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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韓美동맹 50년의 증언 - 白善燁 장군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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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美동맹 50년의 證言 - 白善燁 장군 『우리는 美國을 붙잡아야 산다고 생각했다. 草根木皮의 나라가 세계 최강대국과 손을 잡았기에 안보도, 번영도 가능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발상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제의했던 白善燁 장군 ● 美 해군성 전략기획국장(알레이 버크)이 『아이젠하워에게 휴전의 代價로 한미 군사동맹을 요구하라』고 충고… 美 대통령과 단독 면담, 원칙에 합의 ●『한미동맹은 함께 피를 흘린다는 전제에서 출발. 그것이 血盟이다. 입으로만 동맹이 되지는 않는다』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gomsi@chosun.com) 3·1절 대회장에 나타난 「多富洞의 영웅」 지난 3월1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약 10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反核反金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에서는 歷戰(역전)의 용사들의 함성이 눈길을 끌었다. 특히 이날 사회를 본 奉斗玩(봉두완)씨는 白善燁(백선엽·84) 장군을 단상으로 올라오게 해 『한국전쟁의 영웅 白善燁 장군. 이분이 1950년 낙동강 多富洞 전선에서 버티어 주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생존한 것』이라고 참석자들에게 소개했다. 白장군은 高齡(고령)이 믿기지 않게 힘차게 『대한민국 만세!』를 외쳐 참석자들의 열띤 박수를 받았다. 軍歌 「전우야 잘 자라」를 목청껏 불러 대는 歷戰 용사들의 눈시울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白善燁 장군은 1920년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평양사범, 만주군관학교, 군사영어학교, 1사단장, 군단장, 육군참모총장, 한국군 최초의 육군 대장을 지낸 전쟁영웅이다. 그는 3년1개월간 치러진 6·25전쟁 기간 중 제1사단장으로 平壤(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했고, 그 후 군단장, 육군참모총장으로 60만 大軍을 지휘하면서 북한 공산군과 중공군에 대한 不敗(불패)의 기록을 남긴 百戰百勝(백전백승)의 장군이었다. 그런 그가 거리로 나온 까닭은 무엇일까? 기자는 지난 3월4일 오후 전쟁기념관으로 白장군을 찾아갔다. 「反核反金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에 국민대표 자격으로 참가했던 그에게 기자가 『대한민국 만세!』라고 만세 삼창을 하시는 소리가 연세답지 않게 우렁찼다고 하자 『추운 날씨에 젖은 바닥에 앉아 있는 분들을 격려하고 싶은 내 마음을 「대한민국 만세!」로 대신했다』며 쑥스러워했다. ―3·1절 대회를 다녀오신 소감은 어떠신가요. 『비가 추적추적 내린 자리에 앉아 열심히 구호를 외치는 老年들을 보니까 이 민족이 지금 상당히 울분에 차 있다고 느꼈어요. 울분이 없다면 그렇게 안 모입니다. 만세 삼창도 國權을 수호하겠다는 의미예요』 그는 행사 중간에 태극기와 星條旗(성조기), 그리고 유엔기가 나란히 입장하는 장면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다고 한다. 『은혜를 잊는다면 우리가 금수보다 나을 게 뭡니까』 白장군은 『주한미군은 韓美동맹의 根幹(근간)이며 6·25 전쟁의 주역』이라고 했다. ―6·25 전쟁 때 美軍의 피해는 어느 정도였습니까. 『6·25 전쟁에서 미군은 3만3600명이 전사하고, 10만 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부상자 중 상당수가 별세하거나 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병원에서 아픔을 달래고 있습니다. 중공군이 우회-포위-공세로 나온 청천강 전투에서 美 2사단은 군우리 철수 중 3000여 명이 「죽음의 계곡」에서 전사했어요. 美 해병1사단은 영하 30도의 장진호 전투에서 700여 명을 잃고 3000여 명이 凍傷(동상)에 걸린 상태에서도 중공군 12만 명의 공격을 지연시켜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이 무사히 탈출한 흥남부두 철수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었잖아요. 이것을 잊는다면 우리가 禽獸(금수)보다 나을 게 뭡니까』 그는 이 대목에서 감정이 격앙되는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白장군은 『金正日의 핵무장보다도 더 큰 안보상의 위기는 韓美동맹의 와해』라면서 『金正日이 핵무장을 하는 것과 동시에 韓美동맹이 와해되면 한국은 최악의 위기 속으로 빠져 든다』고 경고했다. 그는 『韓美동맹의 근거는 金正日 정권을 韓美 공동의 敵으로 본다는 것이고 敵의 위협에 공동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1945년 9월8일 한국에 진주한 주한미군은 6·25 전쟁이 한창이던 때는 최고 30만 명에 이르렀고, 지금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철수를 거듭해 현재 3만7000여 명이 북한군의 남침 억지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白장군은 韓美 상호방위조약이 어떻게 시작돼 오늘에 이르고 있는지 그 幕後(막후) 秘話(비화)를 들려 줬다. 아이젠하워의 방한 1952년 11월, 美國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와 일리노이 州知事를 지낸 민주당의 아들리 스티븐슨(Adlai E. Stevenson)이 맞붙어 아이젠하워 원수가 승리했다. 아이젠하워는 선거 公約(공약)으로 『대통령에 당선되면 한국 戰線(전선)을 둘러보겠다』고 공언한 대로 12월2일 訪韓했다. 당시 미국 국민들은 한국전이 3년 동안 계속되면서 自國의 젊은이들이 희생되자 점차 終戰(종전) 쪽으로 여론이 기울어져 갔다. 그의 訪韓은 극비에 부쳐져 김포공항에 내린 후, 서울 동숭동의 美 8군 사령부(現 한국문화예술진흥원)로 직행해 그곳에 머물렀다. 白장군은 이튿날인 12월3일 아침, 아이젠하워가 주재한 회의에 참석하게 됐다. 먼저 밴플리트 대장이 일어서서 한국전에 참전 중이던 당선자의 아들인 존 아이젠하워 중령의 안부를 전했다. 『아이젠하워 중령은 제3사단의 대대장으로 一線에서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당선되신 직후에 보직을 대대장에서 3사단 정보참모로 임명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이젠하워는 『군인의 補任(보임)에 대해서는 軍사령관이 알아서 할 일이고, 내 희망은 아들이 제발 敵(적)에게 포로가 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白장군은 이 자리에서 아이젠하워 당선자에게 한국군 20개 사단을 증편해 줄 것과, 미군 1개 사단 유지비용으로 한국군 2~3개 사단의 유지가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이젠하워 당선자는 白善燁 장군의 제안을 받아들여 3개월에 1개 사단씩을 창설하기로 합의했다. 아이젠하워와 白善燁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美國의 휴전방침은 확고 1953년 1월31일, 대장으로 승진한 白善燁 장군은 그해 5월 美 육군참모총장 콜린스(Lawton J. Collins) 대장의 초청으로 미국 방문길에 오른다. 『대구에서 C-47 군용기로 東京으로 가서, 팬암 소속 여객기로 갈아타 호놀룰루,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워싱턴에 내렸습니다. 육군성 정보국에 근무하고 있던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ausman) 중령이 영접을 나왔고요. 공항에서 육군대장에 대한 예우로 예포 17발로 발사해 주었습니다. 포트 베닝(Fort Benning, 美 보병학교), 포트 실(Fort Sill, 美 포병학교), 美 통신헌병훈련학교(Fort Gordon)에서 위탁교육 중인 장교들을 만나 한국군의 장래에 대한 토의도 하고 건의도 들었습니다』 白장군은 그곳에서 1951년 1군단장 시절, 제5순양함대 사령관으로서 함포사격을 지원했던 美 해군성 전략기획국장 알레이 버크(Arleigh Burke) 제독을 만난다. 1군단 고문관이던 글렌 로저스(Glenn Rogers) 대령 집에서 버크 제독, 평양 진격 때 1사단 고문관이던 헤이즐렛(Heyzlet) 대령, 제임스 하우스만 중령, 미국 유학 중이던 南星寅(남성인) 대위 등 여섯 사람은 새벽 3시까지 한반도 情勢(정세)에 대해 깊이 있는 토론을 했다. 『알레이 버크 제독과는 휴전회담에 대표로 같이 다녀서 굉장히 친해요. 그 사람 말의 요지는 「지금 아이크(아이젠하워의 애칭) 행정부의 휴전 방침은 이미 굳어졌다. 아무리 李承晩 대통령이나 한국민들이 반대해도 안 된다」는 겁니다』 6人이 얻어낸 결론은 「한국은 비록 통일 없는 휴전을 결사반대하고 있으나 미국은 조만간 휴전을 할 것이며, 이 시점에서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어떤 보장을 얻어 내지 못한다면 한국의 장래는 위태롭다」는 것이었다. 버크 제독은 白장군에게 미국 정부로부터 모종의 군사적·경제적 보장을 받아내려면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직접 만나라고 강력하게 권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났습니까. 『이튿날 콜린스 총장에게 아이크를 만나야겠다고 하니까 難色(난색)을 표시하더군요. 아이젠하워가 당신을 만나 주면 1년에 10여 명씩 찾아오는 他國의 참모총장들의 면담을 거절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이었어요. 나는 정색을 하고 「다른 나라 참모총장과 나는 상황이 다르다. 매일 수없이 많은 사상자를 내며 美軍과 함께 싸우고 있는 한국의 참모총장을 어떻게 다른 나라의 참모총장과 비교할 수 있는가. 나는 지난해 12월에도 대통령과 만난 적이 있다」고 항의했어요』 『아시아 국가와 상호방위조약은 매우 드문 케이스』 白장군의 완강한 태도를 본 콜린스 총장은 옆방의 참모차장 존 헐(John Hullㆍ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의 후임)을 불러서 백악관 방문을 주선하도록 연락을 취하게 했다. 이튿날 오전 10시 정각, 白장군은 백악관 집무실에서 수행원도 배석하지 않고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단독 면담했다. 『집무실은 창가에 큰 책상이 하나 놓여 있는, 생각보다 넓지 않은 방이었습니다. 「반갑습니다, 프레지던트 아이젠하워입니다」라고 하길래 「李承晩 대통령께서 안부(Best wishes)를 전하셨다」고 답했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오갔나요. 『아이젠하워는 「한국 정부와 국민이 휴전을 반대하는 뜻은 잘 알고 있으나 한국전쟁을 종식시키겠다는 것이 나의 선거 공약이며, 友邦인 영국과 여러 동맹국들이 3년씩 전쟁이 이어지니까 휴전을 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했어요. 저는 「만약 여기서 휴전을 하게 되면 통일의 기회는 사라지고 맙니다. 연합국의 도움을 받는 이때에 통일을 안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국 정부와 국민의 휴전반대를 과소평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李박사도 휴전을 하면 국군을 유엔군에서 분리해 단독으로 공산군과 싸우겠다고 결단했거든요』 다음은 당시 나눈 대화를 一問一答(일문일답)으로 정리한 것이다. 〈아이젠하워: 그렇다면 무슨 방안이 있겠습니까? 白善燁: 대통령 각하, 왜 우리에게 보장(the guarantee)을 해주지 않습니까? 아이젠하워: 보장이란 무슨 뜻이오? 白善燁: 우리나라가 3년간의 전쟁으로 국토가 폐허로 변하는 희생을 당했습니다. 이대로 휴전하면 우린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에게 상호방위조약(Mutual Defence Pact) 같은 것을 고려할 수 있지 않습니까? 나라가 폐허화했는데 경제원조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젠하워: 당신의 말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합니다(In principle, I agree with you). 그러나 상호방위조약은 유럽 국가와는 많이 체결하고 있지만, 아시아에서는 매우 드문(very rare) 케이스이고, 上院의 認准(인준)을 받아야 합니다.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에 관해서는 벌써 미국 정부內에 위원회가 구성이 됐습니다〉 아이젠하워는 白善燁에게 워싱턴에 얼마나 머물지를 묻고 월터 스미스(Walter Bedell Smithㆍ제2차 세계대전 중 아이젠하워의 참모장) 국무차관을 만나 이 문제를 협의하라고 했다. 당시 국무장관은 존 덜레스(John Dulles)였다. 『이튿날 워싱턴에서 알레이 버크 제독과 함께 스미스 차관을 찾아가 휴전 후 한국의 방위와 再建(재건)에 대한 의견을 나눴습니다』 ―이것이 바로 1954년 11월18일 서울과 워싱턴에서 발표된 韓美 상호방위조약의 시발이었던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韓美 방위조약이 미국 사람들이 원해서 체결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제가 가서 아이젠하워에게 매달려 성사된 것입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李承晩 대통령으로부터 방위조약에 대한 언질을 받으신 건가요. 『李박사에게 승인을 받은 일도 아니고, 梁裕燦(양유찬) 駐美대사와 이 문제에 대해 상의한 적도 없어요. 아이젠하워와 만나서 성사시킨 방위조약에 관한 것들은 귀국해서 李박사에게 설명을 드렸습니다. 제가 아이젠하워를 만나 이 문제를 협의한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하셨는지 보고를 드리고 나자 「잘했다」며 대단히 좋아하셨어요. 당시 李박사도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어놓지 않으면 한반도의 안정이 어렵다고 판단해 韓美동맹을 강력하게 희망했습니다. 당시엔 건국 초였기 때문에 李박사도 우리 軍 장성들과 韓美동맹의 필요성에 대한 격의 없는 대화를 많이 나눴습니다. 李박사는 미국이 주저하자 반공포로를 석방하며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압력을 미국에 가했어요. 해줄 것이 있으면 빨리빨리 해달라는 거지요. 그러나 미국은 한국의 요구대로 휴전 이전에 韓美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면 공산군 측이 휴전협상을 결렬시킬 것을 우려했어요』 1953년 6월12일 새벽 2시, 부산ㆍ마산ㆍ광주ㆍ논산 등 전국에 散在한 포로수용소에서는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2만7000여 명의 반공포로들이 일제히 수용소를 탈출했다. 수용소 관할 부대는 美軍 병참관구사령부(KCOMZ)였다. 이곳에 파견근무하던 한국군 장병들은 경비임무를 포기하는 형식으로 포로들의 탈출을 도왔다. 李承晩 대통령의 外交術 ―美軍 측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군사고문단장(KMAG) 고든 로저스(Gorden Rogers) 소장과 테일러 美 8군사령관, 그리고 미군 병참관부사령부 사령관인 헤렌(Thomas Herren) 소장이 전화를 걸어 분통을 터트리더군요. 특히 東京의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도 「누구의 지시냐」며 두 차례나 항의전화를 했어요. 어떠한 답변도 할 수 없던 나는 새벽 1시에 李承晩 대통령에게 전화를 했어요. 프란체스카 여사와 경무대 비서들이 老대통령의 건강상 「내일하라」고 만류하는 것을 무릅쓰고 통화했습니다. 상황을 보고 드리니까 대통령은 의외로 담담했어요. 「(미국 측에)내가 했다고 그래. 내일 오전 중에 언론 보도자료(Press Release)를 낼게」 하는 겁니다. 나는 李박사께서 책임을 회피할 줄 알았거든. 엄청난 사태의 책임을 혼자 떠맡겠다는 거지요』 이 사실은 美軍 측에 통보됐으나, 탈출한 반공포로들의 再수감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튿날 클라크 대장은 東京에서 날아와 경무대로 李대통령을 예방해 항의했다. 『「중요한 문제는 저와 상의한다고 하셨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고 클라크가 항의를 하니까 李박사가 「내가 만일 당신하고 상의하면 당신 입장만 곤란할 것 아니오. 그래서 事前에 얘기를 안 한 거요」라고 했습니다』 이에 당황한 미국 정부는 한국전 3주년인 1953년 6월25일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인 월터 로버트슨(Walter Robertson)을 18일간 한국에 특사로 보내 韓美 방위조약에 대한 세부 사항을 李承晩 대통령과 단독으로 만나 협의하게 했다. ―로버트슨 차관보는 李대통령에게 어떤 제안을 했나요. 『세 가지 메시지를 전달했어요. 첫째, 미국은 평화적 수단으로 한국을 통일하는 데 계속 노력한다. 둘째, 戰後 방위조약을 체결한다. 셋째, 미국 정부가 허용하는 한 장기적인 경제원조를 제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토대로 한국 정부는 휴전문제를 중심으로 주한미군 감축문제 등이 포함된 현안을 로버트슨 특사와 토의해 구체적으로 정책화한 겁니다』 ―韓美 상호방위조약의 골자는 무엇인가요. 『「小휴전회담」이라고 불린 18일간의 李ㆍ로버트슨 회담에서 李대통령은 다섯가지 약속을 얻어 냈습니다. ①정전 후 韓美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 ②최초 10억 달러의 원조자금 供與(공여)를 비롯한 장기 경제원조에 대한 보증 ③미국 정부는 1952년 11월 아이젠하워가 약속한 육군 20개 사단의 증편 이행과 육군의 증편에 상응하는 海軍 및 空軍의 증강을 승인한다. ④韓美 양국 정부는 휴전 후의 정치회담에서 90일 이내에 실질적 성과가 없을 경우 정치적 회담에서 탈퇴해 별도의 대책을 강구한다 ⑤정치회담에 앞서 공동 목적에 대해 韓美 간 頂上회담을 개최한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미국 측은 한국이 휴전회담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미국을 붙잡아야 한국이 산다고 생각』 덜레스 美 국무장관은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4일 8명의 美 고위사절을 대동하고 來韓, 한국대표와 상호방위조약 초안검토를 위한 회합을 가졌다. 이후 卞榮泰(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국무장관은 1953년 8월8일 서울에서 韓美 상호방위조약에 假調印(가조인)하고 그해 10월1일 워싱턴에서 정식으로 조약에 서명했다. 아이젠하워는 1954년 1월11일 美 상원에 법안의 조속한 비준을 요청했고, 美 상원 외교委는 81대 6으로 가결했다. 전문과 본문 6조로 구성된 韓美 상호방위조약은 1954년 11월17일 정식 발효돼, 韓美 군사동맹의 법적 토대가 됐다. ―현역시절 韓美 군사동맹의 필요성은 느끼셨나요. 『한국전쟁 중에는 절실했어요. 休戰이 임박하면서 이 나라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은근히 걱정이 됐어요. 결국 미국 사람을 붙잡아야 산다고 생각한 겁니다. 국민소득 50달러도 안 되는 草根木皮(초근목피)의 나라, 총 한 자루도 못 만드는 나라, 아무것도 없는 이 나라가 미군이 철수하면 어떻게 되나. 주변 산의 소나무 껍질이 허옇게 다 벗겨진 대한민국이 살려면 세계 초강대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지요』 ―요즘 美軍 철수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민족 自尊(자존)」을 지키자는 것 아닙니까. 『자존심만 가지고 사는 게 아닙니다. 세계 3大 경제대국인 日本, 그리고 영연방의 나라 英國이 자존심이 없어서 「미국의 푸들」이라는 말을 듣는 줄 아십니까. 세계 최강국이 한국의 安全을 보장하니 국제 자유무역을 해서 한국 사람들이 이만큼이나마 먹고 사는 것 아닙니까.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가 어떻게 삽니까. 미국이 경제원조를 해주면서 日本의 물건을 사서 쓰라고 하니까 反日 감정이 있던 李承晩 대통령이 거절했었습니다. 그러자 미국이 한국에 石油 공급을 중단했어요. 결국 방앗간에서 쌀 搗精(도정·낟알을 찧는 일)도 못하게 되니까 李박사는 13일 만에 요구를 철회했습니다. 韓國軍과 美軍이 군사동맹으로서 뭉친 韓美연합사 체제가 있기 때문에 우리 안보가 튼튼하거든요. 여기서 벗어나면 亡國(망국)입니다』 ―軍事 동맹관계는 공동으로 싸워야 할 主敵(주적)이 명확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는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북한을 어떻게 믿어요? 朴正熙 대통령, 全斗煥 대통령을 죽이려고 했고, KAL機 폭파, 동해안 잠수함 침투 등으로 남한을 赤化하겠다는 집단입니다. 대화의 상대가 안 되는 자들이에요. 일본 사람이 영국과 英日동맹을 하고 미국과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했기 때문에 露日戰爭(노일전쟁)에서 간신히 이겼단 말이지요. 일본이 富國强兵(부국강병)의 일류 산업국가로 컸단 말입니다. 우리가 韓美동맹이란 소중한 것을 우리 스스로 폐기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북한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와의 군사동맹은 어떻습니까. 『북한에 러시아군이나 중국군이 주둔하지만 않았지 전쟁이 발발하면 주한미군이 以南에 주둔하고 있는 만큼 북한도 신속하게 러시아나 중국의 병력과 물자의 지원을 받습니다. 北은 陸接된 동맹국으로부터 신속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데 반해, 南은 增援軍(증원군)인 美軍이 7000마일 바다 건너에 있는 상황이니 더 강력한 군사동맹을 가진 것은 북한입니다』 ―미국 정부는 현재 본격적으로 주한미군 철군을 하려는 것 아닌가요. 『미국 현지의 언론은 철수를 기정사실화해 앞서나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美 국무성이나 국방성, 駐韓미군사령부 입장에서는 「완전 철수」 이전 단계인 「再배치」 쪽으로 가닥을 잡아 가고 있는 것 같아요. 부시 정권의 巨視的인 군사전략은 미국 청년들이 피 흘리는 것은 극소화한다는 것입니다. 1991년 이라크戰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지요』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면 미국이 자동개입하도록 韓美 군사동맹에 명시돼 있나요. 『韓美 군사동맹에 자동개입 조항은 없어요』 『집단방위 체제의 최고 파트너는 美國』 1954년 11월17일 발효된 「대한민국과 美합중국 간 상호 방위조약」 제2조에 따르면, 「당사국 중 어느 一國의 정치적 獨立 또는 安全이 외부로부터 무력공격에 의하여 위협을 받고 있다고 어느 당사국이든지 인정할 때에는 언제든 당사국은 협의한다」라고만 돼 있다. 『韓美 간 방위조약은 NATO와 다릅니다. 韓美 양국이 「협의」하게 돼 있지 자동적으로 군사원조를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껏 美2사단이 동두천이란 「제1線」에 배치돼 있으므로 인계철선(trip wire) 구실을 해서 자동개입의 名分을 미국에게 주었지요. 사실상 韓美 방위조약보다 더 공고한 방파제 구실을 한 겁니다. 만일, 漢江 以南으로 再배치한다면 「인계철선」이 없어지기 때문에 우리의 안보는 엄청나게 취약해지는 거요』 ―韓美연합사령관 자리에 美軍 장성이 임명되는 것에 대해 한국군 장성으로 임명하고 작전 통제권도 가져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만. 『NATO(북대서양조약기구)는 美軍장성이 NATO 사령관을 맡기 때문에 회원국이 侵攻(침공)당하면 사령관의 권한으로 자동개입합니다. 현재 駐韓미군사령관이 韓美 연합사령관을 겸임하고 있는데, 駐韓미군사령관이 작전통제권(operational control)이 없다면, 유사시 한국군 장성이 한국과 일본 주둔 美 공군, 미국에 있는 지상군 3군단, 美7함대 투입을 명령할 수 있겠습니까. 朴대통령이 韓美연합사를 창설한 것은 국가적·세계적 전략을 꿰뚫고 있었고, 달관했기 때문에 그런 機構(기구)를 만든 겁니다. 일개 국가의 독자적 작전은 어려우니까 지역방위·집단방위 체제로 하자는 것 아닙니까. 집단방위 체제에서 최고의 파트너는 미국입니다』 미군 근무지로서 인기 1위였던 한국이 꼴찌로 추락 白장군은 지금 거론되고 있는 撤軍(철군)문제가 50년 전의 복사판이라고 했다. 『지난 3ㆍ1절 국민대회같이 正論(정론)이 앞장서야 하고, 多數의 침묵자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잘못된 길을 가는 자들에게 군사전략 마인드를 일깨우고 以北의 돼먹지 못한 집권층을 打倒(타도)하도록 방향을 잡아 줘야 합니다』 1945년 이후 지금까지 한반도 근무를 위해 다녀간 미군은 750여만 명에 이른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美 해군의 40%, 美 공군의 50%, 美 해병대의 70% 이상에 해당하는 戰力을 전개토록 계획하고 훈련에 임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은 해외파견 병력 중 독일에 6만9000명, 일본 4만 명, 한국에 세 번째로 많은 3만7000명을 주둔시키고 있습니다. 더욱이 6·25 전쟁을 통해 가장 돈독한 韓美 혈맹관계가 형성되었음에도 한국은 지금 미군의 근무 선호도가 가장 낮은 지역으로 전락했는데요. 『얼마 전까지는 한국 근무가 敵(적)이 있는 지역으로 임무가 명확하고, 인구 1000만 명 이상의 도심에서 서구화한 생활이 가능하며, 항상 새로운 상황과 도전에 접할 수 있어 근무선호도 면에서 미군 장교들로부터 줄곧 상위권을 차지했답니다. 美軍의 근무지역인 오산ㆍ평택 그리고 동두천은 1년 단위 전투경험을 쌓을 수 있는 지휘관들의 선택적 보직이기도 했습니다』 白장군은 韓美관계의 再정립을 위해 韓美 간의 시각차 극복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韓美관계의 위기극복을 위해 軍 원로로서 한말씀 해 주십시오. 『북한의 핵 및 대량살상무기 개발 위협에 대한 韓美간의 시각차를 극복해야 해요. 비록 이러한 시각차가 소수견해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더 악화되기 전에 공감대 형성이 필요합니다. 1977년 카터 행정부 시절, 주한미군 철수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주한미군 將星(장성)들이 한국의 입장에 서서 워싱턴의 정책 결정자들을 설득해 철수를 막았습니다. 이처럼 우리 軍수뇌부는 주한미군 간부들과의 親交(친교)를 강화하는 적극적인 韓美 군사외교를 지속적으로 펼쳐야 합니다. 30代에 육군 참모총장으로서 태평양을 건너가 60代의 美 대통령과 담판하여 쌓아 놓은 韓美동맹 관계가 지금 위기에 놓여 있다는 생각에선지 그는 인터뷰 내내 「촛불 시위」 단어만 나오면 혀를 끌끌 찼다. 기자는 인터뷰를 마치며 老兵에게 愚問(우문)을 던졌다. ―軍事同盟이란 도대체 뭡니까. 『함께 피를 흘릴 마음 자세가 돼 있는 관계가 血盟(혈맹)이오. 입으로만 同盟이 만들어지진 않습니다』 그는 기자에게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공짜로 얻어지지 않는다)」라는 글귀를 써 주었다.●

입력 : 2003.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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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룡 ‘밀리터리 인사이드’

gomsi@chosun.com 기자클럽 「Soldier’s Story」는 국내 최초로 軍人들의 이야기를 전문으로 다루는 軍隊版 「피플」지면입니다. 「Soldier’s Story」에서는 한국戰과 월남戰을 치룬 老兵들의 인터뷰를 통해 이들이 후손들에게 전하는 전쟁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합니다. 또한 전후방에서 묵묵하게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軍人들의 哀歡과 話題 등도 발굴해 기사로 담아낼 예정입니다. 기자클럽 「Soldier’s Story」에 제보할 내용이 있으시면 이메일(gomsichosun.com)로 연락주십시오.
댓글달기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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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정태 (2007-10-25)

    한글이 "뚝"하고 하늘에서 떨어졌나? 한글은 한자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문자인 것이다. 학교에서 기본 한자를 못배우니 학교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반풍수 만드는 공장이 된것이다. 이 비극의 원천은 이스라엘 구신쟁이 경전이 한글로 되어 있다고, 한글만 주장하는 그 패거리를 조져야 할것이다. 한글학회에 이스라엘 구신쟁이가 얼마나 있는지 특별감사를 요구한다.

  • 김창진 (2007-10-25)

    이상흔 기자님, 예전에 한 번 글을 읽은 적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하셨습니다. 한글날 하는 대부분 소리들이 헛소리들입니다. 그런 오늘날 이 기자님처럼 옳은 말씀하는 분을 만나지 참으로 반갑습니다. 조선일보 블로그 "김창진의 방송언어 바로잡기" 기억하시면 한 번 찾아주십시오.

  • 이상흔 (2007-10-25)

    예, 예전에 제가 조선일보 블로그에 글올 릴때 자주 들리셔서 좋은 말씀 해 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도 자주 찾아가 보겠습니다.

  • 언어 (2007-10-25)

    찾아가는 곳 ==>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17818&logId=1520355&menuId=-1&from=19000101&to=29991231&listType=2&startPage=1&startLogId=999999999&curPag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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