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나서는 가급적 독후기(讀後記)를 남겨놓으려 노력하는 편이다. 그런데 때로는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독후기를 남기기조차 힘든 책들이 있다. 분명 엄청나게 지적 자극과 감동을 주는 책인데, 내 짧은 재주로는 내용을 적절히 요약하고 그 감동을 정리하는 것조차 힘들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1945년 이후 유럽의 역사를 다룬(1권은 1945~1971년) 토니 주트의 '포스트워'(1)도 그런 책이다. 토니 주트와 티머시 스나이더의 대담인 '20세기를 생각한다'를 읽었을 때도 그렇지만, 이 책 역시 압도적이었다.

왜 압도적이지 않겠는가? 1945년 이후 유럽의 역사라지만, 그 역사를 다루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부터 소련과 동구, 스칸디나비아 제국, 이베리아반도의 두 나라, 발칸반도의 여러 소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유기적으로 다루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자칫하면 그 시절에 일어난 일들을 드라이하게 늘어놓기만 해도 길을 잃기 쉬운 게 유럽의 역사다. 그 어려운 작업을 토니 주트는 아주 능란하게 해 냈다. 2차대전 종전 후 잿더미가 된 유럽, 동구의 공산화와 스탈린주의 체제 아래서의 숙청, 전후(戰後)의 부흥과 복지국가의 건설, 식민제국의 해체와 세계무대에서의 주도권 상실, 1950년대와 60년대의 사회문화적 변화, 그리고 신좌파의 대두와 68혁명, ‘프라하의 봄’...

그 다양한 얘기들을 토니 주트는 분명한 주관과 통찰력을 가지고 역사를 종횡으로 꿰면서 써내려 간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구성과 문학적인 표현은 마치 한 권의 소설(조금 어렵기는 하지만)을 읽는 듯하다.

역사책을 읽을 때면 늘 그러듯이, 책을 읽는 내내 우리의 현실을 생각했다. 특히 때가 때인지라 동구 공산화 과정에 관한 부분들을 흥미롭게 읽었다. 공산주의 세력이 미약한 상태에서 비공산연립정권을 구성한 후 반대파들을 나치잔당이나 서방의 간첩이니 하는 죄를 뒤집어씌워 숙청하고 결국은 공산당 1당 독재정권을 수립해 가는 이야기들은 생소한 것은 아니었지만, 새삼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특히 1947년 불가리아(2차대전 당시 추축국의 일원이었음) 공산정권이 미국 등 전승국들과 강화협정을 맺고 미국과 국교를 수립한 직후 반공주의 정치인 니콜라 페트코프를 처형했다는 이야기가 섬뜩했다. 북한과의 평화협정은 북한의 인권을 악화시키고 김씨세습독재체제만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역사적 전거(典據)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1956년 헝가리사태나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사태 당시 소련군이 무력개입하게 된 가장 큰 요인은 ‘탈(脫)소련’이 아니라 ‘탈(脫)1당 독재’였다는 지적도 흥미로웠다. 흐루쇼프가 헝가리에 소련군을 투입한 것은 임레 너지 정권이 바르샤바조약기구 탈퇴와 중립선언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공산당 1당 독재를 포기하고 다당제 민주주의 도입을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둡체크는 브레즈네프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소련권에서 이탈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지만 소용없었다. 브레즈네프나 이웃 국가 공산당 지도부가 우려한 것은 점진적이라고는 하나 결국 다당제 민주주의로 가겠다는 둡체크의 약속이었다. 반면에 헝가리의 야노시 카다르 정권은 상당한 정도로 시장경제제도를 도입했고,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는 소련과 거리를 두면서 서방에 접근했지만, 무사했다. 그들은 ‘공산당 1당 독재’라는 원칙에 도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이나 북한이 어디까지 ‘정치개혁’을 할 수 있을 것인지를 짐작게 해준다. 경제적으로 아무리 시장경제를 채택하고 국제사회에 얼굴을 내민다고 해도 공산당은 결코 다당제 민주주의를 도입하지는 않으려 할 것이다.

동구 국가들이 공산화 이전에 전시(戰時)계획과 통제, 전후 좌우합작정권 아래서의 국유화와 토지개혁 등을 통해 공산체제에 상당히 근접해져 있었다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자유의 침식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국민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서서히 진행되어 가는 것이며, 그때 저항하지 못하면 결국은 자유를 잃게 된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나치에게 점령당했던 유럽국가들에 공통된 숙제였던 ‘과거사 청산’문제도 흥미롭게 읽었다. 청산은 선(善)이고 정의이며, 미청산은 악(惡)이고 불의라는 시작은 얼마나 단순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좌파의 선전처럼 서독만 과거사 청산에 미온적이고 실패(?)했던 것은 아니었다. 서독을 ‘나치잔당’으로 비난했던 동독에서도 나치 전력자들의 과거를 덮어주고 그들을 체제 내로 흡수했다. 전체 인구의 1/10 이상이 나치당원이었던 나라에서 그러지 않고서는 재건도, 국가경영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동독에서 ‘나치청산’은 반공산주의 세력을 숙청하는 도구였을 뿐이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소련군이 국토의 1/4를 점령하고 있는 유리한 상황에서도 공산당이 힘을 쓰지 못했다. ‘나치청산’을 앞장서서 주장했던 것이 국민 대다수가 나치를 지지했던 국민들의 심정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반면에 공산당 출신 법무장관이 앞장서서 파시스트에 대한 사면을 주장했던 이탈리아에서는 공산당이 서유럽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강력한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들이 과거사를 ‘덮고’ 가려 했던 것은 단순히 먹고살기에 바빠서도, 자신들의 과오를 직시하려는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었다. 그들로부터는 제1차세계대전~2차대전 사이에 세계를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졌던 거대담론들-나치즘, 파시즘, 볼셰비즘-이 어떤 파국을 가져왔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개인들의 구체적인 삶을 재건하는 데 주력하기를 원했다. 그들이 애틀리나 아데나워, 처칠, 가스페리, 맥밀런 같은 수십 년간 정계에 몸담았던 구세대 정치인들에게 나라의 키를 맡긴 것도 그래서였다. 그리고 그들은 안정된 정치체제를 재건하고 복지국가를 건설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날 무렵 서너 살에 불과했던 이들이나 평화가 도래한 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들은 부모세대의 그러한 고민을 이해하지 못했다. 유럽이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평화로웠던 시대에 소년기를 보내고 전후 사회개혁의 결과 대학문이 활짝 열린 덕분에 대학생이 된 그들은 부모세대를 향해 “당신들은 히틀러 시절에 무엇을 했느냐”고 삿대질을 했다. 그 패역한 젊은이들이 바로 68세대였다. 우리나라 386세대도 거기서 그리 멀지 않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전후청산이 갖는 내전적(內戰的) 측면이었다. ‘과거사 청산’을 잘했다는 찬양을 받는 프랑스에서의 나치 부역자 숙청은 그 자체가 무기를 쥔 레지스탕스 세력이 혁명으로 가는 도상에서 저지른 폭력이라는 측면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나치 점령 기간 중 형성된 빨치산 세력이 전후 공산혁명을 추구하자 망명에서 돌아온 왕정이 나치하 부역자들을 무장시켜 이들을 진압하는 일도 벌어졌다.

해방 후 우리가 친일파 청산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고민과 부조리들은 우리만이 겪었던 일은 아니었다.

마셜플랜과 유럽의 부흥에 대한 기술(記述)에서는 1950년대 한국 경제와 흡사한 풍경을 발견하고 미소지었다. 원조물자의 제공과 이를 매각한 대충(對充)자금으로 꾸려가는 경제, 그 돈을 가지고 민생부터 해결하라는 미국의 요구와 어떻게든 그에 맞서 산업기반을 확충하는 데 그 자금을 사용하려는 서구 국가들 간의 줄다리기... 1950년대 미국과 이승만 정부도 비슷한 줄다리기를 했었다.

역사라는 것이 두부 자르듯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1950년대 초 유럽석탄철강공동체가 성립될 때 영국이 느꼈던 거부감과 불안은 브렉시트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보여준다.

토니 주트는 기본적으로 사회민주주의자이고, 유대인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그의 통찰력이 흐려지지는 않는다.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은 냉철하다. 전후 복지국가 등장과 발전에 대한 설명도 균형잡혀 있다. 전후 폴란드 등지에서의 유대인 학살, 공산정권 치하에서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기술 등에서 ‘아, 이 사람이 유대인이었지’ 하는 생각은 들지만, 그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유대인을 비호하기 위해 그런 기술을 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역사서답지 않은 문학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표현들도 인상적이다. 전후 유럽의 삭막하고 몰개성한 도시화에 대한 설명에서 “주요 도시들, 특히 프랑크푸르트와 브뤼셀, 런던은 자신들이 한 그릇의 부정한 죽을 얻자고 도시의 장자 상속권을 팔아치웠음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같은 표현은 기가 막히다. '성경'에서 차용한 이런 비유는 유럽 문화에 끼친 헤브라이즘의 영향을 새삼 느끼게 해주거니와 문학적 풍취마저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누가 도시화를 설명하면서 이런 표현을 쓸 수 있을까?

토니 주트는 진정 거장(巨匠)이고, 이 책은 대작(大作)이다. 책을 읽는 내내 밑줄을 긋고 책 곳곳에 메모를 하면서 고시공부하듯 책을 읽었다. 이렇게 지적 자극을 주면서 깊이와 향기가 느껴지는 한국사책을 읽고 싶다.

※ 사족) 왜 1권만 읽었느냐고? 알라딘중고서점에 1권만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책들 읽으면서 머리 좀 식히고 나면 2권이 나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