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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1. 문화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현역으로 뛰고 싶었다" 27일 별세한 봄여름가을겨울 故 전태관 인터뷰

"'도회적이면서 연주력도 있고 일기 같은 가사'가 우리 음악의 특징"

 

[편집자주]  '봄여름가을겨울'의 드러머 전태관(56)이 6년간의 신장암 투병 끝에 27일 별세했다. 전태관은 2012년 신장암으로 신장 하나를 떼어내고도 활동해 왔지만 2014년 암이 전이돼 활동을 잠정 중단했다. 김종진과 전태관으로 구성된 봄여름가을겨울은 1986년 가수 김현식이 결성한 밴드 '김현식의 봄여름가을겨울'로 음악활동을 시작했으며, 1988년 정규 1집을 발표했다. 퓨전재즈와 블루스, 록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다. '어떤이의 꿈' '내 품에 안기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 봐' 등 수많은 히트곡이 있다. <월간조선> 2004년 11월호에 실린 봄여름가을겨울 인터뷰를 다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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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위로하는 40代 뮤지션 봄여름가을겨울

"우리 음악은 善합니다. 지고지순한 사랑을 꿈꾸고, 다투면 화해하자, 같이 가자는 게 우리 음악의 메시지입니다"

이근미  
 
16년간 활동해 온 국내 최장수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은 많은 기록들을 만들었다.
퓨전 음악을 가장 먼저 선보였고, 최초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불혹을 넘긴 나이에 '브라보 마이 라이프' 앨범으로 빅 히트를 냈다.


봄여름가을겨울
김종진 1962년 서울 출생, 고려大 사학과 졸업. 전태관 1962년 서울 출생. 서강大 경영학과 졸업.
1985년 「김수철과 작은 거인」에서 세션맨으로 연주 시작. 1986년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밴드. 1988년 김종진(기타)·전태관(드럼)으로 2인 밴드 「봄여름가을겨울」 결성. 현재까지 7개의 정규 앨범 발표. KBS2 FM 「브라보 마이 라이프」 진행.
6년 만에 再起에 성공
 
봄여름가을겨울의 멤버 전태관(사진 왼쪽)과 김종진.
  마흔두 살의 남자 둘이 매일 브라보를 외친다.
 
  2002년 1월 「브라보 마이 라이프」라는 노래를 들고 나온 2인 밴드 봄여름가을겨울은 최근 60여 회의 라이브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두 사람이 진행하는 KBS2 FM 「브라보 마이 라이프」(오후 6~8시)의 청취율은 同시간대 1위를 다투고 있다.
 
  반짝 스타가 한두 달 간격으로 명멸하는 연예계에서 봄여름가을겨울의 16년 롱런은 값진 사건이다. 서울 여의도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노래·작사·작곡·편곡·기타 연주를 담당하는 金鐘辰(김종진)씨와 드럼을 담당하는 全太寬(전태관)씨는 예상대로 지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김종진씨가 좀 더 진지한 쪽이라면, 전태관씨는 좀더 단정했다.
 
  봄여름가을겨울은 지금까지 7장의 정규앨범과 라이브 앨범 2장, 베스트 앨범 2장을 발표했다. 곡 대부분을 김종진씨가 만들었다. 김종진씨가 작사·작곡·편곡을 한 뒤 전태관씨와 함께 프로듀싱을 하면서 서로 의견을 교환한다. 음악은 김종진씨가, 금전적인 부분과 대인관계는 전태관씨가 맡고 있다.
 
  두 사람에게 7집 앨범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성공 비결을 물었다.
 
  『우리들만이 「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봐요. 어떤 음악을 들었을 때 「어∼ 봄여름가을겨울이네」라는 얘기가 나오는 게 바로 봄여름가을겨울류라고 생각해요. 「약간 도회적이면서, 약간 연주력도 있고, 일기 같은 가사」가 우리 음악이죠』
 
  두 사람은 6년 만에 음반을 발표한 뒤 2002년 2월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할 때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대중들은 기억하고 있었던 거죠. 우리가 활동했던 역사와 기억들이 힘이었던 것 같아요. 세종문화회관에서 막이 오르자마자 4000석을 꽉 메운 사람들이 「와아∼」하고 소리를 질렀어요. 「너희들이 해 줬구나」 하는 함성이었죠』
 
  팬들의 요청으로 그해 4월에 다시 한번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했는데, 암표가 돌 정도로 인기였다. 몇년간의 삶을 축적하여 일기처럼 음악을 만든다는 김종진씨가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우리 음악은 善(선)합니다.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류의 사랑이 아닌 지고지순한 사랑을 강조하고, 다투면 화해하자, 같이 가자는 게 우리 음악의 메시지입니다』
 
 
 
 음악으로 사람들을 위로한다
 
  두 사람은 81학번이다. 이른바 386세대이다. 김종진씨는 고려大 사학과를, 전태관씨는 서강大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김종진씨는 친구들이 데모할 때 카페에서 음악을 들었고, 전태관씨는 학교에서 드럼을 연습했다고 한다.
 
  『우리 둘 다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 없어요. 실천적인 음악가와 내면을 표현하는 음악가가 있다면 우리는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는 쪽입니다. 음악을 통해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싶은 게 우리의 소망이죠』
 
  그들은 가요계에서 「멀쩡한 커플」로 통한다. 「두 사람 다 명문대학을 졸업했고, 데뷔 이래 부업을 하지 않았으며, 야간업소 출연을 하지 않았고, 결혼을 하여 가정을 잘 지키고 있으며, 오로지 음악만 하여 재산을 모았고, 마약을 한 적이 없고, 1988년 결성 이래 해체되지 않은 유일한 그룹」이기 때문이다.
 
  전태관씨는 두 사람 사이에 「무엇은 하지 말고 무엇은 하자」는 독특한 리스트가 있다고 말했다.
 
  『돌아가신 김현식 형이 모범생 같은 우리들에게 「니들은 좀 해야 돼」라며 마약을 권했지만, 우리는 「저건 하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늘 마음속으로 동경해 온 일을 하게 되었는데 한순간에 고꾸라질 순 없잖아요. 현식이 형이 마약으로 건강이 나빠지고 결국 세상을 떠났을 때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우리가 약속을 지킨 건 둘이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서울의 중산층 가정에서 순탄하게 자란 덕 아니냐」고 하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니저인 장현진씨가 거들었다
 
  『가요계에 「봄여름가을겨울스럽다」는 말이 있어요. 음악적으로 늘 새롭고, 사생활이 깨끗하고, 마약도 안 하고, 공연 때는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걸 뭉뚱그려서 그렇게 말해요. 후배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고 있죠』
 
  봄여름가을겨울의 첫 앨범은 발라드 일색이던 대중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가요와 함께 발표한 연주곡 「거리의 악사」는 퓨전재즈 1호곡으로 기록되고 있다. 김종진씨는 『그동안 가요와 퓨전재즈를 병행했다』고 말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스윙풍만 재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죠. 록 음악과 라틴음악을 접목시킨 강렬한 재즈가 대중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간 것 같습니다. 이미 외국에서 연주되고 있던 퓨전재즈를 우리가 처음 도입한 거죠. 1981년부터 그런 음악이 좋아서 계속 연주하고 있다가, 데뷔하면서 국내에 처음으로 퓨전재즈를 선보인 거지요』
 
  봄여름가을겨울은 가요계에서 둘 이상이 결성하여 깨지지 않은 최장수 그룹이다. 17년째 함께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비결을 묻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 친구랑 안 하면 음악을 그만둬야죠. 티격태격은 하지만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고 말했다.
 
  1988년 첫 앨범을 냈지만 불러주는 방송 프로그램이 없었다. 나이트클럽에서 연주하지 말자는 약속 때문에 두 사람은 음반을 낸 뒤 할 일 없이 지내고 있었다. 앨범을 발표한 지 몇 달 만에 두 사람은 한영애씨 콘서트에 초대되어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서게 되었다. 전태관씨는 그날의 감격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를 부르는데, 객석에 있는 분들이 모두 따라하는 겁니다. 방송에서 우리를 소개하지 않았는데, 이미 대중들은 우리를 알고 있는 거예요. 관객들이 우리 노래를 부를 때 소름이 좍 돋으면서 눈물이 났지요』
 
 
 
 「어떤이의 꿈」으로 대중적 인지도 높여
 
   1989년에 발표한 두 번째 앨범에 들어있는 「어떤이의 꿈」은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 곡이 봄여름가을겨울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기타를 치면서 굵은 저음으로 노래하는 남자가 대중들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어떤이는 꿈을 간직하고 살고/ 어떤이는 꿈을 나눠주고 살며/ 다른이는 꿈을 이루려고 사네/ 어떤이는 꿈을 잊은 채로 살고/ 어떤이는 남의 꿈을 뺏고 살며/ 다른 이는 꿈은 없는 거라 하네/ 세상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과/ 세상에 이처럼 많은 개성들/ 저마다 자기가 옳다 말을 하고/ 꿈이란 이런 거라 말하지만/ 나는 누굴까? 내일을 꿈꾸는가?/ 나는 누굴까? 아무 꿈 없지 않나/
 
  이 노래가 담긴 2집이 80만 장 팔렸고, 1집도 덩달아 6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1989년, 2집이 나오자마자 방송사에서 출연요청이 쇄도했지만 이들은 출연을 거절했다. 김종진씨의 설명이다.
 
  『우리 노래를 두세 곡 한 다음, 다른 가수들의 반주를 해달라고 하더군요. 백밴드 이미지를 벗고 우리 자체로 우뚝 서자는 각오였기 때문에 거절했지요. 아예 한 시간을 우리에게 다 주지 않으면 안 나가겠다고 했어요. 우리 색깔을 갖고 가기 위해서였죠』
 
  KBS와 MBC는 이들을 출연시키기 위해 한 시간짜리 특집을 마련해 주었다. 극소수의 대형가수 외에는 불가능한 일을 데뷔 2년차 신인이 해낸 것이다. 「어떤이의 꿈」이 히트하자 나이트클럽에서 거액을 제시하면서 출연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전태관씨는 그런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우리 노래를 듣기 위해 나이트클럽에 와서 술을 마시고 춤을 춘다면 연주했을 겁니다. 춤 추고 술 마시러 온 사람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서 우리가 연주를 할 수 없는 일이죠. 우리는 단 한 번도 나이트클럽 무대에 서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동시대 가수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야간업소에 서지 않은 가수로 꼽히고 있다. 이들은 『프로뮤지션이라면 음악으로 밥 벌어 먹어야 한다』고 했다.
 
 
 
 최초로 라이브 음반이 밀리언셀러 기록
 
  봄여름가을겨울은 1991년에 가요계 최초로 라이브 음반을 제작했다.
 
  그때까지 조용한 녹음실 외의 장소에서 음반 녹음을 하는 건 상상도 못했다. 김종진씨는 『이미 미국에서 많이 하는 것이었는데 아무도 안 해서 우리가 한 거다. 기술적으로 어려울 거라고 했지만 해냈다』고 말했다.
 
  두 장으로 만든 라이브 앨범은 각각 80만 장씩 160만 장이나 팔렸다. 최초 라이브 음반이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것이다.
 
  뛰어난 연주자가 많은 곳에서 녹음을 하자는 생각으로 1992년 발표한 3집 앨범을 미국에서 제작했다. 이 앨범은 80만 장이 팔렸다. 지금까지 3장의 CD를 미국에서 녹음했다.
 
  사진작가 김중만씨가 찍은 16장짜리 사진집을 3집 CD에 넣자 곧바로 유행이 되었다. 1집과 2집은 화가 서도호씨의 그림을 넣었고, 6집은 깡통으로 제작했다. 재킷 하나에도 자신들만의 색깔을 집어넣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음악과 데이터가 같이 들어 있는 엔핸스드(Enhanced) CD도 이들이 최초로 발표했다. 6집은 CD를 컴퓨터에 넣으면 게임을 하면서 뮤직비디오도 보고 가사와 악보까지 볼 수 있다.
 
  1996년 무렵 이들에게 「슬럼프」가 찾아왔다.
 
  『현식이 형과 함께 시작한 게 1986년입니다. 10년 동안 하고 나니 음악의 샘이 말라버리더군요. CD를 낼 때마다 계속 업그레이드됐다고 생각해 왔는데 10년이 되니 그 이상의 것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냥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CD를 내면 밥 벌어 먹는 수단밖에 안 됩니다. 굉장히 괴로웠어요.
 
  쉬는 동안 둘이 매일 만나고, 따로 여행도 다니고, 케이블 TV에서 VJ도 하고 공연을 간간이 했어요. 하지만 새 음악을 발표 안 하니까 우리 스스로가 이렇게 사는 건 못 견디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1998년에 그간 낸 음반 가운데 엄선하여 두 장의 베스트앨범을 냈다. 한 장은 가요, 한 장은 오직 연주곡만 담았다. 지금까지 10만 장 이상 나갔고 계속 나가고 있는 중이다. 전태관씨는 『진짜 괴로운 건 팬들의 기대였다』고 했다.
 
  『우리는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팬들은 기대를 갖고 있다는 게 정말 괴롭더군요.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데, 공연장이 늘 꽉 찼어요. 우리 팬들은 극성스런 사람들이 없고 남자팬들이 많아요』
 
 
 
 「진통제 맞으러 간다」
 
   김진경(女·32·치위생사)씨는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88년부터 봄여름가을겨울의 팬이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지금까지 봄여름가을겨울의 공연을 하나도 안 빼고 다 가서, 늘 맨 앞에서 봤다고 한다.
 
  『아저씨들의 음악은 힘든 세상을 사는 우리들에게 위로가 되죠. 팬들끼리 「진통제 맞으러 간다」고 얘기해요. 특히 2002년에 열린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잊을 수가 없어요. 6년 만에 돌아온 아저씨들을 보고 다들 울면서 봤어요. 봄여름가을겨울의 음악은 최고를 추구하고 세련되고 고급스러워요. 오랜 기간 그 위치에 그대로 있는 게 고맙죠』
 
  봄여름가을겨울은 데뷔 때부터 「오빠」가 아닌 「아저씨」로 불리고 있다. 김진경 씨는 새로운 앨범이 나오면 두 장을 사서 한 장은 보관하고 한 장은 들고 다니며 듣는다고 한다. 그리고 새 앨범이 나오면 보통 10장 이상을 사서 주변에 나눠준다고 한다.
 
  봄여름가을겨울은 음반을 낼 때마다 라이브 공연을 통해 팬들과 직접 만난다. 대규모 공연과 팬들과 호흡을 같이하는 대학로 소극장 공연을 동시에 연다. 2003년에 7차례에 걸쳐 전국 순회 공연을 했고, 2002년에는 소극장까지 50번 정도의 공연을 했다.
 
  음악과 상관없는 전공을 택한 것에 대해 두 사람은 『끝까지 음악을 할 거라는 생각을 못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릴 때 형에게 기타를 배웠던 김종진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독일에서 온 친구의 영향으로 본격적인 기타 연습에 돌입했다. 고등학교 때 이미 친구들과 4인조 밴드를 결성해 베이스기타를 쳤다. 해군홍보단에 들어가 3년간 하루 8시간씩 기타를 연습했다.
 
  전태관씨는 어머니를 졸라 중학교 2학년 때 종로 세기음악학원에 다녔고 대학에 입학한 뒤 서강大 음악서클 「킨젝스」에 가입해 피나는 연습을 했다.
 
  두 사람은 1982년 어느 날, 건반 연주자 정원영씨 유학 송별파티에 따로따로 초대되었다가 친해졌다. 둘은 만나자마자 의기투합했고, 1985년에 「김수철과 작은 거인」 세션을 거쳐, 1986년 7월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김현식씨가 대마초로 구속되면서 팀은 곧 해체되었고, 두 사람은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세션에 참가하였다.
 
  1980년대에 최고 그룹의 세션으로 활동했으니 연주실력은 이미 그때 인정받은 셈이다. 김종진씨는 전태관씨를 「한국 최고의 드러머」라고 평가했다.
 
  『함께 연주해 보면 알아요.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게 해석력인데, 해석력이 뛰어나지요. 이 친구는 더 이상 배울 게 없다고 생각되는데 요즘도 수시로 외국에 나가서 배우고 옵니다』
 
  전태관씨는 김종진씨를 기타의 고수라고 했다.
 
  『테크닉만 뛰어났다고 고수가 되는 건 아닙니다. 젊은 친구들이 기타 치고 드럼 치는 거 보면 손이 안 보일 정도예요. 하지만 음악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기술 따로 음악 따로 노는 거죠. 연주자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연주력이 좋아집니다』
 
  김종진씨는 자신의 연주실력에 대해 『한상원씨가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기타리스트이고 저는 그 아래죠』라고 했다.
 
  두 사람은 지금도 하루에 두 시간씩 연습을 한다. 김종진씨는 『연습한다기보다 너무 좋아서 지금도 매일 밤 기타를 친다』고 했다. 전태관씨는 『골프채널을 틀어놓고 매일 두 시간씩 고무판을 두드린다. 미국 가서 아무 생각없이 2~3년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김종진씨의 노래실력에 대해 질문하자 전태관씨가 웃음을 터뜨렸다.
 
  『호흡이 길고, 고음이 쫙쫙 올라가고 그런 건 아니지만, 이 친구 나름대로 자기 컬러가 있고 목소리에 자기 감정이 그대로 실려 있어요. 그게 좋아요. 노래 잘해도 가식적으로 부르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건 못 듣겠어요. 감정이 메마른 상태에서 음정이 정확하면 뭐합니까. 가식처럼 만들어서 듣기 힘든 가요가 많아요. 이 친구가 만든 곡은 일상사를 진솔하게 표현하기 때문에 좋은 겁니다』
 
  김종진씨는 『내가 노래를 좀 못 부른다』며 웃었다.
 
  『하지만 저보다 봄여름가을겨울 노래를 잘 부를 사람이 없을 거라는 데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밥 딜런이나 레이 찰스가 노래를 잘해서 위대한 음악가가 된 건 아니거든요』
 
 
 
 마흔이 되니 음악을 좀 알 것 같다
 
   창작만 하기도 힘들 텐데 연주와 노래까지 하기가 힘들지 않느냐고 하자 김종진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나로 다 연결되어 있어 쉽게 합니다. 대신 이것 저것 하다 보니 빼어나게 하는 게 없지요. 밤을 새고 오전 6시에 잠듭니다. 놀면서 밤을 새요. 영감이 오기까지가 힘들 뿐 영감만 떠오르면 쉽게 하는 편이에요. 얘기하는 지금도 머리 속에서 음악을 생각하죠』
 
  불혹의 나이 40代를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두 사람은 『이제 뭘 좀 알 것 같다. 음악은 이제부터라는 생각이 든다. 소리 하나를 내도 예전과 확 다르다』고 말했다. 전태관씨는 6년을 쉬면서 자유로워졌다고 했다.
 
  『그전에는 음악을 들을 때 분석을 했어요. 드럼은 어떻게 쳤고 소리를 어떻게 잡았고 이런 걸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음악을 음악으로 듣게 되었죠』
 
  봄여름가을겨울은 7집 앨범을 헝가리에서 녹음했다.
 
  『칭기즈칸이 헝가리를 정복하면서 동양과 서양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칭기즈칸은 다른 나라를 정복해도 그 문화를 인정했습니다. 그 덕분에 헝가리 문화에 동양 문화가 스며들게 되었죠.
 
  퓨전재즈를 외국에서 가져왔지만, 한국 음악을 하자는 게 우리의 생각입니다. 이를테면 섞어찌개 같은 거죠. 재료는 외국에서 갖고 왔지만, 한국적 정서를 넣어 구수하게 요리하자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五感으로 겪고 느낀 걸 음악으로 표현하자는 겁니다』
 
 
 
 나이트클럽 음악가의 맥을 이어
 
  전태관씨와 김종진씨는 1981년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어렵게 외국음반을 구해 음악을 들었고, 나이트클럽에서 연주하던 정원영, 한상원씨 같은 최고의 뮤지션들과 교류를 시작했다.
 
  두 사람은 『한국 나이트클럽 음악가들의 명맥이 끊어지기 직전에 최고의 뮤지션들을 알게 되었다. 1940년대 빅밴드의 전통을 이어오던 나이트클럽 음악가들이 사라지기 직전에 다행히도 우리는 그 분들을 만나 정신을 이어 받았다』고 안도했다.
 
  1980년대, TV에 등장하지 않는 음악가를 인정하지 않는 풍토가 생겼다. 그러자 정원영, 한상원, 김광민씨 등은 본고장에 가서 음악을 하겠다며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들은 대개 10여 년씩 유학하고 돌아와 현재 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면서 연주활동을 하고 있다.
 
  1970년대 포크 음악이 한국에 들어왔고 1980년대 중반에 조금 더 세련된 서양음악이 유입되었다. 세련된 연주기법이 들어오기 시작할 때 그 일을 담당한 사람들이 바로 봄여름가을겨울이다. 동덕여대 실용음악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기타리스트 한상원씨는 봄여름가을겨울을 이렇게 평가했다.
 
  『소울음악, 펑크음악, 퓨전음악을 대중들이 쉽게 이해하게 된 것은 봄여름가을겨울의 공로입니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연주는 테크닉보다 느낌을 중요시하죠.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은 참신한 것을 많이 선보였습니다. 김종진씨는 천재적인 가사를 씁니다. 어떤 음악에도 어울릴 수 있는 가사를 쓰죠』
 
  봄여름가을겨울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한 뮤지션으로 「이치현과 벗님들」을 들 수 있다. 김종진씨는 이들의 연주실력이 기가 막혔다고 평가했다. 들국화는 봄여름가을겨울보다 3년 정도 먼저 출발했다. 들국화가 포크의 영향을 받았다면, 봄여름가을겨울은 나이트클럽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받아 각각 새로운 음악을 선보였다.
 
  봄여름가을겨울은 요즘 다음 앨범을 준비하고 있다. 이들은 1992년과 1999년에도 잠깐 방송을 한 적이 있다. 전태관씨는 방송의 묘미를 이렇게 말했다.
 
  『음악으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싶은 것처럼 방송으로 위로를 전하고 싶어요. 방송이 잘된 날은 굉장히 행복합니다. 사람들과 호흡하면서 느끼는 행복은 무엇과 비길 수 없죠』
 
 
 
 6·25 기념 공연 열어
 
  KBS의 라디오 스튜디오에 갔을 때, 두 사람은 풍부한 음악상식으로 다양한 얘기를 하면서 즐겁게 방송을 진행했다. 구성작가 김은선씨는 1992년에도 봄여름가을겨울과 함께 일했다며 이들을 『까다로우면서 격이 있는 DJ』라고 평가했다.
 
  『풍부한 음악상식과 수준높은 유머로 대화를 이끌어 나가기 때문에 봄여름가을겨울만의 독특한 향기가 있어요. 두 사람이 20년 친구이다 보니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방송이 자연스럽지요. 편안하고 격조가 있어서 청취자들이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전태관씨와 김종진씨는 방송 들어가기 전에 한 번도 『이런 유머 하자고 약속한 적 없다』며 『서로 눈빛만 봐도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알 정도의 사이』라고 했다. KBS2 FM의 오후 6시대는 청취율이 낮아 개편 때마다 DJ가 바뀌었다. 봄여름가을겨울이 2003년 10월부터 맡고 나서 동시간대 청취율 1위 방송과 근소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전한다.
 
  김종진씨는 「10+(텐 플러스)」라는 공연기획사의 대표를 맡고 있다. 10+의 멤버는 전인권, 한영애, 이문세, 봄여름가을겨울, 이승철, 이은미, 김현철, 김종서, 신해철, 이현우 등 이른바 가창력이 있는 가수들이다. 이들은 데뷔 이후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음악만 한 가수들로 라이브 공연을 계속했다는 특징이 있다.
 
  10명의 파급효과는 상당히 크다고 한다. 개개인이 콘서트를 할 때 스폰서를 받기 힘들지만, 10명이 함께 하겠다고 할 때는 서로 스폰서를 하겠다고 나설 정도이다. 10+란 10명 이외에도 얼마든지 다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이고 대중과 록음악, 댄스음악 등과도 연합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전한다.
 
  10+는 2003년과 2004년에 6·25를 기념하는 「노 모어 워(No more war)」라는 공연을 했다.
 
  기획한 의도를 김종진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서 내재되어 있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세대는 6·25를 실감하지 못하지만 잊지는 말아야죠. 全세계에 평화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할 수 있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그걸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한국의 음악가구요.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오래 전에 밥 겔 도프와 마이클 잭슨이 판문점에서 평화의 음악을 공연하려고 했었어요』
 
  「No more war」 공연에서는 같은 제목의 노래를 만들어서 출연자가 다 함께 부르는 것 외에 특별히 다른 이벤트를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가 실천적인 음악가는 아니니까요. 「사랑해 당신을」 이라고 노래해도 평화가 묻어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처한 환경 속에서 全세계인에게 말할 수 있는 가장 파워풀한 퍼포먼스지요. 정치색을 배제하고 현실이 이런 거니까 다시 한번 생각하고 얘기하자는 의미입니다. 언론에서 우리 공연을 反戰이라고 보도했던데,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평화입니다』
 
 
 
 음악가들이 먼저 각성해야 한다
 
   요즘 음반업계가 불황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봄여름가을겨울이 6년 만에 새로운 CD를 발표했을 때 가요환경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면서 음반 판매량이 예전과 비교해 10분의 1 정도로 줄어들었던 것이다.
 
  2002년 4월5일 이후로 거짓말처럼 음반시장이 올스톱된 뒤 지금까지 회복되지 않고 있다. 음반만 내면 선주문이 몇십만 장씩 들어와 밀리언 셀러를 기록했던 가수들도 요즘 판매가 잘 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한다.
 
  봄여름가을겨울의 7집 앨범은 예전에 비해 많이 팔린 건 아니지만, 요즘 음반시장을 생각하면 굉장한 판매량을 기록했다고 한다. 김종진씨는 『음반 불황에 음악가들도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음악가들이 어렵게 된 건 음악가들이 자초한 일입니다. 음악가들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러다가 자기 음악을 표현하지 못하게 됩니다. 음악을 생활의 도구가 아닌 자기 내면을 표현의 장으로 생각해야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에 맞는 스토리가 담겨야 하는데, 요즘은 모두 단품에서 끝납니다. 단품이라도 시리즈를 만들어야 그 사람의 「류」가 생깁니다. 그렇지 않으면 왔다가 가는 상품, 패션 정도밖에 안 됩니다. 역사 속에 남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대중들은 음악이 갖고 있는 파장으로 위로받는 걸 알았기 때문에 존중했던 겁니다. 내가 부르는 노래가 위로가 될 수 있고, 힘든 자를 일어나게 하고, 기쁠 때 서로 교감하는 도구라는 걸 알면 진실하게 자기 속을 표현하게 되죠. 지금은 그런 걸 안 합니다. 혼을 잃어버렸습니다』
 
  전태관씨는 『우리는 적어도 시류에 영합하지는 않았다』고 얘기했다.
 
  『1990년대 초반 이후부터 댄스뮤직이 작두를 타면서 TV만 켜면 댄스뮤직이었습니다. 힙합과 춤 일색이었죠. 그런 장르가 존재해야 하지만, 한편에서는 록도 하고 재즈도 해야 합니다. 된다 싶으니 미디어에서 댄스음악만 선호한 것이 문제지요. 공연시장도 동반하락하고 있어요. 2~3년 전부터 공연인구가 늘어나자 작년 연말에 200개 공연이 열렸어요. 공연에 대한 철학이 있는 전문가가 공연을 기획해야 하는데, 아무나 무대를 만드니 다같이 망하는 거죠』
 
 
 
 『대중을 탓할 이유가 없다』
 
  경제불황 탓도 있겠지만 노래만 살짝 다를 뿐, 똑같은 무대시설에 색깔도 똑같고 반주도 비슷비슷한데 누가 공연을 보겠느냐고 했다. 김종진씨는 대중은 굉장히 정직하다고 평가했다.
 
  『대중을 탓할 이유가 없어요. 우리가 진솔하게 음악하고 미디어에서 진솔한 거 보여 주면, 대중은 알아서 평가할 겁니다. 대중들이 MP3 파일을 주고받는 건 우리 입장에서 좋지 않죠. 음악가들이 존경할 만큼 제대로 했다면 그렇게 할까요? 그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겠지만 이렇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거 같습니다』
 
  전태관씨는 음반을 사는 층이 없어지고 MP3 시장으로 바뀌는 과도기에 체계가 바로 잡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입법을 해서 무료로 음악 듣는 걸 막아야 합니다. 지금 과금시스템은 생산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어요. 그래도 작지만 음반을 사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음반은 계속 내야 합니다. 가치 있게 정성들여 만든다면 판매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약간 시간이 걸리고 이득이 나지 않더라도 그런 방식으로 가야겠죠』
 
  김종진씨는 이미 8집에 발표할 곡을 다 만들었다고 한다. 시기를 보고 있는 중이라는데, 8집도 「봄여름가을겨울류」의 시리즈를 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한다.
 
  『이번에 석 장 내지 넉 장의 연작 싱글을 낼 생각입니다. 이번 CD는 「Life is Drama」가 주제입니다. 드라마처럼 재미있고 아기자기한 삶을 들여다보자는 프로젝트죠. 온라인에서 먼저 선보이고, 라이브 공연과 리믹스 공연장면, 활동하면서 쓴 수필과 메모를 넣어서 마지막에 합본하는 좀 특별한 음반을 발매할 생각입니다. 처음에는 현재의 과금체계를 따라 온라인에서 음악을 다운받는 형식이 될 겁니다』
 
  두 사람은 실력 있는 음악평론가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전태관씨의 얘기다.
 
  『우리나라에 음악평론 시스템이 세워진 적이 없어요. 진짜 권위 있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이 권하는 음반을 대중이 신뢰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진짜 평론가라면 연주하는 사람의 삶 속에 들어가보고 악기를 어떻게 세팅하는지, 세팅하는 사람이 어떻게 벌어 먹고 사는지 알아야 합니다. 평론가라면 음악가 정도의 귀와 음악 해석력이 있어야 해요.
 
  미국에서는 「롤링스톤」지에 평론가가 평론을 실으면, 대중들이 신뢰하고 구매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어떤 분들이 우뚝 서서 일갈하면 그런 거구나 인정할 수 있는 평론가가 있었으면 해요』
 
  김종진씨는 가요계가 음반 제작자들에 의해 『음악보다는 돈이 되겠다』는 판단 아래 움직이는 풍토는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후배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다
 
  『음악 제작자가 음악에 가치를 두고 제작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실정이죠. 제작자들이 진정한 구매층은 40代라는 걸 읽어야 합니다. 에릭 클립튼, 빌리 조엘, 닐 다이아몬드, 엘튼 존이 음반을 내면 판매가 됩니다.
 
  일본도 1998년경부터 중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일본에서 배용준에게 열광하면서 구매하는 사람들이 중년들입니다. 재작년부터 한국에서도 공연장을 찾는 중년들이 늘고 있습니다. 먹고살기 바쁘다가 여유가 생기면서 다시 찾아오는 거죠. 제작자들이 이걸 읽어야 합니다』
 
  최장수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의 희망은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현역으로 뛰는 것이다.
 
  『후배들에게 「저런 선배가 있으니까 우리도 하면 되겠구나」하는 희망이 되고 싶어요.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변절하지 않고, 하고 싶은 거 계속할 겁니다.
 
  미국의 롤링 스톤즈와 에릭 클립튼은 환갑이 넘었지만 무대에 서면 대학생들이 일어서서 다 울어요. 그런 선배들이 있으니 미국 음악이 최고 수준을 유지하는 겁니다. 우리도 후배들에게 존경받는 음악가로 남고 싶습니다』●
 
 

입력 : 2018.12.28

조회 : 12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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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혜연 (2018-12-31)

    전태관씨 편히쉬세요!!!! 브라보 마이 라이프처럼 멋진날만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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