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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치

오늘은 한글날이자 아웅산 테러 35주기! 유가족들의 상흔은 가시지 않았다

북한의 테러에 의해 순국한 17인의 유가족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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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아웅산 묘소) 전체가 솟구쳤다가 떨어지는 순간에 우리(임채헌·이재은)는 밖으로 뛰어나왔다. 나와 함께 파트너를 이뤄 카메라를 들고 있던 임채헌 기자와 다시 뛰어 들어가니까 모두가 피투성이였다. 이범석 외무장관의 입에서는 피가 솟구쳐 나오고, 이기백 합참의장은 쓰러진 채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폭발 직후 MBC 카메라에 찍힌 고 이범석 외무장관의 처참한 모습. 사진=TV조선 캡처
오늘은 572돌 한글날이면서 북한이 우리 국가원수를 상대로 자행한 아웅산 테러 35주기다. 남북 화해 무드가 불어 닥치면서 아웅산 테러는 이제 일반인의 뇌리에서 잊힌 지 오래다.
 
1983년 10월 전두환 대통령과 공식 수행원들은 서남아·대양주 공식 방문의 첫 순방국인 버마(현재의 미얀마)를 향해 날아갔다. 10월 9일 전두환 대통령 일행의 첫 일정은 버마의 영웅 아웅산 장군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었다.
 
전 대통령이 도착하기 며칠 전, 북한 김정일의 지령을 받은 북한군 정찰국 특공대 소속 진모 소좌, 강민철 대위, 신기철 대위 등은 묘소 천장에 원격폭탄을 설치했다. 대통령을 포함한 우리 각료들을 살해하기 위함이었다.
 
테러범들은 전 대통령이 도착하기 직전, 착오를 일으켜 폭탄을 폭파시켰다. 그 바람에 서석준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 등 각료를 포함한 17명이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당시 MBC의 임채헌 기자(MBC 해설위원 역임)와 이재은 카메라 기자(MBC 보도국 부국장 역임)는 이 공식 행사를 취재하기 위해 현장에 있었다. 행(幸)인지 불행(不幸)인지 이날의 참상은 이재은 기자의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펑’하는 소리에 놀란 이 기자는 카메라 셔터가 켜져 있는지도 모른 채 사고 현장을 둘러봤기 때문이다. 이 기자의 회고다.
 
“집(아웅산 묘소) 전체가 솟구쳤다가 떨어지는 순간에 우리(임채헌·이재은)는 밖으로 뛰어나왔다. 나와 함께 파트너를 이뤄 카메라를 들고 있던 임채헌 기자와 다시 뛰어 들어가니까 모두가 피투성이였다. 이범석 외무장관의 입에서는 피가 솟구쳐 나오고, 이기백 합참의장은 쓰러진 채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한국언론 100대 특종》(허용범 저)
 
아웅산 테러는 북한이 대통령과 정부의 각료들을 직접적으로, 그것도 제3국에서 살해하려 했다는 점에서 사실상의 선전포고나 다름 없었다.
 
이 테러가 김정일의 직접 지시에 의해 이뤄졌다는 사실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됐다. 납북(拉北)되었다가 1986년 탈출한 고(故) 최은희·신상옥 부부가 그중 하나다. 고(故)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도 “노동당 작전부가 주도하고 인민무력부 정찰조원들이 가담했다”고 증언했다. 재판 과정에서도 김정일의 지시가 있었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사건 이후 우리 정부의 자작극이라는 논란이 일었지만, 이는 임채헌·이재은 기자가 취재한 영상을 통해 해소됐다. 그들이 의도치 않게 촬영한 4분 55초짜리 영상이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중요한 자료가 됐기 때문이다. 이 영상은 너무나 끔찍하다는 당국의 판단 아래 사건 1년이 지난 1984년 편집 후 공개됐다.
 
이때 순국한 각료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브레인'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경제성장과 경제안정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진력했던 서석준 부총리-김재익 경제수석이 대표적이다. 두 사람은 서울대 동기이면서 서로 견제하고, 또 보완해 가면서 사상 유례없는 '3저 호황'의 초석을 다졌다. 특히 전두환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을 받은 김재익 수석은 “앞으로 다시 나오기 힘든 ‘천재’”라고 관가(官街)에서 극찬할 정도였다.
 
통일원 장관과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던 이범석 외무장관도 선이 굵은 외교관 출신으로, 1970년대 남북 적십자회담을 주도하는 등 능력을 과시했었다. 함병춘 청와대 비서실장(주미대사 역임)도 1974년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를 리드할 150명’에 포함될 정도로 국제 무대에서 인정받는 외교관이자 학자였다.
 
김재익 수석의 부인 이순자씨(전 숙명여대 문헌정보학과 교수)는 2000년 김대중-김정일 평양회담 직후, <월간조선>에 기고한 글에서 이런 소회를 남겼다.
 
<1983년에 양곤(미얀마의 수도)에서 있었던 북한의 테러사건에서 나의 남편 김재익을 잃었다. 그때 그는 국내에서는 물론 국제사회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던 젊은 경제관료였다. 한 가정에서 하루아침에 가장(家長)을 잃는 것보다 더 큰 비극이 있을 것인가? 더구나 그는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국보적인 인물’ ‘경제 대통령’이라는 이름을 얻었던 사람이었으니 국가적인 손실도 막대했다. 사건의 전모는 얼마 후에 밝혀졌고 그 주동 인물이 김정일이었음이 알려졌다. 
남편을 잃음과 동시에 나는 나의 일생을 잃은 셈이었다. 젊고 힘든 세월을 내내 견뎌오면서 내가 그려온 내 인생의 그림들을 대부분 접어서 그와 함께 묻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순자씨는 “이번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우리의 정부와 언론은 완전히 김정일의 이미지를 쇄신해 주었다”며 이렇게 비판했다.
 
<물론 우리 대통령의 정상회담 상대자가 너무도 격이 맞지 않는 것은 우리 국민 모두에게 체면 깎이는 일이니까 상대방의 인상을 좀 개선시킬 필요는 있었겠지만, 과거 그의 경력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가 한 국가의 ‘위대한 지도자’로까지 격상될 수 있는 객관성은 발견할 수 없다.
그는 지금까지 용의주도하게 자신의 정체를 숨김으로써 외부의 관심을 집중시켜 왔다. 또 그는 필요한 때 필요한 모습만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 효과를 최대화하는 수법을 써서 순진한 남한 사람들을 이번 회담 기간 동안 마음대로 휘둘렀다.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수행원들이 말한 그에 대한 평가 중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는 대목은 이런 면에서 어쩌면 정확한 표현인가 보다. 이 때문에 많은 남한 사람들은 마치 김정일 본연의 실체를 우리가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 미안했다는 듯이 그에 대한 찬사를 남발했다. 과연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의 인격을 완전히 개조할 만한 기적이라도 일어났단 말인가?>
 
테러범이자 독재자였던 김정일은 어떠한 단죄도 받지 않은 채 천수(天壽)를 누리고 죽었다. 이젠 그의 아들 김정은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독재를 자행하며 자신의 고모부와 이복형을 무참히 살해하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 
 
현재 아웅산 테러 유가족들은 언론과의 접촉을 꺼리고 있다고 한다. 대체로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길 꺼리고 있지만, 당국의 무관심한 태도에 대해선 분노하고 있었다. 어떤 유가족 중에는 자살한 이도 있다.
 
이 글 하단에 사건 20년 후, 유가족들의 삶을 취재한 《월간조선》 2003년 10월호 기사를 전재한다. 당시 한 유가족은 "지금 보면 정부도 그렇고 젊은 세대들도 북한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어차피 먹고 남는 식량을 북한에 지원하고 돕는 것은 좋지만 그보다 먼저 북한을 제대로 아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예요"라고 말했다.
 
남북 화해 분위기에 젖어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에게, 고민과 시사점을 주는 한마디다.
 
글=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아웅산 테러 20년 - 잊혀진 유족들의 삶

『그러면 가짜 金正日이 지령했단 말인가』

 
● 정권이 아닌 국가를 위해 죽어갔는데 정권이 바뀌니 국가도 잊고 있다
● 테러지령자 金正日의 사과도 받아내지 못하고 그에게 오히려 굴종해 가는 정부의 모습을 보는 것이 더 큰 고통
● 20週忌 행사 계획도 없는 정부
● 자살한 미망인… 아직도 악몽 꾸는 부상자도
 
 
1983년 10월9일 오전 참사를 불과 몇초 앞두고 아웅산 국립묘소에 도열한 수행원들. 왼쪽 끝으로부터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이계철 駐버마 대사, 서상철 동자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이범석 외무부 장관, 서석준 부총리, 그옆에 김기성 연합통신 차장과 이해순 駐이슬라마바드 부총영사의 모습이 보인다. 이 한 장의 사진은 중상을 입은 최금영 연합통신 사진부장이 폭발사고 수초 전에 찍은 것이다. 사진의 아래와 위쪽이 하얗게 바랜 것은 중상을 입은 최부장의 몸에서 흘러내린 피가 필름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金大中 정부 출범 후 관심 밖의 일
 
  10월9일 한글날마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를 참배하는 사람들이 있다. 묘비를 끌어 안고 우는 사람도 있고, 말없이 손으로 쓰다듬는 사람도 있다. 나이가 지긋한 장년의 여자들 곁에 아들, 딸이 동행하는 게 이들의 특징이다. 이들은 다름아닌 아웅산 폭탄테러 유가족들이다.
 
  아웅산 폭탄테러가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 지금은 기억이 아련하지만 1983년 사건 당시에는 국민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한글날 휴일인 1983년 10월9일 낮 12시58분(버마 현지 시간 오전 10시28분) 全斗煥 대통령의 서남아시아 순방 첫 기착지인 버마(現 미얀마) 아웅산 묘소에서 북한에서 파견된 테러단에 의한 폭발사건이 일어났다. 이 폭발로 全斗煥 대통령을 수행해 버마를 방문했던 徐錫俊(서석준) 부총리, 李範錫(이범석) 외무장관, 咸秉春(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등 국무위원을 포함한 공식 수행원 17명이 목숨을 잃고 15명이 부상을 당했다. 폭발은 全대통령을 겨냥한 북한의 테러인 것으로 밝혀졌고 全대통령은 묘소 도착이 늦어 목숨을 건졌다. 아웅산 국립묘지는 버마 독립 영웅 아웅산 장군과 그의 막료 8명이 묻혀 있는 버마의 성역이었다.
 
  테러를 자행한 범인은 북한의 진모 소좌(소령)와 신기철·강민철 대위 등 3명이었다. 이 가운데 신대위는 달아나다가 사살되었고 체포된 진소좌는 사형에 처해졌다. 테러 사실을 자백한 강대위는 원래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강대위는 현재까지 주로 정치관련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미얀마의 인세인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 사건 당시 28세였던 강대위는 이제 48세의 중년이 되었다. 북한에 돌아가면 영웅 대접을 받을 것이라는 강대위의 바람과 달리 북한은 아직까지도 아웅산 폭발테러를 남한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하며, 한국 정부는 물론 유가족에게 사과 한마디 하지 않고 있다.
 
  아웅산 폭발 테러는 10주년까지만 해도 언론에 자주 보도가 되었지만 金大中, 盧武鉉 정부에 들어서는 관심 밖의 일이 되었다. 20년이 흐른 지금 사건과 함께 아웅산 유가족들도 잊혀진 존재가 되고 있다. 유가족 대부분은 신앙생활로 마음을 다잡으며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공식적인 정기 모임은 없고 유가족 중에 경조사가 있거나 특별히 협의할 사항이 있을 시 1년에 한두 번 정도 모인다.
 
  徐錫俊 부총리의 미망인 兪水敬(유수경·63)씨는 국민大 조형대학 의상디자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1988년부터 세종연구소 이사로 재직하면서 유가족들과 연구소 간의 협의사항을 조절하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兪교수는 처음엔 『할 말이 없다, 얘기하고 싶지 않다』며 정중히 인터뷰를 거절했지만 곧 마음을 바꿨다. 兪교수는 1995년 삼풍 사건으로 장녀 이영씨를 잃는 슬픔까지 겪었다. 주변 유가족들은 兪교수가 『고통을 속으로 삭이면서 꿋꿋하게 자기 할 일을 하는 강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兪교수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우리의 아픈 과거를 너무 모르는 채 親北 성향을 갖고 있어서 걱정이 된다』며 『6·25 전쟁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겪었던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되는데 이제는 정부마저 방관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고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兪교수는 요즘 「아웅산 폭발 테러 20週忌 추모행사」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를 놓고 유가족 전체의 의견을 조율하고 있다. 1993년 10週忌 때는 외무부 주관으로 300여 유족과 全斗煥 前 대통령 등이 참석한 가운데 국립묘지 현충관에서 추모식을 했다. 이후로는 공식적으로 추모식을 한 적이 없으며 15週忌 때는 유가족들이 자체적으로 공식 추모식을 거부했다.
 
  兪교수는 『20週忌 추모행사는 공식적으로 해야겠지만 유가족인 우리가 요구해서 하는 것은 너무 싫기 때문에 그 문제를 놓고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에서 20週忌 행사를 성대하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작게라도 국민들이 그 사건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해 줬으면 좋겠다는 것이 유가족들의 솔직한 심정』이라고 설명했다.
 
  『정부 관료들이 국가를 위해 일하다가 순국한 건데 그걸 국가가 기억하지 않으면 누가 기억 합니까』
 
  兪교수는 기자를 쳐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지난 9월9일 유가족들은 모임을 갖고 20週忌 추모식 관련 회의를 했다. 10週忌를 제외하고는 해마다 유가족들이 각자 조용하게 추모식을 지냈지만 올해는 20週忌로 매듭을 짓고 가는 週忌이기 때문이다. 유가족들은 외교통상부에 공식 추모행사를 요청할 것인지, 예년처럼 자체적으로 조용하게 넘어갈 것인지에 대해서 각자 의견을 나누었다. 『공식행사를 요청하자』는 쪽보다는 『지금까지 조용히 살았는데 그냥 지나가자』는 쪽이 더 많았다고 한다.
 
 
 
 외교부 『특별한 행사 계획 없다』
 
  兪교수는 『20週忌 추모식을 유가족인 우리가 요구를 해가면서까지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정말 자존심이 너무 상하고 회의가 든다』고 말했다. 그는 『유가족 중 누구보다 강력하게 「요청하지 말자」고 주장 한 나였지만 이런 현실이 마음이 아프고 서운한 것은 매한가지』라며 『공식행사를 요청하자고 하는 사람들이나 하지 말자고 하는 사람들이나 어차피 마음은 다 같은 것』이라고 전했다.
 
  이 날 모임에서 「정부주관 공식 추모식 요청」과 관련한 유가족들의 공동입장은 결정되지 못했고 兪교수가 대표로 외교통상부의 주관 부서와 협의해서 결정하기로 결론이 났다.
 
  같은 날 외교통상부 당국자는 필자와의 통화에서 『아웅산 20週忌와 관련해 예년과 비교해 특별한 행사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외교통상부에서는 매년 10월9일 오전 8시에 실·국장 이상 간부들이 국립묘지 아웅산 순국자 묘역에 가서 참배하고 오는 것이 의식의 전부다.
 
  1983년 아웅산 폭발 테러 사건 후 全斗煥 前 대통령은 아웅산 테러 순국자들의 유지를 받들고 유가족들의 생활을 도울 목적으로 「日海재단」을 세웠다. 5共 청산과 맞물리는 정치적 우여곡절 끝에 日海재단은 현재의 「세종재단」으로 바뀌었고 목적과 성격도 달라졌지만 아웅산 유가족에 대한 지원은 계속하고 있다.
 
  세종재단 산하에는 「세종연구소」와 「아웅산 유가족 지원 사업팀」이 있으며 「유가족지원 사업팀」에서는 유가족이 사망할 때까지 年金을 지급하며 자녀들의 국내 대학원 및 해외 유학비를 지원해 주고 있다. 年金은 순국 당시의 급여를 기준으로 차등 지급하는데, 매년 소비자 물가 상승률에 맞추어 인상해 오고 있다. 장관급 유가족의 경우 현재 월 200만원 가량의 연금이 지급된다. 
 
  
 『정권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일한 분들인데…』
 
  세종재단 산하 「유가족 지원사업팀」에서는 매년 10월9일이면 아웅산 유가족들에게 화환을 보내고 관계자들이 묘역에 참배한다. 팀장 김진국씨는 『올해 20週忌를 맞아 우리 쪽에서 추모행사를 준비하고 싶지만 유족들은 민간단체인 우리가 하는 것보다는 정부가 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金팀장은 『10週忌 때도 외무부 주관으로 했지만 비용은 세종재단에서 지불했다』며 『이번에도 정부차원에서 20週忌 공식 추모행사를 한다면 얼마든지 지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만약 만약 외교통상부에서 못하겠다고 하면 다른 방법을 찾아 볼 것』이라고도 했다.
 
  李範錫 외무부 장관의 미망인 李貞淑(이정숙·74)씨는 가정법률상담소 성남지부 소장으로 일하며 한편으론 88서울장애자올림픽 자원봉사단으로 구성된 애린회 회장을 맡아 열성적인 사회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필자가 이맘 때만 되면 기분이 어떤지를 조심스럽게 묻자, 李씨는 『추석부터 안 좋죠. 추석도 없으면 좋겠어요』라고 답한다.
 
  李씨는 『엊그제 일어난 일 같은데 10주년이나 20주년이나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서글프다』며 『이번에는 20週忌인 만큼 뭔가 공식적인 추모행사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은 너무도 많이 잊혀졌고 더군다나 정부가 북한하고 화해하려고 애쓰는 분위기라 기대는 하지 않는다』면서도 『주관해 주는 기관도 없는데 우리끼리 덩그라니 앉아서 추모식 한다고 하면 그 얼마나 처량하겠는가. 그렇게 하기는 싫다』고 했다.
 
  李씨는 『돌아가신 그 분들은 정치가가 아니었다』며 『全 前 대통령 개인을 위해 일한 것도 아니고 5共 정권을 위해 일한 것도 아닌 나라를 위해 일하다 순국했는데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소홀히 하고 잊어버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李씨는 李範錫 장관과 같은 고향인 평양에서 이웃사촌으로 만나 1952년 4월 피란지 부산의 한 여객선 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슬하에 1남 4녀를 두었으며 현재 변호사이자 사업가로 활동 중인 장남 명호씨와 같은 빌라에 살고 있다. 장녀 소진씨는 외국기업체 임원으로, 차녀 소영씨는 변호사로, 3녀 진영씨는 동시통역사 그리고 4녀 진주씨는 대학교수 등으로 각자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 李여사는 요즘도 일주일에 한두 번 국립묘지에 있는 李장관의 묘소를 찾는다.
 
 
 
 『金泳三 대통령은 화환이라는 보내 주었는데…』
 
  金東輝 상공부 장관의 미망인 박정혜씨는 현대학원 상임이사로 일하고 있으며 외동딸 지은씨와 단출하게 살고 있다. 박여사는 『아웅산 테러와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얘기하고 싶지 않다』며 『그냥 잘 지낸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徐相喆 동자부 장관의 미망인 이정희씨는 『이렇게 혼자 오래 살지 몰랐는데 벌써 20년이나 흘렀다』며 『다 잊혀진 얘기 아니에요』라고 되물었다.
 
  李씨는 『그래도 金泳三 대통령 때까지는 10월9일에 화환이라도 보내주고 그랬는데 그 후로는 정부에서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고 얘기했다.
 
  합동 국민장 당일 국립묘지의 나무에 기대어 혼자 눈물을 삼키는 모습이 사진에 찍혀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던 徐장관의 차녀 미경씨는 요즘 중학교,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 둘을 키우느라 여념이 없다.
 
  『저는 울고 있습니다. 그러나 17년 동안 그렇게 좋은 아빠를 저에게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당시 17세로 서울예고 2학년에 재학중이던 미경씨가 했던 이 말은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오래도록 남았다.
 
  咸秉春 비서실장의 미망인 심효식씨는 아직도 기도로 나날을 이겨내고 있다. 장남인 재봉씨는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정치철학 박사학위를 받고 연세大에서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현재는 미국에 연구 출장 중이다.
 
  당시 순국한 沈相宇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의 미망인은 아직까지도 아웅산 사건과 관련, 외부와 연락하는 것을 삼가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개그맨 심현섭이 바로 沈실장의 아들이다. 公人이기에 인터뷰 기회가 많은 심현섭씨이지만 그의 모친이 공개 석상에서 아버지 얘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 역시 무척 조심하고 있다. 심현섭씨는 3남 2녀 중 넷째로 형 2명과 누나, 여동생이 있는데, 큰형은 회사원이고 둘째형은 학원을 경영하고 있다. 누나와 여동생은 시집가서 잘 살고 있으며 심현섭 본인만 미혼이다. 아웅산 사건은 당시로는 어린 심씨의 가슴에 씻기 어려운 큰 충격이었다.
 
  『사건 전날 아버지가 출장 가시기 직전에 제가 구두를 닦아드렸는데 그 때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1000원을 주고 가셨어요. 그 1000원을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추억이 이 한 장에 담겨 있습니다 』
 
 
 
 자살한 미망인도
 

  심씨는 『아직도 家長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다』며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가 형제들에게 하셨던 「이제 너희 인생에서 가장 큰 역경은 끝났다. 앞으로 더 이상 어려운 일은 없어」라는 말씀을 생각하며 이겨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金在益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의 미망인 이순자씨는 숙명여대 명예교수로 대학 강단에 서고 있다.
 
  李교수는 『가족들에게는 인생이 달라지는 계기였지만, 사람들은 「그런 일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너무 빨리 잊는다』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그는 특히 『최근의 對北관련 정부의 정책과 사람들의 의식을 보면 나라가 어디로 갈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李교수는 2000년 6월 남북 頂上회담 때 全세계 언론이 아웅산 테러를 지시한 金正日에 대해 「인간적이고 자상하고 정중하고 겸손한 사람」이란 표현한 데 분노했다. 李교수는 月刊朝鮮에 기고한 글(2000년 7월호)에서 「그렇다면 내 남편을 포함한 열일곱 분의 생명을 앗아간 사건은 가짜 金正日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이냐」고 반문했었다.
 
  이계철 駐버마대사의 미망인 이희익씨는 현재 1남 2녀의 자녀들과 함께 미국에서 지내고 있다. 河東善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의 미망인 차경숙씨는 남편을 잃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1986년 서울 압구정동 자택에서 자살했다. 유자녀들만이 남아 어렵게 생활을 꾸려가고 있으며 출가한 맏딸 승완씨가 가끔 유가족 모임에 모임에 나오고 있다고 한다.
 
  閔炳奭 대통령 주치의의 미망인 김보경씨는 소아과 의사로 일하고 있다. 김여사는 아웅산과 관련한 모든 인터뷰에 대해서는 『노코멘트』 라고 답했다.
 
 
 
 추석 때 명절 분위기 못 내

 
  李基旭 재무부 차관은 사건 당시 중상을 입고 이튿날 미군 수송기편으로 李其百 합참의장과 함께 필리핀 클라크 기지 병원으로 후송되어 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 미망인 윤경희씨는 현재 기력이 쇠약해져 병원에 입원 중이다.
 
  姜仁熙 농수산부 차관의 미망인 김경자씨는 신앙생활로 슬픔을 달래고 있다. 金여사는 『마음은 언제나 괴롭고 세월은 너무나 빠르다』며 『다시는 상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金容瀚 과학기술처 차관의 미망인 이정순 여사는 몸이 아파 집에서 요양 중이며 유가족 모임에도 몇 년 동안 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李載寬(이재관) 대통령 공보비서관의 미망인 이영수씨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직도 같은 괴로움과 그리움을 느끼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李여사는 『당시 사고 소식을 듣고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는데 회복 속도가 너무 느려서 「이러다 눈이 머는 게 아닌가」 하는 공포를 느꼈었다』고 얘기했다.
 
  『살다 보니까 20년이 됐지만 그때의 막막했던 심정, 충격은 아직도 그대로예요. 이것은 아마 우리가 죽을 때까지 안고 살아가야 하겠지요』
 
  李씨는 『지금은 장성했지만 사건 당시 아이들이 초등학교 6학년, 1학년이었는데 아이들의 심정은 오죽했겠습니까. 하지만 얘기하면 서로 상처가 헤집어지기 때문에 가족간에도 그 얘기는 꺼내지 않고 살아왔다』고 말했다.
 
  李씨는 『정기 모임 없이 1년에 한두 번 만나다 보니 자녀들끼리의 소통은 없는 편』이라며 『자녀들에게 모임을 승계하기 위해서라도 구체적인 정기 모임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걱정을 내비쳤다.
 
  李重鉉(이중현)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의 미망인 강민선씨는 근황을 묻자 『두 딸의 뒷바라지하면서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강씨는 『각자 삶은 자기가 꾸려 나가는 것 아니냐』며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고통은 본인 스스로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사건 당시 경호원도 두 사람이 죽었다. 한경희 경호원과 정태진 경호원은 각각 31세, 32세로 갓 결혼한 젊은 나이였다. 全 前 대통령 때까지는 청와대 경호실에서 이들 유가족에게 어린이날마다 선물을 보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이들은 재혼 후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현재까지 유가족 모임에 나오지 않고 있다고 한다.
 
  기적처럼 살아 난 李基百(이기백·72) 당시 합참의장은 귀국 후 육군 통합병원에서 치료를 계속 받았으며 1985년 국방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지금도 폭발 사고의 충격으로 밤에 자다가 깜짝깜짝 놀라 깨곤 하는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병원에서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부인 全景連(전경련)씨는 『길을 걸을 때마다 불편해 하며 조금만 걸으면 군살이 박여 밤마다 면도칼로 군살을 긁어 내고 있다』고 전했다.
 
  李 前 장관은 해마다 10월9일이 되면 혼자서 국립묘지에 참배를 간다. 그는 『사람들이 너무 잊는 것 같다』며 『나 같은 사람은 그래도 살아 있으니까 괜찮지만 유가족들은 많이 서운할 것』이라고 말했다.
 
 
 
 10월9일마다 혼자 참배가는 李基百씨

 
  당시 부상자 중의 한 명이었던 코리아타임스 기자 朴昌錫(박창석·57)씨에게는 10월9일이 제2의 생일이다. 『죽다 살아났으니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그의 아내가 그 날을 새로운 생일로 정해 준 것이다. 현재 코리아타임스 편집인 겸 상무이사로 재직중인 朴씨는 해마다 생일을 두 번씩 쇠고 있다.
 
  全斗煥 前 대통령의 한 측근은 『全 前 대통령은 해마다 이맘 때면 아웅산 폭발 테러 사건을 상기하며 「내 처지가 이렇다 보니 챙겨 주지 못해서 안타깝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전했다.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미얀마에 갔던 張世東(장세동·67)씨는 『당시 사건은 한마디로 분단의 비극과 아픔 그리고 희생』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살았다는 것 자체를 역사의 죄인이라고 생각한다』며 『이맘 때만 되면 늘 마음이 아프고 울적해진다』고 했다.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그 당시 국가위기로부터 우리나라가 구해진 것은 하느님의 보살핌으로밖에 볼 수 없으며 인간의 일로 한 모든 것은 경호보안상 얘기할 수 없습니다』
 
  張씨는 『당시의 모든 상황은 기록에 남아 있으며 그것은 명백하게 북한의 테러였다는 것이 사실로 판결이 났다』며 『아웅산의 비극과 희생을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 그 유지를 받들어 통일로 가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張씨는 『일각에서 아웅산 사건을 통일로 가는 길목의 장애요소로 생각하는 데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북한을 응징을 하느냐, 국제 사회로 불러 들이느냐의 기로에서 이걸 또 문제 삼기보다는 통일의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웅산 폭발 테러는 20년이 아니라 2000년이 가도 잊어서는 안 될 사건이지만 통일을 위해서는 개인이나 단체의 희생을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도 했다.
 
  아웅산 테러사건이 터진 뒤 희생자들의 유해를 국내로 옮기는 일을 진두지휘했던 尹昶洙(윤창수·68) 前 소청심사위원회 위원장은 20週忌의 소회를 묻자 『벌써 20週忌가 됐냐』고 반문했다. 그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인물이라는 인물들이 모두 아깝게 죽었다』며 갑자기 지시를 받고 미얀마로 날아가 시신을 수습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尹씨는 『돈 생각하지 말고 최고급으로 준비하라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수의를 비롯해 모든 것을 1등급으로 준비해 갔다』고 말했다.
 
  『그 때 내각은 지금 인재들에 비할 수 없는 역대 최고의 인텔리들이었어요. 그렇게 소중한 인재들을 한꺼번에 잃었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金正日의 사과를 받아야』
 

  李範錫 외무부 장관의 미망인 李貞淑씨는 2001년 金正日의 답방 소문이 보도되자 아웅산 유가족 대표로 「진정서」를 썼다. KAL 858 사건 유가족들이 金正日을 상대로 고발장을 내었을 무렵이다. 아웅산 유가족들 사이에서도 『李여사가 작성한 「진정서」를 언론에 미리 발표를 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金正日이 당초 약속대로 방한을 하지 않는 바람에 이 진정서는 李여사의 서랍 속에 묻히고 말았다.
 
  李씨는 필자에게 진정서를 건네며 『여기에 나를 비롯한 우리 유가족 모두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李여사는 『우리라고 북한과의 통일을 안 원하고 화해를 안 원하겠냐』며 『남편이 그걸 위해 일하다 목숨을 바쳤는데… 하지만 순서가 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남편은 그 때 나에게 敵을 알아야 화해도 하고 교섭도 한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지금 보면 정부도 그렇고 젊은 세대들도 북한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어차피 먹고 남는 식량을 북한에 지원하고 돕는 것은 좋지만 그보다 먼저 북한을 제대로 아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예요』
 
  李씨는 『지금처럼 우리가 끌려 다녀서는 진정한 화해도 통일도 요원하기만 하다』며 『국가적 차원에서 金正日의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입력 : 2018.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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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호 ‘시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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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기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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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영배 (2018-10-09)   

    참 아쉽기만 했다. 그렇게 힘없이 당했다는 걸 당시 너무 너무 분하게 여겼다. 지금에 이 정부에게 뭘 어필 할 수 있겠나? 빨리 새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국민도 이젠 좀 정신을 차릴 때가 됬는데 고통을 받고 정신을 차린다면 그건 바보다

  • 자인 (2018-10-09)   

    국가가 누란지기에 처했을 때 그 누구도 국가에게서 보상을 받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넘의 나라는 국가와 사회 공익을 위한 희생에 대해서는 개죽음에 가깝다. 이런 개들의 세상에서 누가 국가와 타인의 위해를 막기 위해 나서겠는가?

    강간당할 뻔한 여성을 구하기 위해 나섰음에도 쌍방폭행이라는 개같은 판결로 졸지에 전과자가 되어 나서기를 꺼린다. 이는 사법 체계와 시민 의식이 아직 미개함에서 벗어나지 못함일 게다.

    미 영화에는 항시 성조기가 비추고 상기의 경우에는 영웅으로 대한다. 이 넘의 나라엔 교육과 언론들이 좌파일색이고 할렘 문화가 창궐하니 국가 정체성과 시민 사회의 정의가 흔들린다.

    영웅은 외롭다했다. 미개한 국가일수록 올바른 언론에 대한 탄압은 크다. 월간 조선이나마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올바른 사회 정의가 무엇인지 선량한 시민에게 알리는 이 외로운 길을 앞장서서 갔으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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