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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소총과 M16소총 제조자들의 운명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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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슈니코프는 러시아의 英雄으로, 유진 스토너는 미국의 大富豪로 성장 AK소총을 만든 러시아의 미하일 칼라슈니코프(Mikhail Kalashnikovㆍ83)는 1919년 남부 시베리아 알타이공화국에서 17형제중 16번째로 태어났다. 2차대전 당시인 1941년, 그는 탱크 정비공으로 軍에 입대해 브리안스크 戰線에서 독일군과 싸우게 된다. 이때만 해도 그는 기계에 관심이 많은 전차부대 하사관일 뿐 총 설계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러던 중 그의 T-34 전차는 독일군의 포탄에 맞아 파괴되고, 부상을 입은 그는 독일군의 눈을 피해 며칠을 걸어 아군에게 기적적으로 구출됐다. 그는 오랜 기간 병원치료를 받아야 했고, 퇴원 후에도 후방에서 행정병으로 근무해야 했다. 이 부상은 그의 장래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그는 전투중 『독일군의 무기는 우리것보다 왜 더 좋은가』라고 불평하는 소리를 듣고, 병사들을 위해 우수한 총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는 軍에서 쌓은 銃器(총기) 지식을 총동원해 새로운 총을 설계했다. 그의 설계를 본 당시의 소련 기술자들은 그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곧바로 「툴라」에 있던 총기연구소로 그를 스카웃한다. 엉겹결에 총기 연구원이 된 그는 1947년 독일과 미국, 그리고 소련의 여러 총기들의 장점을 뛰어난 센스로 조합한 차세대 돌격소총을 개발해 냈다. 성능이 우수하고 분해조립이 간단하고 값이 싼 그의 소총은 모든 테스트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그가 개발한 총은 1949년 소련군의 制式(제식) 소총으로 채택됐으며, 지금까지 약 1억만정이 생산되는 등 총의 대명사로 군림해 왔다. AK-47이 냉전시대에 공산권을 대표하는 개인화기였다면, 자유진영을 대표하는 총은 M-16이었다. M-16을 설계한 유진 스토너(Eugene M. Stonerㆍ1997년 사망)는 1922년 11월 인디아나州에서 가난한 집안의 獨子(독자)로 출생했다. 1939년, 때마침 찾아온 불경기를 맞아 기술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록히드항공사의 자회사에 취업하게 된다. 곧이어 2차대전이 발발했고, 美 해병대 비행기 정비병으로 일했다. 그의 기계와 무기에 관한 지식은 바로 이때에 얻은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해병대를 제대한 그는 캘리포니아의 총기 회사인 아말라이트社에 입사한다. 이 회사는 2차대전 중 비약적으로 발달한 항공산업의 기술을 응용한 차세대 총기를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설립된 회사였다. 항공 기술과 총기 모두에 상당한 실전 지식을 가진 스토너는 이곳에 딱 어울리는 적임자였다. 이곳에서 그는 여러 가지 총기를 만들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이 바로 AR-15였다. 비행기용의 알미늄 합금으로 만들어 놀랄 만큼 가벼운 데다 5.56mm라는, 反動(반동)이 적으면서도 높은 위력을 가진 소구경탄을 쓰는 AR-15는 아직도 나무와 강철로만 총을 만들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젖어있던 미군의 입장에서는 획기적인 총이었다. AR-15는 당시 미군이 쓰던 어떤 소총보다도 간단하고 값이 쌌지만, 보수적인 美육군에선 이 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공군에서 이 총을 M-16이라는 이름으로 채택하면서 이 총의 運命(운명)은 바뀌기 시작했다. 곧 이어 벌어진 베트남 전쟁에서, 정글에서 쉽게 쓸 수 있는 소총을 찾던 美육군은 공군의 M-16을 육군도 쓰기로 결정했다. 결국 베트남 전쟁에서 그 성능이 입증된 M-16은 미국을 대표하는 소총으로 자리잡게 됐다. 한편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칼라슈니코프와 유진 스토너, 총기의 두 達人(달인)은 체제를 뛰어넘어 서로 친구로 지냈다고 한다. 이들은 회의에서 만나 환담을 나누었고, 칼라슈니코프가 보드카를 선물하기도 했으며, 편지도 주고받았다. 스토너는 칼라슈니코프에게 『당신의 총(AK-47)은 내총(M-16)보다는 덜 복잡하고 망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내총은 당신총보다 가볍고 더 정확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M-16이 수백만 자루가 만들어지게 되면서 스토너는 인생의 중요한 전환기를 맞게 된다. 자신의 총에 特許(특허)를 내 로열티를 받을 수 있었던 스토너는 100여개가 넘는 특허를 소유하게 됐다. 돈 방석에 올라 자가용 제트기를 몰고 다닐 정도로 윤택한 삶을 살았던 유진 스토너는 1997년 4월24일 플로리다州 팜시티에서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에 반해 칼라슈니코프는 상대적으로 불우했다. 1947년 개발된 그의 소총은 1억정 이상 팔렸으며 지금도 19개국에서 면허생산되고 있지만 정작 칼라슈니코프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태어난 죄(?)」로 큰 돈을 벌지 못했다. 소련 연방 英雄(영웅)의 칭호와 함께 종신 소련 국회의원으로 추대됐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서방에서 이 정도의 발명을 했다면 적어도 연간 500만달러(약 60억원) 이상을 특허료 등으로 받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러나 칼라슈니코프는 현재 조그만 아파트에서 연금 등으로 한 달에 겨우 1만4800루블(약 56만원)을 벌고 있다. 칼라슈니코프는 평소 자신의 처지를 빗대 『유진 스토너는 자가용 비행기가 있지만, 나는 비행기 티켓을 살 돈도 없다』고 푸념했다고 한다. 러시아 일간 이즈베스티야는 지난 2월18일 『소총 발명자인 미하일 칼라슈니코프가 독일 서부 졸링겐의 우산 전문업체인 MMI社에 이 회사 지분 30%를 받고 상표 사용권을 팔았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앞으로 칼라슈니코프는 칼, 테니스 라켓, 로션, 지프, 보드카로 만든 칵테일 등의 상표로도 쓰일 것』이라고 전했다. 83세의 나이에도 이쥐마슈 기계제작소의 총설계 감독으로 일하고 있는 칼라슈니코프는 『돈보다 명예가 중요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베스트셀러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가족들의 성화에 못 이겨 상표사용권을 판 것으로 알려졌다.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칼라슈니코프가 그의 경쟁자 유진 스토너처럼 돈과 명예를 다 거머쥘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입력 : 2003.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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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msi@chosun.com 기자클럽 「Soldier’s Story」는 국내 최초로 軍人들의 이야기를 전문으로 다루는 軍隊版 「피플」지면입니다. 「Soldier’s Story」에서는 한국戰과 월남戰을 치룬 老兵들의 인터뷰를 통해 이들이 후손들에게 전하는 전쟁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합니다. 또한 전후방에서 묵묵하게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軍人들의 哀歡과 話題 등도 발굴해 기사로 담아낼 예정입니다. 기자클럽 「Soldier’s Story」에 제보할 내용이 있으시면 이메일(gomsichosun.com)로 연락주십시오.
댓글달기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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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강민 (200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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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강현 (2007-10-25)

    곰이 귀여워요^^

  • 김강민 (2007-10-25)

    곰돌이가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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