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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1. 정치

김상현과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 전두환

여야대화 제의하자 바로 청와대로 부른 박정희, 서빙고에서 고문한 후 술자리 마련한 전두환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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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지도위원회의 중 김대중 총재와 이야기를 나누는 김상현 의원. 두 사람은 만남과 결별을 되풀이했다.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공동의장 권한대행, 6선 의원을 지낸 원로정치인 김상현 전 의원이 4월 18일 저녁 타계했다. 향년 83세. 
기자는 2001년과 2012년 김상현 전 의원을 인터뷰했었다. 첫 번째 만났을 때에는 스트레스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서였다. 당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취재지원하고 있던 이동욱 기자가 동석(同席)했다. 기자의 취재가 끝난 후 김 전 의원은 이동욱 기자에게 1968년 박정희 대통령과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어찌나 재미있게 이야기하던지 마치 내가 두 사람이 만나는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만남이 끝날 무렵 기자는 그에게 "지역감정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책임이 더 크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2012년 11월 1일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에 그의 이야기를 싣기 위해 서울 광화문 코리아나호텔에서 김상현 전 의원을 다시 만났을 때, 기자는 깜짝 놀랐다. 발을 끌면서 들어오는 모습, 작고 기운 없는 목소리… 전에 만났던 김 전 의원이 아니었다. 그는 허리디스크 수술을 하고 퇴원한 직후였다. 그래도 그는 성심껏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두 번째 만남은 12월 3일이었다. 김상현 전 의원은 한결 나아진 모습이었다. 목소리에도 힘이 실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DJ에게 누가 될 만한 얘기는 삼갔다. “DJ에게 서운한 건 없느냐?”고 물으면 “이젠 그런 얘기할 나이는 아니지 않소”라며 말을 돌렸다. 다만 민추협이나 2·12총선 당시의 이야기를 할 때, 중간중간 서운함이 느껴졌다. 자신과 DJ와의 관계를 얘기하는 대목에서는 ‘나는 개인적으로는 DJ를 형님으로 모셨지만, 정치적으로는 대등한 동반자였다. DJ를 맹종(盲從)한 동교동 가신들과는 다르다’ 하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구식(舊式)정치인, 그러나 상쾌한 구식정치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그렇게 고난을 겪었으면서도 일관되게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주장해 왔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우리 정치풍토에서는 대화와 타협을 주장하면 ‘사꾸라’라고 하는데, 그런 시련 속에서도 대화와 타협의 정치에 대한 신념을 놓지 않은 그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왕사꾸라’였다. 그리고 그가 우리 정치판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었다면, ‘사꾸라’가 활짝 피었다면, 오늘날 우리 정치는 이토록 삭막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에 소개했던 이야기 가운데 고인과 박정희-김대중-김영삼-전두환 전 대통령과 관련된 몇 장면을 소개한다.

#1. 박정희와의 만남
- 박정희, 정국경색 풀기 위해 대화 제의하자 바로 청와대로 불러

1967년 6월 8일 치러진 제7대 총선에서 정부와 여당은 압도적 다수 의석을 차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결국 공화당은 지역구와 전국구를 합쳐 129석을 차지했다. 야당 의석은 신민당 45석, 사회대중당 1석을 합쳐 46석에 불과했다. 박정희 정권이 이렇게 무리수를 둔 것은 3선 개헌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신민당의 부정선거 규탄 투쟁으로 정국은 얼어붙었다. 1968년에 접어들면서는 1·21사태,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등이 발생한다.
  
나는 안팎의 위기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정치가 제 역할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여야(與野) 영수(領袖)회담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야당 안에서는 정권과의 대화와 타협을 주장하면 ‘사꾸라’로 몰리는 풍조가 조성되어 있었다.
나는 3월 6일 유진오 당수를 만나 영수회담 필요성을 역설했다. 유 당수는 “내가 영수회담을 제안한다고 해서 박 대통령이 받아주겠느냐?”면서 회의적(懷疑的)인 태도를 보였다. 나는 “그럼 제가 먼저 국회의원 입장에서 박 대통령에게 면담을 신청해 보겠다”고 했다. 나는 유진오 당수의 비서인 박찬세씨를 통해 이후락(李厚洛) 청와대비서실장에게 대통령 면담신청을 넣었다.
  
다음날 나는 서울시청 인근 뉴서울호텔 커피숍에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전 11시경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 사이에 내 앞으로 연락이 온 것이 없었는지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휴대전화가 없던 그 시절에는 그런 식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전화를 받은 아내는 “청와대에서 이후락 실장이 아침부터 두 번이나 전화를 걸어왔다. 빨리 연결시켜 달라고 재촉이 심했다”고 말했다. 아내가 불러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더니, 이후락 실장이 직접 받았다.
“아이고, 김 의원님. 왜 이렇게 통화가 어렵습니까? 각하께서 김 의원님의 면담신청을 받고 바로 만나자고 하십니다. 2시까지 들어와 주실 수 있으십니까?”
  
청와대로 갔더니 이후락 실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나를 안내했다. 집무실로 들어갔더니 박정희 대통령이 확대경으로 무슨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박 대통령이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김 의원, 이거 좀 보시오. 김신조가 얘기한 비행장 시설을 고공(高空)촬영한 것이오. 비행장 시설 하나는 참 잘해 놓지 않았소?”
잠시 후 박 대통령은 자리에 앉았다. 이후 나는 박 대통령과 정치 현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야당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석유세법 통과 등 정부정책에 대해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나는 여야 관계의 경색 등에 대해 박 대통령이 여당이나 정보기관으로부터 일방적인 보고만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생각을 박 대통령에게 말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지금 내가 김 의원을 만나고 있는 것 아니오? 오늘 오전 시민회관에서 전국 도지사 회의에 참석하고 나오는데 이 실장이 김 의원의 면담신청에 대해 말하기에, 12시부터 기다리고 있던 참이오. 지금 나에게 면담신청을 해놓은 여당 의원이 62명이오. 그걸 제쳐놓고 김 의원을 만나기로 한 겁니다.”
이때다 싶어 나는 여야 영수회담 얘기를 꺼냈다.
“이런 어려울 때일수록 정치인들이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줘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여야 영수회담을 열어야 할 때입니다.”
박 대통령은 흔쾌히 응낙했다.
“좋습니다. 어떤 형식을 취할지는 야당 편한 대로 하세요. 내 쪽에서 회담을 먼저 제의하는 형식으로 하는 게 좋으면 그렇게 하고, 유 당수 쪽에서 먼저 제의하는 형식을 취하는 게 좋으면 그렇게 해도 좋습니다. 장소도 꼭 청와대가 아니라 우이동 같은 데도 좋습니다.”
옆에서 이후락 비서실장이 거들었다.
“각하. 김상현 의원이 각하께 면담신청을 한 것은 오늘날 야당 분위기로는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칫 사꾸라로 몰려서 정치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박 대통령은 “김 의원 입장이 그렇다면, 오늘 김 의원이 오신 건 비밀로 하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떳떳했기 때문에 “공개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박 대통령이 말했다.
“내 임기가 이제 2년밖에 남지 않았소. 만약 앞으로 내가 장기집권을 꾀한다든가 하면, 김 의원이 앞장서서 극한투쟁을 하시오.”
“만에 하나라도 그런 불행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있게 되면, 각하와의 약속을 꼭 지키겠습니다.”
헤어지기 전 박 대통령은 말했다. “김 의원이라면 문을 열고 기다릴 테니 언제든지 연락하시오.”
박 대통령은 이후락 실장에게 뭐라고 귀엣말을 하고 난 후 집무실로 들어갔다. 이 실장은 잠깐 자기 방에 들렀다 가라며, 2층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이 실장은 “각하께서 드리는 것”이라면서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하지만 나는 “이걸 받으면 내가 여기 온 뜻이 없어진다”며 사양했다.
내가 정계에 입문할 때, 민주당 원로인 이상철 전 국회부의장이 “정치를 하자면 돈이 필요한데, 정치자금을 받을 때는 생선 먹듯 하라”고 한 적이 있다. 가시 있는 생선을 먹으면 목에 걸리고, 부패한 생선을 먹으면 배탈이 나듯, 나중에 탈이 날 수 있는 돈은 받지 말라는 얘기였다.
  
신범식 청와대 대변인이 나와 박 대통령과의 만남에 대해 발표하자 난리가 났다. 이발을 하다 말고 달려온 유진오 당수에게 나는 “이번은 첫 영수회담이니만큼 무엇을 한번에 얻겠다고 하기보다는 시국 전반에 걸쳐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권했다.
그런데 다음날 유진오 당수 댁으로 갔더니, 그의 안색이 안 좋았다. 그는 “다 틀렸소, 다 틀렸소”라며 탄식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 중진들이, 만약 영수회담을 하면 사꾸라로 몰려 내 정치생명이 죽는 것은 물론, 우리 신민당까지 큰일 난다고 합디다.”
나는 모처럼 열린 박정희 정권과의 대화 창구가 막히는 것이 안타까웠다. 나는 이후 보름 동안 유진오 당수 댁으로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영수회담 수용을 권했다. 하지만 유 당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당내에서는 “김상현이 지가 뭔데 대통령과 면담을 하느냐?”는 성토의 소리가 나오더니, 급기야 중앙당 부·차장단에서 내 화형식까지 하겠다고 나섰다. 나는 “김상현이가 체구는 작지만, 화형식에 사용할 허수아비만큼은 좀 큰 것으로 해달라”고 전했다. 화형식은 유야무야됐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과 유진오 당수의 영수회담은 물 건너가고 말았다. 안타까웠다. 내가 박정희 대통령이라도 이런 야당을 보면서 ‘저런 야당에 어떻게 나라를 맡기겠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 2. 김대중의 71년 대선 출마
- 대선 출마 제안하자 "내가 하나도 준비된 것이 없는데...”

3선 개헌을 막지 못한 야당은 무력감(無力感)에 빠져들었다.
이를 깨고 나온 사람이 김영삼(金泳三) 원내총무였다. 그는 1969년 11월 8일,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40대 기수론(旗手論)’의 막이 오른 것이다. 김영삼 의원의 출마선언은 광복 이후 60대 장로(長老)들이 지배해 온 야당 풍토에 큰 충격을 주었다. 나는 뉴서울호텔에서 김대중 의원을 만났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다.
“김영삼 의원이 대선출마 선언을 했는데, 형님도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하고 대선출마를 선언하십시오.”
김대중 의원은 깜짝 놀랐다.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하나도 준비된 것이 없는데, 어떻게 출마선언을 한단 말인가?”
김대중 의원은 그때까지 출마를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사실 1953년 3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민중당·신민당 원내총무 등을 역임한 김영삼 의원과는 달리, 김대중 의원은 의정(議政) 능력을 인정받고는 있었지만 대변인 이외에는 별다른 당직을 맡지 못했었다. 내가 말했다.
“출마선언이 곧 준비의 신호탄 아니겠습니까? 출마선언을 하면 사람도 모이게 마련입니다. 이번에 출마선언을 하지 못하면, 영원히 못하게 됩니다.”
“생각해 볼 테니, 하루만 시간을 주소.”
다음날 우리는 뉴서울호텔 인근 한식집 풍림에서 만났다. 김대중 의원은 대선에 나서겠다고 했다. 김대중 의원은 1969년 11월 18일 대통령 후보 지명전 출마 의사를 밝혔다. 이듬해 2월 12일에는 이철승(李哲承)씨가 출마 의사를 피력했다.

결국 1971년 4월 27일 치러진 제7대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박정희 후보는 634만2828표(득표율 53.2%)를, 김대중 후보는 539만5900표(득표율 45.2%)를 얻었다.
선거 결과가 나온 후 나는 김대중 후보에게 선거 결과에 승복하는 성명을 내고 박 대통령에게 축하화분을 보내주라고 권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신문에는 그런 얘기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김대중씨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화를 벌컥 냈다.
“이 사람아, 자네 말을 들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전국 곳곳에서 부정선거라며 들고 일어나 아우성을 치는데, 박정희의 당선을 인정하면 어떻게 하나?”
“부정선거를 못 막은 것도 우리의 능력 부족입니다.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합시다.”
하지만 김대중씨는 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 후 나는 그에게 대통령 취임식은 꼭 참석하라고 권했다. 김대중씨도 그러겠다고 했다. 하지만 대통령 취임식이 있던 7월 1일 아침, 동교동으로 전화를 걸자 김대중씨가 전화를 받는 것이 아닌가?
“아니 취임식에 안 가고 왜 형님이 전화를 받으십니까?”
김대중씨는 불쾌한 목소리로 “만나서 얘기하자”고 했다. ‘큰일 났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박 대통령과 김대중씨는 돌이킬 수 없는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대중씨의 앞날이 걱정됐다. 나는 택시를 타고 대통령 취임식장으로 달려갔다. 도착해 보니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사가 끝나려는 참이었다. 공화당의 길재호, 김성곤씨가 반색을 하면서 말했다.
“아이쿠, 김 의원이라도 와줘서 정말 고맙소.”

#3. 전두환, 권총으로 자기 가슴 겨누며 “나는 아무 야심이 없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79년 11월 24일, 재야인사들은 서울 명동 YWCA에서 결혼식을 가장해 유신헌법 철폐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최규하 대통령 선출을 반대하는 집회를 가졌다. 이것이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이다. 나는 이 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됐다. 보안사 요원들은 이름도 물어보지 않고 다짜고짜 야구방망이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내가 기절하면 찬물을 끼얹어 깨운 후 다시 팼다. 보안사에서는 DJ를 YWCA 사건의 배후조종자, 나를 조직책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잡혀 들어가, 제일 많이 얻어맞았다. 그때 맞은 것이 원인이 되어 왼쪽 시력에 이상이 왔다. ‘타박성 백내장’이었다. 옆방에서 박종태 전 의원이 매를 맞으면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YWCA 사건과 무관하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연행된 지 사흘째 되는 날부터는 더 이상 매를 맞지 않았다. 연행된 지 6일째 되는 날, 합동수사본부 수사국장 이학봉(李鶴捧, 민정수석비서관·안기부2차장·13대 국회의원) 대령이 찾아왔다.
“전두환 사령관을 만나보시겠습니까?”
“못 만날 것 없지요.”
하도 맞아서 제대로 운신할 수 없는 나를 좌우에서 두 사람이 부축해서 이학봉 수사국장의 방으로 데려갔다. 점퍼 차림의 전두환 사령관은 조니 워커와 오징어 등 마른안주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김 의원께서 약주를 좋아하신다기에, 술이나 한 잔 하려고 뵙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시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 장군이 말했다.
“조사를 해보니, 윤보선씨가 이번 사건을 주동했더군요. 즉각 연행해서 철저히 조사를 할 생각입니다.”
“그건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살아계실 때, 민청학련 사건이 있었잖습니까? 그때 윤보선씨가 김지하 시인에게 자금을 대준 것이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검사가 그때 안국동 윤보선씨 댁으로 가서 전직 대통령의 예우를 갖춰 조사했지, 수사기관으로 연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아, 그랬습니까? 알겠습니다.”
시원시원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전두환 장군은 이야기 도중에 갑자기 점퍼 속주머니에 손을 넣어 권총을 뽑더니, 자기 가슴을 겨누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보안사령관을 일생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국가를 위해서라면 오늘 당장 죽어도 후회가 없는 사람입니다. 내게는 다른 야심이 없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아, 이 사람은 야심이 있는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전 장군은 내게 시국수습방안이 있으면 얘기해 달라고 했다. 
밤 9시20분쯤 시작된 대화는 3시간 정도 계속됐다. 나는 최규하 정권을 강화시키고, 각계각층의 대타협을 통해 민주화를 이룩해야 하며, 군부의 정치개입은 안 된다고 역설했다.
다음 날 이학봉 수사국장이 찾아와 어제 전두환 사령관과 나눈 이야기를 문서로 정리해 달라고 했다. 그날 저녁 연행된 지 일주일 만에 풀려났다.
20여 일쯤 지났을까. 이학봉 국장이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연락해 왔다. 1차 술자리를 마치고 2차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 국장은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형님, 김대중씨와 손을 끊으세요. 그래야 형님이 삽니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 사람아, 누구와 손을 끊는다는 게 세수하는 것처럼 간단한 일인 줄 아나?”

#4. 민추협과 YS와 DJ
- DJ, 신한민주당 창당 당시 "신당 창당을 중지하라. 이번에도 말을 듣지 않으면 절교한다"

1982년 8월, 나는 2년3개월 만에 출감했다. 이듬해 5월 18일, YS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23일간 계속된 그의 단식은, 1980년 5·17비상계엄확대 이후 숨죽이고 있던 민주화운동세력이 다시 기지개를 켜는 계기가 됐다.
그해 6월부터 옛 동교동계 전직 의원들이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조연하·김록영·박성철(김대중 후보 경호실장)·예춘호·박종태·양순직·박종률·김창환(金昌煥, 8대 국회의원)·최영근(崔泳瑾, 5·6·13대 국회의원)씨 등이었다. 우리가 모임을 가질 때면 안기부나 경찰에서 나와 감시를 했다.
나는 “후광(後廣·DJ)이 없는 이상, 거산(巨山·YS)과 대화를 해서, 거산을 간판으로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심하게 반대했다. YS가 1979년 5·30전당대회에서 신민당 총재가 된 후 동교동계를 소외시켰던 일, 1980년 5·17조치 이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한동안 침묵했던 일 등이 앙금으로 남아 있었다.
그때 YS는 상도동계를 중심으로 민주국민회의라는 것을 만들려 하고 있었다. 회장은 이민우(李敏雨, 4·5·7~10·12대 국회의원, 신한민주당 총재) 전 국회부의장, 대변인은 김덕룡(金德龍, 13~17대 국회의원, 정무장관)씨였다. 나와 조연하·김록영씨도 이사로 되어 있었다. 나는 김 전 총재와 만난 자리에서 항의했다.
“나조차도 모르고 있었는데, 민주국민회의 이사라뇨? 동교동과 상도동이 힘을 합쳐 민주화운동을 하려면 신뢰가 회복되어야 하는데,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민주국민회의부터 해체하십시오.”
내 얘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YS는 민주국민회의를 해체하겠다고 했다. 이때부터 동교동과 상도동 사이에 민주화를 위한 공동투쟁 논의가 시작됐다. 동교동에서는 나와 조연하·김록영·예춘호씨가, 상도동에서는 YS·이민우·최형우·김동영(金東英, 9·10·13대 국회의원, 정무장관)씨가 나왔다.
  
1984년 5월 18일 출범을 선언한 민추협은 그해 7월 12일 민추협 사무실 개소식을 열었다. 
YS는 정치인과 재야가 연합하는 국민연합 같은 기구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나는 정치인들만으로 조직을 꾸리자고 주장했다. 재야와 정치인의 조직이 일원화(一元化)되면 투쟁방법에 경직성을 가져오게 된다, 정치인과 혁명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때 이미 재야 일각에서는 남북교류나 통일, 주한미군 문제 등에 대해 급진적인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었는데, 정치인과 재야가 연합할 경우, 이런 문제에 대한 이견(異見)으로 조직이 표류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들었다. 이러한 걱정은 후일 전통 야당이 재야세력을 대거 영입하면서 현실화됐다.
조직 명칭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도 논란이 있었다. 나는 ‘민주화추진간담회’를 주장했다. YS는 ‘민주구국투쟁동지회’라는 명칭을 주장했다. “투쟁을 해도 시원치 않은 마당에 간담회가 뭐냐”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과거에 구호만 과감하고 거창했지 행동이 따르지 못해 국민들을 실망시키곤 했잖습니까? 명칭이야 온건하더라도 투쟁을 과감하게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YS는 ‘구국’과 ‘투쟁’이라는 단어에 집착했다. 나는 타협안으로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내놓았다. YS도 동의했다. ‘민추협’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해서 나왔다.

이제 지도부를 구성할 차례였다. 나는 YS를 찾아가 김대중 위원장-김영삼 부위원장 체제를 제안했다. “김대중 선생은 미국에 계시지만 투쟁은 국내에서 하는 것입니다. 김 총재(YS)께서는 부위원장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위원장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대승적 견지에서 큰 바둑을 두십시오.”
하지만 YS는 난색을 표명했다. 그는 김영삼-김대중 공동의장 체제를 제안했다. 나는 미국에 있는 DJ를 공동의장으로 할 경우, 두 사람이 모든 것을 일일이 의논해서 결정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오해가 생겨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가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DJ를 고문, YS를 공동의장으로 하되, 동교동에서 공동의장을 내기로 했다.
동교동계에서는 누구를 공동의장으로 하느냐를 놓고 논의 끝에 조연하 전 의원이 나를 추천했다. 김록영·박종률 전 의원도 찬성했다.
동교동계에서도 나이가 어린 축이었던 내가 공동의장으로 추천되자 상도동에서는 깜짝 놀랐다. 안 그래도 DJ가 아닌 동교동 인사가 공동의장을 맡는 것은 YS의 격(格)을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들은 공동의장제에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나는 공동의장이 아니라 ‘공동의장 권한대행’을 맡는 것으로 타협했다.
그러나 다음날 YS는 ‘공동의장 권한대행’도 곤란하다고 했다. 주변에서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럼 민추협을 깨자”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공동의장-공동의장 권한대행으로 낙착을 봤다.
1984년 5월 18일, 서울 남산 외교구락부에서 민추협 출범식이 열렸다. 정보기관원들과 전투경찰들이 회의장 주변을 에워쌌다. 민추협에 참여하기로 했다가, 기관의 협박을 받고 그만둔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 모 회사에서 한 달에 얼마씩 받고 있어서 참여하는 것은 어렵겠다”고 말한 모씨의 경우는 그나마 양심적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가석방 중이던 내게도 다시 수감하겠다고 위협했다.
민추협은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정치인들이 50대 50으로 만든 조직이었다. 처음에는 사회를 보거나 기자회견을 할 때에도, YS가 한 번 하면, 다음에는 내가 한 번 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그런데 내가 사회를 보거나 기자회견을 할 때에는 YS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내가 어쩌다 저런 놈하고 같이 공동의장이 되었나’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기자회견을 할 때에는 꼭 이렇게 발표했다.
“고문 김대중, 공동의장 김영삼, 그리고 김대중씨가 돌아오면 공동의장을 맡기기로 하고, 공동의장 권한대행 김상현.”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김 총재(YS)께서 사회도, 기자회견도 다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동교동계에서 반발하고 나섰다. 조연하·김록영·박종률·박성철 씨 등이 “왜 김영삼이 혼자서 회의를 진행하게 하느냐”고 따졌다.
“형님들, 죽을 죄를 졌습니다. 가만히 보니 그쪽 사람들이 모두 팍 찌그러진 인상들인데, 이거 일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가지고는 건강에도 좋지 않고, 소화도 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김 총재보고 다 하라고 했소.”
나는 민추협을 하는 동안, 한번도 내가 YS와 동렬(同列)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공식회의 석상이 아니면, 뒷자리로 물러나 앉았다.
  
민추협을 만들면서 나는 미국의 DJ에게 사전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정보기관의 공작이 끼어들 수도 있어, 일이 잘못될 경우, 그에게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DJ도 나의 진정을 알아줄 것으로 믿었다. 그와 30년 동안 정치를 하면서 나는 늘 그런 생각으로,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했다.
민추협을 만드는 과정에서 동교동계는 소극적이었다. 미국에 있는 DJ도 ‘김영삼씨와 함께하는 민추협은 찬성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왔다. 그래서 민추협은 ‘정치인들의 조직’이라는 원칙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교동 가신(家臣)들은 한 명도 참여하지 않았다. 동교동계 정치인들 중에서도 박영록·박종태·양순직·최영근 전 의원 등은 처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들이 참여한 것은 1985년 DJ 귀국 이후였다. 전반적으로 DJ나 동교동계는 내가 강하게 밀고 나가니까 어쩔 수 없이 민추협 활동에 끌려오는 그런 분위기였다.
나는 정치적·인간적으로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지만, 세상은 내 마음 같지 않았다. “김상현이가 김대중 선생과는 관계없는 사조직(私組織)을 만들고 있다”, “김대중 계보를 김영삼에게 팔아먹었다”는 얘기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정보기관 돈을 받고 하는 짓이다”라느니 “전두환의 지시를 받고 하는, 전두환 앞잡이다”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1985년 2·12총선을 앞두고 재야의 의견은 둘로 갈라졌다. 하나는 총선에 참가하는 것은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는 것이므로 총선을 보이코트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두환 정권의 관제(官製)야당인 민한당(민주한국당)을 대신하는 선명야당을 만들어 총선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후자(後者) 쪽이었다.
조연하 전 의원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신당(新黨)을 만들어 만석(晩石·조윤형)을 당수로 밀자”고 했다. 나도 기꺼이 동의했다. 조병옥(趙炳玉) 박사의 아들로 7·8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윤형 전 의원은 유신선포 직후 보안사에 연행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13년 가까이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있던 민주투사였다.
당시 조윤형 전 의원은 민한당 입당을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얘기를 듣고 난 후 그는 민한당 입당을 재고(再考)해 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에게 민한당 입당을 강하게 권한 사람은 DJ였다. 이때 민한당행(行)을 택한 조 전 의원은 2·12총선 후 잠깐 민한당 총재를 맡았다. 그러나 이후 민한당이 신민당에 흡수된 뒤 정치적으로 별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1996년 세상을 떠났다.
그 무렵 미국에 있던 DJ가 미국에서 한국인권문제연구소 활동을 하고 있던 심기섭씨를 보내왔다. 평창동 북악파크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DJ의 장남 김홍일씨가 동석했다. DJ의 메시지는 강경했다.
“김대중 선생은 신당 창당을 중지하라고 하십니다. ‘이번에도 말을 듣지 않으면 절교한다’고 통지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번에도’라는 것은 DJ의 소극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민추협 결성을 밀어붙인 것을 말했다. 나는 “‘국내 정세를 감안해서 대처하고 있으니, 그 점은 내게 맡겨달라’고 전해달라”고 했다.
DJ의 방침에 따라 권노갑씨 등 동교동 가신들은 2·12총선에 참여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DJ는 조윤형·정대철씨 등의 민한당 입당에 주안점을 두면서, 나를 통한 신당 추진, 민주헌정연구회 등을 통한 재야활동 등 3트랙(track) 전술을 썼던 게 아닌가 싶다.

#5. 에피소드-김상현과 YS와 DJ

정치권에 전설처럼 전해오는 이야기하나.
<1987년 대선을 앞두고 DJ가 통일민주당에서 탈당,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하자 김상현 전 의원은 통일민주당에 남았다. 노태우 정권 초기, 한번은 DJ가 YS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국 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DJ가 말했다.
"거기 후농(김상현)이 있지요? 그 사람, 이름 석자만 빼고는 다 거짓말인 사람이니 조심하시오."
YS는 짓궃게도 이 이야기를 김상현 전 의원에게 했다. 그러자 김상현 전 의원은 바로 받아쳤다.
"DJ는 이름 석 자도 거짓말인 사람입니다!">
정계원로인 P 전 의원을 만났을 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는 웃으면서 "그거 맞는 얘기요"라고 했다. "그 현장에 내가 있었거든. 후농(김상현 전 의원)과 함께  YS에게 보고할 일이 있어 올라갔는데, 마침 YS가 DJ와 통화하면서 그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내가 직접 들었지."
김상현 전 의원을 만났을 때, 이 이야기가 사실이냐고 물었다. 김 전 의원은 "에이, 그런 일 없어요"라고 부인했다. 정계도 은퇴한 마당에 더 이상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는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심정이 느껴졌다.  
  

  



입력 : 2018.04.19

조회 : 7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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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 ‘어제 오늘 내일’

ironheel@chosun.com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습니다. 2000년부터 〈월간조선〉기자로 일하면서 주로 한국현대사나 우리 사회의 이념갈등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써 왔습니다. 지난 7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내용을 어떻게 채워나가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2012년 조국과 자유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45권의 책을 소개하는 〈책으로 세상읽기〉를 펴냈습니다. 공저한 책으로 〈억지와 위선〉 〈이승만깨기; 이승만에 씌워진 7가지 누명〉 〈시간을 달리는 남자〉 등이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제가 읽은 책들을 소개하면서 세상과 역사에 대한 생각을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댓글달기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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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혜연 (2018-04-21)   

    월간좇선 좋은말할때 당장 폐간해라!!!!! 조선일보만 빼고 엉

  • 박혜연 (2018-04-21)   

    종북좌파언론들보다 내로남불해대는 월간좇선아!!!! 가짜뉴스 퍼뜨리려고 노력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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