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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와 개는 동격(同格)...

[옛 잡지를 거닐다] 이서구의 <기자 시절> ②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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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잡지는 흥미롭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가득한 보물상자다. 먼지를 탈탈 털고 다시 읽으면 앞선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치열함과 마주할 수 있다. 지금 읽어도 진부하지 않고 새롭다. 잡지 필자 대개는 20세기를 활짝 불 밝혔던 문인(文人)들이어서 눈길이 더 간다. 앞으로 옛 잡지에 실린 보석 같은 글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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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은 지령 1000호를 맞은 조선일보(1923년 6월 6일 자). 1000호를 기념하여 24페이지 특집을 마련했다. 창간일인 1920년 3월 5일에 태어난 어린이 3명의 사진을 찍었다. 오른쪽은 동아일보 지령 1000호(같은 해 5월 25일 자). 1000호를 맞아 전국의 어린이 1000명의 사진을 1면에 게재했다. 사진출처=《우리 신문 100년》(방일영문화재단 한국문화예술총서)

기자와 개는 동격(同格)
 
경찰서장이라면… 모자에 금테를 두 개나 두르고 번쩍거리는 칼을 차고 다니는 서슬이 시퍼런 경시(警視)급이다. 놈들은 눈을 뒤집고 독립단을 잡아내기에 정신이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쯤이야, 신문기자가 경찰서에 드나들기는 하지만 여간해서 재료를 얻기 힘들었다. 더욱이 해외에서 돌아온 독립단을 체포했을 때는 극도로 비밀을 지키는 판이다. 좀처럼 진상을 캐내기는 힘들었다. 어느 날 동대문(東大門) 경찰서 서장질 문을 기웃한 신문기자가 한 사람 있었다. 마침 서장은 없고 책상 위에 서류만 쌓여 있었다.
“옳다! 이때를 놓치지 말자.”
기민한 기자는 다람쥐 모양 들어가서 서류를 뒤적거리다가 폭탄을 소지한 독립단 3명을 잡았다는 중대 뉴스를 발견했다.
재료는 발견했으나 단독으로 발표를 했다가는 혼자 경을 치겠는지라 하는 수 없이 각사 기자와 합의를 보아 재료의 출처는 죽어도 밝히지 않기로 하고 각 신문이 일제히 발표를 하고 말았다. 자~ 이러고 보니 미치는 놈은 동대문서장이었다. 재료는 분명히 도적을 맞았는데 누구더러 물으나 출처는 말 못하겠다는 대답이다. 분통이 터지는 바람에 기자를 전부 잡아 가두겠다고 호통을 쳤으나 차마 그럴 수도 없고 나중에는 분풀이 삼아서 서장실 문에다가
“개와 신문기자는 들어오지 말라.”
크게 써 붙여 놓았다. 이야말로 신문기자는 개와 똑같다는 어마어마한 벽보였다.
이것을 본 우리― 우리라면 동아일보 이서구, 조선일보 최국현(崔國鉉), 조선신문 최상덕(崔象德) 등 출입기자들은 이 벽보를 즉시 사진을 찍어서 경기도 제3부장(지금의 경찰국장)에게 갖다 주고 사람을 개와 같이 취급한다는 언사를 서장실 문에 써 붙인 잘못을 따지기 시작했다.
당시 제3부장은 천엽료(千葉了)라는 술 잘 마시는 노련한 자로 시비가 커지면 귀찮았던지 즉시 동대문서장을 불러서
“그 돼먹지 않은 벽보는 곧 뜯어버리고, 신문기자들과는 화해를 하라.”
는 명령이 내려서 우리는 서장 녀석한테 한잔 얻어먹고 화해를 한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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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간부로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한 치바료.
[편집자] 천엽료(千葉了·1884~1963) 혹은 치바료는 미야기 현 센다이 출신으로 1908년 도쿄 제국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경제정책을 전공했다. 문관 고등시험 행정과에 합격, 농상무성 산림국 사무관이 된다.
1909년 이후 내무성 산하 경찰 공무원으로 근무하며 경기도 경찰부 부장, 조선총독부 사무관, 조선총독부 감찰관 겸 참사관 등을 역임했다. 1923년 2월 본국으로 돌아가 니가타 현 내무부장에 취임했다.
1924년 3월 미에현 지사, 1927년 4월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나가노현 지사, 1931년 12월 히로시마현 지사에 취임했다. 1932년 4월 현 특산품 판매 촉진 만주국 봉천시에 현 산업 장려관 사무소를 개설하기도 했다.
그가 쓴 책으로 1925년에 간행된 《조선독립운동비화(朝鮮独立運動秘話)》(帝国地方行政学会)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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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空氣)를 취체(取締)
 
독립운동에 선봉을 선 사람은 일본에 가 있는 우리 유학생이었다. 일인에게 배우면서 일인을 미워하는 기구한 운명에 놓인 그들이었건만 그들은 배우면 배울수록 나라를 잃고 노예생활을 하는 겨레의 설움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대학 하나를 세우지 않고 그럭저럭 부려 먹으려는 놈들의 식민지 정책 아래에서는 옳은 공부를 하려면 미국이나 일본에 가는 수밖에 없었고 미국은 여간해서 출국허가가 내리지 않는 때이라 학비만 마련되면 누구나 일본 동경으로 갔던 것이다.
동아일보가 창간된 다음에 여름방학 때 우선 전개된 행사가 동경 유학생의 귀국강연회였다. 동경에 가서 공부를 하는 우리 유학생들이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고국에 돌아와서 강연을 한번 해보겠다는 것이다.
동아일보에서는 곧 수은동(授恩洞)에 있는 단성사(團成社)를 얻어서 강연회장을 마련하고 동경서 강사들이 오기 전부터 신문에다가 예고를 내기 시작했다. 주요한 강사로 지금도 기억나는 분만 해도 김준연(金俊淵), 서춘(徐椿), 최천순(崔天淳) 등 말만 대학 재학생이지 그 식견 역량은 이미 일인들의 가슴을 찌르고 몸서리를 치게 할 만한 애국청년들이었다.
“언론도 자유이다!”
“집회도 자유이다!”
일단 문화정책이라는 탈을 뒤집어 쓴 놈들인지라 하는 수 없이 일단 입회허가는 해놓았으나 마음이 편할 리는 없었다. 게다가 강연단 일행이 서울역에 내릴 때만 해도 각 단체 남녀대표자들이 마치 망명했던 애국자가 광영(光榮) 있는 개선이나 하듯― 아우성치며 반겨 맞아들이는 판에 놈들만 두 번 놀래지 않을 수 없었다. 폭풍의 전야 같은 하룻밤이 지나고 강연할 날이 돌아오자 동구앞 단성사 일대에는 강연을 들으려고 모여든 시민들은 넓은 마당에 넘쳐나고 있으니 이 어마어마한 인기에 놈들은 또 한 번 몸서리를 쳤다. (계속)
(출처= p 201~202, 《신태양》 1958년 5월호)

입력 : 2018.08.17

조회 : 4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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