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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치

순응과 인내, ‘얕은’ 승부수... 김종필의 스타일과 영욕의 정치역정

처삼촌(박정희)의 혹독한 견제와 회유 / YS의 내각제 개헌 파토에도 짐짓 모른 체 / DJ와의 공조도 결국 2인자 보장하는 선에 그쳐

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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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JP)만큼 정치적 위기에 많이 처한 정치인도 드물다. 그때마다 그는 특유의 인내력을 바탕으로 위기를 넘겼다. 그의 인내심과 권력에 대한 순응 체질은 JP가 정계에 오래 남아 있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나 다름없었다.
 
처삼촌의 혹독한 견제
 
그에게 닥친 첫 번째 시련은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 과정에서 증권파동을 비롯한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에 휘말리면서 시작됐다. 김종필 등 혁명 주체 세력이 증권, 파친코 등으로부터 창당자금을 조달받았다는 의혹을 받은 것이다. 그로 인해 그해 2월 김종필은 ‘자의 반 타의 반’이란 유명한 말을 남기고 첫 외유를 떠났다. 박정희의 조카사위이자 권력의 정점인 중앙정보부장이었던 JP는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었다.
 
박정희 정부 출범 초인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의 주역으로, 핵심 쟁점이던 대일 청구권 문제와 관련된 ‘김종필ㆍ오히라 메모’ 파동으로 6ㆍ3사태가 일어나자 1964년 또다시 2차 외유길에 올랐다. 민주공화당 의장이었던 JP는 그해 6월 4일 민기식 육군참모총장 등 군 수뇌부들의 외유 건의를 받았다. ‘김 의장이 2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를 해달란 것이었다. 박 대통령도 군부의 이런 기류에 동조했다. 결국 JP는 미국 대사관의 주선으로, 하버드 대학에서 헨리 키신저 교수가 주관하는 6주간의 여름 세미나에 참석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국민복지회 사건'으로 된서리 맞은 JP 계열
 
이때부터 박정희 대통령은 JP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른바 처삼촌(박정희)의 조카사위(김종필) 견제가 시작된 것이다. 1968년 JP는 공화당 의장직에서 전격 사퇴하고 보이스카우트 총재 등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른바 ‘국민복지회 사건’의 칼날이 JP의 턱밑까지 온 것이다. 공화당 내 JP 사조직으로 알려진 국민복지회는 친JP계 의원 상당수가 포함돼 있었다. 국민복지회 멤버들은 ‘JP 대통령 만들기’라는 이른바 시국 판단문서를 작성했다는 혐의로 중앙정보부의 내사를 받았다. 훗날 JP의 측근이자 공화당 원내총무였던 김용태(2005년 작고)는 JP의 육사 8기 동기인 길재호 공화당 사무총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꾸민 일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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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박 대통령의 지시로 조사가 이뤄졌다는 게 당시 관련자들의 이야기다. 당시 박 대통령은 3선 개헌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JP 계열 인사들이 JP를 옹립하겠다는 움직임이 나오자 박 대통령이 길재호·김형욱을 통해 JP를 견제했다는 것이다. JP 계열은 박 대통령의 3선 개헌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즉 재선을 한 박 대통령은 2선으로 물러앉고 다음 대통령엔 JP가 출마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논리였다.
  
또다시 JP 주변 샅샅이 조사한 박정희
 
그러나 박 대통령은 1969년 9월 3선 개헌안을 기어이 통과시켰다. 1971년 7대 대선에서 DJ를 꺾은 박 대통령은 이듬해인 1972년 유신을 전격 단행, 사실상 종신 대통령에 올랐다. 이미 그 한 해 전 JP는 국무총리에 임명돼 박정희 정권의 궂은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당시 박 대통령은 JP에게 ‘임자가 나 좀 도와줘. 이 담에 내가 물러나면 임자밖에 더 있어’라며 JP를 회유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JP는 측근들로부터 ‘권력에 타협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1978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JP 주변을 샅샅이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는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당시 JP의 측근이었던 김진봉, 유정회 의원은 정보부에 끌려가 꽤 혹독한 조사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김 의원뿐 아니라 JP의 사돈이었던 김인득 벽산그룹 회장(JP의 처제 박설자 여사의 시아버지), JP의 공주고 동창인 사업가 L씨, 육사 8기 동기생 사업가 L씨도 정보부에서 취조를 당했다.
 
이는 권력 말기에 접어든 박 대통령이 JP에게 표출한 일종의 ‘노이로제’였다. 김 의원은 훗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보부 수사관이) 정일권, 백두진, 이효상, 김종필씨 등 4~5명의 이름을 내놓으면서 ‘이 중에서 누가 (후계자가) 됐으면 하느냐’고 묻더라. 그래서 ‘그중에서 고르라면 김종필씨가 가장 낫다’고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 의원은 “대신 ‘박 대통령이 유고(有故)라면’이라는 전제를 꼭 달았다”고 했다. 그만큼 박 대통령은 JP에 대한 경계심을 끝까지 풀지 않았다.
 
신군부으로부터도 수난당한 JP
 
박 대통령 사후에도 JP의 수난사는 이어졌다. 전두환 신군부 그룹이 12.12로 박 대통령의 죽음 이후 생겨난 권력의 진공상태를 파고들었다. JP는 이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JP는 1979년 말 박정희에 이어 공화당 총재직에 올라 ‘수뇌부를 잃어버린 허울뿐인 집권당’을 이끌고 있었다. 이미 공화당은 옛날의 공화당이 아니었다. 남재희, 오유방, 박찬종 의원은 이른바 ‘정풍(整風) 운동’을 일으키며 JP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때 공화당 당무위원이었던 A씨는 JP에게 “전두환 장군을 만나라”고 했지만 JP는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A씨는 “혁명 때야 JP가 중앙정보부장이었고 전두환은 일개 최고회의 비서관이었지만, 그때는 얘기가 달랐다. JP는 그런 전두환에게 손을 내미는 걸 꺼려 했다”고 말했다.
 
만약 그때 JP가 전두환의 입지를 보장하고, 유신헌법에 의해 '보궐 대통령'으로 선출됐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평하는 이들도 많다. JP가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는 바람에 권력 기반이 아예 없는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으로 선출됐고, 결국 최규하는 신군부에 권력을 내줄 수밖에 없는 신세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신군부 세력은 JP도 가만 놔두지 않았다. JP와 그의 형 김종락(코리아타코마 사장)씨를 부정축재자 명단에 올린 것이다. JP는 또다시 정계를 떠나 미국을 전전하는 신세가 됐다.
   
87년 대선 이후 화려하게 부활
 
1987년 직선제 개헌을 통해 형성된 대선 정국은 JP에게 또 다른 기회였다. 공화당을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한 JP는 비록 대선에선 4위 낙선했지만, 충청권에선 무시 못할 저력을 보여줬다. 이듬해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신민주공화당은 35석을 차지해 원내 캐스팅 보트를 쥐었다. JP는 이 의석수를 바탕으로 한편으론 노태우 정부에 협력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론 YS와 DJ에 협력하는 노련함을 보여줬다. 결국 3당 합당을 통해 JP는 노태우-김영삼과 함께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의 대주주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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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가 대선 후보로 선출되는 과정에서 JP도 일조했다. JP는 YS의 일방적이고 독선적인 정치 행태를 내켜하지 않았지만 내색은 안 했다. 3당 합당의 전제조건이자 JP의 오랜 숙원이었던 내각제 개헌을 YS가 백지화시켰음에도, JP는 짐짓 모른 체하는 입장이었다. 어쨌든 그는 반(反)YS 세력을 다독이면서 문민정부 창출에 일조했다. 그 덕으로 YS 정부 초대 집권 민자당 대표위원에 선임됐다.
 
YS와 민주계부터 버림받아... 자민련 창당으로 승부수
 
그러나 JP는 YS의 친위대였던 민주계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됐다. 구시대의 잔재(JP)가 집권당 대표로 있는 게 적절치 않다는 목소리가 민주계에서 나온 것이다. YS의 오른팔이자 내무부 장관이었던 최형우가 이를 앞장서서 주장했다. YS는 이 같은 분위기를 사실상 방조하고 있었다. 결국 JP는 민자당을 탈당,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해 다시 야당 정치인으로 변신한다. 그동안 대세에 편승한다는 지적을 받아온 JP였지만, 이때는 독한 마음을 먹고 승부수를 띄웠다.
 
각종 선거에서 자민련의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충청권과 TK 일부 지역을 휩쓸었고, 1996년 15대 총선에서도 50석을 획득했다. 그의 정치적 기반은 충청권을 매개로 다시 단단해졌다. 그런 JP에게 눈독을 들인 게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였다.
 
1997년 치러질 대선에서 DJ는 반드시 이겨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JP와 충청권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는 DJP 공조로 이어졌다. JP는 공조의 대가(代價)로 ‘내각제’를 DJ에게 들이밀었다. DJ가 집권한다면 내각제 개헌을 한다는 약조를 받아낸 것이다. YS의 IMF 실정(失政)으로 결국 DJ는 정권을 잡았다. JP는 또다시 화려하게 국무총리로 부활했다. 사실상 공동정권의 2인자에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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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P 공조' 역시 DJ의 2인자 보장하는 선에 그쳐
 
하지만 2000년 총선을 기점으로 DJ의 내각제 개헌 의지는 점차 흐릿해져 갔다. 둘 사이의 연정이 깨진 결정적 원인은 2001년 한나라당이 제출한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결의안 때문이었다. 자민련이 이 결의안에 동조한 것이다. 자민련으로 갔던 민주당 의원 네 명(송석찬, 배기선, 장재식, 송영진)은 당연히 연정 붕괴에 실망을 표하고 민주당으로 원대복귀했고, 입각했던 자민련 소속 장관들도 사퇴했다. 자민련의 연정 철회 배후엔 JP의 지시가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이렇듯 JP는 자신에게 위기가 닥치면 즉각 반격하기보다는 인내하고 순응하고 후일 기회를 도모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그를 답답하게 여기는 측근들도 있었다. ‘영원한 2인자’라는 평가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그나마 JP에게 있어 1995년 자민련 창당은 나름의 승부수였다. 그 승부수 역시 그의 대권행(行)을 뒷받침한 게 아닌 DJ하에서 2인자 자리를 보장하는 선에 그치고 말았다.
  
글=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입력 : 2018.06.23

조회 : 3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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