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원 전 국무총리가 이달 하순 출간 예정인 회고록 <운명과 경주를 한 정홍원 스토리>에서 19대 국회의원선거(2012년 4월) 당시 새누리당 공천 비화를 밝혔다. 정 전 총리는 당시 새누리당 공천위원장이었다.
출간에 앞서 <월간조선>이 단독 입수한 회고록에서 그는 컷오프(cut-off)당한 김무성에 비례대표를 주자고 주장했지만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뜻에 따라 불발됐다고 밝혔다.
정 전 총리는 “공천과정에서 공천위원회와 비대위원회, 나와 박근혜 비대위원장 사이에 적지않은 언쟁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잘 된 공천이었다는 것이 총선 결과로 나타났지만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152석, 민주통합당은 127석, 통합진보당과 자유선진당이 각각 13석과 5석을 얻었다.
김무성 구제하려 했지만
정 전 총리는 회고록에서 19대 총선 공천 당시 가장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김무성-이재오 의원에 대한 공천 비화를 소개했다.
김무성 의원은 한때 친박계 좌장이었지만 2012년 당시에는 ‘탈박(脫朴)’ 인사로 분류됐고, 19대 공천 당시 현역의원의 25%를 공천배제하는 컷오프에 걸려 기존 지역구(부산 남구을) 공천 탈락이 유력시됐다. 당직을 맡아 일을 하느라 지역구에 집중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당에 기여한 바가 크고 향후 대선에서 역할할 여지가 많다는 것을 들어 친박계 내부에서조차 김 의원을 공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또 김 의원이 무소속으로 출마할 경우 부산에 무소속 바람이 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김무성 의원이 “당에 남아 총선과 대선 승리를 위해 기여하겠다”고 발표해 당 분위기가 좋아졌고, 정 전 총리는 김 의원을 구제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박근혜 비대위원장에게 독대를 요청했다.
“김무성 의원을 비례대표 명단에 포함시키면 어떨까요?”(정홍원)
“한 번 원칙을 깨면 다른 사람들이 왜 나만 예외냐고 주장하지 않겠습니까?”(박근혜)
정 전 총리는 비대위원장의 판단이 정도를 걷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비례대표 여부에 대해서는) 두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도 김무성 의원에게 선거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기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지만, 김 의원은 19대 총선에서는 결국 ‘백의종군’했다. 김 의원이 박근혜 비대위원장 시절 중요한 역할을 맡은 시점은 같은해 10월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대선후보 중앙선대위 총괄선대본부장직을 맡으면서다.
정 전 총리는 "그러나 그런 김무성 의원이 당대표를 맡는 동안 20대 국회의원 공천과정에서 보인 행동에 대해서는 실망감을 지울 수 없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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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2월 3일 국회 새누리당 대표최고의원실에서 김무성 대표와 정홍원 국무총리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조선DB |
이재오 공천 과정
정 전 총리는 “당시 친이계를 주도하던 이재오 의원은 친박계 정치인들로부터 원성의 대상이었다”며 이재오 의원 공천과정에 대해서도 회고록에서 설명했다. 이재오 의원은 지역구에 다른 경쟁자가 없는 1차 공천심사 후보자 21명 중 한 명이었다. 공천위원들은 별다른 이의 없이 21명 전부를 공천하기로 결정했다. 공천위원회가 결정을 내리면 그 결과를 비상대책위원회에 보고한 뒤 이의가 없으면 최종 확정되고, 이의가 있으면 공천위원회에서 재심 후 3분의2가 찬성하면 확정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 전 총리가 비대위 회의에 들어가자 ‘명망있는 사람으로 알려진 외부영입 비대위원’이 반대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했다. “지난 총선때 분란의 최고 책임자였던 이재오만큼은 공천을 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박근혜 비대위원장에게 “공천위원장인 제가 여기서 결론이 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좋은 모양새가 아닌 것 같다, 저는 나가 있을 테니 제가 없는 자리에서 계속 논의를 해 달라”고 부탁하고 승낙을 받아 밖으로 나왔다.
정 전 총리는 비대위 회의에서 나온 직후 기자실에서 이재오 의원을 포함한 1차 공천결과를 발표했다. 기자들이 “비대위 회의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발표를 하느냐”고 질문하자 그는 “공천위원회 결정을 발표하는 것이며 앞으로도 이렇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회의중이던 비대위 위원들에게 이 소식이 전해졌고, 회의는 이재오 논란의 장에서 순식간에 ‘정홍원 성토장’이 됐다. 그러나 심사장에서 정홍원 위원장을 기다리던 공천위원들은 발표 후 돌아온 정 전 총리에게 “속이 다 후련하다, 참 잘했다”며 박수를 보냈다. 비대위는 결국 이재오 의원에 대해 재심을 요구했고, 공천위원회는 전원일치로 원안대로 통과시켰다. 이재오 의원은 이런 과정을 통해 공천을 받을 수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진상 설명하라”고 말했지만…
또 회고록은 탄핵 후 박근혜 대통령을 만났던 일도 상세히 설명했다. 박 대통령은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얼마되지 않아 정 전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변호인을 맡아달라”고 말했고, 박 대통령과 정 전 총리는 12월 12일 청와대에서 만났다. 정 전 총리는 이 자리에서 “온 국민이 의문을 갖고 있지만 진상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며 “대통령이 곧 담화를 할 예정이라고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담화가 나오지 않아 실망했다”고 말했다. 또 “대통령이 직접 공개된 장소에서 국민에게 진상을 설명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때 박근혜 대통령은 “그건… 특검을 앞두고 제 담화가 부담이 될까 해서 하지 않았던 겁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정 전 총리는 “최순실을 어떻게 알게 됐고, 어떤 일이 있었으며, 그가 부당한 짓을 한 일이 있었다면 이를 언제 알았고, 그 후 어떤 조치들을 취했는지 소상하게 밝혀야 한다. 그래서 국민들이 납득한 다음 그에 상응한 처분이 무엇인가를 차분히 생각해 여론이 형성돼야 한다”는 취지로 약 한시간정도 박 대통령에게 조언했고 박 대통령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정 전 총리는 회고록에서 “쓴소리만 한 것 같아 죄송한 생각도 들었지만 나라도 한 번은 고언을 드려야 하지 않았나”라며 “그 후 박 대통령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고 지금도 부탁(변론)을 들어드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큰 멍에로 남아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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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1월 정홍원 총리와 박근혜 대통령이 국무회의 참석차 회의장에 입장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나야말로 진짜 흙수저”
이밖에 정 전 총리는 회고록에서 과거 어려웠던 유소년기 등 성장과정, 검사시절 맡았던 굵직한 사건들, 새누리당 공천위원장 시절과 국무총리 시절의 일화들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세월호 사고 당시 해외순방 후 귀국길에서 사고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했던 심정, 25일간 희생자 가족들과 지내며 그들과 아픔을 함께했던 심정도 절절히 밝히고 있다.
정홍원 전 총리는 서문을 통해 “사는 날이 너무 어렵고 힘겨워 많은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흙수저로 살아온 내 청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며 “수저 색깔만 쳐다보지 말고 자기 자신을 끝까지 믿고 스스로를 돕는 사람이 되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회고록을 쓴 동기를 밝혔다.
글=권세진 월간조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