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NewsRoom Exclusive
  1. 정치

[단독] 최은희 신상옥 납치 경위 담은 1984년 안기부 문건

김정일, 배우 윤정희 납치에 실패하자 전형적인 한국 여인상을 지녀 호감 있던 최은희 납치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하기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납북 당시 김정일과 함께한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두 사람은 영화 17편을 찍으면서 김정일의 신뢰를 얻었다. 사진=엣나인필름
영화계의 최고 스타였던 배우 최은희가 16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92세. 고인은 부군 신상옥 감독이 2006년 4월 타계한 뒤, 허리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쇠약해져 오랜 투병생활을 해왔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일주일에 세 번씩 신장투석을 받아왔다.
 
월간조선은 과거 취재 중 최은희 납치경위, 김정일이 최은희, 신상옥 납치 주범 등의 내용이 담긴 1984년 안기부 자료를 입수했다.
 
신상옥 감독과 이혼한 최은희는 1978년 1월 홀로 홍콩에 갔다가 북한 공작원에게 납치됐다. 김정일의 지시로 이뤄진 납치였다. 같은 해 납북된 신 감독과는 1983년에서야 북한에서 재회했다.
 
다음은 안기부 문건에 실린 내용이다.
 
①최은희 납치 경위
 
-77년 8월경 홍콩거점 북괴 공작책 이상희(58세)는 최은희를 납북시키라는 북괴의 지령에 따라
 
-77년 9월경 하수인 신필림 홍콩지사장 김규화(62세, 간첩죄로 징역 15년형 확정 복역 중)에게 최은희를 홍콩으로 유인하는 데 필요한 초청장을 입수하라고 지시.
 
-77년 9월경 김규화를 통하여 영화부로카(브로커) 홍콩거주 중국인 왕동일(57세)을 하수인으로 매수(홍콩화 7천불)한 후 ‘왕’으로 하여금 한국에 입국, 최은희를 만나 77년 12월 개최 예정인 홍콩 카니발에 참가해 달라는 가장 구실하에 홍콩으로 유인하도록 조종.
 
-이에 따라 왕동일은 77년 9월 29일 국내에 침투하여 서울 중구 충무로2가 소재 대원호텔, 남산동 소재 퍼시픽호텔 및 안양 예술학교 등지에서 최은희, 김00, 태00 등과 접촉, 3인으로부터 홍콩 카니발 초청 수락을 받은 다음 77년 10월 13일 홍콩으로 돌아가 이상희에게 동 사실을 보고.

-77년 10월 김규화는 이상희의 지시에 따라 홍콩영화제작업자로부터 동사 명의의 최은희 초청장을 입수하여 이상희에게 제공.
 
-왕동일은 77년 11월 이상희의 조종에 따라 최은희에게 “홍콩 카니발 초청은 현지 사정으로 취소되었고, 홍콩영화 ‘양귀비’의 주연을 맡기려고 하니 와서 상담하자”고 유혹하여 응락을 받은 후 77년 11월 말경 이상희가 최은희에게만 초청장과 비행기 표를 우송.
 
-이 술책에 말려든 최은희는 78년 1월 11일 19:00 CPA-411편으로 출국, 동일 22:00경 홍콩공항에 도착하여 김규화, 왕동일, 중국인 영화 부로카 이영생 등의 영접을 받고 홍콩 프라마 호텔 1612호실에 투숙.
 
-78년 1월 13일 김규화의 안내로 수상 터미날에서 귀국 선물을 쇼핑한 후 동일 19:00~23:00간 구룡소재 국빈반점에서 김규화, 이상희 모녀, 이영생 부부, 재향 영화감독 남상진 등 7명과 석식.
 
-동 석식 도중 최은희는 김규화를 통하여 안양예술학교 강정희 교장에게 1월 20일 귀국하겠다고 국제전화 후 김규화에게 비행기 표 예약을 부탁.
 
-이상희는 최은희와 브랜디 1병을 음주하면서 국제적인 규모의 일본 모 재단 대표를 소개해 주겠다고 언동.
 
-이상희는 석식 후 최은희를 숙소까지 안내.
 
-다음날인 78년 1월 14일 17:00경 투숙 호텔인 프라마호텔 1612호실에서 이상희 등 북괴공작원에 의해 피납.
 
②신상옥 납치경위
 
-78년 1월 27일 하수인 김규화는 최은희 납치에 성공한 후 이상희의 조종에 따라 신상옥에게 “최은희가 실종되었다”고 국제전화 하여 홍콩으로 유인.
 
-홍콩에 도착한 신상옥은 김규화로부터 최은희가 실종된 전후 상황을 듣고, 자신이 평소 정체를 의심하고 있던 이상희에 의해 최은희가 강제 납치되었음을 직감하고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다음날인 78년 1월 28일 홍콩을 떠나 미국, 일본, 대만,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불란서 등을 전전하면서 해외 영화계 친지 등을 통하여 최은희의 행방을 탐문하였으나 실마리를 찾지 못하자 78년 7월 14일 홍콩에 다시 입국하여 최은희의 행방을 계속 탐문하던 중
 
-78년 7월 19일 신상옥의 홍콩 체류사실을 포착한 북괴공작원에 의해 강제 피납되어 공작선편으로 납북.
 
김정일이 최은희 신상옥 납치 주범
 
최은희 신상옥 납치지령 및 배경
 
○ 64년 북괴 김정일은 노동당 선전선동부 영화예술 담당 지도원이 되자 직접 북괴의 대표적 연극단체인 만수대 예술단을 지도하며 ‘꽃파는 처녀’ ‘피바다’ 등의 영화, 영극 제작에 깊이 관여하는 과정에서
 
○ 폐쇄, 통제된 북한사회에서 활동해 온 배우와 연출가로서는 남한 실정과 자본주의 사회를 자신이 의도한 대로 적나라하게 묘사, 비판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예술성마저 남한보다 뒤떨어져 있음을 통감하여 오던 중
 
○ 75년 김정일이 대남공작부서를 관장하게 되자, 그 타개책으로 남한의 유명 배우와 연출가를 납치하여 이용키로 결심하고
 
○ 77년 4월 남한에서 가장 아름답고 성적 매력을 지닌 여배우는 윤정희라고 지칭한 후 자신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킬 겸 영화 제작에도 이용할 목적으로 노동당 연락부 부부장 이정용(60세)에게 재불 영화배우 윤정희를 납치토록 지시하고 과장 허묵(본명: 허무, 47세, 남노당 출신이며 전 북괴최고인민회의의장 허헌의 아들)을 유고 자그레브 주재 북괴영사관 상무관으로 위장, 현지공작책으로 임명하고 행동대원 수명으로 납치공작조를 구성 파견하여,
 
○ 77년 7월 29일 유고의 자그레브공항에 북괴 비행기를 대기시켜 놓고 현지 경찰을 매수하는 등 치밀한 계획하에 공작을 진행, 윤정희 부부를 유고의 납치 예정 장소인 자그레브 교외에 있는 별장까지 유인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 윤씨 부부가 동 장소에 잠복, 기회를 엿보던 허묵의 조발상태, 의복 등을 보고 명석하게도 자신들을 납치하려는 북괴공작원임을 직감하고 기지를 발휘하여 동 장소를 이탈, 미국영사관으로 피신하여 납치에 실패(당시 허묵은 납치 실패 책임으로 연락부 과장에서 벽지학교 교원으로 좌천되었음.)
○윤정희 납치에 실패한 김정일은 77년 8월 평소 전형적인 한국여인상을 지닌 여배우로서 호감을 갖고 있던 최은희와 영화감독 신상옥을 재차 납치키로 결심하고 공작담당부부장 강해룡(58세)에게 이
를 지시.
 
○ 동 지시를 받은 강해룡은 홍콩 현지 공작책 이상희를 조종, 78년 1월 14일과 78년 7월 19일 최은희, 신상옥을 각각 납치한 것임.

2007년 12월 14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최보식 기자 직격 인터뷰] 피아니스트 백건우·윤정희 부부 기사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1977년 8월 1일 윤정희-백건우 부부는 당시 공산국가였던 유고의 수도 자그레브로 유인됐다가 북측에 납치될 뻔했다. 당시 이들 부부와 동행했던 이는 이응노 화백의 부인 박인경씨였다. 박씨는 우리 정부에 의해 ‘반체제 인사’로 분류된 인물이다. 사건 직후 그녀는 주불대사관의 소환조사에 응하지 않았다. 백건우 부부는 지금까지 박씨를 북측 납치공작의 공모자로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박씨는 “백건우 부부가 그 사건을 조작하고 있다”고 반박한 적 있다. 이 사건으로 백건우 부부는 이응노 화백 부부와 영영 절연했다. 이응노 화백은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1989년 숨졌다. 그 뒤 박씨는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몇 달 전 그녀는 대전에 ’이응노 미술관’을 개관하기도 했다.>

최은희 납치 공작선 해주항 입항 시, 김정일이 현지 마중
 
○ 김정일은 최은희를 홍콩에서 납치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자신의 쾌감에 도취되어 납치공작선이 해주항에 입항할 시
 
○ 대남공작 담당비서 김중린, 연락부장 정경희 등을 대동하고 직접 해주항 부두에 나와 마중.
 
○ 당시 수행원들이 김정일에게 “날씨가 추우니 공작선이 입항할 때까지 승용차 안에서 기다리라”고 권유하였으나 김정일은 이를 듣지 않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침착지 못하게 안절 부절하며 부두에서 대기.
 
○ 납치공작선이 부두에 도착하자 미친 듯이 뛰어가 최은희를 직접 마중하고 자신의 벤츠 승용차에 탑승시켜 평양까지 동행하였다.
본문이미지

 
본문이미지

 
본문이미지
1984년 안기부가 작성한 문건.

 "북한에서 나보고 '자진 월북했다'고 말해달라고 할 때도 나는 '말 같지 않은 말 하지 말라'고 악을 썼다"
 
최은희씨는 2007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북한 땅으로 납치돼 처음 대면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최 선생 보기에 내가 어떻게 생겼습네까? 난쟁이 똥자루 같지 않습네까'라면서 껄껄 웃더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이후 북한에서 3년 동안 '신필름영화촬영소' 총장을 맡으며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년), '사랑 사랑 내 사랑'(1984년) 등 모두 17편의 영화를 찍어야 했다. 이때 함께 만든 영화 '소금'으로 최은희는 1985년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많은 영화를 찍으면서 두 사람은 김정일의 신뢰를 얻는다. 덕분에 영화 촬영을 핑계 삼아 1986년 오스트리아 빈으로 갈 수 있었고 그곳의 미국대사관을 통해 극적으로 탈출했다. 하지만 곧바로 국내에 들어올 수 없었다. 당시 '두 사람은 애초 납북된 게 아니라 월북했다'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최은희는 이에 대해 2013년 인터뷰에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면서 "북한에서 나보고 '자진 월북했다'고 말해달라고 할 때도 나는 '말 같지 않은 말 하지 말라'고 악을 썼다"고 했다. 최은희는 미국에서 오랜 망명 생활을 해야 했고 1999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글=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입력 : 2018.04.17

조회 : 9088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사진

최우석 ‘참참참’

woosuk@chosun.com
댓글달기 3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박혜연 (2018-04-17)

    종북좌파들이나 애국을 자처하는 종미우파들이나 북괴영화들 많이많이보세용!!!!

  • 박혜연 (2018-04-17)

    어쩌면 이들을 다시 부부의 연을 맺게한게 정으니애비인 김정일이니 참 아이러니하다는....!!!! ㅡㅡ 이들이 납치안당했으면 북한영화수준은 그야말로 최악의 열악함을 보여줬다는거 몰랐죵 월간좇선기자분들도 유튜브에서 이들이 납치당하기전 북괴영화들 시간되실때 보세용!!!!
    저도 유튜브에서 북영화들 많이보거든용 특히 1950년대1970년대까지는 북영화에서 미녀여배우들 보기가 어려웠고 전부 통통하고 아줌마같이 생긴 사람들이 주류였으니....!!!!

  • 박혜연 (2018-04-17)

    고 신상옥감독과 최은희님은 당시 이혼한상태에서 김정일에 의해 납치당했으며 이것을 계기로 다시 부부의 연을 맺게했죠!!!! 어제는 최은희님이 고인이 되셨으니 하늘나라에서는 신감독님과 함께 좋은일 많이누리시기를 빕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