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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

콩고 출신 욤비 토마 광주대 교수가 국내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기까지

제주도 난민사태로 본 국내 난민 현주소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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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26일 제주 제주시 인근에 위치한 한 양식장. 예멘 난민들이 그물망 작업을 하고 있다.
 
최근 제주에서 예멘인 난민 신청자가 늘어남에 따라, 우리나라도 더 이상 난민 문제에 대해 예외적인 입장이 아니게 됐다. 법무부 등 정부는 29일 관계 기관 및 제주도가 참석한 외국인 정책실무위원회를 열고, 난민법 개정을 추진키로 했다.
 
제주도에 난민이 늘어 난민 문제가 불거졌지만, 사실 국내에는 꽤 많은 난민이 거주 중이었다. 기자는 지난 2015년 10월에 발간된 '월간조선'에 '한국의 난민들'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2015년 7월을 기준으로, 우리나라에는 시리아 난민 768명을 비롯해 1만 2208명의 난민이 거주 중이었다.
 
한국전쟁 때 유엔의 원조를 받았던 우리나라는 지난 1992년 12월, 난민 협약에 가입했다. 지난 1994년 난민 협약의 일부가 대한민국 출입국 관리법에 포함됐다. 유엔난민기구의 한국 대표부가 일본 도쿄의 지역사무소 산하 연락 사무소(2001년)로 문을 열었고, 지난 2006년 7월에 대표부로 승격됐다.

난민 관리는 법무부 출입국 관리소에서 맡고 있다. 국내에 머무르려는 난민들은 법무부에 ‘난민으로 인정해 달라’고 신청서를 내고, 법무부가 이를 검토해 난민으로 인정하면 된다. 난민이 되면 투표권을 제외하고는 대한민국 국민과 같은 사회보장을 받는다. 기초생활 보장은 물론, 성년자의 초등, 중등교육, 직업 훈련도 받는다. 외국에서 이수한 학력, 경력도 모두 인정된다.

우리나라의 ‘난민 지위 신청’이 단순해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월간조선' 기사 내용의 일부다.
 
광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인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 출신인 욤비 토나 씨는 “난민 인정을 받기까지 겪었던 일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겠고, 대학교수가 된 지금도 차별적인 시선을 느낀다”고 말했다.
욤비 토나 교수의 ‘난민 인정 획득기’는 우리나라에 머물고 있는 난민의 현주소다. 콩고비밀정보국에서 일하다 조셉 카빌라 정권의 비리를 밝히려다 비밀 감옥에 수감된 토나 씨는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지난 2002년 한국에 들어왔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미구엘 신부를 만났고, 유엔난민기구 한국사무소와 인연이 닿아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난민 신청을 했다. 욤비 토나 교수는 “서류만 제출하면 곧바로 난민 인정을 받아 일자리도 얻고, 살 집도 구하고, 한국에서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법정 다툼까지 6년의 긴 세월이 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토나 씨의 법무부와의 1차 인터뷰는 넉 달 뒤 이뤄졌다. 조사관이 한국어로 미구엘 신부가 불어로 통역하고, 토나 씨가 불어로 답하면 미구엘 신부가 다시 한국어로 통역하는 식(式)이었다. 국적과 이름, 생년월일 등 기초적인 정보에서 탈출 이유와 경로까지 질문이 쏟아졌다. 토나 씨는 이 인터뷰에서 실수를 저질렀다. 그의 탈출을 도왔던 콩고정보국 지인들의 신변이 걱정되어, 탈출 경로를 거짓 진술한 것이다. 출입국관리소와의 두 번째 인터뷰에서 토나 교수의 거짓말이 들통났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을 사실대로 밝히고, 세 번째 인터뷰(지난 2003년 4월)에서 콩고에서의 체포와 구금사실을 상세히 설명했다. 출입국관리사무소와의 인터뷰는 이후에도 네댓 번 이어졌다. 욤비 토나 교수는 “조사관들이 매번 인터뷰 때마다 똑같은 것을 묻고 또 물었다. 당시에 경기도 모처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는데 인터뷰를 하러 출입국관리소까지 가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신청 후 2년 만에 그는 ‘난민 인정 불허’를 통보받았다.
  
“본국으로 돌아가면 신변이 위험할 것이 분명한 난민인데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억울했습니다. 신청하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무작정 기다린 2년이 뭔가 싶었습니다. 난민 인정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난민의 처지는 이루 말로 할 수 없이 열악합니다. 본국에서 박해받는 얘기 등은 모국어로 할 때 가장 생생하게 전달되는데 그 나라의 말을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난민 입장에서 불리합니다.”
  
 ―그동안 생계는요.
 
 “이태원에서 만난 아프리카 사람들을 통해서 여기저기 공장을 소개받아 근근이 먹고살았습니다. 한국이 난민 협약에 가입된 나라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실제로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콩고의 정글 오두막집에서 숨죽여 살고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여기서 살아야겠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난민을 돕는 ‘피난처’의 이호택 대표와 끈이 닿았고, 법무부의 불허 통지에 이의신청을 냈다. 당시 사법연수원생이었던 김종철 변호사를 대동해 네 시간에 걸친 재인터뷰를 받았다. 결과는 이의신청 기각이었다. 결국 욤비 토나 교수는 법무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고, 천운이었는지 그의 콩고에서의 박해 상황이 보도된 현지 신문까지 입수돼 그는 소송에서 이겼다. 대한민국에 거주할 수 있는 난민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신청에서 인정까지 무려 6년이 걸렸다.
 
욤비 토나 교수는 지난 2016년부터 아태지역 난민단체 대표로 활동 중이다.
 
글=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입력 : 2018.06.29

조회 : 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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