 있죠. 김지하씨의 작품이었는데, 제가 곡을 만들고 싶었어요. 원주에서 만나서 詩를 가지고 나오다가 톨게이트쯤 와서 걸렸는데, 김지하씨가 노랫말로 삼을 詩를 도로 가져갔죠』
    
  시대의 역사는 가요에 담긴다!
 
  ―민중가요 중에서 아는 노래가 있습니까.
 
  『구분이 참 애매하죠. 보통 「사랑」 노래도 민중운동에 접목시키면 민중가요가 될 수 있어요. 「생명」이나 「1987년 서울」이 그런 노래잖아요. 누가 불렀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하고 기준이 명확하지 않죠. 운동권에서 「창밖의 여자」에 의미를 담아서 애창하면 운동권 노래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시대가 음악에, 그리고 음악이 시대에 서로 투영되는가 봅니다.
 
  『가요는 그렇습니다. 그 시대의 역사는 가요를 들으면 알 수 있어요』
 
  ―서울大 宋虎根(송호근) 교수가 조용필씨에 대해 「우리 사회의 분노·좌절·절망·분열 증후군을 노래로 치유해 주는 진정한 프로페셔널리즘의 소유자」 라고 평가했는데, 동의합니까.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런 걸 생각하고 노래하는 게 아니잖아요. 만드는 사람이 있으면 분석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저 고마울 뿐이죠』
 
  ―宋교수는 「권위와 격식을 버린 프로정신, 자유를 추구하는 혼이 조용필의 진정성」이라고도 평가했는데.
 
  『그 부분은 동의합니다. 제가 어디 얽매이거나, 제 음악을 누가 간섭하거나 하면 상당히 어색해요. 저 자신이 우선 자유로워져야죠. TV 출연 안 한 것도 누가 시킨 게 아니라 제가 결정한 거잖아요. 어떤 격식 찾는 게 저는 닭살 돋습니다』
 
  ―「닭살이 돋는다」는 어떤 의미입니까.
 
  『요즘 다들 와인 좋아하잖아요. 저는 그냥 소주 한잔 달라고 합니다. 내가 좋으니까 먹는 거죠. 술도 비싼 것 먹으면 저는 거부감부터 와요』
  
2003년 8월 잠실주경기장에서 열린 가요계 데뷔 35주년 기념 콘서트. 비가 내리는 가운데 열린 야외 공연이었지만 관객들은 공연이 끝난 후에 한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조용필」을 연호하며 열광했다.
 
  와인보다는 소주 같은 음악 하고파
 
  ―술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폭탄주는 하십니까.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다음날 일에 지장을 주니까, 술 마신 다음날 깨는 게 참 힘들더라고요』
 
  ―음악은 어떻습니까. 와인 같은 음악을 하고 싶습니까, 소주 같은 음악이 좋습니까. 아니면 폭탄주 같은 음악입니까.
 
  『제가 원래 노래를 와인같이 시작했잖아요. 외국 것을 수입해서. 지금은 소주가 됐다고 봐요. 우리 정서에 맞고, 부담도 없고. 와인은 와인대로의 맛이, 소주는 소주대로의 맛이 있습니다. 전 소주의 역할을 해야죠』
 
  ―조용필 하면 「카리스마」란 단어가 떠오릅니다.
 
  『저는 카리스마란 게 없는 사람입니다. 카리스마도 참 닭살 돋아요. 무의식적으로 하다 보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일부러 하라면 절대 못 합니다』
 
  ―무대를 장악하는 모습에서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는데요.
 
  『무대는 편하고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공연을 합니다. 지나치게 오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 줍니다. 그게 그렇게 보였나 봐요』
 
  ―무대 위에서 실수한 적은 없습니까.
 
  『많죠. 세트를 전환하거나 할 때, 연출상의 실수가 나올 수 있죠. 다 사람이 하는 일 아닙니까. 가사 까먹을 때도 있고』
 
  ―가사를 잊어버렸을 땐 어떻게 대처하나요.
 
  『그냥 「나 틀렸어요」 합니다』
 
  ―개인적인 아픔이나 사랑이 부르는 노래에 영향을 주기도 합니까.
 
  『가급적이면 결부시키지 않으려고 합니다. 가끔 노래 부르면서 가사를 음미하다 보면 눈물 날 때가 있어요. 무지 참습니다. 그럴 땐 일부러 가사에 집중을 안 해요. 허공 딱 보고 아무 생각 없이 노래합니다. 「꿈」이나 「슬픈 베아뜨리체」 같은 노래가 그렇습니다』
    
  멋이 아니라 진심으로 노래한다
  
공연시작 전 무대인사를 빼고 조용필씨는 말을 하지 않는다. 관객들이 공연장을 찾은 이유는 그의 말이 아니라 노래를 듣고 싶어서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심금을 울린다」는 말이 있는데 노래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관객이나 청취자의 심금을 울릴 수 있을까요.
 
  『몰입할 때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봅니다. 음악은 멋으로 부르는 게 아닙니다. 진심으로 불러야죠. 그럴 때 관객들과 공감하고, 눈물 흘리고, 좋고, 기쁘고 한 거죠』
 
  ―편하게 들을 수 있는 곡을 위해서는 만드는 사람이 편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음악을 만들 때, 보통 내가 아무리 괴로워도 편한 노래를 만들면 관객의 입장으로 돌아가거든요.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노래를 만들어야죠. 내 생각대로 만들면 내 속마음이 다 나오고, 별로 좋은 노래가 안 나오더라고요』
 
  ―「창밖의 여자」를 발표하면서 팝송 위주의 국내 가요 시장이 국내 대중가요 위주로 재편되는 계기를 만들었는데, 요즘의 우리 가요와 팝송의 수준을 비교했을 때 수준 차가 납니까.
 
  『수준을 비교할 수는 없어요. 영국·미국·일본의 멜로디가 따로 있고, 우리 멜로디가 따로 있어요. 팝송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지금 나오는 가요는 대부분 「우리적 표현」이에요. 리듬은 서양 것을 따왔지만, 멜로디는 지극히 한국적이죠. 비교할 수 없어요. 너무 다릅니다. 한국 특유의 가요 멜로디가 있어요. 아무리 록을 하고 때려 부수고 해도, 바탕은 우리 것이죠』
 
  ―소위 말하는 「뽕짝」(트로트)을 말씀하는 겁니까.
 
  『댄스음악이 있어요. 리듬하고 악기를 뺀 후 멜로디만 남겨 둡니다. 거기다 뽕짝 리듬 넣으면 그대로 뽕짝이 됩니다. 제 음악도 마찬가지죠. 한국 사람이라서 그런 거예요』
 
  ―랩은 해본 적 있습니까.
 
  『할 수 있는 실력이 안 돼요. 어울리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여전히 장르가 없다고 생각하나요.
 
  『조용필이 장르가 어디 있습니까. 모두들 알아서 생각하시잖아요. 제 장르는 조용필이에요. 제가 음악 시작할 때만 해도 팝송하고 흔히 말하는 뽕짝밖에 없었어요. 저는 팝송이 좋아 기타를 쳤지만, 대중에게 나오기 위해서 병행할 수밖에 없었죠』
 
  젊은 가수들에겐 조용필이란 이름 석 자가 꿈과 비전의 대상이라고 하니 『오래할 수 있으니까』라며 웃는다.
 
  ―조용필 본인의 현재 꿈은 무엇입니까.
 
  『현재 제 꿈은 무대 위에 있습니다. 계속 새로운 무대를 기획하고 연출해야죠』
    
  40주년 기념 순회공연은 야외에서
 
  ―조용필만을 위한 공연장이나 뮤지컬 쪽은 계획이 없나요.
 
  『발상 자체가 어렵죠. 지금은 계속 매진되지만, 1년 내내 하려면 힘들죠. 뮤지컬은 생각만 하고 있어요. 추진해도 저는 일단 일선에서 빠지고, 지켜보기만 할 겁니다』
 
  ―가요계 데뷔 40주년 공연은 어떻게 준비되고 있습니까.
 
  『우선 대부분 야외공연으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야외공연은 관중의 함성과 무대의 조화가 기가 막히죠. 다만 집중도가 떨어지는 단점이 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무대가 관객을 감싸도록 했죠. 너비가 160m 정도 됩니다. 도시마다 운동장을 빌렸죠』
 
  ―이제 40주년인데, 앞으로 몇 주년까지 예상하고 있습니까.
 
  『아마 「4」자로 끝나지 않을까요? 제가 워낙 에너지를 쏟아 붓는 무식한 공연을 하다 보니까, 그 넘어선 힘들 것 같아요』●   

입력 : 2008.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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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정태 (2008-06-09)   

    식탁에 칼과 쇠스랑(나이프와 포크)이 올려져 있는 백인들의 식탁을보면 그들에게는 식탁 문화지만 우리가 볼때는 섬뜩한 느낌이 들지만, 채소 나부랭이 먹고는 그들과 경쟁자가 될 수 없다. 고기도 골고루 먹고 힘을 길러 대등한 경쟁자가 되어야, 서양 양코뱅이에게 당하지 않는것이다. 서양놈들 모두 채식주의자가 되더라도, 한국인 모두는 알맞게 고기를 섭취하여 체격과 힘을 키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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