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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세상읽기

노벨상의 계절을 앞두고 다시 읽은 소설 <남아 있는 나날>

히틀러에 대한 유화책 주장했던 영국 귀족을 모셨던 늙은 집사의 회한... '쓸모 있는 바보'와 '영혼 없는 관료'들에 대한 우화(寓話)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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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의 계절’이 돌아왔다. 아마 10월 초부터  노벨상 수상자들의 이름이 줄줄이 발표될 것이다. 벌써부터 평화상을 꿈꾸며 입맛을 다시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즈음에 생각나는 소설이 하나 있다. 작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남아 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이다. 이 소설은 1989년에 나왔지만, 이미 ‘현대의 고전’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는 작품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그해에 이 소설로 맨부커상 본상(작가 한강이 수상한 것은 본상이 아니라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임)을 받았다. 1994년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이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 호평을 받았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19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출생, 1960년 영국으로 이주, 영국에서 성장하고 활동하고 있는 ‘일본계 영국작가’다. 이 <남아 있는 나날>은 1920~1930년대 영국의 귀족문화와 시대상을 섬세하게 그려낸 걸작이다.
 
이 책의 1인칭 화자(話者)는 평생 귀족 가문의 집사(執事)로 일해 온 스티븐스라는 인물이다. 그는 대영제국도, 귀족문화도 조락(凋落)해 가는 1950년대 초에 이르러 지난날들을 회상한다. 스티븐스에게 자신의 일생을 돌이켜보는 계기를 만들어 준 사람은, 스티븐스 자신이 모셨던 주인이 죽은 후, 옛 주인의 저택을 사들인 미국인 패러데이였다(이는 마치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대영제국을 대신해 세계의 패권국으로 등장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새 주인으로부터 재충전을 위한 휴가를 얻고, 자동차까지 빌린 그는, 영국의 지방을 여행하면서, 옛날 자기 밑에서 일했던 여성인 켄턴 양을 만나는 일정까지 집어넣는다. 그가 여행을 하면서 마주치는 소소한 체험들과 과거에 대한 회상이 어우러진 것이 이 소설이다.
 
'위대한 신사'를 모셨던 '성공한 집사'
 
집사라는 건, 영화 같은 데서도 볼 수 있듯이, 귀족이나 부호의 가문에서 주로 하인, 하녀들을 감독하고 집안일을 꾸려나가는 자리다. 스티븐스는 자신이 ‘영국의 집사’라는 자부심으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말한다.
“진정한 의미의 집사가 존재하는 곳은 영국밖에 없으며, 그 외의 나라들에는, 실제로 사용되는 칭호가 무엇이든, 오직 하인밖에 없다는 말을 이따금 듣게 된다. 나는 이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믿는 편이다. 대륙사람들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혈통들이기 때문에 집사가 될 수 없다.”
이 소설의 앞부분에서 스티븐스는 이런 식으로 ‘집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길게 설파한다. ‘집사학(執事學)’ 강연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그렇다고 따분하다는 얘기는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잘 몰랐던 영국 귀족사회의 단면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스티븐스는 ‘집사학’을 설파하면서 자기 세대의 집사들은, 역시 집사였던 자기 아버지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신(新)세대 집사’였다고 역설한다. 자신들은 “단순히 자신의 능력을 얼마나 잘 발휘하느냐의 문제뿐 아니라 ‘어떤 목적’을 위해 그것을 하느냐의 문제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상주의적(理想主義的) 세대”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작게나마 기여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슴에 품고 있었으며, 직업인으로서 그 소망을 실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문명을 떠맡고 있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신사(紳士)를 섬기는 것이라고 보았다”고 스티븐스는 회고한다. 그리고 스티븐스는 자신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위대한 신사’를 만나 그분을 충직하게 보필할 기회를 만나는 행운을 가졌던 집사였고, 그런 점에서 자신은 ‘성공한 집사’였다고 자부한다.
 
스티븐스가 35년간 모셨던, 그가 경애해 마지않던 주인은 달링턴 경(卿)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나무랄 데 없는 ‘영국신사(紳士)’였다. 그는 1920~1930년대에 평화로운 유럽을 만들기 위해 막후에서 진력(盡力)했던 ‘위대한 신사’였다. 그럼에도 달링턴 경의 위대함을 모르고 그를 오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고, 스티븐스는 계속해서 푸념한다.
 
선량한 신사 아마추어
 
달링턴 경에게는 브레만이라는 독일인 친구가 있었다. 브레만은 독일의 장교이자 신사였다. 두 사람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선에서 만나 서로를 향해 포화(砲火)를 날리면서도 “이 몹쓸 짓이 끝나고 나면, 서로 만나서 술이나 한 잔 합시다”라고 말하는 사이였다. 전쟁이 끝난 후 연합국은 독일에 베르사유조약을 강요했다. 독일은 비참한 나락으로 굴러 떨어진다. 생활고와 좌절감에 시달리던 브레만은 자살한다. 달링턴 경은 “내가 전쟁에 참가한 것은 이 세계의 정의(正義)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게르만족을 상대로 한 복수전에 가담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면서 “베르사유조약이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었다”고 분노한다.
 
이후 달링턴 경은 독일인들도 수용할 수 있도록 베르사유조약을 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유럽의 평화를 실현하겠다는 목표 아래 영국은 물론 프랑스, 미국의 오피니언 리더들을 결집하는 운동에 나선다. 이들 중에는 H.G 웰즈나 핼리팩스 경(2차대전 초기의 주화파. 외무장관·주미대사 역임)처럼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도 있었다. 스티븐스는 “그 후 몇 년 사이에 그분의 행적에서 어떤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했든, 그분의 모든 행동의 중심에는 ‘이 세계의 정의’를 보고 싶은 열망이 깔려 있었음을 나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회상한다.
 
1923년 3월, 달링턴 홀에서 유럽평화를 위한 ‘비공식 국제회의’가 열린다. 이 회의에는 미국 상원의원 루이스, 프랑스 외교계의 실력자 뒤퐁 등이 참석한다. 달링턴 경은 루이스 상원의원에게 이렇게 말한다.
“갈등이 끝난 마당에 이처럼 적국을 계속 증오한다는 것은 보기 흉한 작태입니다. 링에서 상대를 다운시켰으면 그걸로 끝내는 것이 온당합니다. 그다음에도 계속 발길질을 해서는 안 되는 거지요.”
스티븐스는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이런 ‘역사적 위업’을 이루었다는 사실에 감격한다.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지만, 그는 임종도 지키지 않고 충직하게 회담의 성공을 위해 진력한다.
 
달링턴 경의 열정에 힘입어, 독일문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던 프랑스인 뒤퐁마저 ‘유럽의 평화’라는 대의(大義)에 공감하게 된다. 회담은 성공적으로 막을 내리는 듯했다. 하지만 내내 협조적이었던 것으로 보였던 미국 상원의원 루이스는 마지막 날 폭탄선언을 한다. “여러분은 몽상가 집단에 불과하다”고. 그는 달링턴 경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한다.
“그는 전형적인 영국신사죠. 점잖고, 정직하고, 선량하고, 그러나 이 어른은 ‘아마추어’입니다. 그는 아마추어이며, 오늘날의 국제정세는 신사 아마추어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유럽인 여러분이 이 사실을 빨리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좋을 겁니다. 점잖고 선량하신 신사 여러분, 제가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을 둘러싼 세계가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혹시 아십니까? 여러분의 그 고상한 직관으로 활약할 수 있었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지난 이틀 동안 이 자리에서는 시답잖은 얘기들이 너무 많이 나왔습니다. 의도는 선량하지만 순진하기 짝이 없는 공론(空論)들이었습니다. 유럽인 여러분이 자신들의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프로들이 필요합니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조만간 재앙으로 치닫게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 달링턴 경은 이렇게 반박한다.
“선생이 ‘아마추어리즘’이라고 설명하는 그것을, 내가 보기에는 여기 계신 신사분들 대다수는 아직도 ‘명예’라고 부르고 싶어 합니다.”
“당신이 말하는 ‘프로페셔널리즘’이란 것에 대해선 나도 꽤 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속임수와 조작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 세상에서 선(善)과 정의의 승리를 희구하기보다는 탐욕과 이익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지요. 선생이 말하는 ‘프로페셔널리즘’이 그런 것이라면 나는 관심도 없을뿐더러 굳이 갖추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루이스 상원의원을 제외한, 나머지 ‘유럽 신사들’은 달링턴 경의 말에 우레 같은 환성과 열렬한 박수로 화답한다.
 
집안으로 들어온 파시즘
 
이후에도 달링턴 경의 친독(親獨) 행보는 계속된다. 나치 독일의 주영(駐英)대사인 리벤트로프(후일 외무장관 역임. 2차대전 후 뉘른베르크재판에서 전범으로 처형)는 무시로 달링턴 저택을 드나든다.
달링턴 경의 친독 성향은 다른 면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영국파시스트연맹의 지도자 오스월드 모슬리와 어울린다. 스티븐스는 “달링턴 경은 모슬리의 실체가 드러나기 전에 몇 차례 만났을 뿐이며, 그 실체가 드러난 후에는 관계를 끊었다”고 변호한다. 하지만 이건 자기가 모셨던 주인에 대한 합리화에 불과하다는 것이 다른 대목에서 드러난다. 스티븐스는 달링턴 경이 이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부분을 인식하는 속도가 너무 느려. 새로운 시대의 도전에 대처한다는 게 무슨 뜻이냐, 낡은 것을 폐기한다, 때로는 지난날에 애용되었던 방식들까지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는 뜻이지. 다른 강대국들은 이미 다 알고 있건만 우리 영국은 그렇지가 못하네.”
“우리는 지금 계속되는 위기 상황에 봉착해 있어. 민중이 고통받고 있어. 성실하게 일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말할 수 없이 고생하고 있어. 독일과 이탈리아는 법령으로 의회를 정돈했네. 불쌍한 볼셰비키들도 저 나름대로 체제를 정비한 걸로 아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하염없이 세월만 보내고 나아지는 것은 하나도 없지. 그저 하는 짓이라곤 논쟁하고 토론하고 늑장부리는 게 전부야.”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런 논리는 자유민주주의와 의회정치를 부인한 파시즘과 공산주의 같은 전체주의의 논리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스티븐스가 낭만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달링턴 경은 상당한 정도로 파시즘에 경도(傾倒)된 인물이었을 공산이 크다는 얘기다.
 
이는 달링턴 경이 충실하게 봉사해 온 유대인 하녀 두 명을 해고하라고 지시한 데서도 나타난다. 하녀들을 담당하는 여성 켄턴은 “제 수하 처녀들이 해고되면 저도 떠나겠다”며 반발한다. 스티븐스는 “우리 나리는 무엇이 최선인지를 판단하실 수 있는 좀 더 나은 위치에 계신다”면서 켄턴의 항의를 일축한다.
1년 후 달링턴 경은 그때의 일을 후회한다. 켄턴은 유대인 처녀들의 해고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생계 때문에 달링턴 저택을 떠나지 않은 자신의 비겁함을 자책한다.
“저기 바깥세상에서는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고 관심도 가져주지 않는 현실을 절감하고 있는 내 모습만 떠올랐어요. 그 수준이에요. 나의 고상한 원칙들을 다 합쳐본들 그 정도밖에 안 되죠. 나 자신이 너무나 수치스러워요. 하지만 끝내 떠날 수 없었어요. 스티븐스씨,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아마도 많은 직장인·공무원이 그런 생각으로 직장생활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켄턴은 스티븐스를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 일에 충직한 걸 최상의 미덕으로 생각하는 스티븐스는 켄턴이 보내는 신호들에 무감각하게 반응한다. 결국 켄턴은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서 달링턴 저택을 떠나버린다.
 
나치의 꼭두각시
 
그래도 스티븐스는 ‘내가 최선을 다해 노력하여 나리께서 스스로 짊어지신 저 숭고한 과업들이 마무리되는 것을 볼 때까지는 결코 사명을 다했노라고 말할 수 없다’는 자세로 달링턴 경을 위해 일한다.
달링턴 경에 대한 경고를 스티븐스가 받지 못한 것은 아니다. 2차대전 전야, 달링턴 경은 영국 수상과 주영독일대사의 비밀회담을 주선한다. 달링턴 경의 오랜 친구의 아들인 젊은 기자 카디널이 스티븐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르신은 정말 고귀한 양반이오. 그러나 이 현실에서는 수렁에 빠져 계시오. 그분은 지금 조종당하고 있어요. 나치들이 그분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소, 스티븐스? 바로 이게 적어도 지난 3~4년 사이에 진행되어 온 일의 실상이란 걸 알고 있느냐 그 말이오.”
카디널은 1923년 3월의 회동에서 미국의 루이스 상원의원이 했던 말을 상기시킨다.
“그게 바로 현실이라오. 오늘날의 세계는 훌륭하고 숭고한 도리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추악한 곳이 되어 버렸지. 훌륭하고 숭고한 것을 저들이 어떤 식으로 이용하는지, 당신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소, 스티븐스.”
“지난 몇 년 사이 이 집 어르신은 아마도 히틀러가 이 나라에서 벌여온 선전 책략의 가장 유용한 도구이자 유일한 도구였을 거요. 진실하고 지조가 곧은 양반일 뿐 아니라 당신이 하는 일의 진정한 성격을 간파하지 못하셨기 때문에 더더욱 유용했겠지.”
 
한마디로 달링턴 경은 ‘쓸모 있는 바보(useful idot)'였다는 얘기다. 물론 카디널이 이런 얘기를 한 것은 스티븐스가 달링턴 경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충언을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스티븐스는 그런 문제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자기의 몫이 아니며, 자신은 달링턴 경을 믿고 그에게 충직하게 봉사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이를 무시한다.
 
깨어져버린 환상, 그리고 변명
 
소설은 2차대전 이후 달링턴 경이 몰락해 가는 과정은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스티븐스의 회상을 통해 달링턴 경이 이후 엄청난 사회적 비난에 직면했으며, 명예훼손 소송에서 패소하고 회한 속에 죽어갔다는 걸 읽을 수 있을 뿐이다. 달링턴 저택은 유럽의 귀족문화를 동경해 온 미국인 부자 패러데이에게 넘어간다. 스티븐스는 ‘일괄거래의 한 품목’으로 패러데이를 섬기게 된다. 그리고 패러데이의 배려로 35년 만의 휴가를 갖게 된 것이다.
소설 앞머리에서 스티븐스는 “나는 달링턴 경께서 그분에 대해 엉터리 소리를 해대는 사람들 대다수를 난쟁이로 만들어 버릴 만큼 도덕적으로 대단한 거인이셨다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러셨던 분이라고 서슴없이 단언할 수 있다”면서 “나의 노고가 아주 미미하게나마 역사의 흐름에 공헌하는 데 일조했노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데서 오는 만족감을 느낄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휴가 여행 중 곳곳에서 수많은 민초(民草)를 만나면서 스티븐스는 자신이 달링턴 경에 대해 갖고 있던 허상들이 깨어져 나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는 중간쯤 되면 “혹시 달링턴 경을 모셨느냐?”는 질문에 예스도 노도 아닌 대답으로 어물어물 넘어간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달링턴 경을 부끄럽게 여겨서 그러는 건 아니라고 애써 변명한다. 하지만 여행이 끝나갈 즈음, 스티븐스는 이렇게 항변한다.
“달링턴 경의 노력이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어리석기까지 했음을 세월이 입증해 주었다고 해서, 어떤 면으로든 어떻게 내가 비난받아야 한단 말인가? 내가 그분을 모셔온 세월을 통틀어, 증거를 저울질하고 나아갈 길을 판단한 것은 바로 그분 자신이었으며, 나는 다만 나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지극히 온당하게 움직였을 뿐이다. 그리고 가히 ‘일등급’이라 인정받는 수준에서 내 능력 닿는 데까지 직무를 수행한 것밖에 없다. 오늘날 나리의 삶과 업적이 안쓰러운 헛수고쯤으로 여겨진다 해도 내 탓이라고는 할 수 없다.”
 
여행의 끝자락에서 스티븐스는 이제는 남편과 품위 있게 늙어가는, 그러면서도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한 자락 회한을 간직하고 있는 켄턴과 재회한다. 여기서 스티븐스는 자신이 켄턴의 사랑을 놓쳐 버렸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래도 앞을 보고 전진해야"
 
모시던 주인에 대한 환상은 깨져버리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해 온 삶이 허상이었다는 걸 인식하게 된 회한, 거기에 더해 자기를 사랑하던 여인마저 놓쳐버렸다는 뒤늦은 깨달음이 그를 엄습해 온다. 스티븐스는 해변에서 만난 노인을 붙들고 이렇게 탄식한다.
“달링턴 나리는 나쁜 분이 아니셨어요. 전혀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는 생을 마감하면서 당신께서 실수했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특권이라도 있었지요. 나리는 용기 있는 분이셨어요. 인생에서 어떤 일을 택하셨고 그것이 잘못된 길로 판명되긴 했지만 최소한 그 길을 택했노라는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다.
나로 말하자면 그런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저는 ‘믿었어요’. 나리의 지혜를, 긴 세월 그분을 모셔 오면서 내가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지요. 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정녕 무슨 품위가 있단 말인가 하고 나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에게 노인은 이렇게 다독인다.
“만날 그렇게 뒤만 돌아봐선 안 됩니다... 우리 둘 다 피 끓는 청춘이라고는 할 수 없지. 그래도 계속 앞으로 보고 전진해야 하는 거요.”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펴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아니,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노인의 충고에 스티븐스는 다시 희망을 되찾는다.
“언제까지나 뒤만 돌아보며 내 인생이 바라던 대로 되지 않았다고 자책해 본들 무엇이 나오겠는가?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의 중심축에서 우리의 봉사를 받는 저 위대한 신사들의 손에 운명을 맡길 뿐 다른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내 인생이 택했던 길을 두고 왜 이렇게 했든가 못했든가 끙끙대고 속을 태운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진실되고 가치 있는 일에 작으나마 기여하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그리고 누군가 그 야망을 추구하는데 인생의 많은 부분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결과가 어떻든 그 자체만으로도 긍지와 만족을 느낄 만하다.”
 
"진정한 품위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
 
누군가는 이 소설을 ‘기억, 시간, 자기기만’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은 ‘쓸모 있는 바보’와 ‘영혼 없는 관료’들에 대한 우화(寓話)로 읽었다. 심성은 선량하지만 아마추어적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다 히틀러에게 이용당하고 회한 속에서 세상을 떠난 달링턴 경이 ‘쓸모 있는 바보’라면, 나름 직업적 야망과 이상을 가지고 달링턴 경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다했지만 결국은 뒤늦게 그것이 허상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스티븐스는 ‘영혼 없는 관료’(‘영혼’은 있었지만, ‘잘못된 충성’을 한 것일 수도 있다)의 전형으로 느껴진다. “달링턴 경의 노력이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어리석기까지 했음을 세월이 입증해 주었다고 해서, 어떤 면으로든 어떻게 내가 비난받아야 한단 말인가?”라는 스티븐스의 항변은 ‘영혼 없는 관료’의 자기변명의 극치를 보여준다.
또 달링턴 경이  유대인 하녀들을 해고하는 대목에서는 대외적으로 전체주의자와 가까이하게 되면, 그 영향을 내부적으로도 미치게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켄턴의 고민과 좌절은 세상의 부조리를 알면서도 항거하지 못하고 침묵하는 많은 소시민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지금 우리는 ‘쓸모 있는 바보’와 ‘영혼 없는 관료’들이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하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달링턴 경은 ‘숭고한 아마추어 이상주의자’였고, 스티븐스는 시야가 좁기는 했지만 자신의 직분에는 충직했던 집사였다. 우리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자들은 잘못된 사상과 권력욕과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사악한 무리들일 수도 있다.
스티븐스는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의 중심축에서 우리의 봉사를 받는 저 위대한 신사들의 손에 운명을 맡길 뿐 다른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면서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진실되고 가치 있는 일에 작으나마 기여하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고 자위(自慰)한다. 그것도 인생을 사는 방법이다. 대다수 사람은 그렇게 살려고 할 것이다. 사실은 그렇게 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삶도 있다. 여행 중 스티븐스가 묵게 된 시골 여관에서, 먼 외지에서 신사분(스티븐스)이 오셨다는 말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리고 거기서 신사란 무엇인가, 품위란 무엇인가에 대한 토론이 벌어진다. 2차대전에 참전했던 해리 스미스라는 사내는 “품위란 신사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히틀러와 맞서 싸운 이유도 결국에는 그겁니다. 만약 모든 게 히틀러의 뜻대로 되었다면 우리는 지금쯤 노예 신세밖에 더 되었겠습니까? 소수의 지배자와 수억, 수십만의 노예들만 존재하는 세상이 되었을 겁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굳이 지적할 필요도 없겠지만, 노예 상태에서는 결코 품위를 갖출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싸운 이유도 그거고, 우리가 마침내 얻은 것도 바로 그겁니다. 우리는 자유시민으로 살 권리를 쟁취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신분이 무엇이냐, 부자냐 가난뱅이냐를 떠나서 영국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자체가 일종의 특권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견해를 마음껏 표현하고 투표로 의원 나리들을 의사당에 앉혔다 빼냈다 할 수 있으니까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선생님, 그게 바로 진정한 품위입니다.”
“제가 선거운동에 그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저는 지지를 받든 못 받든 (중략)최소한 사람들에게 생각하게끔 만들 겁니다. 각자의 의무가 무엇인지 일깨워 줄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싸웠습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역할을 해야만 합니다.”
 
세상 모르는 시골뜨기의 만용일 수도 있지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지금 내 가슴을 때린다. 아직 내게 저녁은 오지 않았다.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애써 ‘남아 있는 나날’을 기약하는 스티븐스가 되고 싶지는 않다. 이 조국에서 태어났다는 것 자체를 일종의 특권이라고 자부하면서 자유시민으로 살기 위해 행동하는 해리 스미스처럼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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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니 홉킨스 주연의 영화 <남아 있는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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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9.29

조회 : 4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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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 ‘어제 오늘 내일’

ironheel@chosun.com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습니다. 2000년부터 〈월간조선〉기자로 일하면서 주로 한국현대사나 우리 사회의 이념갈등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써 왔습니다. 지난 7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내용을 어떻게 채워나가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2012년 조국과 자유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45권의 책을 소개하는 〈책으로 세상읽기〉를 펴냈습니다. 공저한 책으로 〈억지와 위선〉 〈이승만깨기; 이승만에 씌워진 7가지 누명〉 〈시간을 달리는 남자〉 등이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제가 읽은 책들을 소개하면서 세상과 역사에 대한 생각을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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